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017)

[김사인] 가만히 좋아하는

일루젼 2012. 3. 5.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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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좋아하는
국내도서>시/에세이
저자 : 김사인
출판 : 창비(창작과비평사) 2006.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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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읽지 않던 시집을 추천 도서 목록을 지워나가겠다는 일념으로 고등학교 이후 가장 열심히 읽고 있다.
현대시의 아름다움이란 내게 아직까지도 다소 먼 이야기이지만, 한 권씩 읽을수록 가만히 생각해보는 일이 조금 늘었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유하의 시집이 가장 마음에 든다.



[조용한 일]

이도 저도 마당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 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 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영월에서]

무엇을 기다리나 산들은
해마다 목을 빼고 나무들은
우두커니 물들은 모래들은
밤마다 어디로 가서 무너지나 한번씩
어둠 속 가로질러
온통 가슴이 주저앉나 무엇을 기다려
우수수 벌판을 헤매다
아침이면 돌아오나 바람으로 우수수

기다림이 아니고야
이렇게 있을리가
기다림이 아니고야
살이 마르고 가죽 쪼그라들리가
기다림이 아니고야
어떻게 죽을 수나 있을까

한데 무엇을?

이렇게 있다는 것이
기다림인 줄을 까맣게 잊고
모든 길 끊어진 영월에서
나는 대체 누구의 잠을 대신 자는가
누구의 밥을 대신 먹는가
누구의 걸음을 대신 걷는가



[유필 遺筆]

남겨진 글씨들이 고아처럼 쓸쓸하다

못 박인 중지마디로 또박또박 이름을 적어놓고

어느 우주로 스스로를 흩었단 말인가

겨울밤

우물 깊이 떨어지는 두레박 소리




[소리장도 笑裏藏刀]


웃음 뒤에 칼을 감추고 나는
계면조 뒤에 핏발선 눈을 감추고 나는
비겁하게도
비겁하게도
사랑을 말하네
역수(易水)를 건너던 자객쯤이나 되나
비장의 이 허장성세
칼은 이미
있어도 없어도 그만이라네
있는지 없는지도 다 잊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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