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다나카 요시키 외] 도박 눈

일루젼 2025. 4. 24.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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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아야쓰지 유키토 / 아리스가와 아리스 / 오사와 아리마사 / 시마다 소지

다나카 요시키 / 미치오 슈스케 / 미야베 미유키 / 모리무라 세이이치 / 요코야마 히데오 / 정태원
출판 : 태동출판사
출간 : 2010.09.07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정말이다. 

 

<도박눈>을 처음 읽었을 때는 <오래된 우물>도 <미래의 꽃>도 '리처드 3세'나 <시간의 딸>과 연결시켜 읽을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물론 그렇게 읽었어도 재미있었지만-

 

이번에 발췌를 정리하면서는, <시간의 딸>과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을 읽은 뒤라 그런지 조금 다른 부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우물>은 그 자체로도 아주 서늘한 단편이지만, 헨리와 리처드와 앤 같은 이름에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이면 '화이트우드 가'와 '런던' 위로 또 다른 헨리와 리처드의 이야기가 덧씌워진다. 특히 전체 이야기의 핵심 키가 될 수 있는 '어머니의 이름'은 아주 재치 있는 트릭이었다고 생각한다.

역시 다나카 요시키. 

 

<미래의 꽃>은 다루고 있는 사건과 풀이 과정 자체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지만, 그 형식에 있어서는 <시간의 딸>과 같은 '침상 추리물'이다. 사건 현장에 직접 방문하지 않은, 사건과는 동떨어진 제3의 인물이 전혀 다른 공간에서 주어지는 단서만 가지고 추리한다는 점이 특징. 어떤 의미로는 진정으로 독자에게 '평등한' 룰일지도 모르겠다.   

 

<눈과 금혼식>의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이미 <하얀 토끼가 도망친다>에 이 작품에 대한 스포를 친절하게 남겨 주었다. 

   

"마감까지 여유가 별로 없어서 거절하실까 봐 걱정했어요. 기뻐라. 매수는 50매... 아, 이건 말씀드렸죠. 요청 사항이 하나 있는데, 아리스가와 씨는 다잉 메시지가 나오는 작품을 써주셨으면 합니다."
이번 미스터리 특집은 밀실이니, 알리바이니, 의외의 흉기니 하는 본격 미스터리의 서브 테마를 골고루 갖출 거라고 한다.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정말 재고가 없었나 생각해 보았다. 가타기리에게 들은 집필진은 확실히 호화로워서, 레벨이 떨어지는 작품을 쓸 수는 없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곁들이면서 50매 속에서 색다른 맛이 있는 이야기. 플롯은 제쳐두고 일단 다잉 메시지를 고안하지 않으면.

 

 

<도박 눈>의 부제가 '새로운 50년을 향하여'인 데다, 작품마다 '50'과 관련된 언어유희를 사용한 이유는 아마 이 단편집이 원래는 출판사의 50주년 기념 특집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번역을 거치며 분량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각 단편은 대체로 40페이지 정도의 분량이다. 

 

이 책이 번역될 당시에는 가장 인지도 있는 작가가 '미야베 미유키'였기 때문인지 대표 작가로 수록되어 있는데, 한 편씩 읽다 보면 정말 호화로운 작가진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일본 소설을 자주 읽는다면 한 번쯤은 들어본 작가들일 텐데, 호흡도 길지 않고 꽤 재미있는 편이니 구해서 읽어보시길. 

 

덧. 가장 재미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확실히 <도박 눈>이다. <도박 눈>이 표제인 것에 불만은 없다. 

아, 그러면 당연히 <도박 눈>의 저자가 대표 저자가 되는 건가? 그럴 수도 있겠다.     

 

덧2. 언젠가 또 다른 지식과 관점으로 이 글들을 돌아보는 때가 올 텐데... 부디 조금 부끄러울 만큼 성장해 있기를.

 


   

  

- 10월 하순의 어느 날, 이런 이야기를 재빨리 아내에게 했다.

"뭔가 이상한 꿈을 꿨는데..."
아내는 내 꿈 이야기를 듣고, 처음에는 섭섭할 정도로 무성의한 반응을 보였다.
'흥' 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창밖을 보더니 마당의 나무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앗, 박새가 왔어요. 저기 봐요. 이 계절에 마당으로 날아오는 박새는 드물어요."

- 작은 새 한 마리가 나뭇가지에 앉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얀 가슴에 검은 머리, 하얀 볼, 청색이 들어간 회색 날개.
참새와 비슷한 크기인데, 참새보다는 조금 둥근 느낌이다.

그런가, 저게 박새인가? 들새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기 때문에, 나는 적당히 맞장구를 칠 수밖에 없었다.

- 얼마 전부터 아내는 마당에 날아오는 새들을 관찰하는 것이 취미다. 나에게도 가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야나기타 쿠니오의 <들새 일기>에 의하면 박새라는 이름은 원래, 우는 소리가 '시쥬(40)'로 들려서 여기에 '카라(カラ)'를 붙인 것이에요. '카라'는 작은 새의 총칭이라고 해요. 한자로는 '四十雀(사십작)'으로 쓰지요. 참새 마흔 마리의 가치가 있다는 설이, <위키피디아>에 나와 있어요. 당신은 어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요?" 
"아아... 글쎄."
"하지만 저, 넥타이처럼 보이는 가슴의 세로줄이 귀엽지요?"

"그래... 확실히."

- 잠시 후 마당의 나무에서 박새가 날아가자, 아내는 갑자기 시선을 나에게 돌리더니 이야기를 원래로 돌렸다.
"죠로즈카 가까이에 있는 호수는 죠로 호수지요?"
"죠로 호수는 알지만, 숲 속의 동굴은..."
"몰라요? 옛날에 둘이서 갔을 때 탐험했잖아요?"
"몰라. 물론 같이 탐험한 기억도 없어."
"..."

"그럼 역시, 단순한 꿈인가?"
나는 혼자서 이해했는데, 아내는 '글쎄요'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 "훨씬 옛날, 아이 때 갔거나..."
아이 때 혼자서? 그런 숲 속의, 그런 동굴에?
그런 기억은 정말 없다. 하지만 수십 년 전의 일이라면 잊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 동굴에 있던 '이상한 것들'은 조금 마음에 걸려요."
"그래, 하지만 어차피 꿈이니까."

 

- "어떤 '이상한 것들'이었는지는 전혀 생각나지 않아요?"

"응, 전혀."

"그래요?"

아내는 입을 다물면서 다시 창 너머 마당을 보았다. 그러나-잠시 후 문득 생각난 듯이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일지도 몰라요."
나는 무심코 '뭐?' 하고 소리를 질렀다.
"틀림없이 *****에요. 옛날부터 죠로즈카의 땅 밑인지 죠로 호수 밑인지에 살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요."

 

- '*****'라고 지금 아내가 발음한 그것.
기억에 있는 한 지금까지 내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말이다. 알고 있는 문자를 사용해서 어떻게 표기하면 좋을지도 모른다. 어느 나라의 언어도 아닌, 소리의 연속...

"그게 뭐야?"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내는 조금 멍한 눈으로 나를 보면서 말했다.
"그거 몰라요?"
나보다 훨씬 오래 이 도시에 살았으면서... 이런 말이 그 뒤에 이어질 거라고 예상했다. 지난 몇 년 동안, 수없이 경험해 온 대화이기 때문이다.

- 나는 이 도시에서 태어나, 인생의 대부분을 이 도시에서 보냈다. 아내가 태어난 고향은 남규슈의 네코메지마. 대학에 들어가려고 이곳으로 나와, 이후 이 도시에서 계속 살고 있다. 하지만 확실히 아내에 비하면 내가 훨씬 이 도시에서 오래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기억이 날이 갈수록 흐려지고 있는데, 그 탓인지도 모른다. 

- 형사는 무뚝뚝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토막을 내서 태워야 했다고만 말합니다. 마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상대가 되살아난다고 말하려는 표정으로..."
"그런 일이... 영화 '이블데드'도 아니고."
"그건 뭡니까?"
"아, 아니오..."
이 사람은 샘 레이미의 명작을 모르는 모양이다, 하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내가 너무나 일반적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나는 바로 알아챘다.

- "그렇다고 해도 정확하게 50개라는 것은..."
왜 그 숫자에 집착했을까? 집착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목소리가 들렸다고 했습니다."
형사가 한숨 섞인 소리로 말했다.
"50개가 아니면 안 된다, 50개로 해라, 틀리면 안 된다... 이런 식으로요."

그 말을 듣고 나는 무심코 한숨을 쉬었다.
"말하자면 전파계입니까?"

(주: '머릿속에 누군가로부터의 소리•사고지시•방해가 전파로 도착한다'라고 호소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 전파계... 전파계 신주.
말은 재미있지만, '수수께끼'의 대답으로서는 너무 당연해서 오히려 시시하다. 어쨌든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 ...

- "그런 것이 있었습니까?"
"아니오, 설마... 농담입니다."
형사는 이죽이죽 웃음을 지우며 '괜찮습니까?'하고 말하며 입가를 끌어올렸다.
"결코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사건 후 우리는 현장과 그 주변을 철저히 수색했습니다. 옥내나 옥외를 막론하고 철저하게 수색했지만, 어디에서도 그런 여분의 조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꼬리는 물론 남성기도, 세 번째 팔이나 열한 번째 손가락 같은 것도요." 

- "그래서 말입니다, 당신의 생각은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밖에 없군요."
"하지만 왜 그런...?"
나도 그다지 리얼리티를 느끼고 제시한 가설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밖에 어떤 가능성이 있을까?
50회의 절단. 50개의 인체 조각. - 왜 숫자가 맞지 않을까? 왜 이런 모순이 생기는 걸까?

- "DNA 감정 결과가 나올 겁니다. 그러면 그 부분의 문제도 확실히 밝혀지겠지요."
머리가 혼란해서 입을 다문 나에게 가미야 형사가 말했다.
"결과에 따라서 도바는 석방될지도 모르지만, 그의 정신 상태를 ... "

- 담 바로 맞은편 옆으로 시로카니 신사의 경내에 있는 숲이 펼쳐져 보인다.
숲의 나무들 사이로 어쩐지 본 기억이 있는 들새가 보이기에 내가 물었다.
"아, 또 박새야?"
그러자 아내는 쌍안경에서 눈을 떼고 살짝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그게 아니라, 저것은 고쥬카라(五十雀)라고 아주 희귀한 새에요. 이런 저녁에 여기까지 내려오다니..."
"고쥬카라? 그런 이름의 새도 있어?"
"시쥬카라(四十雀 , 박새)와 비슷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이 이름의 유래가 된 것 같아요. 아, 봐요. 머리를 아래로 하고 줄기에 머물러 있지요? 저 움직임이 고쥬카라의 특징이에요."

- "박새가 참새 40마리의 가치가 있다면, 고쥬카라는 참새 50마리의 가치가 있다는 걸까?"
"아아, 음..."
쌍안경을 계속 보면서 아내가 말했다.
"하지만... 그건 어떤 가치로 생각하는 걸까요?"


<절단>, 아야쓰지 유키토



- "부인에 의하면 '범인을 본 것은 아니야'하고 다도코로 씨가 확실하게 말했다고 합니다. 사건 전후에 수상한 사람을 목격한 것도 아니고, 어떤 것을 들은 것도 아닙니다." 
히무라의 미간이 좁혀졌다. 사메야마의 이야기는 나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히무라는 쓴웃음을 짓고 나서 머리를 긁으며 물었다.
"그런데 범인을 짐작했다는 것은 어떤 일입니까? 영적인 감각이나 신의 계시 따위로 범인의 정체를 밝히려고 한다면 곤란합니다."
"다도코로 씨는 매우 근엄한 인물로, 그런 종류의 것은 전혀 믿지 않습니다. '어벌쩡한 이유로 경찰에 가려고 할 리가 없습니다'하고 부인이..."
"그렇다면 왜?"
경부보는 안경테를 잡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했던 것을 우리에게 말했다.
"수수께끼입니다. 다도코로 씨가 어떻게 범인을 알았는지는… 히무라 선생과 아리스가와 씨가 그 수수께끼를 풀었으면 합니다."

- 본채의 1층은 여유 있는 거실, 식당, 주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테이블과 소파 등의 가구와 조명 기구, 커튼, 카펫, 벽에 걸린 시계와 재스퍼 존스 스타일의 추상화 등 모든 것이 잘 조화되어 있다. 한마디로 평하면 취미가 고상하다. 장식 선반에 있는 지나치게 귀여운 나무 카파(河童) 인형은 분위기와 좀 맞지 않았는데, 나중에 들은 말에 의하면 신혼여행에서 산 추억의 물건이다.
이런 방에 들어가면 주인의 감각뿐만 아니라 정신의 건강 상태를 느낄 수 있다. 화려하지도 않고, 수수하지도 않고... 노년의 부부가 하루의 대부분을 지내는 장소로서 나무랄 데 없어 보인다.

- "아버님을 모셔올까요? 오늘은 병원에 가지 않기 때문에 방에서 주무시고 계세요. 퇴원한 후에는 낮잠이 일과가 되었습니다." 
"이제 일어날 때가 되었어." 
아즈미는 3시 30분을 가리키는 시계를 보며 말했다. 이 방의 분위기처럼 차분하고 품위 있는 부인이다. 마음도 강할 것이다. 계속 재난을 당했는데도 수척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거기에 올라가 봐도 됩니까?"
"네, 그렇게 하세요."
위에서 현장 주위를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다고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 야요이의 안내를 받아 옥상으로 올라가자, 구루미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올라온 것이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다.
구루미가 아무 말도 없이 난간을 잡고 있는 히무라를 찬찬히 보고 있어서, '방해해서 미안해. 금방 끝날 거야'하고 나는 사과의 말을 했다. 옆에 있는 나에게 조교수는 시시한 것을 물었다. 
"왜 갑자기 표준어를 쓰지?"
"미국에서 살다 온 아가씨니까. 무심코 영어가 나올 뻔했어. 뭔가 재미있는 게 보여?" 
"보는 대로야."
그가 서 있는 곳은, 다도코로 부부가 눈을 봤다는 창문 바로 위였다. 이상한 점은 없다. 히무라는 바로 그 자리를 떠나 '이제 됐습니다' 하고 말했다. 볼만한 것이 없었을 것이다.

 

- "그렇게 형편 좋게 풀리지는 않아."

겨우 내뱉은 독백으로 보아, 히무라가 내 마음을 읽은 것 같다.

"체념하기에는 일러, 뭔가 생각이 났어."
이것은 놀랍다. 옥상에서 뭔가 발견한 것 같지도 않았는데...

"아까까지는 난공불락의 성을 공격하는 것 같았어. 철판 같은 미끌미끌한 벽을 어떻게 올라가지?"
"겨우 손가락을 걸칠 수 있는 곳이 있겠지."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 그 다음날, 오후 6시.
다도코로 저택 1층의 소파에는 천연 대머리인 후나비키 경부가 앉아 있었다. 지금부터 시작되는 흥미 깊은 이벤트에 입회하기 위해, 수사본부에서 뛰어나온 것이다. 그 옆에 사메야마 경부보, 그 맞은편에는 다도코로 부부... 나는 테이블 가까이에 있고, 히무라는 커튼이 닫힌 창 앞에 서 있었다. 
"선생."
안의 문에서 다카야나기 형사가 얼굴을 내밀고, 오른손으로 OK 사인을 만들었다. 사전에 협의한 대로 준비가 완료된 것 같다. 후나비키 팀의 홍일점 여형사는 최연소 형사인 모리시타와 함께 특별한 임무를 맡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다도코로 부부만 모른다. 다만 부탁을 받고 장소를 제공한 후 참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벤트라고 해서 ...

<눈과 금혼식>, 아리스가와 아리스



- 50층에 도착할 때까지 엘리베이터는 도중에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1'에서 시작한 디지털 표시 숫자가 '50'으로 변해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나는 계속 문 위의 표시판을 노려보았다.
이건 정말 기적 같다. 하지만 그럴 것이다. 50층까지 논스톱으로 올라왔기 때문이다.

틀림없다. 지금 나에게는 흐름이 있다. 나는 확신했다. '언젠가 온다. 언제가 올 것이다' 하고 믿고 있지만, 솔직히 지난 몇 년 동안은 그런 자신을 잃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젯밤 휴대전화가 울리고, 이 신주쿠 타워호텔의 50층으로 오라는 말을 들었을 때, 뭔가 움직이기 시작한 것을 느꼈다. 바로 운명의 톱니바퀴라는 녀석이다. 내 인생은 오늘부터 완전히 변한다. 

- 엘리베이터의 문 앞은 긴 복도였다.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고, 아무도 없고 조용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나는 재킷 자락을 잡아당긴 다음, 넥타이의 매듭이 느슨한지를 손가락 끝으로 확인했다.

 

- 막다른 방이다. 전화를 한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50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린 다음 복도를 똑바로 가서 막다른 방까지 와라."
"거기에 뭐가 있지?"
내가 물었다.
"자네를 기다린다."
"누가?"
"물을 필요도 없을 텐데."

- 남자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 하지만 본인이 아닌 것은 알고 있다. '용(龍)'이 직접 전화를 할 리가 없다. 틀림없이 '용'에게는 비서와 보디가드가 몇 명 있다. 어쨌든 전설의 남자이기 때문이다.
전화를 한 사람은 틀림없이 여러 비서 중 한 명이다.
영화 같은 데에도 자주 나온다. 가슴이 발달하고 새까만 선글라스에 검은 슈트를 입고, 새하얀 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있는 남자들. 귀에는 무선인지 전화 이어폰인지를 끼고, 결코 큰 소리로 말하지 않는다. 

- 나는 그런 것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역시 내가 되고 싶은 것은, 그들의 정점에 선 남자다. 선글라스에 양복을 입은 남자들을 군단으로 거느리고, 그늘에서 이 거리를 지배하는 초거물. 본명과 얼굴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고, 불릴 때는 단 한 마디 '용'으로 불린다. 어떤 야쿠자도, 중국 마피아도 '용'이라는 소리를 듣기만 해도 깜짝 놀란다. 그리고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고 목을 ...

