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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우다

일루젼 2012. 3. 5.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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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양장)
국내도서>사회과학
저자 :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Helena Norberg-Hodge) / 양희승역
출판 : 중앙북스 2007.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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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의 수호자의 야쿠 족, 신부 이야기의 소수 민족들, 그리고 인디언들이 떠올랐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있으며, 제 각기 다른 양식의 삶을 살아왔었다.
하지만 지금은 단 하나의, 정답인지 의심스럽지만 모두가 입을 모아 정답이라고 외치는 길을 향해 달려나가고 있다.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들었던 이 책이 이렇게나 많은 북다트를 꽂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이 한 권에 북다트를 거의 다 썼다)
이 책은 총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 라다크 (Ladakh) 족의 평화롭고 행복함에 관한 1부, 그것이 망가져가는 것에 대한 2부, 그리고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하려 노력하는 3부.
1부를 읽는 동안 무척 행복했기 때문에 이어진 2부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이는 라다크 만의 문제가 아니다.
'삶'과 '행복'. 인간에 대한 '이해'와 '여유', '감사'.
라다크는 많은 것을 가르쳐 주고, 또 생각하게 한다.

달라이 라마가 쓴 추천의 글이 함께 실려 있는데, 이 글은 짧지만 마지막 부분에서 라다크들을 돕고 싶어하면서도 자신의 행동이 오히려 그들에게 해가 되지는 않을까 조심스러워 하는 저자의 태도와 함께 어우러져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저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스웨덴의 언어학자로 처음에는 라다크 어와 민담 수집을 위해 그들을 찾았다가 그들에게 매료되어 16년의 시간을 그들과 함께 했고, 또 함께 해나가고 있다. 그 긴 시간을 그들의 언어로 말하며 함께 생활해 온 그녀는 이미 외부인이라 보기 어렵다. 그녀가 말해주는 라다크 족의 이전 생활과 현재, 그리고 나아갈 방향은 소위 "현대"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써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좋았다.




[발췌]

농작물과 야생식물이 생명공학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작물의 영향으로 형질의 변화를 일으키는 이른바 '유전자 오염' 현상은 농업의 생물학적 다양성 유지를 저해하는 불길한 징후가 되고 있다. 한 예로 멕시코 오악사카의 시에라 마드레 산맥 부근 산간 지역의 생태 연구 결과는 이 지역에 서식하는 멕시코의 토종 옥수수들이 이식 유전자의 유전물질(DNA)에 의해 오염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 '골든 라이스'의 예를 보면 생명공학 산업계가 얼마나 음흉한 속임수를 써가며 이익을 챙겨 왔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신젠타사와 몬산토사에 의해 개발된 골든 라이스는 일반적인 쌀에 비해 비타민 A의 함량이 높다고 알려져 있었다. 생산사 측은 이 쌀로 인해 개발도상국 어린이 50만 명 정도가 시력을 회복할 것이라 홍보했다. ... 그런데 영양분석을 실시한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비타민 A의 보고라는 식으로 홍보되었던 골든 라이스로 결핍된 비타민 A를 보충하려면 성인 남자의 경우 매일 9kg의 쌀을 섭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족. 몬산토 사는 자사의 seed를 구매하지 않은 주변 농부들을 대상으로 소송을 걸었다. 자신들의 옥수수 꽃가루로 인해 수분된 그들의 옥수수들이 그들의 특허를 침해했다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몬산토 사의 옥수수를 재배한 농지 근처의 농부들은 큰 돈을 배상해야 했고, 그들의 종자들이 오염되었다는 사실에 슬퍼했다. 몬산토 사의 종자를 사서 한 해 농사를 지으면 단 한 톨의 seed 도 남겨선 안된다. 그것이 계약 조건이기 때문이다. 매해 새로이 구매해야하며, 이 종자들은 GMO들이다.
내가 학부생 때 예방약학에서 골든 라이스 성공적이고 좋은 예로 외웠던 거 생각하면, 속이 꽤 쓰리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이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우리는 최소한 우리에게 고통과 환경문제를 안겨주고 최악의 경우 우리의 생존마저도 위협할 수 있는 글로벌 경제화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한 지역화의 복원을 통해 우리의 공동체와 지역경제를 재건할 수 있으며 자연친화적 순환 체계와 행복의 기초를 복구할 수 있다. 라다크에서 얻은 30여 년의 경험을 통해 나는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나 같은 서구인이 내가 속한 사회 경제적 시스템과 보다 근본적이며 자연과 인간의 공동진화에 기초를 둔 또 다른 시스템을 비교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흔치 않은 기회였다.
라다크에서의 경험을 통해 나는 파괴지향의 변화들에 대해 그간 내가 부분적으로나마 수동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은 자연과 문화의 관계를 혼동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전의 나는 내가 보아왔던 그 부정적 현상들이 우리의 영향력 밖에 있는 자여적 혹은 진화적 요인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속해 있는 산업문화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런 문제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지 못했던 나는 그저 인류는 본질적으로 이기적 심성을 가지고 있어서 생존을 위한 경쟁은 당연한 것이며 서로 돕는 사회라는 것은 유토피아적 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서구의 문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단 하나뿐인 표준적인 문화로 인식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의 성향이 더욱 경쟁적이고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모습으로 변해감에 따라, 그런 성향들을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이라 치부해버리는 태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 서구의 주류 문화에서는 발생하는 문제점의 원인을 인간의 내재적 결함 탓으로 돌리면서 '개발'이나 '진보'로 불리는 구조적 변화에 있어 자신이 정말 해야 할 역할은 무시해버리곤 한다.


