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요네자와 호노부] 겨울철 한정 봉봉 쇼콜라 사건 상, 하

일루젼 2025. 5. 3.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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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요네자와 호노부 / 김선영
출판 : 엘릭시르
출간 : 2024.12.31


   

저자 : 요네자와 호노부 / 김선영
출판 : 엘릭시르
출간 : 2024.12.31


           

오와아. 

 

일본인들에게 '교토'란 어떤 느낌의 지역인 걸까. 천년 도읍, 오사카 사투리, 야마토 일족... 

한국의 경주 역시 천년 도읍으로 유명한데, 어쩐지 경주와는 이미지가 사뭇 다른 것 같다.

어쩐지 조금 기이하고 신비한 이야기들은 대체로 교토로 모여드는 느낌.

 

요네자와 호노부의 <흑뢰성>이 인상 깊었기 때문일까. 소시민 시리즈의 오사나이와 고바토 역시 나고야, 간사이 출신이기 때문일까.

'완결'이라 이름 붙었지만 오사나이가 심혈을 다해 준비해 놓을 교토의 미로에서 두 사람을 다시 만나보고 싶다. 

 

한창 매서운 겨울바람과 눈발 사이에서 읽었던 책을, 곧 다가올 여름의 기운을 느끼며- 까지는 아니고 아직은 조금 서늘한 봄의 중간에서 리뷰하고 있자니 두 소시민들과 함께 3년을 다시 보내는 기분이었다. 그들의 봄, 여름, 그리고 겨울을. 

 

이전 시리즈에서는 언급만 되던 고바토의 '후회'와 오사나이와의 첫 만남, 그리고 두 사람이 '소시민'을 목표로 삼게 된 계기가 모두 담겨있는 <겨울철 한정 봉봉 쇼콜라 사건>.

소시민 시리즈의 팬들이라면 당연히 읽어야 할 작품이다. 동시에 처음 소시민 시리즈를 접하는 분들께도 추천하고 싶지만, 가능하시다면 겨울은 조금 아껴두시고 <봄철 한정 딸기 타르트 사건>부터 시작하시길 함께 권하고 싶다.  

 

마지막에 오사나이가 고바토를 부르는 호칭, '나의 차선'이 너무나도 달콤하고 로맨틱하게 들리신다면, 

축하드린다. 당신은 소시민 시리즈를 제대로 읽으신 것이 틀림없다. 

("도청기... 아니 무전기"니까.)

 

개인적으로는 해설에서 다루었던 "궤변"의 해석에는 살짝 반기를 들고 싶다. 오사나이가 작고 어려 보인다는 이유로 무시를 당한다는 사실을 넌지시 내비쳤을 때, 이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고바토였기에 오사나이와 잘 맞을 수 있다고. 

그리고 그런 두 사람이었기에 '행운'으로 얻은 단서는 오히려 놓쳤을 수 있다고. 

 

시간을 길게 들인 만큼 하나의 생각을 잘 정리한 리뷰를 쓰고 싶었지만, 언제나처럼 의식을 흐름을 기록해 두는 선에서 끝날 것 같다.

여기서도 만나게 되는 <시간의 딸>에게 다시 한번 반가운 인사를 남겨두며. 

 

추가로 남겨두는 단상. 

'타인의 진짜 감정'이 들어가지 않은 공감도 공감일까?

적당한 맞장구나 감정 전이가 아닌 진짜 공감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런 형식적인 공감이라도 의미가 있다고 느껴진다면, 어쩌면 그건 자신의 감정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내 감정, 내 상황, 나에 대한 지지를 통해 정당성을 얻고 싶은- 

그러니까 '내 편'이 되어줘,라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오사나이가 아니지만,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오사나이와 고바토가 있을 거라 믿으며. 

아직은 조금 쌀쌀한 봄밤에.

끝. 

 

 


    

 

- 겨울바람이 강물 위를 훑고 지나가자 강가에서 메마른 참억새가 너울거렸다. 나는 저녁노을이 내려서는 제방도로를 걷고 있었다.
길은 녹아내린 눈 때문에 젖어 있다. 이 동네에서 12월에 눈이 내리는 건 드문 일이다. 어젯밤부터 한차례 내린 눈은 제설차가 길 양옆으로 쓸어냈는데도 인도를 절반쯤 점령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차도 바로 옆을 걸어야 했고, 자동차들은 내 바로 옆을 조심스레 지나갔다. 차도와 인도를 구분 짓는 것은 하얀 선 뿐이고, 그 위에는 몇 미터 간격으로 짤막한 플라스틱 안전봉이 꽂혀 있다. 

- 나와 똑같은 후나도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내 왼쪽에서 걷고 있다. 앞머리를 가지런히 자른 보브컷에 크림색 귀마개를 하고, 키는 나보다 머리 하나 반 정도 작다. 본인은 자기 키가 자랄 수 있는 한계치를 넘었다고 주장하지만 그 한계치가 대체 몇 센티미터인지 나는 모른다. 오사나이 유키, 나와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3학년이다.

- 모르는 사람이 보면 우리는 고등학교 입학 전부터 사귀다가 2학년 여름에 헤어지고, 3학년 여름에 다시 사귀기 시작한 셈이다. 하지만 사실 우리 관계는 '교제'라는 한 마디 표현보다 조금 더 복잡하다. 나는 오사나이를 돕고, 오사나이는 나를 돕는다. 그 호혜 관계 때문에 우리는 함께 지낸다. 

- 지금 오사나이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손에 넣은 것을 소중히 보듬고 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오사나이는 붕어빵을 먹고 있다. 큼직하고, 팥소가 가득 차 있고, 색은 노릇노릇한, 얇은 종이에 싸인 붕어빵을. 

- 이 붕어빵은 학교에서 도보로 이십 분 정도 떨어진, 강 건너편에 있는 '오구라 암자' 본점 제품이다. 수업이 끝나고 학교 건물 현관에서 합류한 오사나이가 "오늘은 너무 추워서 뼛속까지 얼어붙을 것 같으니, 무사히 돌아가려면 붕어빵이 필요해. '오구라 암자'라면 본점이 최고야"라고 해서 가게까지 함께 갔다. 

- 평소 둘이서 달콤한 디저트 가게에 갈 때도 오사나이는 내게 뭐라도 주문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은 오사나이 혼자만 붕어빵을 샀다. '오구라 암자'에 들르는 바람에 지나게 된 제방도로에서 오사나이는 두 손으로 붕어빵을 쥐고 있다. 평소에는 자전거로 통학하지만 눈이 쌓인 오늘은 털부츠를 신고 눈을 밟으며 걸어가고 있다. 달콤한 디저트를 손에 든 오사나이가 행복함과는 거리가 먼 표정을 짓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추위를 견뎌내는 중이기 때문이리라.

- 그 옆모습을 보면서 나는 몇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고등학교에 진학할 때 필요에 의해 함께 행동했다. 2학년 여름방학,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헤어졌다. 그리고 일 년 동안 각자 다른 '연인'과 시간을 보냈고, 지금 다시 나란히 걷고 있다. 
2학년 여름까지 우리는 상대를 편리한 도구 정도로만 여겼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 사람의 말을 하고, 이따금 재미있는 이야기도 하는 편리한 도구. 그랬는데 지금은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우리는 서로를, 단순히 편리하기만 한 게 아니라 귀중하기도 한 도구로 재인식한 것이리라. 
둘도 없는 존재임을 깨달았다고 바꿔 말할 수도 있다.

- 적어도 필요하지도 않은데 둘이서 나란히 하교한다는 것은 전에는 찾아볼 수 없던 행동이다. 우리는 분명 조금 변했다. 그건 바람직한 변화였을까? 바람직하다는 게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니 답을 찾을 길은 없지만.

- 다만 오사나이와 나의 관계가 어떻게 변했든지, 이 인연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나도 오사나이도 고등학교 3학년이고, 각자 진학을 원한다.  1지망은 나고야에 있는 대학이다. 가까우니까. 오사나이는 아무래도 교토에 있는 대학을 노리고 있는 듯하다. 누가 합격하든 우리는 다른 길을 가게 된다. 둘 다 떨어졌을 때는 함께 이 동네에 남게 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런 결말은 절대 사양이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있을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 또 한 가지, 나는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그 생각을 입에 담았다.
"꽤나 천천히 먹네."
오사나이는 아까부터 붕어빵을 깨지락 깨지락 먹고 있다. 모처럼 갓 구운 붕어빵을 샀는데 저런 속도로는 금세 식어버릴 것이다. 오사나이는 달콤한 디저트를 더없이 사랑하고, 그 섭취 속도는 보통 게걸스러울 정도로 빠르지도 않지만 답답할 정도로 느리지도 않다. 그런데 이 붕어빵에 한해서는 먹는 속도가 명백히 느리다. 오사나이는 등지느러미 쪽을 또 작게 한입 깨물더니 나를 올려다보았다.

"응."
"식을 텐데."
"그래. 슬프게도."
"덥석 베어 물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어?"
오사나이의 대답이 조금 늦었다.
"그런 이유가 아니야."
나는 그 대답에 숨은 뜻을 눈치챘다. 뜨거워서 먹기 불편한 게 아니라면 무슨 이유일까, 고바토, 고바토 조고로라면 알겠지? 오사나이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것은 도발이다.

- 이런 도발을 희희낙락 받아들일 때도 있었다. 함께 소시민이 되자고 약속해 놓고 어째서 사람을 시험하려 드는지 찜찜할 때도 있었다. 지금은 하굣길의 유치한 장난에서 심각한 의미를 찾아내려 하지 않는다. 
실제로 오사나이가 붕어빵을 몹시 천천히 먹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 정도 수수께끼라면 생각할 필요도 없다. 팥소가 너무 뜨거워서 식을 때까지 기다린다는 가능성을 부정당했으니 답은 하나뿐이다. 
"손난로 대신 쓰고 있구나."

- 추우니까, 오사나이는 따끈따끈한 붕어빵으로 손을 녹이고 있는 것이다. 식어버리면 매력이 반감되니 뜨거울 때 먹고 싶겠지만 먹어버리면 손끝이 얼어붙는다. 오사나이 나름대로 온기와 맛의 균형을 고려한 결과가 지금의 느릿한 속도인 것이다.
"정답."
오사나이는 나를 힐끔 보더니 그렇게 한마디 하고 다시 손에 든 붕어빵을 바라보았다. 물론 이 정도로는 칭찬을 들을 수 없고, 나도 으스댈 생각은 없다. 오사나이도 참 짓궂다 생각하면서도 행복하게 붕어빵을 먹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우리의 오른쪽에는 눈이 쌓인 널찍한 하천 변이 있고, 왼쪽에는 번잡한 시가지가 펼쳐져 있다. 정면에서 자동차가 다가온다. 바람이 차가워 나는 양손을 주머니 속에 넣고 있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차량 안에 마스크를 쓴 운전자의 모습이 보였다. 

- 지금의 나는 소시민을 꿈꾸며 수수께끼를 풀고 싶어 하는 성격을 대체로 좋게 보지 않지만, 예전에는 영웅을 꿈꾸었던 적도 있었다. 가볍게 누군가를 돕고, 감사 인사는 접어두라며 바람 속으로 사라지는 멋진 존재가 되면 좋겠다는 공상을 했고, 그러기 위해 누군가 곤경에 처하길 내심 바랐던 적도 있었다. 초등학생 때 일이다. ... 아니, 중학생이 되어서도 그런 유치한 바람은 아마 마음속 어딘가에 있었다. 
어리석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막상 타인이 위험에 처하면 내게 불똥이 튀지 않기만을 바란다. 상황을 보아하니 내 몸은 지킬 수 없겠지만 그 대신 다른 사람은 어찌어찌 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한탄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째서 이런 행동을 해야 하는지 억울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나는 내 왼편에서 걷는 오사나이를 어깨로 세게 밀쳤다. 

- 완전히 허를 찔린 오사나이는 그대로 제방도로 경사면으로 떠밀려 한순간 허공에 떴다. 내게 몸통박치기를 당해 튕겨나갔다는 사실을 바로 이해하지는 못했는지 허공에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다. 그 손에서 붕어빵도 함께 튀어올라 오사나이보다 멀리 날아갔다. 내가 잘못 본 걸지도 모르지만, 오사나이는 자기가 고약한 짓을 당했다는 것을 알고 일이 초가량 나를 노려보았다.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담은, 어둡고 고요한 눈빛이었다. 

- 오사나이에 이어 이번에는 내가 하늘을 날았다. 겨울 하늘에 무겁게 깔린 구름이 시야 한가득 펼쳐졌다.

- 역시 꿈이다 보니 상대는 순식간에 오사나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지만, 그렇다고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사람은 꼼짝도 하지 못하는 내 귓가에 얼굴을 바짝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이건 죗값이야."

- 헛소리!
확실히 내 행실이 바르다고 할 수는 없다. 한때나마 나를 좋아한다고 말해준 사람에게 너도 최악이었다는 말을 듣는, 변변찮은 인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런, 이런 봉변을 당할 만한 짓은 결코 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한다.
아마도.
혹시 정말로 죗값인 걸까? 아무 이유도 없이 이런 꼴을 당한다는 게 더 말이 안 된다. 스스로는 눈치채지 못한 치명적인 실수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했다고 생각하는 게 훨씬 논리적이지 않은가?  
잠깐. 목숨을 잃을 뻔했다? 정말로?
이미 잃은 게 아니라?
내가 아직 살아 있다고 판단할 근거가 있을까?  

- 오사나이의 관찰력은 대단히 뛰어나지만 누구라도 항상 주위를 관찰할 수는 없다. 나는 오사나이가 자동차의 접근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물론 최선책은 오사나이에게 경고하고 둘이 함께 피하는 것이었다. 둘 다 측단으로 굴러 떨어졌을지도 모르지만 차에 치이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하지만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실제로 양손을 주머니에서 뺄 틈조차 없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오사나이에게 몸통박치기를 하는 것뿐이었다. 
... 아마도, 아마도 내게 오사나이를 구하려는 생각은 분명 없었을 것이다. 그저 내가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향에 오사나이가 있었고, 오사나이를 밀어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것뿐이다. 

- 나를 친 자동차 운전자는 나를 구조하지 않고 달아난 모양이다.
즉, 뺑소니다.
사고 순간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조금씩 기억나는 것도 있다. 나는 분명 오사나이를 충돌 코스에서 밀어냈다. 그 제방에서 거꾸로 지면에 떨어지면 무사할 수 없다. 하지만 오사나이는 측단으로 이어지는 경사면에 떨어졌을 테니, 그리 크게 다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길 바란다. 내가 떠민 탓에 오사나이가 목이라도 부러졌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다. 갑자기 온몸에 식은땀이 났다. 
오사나이의 목이 부러지지 않았다고 생각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지 않나? 
정말 무사한 걸까? 오사나이가 나 때문에 크게 다치지 않았다고 믿어도 되는 걸까? 어떻게 하면 그걸 확인할 수 있을까? 어딘가에 간호사 호출 버튼이 있을 텐데, 그 사용법도 들었을 터인데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아까 증상에 대해 설명을 들을 때에는 의식이 있었는데 오사나이의 안부는 떠오르지도 않았다. 역시 의사가 말한 대로 나는 몽롱한 상태였던 것이다. 사람을 부르려고 입을 열었다. 

- 깜짝 놀랄 정도로 가느다란 목소리가 나왔다. 이 병실 안에 누군가 있었어도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것 같다. 역시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큰 소리를 내려고 숨을 들이마시자 가슴에 날카로운 통증이 치달았다. 본능적으로 겁이 나서 삼킨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아프다. 아파. 가슴이, 다리가, 머리가 아프다. 아프다...

때문에 마침내 이해했다.
나는 죽을 뻔했던 것이다.

- 떡 벌어졌고, 생김새도 몸집도 어딘가 각이 졌다. 도지마 겐고다. 손에 과일이 담긴 등나무 바구니를 들고 있다.
겐고가 말했다.
"내가 깨웠어? 미안."
무슨 일로 왔느냐고 말하려다가 문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설마 겐고가 내 문병을 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깨닫는 게 조금 늦었다.
겐고는 바구니에서 봉지에 든 사과를 꺼내 침대 옆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문병 왔어."
"고마워."
"... 끔찍한 사고였다며."
"그래. 끔찍한 사고였어."
겐고는 나를 똑바로 보려 하지 않았다.

- "의식불명이었다고 하던데."
"그랬었나 봐. 지금은 살아 있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정보로서 타인에게 전하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피식 웃었다가 겨우 위화감을 알아차렸다.
"... 내가 의식불명이었다는 건 누구한테 들었어?"
겐고가 얼굴을 찌푸렸다.
"갑자기 그런 게 궁금한 걸 보니 평소대로 돌아왔나 보네."

“내 소문이니까 아무래도 신경 쓰이지."
작은 한숨을 내뱉은 겐고가 어째선지 피식 웃더니 겨우 나를 보았다.
"변함없어서 다행이야. 의식불명의 중태라는 말은 오늘 아침 신문에 나왔어."


- 세상에, 모르는 사이에 신문에 실리고 말았다니. 하지만 아직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중태의 환자를 실명으로 보도하나?"
겐고는 전 신문부 부장답게 신중하게 대답했다.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이름은 내지 않아. 너도 18세 고등학생이라고만 적혀 있었어."
"18세 고등학생이 차에 치였다는 기사만 보고 나라고 생각했다?"
"너, 중상을 입은 환자라면서 조금 더 유순하게 굴면 어디 덧나냐? 물론 너라고 생각한 이유가 있지. 우리 반 요시구치 알지?"
알다마다. 우리하고 같은 3학년으로 겉보기에는 특별히 눈에 띄는 구석이 없는 여학생인데, 묘하게 남의 소문에 밝다.
나도 전에 당시 사귀고 있던 여자친구에 대한 소문을 요시구치에게 들은 적이 있다. 돌이켜보니 요시구치와 내가 서로 알게 된 계기를 만든 게 바로 도지마 겐고 아니었던가?

 

- "어제 요시구치도 학교에서 돌아가는 길에 구급차를 봤다나 봐. 그래서 별생각 없이 구급차를 따라가 봤더니 오사나이가 있었대."
바로 물었다.
"오사나이는 안 다쳤대?"
그걸 물을 줄은 몰랐는지 겐고는 조금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아무 말도 못 들었는데, 오사나이도 위험했어?"
"함께 걷고 있었어."
겐고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래서 그랬군. 요시구치 말로는 오사나이가 구급대원에게 환자가 고바토 조고로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는 거야. 너무 냉정해서 오사나이가 너를 찌르기라도 한 게 아닌가 의심했다나. 그러니까 아마... 오사나이는 괜찮지 않았을까?"
나는 힘없이 웃었다. 요시구치의 오해도 우스웠고, 사고현장에서 오사나이가 그녀답게 행동했다는 데 안도했다. 겐고는 그런 나를 미심쩍게 쳐다보며 뒷말을 이었다. 

- "뜬소문이 아니야. 사실이야."
조금 딱딱한 목소리가 나왔다.
그렇다. 어째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내가 당한 사고는 삼 년 전 사고와 굉장히 흡사하다. 정말로, 굉장히 흡사하다.
당연히 겐고가 물었다.
"알아?"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알아. 그것도 뺑소니였어. 차에 치인 사람은 중학교 3학년... 우리 반 학생이었어."
"분명... 모토사카였나. 그런 이름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피식 웃음이 났다.
"이래서 와전이 무섭다니까. 히사카야. 히사카 쇼타로."

"히사카라고?"

- 오늘 겐고는 여러 차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아무리 봐도 히사카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 반응이 아니었다. 나는 벌떡 몸을 일으키려다가 통증에 신음하고 침대에 다시 쓰러져 호흡을 가다듬으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아까 들었던 말을 이번에는 내가 했다.
"알아?"

- "그냥. 조금... 사과하고 싶어서."
"사과? 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겐고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래. 사정은 묻지 않겠다만 미련이 남긴 하겠네."
나는 겐고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이상한 표현을 한다.

"미련?"
"아니야?"
어딘가 찜찜한 태도다. 생각해 보니 취재 중에 이름을 들은 게 전부라면서 아까 히사카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겐고가 그렇게 놀란 것은 이상하다. 일부러 숨기는 건 아니겠지만 뭔가 위화감이 있다.