"거물 보스라면 중국인입니까?"
"정체는 아무도 몰라. 그저 '드래곤'으로 불러. 용이지."
"왠지 중국인 같은데요?"
"중국인이라면 야쿠자는 무서워하지 않아. 모두의 보스 같아. 그 사람 한마디에 조장의 목이 날아간다는 이야기야. '일단 처치해라!'로 유명했던 ㅇㅇ회의 전 회장도 '드래곤'이 주목하자 은퇴했다고 할 정도야." 

 

- "하지만... '드래곤'이 야쿠자와 다른 것은, 후계자를 거리에서 발견해 지명하는 거라고 해. 어제까지 '드래곤'과 인연도 없고 관계도 없었는데, 어느 날 '내일부터 네가 새로운 드래곤이다'라고 하는 것 같아." 
"에? 어떻게 그런 사람을 찾지요?"
"그래서 '드래곤'이지. 거리를 주시하고 있는 거야. 솜씨 좋고 배짱 있고 '드래곤'의 이름을 이어가는 데 어울리는 사람을 언제나 찾고 있는 거지. 후보를 몇 명 찾으면 계속 관찰한다고 해. 그 관찰도 하루나 이틀이 아니라 몇 년 동안 계속돼. 그렇게 해서 이 녀석이야 말로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발견하면 사자가 오는 거야.

- "사자?"
"그래. '드래곤'의 비서지. 비서는 마지막 테스트를 해서, 그 후보가 새 '드래곤'이 될 사람인지를 확인해."
"테스트입니까?"
"학교의 테스트와는 달라. 목숨을 건 테스트지. 그 테스트를 받으면 '드래곤'을 물려받는 거야."
"그럼 지금 '드래곤'은 나이가 많습니까?"
"몰라. 하지만 '드래곤'에 선발된 사람은 다음 '드래곤'을 찾을 때까지 그만둘 수 없어. 때문에 테스트에 합격하는 사람이 나올 때까지 계속 '드래곤'으로 있어야만 해." 

- 그리고 10년이 지났다. 시마 씨와는 그 후 차츰 만나지 않게 되었고, 신주쿠에서 통 볼 수 없었다. 어쩌면 시마 씨가 새 '드래곤'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다.

- 다음에 '드래곤'의 이야기를 들은 것은, 가부키초의 DVD 가게에 고용되어 점장을 할 때였다. 점원으로는 형편없지만, 인터넷이나 그런 것에 대해 통달한 녀석이 있었다. 간단히 말하면, 오타쿠로서 거리에 떠도는 정보나 불법 사이트를 검색하는 데는 귀신같은 녀석이었다. 
어느 날, 그 녀석이 나에게 뜬금없이 물었다.
"점장, '신주쿠의 드래곤'을 아세요?"
마침 그때 가게에 손님이 있어서 나는 이렇게 꾸짖었다.
"멍청이, 큰 소리 내지 마."
'드래곤'의 관계자가 불법 성인 DVD를 사러 오지는 않겠지만, 혹시 뭔가 있으면 위험하기 때문이다.
"에, 알고 있습니까?"

- 선배의 얘기로, 소프랜드에서 일한다고 한다. 언제나 잘 모르는 우주의 기원이나 인류의 진화 얘기를 길게 해서 모두가 질려 있는데도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어깨의 문신이 드래곤이군요."
우연히 문신 얘기가 나와서 내가 말했다.
"그래요. 나는 그의 여자였으니까."
그 말에 여자가 대답했다.
"저, 그 '드래곤'의 여자였습니까?"
내가 깜짝 놀라서 되묻자, 여자는 나보다 더 깜짝 놀랐다.
"당신, '드래곤'을 알아요?"
여자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 "그래요. 그래서 도망쳤지요. 하지만 마음에 걸려요. 지금이라도 돌아오라고 사람을 보내거든요."
"하지만 '드래곤의 여자'라면 사치스럽고 멋대로 아닙니까?"

"언제나 감시당하는 게 싫었어요. 보디가드나 운전기사가 감시하는 것 같았거든요."
나는 무심코 몸을 내밀었다.

- '드래곤'은 말이 없었다. 나도 할 수 없이 침묵을 지켰다.
"'드래곤'이 되고 싶은가?"
갑자기 '드래곤'이 물었다.
"되고 싶습니다."
"왜?"
"나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머리도 좋지 않고 돈도 없습니다. 배짱은 조금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걸 갖고 있는 녀석은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빠져나오려면 '드래곤'에 선발될 수밖에 없습니다." 

- '드래곤'은 담배를 재떨이에 놓았다.
"본인에게 자신이 없나?"
"네. 하지만 오늘은 조금 갖고 있습니다."
"왜?"
"내가 '드래곤'의 후보가 된 것을 알았으니까요."
'드래곤'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자신감을 지나치게 갖는 것보다 부족한 쪽이 좋은 경우도 있지. 그러나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고 본인이 스스로 정해 버린 사람은 역시 아무것도 될 수 없어."

 

- 나는 잠자코 있었지만, 사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나 자신이 대단하다고 느껴져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자네에게 '드래곤'을 양보해야 할지 아직 나는 모르네. 거기에 적당한 인물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지."
나는 끄덕였다. 시마 씨가 말한 '테스트'다.
  

<50층에서 기다려라>, 오사와 아리마사



- "매우 중요한 일이지. 앞으로 우리나라는 자원봉사 시대로 향해 갈 거야. 일본은 멀지 않은 장래에 국민의 40퍼센트 이상이 65세 이상인 국가가 되기 때문이지. 21세기에는 국민 대부분이 자원봉사자가 되지 않으면, 도저히 대처할 수 없게 될 거야. 영국인은 국민 여섯 명 중 한 명이 어떤 신체적인 장애를 갖고 있다고 해." 
"네, 그래요?"
"그래. 그래서 영국은 자원봉사의 나라이기도해. 영국에 발을 디딘 다음 여기저기 돌아다녔는데, 셰필드라는 곳에 갔을 때의 일이야."
미타라이 씨는 거기에서 잠깐 말을 멈추더니 창밖의 나무들로 시선을 옮겼다.
“교외로 나가면 감자밭이 있지. 너무 많이 걸어서 피곤했기 때문에 길가에 앉아서 쉬고 있었어. 청년들이 눈앞의 밭에 와서 농사일을 시작하더군.”
미타라이 씨는 나에게 시선을 돌리고서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 그들은 먼저 구멍을 몇 개 판 다음 뭔가를 묻고 흙을 덮었어. 처음에는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했지. 그것은 무슨 밭입니까? 하고 물었더니 감자라고 말하더군. 하지만 이상하게 작업 솜씨가 서툴러 보였어. 모두 실수만 해서 조금도 진척이 되지 않는 거야. 뭘 하려는 건지 물었더니, 우선 씨를 심어서 감자를 키우려고 한다는 거야. 그런 다음 커다란 구멍을 파고 그 감자를 심어서 늘리려 한다고 말했어. 내가 묻지도 않은 것까지 자세히 가르쳐 주더군. 

- 왜 아침부터 작업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했지. 오후 시간도 한참 지나서 저녁에 가까웠었거든. 그런데 그중 한 사람이 아침에 집을 나왔다고 말하면서, 버스를 타지 못하고 걸어왔기 때문에 이런 시간이 되었다는 거야. 집이 멀기도 하지만, 휠체어를 타고 있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왜 버스를 타지 못했느냐고 물었더니, 버스가 운전기사 혼자 운행하는 형식으로 바뀌어서 타는 방법을 잘 모른다는 거야. 그리고 많은 사람이 승차장에 모여 있고, 그들이 버스에 오르려면 언제나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다른 시민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서 버스 타는 것을 포기했다는 거야. 

- 그러나 마침내 밭에 도착해서 시작한 작업은 아무리 봐도 밤까지 끝날 것 같지 않았어. 도와줄까 하고 물었더니, 부탁한다고 하더군. 삽을 빌려서 내가 작업의 목적에 맞는 형태로 구멍을 파자, 모두들 감자를 심었어. 균등한 깊이에, 균등한 방향으로, 그런 것에 신경 쓰면서 작업을 했는데, 그들 중에 쓰러진 사람이 있었어. 몸 상태가 나빠서 도저히 작업을 할 수 없다는 거야. 문진을 했더니, 그는 중증 뇌성마비를 갖고 있고, 평소에는 휠체어를 사용하는 사람이었어. 이 작업은 그에게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지. 휠체어에 태워 그늘에서 쉬게 한 후 잠시 그와 얘기를 나누었어. 이 팀에 리더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없다고 해.  

 

<영국 셰필드>, 시마다 소지

 


- 얘기하는 것은 괜찮지만, 실명을 밝힐 수는 없네. 확실히 50년이나 지난 옛날 일이지만 관계자 일부가 아직 건재하고, 이름도 없는 서민의 집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지. 이 나이가 되어서 명예 훼손 같은 것으로 법정에 서는 것은 귀찮네. 그러니 가공(架호)의 토지, 가상(假想)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쯤으로 해 두지.

- 지난번 전쟁으로 유럽도 상당히 변했어. 러시아와 독일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오스트리아도 몇 나라로 분열한 것 같아. 우리 대영제국도 이제 좋은 시절은 다 끝났을 거야. 아아, 아니 이것은 노인의 넋두리네. 그럼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해 볼까? 
미리 말해 두는데, 나는 <스트랜드> 잡지에 나오는 명탐정이 아니네. 때문에 명쾌한 해결을 원하면 곤란하네.

- 당신은 기억하겠지. 런던 경찰청(스코틀랜드 야드)의 평판이 땅에 떨어진 것은, 잭 더 리퍼 사건이 일어난 1888년의 일이라는 것을... 그런데 이전에도 경찰청이 비난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네. 잭이 출현하기 10여 년 전의 일이지. 바로 1877년이었네. 정치적으로는 축하할 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황공하게도 빅토리아 여왕 폐하가 인도의 왕을 겸한 해였으니까. 러시아와 투르크도 전쟁을 시작했는데, 이미 몇 년째 일이라서 아무도 기억하고 있지 않을 정도였거든. 그런데 경찰청은 매우 불명예스러운 꼬락서니로, 런던 시민이 돌과 계란을 던지면 머리를 가리고 도망갈 수밖에 없을 정도였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경관들 자신이 경찰청의 명예를 손상시켰네. 어쨌든 공전의 비리 사건 때문이었지. 아니, 사건 하나하나가 큰 것은 아니었지만, 차례로 표면에 드러나 알게 된 것은 경찰청형사의 반이 나머지 반에게 체포된 실정이었으니까. 

- '런던 경찰청에 둥지 튼 악당들'
이런 기사에다, 여우와 늑대가 경찰 제모를 쓴 그림이 첨부되었던 것을 기억하네.
미안한 말이지만, 이 사건은 나 개인에게 행운을 가져다주었지. 법률학교를 나와 일하면서 사무 변호사 자격을 딸 생각이었는데, 취직이 결정된 법률사무소가 망했다네. 사무소의 주인이 베를린에 출장을 갔는데 도중에 객사를 했어. 그런데 장례식도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아들과 사위가 경영권을 둘러싸고 싸우더니, 결국 각자 다른 사무소를 만든 거야. 

- 어느 쪽 사무소에서도 나를 고용해 주지 않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고 있을 때, 경찰청에 취직하게 되었네. 일시에 그만둔 형사들이 많아, 그 결원을 서둘러서 보충해야 했기 때문이지. 나는 세상물정을 모르는 젊은이지만, 나쁜 일을 한 적도 없고 신원도 확실해서 곧바로 채용이 결정되었다네. 나는 망설일 여지가 없었지. 급료는 얼마였냐고? 말하지 않는 게 좋네. 

- 어차피 여기까지 말했으니, 마지막까지 얘기할 생각이네. 다만 아까도 말했듯이, 실명은 밝히지 않겠네. 자네가 억측하는 것은 자유지만 절도는 지켜 주길 바라네. 열악한 시대에, 신사는 멸종을 앞둔 진귀한 종류로 취급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신사답게 행동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네. 

- 자... 20세기가 되어 독극물의 종류도 터무니없을 만큼 많아졌지만, 19세기에는 조금 단순했다고 생각하네. 독살에 사용되는 것은 오로지 비소였지. 나는 형사가 되자마자, 비소를 사용한 살인사건을 몇 건 만났네. 사실 그 이상으로 많았던 것은 비소를 둘러싼 헛소동이었지. 몸 상태가 조금이라도 나빠지면, 누가 자신에게 비소를 먹였다고 믿는 사람들이 날마다 경찰청으로 달려왔었으니까. 남녀를 불문하고 말이지. 

- 부부라는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한 지붕 아래에 동거하고 있는 관계가 아닌가 싶네. 저울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면, 한쪽이 다른 쪽을 독살해도 전혀 이상하지가 않아. 나도 아내에게 독살당하지 않고 일흔 살을 넘게 살았으니까 행운아라고 할 수 있지. 아내가 외출했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것이지만...

 

- 한 번은 부부가 서로 맞붙어 싸우면서 경찰청으로 왔다네. 서로가 상대방이 자신을 독살하려 한다고 주장하면서 싸움을 멈추지 않았지. 상사는 나에게 부부 싸움의 중재를 하라고 하더군. 나는 지긋지긋했지만, 자초지종을 알고 나서는 놀랐다기보다 어이가 없었지. 남편도 부인도 사실을 말했거든. 남편은 부인에게, 부인은 남편에게 각각 비소를 먹인 거야. 이런 경우는, 대개가 두 사람 다 상대를 죽이려는 의사가 없다고 볼 수 있어. 말다툼하다 화가 나서 상대의 몸 상태를 나쁘게 하려고 한 것뿐이지. 자신의 몸 상태가 나빠지자, 짐작되는 것이 있어서 경찰에 달려온 것이고...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이야기지만, 쥐가 아닌 인간에게 비소를 먹게 했다는 사실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않은가. 부부는 사이좋게 체포되었지. 

- 그렇다고 해도, 그즈음은 비소를 아주 쉽게 구할 수 있었네. 비소뿐만 아니라, 진과 아편도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지. 그 결과, 얼마나 많은 영국인이 폐인이 되었는지 모르네. 프랑스인과 독일인은, 영국인이 식민지의 주민들을 학대한다고 비난하지만, 사실은 영국인이 가장 학대하는 것은 같은 영국인이야. 

- 얘기가 좀처럼 진행되지 않는다고? 아니, 하지만 이것은 의외로 중요한 일이라네.
경찰청의 형사가 되어, 나는 하층 계급의 생활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싫어도 알게 되었지. 단 5파운드의 보험금이 욕심나서 자신의 어린 딸을 템스 강에 버린 남자가 있었어. 공허한 시선으로 허공을 쳐다보는 그를 일으켜 세우면서 나는 곰곰이 생각했지. 이런 비참한 사람이 아니라, 부자이며 우아한 범죄자와 대치하고 싶다고... 이루어지지 못할 만큼 고상한 소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마침내 이루어졌지. 그래, 그것이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사건이네. 

- 무대가 된 것은... 그래, 적당히 화이트우드 가(家)라고 해 두지. 어디까지나 가명이네. 비슷한 이름의 집이 실재한다고 해도, 그건 단순한 우연에 지나지 않아. 이 점을 다짐해 두겠네. 화이트우드 가는 작위조차 갖지 않은 대단한 가문이었어. 주인은 이것도 실명은 곤란하니까, 이름을 리처드라고 하지이 사람이 50대째라고 하니, 나 같은 하찮은 중산 계급이 보면 그저 두려울 뿐이지. 훌륭한 유리 케이스에 들어 있는 가계도를 보여 줬는데, 리처드 본인도 서 칭호를 받았더군. 

- 그 리처드가 가해자인지 피살자인지 알고 싶다고?
먼저 서두르지 마. 모두 얘기할 테니까...

- 리처드 화이트우드의 평판은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어.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사업 운영이나 자산관리도 무난히 해 나가고, 교회나 사교계에서도 적당하게 잘 어울렸지. 모든 일에 빈틈없는 신사여서, 사람들이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존경은 했어. 그 리처드가 묘한 일로 경찰청에 상담하러 왔고, 그 임무가 나에게 일임되었어. 그렇게 비웃는 눈초리는 하지 마. 일임이라는 형태로 맡겨졌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 저주인지 재앙인지 모르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으니 형사를 한 명 보내 달라는 것이었어. 그는 지난 몇 년 동안 경찰청에 기부를 계속했고, 유력한 지인도 많았거든. 뭐, 그런 상황이었어. 리처드 화이트우드의 요구에 대해 나는 그다지 진지하게 고려하고 싶지 않았어. 당연하지. 저주든 재앙이든, 그런 종류의 것은 산업혁명 이전의 어둠에 묻어 두었어야 할 것들이니까. 강령술도 나는 마음에 안 들어했고... 

 

- 애당초 화이트우드 가가 50대나 가계를 이어 왔다는 자체를 나는 믿을 수 없었어. 1대가 20년이라고 해도 천 년이 되는 거잖아. 그게 사실이라면 윌리엄 정복왕보다 오래됐다는 얘기거든. 아서왕이나 크누트 대왕, 알프레드 대왕은 이미 전승의 세계야. 물론 나는 역사에 정통하지는 않지만 말이야. 가계도는 확실히 낡은 양피지에 쓰여 있었는데, 그런 것은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는 거지. 나는 현역 시절에, 손으로 그린 위조지폐도 본 적이 있어. 5파운드 지폐였는데, 언뜻 보면 웃음이 나올 정도로 진짜와 똑같았어. 범인은 펜들턴이라는 타락한 화가였는데, 아무래도 재능을 엉뚱한데 쓴 것 같아. 이런, 실례! 또 얘기가 벗어났군. 노인의 나쁜 버릇이라 생각하고 용서하게.

- 런던에서 열차로 네 시간 걸려, 나는 화이트우드가와 가장 가까운 역에 도착했지. 어디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역사를 나왔을 때 바다 냄새가 났다는 것 정도는 말해 주지마중 나온 마차가 있어서, 나는 30분쯤 흔들리며 시골길을 달렸어. 전형적인 잉글랜드의 전원 지대로, 런던의 노란 안개에 고통받던 눈에는 가을색이 깊어가는 들판이 아주 좋은 약이 되어 주더군. 문 앞에서 토지 관리인이 나를 맞아 주었어. 그의 안내로, 나는 3층 건물의 저택에 들어가서 주인인 리처드 화이트우드를 만났어. 놀리고 싶을지 모르지만, 알현 정도의 형식을 갖춘 것은 아니었어. 

