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박서련
출판 : 위즈덤하우스
출간 : 2024.11.13
기본값.
또는 기본 설정값.
최근 자주 생각하는 주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장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상태로 있을 때의 나는 무엇을 하거나 하고 싶어 할까.
그리고 어쩌면 그걸 느껴보기 위한 게 명상이 아닐까 생각하며,
아주 자연스럽게 더 자극적이고 도파민 중독적인 관심거리를 찾아 나선다. 몸은 가만히, 눈과 손가락은 바쁘게. 잠시동안은 잡생각 없이 즐겁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러고 있는 스스로가 지겹다. 그런데도 관성적으로 계속 그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된다.
문득 변화를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도,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
어쩐지 '이것' 하나만 바뀌면 모든 게 다 좋아질 것만 같아진다.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 '이것'에 자꾸만 매달리게 된다.
그런 막연한 답답함과 괴로움을, 박서련 작가는 '몸'이라는 주제로 가시화해 보여준다.
언제나 나와 함께하는, 누군가에게 설명하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하지만 그게 없는 사람은 동서고금 어디에도 없을, 몸에 대한 컴플렉스.
'낌지'와 '짱유'로 대비되는 듯한 다양한 형태의 '몸몸'들은 제각기 다르고, 모두가 닮아 있다.
그 미묘함들을 다루고 드러내는 방식이 너무나도 세련되어서,
아, 더 읽고 싶다, 라고 생각하게 된다.
즐거웠다.
- 이것도 다 거품이면 좋겠다. 물에 녹아버리게.
레버를 올리고 쏟아져 내릴 물을 기다리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 같다. 물은 조금 차가웠다. 나도 모르게 한 손으로 배꼽을 가리며 몸을 숙이고 냉온수 레버를 움직였다. 등을 두드리는 물줄기의 온도가 내 마음에 들 때까지. 몸을 곧게 펴고 배꼽을 가리고 있던 손을 뗐다.
- 아 맞다, 새로 산 바디 미스트,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우당탕 방으로 달려가 화장대에 놓인 바디 미스트를 허겁지겁 뜯었다. 용기 후면에 '샤워 후 30초, 수분을 피부에 가두는 골든 타임'이라고 적혀있었다. 그 문구 하나에 마음이 흔들려 산 제품이었기에 그대로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을 것만 같았다. 한쪽 어깨에서 팔로 칙, 허벅지에서 정강이로 칙 분사하고 다른 쪽도 똑같이 한 후, 조금 망설이다 가슴에서 배까지 또 한 번 뿌렸다. 혹시나 싶어서 한쪽 손으로는 배꼽을 가렸다. 피부에 앉아 있는 클린코튼향 액체를 양손으로 토독토독 두드리며 '리추얼'이라는 말을 떠올렸다.
요즘 많이 쓰던데, 리추얼이라는 말.
-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달라고, 차라리 나랑 모르는 사이인 네 대학 친구나 직장동료에게라면 몰라도 개년들한테는 절대 말하면 안 된다고 내가 몇 번이나 강조했는데. 메신저 하단에 실시간 메시지가 표시되었다. 개년들은 다시 'ㅋㅋㅋㅋㅋ'를 연타하고 있었다. 한참을 일제히 웃다가 겨우 한마디를 누가 했다.
[근데 낌지 뺄 데가 어딨냐?]
그제서야 개년들은 맞아 맞아 하고 거들었다.
-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신나게 때릴 거 다 때려놓고 이제 와서 미안하다면 다냐?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강도의 수치와 분노였지만 다행히 메신저 대화니까, 실제로 얼굴 보고 얘기하는 건 아니니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다. 얘들아 제발 소문내지만 말아주라. 장난스레 이모티콘까지 붙였지만 ...
- 인정할 건 인정하고 감사할 것은 감사해야 했다. 남들은 아무리 크고 싶어도 못 크는 키와 별 노력 없이도 매끈하게 잘 유지되는 팔뚝, 허벅지 라인을 물려받은 건 그럭저럭 자랑거리가 될 만했다. 전신 비만체질이 아니라, 적어도 옷 입으면 가려지는 부위에만 살이 찌는 체질을 물려받은 건행운이었다. 다들 고만고만한 어릴 때는 잘 티가 안 났지만 중학교, 고등학교 갈 때쯤엔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다. 옷발 하면 낌지, 낌지하면 옷발이라고들 했다. 옷 아래에서 심각한 고민거리가 잘 숙성되어 오븐에 넣은 빵 반죽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 그래도 배보다는 가슴이 더 나와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런 고민이 들기 시작한 것은 대학 ...
- 나올 것도 없을 때까지 변기를 끼고 있다가 침대로 돌아갔는데 기다리다 잠든 줄 알았던 남자친구가 문득 손을 잡았다. 나는 이렇게 엉망인데도 너는 나를 사랑하는구나, 그런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는데 남자친구가 내 손을 ...
- 정신이 번쩍 들어 목욕재계하고 돌아온 다음, 하기로 마음먹었던 일을 끝마쳤다. 긴장되고 아프고 생각보다 빨리 끝나는 일이었다.