 

- 나는 몽롱한 머리로 겐고의 눈치를 살폈다.
"난 중학교 졸업한 뒤로 히사카를 만난 적이 없어."
겐고 역시 위화감을 눈치챘는지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련이라는 표현으로 짐작하건대 설령 히사카에게 사과하고 싶어도 사과할 수 없는 상황인 듯했다. 떠오르는 대로 물었다.
"히사카는 지금 유학이라도 간 거야?"
해질 무렵에 가까운 병실에서 찰나의 순간, 겐고의 눈에 ...

- 약간 낮은 베개였는데, 내 취향보다는 조금 딱딱했다. 손으로 더듬어보니 베갯잇은 제대로 씌워져 있어 이상한 소리가 날 만한 요소는 없었다. 대체 무슨 소리였을까, 베개 밑을 뒤적거리니 손가락 끝에 뭔가 닿았다.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으로 잡아서 끄집어냈다. 메시지 카드를 넣는 작은 봉투였다. 
풀로 붙이지도 않았고, 보내는 사람 이름도 없다. 어둠 속이라 똑똑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색은 아마도 흰색이거나 크림색 같았다. 보이는 것처럼 카드가 들어 있을까? 
나는 그 봉투 속 내용물을 확인하기가 꺼려졌다. 대체 무엇이 두려운 건지 모르겠지만, 그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어째서일까...


- 나는 작은 봉투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손끝이 생각대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확인하듯 봉투를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 사이에 끼웠다가, 이어서 가운뎃손가락과 넷째 손가락 사이로 옮겼다가, 엄지와 가운뎃손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그러는 사이 기억이 났다.
꿈을 꾸었다. 정신을 잃고 있었는데, 무슨 소리를 들었다. 아아, 기억해내지 말걸. 꿈은 내게, 이렇게 속삭였다.
'이건 죗값이야.'
죗값이란 말이지... 

- 나는 손 안의 봉투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나는 그 속에 고발장이 들어 있을까 봐 겁이 나는 것 같다. 누군가가. 이러이러한 이유로 너는 죗값을 치러야 마땅하다고 규탄하는 게 아닐까 두렵다.
밤의 병실에서, 나는 중얼거렸다.
"짐작 가는 게 없어."


- 그렇다. 나는 잠에 취해서 존재하지도 않는 고발의 환영을 두려워했을 뿐이다. 내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감돌고 있을 것이다. 봉투를 열었다. 
내용물은 역시 메시지 카드였다. 병실이 어두워 글자가 보이지 않았지만 새벽녘의 흐릿한 빛이 비쳐드는 커튼 쪽으로 카드를 가져가니 겨우 읽을 수 있었다. 


- [고마워.

미안해.

용서하지 않을 거야.

오사나이]


- 세 번째 줄의 "용서하지 않을 거야" 앞에 말풍선이 붙어있고 "범인을!"이라는 한 마디가 덧붙여져 있었다. 하긴, 그 한 마디가 없다면 엉뚱한 뜻이 된다.
무리하지 않아도 돼, 오사나이. 너도 수험생이잖아.
경찰이 최선을 다해 수사하고 있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상대는 운전면허를 가진 어른이야. 위험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어째선지 웃고 있었다. 오사나이가 정말로 무사하다는 사실, 무사한 오사나이가 용서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사실(범인을!), 둘 다 왠지 우스웠다. 웃음이 치밀어 오르자 금이 간 갈비뼈가 통증을 호소했다. 나는 통증을 억누르려고 한숨을 쉬듯 웃었다. 

- 그리고 얼마 지나서 겨우 의문을 느꼈다.
오사나이는 언제 왔던 걸까? 그야 나는 잠들었으니 빈틈이 있었겠지만.
상상 속에서 오사나이가 천장 판자를 벗겨내고 고개를 내밀었다. 작은 봉투를 수리검처럼 던져서 내 베개 밑에 집어넣는다. 그럴 리가 없지만... 
나는 가만히, 불러보았다.
"오사나이?"

- 수술받은 다음 날부터 공부를 할 정도로 나는 기특한 성격이 아니다.
그래서 공책에 기록해 두기로 했다.

・히사카에 대해서.

 

- 겐고는 히사카가 자살했다고 했다.
그건 분명 뭔가 잘못된 정보다. 당연히 겐고가 잘못 들은 것이다.

 

- 히사카 쇼타로는 중학교 2학년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그 시절 내 언동이 어땠는지 되돌아보면 침대 위에서 데굴데굴 몸부림치고 싶지만 지금은 꼼짝도 하지 말라고 하니 내 과거는 생각하지 말자.

히사카는...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멋진 소년이었다.
키는 나보다 주먹 하나쯤 컸다. 즉 180센티미터 정도였다. 등을 조금 구부리고 걸었다. 말수는 적었고, 약간 미안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늘이 있는 타입이냐고 한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늘 햇볕에 그을어 있었고, 여름에는 특히나 더 그랬다. 
학교 성적은 중간 정도였을 것이다. 시험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뛰어나게 우수하다고 할 정도도 아니었다.

- "고바토, 검도해봤어?"

나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조금."
그러자 히사카는 언제나 그렇듯 약간 미안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으스대는 일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던 중학 시절의 나지만, 겨우 그 한마디에 내가 사실은 남들은 모르는 검의 달인이라고 착각하지는 않았다. 히사카는 단순히 내가 조금 익숙해 보여서 의아했던 것이리라.

- 3학년이 되어서도 히사카는 같은 반이었지만 친하게 말을 섞는 일은 없었다. 확실히 나는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는 사교적인 타입이 아니었지만, 히사카는 나보다도 훨씬 더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꺼리는 눈치였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훌륭한 선수라 아마 인기가 많았을 테고, 실제로 히사카에 관한 뜨거운 소문은 내 귀에도 들어왔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창가에 혼자 있는 히사카의 모습뿐이다. 
내가 당한 뺑소니와 히사카가 당한 사고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지만 사건이 발생한 계절은 그렇지 않았다. 히사카가 차에 치인 것은 여름이었다. 아마 여름방학 전이었을 것이다. 

- 오사나이다운 문병 선물이다.
나는 새삼 늑대 인형을 바라보았다.
이런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오사나이는 어째서 내게 인형을 선물했을까?
메시지 카드에는 뒷부분이 있었다. 문장은 카드 뒷면으로 이어졌다.
[노란색, 작은 차(경차?), 번호 미상.
삼 년 전과는 조금 달라.]

- 첫 번째 줄은 나를 친 자동차에 대한 정보일 것이다. 오사나이는 내가 치이기 전에 제방도로에서 떨어졌는데, 역시나 눈썰미가 좋다.
그리고 물론 오사나이도 내 사고와 삼 년 전 뺑소니 사고가 흡사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게 그랬듯이 오사나이에게도 그 사건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 눈을 감기 전에 늑대 인형을 들어 올려보았다.
아기 염소를 잡아먹었다면, 나쁜 늑대가 맞다.

- 그렇다면 어째서 여름 교복이 더러워졌을까? ... 가령 비가 그친 제방도로에서 굴러 떨어져, 웅덩이 위로 넘어졌다거나?
이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삼 초가 걸렸다. 그사이 여학생은 시선을 들어 나를 쳐다보며 잠자코 있었다. 내가 말하기를 기다리는 걸까? 어쩌면 내가 갑자기 돌아봐서 깜짝 놀랐는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먼저 입을 연 건 나였다. 
"차에 치일 뻔한 여학생?"
그 아이는 조금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내 이름이 아니야."
"그렇지만 네 이름을 모르는걸."
우리는 서로 너무 가깝게 서 있었다. 그 여학생이 조금 뒤로 물러나 우리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만들었다.
"오사나이 유키야. 3학년 4반."
자기소개를 하다니. 한발 늦었지만 나도 이름을 밝혔다.
"난 고바토 조고로. 3학년 1반."
오사나이라는 여학생은 작게 끄덕였다. 지금 들어서 이름을 알았다는 뜻일까, 아니면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뜻일까?

 

- 짧은 침묵 끝에 내가 물었다.
"그래서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오사나이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책을 가리켰다.
"볼일이 있는 건 그 책."
"이거? <드라마틱 완전정복 풀 컬러 완벽 해설: 자동차의 메커니즘>?"
"응."
그때 나는 무언가를 직감했다.
"이 책이 왜 필요해?"
오사나이는 너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그렇게 물을 줄 예상했다는 듯이 대답했다.
"나를 칠 뻔한 차가 타이어 자국을 네 줄 남겼는데, 그게 일반적인지 알아보려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답을 알려줄 수 있다.

-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언제 잠들었는지 떠올려보려 했다. 저녁 식사는 한 기억이 난다. 메인 반찬은 간장과 생강으로 양념해 구운 돼지고기였다. 저녁 식사를 하고 시키는 대로 물을 마시고,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양치질을 하고... 그리고 언제 잠들었을까? 저녁 식사는 오후 6시쯤 시작하는데 지금 바깥은 약간 밝았다. 그렇다면 열 시간 넘게 잔 모양이다. 너무 오래 자서 그런지 머리가 조금 멍했다. 움직임을 금지당한 몸이 불만을 호소하며 삐걱거렸다. 나는 의사의 지시를 아주 조금 어기고 몸을 꿈지럭거렸다. 

- 그렇다. 저녁 식사 전에 나는 삼 년 전 일을 되짚어보고 있었다. 히사카의 사고... 그리고 오사나이와 처음 만났던 날을. 우리는 방과 후 도서실에서 만났고, 서로의 목적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정말 만날 운명이었을까?
함께 있어서 가능했던 일도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이용하고, 때로는 멀어졌다가, 때로는 원래대로 돌아와서 고등학교 생활을 보냈다. 하지만 만약 방과 후 그날, 도서실에서 오사나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분명 내 실패에 좌절한 채로 지냈을 것이다. 그러는 게 나았던 건 아닐까? 

- 문득 상큼한 감귤향이 느껴졌다.
머리맡에 뭔가 있다. 나는 어둠 속을 더듬어 향기의 출처를 찾았다.
손은 곧 둥그스름한 과일을 찾아냈다. 둥글지만 꼭지가 볼록 튀어나와 있다. 한라봉일까?
그 귤 밑에 작은 봉투가 깔려 있었다. 나는 그 봉투를 열어. 역시나 안에 들어 있는 작은 메시지 카드를 꺼냈다. 밖에서 비쳐드는 희미한 빛에 의지해 어둠에 익은 눈으로 거기에 적힌 글자를 읽었다.
[선물이야. 맛있어.

오사나이]

 

- 몹시 간결했다. 맛있는 귤이란다. 날이 밝으면 먹어보자... 내 갈비뼈가 귤껍질을 벗기는 작업을 견딜 수 있어야 할 텐데.
나는 카드를 뒤집어보았다. 한마디 더 적혀 있었다.
[카메라를 찾아보고 있어.]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안다. 삼 년 전에도 우리는 카메라를, 정확히 말하면 방범 카메라를 찾았다. 그 영상 데이터는, 그렇다. 오사나이가 입수한 것이었다. 

- 회상에 젖기에 지금의 나는 너무 졸렸다. 이 상큼한 귤 향기가 평온한 잠과 꿈을 가져다주기를 소망했다.

- 연어구이가 반찬으로 나온 아침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 대신 한라봉을 먹었다. 짧은 머리 간호사는 "영양을 계산한 식사니까 과일은 자제하세요"라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오사나이의 문병 선물은 그런 제지로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하지 않았다. 아주 달았다.
껍질은 우려했던 것보다 훨씬 벗기기 쉬워서 갈비뼈에 거의 부담이 가지 않았다. 한라봉은... 혀에서 살살 녹는 맛이었다. 한 조각, 또 한 조각, 입으로 가져가는 손길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오사나이가 달콤한 디저트를 좋아하지만 그저 달기만 한 과일은 그리 환영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귤이라면 조금은 귤에 어울리는 신맛이 있는 게 오사나이의 취향에 맞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한라봉은 한없이 달았다. 지금 내게는 그저 한없이 달콤한 과일이 좋겠다고 생각한 걸까? 그렇다면 그 예상은 정확했다. 어제의 봉봉 쇼콜라도 그렇고, 이 한라봉도 그렇고, 이대로 가다간 혀가 사치스러워진다. 

- 오사나이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휴대전화는 망가진 상태고 새 기기를 손에 넣을 수단이 없었다. 새 기기를 사려면 판매 대리점에 본인이 직접 가야 한다. 병원 침대에 도로를 달리는 기능이 있다면 얼마든지 찾아가겠지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는 않으니 당분간 연락수단은 전혀 없는 상태다. 

- 미야무로 선생님의 허가가 나와서 마부치 씨 재활 훈련 프로그램에 오른쪽 다리가 추가되었다. 그래봤자 일단은 오른쪽 무릎을 굽혔다 펴는 스트레칭부터다. 그렇게 약한 운동으로 괜찮은가 싶었는데, 이게 의외로 힘들었다.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을 알아차렸는지 마부치 씨는 다정하게 말해주었다.
"젊으니까 재활 훈련을 열심히 하면 분명 몸이 응해줄 거예요."
나는 그 말을 믿었다. 믿는 수밖에 없었다.

- ... 이윽고 병실에서 다들 나가고, 한차례 청소 작업을 끝으로 공허한 시간이 찾아왔다. 의식은 차츰 삼 년 전으로 돌아갔다.
나는 딱히 남과 금방 친해지는 타입이 아니다.
오히려 누구에게나 자연스레 벽을 치는 면이 있다.  후 알게 된 일이지만 그것은 오사나이도 마찬가지였다. 오사나이도 상대가 누구든 적당히 어울리기는 하지만, 진짜로 마음을 여는 일은 드물다.
그런데 삼 년 전, 그날 방과 후 도서실에서 우리는 훗날 생각하면 기묘하리만치 솔직하게 서로의 목적을 털어놓았다. 어째서 그랬는지 지금도 이유는 모른다. 


- 한라봉에 이어서 오늘의 봉봉 쇼콜라를 먹었다. 오늘 먹은 건 카리브산 카카오를 사용했다고 한다. 쌉쌀한 맛이 한라봉으로 달착지근해진 입안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나는 펜 뚜껑을 열었다.
오사나이는 그 자동차 운전자를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사건 당일, 범인은 자동차 브레이크를 힘껏 밟았지만 그럼에도 차를 세우지 못해 히사카를 치고 말았다. 오사나이는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뒤를 돌아보고 큰 사고가 났다고 생각해 히사카에게 달려가려 했다. 그때 자동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사고는 말이야.”
오사나이가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일어나는 법이야. 하지만 그 자동차 운전자는 자기가 친 상대를 보고도 전방을 향해 가속 페달을 밟았어. 거기에 내가 있다는 걸 알았을 거야. 확실해, 그 사람 선글라스 너머로 눈이 마주쳤는걸."
그런데도 히사카를 친 운전자는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지 않았다. 핸들을 틀어 오사나이를 피하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무사했던 건 스스로 제방에서 뛰어내렸기 때문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차에 치였어. 그 순간, 운전자는 자기를 지킬 수 있다면 나를 죽여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거야. 나... 무서웠어. 난 그 운전자가 누군지 알고 싶어. 알아내고, 그런 다음."
한 박자 쉬었다가 오사나이가 뒷말을 이었다.
"속죄하게 해야지."

 

- 오사나이는 범죄는 적발되어야 한다거나, 다른 피해자가 나오기 전에 범인을 막아야 한다거나, 히사카의 억울함을 풀어줘야 한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자기를 해치려 들고 공포를 안겨준 운전자가 받아 마땅한 보복, 치러야 할 대가만 이야기했다. 

- 나 역시 본성을 감추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해도 오사나이가 나를 경멸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 아니, 오히려 그런 걸로 경멸해도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했으리라.

- "나는 같은 반 히사카를 친 범인을 알아내고 싶어."

오사나이는 말없이 고갯짓으로 뒷말을 재촉했다.
"아마 나는 할 수 있을 거야. 어쩌면 경찰보다 빨리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 정말 그런지 시험해보고 싶고,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궁금해."
오사나이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살짝 입가를 누그러뜨렸다.
"반 친구의 복수가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만."
"여기서 내가 그건 허영심과 공명심 때문인 거라고 말한다면 어떻겠어?"
"내 이야기를 정확히 이해했다고 생각하겠지."

- 오사나이는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 난 혼자서 할 작정이었어. 하지만 혼자서 하는 데 한계도 느끼고 있었지. 너... 고바토는 어때?"
"혼자서 해야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다시 말해 마지막에 나를 제치면 된다고 생각하는구나."

나는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내심 조금 재미있어하고 있었다. 오사나이와 나 사이에 공통점을 느꼈던 것이다. 우리는 서로 닮은 꼴에 혐오감을 느낄 정도로 비슷하지는 않다. 하지만 같은 취향을 가졌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는... 아니, 그보다는 동병상련이라 할 만큼은 비슷한 구석이 있다.

- "서로 돕자."
그렇게 제안하자 오사나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바토가 나를 도와준다고? 내가 고바토를 도와줄 수 있을까?"
확실히 딱히 서로 돕는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정보를 공유하자?"
"그것보다는 조금 더 밀접한 느낌인데. 서로 이점을 나눠갖는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가령... 호혜 관계를 맺는다거나?"

오사나이가 미소를 지었다.
"이상한 어휘네."
"마음에 안 들어?"
"아니, 그 반대. 굉장히 마음에 들어. 그럼 고바토, 정식으로 말할게. 나하고 호혜 관계를 맺지 않겠어?"
"기꺼이."

- 악수를 나누었으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나눈 것은 서로를 어디까지 신용할 수 있는지 가늠하는 시선뿐이었다. 손에 든 책을 선반에 돌려놓고 제안했다.
"그럼 서로 아는 정보를 말해볼까?"
"장소를 옮기는 게 좋겠어."
확실히 도서실은 서서 이야기하기에 좋은 장소라고 할 수는 없다.

 

- "빈 교실이라도 찾을까?"
내가 그렇게 말하자 오사나이가 고개를 저었다.
"고바토. 돈 얼마나 있어?"
"... 셔틀?"
"차로 가야 하는 가게에는 안 가. 조용히 이야기할 수 있는 가게가 있어."
나는 동급생들끼리 음식점에 들어가 본 경험이 없었다. 기껏해야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본 정도다. 그래서 솔직히 오사나이의 제안에는 깜짝 놀랐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알았어. 그럼, 가자."
"응. 교문 밖에서 기다릴게."
남들 눈에 띄는 곳에서 둘이 함께 행동하면 필연적으로 귀찮은 억측을 부른다. 오사나이의 제안은 무척이나 타당했다.

- 오사나이가 먼저 도서실에서 나가고, 일 분쯤 간격을 두고 나도 뒤를 따랐다. 건물 현관에서 운동화로 갈아 신고 교문으로 향했다. 오늘도 날이 참 맑았다. 짙은 하늘색을 바탕으로 계절을 조금 앞서나간 듯한 뭉게구름이 피어올라 있었다. 
우리 중학교 교문은 문기둥이 벽돌로 되어 있고 교문 앞에는 이차선 도로가 있다. 길을 따라 가로수가 푸르른 잎을 잔뜩 드리웠고 여름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드문드문 문을 빠져나가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좌우를 살피고 무심코 중얼거렸다. 
"어라?"
방금 전 헤어진 오사나이가 보이지 않았다. 가방을 가지고 있었으니 돌아갈 채비는 마친 줄 알았는데.
놓쳤나 싶어 일단 학교 안으로 돌아왔다. 운동장에서는 육상부와 야구부가 동아리 활동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체육관에서는 검도부가 죽도를 휘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사나이는 지금 이 학교에서 겨울 교복을 입고 있는 단 한 사람으로, 그렇게 눈에 띄는 모습을 놓칠 리는 없다. 연락처를 교환할 걸 그랬다고 생각하며 다시 교문 밖으로 나갔다.  
가로수 그늘 밑에서 오사나이가 왜 못 찾느냐는 듯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없었는데, 아까는 분명 없었어. 그렇게 주장하고 싶은 나를 내버려 두고 오사나이는 발길을 돌려 걸어갔다. 조금 떨어져서 따라오라는 뜻이리라. 

- 오사나이는 이윽고 평범한 가정집으로만 보이는 주택/건물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조용히 이야기할 수 있는 가게가 있다더니, 자기 집 얘기였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오사나이가 닫은 문으로 다가가보니 벽에 아주 작게 '오모테다나'라고 적힌 간판이 걸려 있었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지만 다른 문은 없는 것 같았다.