"당신은 신중한 남자 같군요. 사실 지금부터 어떤 일이 일어날지. 나도 확실히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떤 일이 일어난 다음 불렀으면 좋았을걸... 
"오래된 우물에 관한 우리 집안의 전승을 당신에게 얘기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듣고 싶습니다."
물론 내가 물었다기보다는 그가 들려주고 싶어 했던 것 같아. 하지만 그런 일로 누가 유리한지 누가 불리한지를 다투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에, 나는 리처드가 어떤 얘기를 어떤 표정으로 하는지 흥미를 갖고 듣기로 했지. 

"20대 전, 500년 가까운 옛날이야기입니다. 리처드 2세가 치세하던 때의 일이지요."
리처드는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했지.

 

영국 역사상 유명한 농민 반란의 시대였다고 했어. 당신도 학교에서 배웠겠지. 와트 테일러나 존 볼이라는 이름을... 나는 이 두 사람의 차이를 잘 모르지만, 어쨌든 그들이 왕국과 담판해서 농노제 폐지와 농산물 거래 자유화 등의 약속을 얻어 냈어. 일단은 진정되었는데, 다시 반란의 불이 타올라 두 번째 담판이 시작되었지. 그때 국왕이 테일러를 속여 토벌하고 반란 진압에 성공했다는 거야. 역사상의 평가가 어쨌든, 반란이 진압되기까지는 상당한 피와 눈물이 흘렀을 것인데, 화이트우드 가는 상당히 약삭빠르게 잘 ...

 

- "살해되기 직전에 앤은 비명을 질렀어. '당신 가문의 50대째 자손에게 벌을 받게 하겠다. 틀림없이 죽게 할 것이다'라고..."
리처드가 말을 끝내자, 나는 침묵을 참을 수 없어서 흔해 빠진 감상을 말했지. 
"당신의 조상은 상당히 도리에 어긋난 일을 했군요."
"그 말엔 동의하지만, 특별히 우리 집안의 일만은 아닙니다. 오래된 가문은, 즉 거듭된 악행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새로운 가계라고 해도... 웰링턴 공작은 인도와 스페인과 워털루에서, 도대체 몇 만 명을 죽였을까요?" 
"우리나라를 나폴레옹으로부터 구한 영웅을 비판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의 조상을 면죄할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요. 그것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앤이라는 여자도, 일부러 50대째 자손에게 벌을 줄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요? 해롤드는 천수를 다했으니까요. 저주하려면 해롤드 본인에게 하면 좋은데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도, 그것의 의미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내가 저주한 것도 아니고 말이다.
"정말 저주나 재앙 같은 것을 믿습니까?"
대답이 없어서 말을 반복했다.
"그렇다면 국교회의 사제님에게라도 상담하세요. 저주와 재앙은 경찰의 관할밖입니다."

- 나의 초보적인 혐오감을 리처드는 예의 바르게 무시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런 겁니다. 저주와 재앙을 가장해서, 현실적인 방법으로 나와 가족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계획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요."
리처드의 얼굴이 어두웠는데, 그것은 구름 덩어리가 햇빛을 가렸기 때문이다. 그의 말을 나는 잠시 검토해 보았다. 
"과연,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다만 그렇게 되면 다른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만..."
"어떤 문제 말입니까?"
"현실적인 방법으로 위해를 가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런 일을 당할 이유에 대해서 마음에 짚이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나는 주의 깊게 관찰했지. 리처드가 어떤 표정을 하는지를... 리처드는 속내를 짐작하기 힘든 표정을 지으며, 지팡이 끝으로 땅을 가볍게 쿡쿡 찔렀어.
"개인적으로는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 원한을 살 정도로 잘못 살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는지... 세상에는 질투를 심하게 하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 리처드와 나는 저택 쪽으로 향했지. 잠시 후에 빗방울이 떨어졌어. 큰 방울이지만 드문드문 떨어져서, 특별히 걸음을 빨리할 필요는 없었어. 묘하게 자세한 것까지 기억이 나는군.

- 저택이 보였을 때, 리처드가 말했어.
"그런데 런던 경찰청에 소속된 사람으로서 이전의 비리 사건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심입니까?"
실례되는 질문을 리처드는 무척 진지한 표정으로 하더군.
"그렇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비리는 물론, 그 시점에는 경찰관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일로 내가 책망받는 것을 참을 수 없습니다." 
"그래요. 그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심리겠지요."
리처드는 지팡이를 들고, 허공에 있는 무언가를 가볍게 때리듯 동작을 하며 말했어.
"자신에게 책임이 없는데도, 규탄이나 보복의 대상이 되면 참을 수 없지요. 그렇게 되면 이쪽도 몸을 지킬 권리가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서 리처드는 입을 다물었는데, 그런 식으로 내 질문을 막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

- 변덕스러운 비는 20분쯤 후에 그쳤어. 나는 가정부와 하녀들에게 무익한 질문을 한 뒤, 다시 밖으로 나와 혼자 돌아다녔지.
자연이 이렇게 아름다운 지역인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언동을 들으면 부자연스러운 것뿐이었어. 아니, 타인을 이렇다 저렇다 말할 필요는 없을 거야. 다만 런던이란 도시에서 살아온 미숙한 형사인 내가, 그곳에서는 너무 이질적인 존재로 느껴졌을 뿐이야. 
많이 돌아다닌 것도 아닌데, 나는 피곤했어. 조금 높은 곳으로 가서 풀밭에 앉으려고 했지만 풀이 젖어 있어서 포기했지. 바람에 바다 냄새가 묻어오는 것으로 보아 부근에 바다가 있을 텐데, 확실히 보이지는 않았어. 

- 리처드는 상당히 노회한 남자 같았어. 정확히 말하면 내가 미숙했던 거겠지. 그의 본심을 나는 전혀 파악할 수가 없었거든. 지금 생각하면, 나를 믿을 만한 증인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 그렇지만 확신하는 것은 아니야. 그래, 확신이라는 것은 인간의 행복에 불가결한 요소일 수 있지. 자네도 그걸 실감하지 않나? 

- 사냥개의 포효가 가까이에서 들렸어. 나는 그다지 좋은 기분이 아니었지. 말할 필요도 없지만,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사냥개는 흥분하면 사정없이 물기 때문이야.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어. 하지만 풀밭 언덕에는 개로부터 몸을 지킬 수 있는 그 무엇도 없었지. 
"아, 형사님."
사람의 목소리가 나고, 나타난 것은 토지 관리인이었어. 그레이하운드를 세 마리 끌고 있더군. 아니, 토지 관리인이 끌려왔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 같네. 그레이하운드들은 미심쩍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며 사납게 으르렁거렸는데, 토지 관리인이 꾸짖자 불만스러워하면서도 이내 조용해졌어. 그래서 드디어 그와 얘기를 할 수 있었지.
"저희 집까지 걸어서 15분쯤 걸립니다. 괜찮으시면 차라도 한 잔 할까요?"
"고맙습니다." 
주인이 리처드니까, 토지 관리인의 이름을 헨리라고 할까?  

- "불쌍하지만 그때까지만 살아 있는 거지요."
"야생 여우를 당일 사냥하는 게 아니라면 의미가 없는 것 아닙니까?"
"저는 모릅니다, 형사님. 서 리처드의 생각이니까요."
헨리의 목소리는 비웃는 것 같았어. 비웃는 것은 확실하지만, 비웃는 대상이 리처드인지 나인지는 알 수 없었지. 아마 양쪽 다 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자기 자신이나 세상 전체를 비웃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 뭐, 이것도 지금 생각하니 그렇다는 것뿐이야. 당시의 나는 조금 불쾌하게 느끼긴 했지만, 그것도 금방 사라졌지. 

- 나는 리처드가 걱정하는 것을 헨리에게 이야기하면서, 뭔가 짐작 가는 게 있느냐고 물었지. 헨리는 표정을 움직이지 않고 생각하는 것 같더니, 역시 표정을 움직이지 않은 채 대답했어. 
"나는 서 리처드의 생활을 극히 일부밖에 모릅니다. 그다지 책임 있는 일은 시키지 않으니까요. 여기에서는 태평하게 지내는 것 같아 보이니, 무슨 일이 있다면 런던에서가 아닐까요?"
"태평하게. 여기에서 아무 문제가 없다면 토지 관리인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군요."
헨리는 소리 내지 않고 웃으며 나를 주방으로 안내하더니 서둘러서 맛있는 차를 만들어 주었어.

- 나는 영국인이네.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유령과 괴담을 아주 좋아하지. 자네는 어떤가? 하지만 유령이 좋다고 해서, 실재를 믿는 것은 아니네. 내가 믿는 것은 다른 것이야.  


- 처음에는 아주 의욕이 넘쳐서 이 지역에 왔는데, 그런 기분은 곧바로 사라지고 나는 진저리가 나기 시작했어. 그래도 장원의 사용인들에게 몇 가지 탐문 수사는 했지. 일단 해 본 것인데, 헨리의 어머니에 대한 얘기도 들었어. 
이름? 또 이름인가? 그렇군. 제인이 어떤가? 제인으로 하지. 그 당시 일흔 살 정도였는데, 60년 가까이 화이트우드 가에서 아들과 함께 살았다고 하더군. 이미 말했나? 하지만 중병으로, 그렇게 오래 살 것 같지는 않았네. 그때는 불쌍하게 생각했지. 
그 후, 나도 오래 고생할 필요는 없었어. 사건이 일어난 것은 그날 밤이었으니까.

- 내가 묵은 곳은 2류 손님용 침실이었지. 귀한 손님이 아니라 회계사나 사무변호사, 이를테면 업무상 필요가 있어 머무는 손님을 위해 마련된 방이었네. 그래도 약간은 호텔의... 아니,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아. 
일어난 것은 오전 1시가 지나서였지. 이상한 소리가 들렸어. 유리가 깨지는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확신은 없었지. 나는 파자마 위에 가운을 걸쳤어. 물론 방에 비치되어 있는 것이었는데, 사이즈가 너무 컸어. 어쨌든 나는 권총을 들고 방을 뛰어나왔지. 

 

- 거실에 리처드가 서 있었어. 나와 비슷한 모습이었지. 슬리퍼를 신은 발밑에는 유리 파편 같은 것이 흩어져 있더군. 깨진 큰 거울과 바닥에 떨어진 손도끼를 번갈아 가리키면서 그는 신음했어. 
"헨리가 나를 죽이려고 했어요."
묻고 싶은 것이 많이 있었지만, 나는 우선 헨리를 추적해야 했지. 돌로 쌓은 긴 담이 구불구불 길게 이어져 있었어. 과수원과 양의 방목장을 구분하는 돌담으로, 높이는 4피트쯤이었네. 보름달 빛에 눈을 모으니, 담을 따라 달려가고 있는 사람이 검게 보였어.
"헨리!"
큰맘 먹고 부르자, 사람 그림자가 깜짝 놀란 듯이 멈추어 서는가 싶더니 곧바로 밤의 어둠 속으로 달려가더군. 헨리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어. 

- 헨리를 사살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권총을 들고 그를 쫓았어. 뭐가 뭔지 모르는 것 투성이였지만, 헨리를 생포하면 자백이나 증언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헨리의 뒤를 쫓는 것은 확실했지만, 내가 어디를 달리고 있는지조차 짐작할 수가 없었네. 
내가 젊은 만큼 헨리와의 거리는 줄어들었지만,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바다 냄새가 나자 내 발걸음이 점차 늦어졌어. 그 위험하게 느껴지는 오래된 우물을 생각했기 때문이었지. 

- 헨리는 달리다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더니, 두 손을 허공에서 흔들며 허우적거렸어. 
순간, 보름달 빛에 비친 헨리의 얼굴이 보이더군. 그런데 그의 표정이 참으로 기묘했어.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데, 분노나 증오라는 인상은 받지 않았어.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마치 다른 사람이 헨리의 얼굴 가면이라도 쓰고 있는 것 같았거든. 어쨌든 확인할 여유는 없었지. 곧바로 헨리의 얼굴은 사라졌으니까. 영원히... 
 
- "사람들을 지원하겠소. 다만 강제로 위험한 행위를 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일은 날이 밝으면 시작하세요."
나는 아무런 반론을 할 수 없었어. 단지 협력을 구할 수밖에 없었지. 날이 밝자 하인들과 소작인들 -남자들 스무 명- 이 모였기에 오래된 우물의 내부를 탐색하려 했어. 하지만 나서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 이럴 때 도움이 되는 것은 치안 판사인데, 노령에다가 리처드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하니 기대할 수가 없었지. 

- 리처드는 밤늦도록 잠이 오지 않아서 도서실에 갈 생각으로 거실로 내려갔는데, 기다리고 있던 헨리가 손도끼를 들고 달려들었다고 증언했어. 이것이 하층 노동자의 증언이라면 경찰청의 형사들이 매우 꾸짖었을 거야. 하지만 리처드는 태연하게 그렇게 주장했지. 
나는 극단적으로 기분이 나빠진 상태에서 관리인의 오두막으로 걸어갔지. 제인 할머니, 즉 헨리의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서였어. 안쪽 침실에 누워 있기 때문에 지난번에는 만나지 못하고, 이번이 처음 만나는 것이었지. 

 

- 나이가 들었어도, 젊었을 때 상당히 미인이었을 거라고 생각되는 부인들이 간혹 있잖아. 하지만 제인 할머니는 전혀 그렇지 않았어. 새삼스럽게 말을 꾸며서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아마 젊을 때는 오로지 젊음 자체만이 매력인 여성이었을 것이네. 
그녀가 내쉬는 숨에서 썩는 냄새가 났어. 진 때문에 내장이 상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지. 내가 먼저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말하자, 그녀는 병상에 누운 채 손을 흔들더군. 
"그렇게 된 것도 그 아이의 운명이지. 할 수 없어. 그것보다 나도 이제 금방 죽을 거야. 그전에 형사분을 만나고 싶었어."

- 나는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가 성급하게 말했지. 그의 어머니 이름을 알려 달라고. 연거푸 사람이 죽었는데 사냥을 가려는 리처드에게 화가 났지만, 그렇다고 화를 낼 수는 없는 일이었어. 
리처드가 나를 바라보았어. 마치 오래된 우물 같은 눈동자로 말이야. 그리고 오래된 우물 안에 등불이 켜진 거야. 그런데 그것은 악마가 켠 듯한 등불처럼 느껴졌어. 
"기묘한 것을 묻는군요, 형사님."
"기묘하지요. 게다가 실례인 줄도 알고 있습니다."
"알고서 묻는 겁니까? 글쎄, 좋습니다. 별로 숨길 일도 없으니까요. 나의 어머니 이름은 클로디아입니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클로디아도 가명이니 착각하지 말게.
"제인이라는 이름이 아닙니까?"
"아니요. 훌륭하고 흔한 이름이군요. 내 사용인 중에도 몇 사람 있을 겁니다만..."

- 문제는 리처드의 목소리가 바로 '갑옷을 입었다'는 거야. 신참형사가 갖고 있는 빈약한 검 따위는 찌르는 순간 꺾어질 수밖에 없었지. 나는 더 이상 공격할 수 없었어. 리처드가 죄를 범했다는 확증조차 없었으니까. 그리고 제인 할머니가 말한 것을 상사에게 보고해도, 죽음을 앞둔 늙은 여자의 허튼소리라고 하며 웃음거리가 될 게 뻔한 상황이었어. 
패배감을 안고 리처드를 지켜보았지.  

- ... 화이트우드 가의 정당한 주인이고, 리처드가 찬탈자였을까? 그녀가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날조해서, 리처드와 헨리 두 사람에게 서로 살의를 품도록 만든 것은 아닐까?
의혹이라는 것은 차갑고 젖은 손바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것이 내 목덜미를 이리저리 쓰다듬을 때마다 나는 몸을 떨곤 했지. 그 의혹은 지금도 풀리지 않았어. 하루 종일 그 사건을 생각할 정도로 여유 있는 인생은 아니지만, 가끔 생각이 나는군.

- 진상은 어떤 것일까? 젊은이, 이 사건에 진상은 없어. 있는 것은 의혹뿐이지. 시체조차 나오지 않았으니까. 때문에 함구령이 나온 것도 당연하지. 
그래, 이것은 말해야겠네. 그 오래된 우물은 그 후 즉시 메워지고 지금은 흔적도 없는 것 같아.
몇 번이나 말했지만, 유령도 저주도 재앙도 나는 믿지 않는다네. 내가 믿는 것은 인간의 악의라는 것이지. 그것은 밤보다도 어둡고, 오래된 우물보다도 훨씬 깊다네. 거기에서 검은 손이 뻗어 나와 갑자기 사람의 발목을 잡는 거지. 


<오래된 우물>, 다나카 요시키



- "에, 죽였다고?"
흥분했을 때 '에'를 연발하는 것은 신지의 버릇이었다.
히로키는 턱으로 기요타카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 턱을 내민 채로 자신과 비슷한 키의 상대를 내려다보듯이 하며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봤대. 아침 일찍 이 녀석이 완다를 죽이는 것을..."

- 히로키는 대답을 하는 대신에 상대를 잠시 날카롭게 노려보더니, 홍합처럼 양쪽으로 똑같이 나누어진 머리칼을 손으로 만지며 분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 죽이는 것은 확실히 보지 않았지만..."

- 히로키의 얘기는 이러했다.
반년 전 겨울, 마침 완다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 직전의 일이다. 카메라맨인 히로키의 아버지가 아침 일찍 식물 사진을 찍으려고 산기슭을 혼자서 걷고 있었다. 찾고 있는 것은 수정란풀- 별명이 유령버섯으로, 전체가 완전히 새하얀 버섯이다. 그 버섯은 이른 새벽이면 정말 유령처럼 어렴풋이 빛을 낸다고 한다. 잠시 유령버섯을 찾으며 걷고 있던 히로키의 아버지가 마침내 그것을 발견했다. 어떻게 찍을지 구도를 생각한 후, 삼각대를 낮게 세우고 카메라를 고정시켜 유령버섯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그때의 사진이 이거야. 아버지의 앨범에서 가져왔어. 여기에 기요타카가 완다를 죽인 결정적인 증거가 찍혀 있어."

