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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툴 가완디]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

일루젼 2012. 3. 1.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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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 - 불완전한 과학에 대한 한 외과의사의 노트
국내도서>자연과 과학
저자 : 아툴가완디 / 김미화역
출판 : 소소 2003.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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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의사의 고백적인 수기나 자서전은 대부분 한쪽에 치우친 이야기들이었다.
완전한 의사의 입장에서 성공적이었던 자신의 치료나 현대 의학을 칭송하거나, 혹은 고발자의 입장에 서서 의료 현장의 실태와 환자들이 겪었던 피해들을 목소리 높여 외치거나.
 
물론 과거에도 그랬지만 특히 현대에는 거의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자신의 행동이 다른 누군가에게 그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장 목이 말라 마시는 한 잔의 물조차 수돗물을 마실 것인가, 슈퍼에서 생수를 사 마실 것인가, 아니면 마트에서? 그도 아니면 음료수를? 그런 사소하고 작은 선택조차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그런 사회에서도 의학, 의료가 가지는 영향력은 상당히 크다. 이 분야만큼 직접적이고 의도적으로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상당한 경우 영향을 받는 당사자의 의사는 결정력이 크지 않다)

아툴 가완디의 글을 즐겁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미화도 없었고 폭로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계를 말하면서도 담담하게,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게.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그의 글은 의사도, 환자도 분노하지 않고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의사가 아니므로 환자 쪽에 치우쳐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의사의 입장은 장담하기 어렵다.)

60%의 생존률로 완치가 가능한 치료법을 택할 것인지, 95%의 생존률로 80%의 치료가 가능한 치료법을 택할 것인지는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결정의 책임을 지는 것은 누구에게나 버겁다.
(진단에 대해서조차 확신을 가지기 어려울 때가 드물지 않음을 생각해보면, 정신적인 압박감이란 어마어마할 것이다)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또 누가 %의 어느 쪽일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니까.

한 번 정도 읽어보기를 권한다.

덧) 마침 50/50에서 미국 의사 면허 제도를 좀 알아본 뒤라 눈에 띄었는데, 아툴 가완디의 경우는 임상 레지던트로 8년을 수련한 모양이다. 외과의 경우는 확실히 수련 기간이 긴 것이 강점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국내에서도 많은 수련이 필요한 과는 펠로우로 남는 경우가 많으므로 꼭 기간으로만 비교할 것은 아니다.


[발췌]

나중에야 나는 그때 우리의 선택에 의문이 생겼다. 그건 정말 장님 문고리 잡기에 다름 아니었다. ... 이 일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 보았으나 어느 누구도 자책하지 않았다. 리는 살았다. 중요한 건 그것이었다. ...
이것이 바로 실제 의학이 벌어지는 순간들이다. 이 책이 발아되는 순간들이며, 우리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목격하고 생각할 수 있는 순간들이다. 우리는 의학을 지식과 처치가 질서정연하게 조화를 이루는 분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의학은 불완전한 과학이며, 부단히 변화하는 지식, 불확실한 정보, 오류에 빠지기 휘운 인간들의 모험이며, 목숨을 건 줄타기이다. 우리 일에는 과학이 있다. 그렇지만 그 안에는 또 습관과 직감, 때로는 단순한 낡은 추측도 있다. 우리가 아는 것과 우리가 목표하는 것 사이에는 늘 간극이 있다. 그 간극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을 꼬이게 만든다.