- 미닫이문을 열자 드르륵 소리가 났다. 안에는 테이블이 세 개뿐인 작은 공간으로, 오사나이는 가게 제일 안쪽의 4인석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 맞은편에 앉았다. 역시나 테이블도 작았다.
앞치마를 두르고 동그란 안경을 쓴, 옆머리를 짧게 자른 남자가 물을 가져왔다.
"어서 오세요."
손님이 중학교 교복을 입고 있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메뉴를 정하시면 불러주세요"라고만 말하고 주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목소리를 낮추어 오사나이에게 물었다.
"신고당하지 않을까?"
"안 당해."
명쾌한 대답이다. 그렇다면 뭐, 신경 쓰지 말자.

- 메뉴를 보고 조금 놀랐다. 어느 음료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이삼십 퍼센트 저렴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평소 학교에 현금을 잔뜩 들고 다니지는 않으니 주문할 수 있는 메뉴는 한정적이었다.
"커피가 좋을까."
그렇게 말하자 오사나이가 조용히 말했다.
"밀크커피를 추천할게."
블랙커피는 아직 이르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을 어쩐지 오사나이도 눈치챈 듯했다.
"고바토가 블랙커피를 좋아해도 이 가게는 밀크커피가 추천 메뉴야."

 

- 뭔가 이유가 있어 보인다. 그렇게 생각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메뉴 끝에 "고향 목장에서 직접 가져온 우유를 사용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냥, 정말로 추천 메뉴인 모양이다.
"그렇구나. 그럼."
사실 어떤 음료든 상관없었기 때문에 순순히 조언을 받아들였다. 오사나이는 밀크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 주문한 메뉴가 금방 테이블에 나왔다. 오사나이의 소프트 아이스크림은 작고 동그란 그릇에 소복하게 담겨 있었다. 다른 토핑은 아무것도 없다. 너무 소박했다.
"그럼 슬슬..."
정보 공유를 시작하자고 말하려는데, 오사나이는 내 말은 듣지도 않고 소프트아이스크림에 스푼을 꽂았다. 뭐, 이야기하는 사이 녹아버리면 아까울지도 모른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며 밀크커피를 마셨다. 
확실히 맛있는 것 같지만, 엄청난 차이는 느끼지 못했다. 애초에 나는 그때까지 설탕을 안 넣은 커피를 마셔본 적이 없어서 뭐가 좋고 나쁜지 모른다. 그리고 오사나이는 소프트아이스크림을 입으로 가져가더니... 
어쩐지 한순간, 굉장히 방심한 표정을 지은 것 같았는데. 기분 탓일까? 오사나이는 엄숙한 의식이라도 치르는 것처럼 진지하게, 그리고 늦으면 말짱 헛일이라는 듯이 신속하게,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예의상 물어보았다.
"맛있어?"
대답은 없었다. 감상을 공유할 정도로 친하지는 않다는 뜻일까?

- 잠시 후 오사나이는 소프트아이스크림 그릇을 비우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릇에 맺혀 테이블로 떨어진 물방울을 손수건으로 닦더니 그 위에 가방에서 꺼낸 공책을 펼쳤다.
"자, 시작하자."
나는 아직 밀크커피를 3분의 1 정도밖에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커피는 천천히 마셔도 맛이 떨어지지 않겠지.  

 

- "내가 동그라미로 표시한 이 지점까지 길을 따라 달려가거나, 제방도로에서 떨어져 큰 사고를 내거나, 둘 중 하나뿐이야. 그리고 그런 사고는 없었어." 
말투는 조용하고 평온했다. 하지만 나는 오사나이의 말끝에 '그래도 내 관찰 결과를 믿지 못하겠다면 협조는 여기서 끝'이라는 뜻이 붙어 있음을 직감했다.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내가 졌어. 미안, 의심하는 게 아니야. 어제오늘 사이에 9킬로미터를 걸어서 확인했을 줄은 몰랐어. 눈으로 보고 확인했다면 틀림없겠지. 범인의 자동차는 이 동그라미를 통과했을 거야." 

- 후지데라는 굴러 떨어진 오사나이를 보고, 히사카의 상태를 확인한 뒤 측단을 살펴보았을 때 이미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아마 오사나이는 제방도로에서 뛰어내려 웅덩이의 흙탕물을 여름 교복에 뒤집어쓴 직후에 이미 범인의 자동차를 쫓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 다리로는 자동차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상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측단으로 다니면 안 된다는 학교의 주의사항도 무시하고, 자기 목숨을 위협한 자동차를 두 발로 어디까지고 쫓아간 것이다. 
인간이 걷는 속도는 대강 시속 4킬로미터다. 즉 9킬로미터 앞 T자 교차점까지 약 두 시간 동안 오사나이는 계속 걸었다.
어렴풋이 눈치는 챘지만 오사나이는 상당히... 그게 뭐랄까, 정상이 아니다.

- 오사나이는 알면 됐다는 듯이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빨간 펜을 집었다.
"그리고 이 교차점에는 편의점이 있어. 세븐일레븐... 패밀리마트였을지도... 아니면 로손... 어쨌거나 '나나쓰야마치 점'이."
오사나이가 지도에 "편의점!"이라고 기입했다.
겨우 이야기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내가 이해한 내용이 맞는지 자신이 없었다. 그런 일이 가능한지 의심하면서 물었다.
"그렇다면 범인의 자동차는 그 편의점 앞을 반드시 지나야겠네."
"응."

- "녹화 영상에 범인의 자동차가 남아 있을지도 몰라. 거기까지는 알아. 하지만 난 찾아야 할 자동차의 특징을 몰랐어. 어설프다고 하지 마. 사고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더니 갑자기 차에 치일 뻔했으니까. 파란 차였다는 것밖에 몰랐어. ... 하지만 내가 찾는 차가 박스형 경차라는 걸 고바토 네가 알려주었어."
오사나이는 행복한 얼굴로 웃었다.
"고마워. 나, 기뻐."
그거 다행이다.

- 다만 편의점 방범 카메라에 범인이 찍혔을 거라는 예상은 할 수 있어도, 그것만으로는 기뻐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약간 정상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객관적으로는 한낱 중학생일 뿐인 우리는 방범 카메라 데이터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애석하게도 나는 어두운 방에서 '좋아, 착하지' 하고 중얼거리며 키보드만 두드려 전 세계의 데이터를 가져올 수 있는 슈퍼 해커가 아니다. 그렇다면 혹시 오사나이가 슈퍼 해커일까? 
"그래서 데이터는 어떻게 입수할 거야?"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쌀쌀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 편의점 집 아이하고 아는 사이야. 데이터를 보여달라고 부탁해 봐야지."
생각했던 것보다 원시적인 방법이었다. 그만큼 오히려 성공을 향한 길이 뚜렷이 보였다.  


- "뭐?"
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오사나이는 굳이 캐묻지 않고 다시 앞을 보았다.
하늘색 경차가 정비소에 들어갔다면 경찰이 찾아내지 못했을 리 없다. 사고 직후 시내의 모든 정비소에 범인의 자동차 특징을 알리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아직 범인이 체포되지 않았다는 건 자동차가 정비소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확실한 증거가 아닐까? 
물론 그래도 확인해 볼 가치는 있다. 내가 정비소에 전화해서 '죄송하지만 저는 한낱 중학생인데, 최근 하늘색 경차를 수리하지 않았나요?'라고 물어봐도 대답해 준다면 말이지만. 중학생이라. 
오사나이에게는 각오와 행동력이 있다. 나에게는 아마도 관찰력과 혜안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중학생이다. 결국 그 점이 우리의 추리와 수사에 치명적인 마이너스 요소가 되지 않을까? 
"... 이제 와서 뭘."
이번에는 오사나이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그렇다. 이제 와서. 나를 제외한 반 아이들은 그 사실을 이미 알고 물러났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이든 진실을 밝혀내려고, 아니, 오히려 진실을 찾아냄으로써 내가 어떤 사람인지 증명하려는 생각으로 지금 이렇게 자전거를 타고 달리고 있다. 중학생이니까 불가능한 일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고등학생은 고등학생이니까, 대학생은 대학생이니까, 어른은 어른이니까 불가능한 일이 있을 게 뻔하다.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면 될 일 아닐까?
페달을 밟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내가 속도를 낸 것을 어떻게 감지했는지 앞에서 달리는 오사나이도 속도를 높였다.

- "뭐, 뭐야?"
"이사와가..."
오사나이의 말을 끊듯이 아소야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알았어! 알겠다고!"
그리고 지금 자기가 낸 큰 소리를 지우듯 손을 젓더니 가게 안으로 통하는 문을 보았다. 몇 초가 지나도 아무도 오지 않자 아소야는 한숨을 쉬고 모니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정말 비겁해. 그건 내 잘못이 아니라고. 남자까지 데려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섭단 말이야. 내가 뭘 했다고 그래? 애초에 이런 걸 뭐에 쓰려고? 최악이야. 정말 최악이야, 오사나이. ... 그래서, 파일은 어디에 옮기면 돼?"
검은 가방 속에서 오사나이가 뭔가 작은 물체를 꺼냈다. 내 쪽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저장 장치리라. 아소야는 한동안 노트북을 조작하더니 얼마 후 그 저장 장치 같은 물체를 오사나이에게 건넸다. 
"자. 말 안 해도 알겠지만 내가 줬다는 건 비밀이야."
"물론, 네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아소야는 용건이 끝났으면 냉큼 돌아가라는 듯이 손을 흔들었고, 우리는 들어온 문을 지나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아소야도 사무실에 오래 있을 수 없는 건 마찬가지라 결국 셋이서 나란히 복도로 나오게 되었다. 

- 맨션을 빙 돌아서 자전거를 세워둔 편의점 앞까지 돌아왔다. 오사나이는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했다.
"8시 반. 금방 끝났네."
나는 일단 내 생각을 말하기로 했다.
"오사나이."
"왜?"
"너는 네 뒤에서 잠자코 서 있을 남자가 필요했던 거구나. 아소야를 압박하려고. 그건 누구라도 상관없었어."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으며 오사나이가 끄덕였다.

"응."
전혀 부정하지 않는구나. 이어서 오사나이가 물었다.

"불만스러워?"
"전혀."
"나, 정말 기뻤어.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말을 듣고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은 어쩌면 처음 만나보는 것 같아."
“의도를 눈치챘으니까."

- 무슨 은어인 줄 알았는데, 아마 단순히 초콜릿을 먹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는 자전거에 올라타 페달을 밟았다. 편의점을 돌아보지는 않았다.

- 환자식은 의외로 맛있다.
저녁 식사 메인 반찬은 돼지고기 감자조림이었다. 된장국의 재료는 무와 유부였다. 식사를 끝내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짧은 머리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왔다. 물컵에 3분의 1 정도 남아 있는 물을 보더니 간호사는 말귀를 못 알아듣는 아이를 타이르듯 말했다.
"물은 전부 마셔야 해요."
그리고 물을 마셨는지가 치료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도 되는 것처럼 내가 물을 다 마시는지 뚫어져라 지켜보았다.

-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양치질을 하는 사이 졸음이 몰려왔다. 입원한 후로 정말 잘 자고 있다. 부상당한 몸이 그만큼 수면을 원하는 걸까? 이렇게 빨리 자는 버릇이 들면 퇴원한 다음이 걱정이다. 조금은 깨어 있을 작정이었는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커튼 너머 창밖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저녁노을인가 했는데 방향이 달랐다. 아침노을이다.

- 삼 년 전, 우리는 히사카를 친 자동차가 틀림없이 찍혀 있을 녹화 데이터를 손에 넣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일이 너무 술술 풀려서 조금 불만스러웠던 것 같다. 오사나이의 행동력과 인맥으로 조사가 진행되면 내가 활약할 차례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 후에 흐름이 바뀌었다.

- 나 자신의 실패를 더 이상 떠올릴 필요가 있을까? 이런 기억을 더듬어봤자 히사카의 안위를 알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자해하는 꼴이나 다름없다. 지난 기억을 파헤치는 짓은 이제 그만두는 게 좋지 않을까? 
... 다리가 아팠다. 진통제 효과가 떨어졌는지도 모른다. 나는 문득 향기를 느꼈다. 꽃향기다. 고개를 돌리자 협탁 위에 꽃이 담긴 꽃병이 있었다. 어제는 없었는데.
수술 부위에 부담이 가지 않도록 몸을 틀어서 꽃병을 만져보았다. 살짝 흔들어보니 물소리가 났다. 꽃은 전부 빨간 장미였다. 그 붉은색이 내게는 정열의 상징이 아니라 분노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꽃병을 끌어당겨 손에 쥐었다. 장미 향기를 가슴 깊이 빨아들였다.
꽃 속에 메시지 카드가 들어 있었다. 아침노을에 비추어 읽어보았다.
[그 차는 안 찍혀 있었어. 뭔가 크게 잘못됐어.

오사나이]


- ... 나는 삼 년 전으로 돌아간 걸까? 그렇다면 사과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다시 의식이 흐려졌다. 잠깐만 깨어 있어도 다시 깊이 잠이 든다. 어제처럼.

- 편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통증이나 피로도 견딜 만한 수준이다. 오히려 하루 종일 누워 있을 수밖에 없는 입원생활에서 유일하게 몸을 움직이는 이 시간이 즐거울 정도다. 
마부치 씨는 커다란 몸집에 비례해 손가락도 굵은데, 재활훈련 지도와 보조는 대단히 섬세했다. 지시에 따라 관절을 움직이면 과할 정도로 칭찬해 준다.
"좋아, 아주 좋아요. 그만큼 움직이면 문제없이 걸을 수 있을 거예요. 완치가 기대되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미야무로 선생님은 전치 육 개월이라고 했다. 그때까지는 계속 이렇게 재활 훈련을 하면서 누워 지내야 하는 걸까?

- 마부치 씨의 오른쪽 손등에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의외로 큼직한 정사각형 반창고로, 어제까지는 없었다. 지시에 따라 다리를 움직이면서 깊은 뜻 없이 물어보았다.
"손을 다쳤나요?"
마부치 씨는 민망한 듯 웃더니 왼손으로 반창고를 가렸다.
"아아, 조금. 고양이가 할퀴어서."
문득 내가 묻기도 전에 마부치 씨가 이유를 대답한 것과, 고양이가 할퀸 것치고 반창고가 너무 크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그만뒀어야 하는데 괜한 소리를 했다.
"혹시 두 발로 다니는 고양이인가요?"
마부치 씨가 침묵했다. 나는 침대에서 벗어나지도 못하는 처지고, 마부치 씨는 레슬러처럼 덩치가 크다. 그런 상황에서 침묵은 특히 거북했다.
하지만 마부치 씨는 바로 방금 전과 같은 쾌활함을 되찾았다.
"고양이야."
그리고 우리는 묵묵히 재활 훈련에 힘썼다. 이윽고 하루치 운동이 끝나자 마부치 씨는 몸조리 잘하라는 말을 남기고 병실에서 나갔다.

- "저기서 네 단어장을 주웠어."
"고마워."
"그런데 지금까지 묻지 않았는데, 다치지는 않았어?"
오사나이는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 너도 묻지 않았고, 나도 말하지 않았어. 너무하네."
너무한 건 나일까, 오사나이일까? 아마 둘 다일 것이다.

"굴러 떨어져서 아팠지만 다쳤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어."
"그건 다행이다."

 

- ... 라고 말해주었다면 이렇게 먼 길을 돌아갈 필요도 없었다. 어째서 나는 추론으로만 사실에 도달할 수 있었는지, 거기에 큰 수수께끼가 있다.
오사나이가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 말하기 좀 그렇지만, 그건 이상하지 않아."
나는 오사나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오사나이는 그 시선을 피하듯 엉뚱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가 순간 멎은 것 같았다. 나는 물어보았다. 
"어째서?"
"아까 측단에서 히사카와 후지데라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말해줬지? 그때 이상하다 싶었어."
말없이 뒷말을 재촉했다.
마음을 써주는 건지, 오사나이의 목소리가 작았다.
"그 애들, 고바토가 묻는 말에 다른 대답을 했어."
"어?"
"히사카한테 평소 그 길로 하교하는지 물었더니 자기가 차에 치인 게 그렇게 재미있냐고 했지. 결국 질문에는 대답해주지 않은 거야."
기억을 더듬었다. 기라 시민 병원 403호 병실에서, 히사카와 무슨 대화를 했는지.

 

- 그리고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사실이다. 분명 대답을 듣지 못했다.

- "후지데라의 경우는 더 노골적이야. 히사카가 혼자 있었냐고 확인했더니 히사카와 후지데라 사이에 여학생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지. 히사카가 어째서 거기에 있었고, 누구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고바토에게 말해주지 않은 거야."
현기증마저 느꼈다.
말도 안 돼. 그런... 그런 일이 있을 리 없다. 내가... 뺑소니 사건을 해결할 이 몸이, 피해자와 목격자에게 속은 데다가 심지어 속은 줄도 모르고 있었다니!

- 간신히 말을 이었다.
"그건 이상해. 그 말대로라면 히사카와 후지데라가 입을 맞췄다는 뜻이 돼. 히사카와 후지데라는 우연히 같은 길을 걸었을 뿐인데."
"저기, 확인해 봤어?"

... 안 했다.
오사나이는 말하기 거북한 투로, 하지만 똑똑하게 말했다.

"하는 게 좋았을 거야. 고바토가 해준 얘기에서 후지데라는 자연스럽게 '히사카 선배'라고 불렀어."
상급생을 언급하는 것이니 선배라고 부르는 건 이상하지 않 ...

- 단순한 피해자인 줄 알았던 히사카와 단순한 목격자인 줄 알았던 후지데라 사이에는 연결 고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결탁하고, 공모해서, 어떤 사실을 숨기고 있다. 숨긴다는 것은 숨기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다.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지금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었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이제 풀기만 하면 된다!

- 새벽에 잠에서 깼다. 병실은 조용했다.
내가 무슨 기억을 떠올렸는지 생각나서 크게 숨을 들이마시자, 대번에 부러진 갈비뼈가 아파서 신음했다. 삼켜버린 숨을 조금씩 토해내고 간호사를 부를 정도의 통증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뒤에 조금 웃었다. 언제쯤에야 이 다친 몸에 익숙해질까? 

- 옛날에 도지마 겐고는 내게 너는 소시민이 아니라고 했다. 오사나이는 소시민이 되겠다는 내 말조차 거짓말이라고 했다. 그 꾸지람은 분명 옳다. 나는 쓸데없는 두뇌 놀음과 참견을 멈출 수 없고, 솔직히 진심으로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꿈이 속삭인 '죗값'이라는 말은 이 고약한 성격이 초래한 죗값을 뜻하는 게 아닐까? 

- 더 솔직히 털어놓자면 나는 내가 자부하는 만큼 현명하지도 않다. 적어도 과거의 나는 그랬다. 침대 옆에는 내 어리석음을 기록한 공책이 있다. 그 공책조차 쳐다볼 수가 없어, 나는 엉뚱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히사카와 후지데라가 내게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내가 속았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을 리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든다. 당사자인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일을 제삼자인 오사나이가 알아차리는 건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니다.
... 그보다 더 어리석은 점은 따로 있다.
히사카가 들키기 싫어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내면 모든 수수께끼를 풀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나의 (나는 내 책임이 무겁다고 생각하지만 공평하게 말한다면 나와 오사나이의) 조사는 내가 예감했던 대로 그날을 경계로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히사카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이 세상에 없다니,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다. 두 번 다시 만날 일은 없어도 우리는 각자 계속 살아갈 줄 알았는데.

- 커튼 밑으로 새벽빛이 비쳐 들었다. 나는 이 침대 위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금이 간 갈비뼈와 부러진 넓적다리가 아파서 고함을 지를 수도 없다. 
의식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오사나이는 어쩌고 있을까? 보아하니 방범 카메라를 조사한 모양이지만 그런 것보다 입시에 전념해 주면 좋겠다. 그리고 한 번이라도 좋으니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메시지는 받았지만, 나는 아직 오사나이를 만나지 못했다. 언제나 내가 잠들어버린다. 
단순히 타이밍이 맞지 않는 건지, 아니면 내가 감싼 것에 미안함을 느낀 오사나이가 매일 내가 잠든 틈을 노려 문병 선물을 두고 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역시 가능하다면 얼굴을 보고 싶다. 내가 떠민 탓에 다치지는 않았는지 본인 입으로 답을 듣고 싶다. 