그런데 주인이 잔을 채우려 하면 손님은 그것을 몇 번 사양해야 하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들고 있는 잔을 뒤로 빼며 몇 번쯤 사양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주인이 따라주는 차나 술을 받게 되는데 이렇듯 겸양의 덕을 보여주는 공손한 사양을 가리켜 '장스초체스'라 부른다. 이러한 상황은 또 주인과 손님 사이의 대화를 담은 노래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제 창을 더 마시지 않을래요
누군가 푸른 하늘을 모두 차지한다면 그때나 마실게요
해와 달이 푸른 하늘을 안고 있어요
시원한 창을 마셔요, 어서 마셔요
이제 창을 더 마시지 않을래요
누군가 시냇물을 모두 마셔버린다면 그때나 마실게요
황금 눈의 물고기가 시냇물을 모두 마셨어요
시원한 창을 마셔요, 어서 마셔요



"여기서 빨래하면 안 돼요. 아랫마을 사람들이 마시는 물이에요. 빨래는 저 위 쪽에서 하면 돼요. 그 쪽 물을 밭으로 흘러 들어가는 물이거든요."


겨울이 되면 라다크 사람들은 염소나 야크, 쪼 같은 동물의 고기를 특히 더 먹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 고기를 먹지 않고는 혹독한 환경에서 생활이 힘들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생선을 먹는 일은 없다. 라다크 사람들을 살생을 해야 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먹을 수 있도록 큰 짐승을 택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생선을 먹는다면 더 많은 살생을 해야 하는데 이곳 사람들은 그런 것을 꺼리고 있는 것이다. 동물을 죽이는 것을 사람들은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다. 마음을 모아 기도를 드리며 신에게 용서를 구하고 난 다음에야 동물을 죽이는 것이 이곳 사람들이다.


시간을 재는 경우에도 느슨하고 여유롭게 잰다. 1분 단위로 시간을 측정할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라다크 사람들은 "내일 낮에 찾아올게" 혹은 "저녁쯤 찾아올게" 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라다크 사람들은 그렇게 시간에 대해 넉넉한 여유를 남겨 놓는 것이다. 라다크 사람들의 언어에는 시간을 나타내는 아름다운 표현들이 많이 있다. '공그로트 gongrot'는 '어두워진 다음부터 잠잘 시간까지'라는 뜻이고 '나이체 nyitse'는 '해가 산 꼭대기에 걸려 있는 한낮'을 말한다. 또 '새의 노래'라는 뜻의 '치페 치릿 chipe-chirrit'은 '해가 뜨기 전 새들이 지저귀는 이른 아침'을 뜻한다.