- 기요타카는 나보다 훨씬 강했다.
"피야..."
그때 그는 내가 아직 존재조차 몰랐던 강함을 갖고 말했다.
"그래, 피였어! 할머니의 적이어서, 내가 그 개를 때려죽였어!"

 

- 똑바로 정면을 보면서, 우리들의 고막이 찢어질 정도로 크게 소리친 기요타카가 크게 한 걸음을 떼어 히로키의 눈앞까지 나왔다. 그때 기요타카의 신장이 갑자기 30센티미터나 늘어난 것처럼 보였다. 상대가 바로 옆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요타카는 아까보다도 더 큰 목소리로 "비켜!"하고 말했다.
"나는 물건 사러 가야 해! 반찬, 화장지, 비누... 너희들은 언제나 어머니가 사주는 것을 지금부터 사러 가야 해! 할머니는 슈퍼까지 걸어가는 것도 힘들어. 우리들보다 훨씬 오래 살았기 때문에, 다리나 허리가 우리와 같다고 해도, 우리들보다 훨씬, 몇 배나 피곤해. 그래서 내가 가는 거야!" 
그러고 나서 다시 한 번 숨을 들이마시더니, 기요타카는 히로키에게 더할 수 없이 큰 목소리로 퍼부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외쳤다.
"비켜!"
히로키가 물러섰다.
기요타카는 상대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으려고도 하지 않고, 장애물이 사라진 방향으로 담담하게 걸음을 옮겼다.
 

<여름의 빛>, 미치오 슈스케

 


- 그는 시집와서 반년 만에 '젊은 여인'에서 '여주인'이 되었다. 뒷간에서 남몰래 울기도 했던 여성적이고 우아한 모습은, 지난 8년 동안 그림자를 감췄다. 젠이치와의 사이에 아이도 세 명 낳았고, 관록도 남편에게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가나에마저,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젠이치의 몸의 떨림과 점점 핏기를 잃어가는 그 얼굴빛을 보고 당황했다. 
"아아, 큰일이다."
젠이치는 오른손에 잡고 있던 남은 젓가락을 힘없이 떨어뜨리더니,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눌렀다.
"마사기차 형이 죽었다..."

 

- 의리 있는 상인인 고로베는 계산에 밝다. 솔직히 사람의 인품은 외모에서 알 수 있다고 하는데, 얼굴은 조금 무섭다. 눈초리가 날카롭고, 굵고 짙은 눈썹에 코가 넓적하게 퍼져 있다. 이마에 상처도 있다 - 아무래도 건실해 보이지 않는 무뢰한이다. 무뢰한 고로베는 줄여서 '고로고로'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오십 대 남자다. 
"응, 방금 죽었다. 고로 씨, 그것이 우리 집에 왔다."
젠이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자 고로베의 얼굴이 방금 새로 바른 문종이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남은 사람들은 또 놀랐다.

 

- "확실합니까, 주인님?"
"확실하다. 지금 여기에서 느꼈다."
젠이치는 손으로 심장 위를 두드려 보인 다음 꿀꺽 침을 삼켰다.

"친척이니 알 수 있어."

- "그러나 다음이 주인님으로 결정된 것은 아닙니다."

"아니, 나야. 원래 나로 결정된 것을, 마사기치 형이 대신했던 거지."
"그것은 알고 있지만..."
"나는 지금도 두 번째야."
수수께끼 같은 대화에, 가장 아랫자리 끝에 앉은 견습 종업원은 입가에 밥풀을 붙인 채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다.

- "그것이 여기에 왔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하지만 나는 알 수 있다. 저..." 
마루방에 모인 열여섯 명은 땅바닥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지진이다, 하고 자세를 잡자, 상 위의 그릇과 공기가 작게 달가닥 달가닥 흔들리기 시작했다. 잔물결 같은 흔들림이 땅바닥뿐만 아니라 허공에 전해져 온다. 부엌의 굴뚝과 격자창에서 피비린내 나는 바람이 불어왔다. 
"어쨌든 가두어야 해."
그렇게 말하면서 젠이치는 격자창 밖을 보았다. 날이 새기 전으로 하늘은 아직 어둡다.

- 젠이치는 한 손을 들고 얼굴을 감싸면서, 밥상을 박차고 일어섰다.
"모두 도와라. 아, 남자들만 있으면 돼. 여자들은 밖으로 나가지 마라. 밖을 보면 안 된다!"
주인과 지배인을 선두로, 종업원들도 어지럽게 흩어져 밖으로- 가게 뒤의 창고 쪽으로 달려갔다. 남은 여자들은 멍청히, 서로의 얼굴에 서로의 불안을 비추면서 모여 앉았다. 

- 지진 같은 흔들림과 불온한 바람의 흐름은 계속되었다. 선반 위의 물건과 부엌 안, 아니 부엌 자체가 삐걱삐걱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왔다.

- 휘이! 한번 커다란 흔들림이 있었고, 창고 쪽에서 남자들의 비명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로베가 소리쳤다.
"닫아라, 닫아! 빨리 닫아 닫아라! 보면 안 돼. 절대 보면 안 돼!"

이윽고 흔들림이 멈췄다. 마지막으로 바람이 빠져나가면서 마루방의 등잔불을 마술처럼 선명하게 불어서 껐다. 시작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멈췄다. 
부엌과 마루방의 희미한 어둠 속에서 가느다란 먼지가 춤추고 있다.

- "오미야 씨 집에서 지낼 수 있을지 어떨지 걱정했었지. 시어머니 앞에서 뿐만 아니라 하녀의 우두머리 앞에서도 기를 펴지 못했거든."
지금의 어머니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에 깜짝 놀랐다.
"너, 심술궂어."
오미요는 재빨리 뒷걸음질을 해서 다시치에게서 떨어지며 강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런 심술을 부리면 이제 복습하는 거 도와주지 않을 거야."

다시치는 시건방지게 비웃었다.
"그런 식으로 뒷걸음치면 뒤에 있는 둥근 기둥을 지나가게 돼. 신에게 엉덩이를 대면 벌을 받는다고."
오미요는 뒤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마침 오미야에서 반 정(町) 떨어진 길에 있는 작은 하치만궁(八幡宮) 앞에 멈춰 있었다.

- 고양이 이마처럼 좁은 경내로 이나리(稻荷)는 없다. 그 증거로 칠이 벗겨진 낡은 기둥 좌우에 앉아 있는 것은, 여우의 상이 아니라 한 쌍의 고마이누다. 이것도 오래된 돌로 만든 고마이누로, 회색 몸 전체에 하얀 얼룩무늬가 달라붙어 있다. 까마귀와 비둘기의 배설물이 떨어진 것이다. 
이 조용한 신사는 옛날부터 여기에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

- (주 : 정(町) . 거리의 단위. 1정(町)은 60간(間)으로 약 109미터)

- (주 : 하치만궁(八幡宮). 오진천황(應神天皇)을 주신(主神)으로 모신 신사. 궁시(弓矢)의 수호신으로 무사들이 숭앙했음.

- (주 : 이나리신사. 오곡(五穀)의 신인 우카노미타마노카미(倉稻魂神) 또는 그 신을 모신 신사(神))

- (주 : 신사(神社) 앞에 마주 보게 놓은, 한 쌍의 사자 비슷한 짐승의 상. 마귀를 쫓기 위한 것이라 함)

- "모두 친척들이야. 아버지와 중요한 이야기를 하니까, 방해하면 안 돼."
확실히 아버지 젠이치의 객실에서는 사람 목소리가 왁자지껄 흘러나왔다.
"그렇다면 친구를 불러도 되나요?"
"안 돼."
어머니는 엄했지만, 보통 때는 이런 식으로 오미요의 부탁을 한마디로 거절하는 사람이 아니다.

- "왜요? 오늘 아침에 그런 이상한 일이 있기 때문에 친척들이 모인 거지요? 3번 창고에 괴상한 것이 날아들어 온 것을 아버지가 가두었지요?"
오미요가 불쑥 물었다.
가나에는 틈을 주지 않고 오미요의 머리를 탁 때려서 말을 막았다. 때문에, 다행스럽게도 오미요는 '다시치가 봤다고 했어요'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었다.
"엉뚱한 얘기하지 마. 너는 아직 모르는 일이야. 몰라도 되는 일이라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말한 대로 하면 돼."

 

- 일곱 살 여자아이와 남자아이의 차이는, 여자아이는 이런 때 일단 물러나는 계략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오미요의 기특한 태도에 가나에의 표정도 부드러워졌다.
"얌전히 있으면 맛있는 간식을 주지. 혼자서 심심하면 신돈과 놀아도 돼."
신돈은 가장 어린 견습 점원이다. 평소에 고이치로를 돌보는 것도 신돈의 일 가운데 하나다.

- "신돈에게도 말했지만, 지금부터 잠시 너희들은 창고에 가까이 가지 마. 마당에서 노는 것도 안 돼. 뒷간에 갈 때는 곧바로 갔다가 곧바로 돌아와. 창고 쪽을 보면 절대로 안 돼."
일곱 살의 어른스런 여자아이는, 이런 때 또 '왜요?' 하고 물어서 머리를 맞고 싶지는 않았다. 오미요는 깨끗이 자신의 방으로 물러갔다. 

- 고이치로를 딸랑이 장난감으로 달래면서 까꿍 놀이를 하고 있는데 신돈이 왔다. 선물로 들어왔는지 손님용인지, 가이린당의 양갱과 생과자도 가져왔다. 손뼉을 치며 춤을 추고 싶을 정도로 호화로운 과자다. 
신돈은 칭얼거리기 시작한 고이치로의 기저귀를 간 다음 아이를 등에 업었다. 평소의 모습이다. 오미요는 신돈에게 묻고 싶은 것이 산처럼 많이 있었지만, 다른 종업원들과 마찬가지로 신돈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말을 지키는 사용인의 (작은) 모범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우선은 회유책을 썼다. 
"신돈, 쌍륙을 할까?"
쌍륙은 본래 정월의 놀이다. 신돈은 이것을 아주 좋아하지만, 놀 기회가 한정되어 있었다. 생각대로 달려들었다.
"신돈이 이기면 내 양갱을 먹어도 좋아." 
신돈은 크게 기뻐하면서 승리에 승리를 거두었고, 그 결과 오미요는 그의 입을 열게 할 수 있었다.

- 오미요도 어머, 하고 생각했다. 지배인의 얼굴이 고마이누를 닮아 있었다.
고로베가 말했다.
"비밀입니다."
"응."
"부주의해서 그것에 가까이 가거나, 그것을 보거나 하면 손버릇이 나빠지게 됩니다. 한 번 정도라면 걱정할 것 없습니다. 그래도 다시치는 앞으로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아가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가씨의 생활에는 어떤 방해나 변화도 없습니다. 주인님과 어머님의 말을 듣고 착한 아이로 있으면 됩니다. 이번 일은 우리들 어른에게 맡기십시오. 그러면 정리됩니다. -아니, 정리할 겁니다."
고로베는 오미요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불한당처럼 웃었다.

- 밤이 되자, 두 가지 놀라운 일이 추가되었다.
하나는 창고 주위에 화톳불이 빨갛게 불타오른 것이다. 창고 감시는 보통 감시가 아니라, 밤을 새우는 철야 감시다. 오미야만으로는 사람이 부족했다. 
두 번째는 창고가 소란스러운 것이다. 감시를 시끄럽게 하는 것이 아니다.
3번 창고에서 소리가 났다. 밤이 되어 주위가 조용해지자, 속임수가 아닌 기괴한 소리가 사라지지 않은 채 울려왔다.

 

문은 모두 닫혀 있는데, 창고의 두꺼운 벽을 통해 그 소리가 홀러 나왔다.
중얼중얼 투덜투덜 누군가 중얼거리는 듯한 소리… 질질, 바스락바스락, 누군가 움직이는 듯한 소리...

지긋이 듣고 있으면 소름이 끼칠 것 같아서, 오미요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래도 좀처럼 잠들 수가 없었다. 어린 동생 고이치로도 무엇이 불편한지 계속 울면서 보챘다. 그것을 달래는 가나에의 자장가가 밤 기운 속으로 가늘게 흘러들었다.
그 배후에도, 스윽...

- 다음 날, 또 습자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고로베의 주의가 효과가 있었는지, 다시치는 사람이 변한 듯이 얌전했다. 오미요가 어제의 계속을 기다렸지만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안 돼, 안돼, 안돼. 이봐, 그 얘기를 하면 안 돼."

- 하지만 다시치는 다케 형이 아니라면서, 뒤에서 혀를 내밀고 있었다.
"시끄럽게 하면 신이 화를 내."
"그래요, 다케 오빠. 이런 곳에 숨어 있으면 신이 화를 내요."

그러자 또 소리가 들렸다.
[옹삭시런가?]

- 오미요는 입을 다물면서 등을 폈다.
지금 것은 이상하다.
귀에 들린 것이 아니다. 팔을 통해 곧바로 가슴에 닿은 느낌이었다. 
오미요는 천천히 얼굴을 돌려, 자신의 오른팔을 보았다. 고마이누의 대좌에 닿아 있는 팔을... 
[옹삭시럽다믄 내가 거들어도 되께.]
오미요는 더욱 천천히 오른팔에서 눈을 들어, 고마이누를 보았다. 하얀 새똥 얼룩에 섞여 졸린 듯한 그 얼굴을... 

- [응, 나여.]
고마이누의 눈이 깜박이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가지 못한께 다케 오빨 데꼬와.]
또 팔을 통해 느낌이 왔다. 말이라기보다 이것은 사념(思念)이다. 그리고 그 사념 가운데 오미요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단 하나 있었다..
다케 오빠.

- 오미요도 눈을 감고, 자신의 손을 고마이누의 대좌에 댔다.

[이짝 사람을 만난 것은 무자게 오랜만인디.]
오미요는 번뜩 눈을 떴다. 보니 다케지로도 눈을 뜨고 있다.
"들었어?"
그래, 하고 다케지로가 말했다.

- "뭐야, 이거?"
다케지로는 고마이누를 올려다보더니, 이어서 손을 뻗어 그 얼굴과 머리를 찰싹찰싹 두드리기 시작했다. 다케지로는 키가 크기 때문에 고마이누에게 쉽게 가까이 다가갔다.
"헤에, 너는 도도키에서 채취되었나? 그래, 도도키 돌이군. 그립다. 깜짝 놀랐다."
고마이누와 얘기가 통하는지, 이번에는 다케지로가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 다케지로는 얼굴 가득 웃음을 담고, 오미요를 훌쩍 들어 올리며 목말을 태워 주었다.
"봐, 가까이에서 인사해. 이 고마이누는 나와 같은 고향에서 왔어. 도도키라는 곳으로, 옛날에는 채석장이 있었어. 도도키 돌이 유명하거든."
그건 그렇다 하더라도, 오미요는 고마이누를 가까이 보면서 새똥 투성이군, 하고 말했다.
"도도키 돌은 푸른 기가 도는 아름다운 회색이지. 잘 연마하면 ... "

- 오미요가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오미야' 뿐이다. 자기 집을 말하는 것이다.
다케지로는 또 눈을 크게 뜨면서 그래, 하고 말했다.
"당신은 좋은 신의 심부름꾼이군."
"이녁을 좋은 구신이 보냈는갑다."
다케지로는 서둘러서 고마이누에게 통하는 말로 바꿔 말했다. 오늘은 목말을 탄 덕분에 고마이누의 얼굴이 눈앞에 있다. 다케지로의 말에, 고마이누의 입이 희미하게 웃는 것을 오미요는 가까이서 보았다.

- "고마이누 님이 뭐라고 했어?"
졸라대는 오미요에게 다케지로는 숨을 한 번 크게 쉬고 나서 가르쳐 주었다.
"아가씨의 오미야가 곤란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도박눈'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손으로 퇴치할 수 있는 요괴는 아니기 때문에, 내가 도와주겠다."
그 말에 오미요가 눈을 크게 떴고, 다시치는 붕어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두 사람을 그대로 둔 채, 다케지로는 고마이누와 한바탕 대화를 나누고 나서 부스스한 머리를 긁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지? 이런 이야기를 오미야 씨가 금방 믿어 줄까?"

- 믿어 주었다.
무엇보다 효과가 있었던 것은 '도박 눈'이라는 불가사의한 말이었다.
'賭博 眼(도박 안)'이라고 쓴다고 한다.

- "신불의 인도라고 할 수 있을까..."
흔하지 않지만 불가사의한 일도 있는 것이라고, 젠이치는 받아들이는 듯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왼쪽에는 고로베가 있고, 오미요는 다시치와 둘이서 다케지로를 사이에 두고 머리 세 개를 나란히 하고 앉아 있다. 오미야의 안채다. 

- "이 이야기에 가족 아닌 사람을 끌어들인 것이 알려지면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도 있으니까."
고마이누가 그 '도박 눈'이라는 것을 퇴치하기 위해, 다케지로에게 지시했다는 사항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오미요가 들어도 바로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지금부터 가능한 서둘러서, 이누하리코(犬張り子) 50마리를 모을 것. 바구니를 짊어진 이누하리코라면 크기는 관계없다. 
다만 신품은 안 된다. 돈으로 사서 모아서도 안 된다. 여기저기 집에 장식되어 있는 것을 모아 와야 하는 것이다. 그때 바구니가 깨지거나 망가졌다면 반드시 바꾸거나 수선해야 한다. 
50마리의 이누하리코가 모이면, 다시 신사로 와라.  

- 고로고로 지배인은 똑 부러지게 말하고 나서, 젠이치에게 머리를 숙였다.
"얘기를 중간에 끊어서 죄송합니다."
"괜찮아. 고로 씨는 모두 알고 있겠지만, 나도 이 이야기는 좀처럼 하기 어려워. 한 번만 말할 테니 듣고 나서 일이 끝나면 잊어 주게. 그런 이야기네."
젠이치는 울대뼈를 위아래로 움직이면서 말을 계속 이었다.
"그 '도박 눈'이라는 요괴는 다시치가 본 대로 커다란 이불 같은 모양이네. 사람의 피가 탁해진 듯한 검은색으로, 거기에 정확히 50개의 눈알이 있어. 사람의 눈이야."  
자신이 말한 것에서 도망이라도 가려는 것처럼 젠이치의 말이 빨라졌다.
"50명의 사람을 제물로, 그 시체의 혈육을 빨아들인 묘지의 흙을 반죽해서 만든 것 같아. 자세한 제작 방법은 나도 몰라.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알려 주지 않았어. 그런 지혜는 후대에 전해지지 않는 것이 좋겠지." 