- 오늘은 선물이 없었다. 테이블 위에는 변함없이 늑대 인형이 매서운 눈초리로 앉아 있다. 겐고가 가져온 과일 바구니는 나 혼자서는 도저히 다 먹을 수가 없어 속옷을 가져다준 부모님에게 주었다. 
어젯밤 오사나이는 오지 않은 모양이다. 연말도 다가오고 있으니 매일 선물을 두고 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크리스마스 아침에 믿지도 않는 산타클로스의 선물을 찾는 아이처럼 나는 베개 밑을 더듬었다. 
손가락이 딱딱한 물체에 닿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오늘도 어느 틈엔가 메시지 카드가 놓여 있었다. 대체 오사나이는 내 빈틈을 얼마나 오랫동안 살피고 있었던 걸까? 

- 메시지는 짤막했다.
[어째서 우리 못 만나는 걸까?]

 

- 마치 장거리 커플의 연애편지 같다.
물론 우리는 연애와 아무 상관이 없다. 어둑한 병실에서 나는 오사나이의 질문을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던졌다.

  


 

 

- 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이 간호사에게 의존하고 있다. 빨리 낫고 싶다.
수저를 들고 천천히 식사를 마쳤다. 물도 시키는 대로 다 마셨다. 몇 분 뒤 같은 간호사가 돌아와서 식판을 치워주었다. 나는 다섯 알 남은 봉봉 쇼콜라 중에서 한 알을 골라 입안에 넣었다. 오늘 먹은 봉봉의 맛은 플레인 초콜릿이지만 식감이 특이했다. 뭔가 아삭아삭 기분 좋게 씹히는 얇은 알갱이가 초콜릿 속에 들었다. 설명서를 읽어보니 '푀이양틴 feuillantine'이라는 게 들어 있다는 것 같았다. 그게 대체 뭔지, 오사나이라면 설명해 줄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나에겐 이 재미있는 식감만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초콜릿의 달콤함은 영원하지 않고 식감 또한 마찬가지다. 이윽고 둘 다 아련하게 사라지고, 나는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 나는 경험으로 입원에 대한 깨달음을 하나 얻었다.
입원 첫날은 목숨을 건지면 그걸로 다행이다. 둘째 날은 온갖 검사를 받고, 그 결과가 나쁘지 않기를 기도한다. 셋째 날에는 언제 퇴원할 수 있을지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넷째 날부터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이 상태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불안 섞인 무료함이 덮쳐온다.
그 무료함을 그저 참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나는 눈을 감고 다시 과거의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나마 공책과 펜이라도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 9킬로미터의 제방도로 검증을 마치고 사건 당일 히사카가 서 있던 위치에 대한 중대한 의혹을 알아낸 뒤, 우리는 학교에 두고 온 오사나이의 노트북을 가지러 가까운 버스 정류장에서 학교로 돌아갔다.

탑승한 버스 안에서 우리는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나는 사건의 새로운 국면에 어떻게 임해야 할지 몇 가지 시뮬레이션을 거듭하고 있었다. 오사나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모른다. 어쨌거나 대중교통 안은 대화하기에 그리 적합한 장소는 아니었다. 
학교 근처를 지나는 버스가 아니라서 우리는 적당한 정류장에서 또 십오 분쯤 걸었다. 중간에 달콤한 냄새가 풍겨오는 것 같아 주위를 살펴보니 차도 건너편에 '오구라 암자'라는 가게가 있었다. 간판에는 '가지야마치 점'이라는 작은 글씨도 적혀 있었다.  

- "딱히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어. 나도 그 녀석도 배드민턴은 처음이었는데, 나는 다른 동아리라도 별로 상관없었고 아마 그 녀석도 그렇지 않았을까? 다만 집에 라켓이 있어서 아까우니 사용해보고 싶었다고 했어."
"동아리에 들어가면 새 라켓을 사는 줄 알았는데."
"맞아. 그래서 뭐, 그 녀석은 집에 있던 라켓은 쓰지 않았지. 집에서 연습할 때는 썼을지도 모르지만."
우시오는 살짝 웃었지만 그 웃음은 곧 사라졌다.
"동아리에 들어가 한 달쯤 기초 연습을 하고, 처음으로 연습 시합을 했을 때는 내가 이겼어. 둘 다 초보였지만 그 녀석은 몸집만 크고 둔했으니까. 나중에 물어봤더니 그 녀석, 운동 자체가 처음이었다는 거야. 나는 초등학교 때 수영 클럽에 다녔으니 처음에는 내가 유리했어. 뭐, 내가 히사카에게 이길 수 있었던 건 반년 정도였을까." 
우시오가 컵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히사카가 어떤 녀석인지 알고 싶다고 했지. 그 녀석은 뭐랄까, 어, 그러니까, 금욕적이야. 이렇게 표현하는 게 맞나? 어쨌거나 기초 연습도 체력 단련도, 말없이 계속하는 거야. 힘들거나 귀찮다는 생각 자체가 없는 것처럼. 말수는 적었지만 묵묵히 연습하는 것만으로 다들 그 녀석을 존경했어."

- "... 아니, 하지만 원래 말수가 적었던 건 아니네. 1학년 때는 지금보다 잘 웃었던 것 같아. 나불나불 떠드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과묵한 것도 아니었어." 
지금 생각해 보면 중학교 1학년이면 거의 초등학생이나 마찬가지다. 3학년이 되는 사이에 성격이 변한 경우는 드물지 않은 일이리라. 그래도 일단 물어보았다.
"변한 계기가 있었을까?"
우시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계기랄까... 2학년 가을 대회가 끝났을 즈음부터 조금 예민해졌어. 3학년이 은퇴하고 첫 대회였고, 앞으로는 우리가 후배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걸 통감한 게 아닐까? 사실 내가 그랬고. 그 후로는 그 녀석, 전보다 더 말없이 연습하는 일이 늘었던 것 같아. 그다음부터는 엄청났어. 원래 시내에서도 유망한 선수였는데, 봄에 열린 대회에서는 지역 최강도 넘볼 정도였어. 여름 대회를 목표로 의욕을 불태우고 있었어. 자기 마지막 대회라고 했지." 
"아아, 그런 얘기는 하는구나."
"야. 연습 집중력이 굉장하다고 해서 늘 입을 다물고 사는 건 아니잖아?"

- "그 녀석이 감추었다면 그럴 사정이 있겠지."
"그럴지도 몰라."
나는 우시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대로는 히사카를 친 범인을 알아낼 수 없어. 그렇게 되면 히사카는... 히사카의 가족은 배상금도 받을 수 없어. 치료비는 전부 가족이 부담해야 하고, 히사카는 대회에 나가지 못하는 억울함도, 특별 전형을 치르지 못하는 것도, 돈으로조차 배상받지 못하는 거야."
지금까지 말로 하지 않았던 생각은 우시오에게 어느 정도 전달되었다. 우시오는 그래도 망설였지만 마침내 이렇게 중얼거렸다.
"결국 내가 시작한 일이지."

- "사실은 봄 대회 때 조금 이상한 일이 있었어."
점원이 뭔가 멋진 디저트가 담긴 쟁반을 들고 오사나이의 테이블로 다가갔다. 힐끔 본 바로는, 딸기와 체리가 얹혔고 생크림이 높게 솟아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브릴리언트 선디입니다."
나는 보았다. 점원이 떠나자 오사나이가 두 손을 살짝 들며 만세를 부른 것을. 괜히 반응했다가는 우시오가 내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고 오사나이의 존재를 알아차릴 것 같아 억지로 무표정을 유지했다.
아무래도 우시오는 내 표정을 진지함의 증거로 받아들인 듯했다.

- "뭐, 별일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단서를 달고 말했다.
"히사카는 테니스 가방에 부적을 달고 다녔어."
"... 일단 묻겠는데, 배드민턴 가방이 아니라?"
"테니스 가방이라는 이름으로 팔고 있고, 동아리에서도 다들 그렇게 불러."
그런가 보다.
큰 대회를 앞둔 유망한 선수가 소지품에 부적을 달고 있었다. 그것뿐이라면 이상한 점은 전혀 없다. 뒷이야기를 기다렸다.
우시오가 말했다.
"히사카는 말이야, 미신을 믿지 않아. 수학여행으로 교토에 갔잖아? 다른 녀석들이 선물로 부적을 사는데 그 녀석은 그런 건 믿지 않는다고 했어. 그런 히사카가 부적이라니, 어울리지 않아."
"여자친구라는 오카하시가 준 게 아닐까?"
"나도 그런 줄 알았어. 아니, 오카하시가 선물한 거라고 믿고 있었어."
보아하니 아무래도 이제부터가 본론인 것 같았다. 우시오는 테이블에 한 팔을 얹더니 살짝 몸을 내밀었다.
"우리 동아리에서는 테니스 가방을 부실에 두고 다녀도 되고 집에 가져가도 상관없어. 뭐, 1학년은 가지고 돌아가야 하지만."
"왜?"
"부실이 좁아서 둘 자리가 없으니까."
실로 합당한 이유다.
"히사카는 가방을 부실에 두고 다녔고 부적은 그 가방 손잡이에 달려 있었어. ... 그런데 지난 봄 대회에 갈 때, 그 녀석은 그 부적을 뗐어."
우시오는 거기서 말을 끊었다. 이야기의 내용이 내게 스며들기를 기다리듯이.

- 일단 확인해 보았다.
"평소 동아리 활동에서도 가방이 필요해? 부실은 남녀가 따로 써? 그리고 가방에 부적을 달고 다니는 건 규칙 위반은 ... "

- 우시오에게 말해줘야 할까?
진동음이 들렸다. 내 휴대전화다. 우시오에게 잠깐 실례한다고 말하고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오사나이가 보낸 메시지였다.
[어디 부적?]
나는 순간 얼어붙었다. 우시오가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가족 일로. 그것보다."
이 질문에는 대답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면서도 물어보기는 했다.
"그 부적이 어디 거였는지 알아?"
"어디냐니..."
"왜, 신사든가 절이든가."
칼피스로 뻗던 손을 멈추고 우시오가 나를 쳐다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다. 모르면 됐어, 보통은 모르겠지. 그렇게 말하려는데 우시오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뜻밖이네! 고바토, 너 그런 걸 신경 쓰는 녀석이었냐? 몰랐어."
"아아, 아니, 그게."
"히사카가 보여줘서 알아. 이세신궁 부적이었어. 영험함에 우열을 따질 수는 없지만, 뭐, 일본 최고지."
"그런가. 그랬구나."
갑작스러운 호들갑에 기가 눌렸다. 내가 호응하지 않아서 그런지 우시오의 웃음에 섭섭한 그늘이 졌다.
"뭐, 그런 거야. ... 그래서 뭔가 알 것 같아?"
몇 가지 짐작 가는 바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우시오에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아무것도 없다.

- 우시오는 딱히 실망한 기색도 없이 칼피스를 다 마셨다. 내 우롱차는 아직 절반 정도 남아 있다.
"... 사실은 부탁이 하나 있어."
그렇게 입을 열자 용건이 다 끝난 줄 알고 있던 우시오가 조금 귀찮다는 듯이 눈썹을 찌푸렸다.
"뭔데?"
나는 두 손으로 컵을 감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히사카는 사고 목격자를 감추고 있어."

"그 얘기는 들었어."

- 우시오가 끙끙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실 것 좀 가져올게."
그것이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한 행동이라는 건 명백했다. 나는 우시오를 따라가지 않았다. 계속 부추기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만 강요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 또 칼피스를 가지고 돌아온 우시오는 테이블에 컵을 내려놓고 털썩 앉았다.
"알았어. 그 녀석한테는 말해둘게. 월요일에 이야기하라고 하면 돼? 나도 함께 있는 게 나으면 그렇게 할게."

"같이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니까 네가 편한 대로 해. 이야기는 월요일이 아니라 내일 듣고 싶은데, 사실은 오늘 당장 듣고 싶지만 벌써 저녁이니까. 내일 오전에 어디서 만날 수 없는지 물어봐주면 좋겠어. 마땅한 장소가 없으면 이 가게에서 만날게."
우시오는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진심이구나."
"진심이야."
"알겠어. 말해보고 나중에 연락할게."

- 히사카가 세상을 떠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그렇다면 내 짐작 말고도 히사카가 살아 있다고 생각할 근거가 있을까?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문득 떠올랐다.
우시오는 히사카와 친했다. 삼 년 동안 같은 동아리였고, 본인도 자신이 히사카의 친구라고 했다. 그리고 나와 우시오의 관계는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만약 히사카가 정말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면 우시오는 그 사실을 알았을 테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게도 알려주었을 것이다... 장례식 일정도 함께.
그런데 나는 그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 소문조차 듣지 못했다. 그러니 히사카는 살아 있다. 이것은 이미 절대적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의심할 여지가 없다.

- 다만.
나는 새벽녘 거리를 바라보며, 굳이 모색하지 않아도 될 가능성을 생각했다.
히사카의 죽음을 우시오도 전달받지 못했다면, 다시 말해 가족들이 주위에 숨겼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다만 죽음을 그토록... 고인의 친구에게도 숨기는 경우가 있을까?

 

- 있을지도 모른다. 
히사카가 정말로 십 대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남은 가족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 마음 때문에 히사카의 죽음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장례식도 가족들끼리만 치렀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 다만 한 가지 확실한 의문점이 있다. 만약 히사카의 가족이 그 정도로 감추었다면, 히사카의 라이벌 선수였던 미카사 선배는 그 사실을 알 길이 없다. 이것은 모순이다.
그러니까 아마도... 아니, 확실하게, 거의 확실하게 히사카는 살아 있다.

- 창가는 추웠다. 나는 다시 몸을 틀어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머리맡에 작은 상자가 놓여 있다. 하얀 직사각형 상자다. 나는 살짝 웃었다. 그렇다, 오사나이가 숙제를 내줬지...
상자를 여니 안에는 반으로 접힌 메시지 카드만 들어 있었다. 카드를 집어든 나는 숨이 턱 멎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최근 삼 년 동안현 배드민턴 대회에 히사카 쇼타로라는 선수는 한 번도 출전하지 않았어.]

- 나는 처음으로 어쩌면 이 간호사가 베테랑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몇 번이나 경험해 봤다고 보기에는 너무 긴장한 상태였고, 그 긴장감이 환자에게 전달되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닐 듯하다. 이 간호사는 겉으로 보아 이십 대 초반이다. 이제부터 경험을 쌓아가겠지.
바퀴가 제대로 고정되지 않았는지, 내가 앉으려는 순간 휠체어가 살짝 뒤로 밀렸다.
의자에 앉으려고 몸을 숙이는데 의자를 휙 빼면 누구나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뒤로 넘어진다. 소리 없는 비명이 목구멍 안에 맺혔다. 심박수가 치솟았다. 순간적인 공포로 따지면 차에 치였을 때보다 무서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 휠체어가 움직인 것은 아주 조금이었다. 간호사가 손잡이를 잡아 휠체어가 멈췄고, 나는 무사히 의자에 앉았다.
심장이 벌렁거리는 가운데 간호사를 돌아보았다. 휠체어가 움직인 것은 이 사람이 바퀴를 제대로 고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손잡이를 잡아 나를 구해준 것도 이 사람이다. 역시 인사는 해야겠지.
"고맙습니다."
간호사는 바로 지금 사고가 날 뻔한 것을 눈치채지도 못한 ... 

- 몇 가지 감정이 찾아왔다. 비밀을 간파해 상대를 몰아세운다니, 제법 재미있는 일이다. 맛을 들일 것 같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번만은 조금 불쌍하기도 했다. 후지데라는 스스로 원해서 정보를 숨긴 게 아니라 히사카에게 부탁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울상을 짓게 하고 말았다. 지침에 추가해 두자, 거짓말이나 비밀을 폭로할 때는 조금 더 배려할 것.
고개를 푹 숙인 후지데라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숨겨서 죄송했어요."
괴롭힐 마음은 없다. 나는 화해를 제안했다.
"히사카가 그러라고 했지? 그럼 어쩔 수 없지."
"저, 제가 말했다는 건 히사카 선배가 모르게 해 주세요."

"당연하지."
그렇게 약속하자 후지데라가 눈에 띄게 안심하더니 종이컵에 꽂힌 빨대에 입을 댔다. 내용물은 보아하니 오렌지주스 같았다.

-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너 말이야. 히사카가 혼자가 아니었다는 거, 혹시 경찰에도 말하지 않았어?"
후지데라는 돌덩어리라도 삼킨 표정으로 겨우 대답했다.

"그야, 묻지 않았으니까요."

- 그 가능성은 자명한 사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히려 에둘러 표현하니 순간 무슨 이야기인지 몰랐다.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으려니 오사나이가 주의를 주었다.
"표현이 좋지 않아."
후지데라는 새빨간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어제 자율 연습에 후지데라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자율 연습에 오지 않은 건 오카하시와 마주치는 게 불편해서였구나."
후지데라는 역시나 새빨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나는 지금까지 중학교 생활에서 몇 가지 수수께끼를 남들보다 먼저 풀었다. 이번 뺑소니 사건에서는 몇 가지 실수도 저질렀지만, 그것으로 지금까지 쌓은 영광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경험에 비추어볼 때, 연애가 더해지면 풀어야 할 수수께끼는 이따금 문제의 순수성을 잃고 만다. 인간의 변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그 어떠한 상식을 벗어난 기묘한 행동도, 이득이라고는 없는 어리석은 행동도 '사랑 때문에'라는 말로 정리되어버리기도 한다. 이번에도 차에 치여 쓰러진 히사카를 남겨두고 자전거를 타고 떠난 수수께끼의 여학생의 행동은 역시 조금 이상하지만, 연애를 하는 사람 특유의 기묘 ...

 
- 후지데라는 교복수에 지레 겁을 먹었다.
"이걸 전부 봐요...?"
"안 봐도 돼. '동행인'이 입고 있던 교복만 찾으면 돼. 그럼 부탁할게."
그렇게 말하고 나는 오사나이와 함께 계단 양옆에 섰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마치 후지데라가 달아나지 못하도록 퇴로를 막는 꼴이었다. 후지데라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교복을 하나하나 관찰하기 시작했다. 오사나이와 나는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 후지데라를 눈으로 좇으며 내가 입을 열었다.
"오사나이."
"왜?"
"대답하기 싫으면 대답 안 해도 되는데."
오사나이 역시 후지데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럼 아마 대답 안 할 텐데, 왜?"
"그날, 오사나이는 계단으로 제방도로로 올라갔지. 그리고 상류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어."
"응."
그때 제방도로에는 히사카, 수수께끼의 동행인, 후지데라가 있었다. 후지데라가 그 길을 지난 이유는 들었다. 히사카가 그 길에 있었던 이유는 묻지 않았지만 학교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걸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마 단순히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오사나이는 제방으로 올라와 학교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아직 그 이유를 듣지 못했다.

 

- "어디에서, 어디로 가고 있었던 거야?"
오사나이가 나를 힐끔 보았다.
"우리는 뺑소니범을 찾고 있어. 고바토는 허영심을 위해, 나는 복수를 위해. 장담하건대 그날 내 행동은 사건과 아무 상관없어. 그러니까, 비밀이야."
"믿고 싶지만."
"고바토는 수수께끼를 풀고 싶지? 풀어서, 내 손에 걸리면 식은 죽 먹기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수수께끼를 풀고 싶은 거지, 정보를 알고 싶은 타입은 아닐 텐데?"
그것은 흠잡을 데 없이 정확한 인식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단순한 흥미로 묻는 게 아니다.

 

- "일단 가능성일 뿐인데... 뺑소니범이 정말 단순히 사고로 히사카를 친 건지 모르겠어."
"의도적으로 쳤다는 거야? 박스카는 히사카를 치지 않으려고 브레이크를 밟았잖아."
"하지만 쳤지."
"그건 그저 결과야."
"히사카 때는 분명 브레이크를 밟았어. 하지만 그 후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돌진한 상대가 있어."
오사나이다. 어쩌면 범인의 진짜 표적은 오사나이였던 게 아닐까?