이곳에서 가장 심한 욕설은 '숀 찬'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화 잘 내는 사람' 이라는 뜻이다. 내가 라다크 민담을 영어로 옮길 당시 도움을 주었던 앙축 다와라는 학생은 부정을 저지른 여자의 남편이라도 아내의 부정 때문에 소란을 피우는 것은 좋지 않은 것이라 이야기했다.
"아시잖아요. 남자가 화를 내면서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다면 여자가 잘못 행동한 것보다 더 많은 비난을 받는 거예요."
일처다부제는 수 세기 동안 라다크가 비교적 안정된 규모의 인구를 유지할 수 있게 한 결정적 요인이었다. 내가 믿는 바로는 그러한 안정감이 결과적으로 균형잡힌 자연환경과 조화로운 사회를 이루는데 상당 부분 기여했던 것 같다. ... 그렇지만 한정된 자원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수가 세대가 거듭되는 동안 변동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된다면 사회적 갈등이나 마찰은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그러한 상황이라면 생존을 위한 경쟁이나 다툼은 최소화될 것이 분명하다.
라다크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비율이 대체적으로 비슷하게 유지되고 있다. 그래서 여러 명의 남자가 한 여자와 결혼한다면 분명히 어느 곳에서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생기게 마련이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비구니가 된다. 그리고 실제 한 집안의 형제 중 한 사람 이상의 많은 남성들이 결혼을 하지 않고 승려생활을 하고 있기도 하다.


라다크에 처음 왔을 때 나에게 제일 강한 인상을 남긴 것 가운데 하나는 여성들의 얼굴에 피어나는 환한 미소였다. 라다크의 여성들은 가고 싶은 곳은 어디든 자유롭게 돌아다녔고 남성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농담을 주고받을 때도 거리낌 없이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어린 소녀들은 때로 수줍음을 보이기도 했지만 성숙한 여인들에게는 자신감과 개성, 위엄 같은 것이 느껴졌다. 나보다 먼저 라다크에 와본 사람들의 이야기에서도 이곳 여성들의 강력한 파워와 확고한 지위에 대한 이야기가 어김없이 등장했다. ... 그러한 역량 때문에 라다크 사회에서 남성 고유의 특성이 약해지는 일이란 없다. 오히려 남성 고유의 특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더욱 큰 포용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돌마는 세 살배기 아들이 뜨거운 찻주전자를 잡으려 하자 그를 찰싹 때린 적이 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그를 꼭 껴안았다. 나는 그런 불명확한 행동들이 아이를 혼란스럽게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와 비슷한 상황을 몇 번 더 보고 나서 그것이 '너를 사랑해, 그렇지만 그건 하지 마'라는 메세지를 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돌마는 자기 아들이 아니라 아들이 한 행동을 꾸짖었던 것이다.
라다크의 아이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무한정의 그리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는다. 그런 것이 서양 사람들에게는 아이를 '버리는 것'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겠지만 실제 라다크의 아이들은 다섯 살 정도만 되어도 다른 사람에 대한 책임의식을 배운다.


불교 교리의 핵심을 이루는 것 중 하나는 이른바 '공'의 철학이다. 처음에는 그 의미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는데 해를 거듭하며 타시 라브기아스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조금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대화를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말만으로는 절대 이해될 수 없다는 이야기죠."
타시 라브기아스는 말을 이었다. ...
'수니아타'의 개념을 정의하기 위해 사용된 '공'과 '무'라는 용어로 인해 많은 서양의 사상가들은 불교는 허무주의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또 불교신도들은 죽고 사는 문제에마저 무감각한 무리들이라는 인식이 생겨나기도 했다. ...
불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 염세주의를 조장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고 나면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영향을 받지 않는 영원한 행복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 그 가르침이다. 우리는 무지함 -감각과 선입관에 의존하는 세상의 경험- 으로 인해 사물이 분리되어 존재하는 일상세계 너머의 영속성을 보지 못한다. 계속 그런 무지함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한 우리는 존재의 굴레 속에 갇혀버리게 된다. 불교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세계의 실체를 부인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시각을 바꾸라는 것이다.