"만든 것 같다니요... 요괴인데."
다케지로가 얼굴을 찡그렸다.
"요괴이지만 사람의 손으로 만들었지. 물론 주술이나 주문이 필요해. 절차도 필요하고. 나는 아무것도 몰라. 모르는 게 다행이지. 사실을 말하면 제대로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네. 마흔 살에 봤지만 그때 그것은 이 정도의..."
그러면서 손으로 네모난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그리고 계속 말을 이었다.
"문상(편지지, 봉투 등의 편지 용품을 넣어 두는 상자) 같은 상자에 들어 있었어. 마사기치 형이 뚜껑을 열고 보여 주었는데, 몇 개나 되는 눈알이 번득이며 쳐다보고 있어서 깜짝 놀랐지." 

- "50명의 사람을 재료로..."
다시치가 중얼중얼 말하고 나서, 손가락을 접으며 몇 개를 세고 있다.
"만들어진 요괴는 눈알이 50개 있어요? 백 개가 아니라요? 50명이 있다면 눈알은 백 개일 텐데요."

그 계산을 손가락으로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아니면 의미가 없다. 
"한쪽 눈을 망가뜨렸어."
다케지로가 말했다.
무심코 말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당황했는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재투성이의 회색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 "먼저 한쪽 눈을 망가뜨리고, 나중에 몸을 요괴의 모체로 만드는 데 사용할 때... 아아, 모두 말할 것은 아니야. 어쨌든 엄청나게 잔인한 방법으로 만든 요괴야."
그런 잔인하고 무서운 요괴를 왜 만들었을까? 어떤 경우에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인가?

 

- "도박 눈과 약정을 맺고 그것의 주인이 되면..."
무섭게 도박에 강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도박 눈'일까?

"하지만 그렇게 번 돈은 척척 쓰지 않으면 안 돼. 화려하게 사용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도박 눈이 보내는 나쁜 기운 때문에 주인이 죽게 돼. 도박 눈이 좋아하는 것은 사람이 도박을 시작해 뜨겁게 됐을 때의 기운과 더 이기려고 하는 욕심, 그리고 진 상대가 후회하는 것을 보는 거야. 바로 도박 눈의 업이라고 할 수 있지. 사람이 가진 그러한 나쁜 마음이, 도박 눈의 먹이가 되는 거야, 도박 눈은 사람의 나쁜 마음에 굶주려 있는 요괴야." 
화려하게 돈을 사용하려면, 더 크고 더 위험한 도박을 계속하는 것이 가장 좋다.
"도박을 하다 보면 술과 여자도 따르기 때문에, 차츰 그쪽에도 빠져들게 되지. 그러면 도박 눈은 기뻐서 점점 이기도록 해 준다는 장치야."
그런 생활을 하면 주인은 다른 사람의 원한을 사게 되어 있다.
"도박에 강해진다는 것은, 즉 뛰어나게 운이 강해지는 것이기도 해. 때문에 주인은 도박 눈과의 약정이 살아 있는 한, 다른 사람의 손에 걸려서 죽지는 않아. 어떤 재앙에서도 도망갈 수 있지."
그리고 도박을 계속한다.
"그래도 사람의 수명에는 한도가 있고, 술과 여자에 빠져서 살면 결국 신체를 손상시키게 되지. 너덜너덜해질 거야. 오래 살 수가 없는 거지."
주인의 목숨이 다하면, 도박 눈은 다음에 약정을 맺을 주인을 찾는다.

- "다음 주인이 있을까요? 그런 이상한 요괴를 왜 만들어요?"

오미요가 말하자, 젠이치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이상하지? 오미요와 다시치는 아직 알 수도 없고, 모르는 게 좋아."
그러면서 도박 눈을 찾는 마음이 꼭 나쁜 마음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너무 가난해서 한 푼도 없고, 먹을 것도 살 수 없다고 해 보자. 병에 걸려도 약을 살 수 없어. 그런 상황이라면 나도 도박 눈과 약정을 맺을지도 모르지. 도박에 꼭 이길 수 있게 되면, 다른 어떤 수단보다도 빨리 얻을 수 있고 돈벌이를 할 수 있기 때문이지."

그렇게 번 돈을 자신 혼자가 아니라 굶주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쓴다면, 돈을 사용하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런 맑은 마음으로 있을 수는 없지만..."
젠이치의 말을 듣고만 있던 고로고로 지배인이 오랜만에 다짐하듯 말했다.
"확실히 돈은 사용하기에 따라 살아 있는 돈도 되고, 죽어 있는 돈도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박 눈을 만드는 사람도 있고, 도박 눈의 주인이 되려고 하는 사람도 있는 겁니다. 오히려 그런 소원을 기초로 도박 눈에 접촉하는 사람이, 뿌리부터 도박을 좋아하는 사람보다 많지 않을까요?"
그러자 다케지로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굶어 죽게 된다면... 나도 주인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잘만 처신하면 혼자 벌어서 마을 하나쯤은 통째로 먹여 살릴 수 있으니까요."

- 젠이치와 고로베가 얼굴을 마주하더니, 약속이라도 한 듯이 다케지로를 쳐다봤다.
"자네, 알고 있나?"
"도박 눈이 좋아하는 산 제물은 근본이 되는 것은 굶주린 사람들입니다."
다케지로는 그렇게 말한 다음 도망가듯이 고개를 숙였다.
"설마. 잠깐 생각해 봤을 뿐입니다.”
젠이치는 다케지로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미야에 전해지는 도박 눈도- 그 옛날에 지독한 흉작으로 산의 나무뿌리마저 다 먹어 버리고, 마침내는 사람이 죽은 사람의 고기를 먹어야 할 정도로 대기근이었을 때 만들어졌다고 해."

 

- 다케지로가 꼼짝 않고 몸을 긴장하고 있기 때문에, 오미요는 그의 팔을 만졌다.
그러자 다케지로가 오미요를 보며 형편이 나쁘다는 듯이 겨우 웃어 보였다.
"뭐야, 오미요. 무서워?"
"무서운 것보다 어려워서 잘 모르겠어. 사람이 죽은 사람의 고기를 먹는다는 게 무슨 말이야?"
오미요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좋아."
다케지로가 오미요의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
'다시치는 어디 있지?' 하고 보니, 다케지로의 등 뒤에 숨어 있었다.

- "지금 오미야에 전해 오는 도박 눈이라고 말했지만... 다행히 우리의 도박 눈은 가족이 만든 게 아니야. 초대(初代)가 어디에서 받았는지 샀는지 속아서 떠맡았는지, 어쨌든 다른 곳에서 온 거야." 
젠이치가 계속 말했다.
오미야는 젠이치 가(家) 5대가 된다.
"옛날 일이라 자세한 것은 나도 몰라. 가족의 수치이기도 하기 때문에 중요한 결정 이외는 오랫동안 전해지지 않아서, 일부러 애매하게 해 왔는지도 몰라."

 

초대는 부지런한 상인이었는데, 욕심 많은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도박 눈의 주인이 되었겠지만, 굶주려서도 아니고 도박에 강해지고 싶어서도 아닌 것 같아. 다만 영업에도 도박과 비슷한 점이 있긴 하지."
운이 강하면 강할수록 돈을 많이 벌게 된다.
"하지만 도박과 장사는 다릅니다. 도박하는 사람과 상인은 근본부터가 다르니까요."
다케지로가 끼어들었다.

- "그렇지. 그렇기 때문에, 나는 초대가 그 전의 주인에게 속아서 '이것만 있으면 장사로 틀림없이 돈을 벌 수 있다. 액막이도 되고, 가게가 커진다'는 등의 말을 듣고 도박 눈을 억지로 떠맡은 것이라고 생각해."

- "도박 눈과 약정할 때 '앞으로 주인이 몇 사람 바뀌어도 결코 오미야에서 떠나지 말라'는 추가 약정을 했지."
즉 주인을 오미야의 가족으로 한정한 것으로, 오미야 가문에서 대대로 도박 눈을 이어받는다는 약정이다.
"그 정도로 장사에 성공하고 싶었겠지."
젠이치는 말하고 나서 한숨을 쉬었다.
"오로지 도박 눈을 경사스러운 것으로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뺏기고 싶지 않았겠지."
그 결과로 초대의 가게에서는 차남이 도박꾼이 되었고, 도박장을 전전하는 생활을 하다 주독에 빠져서 서른이 되기도 전에 죽었다고 한다.

"바보입니다. 어설픈 거지요. 상대가 요괴라서, 약정의 효과를 잘 확인하지도 않았겠지요?"
다케지로가 거리낌 없이 내뱉었다. 
그러자 고로고로 지배인이 또 노려보았다.
"요괴는, 초대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유혹했을지도 모릅니다."
젠이치는 다시 한번 숨을 내뱉더니, 피로한 듯이 어깨를 떨어뜨렸다.
"이렇게 해서 우리 오미야 일족은 대대로 도박 눈의 주인을 맡았지. 즉 일족의 한 사람이 도박꾼이 되는 거였어. 주인이 되면 싫거나 좋거나 상관없이 건실한 생활을 버리고 도박꾼이 되어야 했어. 만약 목숨이 위험하다고 도망치면 다른 가족이 위험해지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지. 사실, 가게의 번성은 도박 눈과는 관계가 없어. 그렇기 때문에 주인이 되는 도박꾼은 오미야 일족을 위해 희생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 그것은 초대의 경솔한 약정의 조항을 짊어진 것으로, 글자 그대로 빈핍 제비뽑기인 셈이야."

- "하지만...."
오미요는 불쑥 말을 뱉었는데, 어른들의 시선이 쏠리자 얼굴이 빨개졌다.
"왜 그래, 오미요?"
젠이치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오미요는 거기에 힘을 얻어 질문을 했다.
"그 사람이 진짜로 도박을 좋아한다면 도박 눈과 사이가 좋아지는 것 아니에요? 그러면 모두 형편이 좋아질 것 아니에요?"
젠이치는 무조건 기쁜 얼굴을 하며 다케지로에게 말했다.
"그래, 글쎄 이 아이가 이렇다니까. 총명하다고 할까, 어른스럽다고 할까?"
다케지로는 뭔가를 말하려다가 고로고로 지배인의 얼굴을 보더니 침묵했다.
대신에 고로베가 엄한 얼굴로 오미요를 가까이에서 쳐다보며 무겁게 말했다.
"아가씨, 그렇게 엿장수 마음대로는 안 됩니다. 도박 눈의 주인이 되어 도박꾼이 되면, 원래 도박을 좋아했던 사람도 점점 도박이 싫어지게 됩니다."
"왜?"
"요괴에게 혼을 뺏겨서 조금씩 먹히기 때문이지요."
도박이 싫어지게 된다. 그래도 이긴다. 계속 이기기 때문에 싫어도 그만둘 수 없다. 조용한 생활을 하고 싶다거나 조금 쉬고 싶다고 생각해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마음만 점점 거칠어져 간다.

 

- 젠이치가 열네 살 때의 일이다. 당시 도박 눈의 주인이, 수명이 다해서 죽었다. 수명이라고 해도 서른다섯 살이었다.
"도박 눈의 주인은, 오미야의 가족으로서 가능하면 아직 가정을 갖지 않은 젊은 남자거나 남자아이여야만 된다. 때문에 그런 때에는 친척과 분가가 모두 모여서 제비뽑기를 하는 거다."
누가 다음 주인이 될지를 제비뽑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무리하게라도 결정하지 않으면 굶주린 도박 눈이 멋대로 사람을 선정하여 빙의한다. 

- "나의 아버지가 결정되었다."
젠이치는 외아들이었다. 
"아버지는 머리를 감싸고 돌아왔고, 사흘을 자리에 누워 계셨다. '미안, 미안'이라고 하면서 이불속에서 울고 계셨지."

 

- 그런데 그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나의 육촌 형에 해당하는 마사기치라는 사람이었어."
드디어 나왔다! 마사기치 형이다.
"어느 오미야의 사람인지는 묻지 마십시오. 역시 다른 곳의 사람들에게는 알리고 싶지 않으니까요. 어쨌든 우리의 일가로, 당시 나이는 스물대여섯이 됐을까..."


- 마사기치는 방탕아로, 몇 년 전에 부모로부터 의절당해 집에서 쫓겨나 있었다.
"훌쩍 돌아온 그 사람이 사정을 듣고 나를 불쌍하다고 생각했지."
어린 아들이 불쌍하다.
"어차피 나는 방탕한 사람이고 도박의 맛도 알고 있습니다. 도박장에서 마주칠 상대가 없는 생활이 재미있을 테니, 내가 주인을 대신하겠다는 겁니다." 
다행히 마사기치에게는 다른 형제가 있어서, 가계를 이어갈 후계 걱정은 없었다. 그의 방탕에 진저리 치던 부모도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마사기치의 의지가 워낙 강하기 때문에 반대하지 않았다. 
"도박 눈과 약정을 맺으려면 저기 봉해져 있는 상자를 열고 손가락의 피를 한 방울 떨어뜨려 '오늘부터 내가 주인이다'라고 말하면 됩니다."

- "의절당할 정도였으면 불효자였겠지. 하지만 나에게는 친절한 사람이었다."
젠이치의 말에는 습기가 배어 있었다.

 

- "아버지도 다다미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마사기치 씨는 은혜를 베풀거나 생색을 내는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으면서, 내 머리에 이렇게 손을 얹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어.
'걱정하지 마. 나는 근본이 방탕자다. 요괴에게 지지 않아'
어린 마음에도 나는 가슴이 뜨거워졌지. 그래서 무심코 이렇게 말했다.
'이 은혜는 일생 잊지 않겠습니다. 만약 마사기치 씨의 몸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제비뽑기 없이 내가 다음 주인이 되겠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내 머리를 때렸고, 마사기치 형은 웃었지.
그러나 그것은 말뿐인 약속이고, 피를 떨어뜨리며 맹세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도박 눈은 그때의 일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마사기치 씨가 죽으면 나에게 날아온다는 것이지. 
그리고 3번 창고에 날아 들어가 50개의 눈알을 빛내면서, 중얼중얼 질질 꿈틀거리고 있다."

- "어제 후카가와 만넨초에 갔었네."
젠이치의 말투는 차분했지만 그늘이 느껴졌다. 

"나는 계속 마사기치 형과 소식이 끊어지지 않도록 해 왔어."

하지만 마사기치는 떠돌이 한량이기 때문에 그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때로는 이 고로 씨에게도 수고를 끼쳤지. 형이 어디에 있고, 지금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대강의 모습을 알 수 있도록 노력했지. 형이 우리에게 온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 지난 몇 년간 마사기치는 만넨초의 우라나가야에서 살았다. 도박에는 강하지만 몸이 완전히 망가져, 특히 이번 여름이 지나고부터는 거의 드러누워 있는 생활이 되었다.
"도박을 할 수 없으면 더욱더 도박 눈의 나쁜 기운이 기승을 부리지. 형은 지금까지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도박 눈을 이어받았지만 드디어 목숨이 다된 거란다."

 

- 그리고 마사기치는 하나의 결심을 굳혔다.
"형은 자신을 마지막으로, 오미야와 도박 눈과의 약정을 끝내려고 했어."

- 어제, 찾아가 보고 놀라운 것을 알았다. 이번 달이 되어서 마사기치가 갑자기 관리인에게 부탁을 하여 나가야를 나간 다음, 낡은 쵸키부네(猪牙船)를 사서 가까운 수로 끝에 띄워 두고 그 안에서 생활했다는 것이다.
"형은 그 배와 함께 불에 타 죽었어. 배에 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여서 도박 눈과 함께 타 죽으려고 했던 것 같아. 사실, 형은 주인이 됐을 때부터 그럴 생각이었을 거야. 나에게 살짝 그렇게 말했거든.
'안심해. 너의 차례는 돌아오지 않아. 내가 확실히 마무리하겠어.'
의절당한 사람의, 최소한의 부모에 대한 효도, 아니 일가에 대한 효행이라고 말했어. 그래서 틀림없이 아버지에게도 얘기했을 거라고 생각했지."

- 그러자 고로베가 무거운 말투로 말했다.
"그런 생각이 있다는 것을 나는 듣지 못했습니다. 선대도 알고 있었다면 주인님에게 알려 주었겠지요."
"그럴까. 그럼 형과 나만의 약속이었단 말인가?"

- 다케지로를 바라보는 젠이치의 눈초리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젠이치는 아이처럼 순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그렇게 되지. 다케지로 씨가 말한 대로야. 마사기치 형의 유지를 따르려면, 요괴가 말하는 대로 주인을 계속하는 것은 이제 그만해야 해. 첫째 나만으로 끝난다고는 정해져 있지 않으니까. 이대로 가면, 다음은 고이치로 차례일지도 몰라. 그런 것은 이제 딱 질색이야."
"헤, 딱 질색입니다."
다케지로는 위세 좋게 소리를 냈다. 그러나 고로베가 노려보자 허둥지둥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렸다.
"어, 어쨌든 바구니를 짊어진 이누하리코 50마리를 빨리 모읍시다."

- 오미야의 일가를 모두 돌아, 우선 열여덟 마리를 모을 수 있었다.
의외로 적은 것 같지만, 젠이치는 이것으로도 괜찮다고 말했다. 이런 행운을 비는 물건은 없는 곳에는 하나도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에 목표로 할 수 있는 것은 이웃과 거래처다. 이 경우에는, 오미야가 왜 이누하리코를 필요로 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다. 더구나 그것이 행운을 비는 물건이라, 사람들은 그것을 왜 필요로 하는지 이유를 알고 싶어 할 것이다. 오미야 씨가 묘한 일을 시작했어, 하고 소문이라도 나면 더욱더 곤란하다. 
"주인님이 이누하리코를 많이 모으면 좋은 일이 있다고 하는 꿈을 꾸었다고 하지요."
이렇게 말한 것은 고로베다.
무난한 핑계다. 그렇게 하자고 결정했다. 확실히 이것은 말하기에도 좋다.