오래전부터 의학계는 환자들에게 최상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의무와 신출내기 의사들에게 경험을 쌓게 해야 한다는 두 가지 명제 사이에서 고민해 왔다. 레지던트 제도는 감독과 누진적 책임부과를 통해 잠재적 위험을 완화시키고자 하는 시도다. 그리고 교수 과정에서 환자들이 실질적으로 이익을 보고 있다고 생각할 근거도 있다. 연구결과를 보면 일반적으로 수련의 제도가 있는 병원들이 없는 병원들보다 결과가 좋았다. 레지던트들은 미숙할지는 몰라도 환자들을 체크하고, 질문하고, 그리고 스태프 선생들로 하여금 긴장을 놓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도움이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초보 의사가 중심정맥관 삽입, 유방암 제거, 결장 단면 봉합법을 익히는 사이 보내야 하는 처음 몇 번의 가슴 떨리는 순간들을 피해갈 방법은 아직 없다. 아무리 많은 안전장치를 해 놓는다 해도 보통 그러한 케이스들은 노련한 의사보다 초보의 경우에 잘 안 될 때가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그에 대해 어떠한 환상도 갖고 있지 않다. 스태프 선생 가족이 수술을 받아야 할 경우 병원 사람들은 수련의들을 얼마나 참여시킬까 고심한다. 스태프 선생한테서 평소처럼 하라는 지시를 받더라도 수술실에 들어가는 레지던트는 그날은 실습과는 거리가 멀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 중심정맥관을 삽입해야 될 경우 확실히 초짜한테는 맡기지 않는다. 거꾸로, 레지던트들이 주로 담당하는 병동이나 클리닉은 대개 가난한 사람들이나 무보험 환자, 주정뱅이, 미친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요즘 레지던트들은 스태프 선생의 참관이나 감독 없이 독자적으로 수술해 볼 기회가 거의 없다. 전문의 자격증 따고 나가서 단독으로 수술하려면 꼭 해 봐야 하는 과정이므로 레지던트가 혼자 집도한다면 그 대상은 대체로 환자들 중에서 가장 힘없는 이들일 경우가 만다.
이는 의사 수련에서 참 난감한 진상이다. 법원 판결은 말할 것도 없고 전통윤리나 공공도덕 측면에서도 최상의 의료서비스에 대한 환자의 권리는 의사의 수련이라는 목적보다 분명 상위에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실습대상이 되는 것은 싫어하면서 숙련된 의사를 원한다. 하지만 만일 미래를 위해 누군가를 훈련시키지 않는다면 그 피해는 모두의 몫이다. 결국 학습은 소독방포 아래서, 마취 하에서, 때로는 암묵적으로 비밀리에 이루어진다. 이 딜레마는 비단 수련 중인 레지던트들이나 전임의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학습과정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오래 계속된다.
...
신기술과 새로운 수술법이 나타나 구식을 대체하면 학습곡선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 아버지는, "내가 지금 시행하고 있는 기술의 4분의 3은 레지던트 시절에는 배운 적도 없는 것들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가령, 바늘땀을 뜰 때 "손목을 좀더 틀어!" 하는 식의 가르침을 줄 선생은커녕 제일 가까운 곳의 동료조차 삼십 리는 떨어져 있는 고립된 현실 속에서 아버지는 독학으로 미세 수술법, 정관 복원술, 인공 요도괄약근 이식법을 익혀야 했다. ... 이 모든 기술과 테크닉은 그가 의사 수련을 바친 뒤 새로 도입된 것들이다. 그 가운데는 옛 기술을 토대로 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완전히 새로운 것들이다.
이는 사실상 모든 외과의들이 겪는 일이다. 끊임없이 의학기술의 혁신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도태되지 않으려면 최첨단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사실 신기술을 적용하지 않는 것은 환자들을 의미있는 의학적 진보로부터 단절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학습곡선의 위험은 레지던트 때나 개원의가 된 후에나 피할 수 없다.
... 결국은 환자들이 혜택을 본다. 종종 그것도 아주 엄청나게. 하지만 처음 몇 환자들은 혜택을 보기는커녕 피해를 볼 수도 있다. ... 성공적인 혈관 치환수술 후 연간 사망률은 세닝 수술 때의 4분의 1도 안 되며, 평균 수명도 47세에서 63세로 늘어났다. 하지만 그 기술을 습득하기까지 치러야 했던 대가는 무시무시했다. 최초 70건의 치환수술은 수술사망률이 25%로, 세닝 수술 사망률 6%에 비해 엄청나게 높았다. 세월이 흘러 기술이 숙달된 뒤에는 100명의 환아 중 5명만이 사망했다.
환자의 입장에서는 전문성과 진보 모두를 원한다. 아무도 직시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실은 그 둘이 상호모순되는 바람이라는 것이다. 영국의 한 공공보고서에 '환자들의 안전에 관한 한 학습곡선은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는 글귀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희망사항일 뿐이다.

... 우리가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불가피하게 위험률이 높으니 좀더 경험 많은 의사한테 가는 게 낫겠습니다, 하고 환자들한테 얘기한 적이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술에 동의하겠느냐고 물은 적이 있는가? 그런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다.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일인데 제정신이라면 어느 누가 실습대상이 되는 데 동의해 주겠는가?
이 가정에 반박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봐요, 의사가 된다는 게 어떤 건지 이해해주는 사람들도 많아요. 이제 환자들한테 좀 솔직하게 말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이익을 위해 봉사할 기회를 가지려는 사람들도 분명 있지 않겠소?"
얼마 전 사무실에 들렀을 때 한 보건정책 전문가가 내게 한 말이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못을 박듯이 말했다.
"암, 있고말고."
확신이 대단했다.
정말 깨끗하고 두루두루 좋은 방법이다. 환자들에 솔직하게 툭 터놓고 물어 보고 환자들은 동의해 주고,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의 책상 위에 갓난아기 사진이 놓여 있는 것을 보고 갑자기 아주 짓궂은 질문이 떠올랐다.
"그래서, 아드님 분만할 때 레지던트가 하게 하셨습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니, 레지던트들은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지."
그가 고백했다.