- 오사나이가 앞을 바라본 채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 아직 성과는 없지만 고바토는 나를 도와줬어. 내 말을 믿어줬어. 그러니까 말해줄게."
나는 오사나이를 보았다. 비밀이 있었단 말인가!
오사나이가 속삭이듯 말했다.
"나, 그 사고가 일어나는 순간에 죽는 줄 알았어. 무서웠어, 떨릴 정도로. 있지, 고바토, 죽을 뻔한 사람에게 그건 사고가 아니라 살의가 깃든 행동의 결과일지도 모른다고 암시하는 건 하나도 재미없는 농담이야."
농담으로 한 말이 아니라고 말할 뻔했다. 하지만 나는 간신히 그 말을 삼켰다. 오사나이는 지금이라면 농담으로 눈감아주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 조금 뜸을 두고 오사나이가 말을 이었다.
"아무에게도 해코지당할 이유가 없다고 말하지는 않겠어. 살해당할 뻔할 정도로 원망을 샀다고 생각하기는 싫지만 어디서 원망을 샀을지 알 수 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때 내가 그 제방도로로 올라간 건 나도 예상할 수 없는 우연이었어. 그런 나를 노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고바토 주장이 맞는다면 뺑소니범은 히사카를 친 뒤에 다시 진짜 표적인 내쪽으로 돌진했다는 뜻이야. 아니야, 고바토, 그건 성립하지 않아." 
... 오사나이의 주장이 옳다.
"그러네. 그 말이 맞아. 질문을 취하할게."
"고바토는 모를지도 모르지만 자기가 틀렸다고 생각했을 때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건 굉장한 일이야."
그런 당연한 일로 칭찬해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처하다. 자기가 틀렸는데 틀리지 않았다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이 있을까?
오사나이가 살짝 웃는 것 같았다.

 

- "그럼 질문을 취하해 주었으니 알려줄게. 나는 고민을 하고 있었어. 걸어가면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집에 거의 다 갔지만 조금 더 생각하고 싶어서 막다른 길에서 모퉁이를 돌아서 걸었어. 그 계단이 제방도로로 이어진 것도 올라가 보고서야 알았을 정도야."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오사나이는 다시 평소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표정으로 돌아갔다.
"못 믿겠지? 믿을 이유가 없잖아. 그래서 말하기 싫었어."
"믿지 않는 건 아니야. 여기서 고민거리가 뭐였는지 묻는 게 실례일까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지."
오사나이가 이번에는 또렷하게 웃었다.
"확실히 그건 조금 실례야."

 

- 산더미 같은 마네킹 사이에서 후지데라가 외쳤다.
"저기, 선배! 이거 같아요!"
후지데라는 어느 마네킹 옆에 서 있었다. 


- "후지데라는 기꺼이 도와줄 거야."

"왜?"
"왜라기보다... 기꺼이 도와주도록 머리를 써서 부탁하면 될 거야."
대체 어떤 '머리'를 쓸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헛기침을 하는 시늉을 했다.
"일단 정면돌파하자. 편법은 그다음에 써도 늦지 않아."
"정면돌파?"
오사나이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오요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사고를 본 사람 있느냐고 물어볼 거야?"
"그랬다가는 쫓겨날 거야... 이런 방법은 어떨까?"


- 나는 가방을 열고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오사나이에게 건넸다. 눈에 잘 뜨이도록 글씨체와 색깔을 고려해 이렇게 적었다.
[ 오요 고등학교 학생 여러분!
6월 7일, 이나바 강 제방도로에서 발생한 뺑소니 사건을 목격한 오요 고등학교 학생을 찾습니다. 차에 치여서 지금도 병원에 있는 친구를 위해 범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사건을 목격한 학생, 사건을 목격한 학생을 아는 분, 이 전화번호로 연락해 주세요.

고바토]

이어서 내 전화번호를 적어놓았다. 이것은 복사본으로 원본은 집에 두고 왔다.

- 오사나이가 몸을 내밀어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났다.
"어, 좀 그래?"
오사나이는 손을 절레절레 저었다.
"굉장해. 이런 정면돌파, 나는 생각도 못했어. 마치..."

그리고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뭐라고 하면 좋을까. 마치... 평범한? 그게 아니고 으음, 굉장히, 마치... 소시민 같은?"
나는 무심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마 오사나이는 내가 생각해 낸 방법을 정공법이라고 말하고 싶었겠지만, 단어 선택이 조금 빗나갔다.
"소시민이라니, 좋네."
"저기, 나쁜 뜻이 아니라 정말 굉장하다고 생각해."

"알아."
내가 그렇게 동의하자 오사나이는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글귀를 읽었다.
"... 응. 이거라면 '동행인'을 몰아붙일 수 있을지도 몰라."
역시 오사나이는 알아주었다.

- 이 전단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첫 번째는 '동행인'에게 진실을 듣고 싶으니 연락해 달라고 호소하는 메시지. 하지만 이것은 어려운 일이다. '동행인'은 경찰이 오기 전에 사고 현장에서 떠났고, 히사카는 후지데라에게 그녀의 존재를 입막음했다. '동행인이 히사카의 다중 교제 상대라는 견해의 진위 여부는 불확실한 데다 딱히 그 문제에 관심은 없지만, 그 여학생이 남들 눈을 피하려는 것은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이런 메시지만으로 순순히 손을 들고 나올 것 같지는 않다.
거기에서 또 한 가지 목적이 빛을 발한다.
잘만 하면 이 전단 때문에 오요 고등학교 안에 소문이 퍼질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사고를 목격하고도 침묵하고 있다. 그 때문에 중학생이 병원에 실려갔는데도 정의가 구현되지 않고 있다. 침묵하는 자는 대체 누구인가?

- 그런 소문이 돌면 '동행인'은 이 상황이 몹시 가시방석일 것이다. 뭐든 반응을 끌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사려 깊은 오요 고등학교 학생이 누가 의심스럽다고 알려줄지도 모른다.
잘될 거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해볼 가치는 있는 방법이다.

- 문득 오사나이가 눈썹을 찌푸렸다.
"전화번호를 써놔도 돼?"
확실히 불특정 다수가 보는 글에 전화번호를 적는 건 내키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할 거고, 해낼 거야. 그렇지?"
오사나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물었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하려고?"
나는 오요 고등학교가 접해 있는 도로 양옆을 보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찾는 것이 있었다. 시에서 설치한 홍보 게시판이다. 나는 그 게시판 앞으로 걸어갔고, 오사나이도 따라왔다.

- 나도, 야마사토 씨의 배우자도, 뭔가 나쁜 짓을 했기에 차에 치이는 게 당연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나는 매사에 세심하게 배려하는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에게라면 또 몰라도 타인에게 죗값을 치른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무신경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테이블 위에 놓인 공책을 보았다. 어제, 잠들기 전 내려놓은 위치에 공책은 그대로 놓여 있다.
다만 조금...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조금, 펜이 움직인 것 같았다. 공책의 짧은 변과 나란하게 펜을 두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조금 기울어 있었다. 공책을 열어 글을 썼던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 [√ 꽃에 물은주지 못했어.]
나는 살짝 웃고 다음 페이지를 펼쳤다. 점심 식사 때까지 조금 여유가 있다. 기억해 낼 수 있는 정보는 아직 남아 있다. 나는 두 알 남은 봉봉 쇼콜라 중에서 카시스맛 초콜릿을 입에 넣고 사르르 녹는 식감과 달콤함, 카시스의 신맛과 향기를 음미하며 과거로 의식을 돌렸다. 

- "그 '동행인'은 뺑소니 사고를 낸 차를 가까이서 봤으니 조금 더 자세한 자동차의 특징이나, 어쩌면 범인의 얼굴도 봤을지 몰라요. 그래서..."
그래서 곧 이 사건의 전모를 밝혀낼 겁니다...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전단을 붙였습니다."
히사카 씨는 고개를 숙이고 잠자코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 끼운 담배를 피울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연기가 피어오르는 대로 둔 채 어두운 천장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그제야 나는 히사카 씨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원통함 때문일까, 슬픔 때문일까. 나는 사람의 속마음을 읽어내는 눈치가 별로 없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는 능력은 어느 정도 있지만 일이 어떻게 되기를 바라는지, 사람 마음을 읽어내는 기술은 별로 뛰어나지 않다고 자각하고 있다. 그래서 히사카 씨가 어째서 그렇게 힘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다만 그 얼굴에는 무엇보다도 분노가 서려 있는 것 같았다. 

- "저... 히사카의 상태는 어떤가요?"
히사카 씨는 졸다가 깬 사람처럼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응? 아아..."
그러더니 침통하게 고개를 숙였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상태야."
"퇴원은 할 수 있을까요?"
"의사의 판단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구나."
히사카 씨가 천천히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래, 잘 알겠다. 열심히 조사했구나. 덕분에 사고에 대해 많이 알 수 있었어. 아들을 생각해 주는 네 마음씨가 기특하구나. 고맙다."
천만에요, 앞으로도 맡겨주세요. 그렇게 으스댈 새도 없이 히사카 씨가 말했다.
"하지만 이건 경찰이 할 일이다."


"자신이 당한 사고에 대해 조사하다가 같은 반 친구가 위험한 일을 당했다는 말이라도 들으면 쇼타로도 안심하고 치료에 전념할 수 없을 거야. 네가 말하는 동행인은 내가 경찰에 말해두마. 너는 공부에 집중해. 그게 학생의 본분이야."
나는 당황했다. 히사카 씨는 경찰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라서, 상세한 사고 정보를 듣지 못해서 나를 의지했을 텐데. 그런데 히사카 씨는 지금 뒷일은 경찰에 맡기라고 말하고 있다. 모순된다... 히사카 씨가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다.
"그러니까."
나는 물어보았다.
"손을 떼라는 말씀인가요?"
"설마.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
히사카 씨는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고 커피를 마셨다.
"뒷일은 어른들에게 맡기라는 거야."
히사카 씨는 잔을 컵받침에 내려놓고 테이블 위에서 손깍지를 끼더니 타이르듯 말했다.
"고다카 군. 네가 걱정돼서 그래. 계속 고집부리면 학교 측과 의논해 봐야겠구나. 알겠지? 자, 돌아가렴. 계산은 내가 하마."
히사카 씨는 내 이름도 제대로 외우지 못했다. 그러면서 나를 걱정한다고 해도 전혀 설득력이 없다. 다만 학교에 알리겠다는 위협은 그냥 겁주는 말이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해 역시나 내가 생각한 대로, 히사카 씨는 내게 손을 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사건을 조사하는 사람으로서 손을 떼라고 협박당하는 일은 명예로 여겨야 할지도 모른다. 그만두라는 경고는 무언가에 근접했다는 증거라고 만족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는 기분이 나빴다.
말없이 주머니를 뒤져서 핫 밀크 값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히사카 씨는 돈을 집어넣으라고 하지는 않았다.

- "저녁 식사예요."
짧은 머리 간호사가 식판을 가져다주었다.
메뉴는 밥, 간장 양념을 바른 방어구이, 뿌리채소조림, 그리고 미니 국수가 함께 나왔다. 새해맞이 국수다. 버섯 국수였다. 두 손을 모아 젓가락을 들고, 다른 병실에 배식하러 가려는 간호사에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 "아니, 너희라고 해야 하나. 너희는 범인이 어디에서 어떻게 달아났는지 조사하는 거야?"
오사나이와 나는 엇박자로 끄덕였다. 아소야가 주춤하며 뻗은 손가락으로 우리를 가리켰다.
"며칠씩 들여서?"
조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 예감의 정체를 파악하기 전에 아소야가 버럭 외쳤다.
"멍청이 아냐, 너희! 그럼... 그럼 답은 하나뿐이잖아. 거기까지 조사했는데 왜 안 찍혀 있는지 모르겠다니... 야, 거짓말이지?"
거짓말이 아니다.
유감스럽게도 거짓말이 아니다. 나는 알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모른다면 다른 사람도 모를 것이다. 나는 무심코 질문했다.
"뭔가 아는 게 있어?"
그 순간, 아소야가 나를 쳐다보았다. 동정심이 가득한 눈으로.
"몰라, 다 처음 듣는 얘기야. 하지만 그 녹화 영상을 봤으면 결론은 하나잖아. 제기랄!"

- 내가 알 수 있었던 건 그 정도였다. 아소야가 무엇을 알아차렸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그리고 오사나이 역시 눈을 휘둥그레 뜨고 굳어 있었다. 아소야의 언동은 오사나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던 것이다.
아소야는 결론에 다다랐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그러니까 아소야의 결론은 섣부른 착각이거나 엉뚱한 믿음이거나, 뭔지 몰라도 그런 게 틀림없다. 아소야는 사건 이야기를 방금 전에야 들었고 범인의 자동차가 하늘색 박스형 경차라는 것조차 모르니까... 그 결론이 정답일 리 없다.

- 병실은 조용했다.
정적에 익숙해지면 귀는 평소 듣지 못하는 소리도 듣는다.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아마 홍백가합전이겠지. 이 병원은 9시에 불을 끄니까 그때까지는 누가 텔레비전을 봐도 아무 문제없다. 
베개와 머리 사이에 깍지 낀 손을 집어넣었다. 이제 팔은 마음껏 움직여도 갈비뼈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는다.
어두워서 공책을 펼치지 못하는 건 다행이다. 쓰고 싶지 않은 기억뿐이다. 아소야를 만난 다음 날, 월요일로 기억은 되돌아갔다.

- 일요일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시계를 본 게 새벽 4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풀지 못한 수수께끼를 아소야가 그 짧은 순간에 풀었을 리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도, 내 의식은 아소야가 알아차린 그 무언가로부터 헤어나지 못했다.
날이 밝으면 월요일이고 학교에 가야 한다. 여름 교복으로 갈아입고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수면이 부족한 눈에 내리쬐는 여름 햇살이 가혹했다.


- 잠자코 있는 히사카에게 나는 단숨에 쏟아냈다.
"그 남자는 수사 진행 상황이 궁금했던 거야. 아들이... 히사카가 뺑소니 사고를 당해 보험회사에 사고 상황을 알려야 한다고 했어. 하지만 그 사람이 네 아버지가 아니라면 보험회사 이야기도 사실이 아니겠지. 그럼 대체 누가 뺑소니 사건의 수사 진행 상황을 궁금해할까?"
등줄기가 오싹했다.
"어쩌면 나는... 범인을 만난 건지도 몰라."
히사카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자기를 차로 친 범인이 자기 아버지를 사칭해서 반 친구에게 접근했다... 분명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정보는 어쩌면 범인 체포의 결정적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


- 히사카는 어딘가 피곤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 대단해, 고바토 넌. 언제 퇴원했는지만 듣고도 그만큼 알아낸 거야? 훌륭해, 정말."
히사카는 이어서 알겠다는 듯 끄덕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모처럼 여러모로 고민해 줬는데 미안하지만, 이 좀 악물어."
"어?"
찰싹, 얼빠진 소리가 났다.
히사카가 오른손으로, 내 뺨을 쳤다.

- 아프지는 않았다... 거의 어루만지듯, 그 따귀는 힘이 없었다. 나는 아파서가 아니라 놀라서 휘청거렸다. 히사카는 자기 손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심하네. 아파서 손목 힘을 쓸 수가 없어. 뭐, 힘줄을 다친 건 아니라서 금방 낫는다고 하지만."
그리고 히사카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야, 고바토, 내가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했어? 내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단서가 아닌가 고민하고, 휴일에 호텔에서 사람을 만나고. 내가 그렇게 해달라고 했어? 반대였지? 나는 네게 완전히 반대로 말했잖아. 괜한 짓은 하지 말라고. 잊었어?"
나는 얼어붙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히사카가 일방적으로 말했다.
"나는 똑똑히 기억해. 그 병실에서, 문병을 와준 네가 뺑소니 범인을 찾고 있다는 말을 듣고 분명히 말했어.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그만두라고, 잊었다는 말은 못 하겠지?"
히사카는 그리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니다. 거침없이 말하는 게 아니라 단어를 한 마디 한 마디 이어갔다.

- "딱히 좋아서 시작한 건 아니었지만 중학교 내내 매달려왔던 것을, 나는 전부 잃었어."
히사카는 나를 때린 손바닥을 몇 번 쥐었다 폈다 했다. 아픈 거겠지.
"하지만 솔직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어. 아니, 좋지는 않지만 체념할 수 있어. 어쩔 수 없으니까, 사고니까. 그런 일을 당했는데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어. ...그런데 네가 튀어나왔어. 하지 말라고 한 일을 태연히 했지."
"나는..."
그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히사카는 나를 탓한다기보다 진심으로 궁금한 것처럼 물었다.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어? 원망 살 짓을 했어? 나는 말이야, 그렇게 눈치가 빠른 편이 아니야. 동아리에서도 우시오에게 도움만 받아. 그래서 네게 뭔가 잘못을 저질렀을지도 몰라. 그 원한을 풀고 싶은 거라면 그나마 이해가 가."
"그렇지 않아."
"... 알아. 네게 악의가 없었다는 건. 그게 열받아. 묘한 표정이네, 고바토. 마치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는 것 같잖아?"
히사카는 웃고 있지만 우는 것처럼 보였다. 어쩌면 울고 있지만 웃는 것처럼.

- "전에도 말했어. 한 번 더 말할게. 그리고 이번이 마지막이야."
어딘가 철부지에게 타이르는 듯한 말투였다.
"내버려 둬. 부탁이야."
히사카는 천천히 떠나갔다. 조금, 다리를 끌며, 나는 손으로 뺨을 짚었다. 하나도 아프지 않았지만 히사카의 손바닥이 닿은 자리가 몹시 얼얼하게 당기는 것 같았다. 
천천히, 히사카가 멀어져 간다. 방과 후 복도 끝에서 나는 홀로 멍하니 서 있었다.

- 히사카의 말이 맞다. 나는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어째서 히사카는 뺑소니 사건의 조사를 이토록 거부하는 걸까? 어째서 히사카는 저렇게 상처 입은 표정을 짓는 걸까? 히사카가 계단으로 사라지자 나도 걸음을 뗐다.
지금까지 조사한 결과로는 사고 당일 히사카는 교제상대 오카하시가 아닌 다른 여학생과 함께 걸어가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그 여학생의 존재를 히사카가 숨겼다는 점, 여학생도 사고 현장에서 신속하게 떠났다는 점에서 누나나 여동생처럼 히사카가 감출 필요 없는 상대였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나도 후지데라의 추측처럼 다중 교제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히사카는 단순히 다중 교제를 폭로당해서 저렇게 슬퍼 보였던 걸까? 손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따귀를 때릴 정도로 나를 용서할 수 없었을까? 나는 조사 결과를 다른 사람에게 퍼뜨리지는 않았다. 후지데라도, 오사나이도, 그런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멍하니 복도를 걸었다. 아까 히사카와 복도 끝까지 간 후로 십 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복도는 기묘하리만치 조용했다. 

- 뺨을 문질렀다.
생각이 뿔뿔이 흩어져서 집중할 수가 없다. 히사카가 어째서 화를 냈는지, 굳이 알아낼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어째서 나는 이렇게나 동요하는 걸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휘청거렸다. 뺨을 맞은 충격이 어지간히 컸던 걸까? 그런 이유는 아닌 것 같았지만, 그렇다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고민해 봐도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 이나바 강 호텔에서 만난 남성은 아무리 봐도 마흔은 넘어 보였다. 다시 말해 그 남자가 범인이라는 추리는 완전히 빗나갔다.
사건은 끝났다. 우리의 수사는 범인의 그림자에도 미치지 못했다.
나는 단순히 히사카에게 상처를 입히고... 결국 성과는 그것뿐이었다.
이것이 히사카 쇼타로 뺑소니 사고의 전말이다.

- 나는 삼 년 전, 범인의 자동차가 어째서 방범 카메라에 찍히지 않았는지, 그 수수께끼에 도전하기를 회피했다. 적극적으로 새로운 단서를 얻으려 하지도 않았다. 만약 단서를 다 갖추었는데도 풀지 못하면 그것은 내 무능력을 증명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나와 똑같은 단서밖에 없었을 아소야가 사정만 듣고도 대번에 수수께끼를 푸는 순간을 나는 보았다. 아소야가 수수께끼를 푼 다음날에 범인이 체포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나는 풀지 못한 수수께끼를 끈기 있게 풀려하지 않고 현장에 있던 '동행'을 찾아내는 일에 집착했다. 지금도 완전히 엉뚱한 방침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역시 그 선택의 근본은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로부터 도피하려는 심리였다. '동행인'을 찾아내려다가 히사카의 사생활을 폭로했지만 그것은 사건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단순히 폭로만 했을 뿐이었다.