심지어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편안하게 받아들인다. ... 존재에 대한 라다크 사람들의 개념은 윤회, 다시 말해 멈추지 않는 반복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번 인생이 유일한 것이라는 관념은 없다. 그들에게 죽음이란 것은 끝이기도 하지만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나의 탄생에서 다음의 탄생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뿐이며 최종적인 해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정말 억누를 수 없는 '삶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이다. 그 기쁨의 느낌이 그들 사이에 너무나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어 어떤한 환경이라도 그것에 영향을 줄 수 없어 보인다. 라다크를 찾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들의 전염성 강한 웃음에 이내 감염되고 말 것이다.
처음 나는 라다크 사람들이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들의 미소가 진짜라는 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라다크에 온 지 2년째 되던 해 나는 어느 결혼식에 참석하여 뒷자리에 앉아 즐거워하는 하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 내가 그동안 문화적 편견이라는 눈가리개를 쓰고 라다크 사람들이 보이는 것처럼 행복한 건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며 돌아다녔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농담을 나누고 행복한 웃음을 보이는 그 이면에는 내가 살아온 사회에서처럼 좌절과 질투와 결함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그간 의식하지도 못한 채 '행복을 향한 인간의 잠재력에는 문화적인 차이 같은 것은 없다'라고 전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라다크 사람들 같이 정서적으로 건강하고 안정감 있는 사람들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물론 그들의 그런 모습은 복합적인 요인들에 의해 형성된 것이고 그들 특유의 생활방식이나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가장 중요한 요인은 라다크 사람들은 자신이 자기 자신보다 훨씬 더 거대한 그 무엇인가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고, 또 자신은 다른 사람들 그리고 주변의 환경과 분리될 수 없는 연결 속에 존재한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라다크 사람들이 산업화된 사회에서 사는 우리 같은 서양인들보다 정서적인 면에서 훨씬 덜 의존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들에게 있어 사랑과 우정은 격정적이거나 집착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소유하는 형태가 아닌 것이다. 언젠가 한 어머니가 집을 나간 지 1년 만에 돌아온 열 여덟 살짜리 아들을 맞이하는 것을 본 일이 있다. 어머니는 놀랄만큼 차분했다. 그동안 아들이 보고 싶지도 않았던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 결국 나는 라다크 친구들의 그런 편안하고 여유로운 태도를 이해하게 되었고 마치 내가 떠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대해주는 그들의 모습이 좋아졌다.
... 만일 당신이 긴 여행을 떠나려는 순간 비가 쏟아진다 해도 굳이 참담한 느낌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당신이 그런 것을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라다크 사람들은 그런 경우 '굳이 불행하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지요' 라는 반응을 보이리라는 것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해할 수가 없어요. 제 여동생이 레에 살거든요. 여동생은 일을 빨리 하게 만드는 것들은 뭐든지 가지고 있어요. 옷을 가게에서 구하고 지프를 타고 다니고 전화기나 가스 요리기도 가지고 있어요. 그런 것들 때문에 시간이 많이 절약될 텐데 제가 찾아갈 때면 저하고 이야기 나눌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바쁘답니다."
(사족. 이게 이 책에 나온 말이었구나!!!!)


그러한 분열 양상의 원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은 남성과 여성의 직무 구분이 더욱 뚜렷해짐에 따라 그들 사이의 역할 자이가 점점 더 양극화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세계 전역에 나타난 공통적인 현상은 남성들이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인 농촌 지역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다는 것인데, 라다크 역시 예외는 아니다. ... 여성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갇혀 보이지 않는 그림자와 같은 존재가 되고 만다. 일을 하고는 있지만 그것으로 돈을 버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생산적인' 존재로 비춰지지는 않는다. ...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자신과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변화가 생겨났다. 또한 그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정서적인 측면에서 당사자에게 큰 충격이 되었다.
...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그렇게 강하고 활발한 모습을 보이던 라다크 여성들이 자신감이 없어지고 외모에 지나칠 정도로 신경을 쓰며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라다크에서는 전통적으로 여성의 외모를 중시하긴 했지만 인내심이나 사회적인 역할들을 더 중시했다.

외국 관광객 한 사람이 하루에 쓰는 돈은 라다크의 가정이 1년 동안 쓰는 돈과 맞먹을 정도이다. 라다크 사람들은 외국인들에게 돈의 용도가 그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집에 돌아오면 생존을 위해 돈을 써야 하는 외국인들의 입장이 그들에게는 너무 생소했다. 먹을 것을 구할 때도 의복을 구할 때도 거처를 마련할 때도 모두 돈이 필요하고, 그것도 아주 많은 돈이 필요한 외국인의 생활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런 외국인들의 모습을 보던 라다크 사람들은 갑자기 자신들이 가난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라다크에 처음 왔을 때는 처음 보는 어린 아이가 달려와 내 손에 살구를 꼭 쥐어주는 일이 많았는데 지금은 그 어린 아이들은 낡은 서양식 옷을 입고 디킨스 소설에나 나오는 거리의 아이들을 연상시키는 칙칙한 모습으로 변해버렸다. 외국인들과 마주치면 빈손을 내밀며 '한 푼만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들에게 입버릇이 되어 버렸다.