... 선택권을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줄 수 없다면 아예 아무한테도 안 주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 그렇다면 인간과 컴퓨터가 공동작업할 경우 최상의 결과를 빚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연구가들이 지적한 대로 그것은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의견이 일치할 때는 아무 문제가 없고,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연구결과에 의하면 컴퓨터의 판단을 따르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외과 의료사고 사례를 몇 가지 살펴보자. 일반외과의가 커다란 금속제 도구를 환자 복부에 남겨둔 채 닫아서 내장과 방광벽이 찢어진 경우도 있었고, 암 전문 외과의가 엉뚱한 유방의 생검을 하는 바람에 암 진단이 몇 달이나 늦어진 적도 있었고, ...
그런 중대한 과오를 범한 사람들을 어떻게 시술하게 놔 둘 수 있을까? 우리는 그들을 '무능'하고 '비윤리적'이며 '직무태만한' 의사들이라고 생각하며, 그들이 처벌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의료소송, 미디어 스캔들, 정직, 해고 등 그러한 의료사고를 다루는 공공시스템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의료계에는 악덕 의료행위와 그 행위자에 대한 이러한 단순논리적 관점을 교란시키는 중요한 진실이 있다. 그것은 모든 의사들이 끔찍한 과실을 범한다는 것이다. 방금 전 열거한 의료사고들만 해도 내가 아는 명망 높은 외과의들의 이야기다. 일류 의대의 외과 선생님들에게 지난해 범했던 실수에 대해 이야기해달라고 청해서 수집한 것이다.
... 1995년에 발표된 한 연구에 따르면, 엉뚱한 약을 주거나 잘못된 용량을 주는 등의 투약 실수는 입원환자 모두에게 거의 한 번꼴로 일어나며, 대체로 별 문제 없이 넘어가지만 그중 1%는 심각한 결과를 낳기도 했다.
위험한 소수 의사들에 국한되어 과실이 일어난다면 의료소송도 소수집단의 의사들에게만 집중되어 나타나야 할 것이나 실제는 균등한 종 모양의 분포도를 보인다. 대부분의 외과의들은 의사생활 중 적어도 한 번은 소송을 당한다. ... 이런 이유로 의사들은 언론에서 끔찍한 의료사고가 또 났다며 떠들어댈 때도 좀처럼 분개하지 않으며, 대개 보통 사람들과 다른 반응을 보인다. 자신의 일이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나쁜 의사들을 환자들로부터 차단시키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좋은 의사들이 환자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을 막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선택을 해야 하는가? 여러 면에서 최선책을 결정할 가장 이상적인 후보자는 바로 나였다. 아이의 아빠이므로 아이한테 닥칠 위험에 대해 병원 의료진 누구보다 세심하게 마음을 쓸 것이고, 또 직업이 의사니까 관련된 문제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는 의사소통 문제, 과로, 순전한 자기과신 같은 문제들이 얼마나 자주 의사들로 하여금 잘못된 선택을 내리게 하는지도 잘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료진이 헌터에게 삽관하는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러 왔을 때 나는 그들이, 본 적도 없는 의사들이 결정을 내려주기를 바랐다. 윤리학자 제이 카츠 같은 이들은 이런 류의 바람을 '유아적 역행'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내게 그런 비난은 너무 가혹하게 생각되었다. 불확실성은 무지막지하게 컸고, 나는 잘못된 판정을 내릴지도 모르는 위험성을 감당할 수 없었다. 혹 내가 아이한테 올바른 선택이라고 확신하는 결정을 내렸다 할지라도 만약 일이 잘못된다면 가책 때문에 도저히 살 수 없을 것이다. 부모가 결정에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 역시 본질적으로 일종의 가혹한 간섭주의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헌터의 의사들이 책임을 져 주어야 했다. 결과가 좋든 나쁘든 그들은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 나는 환자 당사자도 아니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픈 아이 곁에 앉아 아이를 지켜보며 걱정하거나, 공연히 바쁘게 움직이며 잠시 근심을 잊어 보는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치료법들을 철저하게 심사숙고해서 선택할 만한 에너지나 집중력이 내게는 없었다.

... 많은 윤리학자들이 환자의 자결권을 여러 가치들 가운데 하나로 인식하지 않고 의학의 궁극적 가치로 주장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슈나이더는 환자들이 의사들한테 가장 원하는 것은 자결권 그 자체가 아니라 실력과 친절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여기서 친절은 종종 환자의 자결권을 존중하는 것을 뜻하며, 그들이 중요한 결정에 대해 통제권을 갖도록 보장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친절은 또한 환자들이 결정권 행사를 원치 않을 때 부담되는 결정을 대신 맡아서 해 주는 것까지도 포함하며, 그들이 결정을 내리고자 할 때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해 주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환자들이 스스로 결정을 내리기를 원할 때라도 강력하게 주장해 설득시키는 것이 올바른 배려가 될 때가 있다. ... 대다수의 윤리학자들은 이런 식의 논리를 혼란스러워 하지만 환자와 의사가 어떻게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는 앞으로도 계속 고심해야 할 문제다. 의학 분야가 점차 더 복잡해지고 기술이 발전할수록 진정한 과제는 가부장적 간섭주의를 추방하는 것이 아니라 친절을 지키는 것이 될
것이다.



마음에 드는 구절들을 뽑아놓고 보니 좀 한 쪽 입장에 치우친 것 같다.;;
하지만 전체를 읽어보면 밸런스를 상당히 잘 잡은 책이므로, 혹 발췌만을 보고 이 책을 단정짓지는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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