 

- 수사는 무참한 실패로 끝났다. 내가 아무리 자신감 넘치는 중학생이었다고 해도, 부분적으로나마 성공했다고 스스로 위로조차 할 수 없는 완벽한 실패였다.
나는 사태를 직시할 수 없어 이 문제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거부했다. 눈을 돌리고, 귀를 막았다. 


- ... 중학 시절을 되돌아보면 찬란한 성공이 가장 비참한 결과를 가져온 사건이나 고생했는데 보답이라곤 비웃음과 욕설 뿐이었던 사건 등,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일은 많았다. 하지만 복잡한 수수께끼의 진상을 푸는 행동에 희미한 망설임을 느끼게 된 계기는 역시 이 사건이었다.

- 이 사건은 오사나이에게도 상처를 남겼다. 오사나이는 아소야에 대한 우위를 잃었다. ... 오사나이 유키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상대로 인식된 것이다. 나는 당시의 오사나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아소야에 대한 우위를 잃은 오사나이가 물리적인 위협에 노출되었다는 것뿐이다. 오사나이는 뺑소니범의 체포 소식이 알려진 뒤 일주일 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 나와 오사나이는 둘 다 만신창이가 되어서,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고등학교에서는 꼭 우리의 어리석은 성향을 봉인하자고 맹세했다. 서로 도와서, 소시민이 되기로 약속한 것이다.
그 후로 삼 년 동안 우리는 스스로 정한 좌우명이 얼마나 염치없는 소리인지 직면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여기서 할 이야기는 아니다.

- 어디선가 홍백가합전(혹은 다른 프로그램)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는 어스름 속에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잠은 오지 않았다.
지금, 나는 확신하고 있다. 삼 년 전 내가 히사카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두 사람과 동시에 교제하고 있던 사실을 폭로... 한 것이 아니다.
과거의 나는 그런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다. 분명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나는 무슨 짓을 했던 걸까?

- 밤에 깨어 있었던 적이 없어서 몰랐지만 이 병실의 벽시계는 바늘에 형광도료가 칠해져 있는 것 같았다. 시각은 8시 47분, 이제 곧 소등 시간이다. 9시가 넘으면 텔레비전도 켤 수 없으니 희미하게 들려오는 노랫소리도 사라질 것이다. 날이 밝을 때까지는 지겹도록 긴 밤이 되리라.
노크 소리도 없이 조용히 문이 열렸다. 병실에 비친 복도불빛에 눈이 부셔서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문가에는 털 달린 후드를 뒤집어쓴 사람이 서 있었다. 역광이다. 하지만 한눈에 알아보았다. 나는 말했다.
"안녕."
오사나이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감흥 없이 대답했다.
"오와아, 안녕."

- 오사나이는 크림색 다운 코트를 입고 회색 목도리를 감고 있었다. 오사나이는 추위를 못 견딘다. 겨울철은 특히 복슬복슬해진다.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벗으니 오사나이는 다운 코트와 비슷한 크림색 귀마개도 하고 있었다. 오사나이가 귀마개를 빼서 목에 거는 사이 병실 문이 저절로 닫히더니 틈새로 들어오던 빛도 사라졌다.
"역시 그랬어. 너무 매일 자고만 있어서 이상하다 했어."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건 푸념인데, 낮에 왔으면 좋았잖아."
"바빴어."

 

"꽃에 물을 주라니, 우회적인 메모를 남겼네."
오사나이가 그 메시지와 함께 준 꽃은 드라이플라워였다. 당연히 물이 필요 없다. 그래도 꽃에 물을 주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 다행히 나는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런 뜻이다.
'저녁 식사 후에 나오는 물은 마시지 말고, 꽃병에 버려.'
감시당하느라 한 번은 실패했다. 하지만 두 번째에는 성공해서 물을 마시지 않았다. 입원한 후로 오늘까지 소등 시간이 되도록 깨어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물을 버린 오늘은 이렇게 의식이 깨어 있다. 결과를 보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명백했다. 나는 드라이플라워가 꽂힌 꽃병을 바라보았다. 

- "약을 먹였을 줄은 몰랐어."
"나도 처음에는 안 믿었어. 믿을 수 없었어."
오사나이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나를 보았다.
"더 빨리 경고해 줄 수 있었는데 내 생각을 믿을 수가 없었어. 미안해, 고바토."
사과할 필요는 하나도 없다.
"그게 뭐가 미안해. 나야말로, 미안... 밀쳐내서."
사고 직전, 나는 오사나이를 어깨로 밀쳤다. 오사나이는 제방 측단으로 굴러 떨어졌다.
"안 다쳤는지 계속 마음에 걸렸어. 분명 다른 방법도 있었을 텐데."
"... 고바토."
"붕어빵, 먹고 있었잖아. 그것도 엉망이 되었지? 미안해, 어디 부딪치진 않았어?"
"고바토."
오사나이는 침대에 누워 있는 내게 얼굴을 가까이 댔다.
"나는 가벼운 타박상뿐이었고 붕어빵은 아무래도 상관없어. 고바토가 신경 쓰이면 다음에 사다 줄게. 알았으면 내 얘기를 들어."

- "알고 있겠지만 고바토는 다섯 시간이나 의식을 잃고 있었어. 그동안 내가 뭘 했는지 알아? 이 병원 대합실에서 계속 검색했어. '머리 충격 의식 없음 1시간', '머리 충격 의식불명 2시간' 이렇게. 소용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어. 손가락이 떨려서 계속 오타를 냈다고 하면 고바토는 믿어줄 거야?"
그렇게 물으면, 믿기 어렵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사나이는 두 손을 모으고 똑바로 일어섰다.
"제대로 말할게. 그때 나는 차가 오는지 몰랐어. 고바토가 밀쳐내지 않았다면 차에 치였을 거야. 고바토가 살아 있어서 기뻐. 그렇게 크게 다쳤는데 다행이라는 말은 할 수 없지만, 고바토가 살아 있어서, 지금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서, 난 정말, 정말로 기뻐... 구해줘서 고마워."


- 오사나이는 이렇게 다부지게 말하는데, 나는 영 꼴불견이었다. 가볍게 사람들을 도와주고 산뜻하게 떠나는 히어로를 동경한 적은 있지만 목숨을 걸고 다른 사람을 돕는 자기희생 타입의 히어로가 되고 싶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고, 비슷한 일이 또 생긴다면 그때는 분명 혼자서만 살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라도 그 순간만은 오사나이를 구할 수 있었다. 
다른 일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되돌릴 수 없는 결말이 바로 눈앞에 닥친 순간 나는 나쁘지 않은 선택지를 골랐고, 그런대로 잘 해냈다.
나는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오사나이도 분명 내 눈물을 보기는 싫을 테니까.

 

- 어느새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눈이 어둠에 익어 이대로도 문제없었다. 오사나이도 병실에 불을 켜려고 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나는 밝은 목소리를 지어냈다.
"내가 시키는 대로 물을 마시는 걸 용케 알고 있었네."

오사나이는 시시한 농담을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고 있었잖아?"
무슨 소리냐고 묻지는 않았다. 실패한 농담을 되풀이할 생각은 없다. 나는 손을 뻗어 테이블에서 늑대 인형을 가져왔다. 오사나이의 문병 선물이다.
"일부러 샀지? 비싸지 않았어?"
"공짜는 아니었어. 하지만 그런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

 

- 나는 인형에 대고 말했다.
"안녕."
하지만 오사나이는 그리 감명을 받은 기색이 아니었다.
"고바토, 살짝 틀렸어. 말을 걸고 싶다면 그쪽이 아니야."
"어?"
나는 당황했다. 제법 자신 있었는데.
오사나이가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 위에 있는 것은 드라이플라워 꽃병과, 한 알 남은 봉봉 쇼콜라뿐.
... 설마.
나는 봉봉 쇼콜라 상자를 들고 바닥을 손가락으로 튕겨보았다. 오사나이가 눈썹을 찌푸렸다.
"잡음이 들어가니까 그만둬."

- 옆에서 상자를 살펴보았다. 안에 든 봉봉 쇼콜라에 비해 확실히 불필요할 정도로 상자가 깊었다. 상자 바닥을 보니 "봉봉 쇼콜라 16개입"이라고 적혀 있다.
그런가. 이 상자는 바닥이 이중이구나. 원래 봉봉 쇼콜라가 들어 있어야 할 아랫단에 지금은 다른 게 든 건가.
"누가 몰래 약을 쓴 것에도 놀랐지만 도청기가 설치되어 있는 것에도 놀랐어."
오사나이가 억울해 죽겠다는 듯이 나직하게 말했다.
"도청기가 아니야. 무전기."
“그래?"
"그래. 상시 작동하는, 발신 전용 무전기."
그걸 도청기라고 부르지 않나....

- 오사나이가 어딘가 감개무량한 기색으로 말했다.
"고생했어. 의료 기기에 영향을 주지 않는 주파수의 기계를 찾아야 해서. 난 아는 게 별로 없어서 잘 아는 사람의 도움을 받았어."
온당한 협력 요청이었기를 바란다.

- 오사나이는 필요하다면 크게 수단을 가리지 않는 타입이기는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아무나 도청하는 취미의 소유자도 아니다. 내가 매일매일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면 깊이 잠들어 깨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안 이상 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도청기... 아니, 무전기를 설치한 행동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이 봉봉 쇼콜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내가 차에 치인 것은 22일 저녁이었으니 오사나이는 거의 사고 직후에 무전기를 마련했다는 뜻이다. 
"애초에 무전기를 둘 생각은 왜 했어?"
"대충 알잖아."
"뭐, 대강은. 하지만 빗나갔을지도 모르니까."
내가 그렇게 말하자 오사나이가 공포로부터 몸을 지키려는 듯 가만히 팔로 자기 몸을 감쌌다.
"나, 차가 오는 걸 늦게 알아차려서 확신은 없었어. 하지만 고바토를 친 차는 브레이크를 밟지 않은 것 같았어."

- 그날은 드물게 눈이 쌓여 있었다. 이 동네는 눈이 별로 내리지 않아 겨울에도 스노타이어로 바꾸는 차가 많지 않은 듯하다. 일반 타이어로 눈길 위를 달리는 것은 몹시 위험해서 다른 차들은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나를 친 차도 그렇게 빨리 달리고 있지는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여기에 없을지도 모른다. 작고 노란 차가 천천히 우리 쪽으로 다가왔고, 그대로 지나칠 줄 알았던 순간 자동차가 방향을 틀었다. 
오사나이의 말대로 운전자는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사실은 사정 청취 때 경찰에도 말해서 조서로도 남아 있다.

- 삼 년 전, 나는 오사나이에게 히사카를 친 차가 오사나이를 노렸던 게 아닌지 넌지시 물었다. 그 말에 오사나이는 죽을 뻔한 사람에게 살의가 깃든 결과였을지도 모른다고 암시하는 건 하나도 재미없는 농담이라고 가르쳐주었다. 이번에 죽음을 눈앞에서 느낀 경험으로 말하건대 그때 오사나이가 한 말은 옳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 하지만 그것은 대단한 근거 없이 고의일 가능성을 거론하는 게 불쾌하다는 뜻이지. 실제로 고의일 가능성이 있는지를 검토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그날 나는 의도적으로 차에 치였고... 살해당할 뻔했다는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었다. 오사나이도 똑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그렇기 때문에 봉봉 쇼콜라, 그리고 무전기를 준비한 것이다.
"운전자가 정말 고바토를 고의로 노렸다면 병원도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했어. 고바토가 어느 병원으로 실려갔는지 신문에도 실렸으니까. 유치한 발상이라는 생각도 했어... "

- "의미가 다른 것 같은데."
"... 24시간 계속 듣는 짓은 안 해. 고바토라면 말을 안 했을 거라고 생각했을 뿐."
당했다. 미끼를 던지다니.
오사나이는 훌륭하게 맞혔다. 나도 사고가 사실은 고의였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유치함을 부끄럽게 생각하면서도 그날 있었던 일이 살인미수가 아닐까 의심했다. 그렇기 때문에 고의범일 가능성을 일부러 입에 담지 않았다. 오사나이가 무전기를 설치한 것처럼, 범인이 어떠한 방법으로 이 병실의 상황을 살피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침대에서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내가 살인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범인에게 들키는 건 그리 안전한 행동이라 하기 어렵다.

물론 범인이 의도적으로 나를 쳤다고 해도 나를 고바토 조고로로 인식하고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어떤 이유로 울분이 쌓인 범인이 누구든 상관없으니 차로 쳐서 죽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 오사나이가 태연하게 말했다.
"그리고 내가 맨 처음 선물한 건 녹음기였어."
"녹음기? 무전기가 아니라?"
"싸구려 무전기는 전파가 약해서 결국 계속 병원 근처에 있어야 하잖아. 그러면 아무 데도 갈 수 없고, 밖에서 듣고 있기엔 너무 추우니까 처음에는 오래가는 녹음기를 두고 상황을 살폈어. 그랬더니 고바토, 저녁 식사 후에는 항상 바로 잠드는 거야. 조금 이상하다 싶어서 도청... 무전기로 바꿨어. 사실은 저녁 식사 때 만날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식사 때는 면회 금지라서."
그러고 보니 나도 삼 년 전 히사카를 문병하러 갔을 때 저녁 식사 시간은 면회 금지라는 말을 들었다. 그건 그렇고. 
"아까 도청기라고 말하려고 했지?"
오사나이는 억울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안 했어."
오사나이가 어느 타이밍에 녹음기를 무전기로 바꾸었는지 굳이 묻지는 않았다. 아마도 드라이플라워에 물을 주라는 메모를 남기기 전날이나 전전날이리라. 그리고 나는 눈치챘다.

- 오사나이는 똑같은 봉봉 쇼콜라와 녹음기를 두 개씩 구해서 상자를 바꿔치기했던 것이다. 그렇게만 하면 음성 데이터가든 녹음기를 회수하고, 새로 녹음이 시작된 녹음기를 이 병실에 설치할 수 있다. 같은 수법으로 녹음기를 무전기로 바꿔치기했을 것이다.

- 오사나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몰랐어? 고바토가 어느 봉봉 쇼콜라를 먹었는지까지는 따지지 않았으니 같은 맛을 먹은 적도 있었을 텐데."
듣고 보니... 바닐라를 두 번 먹은 것 같기도...
아무리 컨디션이 정상은 아니었다지만 눈앞에서 바꿔치기한 줄 몰랐다니 너무 한심했다. 다리가 멀쩡했으면 발을 동동 굴렀을 것이다.
나를 내려다보던 오사나이가 피식 입가를 누그러뜨린 것 같았다.
"지금, 웃었어?"
"안 웃었어."

- 침대 위에 놓인 인형을 보면서 물었다.
"그럼 이 인형은 뭐였어?"
"깜찍한 인형을 두는 데 이유가 필요해?"
"그런 건 아니지만."
"범인이 무전기를 의심했을 때 쓸 깜찍한 미끼."

미끼였나...


- "하지만 난 왜 고바토를 잠재웠는지 모르겠어."
오사나이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 점에 대해 확신에 가까운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일단 한 가지 더 확인하고 싶은 점이 있었다.
"오사나이. 문병을 와줬는데 미안하지만 부탁 좀 해도 될까?"
 

- "친구인가요? 면회 시간은 끝났으니 죄송하지만 돌아가주세요."
정당하기 그지없는 지시다.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이대로 오사나이에게 돌아가라고 하고 홀로 새해를 기다려야 할까? 아니면 여기서 승부에 나서야 할까? 
넓적다리가 욱신거렸다. 그 통증이 상대에게 시간을 주지 말라고 속삭였다.

- 거짓말이다. 물은 꽃병 속에 있고 꽃병은 간호사 뒤쪽, 테이블 위에 그대로 있다. 나는 간호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지 않으면 꽃병에 시선이 갈 것 같았으니까. 

- 오토바이에 부딪혀 자전거가 망가졌을 뿐이라는 에이코에 대해 깊이 조사하려 하지 않았다. 
이 일에서 나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 먼저 사람은 거짓말을 한다는 것. 오토바이 때문에 자전거가 망가졌다는 에이코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없다. 그리고 믿기 어려운 행운으로 얻은 정보라는 이유로 유의미하지 않을 거라 판단하는 행위는 전혀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첫날 얻은 정보든, 몇백 일 뒤에 얻은 정보든, 같은 조건으로 진위를 따져봐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또 한 가지 깨달았다. 오요 고등학교에서 우리에게 친절을 베풀어준 선배는 자기를 '장사꾼'이라고 했다가 바로 '상업과'라고 고쳐 말했다. 그렇다면 '천사 에이코'는 무엇을 의미할까? 

- 병실에 침묵이 깔렸다.
우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에이코 씨는 반론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자기 소행이라고 시인한 것도 아니다. 일단 혐의를 입에 담은 이상 사건의 막을 내리지 않으면 오늘 밤은 끝나지 않는다. 사정이 그렇게 되었으니 이다음은 내일 계속, 그렇게 말하고 침대에 누우면 에이코 씨는 내 목을 조르러 올 것이다. 그렇다고 에이코 씨 눈앞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경찰을 부를 수도 없다. 에이코 씨가 힘으로 저지하려 든다면 나는 아무것도 못하고, 오사나이도 몸싸움에서는 유리하다고 할 수 없다. 애초에 나는 지금 휴대전화도 가지고 있지 않다. 

- 교착 상태를 깬 것은 웃음기를 머금은 오사나이의 목소리였다.
"이제야 알겠어. 나는 계속 당신이 여기에 뭘 하러 왔는지 고민하고 있었어. 새해 전날인데, 따끈따끈한 고타쓰 안에 들어가서 쉬면 되는데, 왜 사복을 입고 병실에 와 있는지 이상했거든. 하지만 이제 알겠어."
휠체어를 타고 전해져오는 희미한 감촉이 오사나이가 손잡이를 쥐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즉 언제든 나와 함께 달아날 수 있도록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고바토가 병실에 있는 동안에는 아직 안전하다고 믿을 수 있었어. 그동안에는 고바토가 뺑소니범에 대해 뭔가 기억하고 있는지, 괜한 소리를 하지 않는지 감시할 수 있으니까. 고바토에게 수면제를 먹인 건 다른 간호사의 이름표를 못 보게 하려는 것만은 아니었지? 자기가 없는 곳에서 사건에 대해 누군가에게 무슨 말을 하지나 않을까, 너무너무 두려워서 견딜 수 없었던 거야." 

- "그래, 죽이지 못했어. 몰고 있는 자동차로 칠 수는 있어도, 자기 손과 의지로 고바토를 죽일 수는 없었어. 굉장히 윤리적이라고 누가 칭찬해 줄 줄 알았어? 아니야, 당신은 비겁할 뿐이야."

"..."
"그리고 세 번째는 완벽한 안전지대라고는 할 수 없지만 결정적으로 파멸하지도 않는, 소심한 시간 벌기. 고바토가 호전되는 게 문제라면 당신은 문제를 지연시키면 된다고 생각했어." 
나는 기억해냈다. 미야무로 선생님은 다음 달에는 외출 허락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뭔가 불행한 일이 생겨 내 상처가 악화되면 그 예측은 달라질 것이다. 
"약 때문에 잠들어 있는 고바토의 넓적다리를 살짝 손봐주기만 하면 그만. 그것만으로도 고바토는 다시 병실에서 나가지 못하게 돼. 당신은 당장 결단을 내릴 필요 없이 편안하게 지켜볼 수 있어. 적어도 연속 출근을 환영해 주는 연말연시 동안에는 계속 고바토를 감시할 수 있어. ... 히사카 씨. 어째서 손을 감추고 있는 거야?"
마스크 아래에서 에이코 씨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 손에는 자그마한 쇠망치가 들려 있었다.
 
- 혐오감을 산 적은 있다. 나는 아무하고나 이유 없이 친해질 수 있는 타입이 아니다.
적대감을 산 적도 있다. 적극적으로 원한을 사려 들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원한을 사게 된다면 살아가는 이상 어느 정도는 감수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악의를 경험하기는 처음이었다. 이걸로 너를 해치겠다는 흉기를 눈앞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 하지만 아무리 작아도... 저걸로 맞으면 조금 아픈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피식 웃었다. 순수하게 백 퍼센트 허세였지만, 그것으로 조금 여유를 되찾았다. 오사나이는 적의를 품은 상대에게 납치당한 적도 있다. 훨씬 더 무서웠을 것이다. 게다가... 나를 덮친 자동차에 비하면 저런 게 뭐가 무섭단 말이냐!