- 하지만 세상에는 '호오, 재미있네. 좋아요, 우리 집의 것을 갖고 가세요' 하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뭐야? 그런 것은 오미야 씨가 멋대로 생각하는 것 아닌가?'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그렇다면 나도 이누하리코를 모아야지' 하는 사람도 있다.
오미야의 주인이 꾼 꿈이기 때문에, 효과가 있는 것은 오미야 뿐이라고 설명해도 오히려 노여워한다.
'이누하리코를 돈으로 사면 안 된다'는 조건이 있는 것이 더욱 일을 어렵게 만들었다.
오미야는 자기 가게의 장사가 잘 되도록 하기 위해, 이누하리코를 하나라도 거저 가져가려는 것인가? 하는 험담을 듣게 되면 앞으로의 장사에도 지장이 있다. 

- "돈을 지불하면 안 되지만, 그 답례로 우리 가게에 있는 것을 주는 것은 상관없지 않을까?"
다케지로가 서둘러서 고마이누 님에게 질문하러 달려갔다.

[니 맘대로 해분져.]
'좋도록 해라'라는 대답이었다.

- "여기저기서 잡일을 하고, 그 대가로 이누하리코를 받아 왔습니다."
그는 원래가 잡일꾼이다. 그랬기에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청소, 빨래, 장작 패기, 물 긷기, 아이 보기, 장보기, 하수구 청소 등을 닥치는 대로 하고, 그 대가로 이누하리코를 받아 올 수가 있었다.
운이 좋게도 올해가 개해 戌年라, 이유를 물으면 이렇게 대답했다.
"개해에 태어나 돌아가신 아버지께 공양하기 위해서입니다."

효자라고 돈까지 얹어 주는 집도 있었다고 한다.

- 이렇게 하는 동안에 젠이치는 제대로 하오리를 갖춰 입고 하치만 신사에 가서 몇 번인가 빌었다.
얼굴이 무척 넓은 야마토야의 대장은 -왠지 그 얼굴이 사람들에게 먹힌다. 여기저기 물어서 이름조차 확실하지 않은 이 신사의 유래를 조사해 주었다.
그것에 의하면 그 신사는 투구 '하치만궁' 같다.
"아주 옛날, 에도가 생기기보다도 옛날이다. 이 주위는 초원이었다. 전투 뒤에 그 신사 주위에 투구 몇 개가 떨어져 있었다.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무사들의 투구였지." 
머리까지 함께 떨어지지 않아서 좋았다. 아니, 머리는 적들이 수급의 표시로 가져갔을 것이다.
"그것이 밤이 되면 도깨비불처럼 파랗게 빛을 내서, 마을 사람들이 흙에 묻고 공양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들의 꿈에 갑옷 무사가 몇 사람 나타나서 인사를 했다고 한다.
[하치만 신을 모시고, 그 투구를 신체로 신사를 지으면, 우리들이 영원히 이 토지를 지키겠소.]
이렇게 약속했기에 그렇게 했다고 한다. 그것이 유래다.

- "어쨌든 오래된 이야기로, 네기 씨의 집도 어느새 대가 끊어진 것 같아. 그리고 마을 이장도 알지 못했는데, 이 옛날이야기를 해준 사람은 이장의 아버지였어."
이장의 아버지는 90이 되는 노인이라고 한다.
"저렇게 폐가처럼 되었는데도,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마을 사람들 덕분이지."

 

- 야마토야의 대장이 이 이야기를 하러 오미야에 왔을 때, 마침 오미요는 부모님 옆에 있었다.
"나도 다시치도 그 앞을 지날 때는 인사해요."
야마토야의 대장은 훤칠하고 용모가 단아한 남자로, 고로고로 지배인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다. 하지만 눈초리만은 고로베도 맨발로 도망갈 정도로 날카롭다. 그가 그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그런 마음가짐이 좋은 거야."

 

- (주 : 네기.  옛날 신직(神職)의 하나)


- "대장님."
"오미요, 대장에게 말을 시키면 안 돼."

"괜찮습니다. 뭐야, 오미요?"
"고마이누 님을 아훔이라고 하지요?"
"잘 알고 있군. 그렇게 부르지.”
"어느 쪽이 아고, 어느 쪽이 훔이에요? 나에게 말을 한 것은 아일까요, 훔일까요?"
오미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대장이 잠시 생각하고 말했다.
"합쳐서 '아훔 님'이라고 말하지 않나?"
마음대로 생각하라는 것이다.

- 다시치는 도중에 잠이 들어서 중요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지만, 도박 눈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안심해도 좋을 일을 알려 주었다.
"대부분 모르고 있어요. 그것이 날아왔을 때 본 사람은 우리 아버지와 형들뿐이에요."
그것은 잘 됐다.
"집의 관리인은, 오미야 씨가 밤에 도둑이라도 들어올까 봐 걱정해서 창고 옆에 화톳불을 피웠다고 했어요."
"그럼 그렇다고 해 둡시다."
도박 눈이 중얼중얼 투덜투덜하는 것을 다행히 이웃에서는 모르는 것 같았다.

- 조금씩, 조금씩 바구니를 등에 진 이누하리코가 모였다. 야마토야에서 왕고참 파발꾼 다쓰 씨는 한 번에 여덟 개나 갖고 돌아왔다.
"난소까지 갔다 왔습니다."
편지 배송지인 촌장의 집에서 이누하리코 얘기를 했을 때, 촌장의 얼굴빛이 변해서 당황했다고 한다.
"그 촌장이 '혹시 자네는 도박 눈을 퇴치하려고 이누하리코가 필요한 것 아닌가?' 하고 말해서 깜짝 놀랐지요."
촌장은 도박 눈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 때 들은 이야기라고 했다.
"마을에 있는 절의 스님이 목숨을 걸고 퇴치했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때도 고생해서 이누하리코를 모았다고 합니다."
'아이는 가까이 가지 마라. 그것에 가까이 가면 손버릇이 나빠진다'
이 내용도 똑같았다.

- "지역이 난소(南總)라 여덟 마리 견사(犬士)군' 하고 모두들 웃었다. 그것을 계기로 오미야에서는 이누하리코를 '견사 님'으로 부르게 되었다.

- 견사님들을 오미야의 손님방에 모아 두었다. 오미요는 가끔 숨어 들어가, 크기도 낡기도 더러움도 제각기인 이누하리코들이 모두 등에 바구니를 이고 나란히 정렬해 있는 모습을 보았다. 오미야는 멍멍, 하고 소리를 질러도 보고 혼자서 생긋 웃기도 했다. 
견사님들은 모두 눈을 크게 뜨고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이 보였다. 불가사의하게도 이 방에 있으면 3번 창고의 불온하고 불쾌한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 (주 : 난소. 난소 사토미 팔견전(南總里見八犬傳)에서 유래)

- 이렇게 해서, 이레에 걸쳐 50마리의 견사님들을 모았다.
젠이치와 야마토야의 대장은 다시 하오리를 입은 다음, 다케지로를 데리고 투구 하치만 신사로 갔다. 그리고 사반각(30분)도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내일이다. 내일 한다."
그러면서 사람을 모으라고 했다.

 

- "우리 일가에서 남자 스물다섯 명, 여자 스물다섯 명을 모아라. 남자는 주판을, 여자는 쌀을 넣은 질그릇과 양념절구나 사발을 갖고 창고 가까운 방에 모인다. 미닫이도 덧문도 모두 닫고, 절대로 밖을 보면 안 된다."
투구 하치만 님을 모시는 신사에는, 문과 본전 사이에 화톳불 두 개를 피웠다.
"그쪽은 야마토야에서 맡고, 내가 감시를 할 거요."
대장은 이렇게 말하고서 서둘러 돌아갔다.

- "밤에 종이 아홉 번 울리면 내가 3번 창고의 자물쇠를 연다."
자물쇠만 열고 문은 그대로 둔다. 그리고 젠이치는 방으로 달려들어와, 남자들과 함께 주판을 들었다.
"그러면 머지않아 아훔 님이 멍멍, 하고 울 것이다. 그 소리를 듣고... 남자들은 주관을 흔들고, 여자들은 그릇 안의 쌀을 씻는다."
"쌀을 물로 씻지 않아도 돼요?"
가나에가 곧바로 팔을 걷어붙일 기세로 물었다.
"괜찮아. 중요한 것은 주판을 흔드는 소리와 쌀 씻는 소리를 내는 거야. 도박 눈은 그 소리를 못 견뎌. 한마음으로 흔들고, 씻는 소리를 낸다. 다른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염불도 필요 없다. 마음을 비우고 그저 소리를 낸다. 피곤해도 쉬면 안 된다. 이것은 도박눈과의 승부이기 때문에 이기고 싶으면 손을 쉬면 안 된다."

 

- "견사님들은 어떻게 하지요?"
"그래, 그게 중요하다. 견사님들이 있는 방은, 덧문과 미닫이를 열어 놓는다. 그리고 자정이 되기 전에 견사님들의 등에 이고 있는 바구니를 뒤집어 놓아야 한다."
보통 이누하리코 등의 바구니는 뒤집혀 있다. 그것을 위로 향하게 놓으라는 말이다.
"내일은 반달입니다. 달은 관계없어요? 이런 주술 같은 것은 보름달이나 초승달일 때 하는 거 아니에요?"
가나에가 아직 밝은 하늘을 보며 물었다.
"그런 말을 하다니... 당신은 노란 표지 책의 도깨비 얘기를 많이 읽은 모양이군."
젠이치의 말에 가나에의 얼굴이 붉어졌다.

- "도박 눈 퇴치에 달의 밝기는 상관없어. 달밤도 어두운 밤도 도박에는 관계가 없기 때문이야. 다만 비가 내리면 다음으로 연기한다."
"왜요?"
"비가 내리면 견사님들이 젖기 때문이지."
종이로 만들어서 물에는 약하다.

 

- "아훔 님의 짖는 소리를 신호로, 주판과 쌀로 소리를 계속 낸다. 그러고 있으면 마침내 아훔 님이 멍! 하고 한 번 짖는다. 그렇게 하면 집안의 불을 켜고, 문을 열어도 좋다. 될 수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는 것이 좋다고 한다."

- '놀랍겠지만 무서운 일은 아니다'
아훔 님이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 그날 밤이 왔다.
어린 오미요는 할 일이 없었다.
오미야의 가족이 아닌 다케지로도 일이 없었지만, '자네가 말해서 이렇게 하게 됐으니 꼭 입회해 달라'라고 젠이치가 부탁해서 오미요와 함께 있었다.
사정을 듣고, 오히려 겁을 먹은 신돈이 벽장에 들어가서 떨고 있기 때문에 다케지로가 고이치로를 업고 있었다. 상당히 익숙한 자세다.
"나는 애 보기에 익숙하니까."
덧문을 닫은 방에 초를 하나 켜고 있다. 고이치로는 다케지로가 잘 달래서 푹 잠들어 있다.
오미는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좀처럼 안정이 되지 않았다. 서거나 앉거나, 덧문에 가까이 갔다가 물러나느라 바빴다.

- "오미요, 졸리지 않아?"
"졸리지 않아."
"배짱이 좋군."

오미요는 마음속으로 아홉 님의 소리를 들었다.
[인자 걱정 말드라고.]
이제 안심해도 좋다는 의미다.
[또 놀러 온나 잉.]
이 말은 짐작이 가지 않아서, 나중에 다케지로에게 물어봤다. 그랬더니 '또 놀러 와라'라는 뜻이라고 말해 주었다.

- 투구 하치만 신사에서 감시하던 야마토야의 대장은, 오미야에서 나온 견사님들이 바구니 안의 눈알을 짊어진 채 호를 그리며 가볍게 날아와서, 화톳불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봤다고 한다.
견사님이 한 마리 날아들 때마다 화톳불이 확 타올라, 좁은 경내가 대낮처럼 밝아졌다고 한다.
또한 그 빛이 본전의 문을 넘어 안까지 비치는 것을, 대장은 봤다고 한다.
희미하게 빛나는 투구 몇 개를...


- 모두 밥을 배불리 먹은 후, 젠이치는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다케지로를 데리고 아홉 님을 만나러 갔다.
"3번 창고는 잘 청소하고, 하루만 소금을 뿌려 놓으면 된다. 도박 눈과 함께 갇혀 있었던 간장은 통째 강에 가라앉혀라. 그리고 앞으로 일 년 동안, 우리 불단에 도박 눈의 재료가 되었던 사람들의 공양을 위해 매일 흰밥을 올리도록 해라." 
젠이치는 이렇게 말하고 목이 막혔다.
"그것들도 옛날에는 사람들이었으니까."

- 도박 눈은 사라졌다. 더불어서 오미야는 약정에서 해방되고, 재난도 사라졌다.

- 50명의 남녀는 대강 일각 반(3시간) 동안, 주판을 흔들고 쌀을 씻었다. 그 후유증으로 남자들은 그 후 며칠 동안 팔이 올라가지 않았고, 고로베는 허리까지 아파서 누워 있어야 했다.
"불찰이었습니다."
여자들은 손톱이 갈라지고 손가락 끝에 손거스러미가 생겼다. 여자들이 씻었던 쌀의 대부분은 희미하게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오미야의 가나에와 오킨은 그 손을 마주 잡고 울었지만, 손가락의 상처가 아물자 전보다 한층 더 많이 웃게 되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로 엄격한 것은 그대로였다. 

오미야에서는 투구 하치만의 본전을 다시 짓기 위해, 촌장에게 청원했다. 야마토야에서도 돕겠다고 했다.
"토지신(地神)이기 때문에 이웃의 시주도 모으지요. 장황하게 말하지 않아도 틀림없이 모두 찬성할 겁니다."

 

- 그런가 하면 젠이치는 다케지로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다케지로 씨, 이것도 인연이니 우리 집에서 일하지 않겠나? 야마토야에서 괜찮다고 한다면..."
야마토야의 대장은 좋다고 했는데, 본인은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나는 잡일꾼으로 있는 게 편합니다."
"언제까지나 그렇게 있을 수는 없어. 언젠가는 가정도 가져야 하고..."
"그때는 그때입니다. 무엇을 생업으로 해도, 도박꾼은 되지 않을 겁니다."
다케지로는 이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 오미요는 다케지로의 도움을 받아, 다시치와 오빠들과 함께 가서 이틀 동안이나 아훔 님을 반짝반짝하게 닦았다.
다케지로가 말한 대로, 도도키 돌은 역시 아름다운 청회색이다. 너무나 오래되어서 기야만처럼 반짝이지는 않았지만,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을 끌기에는 충분했다. 아훔 님은 아름다워졌다.

- 또 하나, 오미요가 투구 하치만을 지나면서 꾸벅 인사를 할 때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의 귀를 끄는 말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왔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은, 누구나 듣고 알았다.
그러나 오미요는 거기에 더해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아훔 님, 우덜은 인자도 겁나 좋게 지내고 있지라우."

 

- 그 말은 도도키 사투리로 이런 의미다.

아훔 님, 우리는 오늘도 무사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도박 눈>, 미야베 미유키

 

- 아오바 요시오는 도쿄에서 출세하려고 상경했다. 북쪽의 외진 고향 마을에는 좋은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방대학을 졸업했지만 지방에는 일자리가 없다. 이렇다 할 기업도 없고, 시청은 '파산'을 선언했다. 
졸업 후, 지방의 신용조합에 근무했지만 신용조합은 도산했다. 그 후 운전기사, 점원, 도로공사 일용직 잡부, 웨이터, 일회성 잡일 대행 등을 전전하며 살아왔는데 계속 비관적이었다.
집에는 나이 든 부모가 연금을 받아 근근이 살고 있다. 기대했던 외아들이 대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죽을 날만 기다리며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런 상태이기 때문에 애인이 생길 리가 없고 결혼도 할 수 없다.

첫째, 고향 마을에서는 젊은 여자를 거의 볼 수 없다. 학교를 졸업하면, 젊은이는 도시로 나간다. 도시에 가서 어떤 생활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마을에는 없는 기회가 있는 모양이다. 오봉(お盆)과 연말에 귀성하는 그들은 도시에서의 화려한 생활을 과시하듯, 화려한 옷을 입고 많은 선물을 갖고 온다. 가혹한 도시 생활을 견디다가 일 년에 한두 번 귀성하는 것인데도, 시골에 있는 사람들 눈에는 그들이 모두 성공한 사람처럼 보인다. 
젊은 여자들은 도시 생활과 가장 중요한 것을 바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들은 시골에는 없는 기회를 찾으려 할 것이다. 아주 낮은 확률이지만... 

 

- {주 : 태음 태양력(太陰太陽曆)인 화력(和曆) 7월 15일을 중심으로 일본에서 행해지는 조상의 영혼을 모시는 일련의 행사. 일반적으로 불교의 행사라고 인식되어 있지만, 불교의 교의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도 많다. 옛 신도(神道)에 있어서 조상 공양의 의식이나 제사를 에도 막부가 서민에게 강요한 시주 제도에 의해 불교식으로 실시하는 일도 강제해서, 불교 행사 '우란분재'와 합쳐져 현재의 형태가 되었다고 한다.) 

- 그래도 아오바는 나이 든 부모를 두고 떠날 수도 없고 또 도시로 뛰어들 만한 배짱도 없다. 그래서 일본의 외진 곳에 있는 잊힌 듯한 고향 마을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그것에도 한계가 왔다. 마지막에 얻은 공사 현장의 교통정리 자리도 공사 종료와 동시에 그만두게 되고, 다음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가령 하루 일을 얻는다고 해도, 하루 늘어날 뿐이다. 

 

- 정보화 사회이기 때문에 중앙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정보는 리얼타임으로 얻을 수 있다. 때문에 대도시에서의 서바이벌이 얼마나 가혹한지도 충분히 알고 있다. 돈을 벌려고 해도 일에 데어서, 돌아올 여비도 없이 노숙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알고 있다. 
날마다 발생하는 흉악한 범죄와 위험한 함정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고, 차의 홍수 속에서 교통사고도 끊이지 않으며, 거리에는 배기가스가 가득 차 있다. 도저히 사람이 살 만한 환경이 아니다. 러시아워 때의 만원 전차처럼 들어설 여지가 없지만, 도시는 오는 사람을 거부하지 않는다. 
특히 대도시는, 일단 들어가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지방 사람들을 아주 관대하게 맞아준다. 하지만 거기에 흘러들어 갈 수는 있어도 뿌리를 내리는 것은 쉽지 않다. 
도시에 꿈을 걸고 온 젊은이들 대부분의 웅대한 계획은 허무하게 좌절하기 마련이다. 그런 일은 모두 알고 있다. 그래도 대도시는 지방의 젊은이들을 끊임없이 끌어당기는 화려한 꿈의 광원이다. 