1부와 2부를 통해 나는 라다크의 전통적 생활방식과 도시 지역에 나타난 변화의 영향력에 대해 개괄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 나의 설명이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전통적인 생활상은 장밋빛 렌즈를 통해 들여다보고, 현대화에 관한 부분에는 검은 칠을 너무 많이 했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 전통문화에 속한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은 물론 이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거기에는 추운 겨울의 난방 시설처럼 우리가 기초적 편의 시설이라 부르는 것들이 결핍되어 있다. 외부세계와의 교류도 제한되어 있다. 문맹률은 높고 영아사망률은 더 높으며 개인의 기대수명은 서양보다 낮다. 이 모든 것은 심각한 문제들이고 나는 그것을 부인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라다크의 실제 모습은 외부의 시각으로 바라본 모습과는 차이가 있다. 서양의 잣대로 측정하려 한다면 분명 잘못된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해를 거듭하며 라다크 사회와 긴밀한 접촉을 계속하는 동안 나는 앞서 언급한 한계들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문화와 경제의 고립주의로 후퇴하지 않고서도 우리는 우리가 사는 지역의 전통들을 더욱 부양할 수 있다. 문화의 다양성을 진정으로 존중한다는 것은 우리의 것을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며 상대방의 문화를 우리의 소비를 위해 포장하거나 악용하거나 상업화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서구 사람들이 제3세계의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원칙적으로 타당성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우리가 집에서 조용히 지내는 동안에도 서구인이라는 우리의 생활방식은 그 물리적 실체로 머물지 않고 지구촌 저편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간과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가진 산업화의 값진 경험은 개발도상국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제3세계의 문제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면 그곳의 어머니들이 오염된 물에 분유를 타서 아기에게 먹인다는 말을 듣고도 그저 어깨만 한번 으쓱 올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제3세계 사람들도 스스로 배워야 하며 스스로 헤쳐나가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잇다. 제3세계 문제에 관심과 우려를 가진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나는 수없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제3세게 사람들을 어린아이 같이 다루는 것이고 아무리 아이에게 주의를 준다 해도 그 주의만으로 아이가 뜨거운 불에 손가락을 넣으려 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일이다. 또한 그러한 태도는 고의가 아니더라도 결과적으로 개발의 속임수를 영구적으로 지속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스스로 헤쳐간다'는 것은 반복할 수 없는 개발의 모델을 따라가야 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동일한 자원이 없는 상태에서 그것을 따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바로 그 무렵 나는 경제학자 에른스트 슈마허의 책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접하게 되었는데 그 책은 개발이라는 것이 파괴를 의미할 필요는 없다는 나의 확신을 더욱 강화시켜주었다.

이념적인 측면에서도 우리의 활동은 어렵게 진행되었다. 우리가 추구했던 것은 기존의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개발의 방향이었기 때문에 이전의 것들 가운데는 우리가 따라갈 만한 모델은 거의 없었다.
우리는 몇 가지 까다로운 문제들에 직면했다. 우리의 노력이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혹시 해를 입히는 게 아닐까? 라다크 사람들에게는 어떤 형태로든 개발이라는 것이 없는 편이 더 나은 게 아닐까? 개발은 외부의 개입 없이 라다크 사람들에 의해서만 추진되어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해야 라다크 사람들은 전통문화의 강점을 손상하지 않고 개발의 영향력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을까?

... 태양열 난방 시스템이 라다크의 생활수준을 분명히 개선시킬 수 있다고는 느꼈지만 만약 석탄이나 석유를 이용하는 재활용이 불가능한 난방 방식이 라다크의 전통 방식을 이토록 손상시키지 않았다고 가정하면 나 같은 외국인이 주제넘게 태양열 같은 새로운 시스템의 도입을 주장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 때문에 라다크의 전통 방식은 분명히 손상을 입었고 그래서 나는 사람들에게는 선택을 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가 있어야 한다고 느꼈다. 더 높은 수준의 생활이란 것은 경제의 독립성이나 전통적 가치를 포기할 이유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나는 우리가 합이한 사항들이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구체적인 결정과 그 실행과정에는 분명히 차이가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활동들이 내내 바람직한 방향으로 전개되었고 우리의 노력들이 결실을 맺고 있다는 긍정적인 신호들이 나타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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