 

- 궁지에 몰린 건 상대방이다.
다시 말해 자포자기해 달려들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 "마치 차로 쳐달라는 듯이 차도 가까이서 웃고 있었어! 그러니까 내가 친 게 아니라, 네가 치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날 내가 차도 바로 옆을 걸었던 이유는 제설한 눈이 쌓여있어 인도가 좁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길 가장자리 구역을 나타내는 흰색 선을 넘지는 않았다. ... 그런 반론은 가슴속에 묻어두었다. 다만 에이코 씨는 나만 알아보았고 오사나이는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내가 혼자 행동했던 타이밍... 에이코 씨는 내가 히사카 가즈토라를 이나바 강 호텔에서 만난 그날, 그 장소에 있었던 걸까? 이 녀석 얼굴만큼은 잊지 않겠다고 내 얼굴을 훔쳐보고 있었던 걸까? 

그리고, 그런가. 눈 쌓인 그날, 제방도로 위에서, 나는 웃고 있었나.

- 나는 추위도 잊고 질문했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데? 무슨 짓을 했기에 살해당할 만하다는 거야?"
"그걸 모른다는 걸 제일 용서할 수 없어."


- "너는 모르지? 당연하잖아, 사람은 누구나 사정이 있어. 그건 남한테 가볍게 얘기하는 게 아니야. 보통 사람은 그걸 알고 남의 사정을 들쑤시지 않으려고 조심해. 하지만 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다 안다는 얼굴로 우리 부탁을 짓밟았어. 아아, 네가 왜 살아 있는 거야? 더 확실히 쳤어야 했는데!"

 - "살다 보면 기복이 있어. 좋을 때도 있지만 나쁠 때도 있어. 나쁜 순간은 어쩔 수 없이 찾아와. 그것만 보고 단순히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할 수는 없어. 나쁜 시기는 바로잡으면 돼. 나중에 그때는 힘들었지, 하고 웃으며 이야기하면 되는 거야."
이나바 강 호텔에서 만났던 히사카 가즈토라 씨는 히사카 쇼타로가 언제 퇴원했는지 몰랐다. 삼 년 전 나는 그 이유를, 가즈토라 씨가 히사카의 아버지를 사칭한 가짜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라면 아들의 퇴원을 모를 리 없으니까. 
지금이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텐데.
아들의 퇴원 소식도 모르는 아버지라고 생각할 텐데. 

- 말문이 막혀버린 내 시야를 크림색이 가득 채웠다. 오사나이가 나와 에이코 씨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엉뚱한 화풀이네."
"... 넌 뭐야?"
"당신은 자기한테 고바토를 차로 칠 이유가 있었다고 외치고 있어. 그래, 그렇구나. ... 그럼 나는? 당신은 나도 치려고 했지. 고바토가 구해주지 않았다면 당신은 나도 쳤을 거야. 이유 없는 상대도 겸사겸사 치다니, 그냥 살인자잖아?"

- 히사카의 뺑소니 사건은 나 혼자 추적했던 게 아니라 오사나이도 함께했으니 에이코 씨가 볼 때 우리는 똑같은 죄인이다. 그런데 오사나이는 지금 무관한 피해자를 가장하고 있다. 나는 그 이유를 안다. 그러는 편이 에이코 씨를 동요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시간을 벌 수 있으니까. 

- 에이코 씨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 아니야! 네가 그 남자하고 함께 있었으니까! 원망하려면 그 녀석을 원망해!"
"사양할게. 나를 치려고 했던 건 고바토가 아니야."
"그럼 너도 죽일 거야."
"안됐지만 못 죽일 거야. 시간이 다 됐어. 옥상정원 문 저편에 누가 있는지 당신은 분명 모를걸."
 

- 그렇게 삼 년 전보다 조금 나직해진 목소리로 쇼타로가 말했다.
"그 심정은 정말 이해하지만, 그만둬. 고바토가 잘못한 게 아니야. 저 녀석은 그저 나를 치고 달아난 자동차를 찾았던 것뿐이야."

 

- 아아, 그런가.
에이코 씨는 동생에게 들킨 것이다. 자기가 사람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한 번 더 함께 살기를 바랐던 동생에게 자신이 살의를 품고 사람을 차로 쳤다는 사실을 들키고 만 것이다. 
에이코 씨의 목소리는 떨리다 못해 거의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 히사카가 슬그머니 웃었다. 눈에 익은, 조금 미안한 표정의 웃음이었다.
"오랜만이네."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간신히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오랜만이야. 만날 줄 몰랐어. 여기엔 어떻게?"
히사카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라, 오사나이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사나이가 갑자기 사라지는 것은 흔한 일이다.

- "뭐, 상관없어. 어제 오사나이한테 사정을 들었어. 얼굴은 알고 있었지만 이야기해 본 적은 없어서 갑자기 찾아왔을 때는 놀랐어. 네가 차에 치였다는 것도, 내 생각으로 이래저래 고민하고 있다는 것도 이야기해 줬어. 그리고 고바토를 만나달라고 했어."
"... 그래서 새해 전날에 와줬구나."
"달리 할 일도 없었고, 버스를 갈아타느라 애를 먹어서 겨우 도착해 메시지를 보냈더니 옥상정원으로 와달라는 답장이 와서 놀랐어. 설마...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 옥상정원에 들어왔을 때, 오사나이가 휴대전화를 만지작 거렸던 것은 알고 있었다. 그때 히사카를 불렀던 건가.
히사카가 와주지 않았다면 에이코 씨를 막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감사 인사를 받는 건 이상한데. 누나가 끔찍한 짓을 했어.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과라니. 삼 년 전에 나는 아무 사정도 모르고 멋대로 굴었는데."
히사카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나도 중학생 때는 말이 지나쳤어. 계속 마음에 걸렸어. 내가 사실을 숨겼던 건데, 어째서 그렇게까지 말했을까 하고."

"당연한 일이야."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큰 소리가 나왔다.
"그런 말을 들어도 싸."

 

- 히사카는 깜짝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살짝 그늘진 웃음을 지었다.
"나는 줄곧 고민했어. 내가 너를 때린 후에, 너는 어째서 그렇게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을까 하고. 나는 고바토 너를, 재미있어 보이는 사건을 발견하면 드라마처럼 여기저기 조사하고 다니는 걸로도 모자라 반쯤 재미 삼아 남의 비밀에 참견하는 녀석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정확하다.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히사카는 말을 이었다.
"그렇게 경박한 녀석이었다면 내가 때려도 그런 표정은 안 지었을 거야. 믿어주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나, 사람을 때린 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 많은 생각이 들었어. 그랬더니 나중에 우시오가 그러는 거야. 너, 내 치료비를 걱정해 줬다면서?"
... 뭐, 그런 말도 했다. 범인을 알아내지 못하면 히사카는 배상금도 받지 못한다. 치료비는 가족들이 내야 할 테고, 대회에 나가지 못한 것도, 특별 전형으로 입학하지 못하게 된 것도 보상받지 못한다고.
"그래서 생각했어. 그 순간만 대충 모면하려는 사람이 내 치료비 얘기를 꺼낼 리가 없어. 너는 정말 나를 걱정해서, 힘이 되어주려 했던 거야." 
그거다.
그것이 바로 내가 삼 년 전 저지른 가장 큰 우행이다.

 

- "나는 있지."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나는 정말 바보였어. 뺑소니범을 알아내면 칭찬을 받을 거라고, 인정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어. 게다가 너도 배상금을 받을 수 있고, 가족들의 부담도 가벼워질 거라고. 히사카를 도와줄 수 있다고, 분명, 분명 히사카도 기뻐할 거라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어."
그것을 선의라고 부르는 건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부담스러운, 상대가 원하지 않는, 자기만족의 선의다. 결과적으로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면 분명 기뻐해줄 것이다. 중간에 어떤 사실이 튀어나오더라도. 나는 그런 식으로 생각했고, 그 생각은 잘못됐다. 

- 삼 년 전 방과 후, 히사카에게 맥없는 따귀를 맞은 뒤에 나는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충격을 받았다. 그 이유를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깨달았다. 기뻐해줄 줄 알았던 장면에서 거부에 직면한 것에 현기증을 느꼈던 것이다. 마치 애써 고른 생일 선물을 친구가 내팽개친 것처럼,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그려서 보여주었더니 '참 못 그렸다. 필요 없어'라는 말을 들은 것처럼, 호의를 받아주지 않아 서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리석었다.
어리석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다. 그것을 호의로 보는 건혼자만의 생각이고, 상대가 그것을 받아들여줄 이유는 하나도 없다. 하물며 마음속을 엉망으로 헤집어놓고 호의의 발로이니 용서해 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니.
나는 내 안일한 생각에 진저리를 쳤다. 지금도 여전히.

 

- "그때 나는 고맙다고 말하지 못했어. 지금도 못하겠어. 하지만 이 말만은 할게. 고바토... 때려서 미안했어."
나는 네게 사과를 받을 자격이 없어. 다만 줄곧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던 말을 겨우 할 수 있는 때가 왔다는 것만은 알았다.
"나야말로 잘못했어. 미안."
히사카는 몹시 가볍게 받아주었다.
"됐어. 그런데 혹시 용서해주지 않는 게 나아? 잘 모르겠다. 난 그렇게 눈치가 빠른 편이 아니라서."
나는 살짝 웃었다.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이라면 계속 품고 있던 생각을 털어놓아도 될 것 같았다.

- "히사카.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소문을 듣고 내 탓이 아닐까, 계속 생각했어."
히사카는 쓸쓸한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숙였다.
"그야 어떤 의미에서는 네 탓일지도 모르지. 어떤 의미로는 누나 탓이기도 하고, 우시오도, 후지데라도, 조금씩 얽혀있어. 하지만 내가 자살하려 했던 건 다른 누구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야. 실패했지만."
그리고 히사카는 내 표정을 훔쳐보았다.
"이유가 궁금하다는 표정이네."
그건 오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 "이제 됐어.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그뿐이야. 하지만 만약 뭔가 힘이 될 수 있다면 말해줘. 말해서 마음이 가벼워진다면 들려줘."
히사카는 어깨를 쓱 움츠렸다.
"뭐, 한 가지만 말한다면 인간관계 문제야. 네 탓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가족 중에 범죄자가 나와서 고민거리가 두 배로 늘었어.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니 참 답답한 노릇이야.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어, 고바토?" 
글쎄.
멀쩡한 인간이 되고 싶다고 바란 적은 있었던 것 같다.

- 어두운 복도 저편에서 "나카타"라고 적힌 이름표를 단 간호사가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벽시계를 보니 벌써 11시가 훨씬 넘었다. 히사카도 시계를 보고 "아차"라고 중얼거렸다.
"버스 끊겼다."
"경찰차로 데려다 달라고 했으면 좋았을걸."
"그러게. 뭐, 어떻게든 되겠지."

- <종장 : 소시민은 하늘을 날지 않는다>

- 어두운 병실로 돌아왔다.
히사카 에이코 씨가 떠났으니 내일부터 누가 올까? 결과적으로 이 병원 간호사가 체포되는 계기를 만들고 말았으니 내일부터 치료를 받을 수나 있을까? 그나저나 피곤하다. 옥상정원은 추웠고, 추위는 체력을 앗아갔다.
침대 앞에 선 나는 혀를 찰 뻔했다. 휠체어에서 침대로 돌아갈 수 없다. 아까 병실 앞까지 바래다준 나카타 씨에게 무심코 혼자서도 괜찮다고 말하고 말았다. 막 업무로 돌아갔을 텐데 미안하지만 호출 버튼을 누르는 수밖에 없나. ...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와, 고바토."

- 오사나이가 침대에 앉아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이제 곧 12시야!"
"괜찮아. 집에는 경찰이 돌봐줄 거라고 말해뒀으니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오히려 걱정하지 않을까... 나는 목도리를 풀어 오사나이에게 돌려주었다.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이게 없었다면 절대 못 버텼을 거야."
"천만에. 추웠지?"
오사나이의 도움을 받아 침대로 돌아갔다. 몸이 꽁꽁 얼어붙어 있었는데 오사나이가 앉아 있던 자리가 따뜻해서 조금 기뻤다.

- 테이블 위에는 물이 든 꽃병과 입원해 있는 동안 기록한 공책이 놓여 있었다. 그 공책을 바라보며 말했다.
"히사카하고 얘기를 나눴어."
"다행이네."
"히사카, 내가 자기 일을 떠올리며 걱정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 오사나이한테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을 텐데."
말하고 자시고, 애초에 나는 수면제 때문에 오사나이와 한마디도 나누지 못했다. 오사나이가 그런 상황에서 내가 히사카를 회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 "내가 쓴 공책, 봤구나?"
오사나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한테 보여주려고 쓰는 줄 알았어."
"그런 건 아니었는데..."
나는 그저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읽을 걸 상정했잖아?"
뭐, 그건 그렇다. 그렇지 않았다면 드라이플라워 꽃병에 수면제가 든 물을 버리는 데 실패했을 때 이 공책을 써서 오사나이와 연락을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 나는 침대 위에서 갈비뼈 통증이 허락해 주는 범위에서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 오사나이. 히사카를 불러줘서 기뻤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기뻤는데, 그 녀석은 위험에서 날 구해주기까지 했어."
오사나이가 가슴에 손을 얹었다.
"정말 깜짝 놀랐어. 무서웠어."
"오사나이가 히사카를 찾아준 덕분이야. 용케 찾아냈네."
그렇게 묻자 오사나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거라면 도지마한테 고맙다고 해. 히사카... 아니, 지금은 성이 바뀌어서 미우라인데, 그 애를 찾아준 건 도지마 ... "
 

- 그날 제방도로 위에서 유턴은 불가능했고, 뺑소니 현장으로 가거나 그 자리를 벗어나는 차는 반드시 그 편의점 방범 카메라에 찍힌다는 것은 우리가 직접 꼼꼼히 확인한 사실이다. 긴급 차량이라는 이유로 무리한 유턴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후지데라가 봐서 안다. 
다시 말해 그 녹화 데이터에는 구급차나 경찰차가 찍혀 있었어야 했다.
그런데 찍혀 있지 않았다는 것은 결국 영상이 가짜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사고가 발생한 6월 7일의 데이터는 아소야가 우리 눈앞에서 복사본을 만들어주었다. 그것이 가짜였다는 말은 애초에 원본 데이터가 조작되었다는 뜻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녹화 날짜는 분명 파일명에만 표시되어 있고 동영상 안에는 시간 표시만 있었다. 파일명만 바꾸는 거라면 그리 어렵지 않았으리라. 
나는 그 제방도로를 전체 9킬로미터에 이르는 커다란 밀실로 생각했다. 정말 밀실이 성립하는지, 열쇠도 확인하지 않고 추리 게임에 빠져 있었던 꼴이다.

 

- 그런데 다운 코트를 보다가 생각이 났다.
"아까 히사카 에이코 씨한테 뿌린 건 뭐였어?"

그거, 나도 조금 들이마셨는데. 오사나이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후춧가루, 해롭지는 않아."
"재채기가 나서 부러진 갈비뼈가 아팠어."
"미안해."
"후춧가루는 왜 갖고 있었어?"
오사나이가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간호사가 고바토에게 약을 먹인다는 건 짐작하고 있었어. 적진에 뛰어드는데 경계하는 건 당연하잖아? 정말 해머를 가져올 걸 그랬다고 생각했을 정도인데."

- "... 응?"

"어? 왜 그래?"
설마. 설마 아니겠지만, 살짝 눈치채고 말았다.
"오사나이, 나를 친 뺑소니범 때문에 화가 나 있었구나."
어둠 속에서 오사나이가 눈썹을 바짝 치켜세웠다
"당연한 소리."
응. 나도 결코 관대한 마음은 가질 수 없었다.

- 거기까지 말하고 오사나이는 자기를 가리켰다.
"어? 고바토, 설마 내가 계획했다고 생각해?"
오사나이는 히사카를 만났으니 그 누나가 기라 시민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라는 말을 들었어도 이상할 것 없다. 그 정보와 병원 안에서 누가 내게 수면제를 먹이고 있다는 추측을 연결해 보면 히사카 에이코 씨를 의심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흐름이다. 
아니면 더 단순하게, 오사나이는 병실 밖에서 규칙대로 이름표를 단 히사카 에이코 씨를 본 건지도 모른다. 다만 그 경우에는 아무리 내가 자고 있었어도 어떻게든 간호사의 정체를 알려주었을 거라고 믿고 싶지만. 
그리고 나는 이런 생각도 했다.
"범인에게 최악의 결말이라는 건, 오사나이에게는 최고의 복수였을지도 모르겠네."
오사나이는 내 의혹을 코웃음으로 넘겼다.
"그럴 리가. 범인이 오늘 밤 여기에 온다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하지만 불을 켜도록 유도해서 내가 깨어 있다는 걸 밖에서 알도록 한 건 오사나이였잖아."
"어두워서 위험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게다가 미우라가 늦게 도착할 걸 미리 알 방법도 없었고."
만약 제때 왔다면 히사카는 오사나이와 함께 이 병실에 왔을 것이다. 그리고... 누나와 맞닥뜨렸을 것이다.

- "히사카하고 누나를 만나게 하면 재미있겠다고, 그런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는 거야?"
오사나이는 허리춤에 손을 얹고 나를 쏘아보았다.
"고바토,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미, 미안."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지."
나는 침대 위에서 웃었다. 오사나이는 왜 웃느냐는 듯 눈썹을 실룩거렸지만 이윽고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 오사나이에게 창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했다. 몸은 아직 차가웠지만 바깥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몰랐는데 근처에 절이라도 있는 듯했다.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말이야."
무슨 뜻이 있어서는 아니고 그냥 말했다.
"히사카 에이코 씨가 나를 죽이지 않은 게 겁쟁이라서는 아닌 것 같아. 에이코 씨는 나를 평범하게 간호해 줬어. 위험했던 건 딱 두 번, 머리를 감는데 목에 수건을 너무 세게 둘렀을 때 하고, 처음 휠체어 탈 때 바퀴를 고정하지 않았을 때뿐이었어. ... 에이코 씨는 간호사로서, 직업 정신 때문에 환자에게 해를 가할 수 없었던 게 아닐까?" 
오사나이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고바토의 심리를 뭐라고 부르는지 알 것 같아."
"센티멘털리즘?"
"스톡홀름증후군."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뭐, 히사카 에이코 씨는 단순히 의료사고를 피하고 싶었던 것뿐이리라.

- 그래도 한 가지 기묘한 점이 있다.
히사카 에이코 씨는 나를 차로 친 이튿날 아침 출근해서 내 담당 간호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전에 사고 후 혼미한 정신으로 "이건 죗값이야"라는 말을 들었다.
시간 순서로 볼 때 그 말을 한 사람은 히사카 에이코 씨가 아니다. 그렇다면 누구였을까?
그 누구도 아니었으리라. 굳이 따진다면, 내 목소리였을까?

- 만약 경찰이 에이코 씨의 살의를 눈치챈다면, 나는 조사 과정에서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먼저 나서서 에이코 씨가 나를 노리고 있었다고 밝힐 일은 없을 것이다. 
살해당할 뻔한 공포를 잊을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역시. 아마도... 내게 에이코 씨의 죄를 규탄할 자격은 없을 테니까.

- 차가운 바람이 상쾌했다. 오사나이가 머리카락을 살짝 매만지며 내게 물었다.
"... 다 나으면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내가 혼자 돌아다닐 수 있게 될 무렵이면 오사나이는 분명 이 거리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데려가주겠다는 말이 아니라 단순한 질문이다. 나는 고민해 보았다. 미야무로 선생님이 똑같은 질문을 했을 때는 휴대전화 가게에 가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때는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서둘러 연락해야 할 용건은 오늘 밤 마무리되었다. 그렇다면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 
"'앨리스'일까. 딸기 타르트를 사고 싶어."
예상도 못한 대답이었는지 오사나이가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어?"
"오사나이가 추천해 준 디저트 중에서 그걸 못 먹어봤어. 분명 맛있겠지."
오사나이가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 응. 해마다 조금씩 맛이 다르지만, 항상 굉장히 맛있어. 온통 딸기 범벅이야."
"하다못해 '딸기가 한가득'이라고 말해주겠어?"