- 아오바의 경우 단순히 꿈을 좇을 뿐만 아니라, 고향 마을에서도 살아갈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없는 돈을 모두 긁어모으고, 친한 친구에게서 받은 전별금을 가슴에 넣고 상경했다. 어떤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도쿄에 나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도쿄에는 수학여행으로 한 번 와 봤을 뿐이다. 우선 싼 하숙을 찾아서, 헬로워크에서 일거리를 찾을 생각이다. 도쿄는 사람의 바다이기 때문에 자기 하나쯤 들어가는 것은 문제없을 거라고 태평스럽게 생각했다. 

- 도쿄에서 먼저 놀란 것은, 사람들의 표정이 험악하다기보다 무표정하고, 걷는 속도가 무척 빠른 것이었다. 차간 거리만이 아니라, 걷는 데도 앞사람과의 사이에 틈만 생기면 다른 사람이 끼어든다. 게다가 고향에서는 희소가치가 된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북적대고 있는데, 모두 같은 얼굴로 보였다.
공기는 오염되었다기보다 흉포했다. 먼지 하나 떠다니지 않는 고향에 비해, 도쿄의 공기에는 흉악한 것이 들끓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 한 사람쯤은 문제없이 숨어들 수 있을 거라고 낙관했는데, 흉악한 물질이 응축한 것 같은 공간에는 개미도 들어갈 수 없으리만치 거부의 느낌이 강했다. 
텔레비전과 영화에서 본 화려한 야경과 귀성한 친구들의 이야기에는, 도시의 자유와 무한한 가능성이 강조되어 있었다. 그런데 실제의 도쿄는 들어갈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강하게 거부하는 자세를 하고 있다. 처음 상경한 사람은 도쿄를 보고 기가 꺾일 수밖에 없다. 

 

 

- 그런 그를 조소하듯이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목적 장소나 목표를 향해 빠져나간다. 그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이렇게 엄청난 사람을 위해, 도쿄는 그들의 목적지를 준비하고 있는 걸까? 오직 자신만이 이 인간의 바다에 방출되어, 목적도 없이 표류하는 기분이었다.

- 시부야에 대한 예비 지식은 대충 갖추고 있지만, 아오바가 실제로 체험한 시부야는 사람의 거리가 아닌 원숭이의 거리였다.
거리에서 꿈틀거리는 군중은 겉으로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원숭이처럼 보였다. 도쿄가 어느새 원숭이에게 정복된 느낌이다. 아오바가 도쿄에 기가 꺾였기 때문에 이런 느낌이 드는지도 모른다. 

- "배가 고프지요? 먹을 것을 만들어 줄게요. 잠깐 이것으로 요기하세요."
여자는 키친 테이블 앞에 그를 앉히고 주스 캔을 내밀었다.
무서운 남자들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남자의 냄새도 없었다.
"아, 소개가 늦었어요, 내 이름은 야요이(彌生). 야요이의 하늘의 야요이에요. 당신은..."
그녀는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나야말로 실례했습니다. 아오바 요시오(靑葉良男)입니다. 푸른 잎, 좋은 남자입니다."
"아오바에 야요이인가... 왠지 잘 어울리는 것 같네요."
야요이는 아름답게 웃었다.

- 미지의 대도시에서는 주위를 모두 적으로 봐야 몸이 안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요이는 조금 전에 만났을 뿐인, 어디의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오바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왔다. 젊은 여자가 처음 만난 남자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오는 것은 무방비라기보다는 무모하다. 
기다릴 틈도 없이, 꼬르륵 소리가 나는 배 속에서 먼저 알아챌 정도로 좋은 냄새를 발산하는 뜨거운 요리를 야요이는 테이블로 가져왔다. 
"마침 있었던 즉석요리예요. 입에 맞을지 모르지만 허기는 없앨 수 있을 거예요."
야요이는 이렇게 말하면서 즉석 비빔밥과 호박 수프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거기에 만두와 캔 맥주가 있었다. 아오바의 배에서 또다시 소리가 났다. 

- "고맙소."
아오바는 의식하지 않았는데 어느새 눈시울이 젖었다. 상경하자마자 돈을 잃어버리고 막막했는데, 정말이지 지옥에서 부처님을 만난 것 같은 마음이었다.
"드세요. 나도 함께 먹을 거예요. 먼저 건배하지요."
두 사람은 캔 맥주로 건배했다. 빈속에 마시는 맥주는 온몸의 세포에 스며드는 듯 시원한 데다, 비빔밥과 만두로 허기를 달래고 나자 아오바는 몹시 기분이 좋아졌다. 

"당신은 오늘 처음 만난 나에게 왜 이렇게 친절을 베푸는 겁니까?"
마침내 제정신이 든 아오바가 머리를 스치는 궁금함을 물었다.
"처지가 비슷해서 도운 거예요."
"처지가 비슷해서...?"
"나도 처음 상경했을 때, 돈을 모두 소매치기 당했거든요."
"당신도..."
"그때 친절하게 나를 집까지 데리고 가서, 거취가 결정될 때까지 있게 해 준 할아버지가 있었어요. 때문에 당신을 그냥 둘 수 없었어요."
"그러나 야요이 씨는 여자이고, 나는 남자입니다. 처음 보는 남자를 갑자기 집에 데려오는 일을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나요?"
"아오바 씨를 봤을 때, 신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나를 믿었다는 말이군요."
야요이는 입가에 미소를 보이면서 끄덕였다.

- 아오바는 그 후 그녀와 노인의 관계가 어떻게 됐는지, 또 대도시에서 여자 혼자 어떻게 살아가는지 궁금했지만 결코 묻지는 않았다. 그런 것을 묻는 것은 구원의 여신을 모독하는 정도가 아니라,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 배가 부른 아오바는 방구석에 놓여 있는 둥근 방석이 깔린 바구니를 보았다. 고양이나 강아지를 기르는 것 같은데, 그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아오바는 그 소재를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아오바처럼 가출했는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식사와 맥주를 마셨으니 더 이상 야요이의 방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아오바는 인사를 하고 나서 가겠다고 했다. 그러자 야요이가 5천 엔짜리 지폐 하나를 내밀었다. 
"돈이 전혀 없으면 고향에 연락도 못 하잖아요. 적지만 당장 필요한 데 써요."
"식사를 대접받고 돈까지 받을 수는 없습니다."
아오바는 깜짝 놀라며 거절했다.
"일자리를 찾고 조금 여유가 생기면 갚아요. 그때까지 빌려 드리는 것으로 해요."
야요이는 거절하는 아오바의 손에 5천 엔짜리 지폐를 쥐어 주었다. 아오바는 또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아오바가 야요이의 방을 떠나면서 말했다.
"그런 과장된 말은 하지 마세요."
야요이는 아름답게 미소를 지었다.
아오바는 도쿄라는 적지에서 만난 여신에게 최고로 정중하게 인사를 한 후 떠났다.

- 속옷을 배낭에 넣었다. 그리고 부정을 씻기 위해 발로 밟은 장소에 소금을 뿌렸다. 그는 이와 같은 불경한 상황에 대비해서, 언제나 정화용 소금을 갖고 다녔다.
본존(속옷)을 부주의하게 밟은 장소에 정화의 소금을 뿌린 유사는 준비해 온 등산용 자일을 이용해서 무난히 지상으로 내려왔다.
야요이 방의 불은 따뜻하게 반짝였다. 손님은 아직 있는 것 같다. 유사는 그 후에 두 사람이 어떻게 발전할까를 상상했다.

- 오타 도라키치는 노숙자다. 돈을 벌려고 온 도쿄에서 공사 현장을 돌아다니며 하루 단위로 구멍 파는 일을 했는데 일이 끊어졌다. 세계적 불황의 바람을 받아 공사가 줄어들고, 기초 공사의 시작인 구멍 파는 일조차 없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여비가 없다. 또 고향에 가도 고향에는 일이 없다. 
오타는 일을 찾으면서 노숙 생활을 했다. 일이 없으면 외지인 노동자의 거점인 노무자 합숙소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일찍, 인력 시장(구인 장소)에 가도 하루 일거리를 얻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 그는 거리에서 생활하는 동안, 같은 노숙자에게도 계급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A급은 거리에서도 다소의 현금 수입이 있는 사람이다. 그들은 쓰리기통에 버려진 잡지와 쓰레기장에서 폐품을 모으고, 이것을 팔아서 수입을 얻는다. 이렇게 모은 잡지와 식품을 전문으로 교환하는 업자도 있다. 책과 잡지를 거래하는 곳은 '서점', 식품을 거래하는 곳은 '노점'이다. 
노상에다 방수포와 골판지 상자로 주거 공간을 만들고, 포터블 텔레비전과 휴대용 곤로, 침구, 자전거, 세탁기 등의 가재도구까지 갖추는 등으로 상당히 문화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A급 중에는 일단 생활 능력이 있고 일반 사회에 복귀할 능력도 있으면서, 자유로운 노상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 B급은 A급 밑에서 일하면서 남은 것을 받고, 유효 기간이 지난 식품이나 남은 음식 등을 슈퍼마켓이나 레스토랑의 뒷문에서 받아 생활하고 있다. 수집하는 데도 각자의 특기 분야가 있어서 도시락, 데일리 푸드, 술 등을 분업해서 모아 교환하면 상당히 균형 잡힌 식생활이 가능하다.
그들은 각자의 구역이 있고 단골집이 있다. 이것을 '단가(檀家)'라고 한다.

- C급은 전혀 능력이 없어서 거리에서 멍하니 보내며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 이렇듯 노숙자들에게도 계급의식이 있어, A급과 B급은 C급과 함께 취급하지 말라고 주장한다.
오타 도라키치는 겨우 A급에 매달려 있었다. 경기가 좋아지면 일자리도 생긴다. 이 노숙 생활의 경험을 책으로 써서, 작가 데뷔를 하려는 야심도 갖고 있다. 그 때문에 지금의 신분은 세상을 속이는 가짜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노숙 생활은 가혹하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관리사회의 틀을 벗어난 자유가 있다. 어디에나 갈 수 있고, 아무 데서나 잠을 잘 수 있다. 잠들고 일어나는 시간도 자유다.  
도시에는 비와 이슬을 피할 수 있는 장소가 많다. 지하도, 육교 아래, 아케이드, 빌딩 뒤, 공사 중인 건물, 건설이 중지된 미완성 빌딩...
아침마다 정해진 시간에 만원 전차에 정어리처럼 채워져 타지 않아도 되고, 상사의 화난 목소리를 들으면서 회사의 노예 쇠사슬에 묶여 있지 않아도 된다. 납세의 의무도 없고, 관혼상제의 의리도 없으며, 번거로운 인간관계도 없다. 부양해야 할 가족도 없다. 가족은 있어도 고향에서 떠나왔거나 또는 가족에게 버림받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노숙 생활의 요령을 익히면 먹는 것은 거의 해결된다. 물물교환해서 술과 기호품도 얻을 수 있다. 비슷한 노숙자와 '도나리구미(隣組)'를 결성하면 더욱 효율이 좋아지고, 안정성도 높아진다. 
어느 정도의 현금 수입을 확보해서 복장을 좋게 하면 일반 사회인과 구별할 수 없게 되고, 잡무 대행, 영화나 텔레비전의 엑스트라, 또 '줄서기'라고 하는 행렬에 줄을 서서 플래티늄 티켓과 사회적 관심이 높은 재판의 방청권을 입수하는 일을 만날 수도 있다.
골판지 상자와 비닐하우스 생활도 익숙해지면 의외로 나쁘지 않다. 노숙자 가운데는 골판지 상자 하우스를 거실, 침실, 식당으로 구분해서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 (주 : 도나리구미(隣組). 일찍이 일본에 있던 제도로, 1940년에 처음으로 명문화되었다. 반상회보다 한층 아래에 있고 몇 가정마다 1조를 조직해, 배급의 효율화나 사상 통제를 기도했다. 이 문장에서는 작은 조직이나 팀을 가리킨다.) 

- 여자 노숙자는 아주 적다. 거의가 혼자 사는 여성이고, 어쩌다가 부부가 있을 정도다. 파산하거나 재해를 당한 부부가 노숙을 시작한 것이다.

- 오타는 그런 경험은 없지만, 숙달된 노숙자에게서 들은 얘기에 의하면 노숙자를 좋아하는 여자도 있다고 한다. 그것도 같은 노숙자가 아니고 일반 사회의 여자라고 한다. 그녀들은 가끔 골판지 상자와 비닐하우스를 방문해서 먹을거리를 조달하거나 하우스를 정리하고, 밤까지 머무르면서 섹스 상대를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속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정보이지만, 노숙 베테랑은 그런 여자와 경험한 일을 구체적으로 말했다.

- 또 그런 여자가 아니라도, 가끔 가출 소녀가 갈 곳이 없어서 노숙자의 텐트촌으로 들어오는 일이 있다. 인정 많은 그들이 며칠 동안 골판지 상자 하우스에서 머물게 해 준다. 하지만 그녀들은 거의 미성년자라서, 무심코 손을 댔다가는 청소년 건전 육성 조례에 걸려 큰일이 난다. 납치 유괴했다고 의심받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하룻밤의 잠자리를 제공하는데도 각오가 필요하다. 

- 노숙자에게 최대의 적은 추위다. 비바람과 여름의 더위는 그럭저럭 견딜 수 있지만 거리에서의 겨울은 혹독하다. 특히 지상에서 그냥 자면 체열을 뺏긴다. 술을 마신 기운으로 골판지 상자나 담요 없이 자다가 얼어 죽는 일도 있다.
도쿄의 하늘이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각다귀에 물리지 않게 되어 안심하는 기간은 짧다. 아침저녁 두드러지게 추워지면 노숙자는 다음 해 봄까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함께 비장해져야 한다. 경박한 자유에는 길에서 비참하게 죽는 자유도 포함되어 있으니까...

- 어느 날 아침, 발밑이 따뜻한 털 뭉치에 닿는 감촉을 느끼면서 눈을 뜨자 '야옹'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고양이가 그의 텐트에 들어온 것 같았다.
노숙자와 고양이는 상성이 좋다. 고양이를 기르는 동료는 적지 않은데, 고양이는 사육된다는 의식이 없을지도 모른다.
오타가 손을 뻗자, 고양이는 사람이 그리운지 가까이 다가왔다. 목걸이는 없지만 털에서 샴푸 냄새가 났다. 집고양이가 밖으로 나왔다가 길을 잃은 것 같다. 하얀 바탕에 검은 무늬가 있었다. 
먹다 남은 도시락을 주자, 배가 고팠는지 전부 먹는다. 그 후, 고양이는 오타의 텐트에서 살게 되었다.

- 인간의 먹을거리는 고양이에게 강하기 때문에, 잡지와 빈 캔을 수집한 수입으로 고양이 먹이를 사주었다.
오타는 집 잃은 고양이를 '몽'이라고 불렀다. 몽과 함께 자고 있으면 살아 있는 작은 난로를 안고 있는 것 같아서, 그 겨울은 그렇게 추운 것 같지 않았다. 
몽은 곧바로 텐트촌의 명물이 되었다.

시부야의 노숙자는 신주쿠에 비해 온화한 사람이 많다. 미야시타 공원 일대가 노숙자의 집합소인데, 공원 관리인도 그다지 시끄럽게는 말하지 않았다.
'도나리구미'는 사이가 좋고, 살고 있는 환경을 청결하게 유지하고 있다. 일반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서, 공원 이용자들도 크게 ...

- "아마 전차 안에서 엽서를 소매치기 당했다고 생각합니다."
"소매치기 당한 금액은? 그 밖에 잃어버린 것도 있습니까?"
"저금과 부모님에게서 받은 돈, 그리고 전별금까지 합해 15만 엔 정도입니다. 아, 그리고 50엔짜리 우표 다섯 장을 지갑에 넣었습니다. 엽서에 그 가운데 하나를 붙였습니다." 
"당신이 스기무라 씨의 방에 들어왔을 때, 베란다의 유리문이 열려 있었습니까?"
"아마 닫혀 있었을 겁니다."
"당신이 열지 않았습니까?"
"처음 방문한 다른 사람 집의 유리문을 멋대로 열 수는 없습니다."
아오바가 범인이라면 경찰에 출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네스에는 오타가 고양이를 돌려주러 와서 피해자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 복도를 지나다 부딪친 젊은 남자와 함께 피해자의 방에 들어갔다고 진술한 것을 생각했다. 이웃의 젊은 남자에게 물으면 그때의 유리문 상태를 알 수 있을 것이다.

- 아오바로부터 사정을 한바탕 들은 후, 무네스에는 다시 피해자의 이웃에 사는 젊은 남자 사야마 미키오에게서 사정을 들었다. 사야마는 유리문이 닫혀 있었고,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무네스에는 사건에 관한 참고인의 증언을 면밀히 검토했다.
사야마는 유리문이 닫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 유리문은 누가 열었을까? 현장에 온 수사관들은 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하늘이 보낸 고양이>, 모리무라 세이이치

 


두 남자가 보였다. 중앙 침대에 반백의 머리. 부드러워 보이는 베개에 얼굴을 반쯤 파묻고 있다. 만나야 할 남자는 얇은 커튼이 흔들리는 창가 침대에서 상반신을 일으키고 있다. 현경 검시관, 구라이시 요시오(倉石義男), 환자복을 풀어헤치고 있다. 만나는 것은 처음이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동시에 이마무라는 멋대로 방문한 자신을 후회했다. 구라이시의 팔은 가늘었다. 가슴은 너무나 얇았다. 역광의 하얀 윤곽이 흐릿해서, 지금이라도 하늘의 사자가 내려올 것 같았다. 하지만...

- 구라이시의 눈이 이쪽을 보고 있다. 충격과 두려움이 동시에 어려 있는, 형용하기 어려운 눈빛이었다. 용의자들을 천명 이천 명 관찰했어도 결코 본 적이 없는 눈빛이었다. 호기심이나 시의심(猜疑心) 그리고 놀라움마저도 아주 옛날에 깔고 누른, 단지 본질만을 밝히는 '직관' - 그런 상상을 일으키는 눈이었다. 한순간 벌거벗은 것 같으면서, 모든 것을 들여다보이는 기분이 되었다. 이쪽의 용건이나 생각 모두를... 그리고 경력과 처지와 인격까지도.
이마무라는 머리를 숙였다. 경례가 아니라 일반 인사였다. 그렇게 해서 시선을 피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침대로 다가갔다. 구라이시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고, 무릎 앞에 신문이 펼쳐져 있다. 주식 면이다. 