- 봄철 한정이었던 '앨리스'의 딸기 타르트는 재작년 봄, 오사나이의 눈앞에서 도둑맞고 말았다. 정확히는 타르트를 앞바구니에 넣어둔 자전거를 도둑맞았다. 그 사건으로, 오사나이는 입학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소시민이 되자는 우리의 맹세를 깨고 말았다. 뭐, 그때는 나도 요모조모 거들었으니 남 말할 처지는 아니다. 

- 몸은 차가워도 머리는 뜨거웠던 모양이다. 바람이 이마를 어루만지니 문득 졸음이 찾아왔다.
"그리고... '세실리아'에도 가고 싶어. 파르페에 도전할 거야."
여름철 한정 트로피컬 파르페는 내게는 벅찬 사이즈다. 하지만 분명 '세실리아'에는 평범한 크기의 파르페도 있었다. 오사나이가 조금 염려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파르페, 괜찮아?"
2학년 여름 사건 이래로 나는 파르페가 거북했다. 하지만 슬슬 극복해도 될 만큼 시간이 지났다.
"괜찮을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파르페가 거북하다는 얘기를 오사나이에게 했던 적이 있었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말한 적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오사나이가 알고 있는 이상 분명 어디선가 말했을 것이다.

 

- 봄이 가고, 여름이 가면, 나는 얼마나 치유되어 있을까? 가을쯤이면 목발 없이도 걸을 수 있을까?
"'벚꽃 암자'의 구리킨톤은 반드시 먹으러 갈 거야. 그건 인식이 바뀔 만큼 맛있었어."
오사나이가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에 들었다니 기뻐. 하지만 밤은 맛있는 해도 있고 떫은 해도 있으니 조금 아쉬운 맛이라도 실망하지 마."
"그럼 이듬해를 기대해야지. 분명 언젠가 맛있는 해도 올 테니까."
"그러네."
칠기와 주단이 연상되는 검은색과 붉은색 기조의 '벚꽃 암자'를, 아마 나는 혼자 찾아가겠지. 어쨌거나 재수생이니 참고서와 공책을 가져갈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맛있는 구리 킨톤을 공부하면서 먹는 건 너무 운치 없을까?

- 종소리가 들린다. 오사나이가 침대에 앉은 채로 시트 위에 한 손을 얹었다.
"... 있지, 고바토, 많은 일이 있었지."
그러게.
"고등학생도, 이제 끝나가네."
그러게, 이제 끝이야.

 

- 우리는 고등학교에 들어오면서 호혜 관계를 맺고, 소시민이 되겠노라 약속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시간과 함께 빛이 바래 보다 온당하고 타당한 개념으로 바뀌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를 조금씩 받아들인 발자취인지도 모른다. 이번에 있었던 히사카 에이코 씨 문제, 겨울철 한정봉봉 쇼콜라 사건을 통해 뼈저리게 깨달았지만 나는 결국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영악하게 휘두른 지혜의 칼날이 누군가의 가슴을 후벼 파도, 그 상처에서 튄 피가 내 손에 묻은 것만 한탄했다. 그런 나를 어떻게 좋아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래도... 스스로가 창피해도 자신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앞으로는 이제 혼자니까.

- "고바토. 삼 년 중에 가장, 이것만은 절대 잊지 못하겠다 싶은 순간은 언제였어?"
뭘까.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내게 돌진하는 자동차와, 시야를 가득 메운, 겨울 하늘에 무겁게 깔린 구름이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언젠가 잊을 것이다. 
내가 대답을 못하고 있자 오사나이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나는 말이야, 지금이야."
종이 울린다. 졸음이 스르르 다가왔다.

 

- "... 입시, 아쉽게 됐네."
그러고 보니 그랬다. 너무 많은 일로 잊고 있었는데 내 대학 입시는 이미 끝나버렸다.
"뭐, 느긋하게 공부해야지."
그렇게 말하자 오사나이가 살짝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고바토는 어느 대학에 갈 생각이었어?"
"나고야였어. 가까우니까. 하지만 지망 대학도 다시 찾아봐야지."
"난, 교토가 좋을 것 같아."

뜬금없다. 깜짝 놀라서 아주 조금 졸음이 달아났다.

"왜?"
"내가 교토에 있는 대학에 갈 거니까."
뭐야. 나는 살짝 숨을 토해냈다.
"그래. 붙으면 알려줘. 축하 메시지 정도는 보낼 테니까."
"안 가르쳐줄 거야."

- 오사나이가 침대 가장자리에 손을 얹었다.
"고바토는 아까 나를 매정한 음모꾼처럼 말했지? 나, 마음에 상처를 입었어."
"... 뭘 그렇게까지."
"게다가 좀처럼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서 나를 몹시 불안하게 만들었어. 그러니 그 죗값을 치러야 할 거야. 내년에 고바토가 올 때까지, 교토에 미로를 만들어둘게."
고요한 밤에 오사나이가 키득키득 웃었다. 나는 눈도 간신히 뜨고 있었다.
"맛있는 가게도 찾아놓을게. 그러니까 꼭 나를 찾아내. 그러면... 마지막 한 알을 줄 테니까."

오사나이가 내 머리맡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봉봉 쇼콜라 한 알을 꺼내 입에 쏙 넣었다. 나는 또다시 거역하기 힘든 졸음에 사로잡혔다. 약 때문이 아닌, 자연스러운 잠기운에 눈이 감긴다.

- "잘 자, 고바토. 나의 차선. 네가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몸조리 잘해. 그리고 새해 복 많이 받아."

- 깊은 밤 저편에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해설

 

고바토, 침대 생활을 하다

마쓰우라 마사토



고바토와 오사나이라는 두 고등학생의 청렴하고 얌전한 소시민이 되고자 하는 마음가짐에서 시작된 탐정 이야기도 마침내 대단원을 맞이했습니다. 두 사람이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는 새사람이 되려 했던 2004년 <봄철 한정 딸기 타르트 사건>을 시작으로,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의 파란을 그린 <여름철 한정 트로피컬 파르페 사건(2006)>, 같은 해 가을부터 일 년에 걸친 두 사람의 발자취와 연쇄 방화 사건을 뒤쫓는 <가을철 한정 구리킨톤 사건(2009)>을 거쳐, 계절 한정 디저트의 이름을 딴 장편 4부작은 고등학교 3학년 겨울 이야기로 피날레를 맞이합니다.

<가을철 한정 구리킨톤 사건> 발표로부터 십오 년의 세월을 인내한 팬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연작 단편집 <파리 마카롱 수수께끼(2020)>로 잠시 숨통은 트였지만 기다리느라 애가 탔겠지요. 재미는 물론이지만 심각하기도 한, 절대 후회 없을 신작입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에 대한 기록도(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확실하게 실려 있습니다. 부디 만끽하시길.

그리고 <흑뢰성(2021)>과 <가연물(2023)>이라는 최근 작품으로 요네자와 호노부를 알게 되신 분들께. 이건 미스터리로서 실로 놀라운 수작입니다. 마지막에 휘몰아치는 진상규명 장면의 훌륭한 박력은 산뜻하면서도 가슴에 오래 머무를 진한 감정을 남깁니다. 이렇게 힘이 깃든 작품을 놓칠 수는 없지요. 한 가지 주의를 드린다면, 시리즈 첫 작품 <봄철 한정 딸기 타르트 사건>은 먼저 읽어보시는 게 좋습니다. 이 작품에는 배경지식을 갖고 읽어야 참맛을 느낄 수 있는 장치가 숨겨져 있으니까요. 그걸 놓치면 아깝지 않겠습니까?

... 

그런 고바토에게 식사부터 배설, 청결 유지, 통증을 다스리는 방법까지, 입원 생활의 모든 것은 난생처음 겪는 일입니다. 물론 당사자로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만, 담당 의사와 간호사의 도움까지 받아야 하니 그야말로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를 일투성이입니다. 사실적으로 펼쳐지는 생생한 세부 묘사를 읽다 보니 입원 경험이 없는 저는 어느새 잔뜩 오그라든 채로 그 상황을 지켜보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당사자인 고바토는 몸을 뒤척이는 것조차 금지당합니다. 아아, 그래요. 시리즈의 탐정이 병원 침대 위에 누워서 진저리를 치며 천장을 노려보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미스터리가 있었습니다. 1951년에 발표한 조지핀 테이의 기념비적 명작 <시간의 딸>입니다. 탐정은 앨런 그랜트 경감으로, 범인을 추적하다가 맨홀에 빠져서 부득이하게 입원 생활을 합니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로 리처드 3세의 악명에 의혹을 품고 문헌만을 토대로 역사적 사실을 뒤집는 시원한 담론을 펼칩니다. 이 과정이 참으로 유쾌해서, 이처럼 시리즈의 탐정이 '침대탐정 Bed Detective'이 되어 역사 속 수수께끼에 도전한다는 설정은 훗날 다카기 아키미쓰의 <칭기즈 칸의 비밀(1958)>, 콜린 덱스터의 <옥스퍼드 운하 살인사건(1989)>이라는 작품들을 낳았습니다.

요네자와 호노부는 기초 자료만으로 과거의 특정 인물의 본모습을 파헤치는 걸작이자 '고전부'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인 <빙과(2001)>로 데뷔한 작가입니다. 그렇기에 역사 미스터리에 대한 관심도, 작품을 써내는 실력도 넘칠 만큼 갖추고 있다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겨울철 한정 봉봉 쇼콜라 사건>은 그런 종류의 미스터리가 아닙니다. 어째서일까요? 제 생각에 이것은 침대 탐정의 초심과 상관이 있습니다. 초반부터 휴식 중에 나누는 수다가 전면에 드러나는 다카기 아키미쓰 작품을 제외하면, 조지핀 테이와 콜린 덱스터의 작품 속 주인공은 직업 경찰로, 거동을 하지 못하면 직무를 수행하지 못합니다. 그러다 우연히 역사 속 수수께끼가 굴러 들어와 기분 전환 삼아 문헌을 찾아보기로 하고, 평소와 달리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상황인데도 그랜트 ...

 

...


두 사람의 (고등학교 입학 당시) 슬로건은 태어나기 전부터 아이러니한 주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해가 없도록 첨언하자면 이 파트에는 이 시리즈의 코믹한 탐정 이야기의 매력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고바토와 오사나이의 행동을 그려나가는 필치는 언제나 그렇듯 매끄럽지만, 곳곳에서 슬그머니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이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이입니다. 서로의 언동에 익숙하지도 않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조심스레 살피기도 합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아직 확립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상대의 행동에 깜짝 놀라는 반응은 굉장히 싱그럽습니다. 이는 과거 이야기에서만 맛볼 수 있는 재미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 더 덧붙인다면, 확립되지 않은 관계이기 때문에 두 사람의 미래를 예감하게 하는 미묘한 어긋남을 엿볼 수 있는 순간도 있습니다. 가령, 제5장에서 오사나이가 초등학생처럼 작다는 이유로 신뢰받지 못한 경험을 말했을 때, 고바토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궤변처럼 들리는데"라고 대답합니다. 그런 건 이해할 수도 없고, 이유가 되지도 않는다는 감각은 참 올바르지만 이런 편견을 가진 사람이 실제로 있다는 것, 그것을 경험함으로써 받는 마음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이 이때의 고바토에게는 결여되어 있습니다. 다소 잔혹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사나이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느껴졌다"라는 서글픈 묘사를, 두 사람의 미래를 위해 기억해두고 싶습니다.

자, 회상 파트는 이 정도로 하고 드디어 후반의 전개를 다뤄보기로 할까요. 단, 지금부터는 진상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니, 그 내용을 성대하게 다룰 예정입니다. 부디 본문을 다 읽은 뒤 보시기를. 

기다림 끝에 마침내, 제11장에서 진상 규명의 신호탄이 울려 퍼집니다.

놀랍게도 규명 대상은 삼 년 전 여름의 수수께끼가 아닙니다. 현재 고바토의 입원 생활, 바로 그것입니다. 규명해야 할 무언가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청천벽력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전개일 것입니다. 그뿐이겠습니까. 익숙해진 일상의 배후에서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던 사태, 존재조차 몰랐던 범죄가 고바토와 오사나이의 응수(추리의 연쇄)로 폭로됩니다. 대체 나는 지금까지 뭘 보고 있었던 걸까. 한탄이 나옵니다. 

이런 추리소설의 형태에서 저는 한 위대한 선배를 떠올렸습니다. 작가가 경애하고 본보기로 삼고 있다고 <요네자와야 서점(2021)>에서도 거듭 표명한 아와사카 쓰마오입니다. 어느 작품이라고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아 아이이치로' 시리즈를 중심으로 하는 초기 단편들에는 언뜻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마법처럼 범죄와 유사한 사건)의 존재를 추리로 백일하에 드러내는 장면을 지닌 명작이 여럿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고의 사례는 <겐에이죠>이외의 상업지에 아와사카가 처음으로 집필, 발표한 작품들입니다. 관심 있는 분은 개별적으로 찾아보셔야 하겠지만, 역시 비교 사례가 필요하겠지요. 거기서 떠오른 것이 이 시리즈 첫 번째 작품 <봄철 한정 딸기 타르트 사건>입니다.

일상 속의 여러 기묘한 사건에서 고바토와 오사나이가 탐정활동에 애쓰는 사이, 뒤에서는 어떤 범죄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고바토는 가느다란 밧줄 위를 건너듯 아슬아슬한 추리의 연쇄로 그 정체를 밝혀냅니다. 유쾌한 일상의 이면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 줄 상상도 못 했던 독자는 강렬한 충격을 받습니다. 아시겠지요? 이것은 이 작품에서도 공통되는 구조입니다. 하지만 요네자와는 여기서 첫 작품과 완전히 똑같은 구조를 꾀했을까요? 아니, 그렇지 않을 겁니다.

...

반론을 하자 고바토는 곧바로 가설을 철회합니다. 다른 가능성을 배제하는 이 묘사는 조금 무섭고도 인상적인데, 현재 시점의 뺑소니 사건에서 이 반론이 뒤집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연히 도로를 걷고 있던 고바토를 범인이 의도적으로 해치려 했으니까요.

오사나이는 "고바토 주장이 맞는다면 뺑소니범은 히사카를 친 뒤에 다시 진짜 표적인 내 쪽으로 돌진했다는 뜻이야. 아니야, 고바토, 그건 성립하지 않아"라고 확실하게 부정하는데, 이 점이 현재의 사건과는 다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우연한 행동이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논리적으로 보이는 반론을 뒤집은 것은 걸어오는 사람이 고바토임을 깨달은 순간, 범인을 별안간 덮친 살의입니다. 여기에는 어쩌면 애거사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 시리즈 중 <깨어진 거울(1962)>의 영향을 찾아봐야 할지도 모릅니다. 순간적으로 불타오른 살의에 사로잡힌 채 과감하게 무기를 들어 피해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그 인상적인 범인과 어디가 닮았고 어디가 다른지, 그 점은 독자 여러분의 판단에 맡기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렇게만 기록해 두겠습니다.

 

사람의 심리나 인간관계의 오묘함은 때로 추리의 영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곳으로 사람들을 데려가기도 합니다. 혹은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나서야 비로소 논리로 도출되는 진상의 형태가 갖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요네자와가 데뷔 이래로 항상 고민하는 주제로 보입니다. 이 작품 곳곳에도 그런 생각이 반영되어 있고, 물론 앞서 서술한 모순(처럼 보이는 것)도 그 일환으로 넣어두었을 것입니다. 논리를 존중하는 추리소설이라고 해서 결코 논리만 읊어대는 건 아니니까요. 

마지막으로 종장에서의 고바토와 오사나이의 모습을 잠시 언급하겠습니다.

새해 종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조용히 지난 삼 년의 고등학교 생활을 되돌아보는 두 사람의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습니다. 그리운 추억을 되짚어가지만 고바토는 마지막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이제, 혼자니까." 그 한마디에 담긴 고독감에 가슴이 서늘하게 얼어붙었지만 아무래도 오사나이의 마음은 달랐던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면 <가을철 한정 구리킨톤 사건>의 결말 부근에서 오사나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난 고바토가 최고의 상대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분명 언젠가 더 똑똑하고 다정한 사람하고 만날 기회가 있을 거야. 난 그날이 올 거라고 믿어. 하지만 고바토. 이 동네에 사는 한, 후나도 고등학교에 다니는 한, 백마 탄 왕자님이 내 앞에 나타나기 전에는... 내게는 네가 차선책이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고바토는 계절 한정품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이라는 하나의 계절에만 필요한. 하지만 이 작품에서의 경험을 통해 오사나이는 계절이 바뀌어도 조금 더 함께 있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똑똑한 척 여러 말을 늘어놓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마지막에 자연스럽게 잠에 빠지는 고바토를 “나의 차선"이라고 부르는 오사나이의 목소리는, 분명 세상에 더없이 다정한 목소리였을 거라고. 


 

...

 

지식을 갖추지 못했다면, 갖고 있어도 미처 그것을 놓친다면? 사실 무엇을 놓쳤는지도 모를 테니 고민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것이 좋아하는 작품이고, 그 안에서 뭔가를 놓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다 읽고 나서도 후련하지 않겠지요.

2024년은 요네자와 호노부 작가의 '소시민' 시리즈를 사랑하는 팬들에게 무척 행복한 한 해가 되었으리라 믿습니다. 작품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면서, 살아 움직이며 목소리를 가지고 말하는 고바토와 오사나이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국내에도 OTT 서비스를 통해 많은 원작 팬들이 보셨겠지요. 2025년에 공개될 후속편 발표도 있었고, 제가 지금 이렇게 후기를 쓰고 있는 '소시민'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 <겨울철한정 봉봉 쇼콜라 사건>도 무사히 우리나라에서 출간됩니다.

그런데 출간 준비를 앞두고 한 가지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저를 비롯한 대부분의 독자들이 오사나이의 불가사의한 언동을 이해할 수 있었던 건, 그녀의 행동을 보며 친절하게 저희에게 해설해 주는 고바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오사나이는 과거에 한 번, 현재 시점에서 한 번, 고바토를 만났을 때 조금 독특한 인사를 합니다. "오와아, 녕"이라는 대사인데, 이와 똑같은 표현이 하기와라 사쿠타로가 1917년에 간행한 시집에 실린 <고양이>라는 작품에 나옵니다. 시 속에서 해당 표현은 두 마리 고양이가 병을 앓는 사람이 사는 집 지붕 위에서 서로 주고받는 인사말로,  "오와아"는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나타낸 의성어입니다. 작가에게도 문의해 보니 그 시의 인용이 맞다고 확인해 주었습니다만, 막상 이 부분을 주석으로 달자니 마지막 순간에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바토는 오사나이가 두 번이나 건넨 이 인사를 결국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시는 국내에 소개될 때 해당 표현이 "야오옹"으로 번역되었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렇게 옮길 경우 고바토가 그저 조금 특이한 감탄사가 붙은 인사로 받아들이는 소설 속 장면들과 어울리지 않게 됩니다. 

사실 고등학생이 된 고바토는 본인의 성격을 반성하고 고치고 싶어 하며 항상 언동을 조심하지만, 오사나이는 그런 고바토를 상대로 가끔씩 퀴즈를 내듯 자그마한 수수께끼들을 던집니다. 이번 작품의 도입부에서 '붕어빵을 천천히 먹은 이유'처럼요. 그렇다면 결국 이 "오와아, 안녕"도 고바토가 과연 풀 수 있을지, 고바토의 수준을 가늠해 보려고 던진 수수께끼였을지도 모릅니다. 고바토는 결국 알아채지 못했고, 그것을 작가가 직접 어딘가에서 언급하지 않은 이상 작품의 일부가 되는 주석으로 삽입하는 것은 번역의 영역을 넘어선 과도한 개입인 것 같아 망설여졌습니다. 아름다운 여운을 남기며 본편이 마무리된 '소시민' 시리즈에 역자 후기는 불필요하겠지만, 이런 이유로 부득이하게 편집부에 후기 페이지를 마련해 달라 부탁드렸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요네자와 호노부와 고전부>에서 공개한 오레키 호타로의 책장에 하기와라 사쿠타로 시집이 꽂혀 있다는 점입니다. 언젠가 오사나이와 고바토의 책장이 공개되는 날이 온다면, 오사나이의 책장에 같은 책이 있지 않을까? 혹은 그 인사를 받은 게 호타로였다면 어떻게 응수했을까? 그런 상상을 해보며 고바토와 오사나이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려봅니다.

2024년 12월

김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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