- "실례합니다."
가방은 바닥에 놓았는데, 과일을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손끝에도 긴장이 전해졌기 때문에 명함을 꺼내는 데도 힘이 들었다. 'S현 경찰본부 형사부 수사 1과 경부 이마무라 유키마사' 구라이시는 명함을 한 번 보고 나서 시선을 들었다. 

 

- 다시 처지가 바뀌고 말았다.
"자네, 정말 현장에 갔었나?"
구라이시는 사진을 손 가까이로 모으면서, 파자마가 걸쳐진 시체의 왼쪽 넓적다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위를 보고 찔렸다면 가슴에서 배까지야. 넓적다리까지 흠뻑 피가 묻어 있는 것은 어떤 이유지?"
"그것은... 상당량의 출혈이 있었다는 것이고, 보다시피 우치다는 가슴이 두껍기 때문에 각도가 있어, 배에서 다리로..."
"바보! 근본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점점 세부가 왜곡되는 거야."
두려움과 분노가 반반이었다. 열세는 이마무라도 자각하고 있다. 하지만 말로 지고 있을 뿐이다. ‘근본’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지적하신 부분은 모두 지엽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피가 흐르거나 튄 것도 기점(起点)에 대해서 예측에 벗어난 결과를 보이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 과학수사연구소가 정리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 "이렇겠지."
링거의 관이 당겨졌다. 구라이시가 팔을 들었기 때문이다. 책상다리를 한 채, 전방으로 내민 오른손 주먹을 왼손으로 싸고, 칼의 길이를 재는 듯이 행동한 다음, 스윽 자신의 왼쪽 가슴에 댔다. 
"누워서 자신의 가슴을 찌르려고 해도 힘이 들어가지 않아. 하려면 똑바로 앉거나 책상다리야. 의심나면 시험해 봐. 똑바로 앉아서 찌르면 몸이 앞으로 쓰러져. 책상다리의 경우는 잠시 고정돼. 그리고 앞이나 뒤로 천천히 쓰러지지. 우치다는 책상다리로 있었어. 왼쪽 가슴 바로 아래의 왼쪽 넓적다리야. 몸이 뒤로 쓰러질 때까지 충분히 파자마가 피를 빨아들였지." 
"그러나..."

반격할 돌은 손에 있지만, 어디에 어떻게 던져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머리에 있던 몇 개의 의미도 구라이시의 독기에 맞아 위축되었다. 대신 이미지가 부풀어 올랐다. 
그것은 책상다리를 한 우치다의 모습이다. 또한 직접 자신의 가슴에 칼을 찌르는 모습이다. 어쩐지 무서워졌다.

- 백을 백, 흑을 흑이라고 하기 때문에 신은 아니다. 우선 아마노쟈쿠(天邪鬼)처럼 상대의 마음을 읽고, 온갖 다른 이론을 구축하고, 백을 흑, 흑을 백이라고 그럴듯하게 속인다. 그런 '구라이시를 위한 검시'가 과거에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

 

- (주 : 야마노쟈쿠. 옛날이야기나 전설에 등장하는 상상 속의 나쁜 존재. 요괴라고도 정령이라고도 하기 어렵다. 타인의 심중을 헤아리는 것이 교묘하고, 여러 흉내를 낸다. 사람의 의도를 거역하기도 하고, 순진하지는 않지만 굴복되기도 한다.) 


- "고쥬 씨, 어떻습니까?"
이마무라는 갑작스런 목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젊은 간호사가 복도에서 얼굴을 들이밀고, 이쪽을 보고 있다.
"똑같아."
구라이시가 하찮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간호사가 미소를 지었다.
고쥬 씨? '구라이시 요시오(倉石義男)'와는 전혀 연결되는 부분이 없다.

- 이마무라가 기가 막혀 멍하니 있자, 이윽고 여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날씬하고 키가 크고 머리를 길게 길렀다. 눈에 힘이 있는 화사한 얼굴이다. 마흔을 넘은 것 같다. 쑥색 스웨터가 잘 어울린다. 손에 커다란 종이봉투를 들고 있었는데, 이마무라를 보고 조금 놀란 것 같다. 
이마무라는 일어나서 인사를 했다. '구라이시 부인'으로 본 것은 아니다. 틀림없이 평소에는 머리를 올리고 있고, 밤에는 카운터 안쪽에 있을 것이다. 그런 직감을 믿고 인사한 것이다. 
여자도 애매하게 인사를 한 다음, 구라이시에게 희미한 시선을 남기면서 그대로 방향을 바꾸었다. 나중에 보자고 손을 들었기 때문이다. 

- 침묵의 시간이 있었다. 잠시 두 사람에게 반백 머리 환자의 잠자는 숨소리가 들렸다. 이마무라는 엉덩이를 옮겨 침대 쪽으로 향했다. 구라이시는 외면하고 있다.
고쥬 씨... 어떤 내막인지는 모르지만, 구라이시와 젊은 간호사가 '기호'로 커뮤니케이션하고 있는 모습은 흐뭇해 보인다. 여자의 등장은 정말 도움이 되었다. 아마 구라이시는 페이스를 잃었을 것이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마무라는 마음이 가라앉았다.

"자살은 무리가 있습니다. 가슴 자창의 주위를 시작으로 우치다의 몸에는 자살 때에 보이는 주저창(躊躇創)이 하나도 없습니다."
"상처에 망설임이 없다고 해서 타살일까? 검시 관련 예외 사례집을 만들면, 그것이 검시 교과서보다 두꺼울 거야."
"그렇다면 이번 넓적다리의 피도 예외 사례집에 넣어 주세요."
"이것이 진짜 살인이라면 그렇게 하지."
"아사코가 남편의 죽음을 자살로 하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뭡니까?"
구라이시를 흉내 낸 질문을 재빨리 전개했다. 냉정해지자 생각이 잘 났다.
아까 구라이시는 이렇게 말했다. 자살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자살로 하고 싶지 않았지...

- "보험금이네."
의외의 답이었다.
"그러나 아까 얘기한 대로, 남편의 죽음에는 맞지 않는 금액입니다."
"자네가 말하는 것은 보험금 살인으로서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겠지. 남편은 자살했어. 이 말은 집에 들어오는 돈이 끊어진다는 거야. 주택 대출은 25년, 빛도 있어. 아이는 아직 다섯 살이고..."
"그러나 자살이어도..."
이마무라는 말을 중단했다. 지금은 어느 생명보험이나 자살의 면책은 2년이나 3년이다. 우치다가 계약한 것은 1년 반 전 자살로 인정되면, 보험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한다. 하지만...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자살한 남편의 시체를 보면, 많건 적건 패닉 상태일 겁니다. 그런데 졸지에 생명보험이 떠올라서, 강도 살인으로 보이도록 한다고요. 뭔가 지나치게 정리된 느낌 아닙니까?"
"패닉은 그저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게 아니야. 한순간에 팽대한 정보와 감정이 뇌에서 움직이지. 때문에 모든 것이 순식간에 보일 수도 있어, 오늘, 내일, 모레, 그다음. 먹고살아야지. 전기, 가스, 수도, 아이 교육비, 대출 상환, 빚 상환... 아무래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보험금 1천만 엔이."
상상이 따라잡지 못했다. 순식간에 모든 것이 보였다...


- "흐릿하지 않나, 이 사진?"
구라이시가 손에 든 것은 우치다의 집 외관이었다.
이마무라도 옆에서 들여다보듯이 사진을 봤다. 정말 집 장사들이 지어 파는 2층 집, 구형 BMW, 빨간 경자동차, 적갈색 흙으로 덮인 썰렁한 마당, 바깥 수도 옆의 작은 화단...
"팬지군."
"뭐라고요?"
"화단 말이야. 심어 있는 것은 팬지이거나 비올라야."
이마무라는 눈을 의심했다. 원경이기 때문에 꽃은 보이지 않았다. 빨강, 노랑, 보라, 핑크, 온갖 색이 점으로 보일 뿐이다.

"팬지는 미래를 보고 심는 꽃이네."
미래를...?
이마무라는 구라이시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귀여운 꽃이기 때문에, 집을 지을 때 가장 먼저 심고 싶지. 색깔이 다양하고, 가격도 적당해. 새 살림을 차릴 때는 기쁨으로 설레지. 꿈의 출발점 같은 것이니까. 먼저 팬지나 비올라야. 그러다가 정원 가꾸기에 몰두하게 되고, 여러 가지 꽃으로 눈이 옮겨가지." 
이야기가 끝났나? 끝나지 않았나?
"하시는 말씀의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집이 지을 때의 그 상태로 있다는 말이야. 서른에 갖는 집은 너무 일러. 5년이 지났는데, 잔디도 나무도 없어. 집은 구입했지만 담이나 마당을 만들 여유가 없었던 거지. 구형 BMW는 3류 증권사 직원의 허영이겠지. 실제로는 부인의 빨간 경자동차를 겨우겨우 운행하는 생활이었어. 단체신용생명보험의 부금도 간신히 낼 정도의 수입과 지출이 계속되고 있지. 대출도 많고, 빚도 있어. 하지만 부인은 화단에 꽃 심는 것을 계속했어. 출발점의 팬지를 해마다 사서 심었지." 

- 상상의 날개가 확 펴졌다. 꽃의 모종과 삽과 웅크리고 앉은 여자의 무릎이 떠올랐다. 사진 한 장에 찍혀 있는 슈퍼마켓의 광고지가 아주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아사코는 검소하게 생활했다. 남편의 바람과 빚에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지금의 생활을 지키려고 애를 썼다. 미래를 보고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이마무라는 애매함을 떨쳐 버렸다. 기특함은 아사코의 범행설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은 오히려 쌓이고 쌓인 불만의 폭발로서 살해 동기가 된다. 
"조사관의 말씀 가운데 우치다의 자살을 상기시키는 재료는 없습니다."
"그것을 조사하는 것은 자네들 형사의 일이야. 다만 리먼 쇼크 이후, 정상적인 정신 상태로 보낸 주식 관계자가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네. '먹고 싶지도 않아. 피곤해. 잠자게 내버려 둬.' 부인은 들은 대로 자네들에게 얘기했을 뿐 아닌가?" 
심장의 고동이 빨라졌다. 주식 면, 이마무라가 여기에 왔을 때, 구라이시는 '증권인 살인'의 상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인가?

- "우치다가 자살이라는 근거를 보여 주십시오."
더 참을 수 없어서 말했다. 지금 구라이시는 검시의 요점을 말하고 있지 않다.
"자네가 얘기했네."
"내가요? 어떤 것을?"
"피 묻은 발자국 이야기. 예를 들어, 미세한 비말이라도 범행 직후에 젖은 피를 밟으면 계단 등에 눈에 보이는 자국이 생기지, 하지만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았고, 루미놀 검사로 알았다고 자네가 말했어. 마른 피를 밟은 발이었기 때문이지, 부인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젖은 피를 밟지 않았어. 즉 아무도 우치다를 죽이지 않았다는 말이야." 
이마무라는 갑자기 크게 흔들렸다. 즉시 말이 나오지 않았다.

- "그러나 젖은 피를 밟은 발자국이라도,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구라이시는 반론을 무시했다.
"그래서 일방적으로 단정한 것은 이것이지."
구라이시는 자창의 확대 사진을 들었다. 부검할 때의 사진이다. 얇은 볼록렌즈 형태로 벌어진 상처가 선명하다.
"상처 안에 상처가 있지."
"그, 그것은 '자절창(刺切創)'입니다. 자창과 절창(切)의 복합입니다. 찔린 직후에 반사적으로 우치다의 몸이 움직였기 때문에 절창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또 반사적으로인가? 아주 편리하군."
"사법 해부에서 그렇게 판정되었습니다."
"누가 부검했나?"
"이소베 교수입니다."
"시체를 다루면서, 시체를 무척 싫어하는 사람이지. 제대로 보지 않은 것 아닌가?"
"그럴 리가..."


"이것은 자절창이 아니야. 뺀 상처야."
뺀 상처...? 칼을 뺄 때 생기는 상처라는 말인가?
"정신 차려. 모르겠나?"
"모, 모르겠습니다. 왜 이것이 뺄 때의 상처입니까?"
"그렇다면 알려 주지. 복합 상처라면 두 개의 상처 폭이 왜 이렇게 다르지?"
다시 상처를 보았다. 주된 상처는 렌즈 형태. 안의 상처는 볼펜의 선. 생각이 맴돌고 있다. 이마에서 진땀이 배어 나온다.
"동시에 생긴 복합 상처라면, 안의 상처도 열려 있어야 하네. 생활반응으로..."
발밑이 꺼지는 느낌이다.
바깥의 자창에 비해 얕은 절창이기 때문에 단순하게 선 모양으로 상처가 생겼다고 이해했는데, 이것은 정말 단순한 선이다. 상처는 전혀 열려 있지 않았다. 

- "이해한 것 같군. 칼이 들어갈 때는 살아 있는 몸, 뺄 때는 죽어있는 몸이었어."
잠시 말을 할 수 없었다.
검시하는 교수가 자절창이라고 단정해서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기본 중의 기본이 머리에서 날아간 것이다. 아니, 부검 시에는 아사코의 용의가 확정적이었다. 자살의 가능성을 찾을 노력이나 상상력도 머리에 없었다. 

- "생활 반응에도 예외가 있습니까?"
이마무라가 물었다. 결론을 뒤집고 싶어서 물은 것은 아니다.
"배웠을 텐데. 심폐 정지 후, 잠시 동안 근조직이 죽지 않고 상처가 벌어지는 일이 있어. 하지만 반대는 없어. 죽은 몸을 찌르거나 베어도 상처는 벌어지지 않아." 

 

- 이마무라는 끄덕이면서 마지막 의문을 질문했다.
"왜 아사코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까요? 살인 용의가 걸려 있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요. 연극만 했다면 큰 죄는 되지 않잖아요."

"죽였다고 말하는 것보다 강하지 않은가?" 
구라이시는 창밖을 보았다.
"미워서 죽였거나 계획하고 죽였다면, 마음에 의지할 기둥이 생기지. 그래서 자백을 하거나 발뺌을 하려 할 때 그 기둥과 상담할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순식간에 마음을 잃은 이 부인에게는 기둥이 없었던 거야. 남편의 시체를 발견하기 바로 전까지 아들과 도라에몽 얘기를 했었어. 그리고 슈퍼마켓의 세일 상품을 찾았어. 그럭저럭 가계를 꾸려 나가려고 노력했지. 그런 자신이 남편의 시체를 돈으로 바꾸려 했던 거야. 악마에게 홀린 것이지. 한동안 울지도 못하고 말도 나오지 않을 거야." 

- 미래의 꽃.
이마무라는 천장을 보았다. 그렇군. 그 말의 의미를 알았다.

"하다못해... 개인 파산이라는 단어라도 생각했다면..."

"부인은 생활과 싸웠지. 진짜로 싸우는 인간의 머리에는 그런 것이 떠오르지 않아."

 

- "듣고 싶은 것은 그것뿐인가?"
이마무라는 숨을 들이켰다. 설마...
"없습니다. 감동했습니다. 오래 방해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빠른 쪽이 좋겠지."
등줄기에 차가운 것이 매달렸다.
"뭐가 말입니까?"
"늦지 않도록 윗사람에게 말해."
"무엇을 말입니까?"
목소리가 말려 들어갔다. 숨쉬기가 괴로웠다.
구라이시의 눈이 이쪽을 보고 있다. 드디어 알았다. 시체의 사진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직시'는 계속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이마무라에게 향해 있었다. 

- "신문 기자가 눈치챘겠지? 남편 살해라고 튀는 기사를 썼다면, 곤란하지 않겠나?"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가슴이 막혀 대답할 수 없었다. 규정보다 길게 경례를 하고, 이마무라는 커튼이 흔들리는 창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왔다.

- "이봐, 고쥬."
세 번째 부른다. 이제는 괜찮겠지. 구라이시 미키오(藏石幹夫)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서 흰머리가 섞인 머리를 들었다
"아, 아, 뭐야?"
구라이시(倉石)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조금은 시간을 죽였나?"
"글쎄, 자는 것도 확실히 시간을 죽이는 거지만..."
"시치미 떼지 마. 들으려고 귀를 기울였으면서..."
"아, 고쥬산에게는 이길 수 없어. 어떻게 알았지?"
"동물이나 인간이나 다 마찬가지야. 귀를 기울일 때에는 자신의 소리를 죽이기 마련이지. 잠자는 숨소리를 죽이면 탄로 나게 되어있다고."
"그런가, 그때였나? 정말, 사람이 나쁘군. 일부러 말소리를 죽였군."
"우연이지."
구라이시(藏石)는 놀라서 구라이시(石)의 얼굴을 보았다.

- (주 : 고쥬산. 원문은 五十さん이다. 고쥬산으로 읽는데, '53'이라는 뜻과 '고쥬 씨'라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새로운 50년을 향해서!"
"그게 뭔데요?"
"어느 출판사의 광고 문구야."
"헤에. 그림 51에 발을 내딛는 겁니까? 쉰 하나. 어감이 좋지 않군."
구라이시()의 몸이 굽실굽실 움직이더니 이쪽으로 등을 보였다. 많이 여위였다.

- "나도 팬지를 좋아해. 옛날에 집을 지을 때 마당에 심었지."

"..."
"또 심어 볼까? 여기를 나가면, 나갈 수 있다면..."

"..."
"뭔가 말해 주세요. 시간이 가지 않는군요."
구라이시(右)는 흰머리가 섞인 머리를 북북 긁었다. 밀리미터 단위의 머리칼이 진짜 깨소금처럼 시트에 떨어진다.
"오십에도 미래가 있을까요?"

"..."

"미래 정도는 있겠지요?"

"..."

"정말 잠들었습니까?"
숨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 사람은 방심할 수 없다. 구라이시(藏石)는 웃으면서 귀를 기울였다.

<미래의 꽃>, 요코야마 히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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