- 잦은 다이어트 실패로 과체중에서 중도비만이 되어버린 글쓴이와 달리 나는 뱃살만 빼면 되니까. 앞으로 살면서 다이어트에 투자하게 될 자본이 수백만 원에 달한다면 차라리 그 돈을 한 방에 쓴다고 치고 표적 부위만 정확하게 조지는 게 효과적일 테니까.
- 살면서 이렇게까지 확신에 차 있던 적이 얼마나 되지? 신사역으로 가는 지하철에 몸을 실은 채 그런 생각을 했다. 친구들이 잘 가르친다고 해서 다닌 학원, 수능 점수에 맞춰 들어간 무난한 대학과 그럭저럭 전망이 괜찮은 전공, 대충 나더러 좋다고 하길래 따져보니 같이 다니기 쪽팔리진 않을 듯해서 만났던 남자들, 지원서 수백 장을 살포하고서야 겨우 얻어 최선도 차선도 아닌 직장. 지나온 선택들에 비하면 이건 혁명적이라는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거의 평생을 시달려온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사람이 되고 말 것 같았다.
- 어떻게 오셨냐고 하기에 우물쭈물 전화로 예약하고 온 사람이라고 하자 실장은 나를 탈의실로 데려가 가운으로 갈아입히고 체질량 지수를 재게 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달아날 수 있는 가능성을 재고 있었다. 일단 소지품을 압류당한 셈이어서 쉽지는 않겠지만, 다음에 하겠다고 해보자. 너무 성급하게 결정할 필요는 없잖아, 아무리 그래도 이것 역시 수술인데.
- 마른 비만에 복부비만은 다른 비만체형보다 성인병 위험이 더 높으세요. 미용적으로도 고객님은 거의 모델 체형이신데 복부만 이렇게 지방이 많아서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 그 순간 나는 거의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혹시 실장님도 그런 체질이신가요? 살이 찔 때는 배부터 찌고, 빠질 때는 끝까지 배만 안 빠지는 저주받은 체질 말이에요. 나는 그런 구구한 말들을 늘어놓기보다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말하고 싶은 심정은 굴뚝같았지만 내용이 워낙 주책스럽기도 하거니와 입을 떼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서였다.
- 나는 결심했다.
이제부터는 모든 게 달라질 거야.
- 몸 괜찮아? 죽 사다 줄까?
눈물이 핑 돌았다. 마취약 때문에 감정기복이 심해져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짱유가 너무 착해서 감동적이었다. 아냐 나 죽 안 먹어도 된대. 갈비탕이나 선짓국처럼 기름지고 바로 피 되고 살 되는 거 먹어야 된대, 지흡하면 피 많이 나서 같이 순댓국 먹으러 가자. 어때? 나는 손아귀에 힘이 없어 옆으로 돌아누운 채, 휴대전화도 모로 세워 손으로 받친 채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쳤다. 짱유의 답장은 또 한참 만에야 왔다.
그러자.
- 짱유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다른 애들 말대로, 우리가 부르는 노래 자체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괜히 선생님이 끼어들어서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 말하자면 짱유는 성격도 생김새와 똑같았다. 괜한 분란을 싫어했다. 놀림을 받는 것과 놀림에 맞서는 것, 어느 쪽이 나은가 하면 짱유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전자를 택하는 타입이었다. 짱유는 조용하고 참을성이 많고 화를 낼 줄 몰랐다. 친구들의 부탁을 거절하는 일도 거의 없어서, 반이 갈린 2학년 1학기 초에는 짱유네 반 담임이 나를 불러 면담을 하기도 했다. 유현이가 자꾸 다른 애들 대신 주번을 해주는데 혹시 작년에 따돌림 같은 게 있었니? 아니요, 짱유는 원래 성격이 좀 그래요. 해달라고 하면 그냥 해주는 게 편하대요. 저도 답답해서 그러지 말라고 여러 번 말했는데도 그래요.
- 그렇다고 짱유가 마냥 착하고 성실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짱유는 기본적으로 사랑받기를 좋아했고, 그래서 남의 심기를 거스르는 선택을 꺼리는 것뿐이었다. 그런 게 착해 보일 수도 있겠는데 나는 내가 생각해도 착한 편은 아니야, 짱유는 담담하게 말하곤 했다. 나도 보면 알지. 철저하게 나 이용만 하려는 사람하고 언젠가 내가 해준 만큼 갚을 사람 정도는 나도 구분할 줄 알아. 짱유가 그렇게 말하면 조금 소름이 돋기도 했다.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는 말이 짱유처럼 잘 어울리는 사람은 드물었다.
작가의 말
몸은 가장 오래된 마음의 병
전화를 걸면 모친은 마무리 인사로 늘 이 말을 한다. 요즘 운동 좀 하니? 오랜만에 만나면 모친은 이렇게 말한다. 너 또 살쪘니? 나도 안다, 모친이 염려하는 것은 내 건강이라는 사실. 그렇다고 모친이 나의 모양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건 또 아니다. 그래도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좀 더 예뻐봐야지... 이런 말도 모친은 한 적이 있다. 나는 이런 말에 큰 스트레스 없이 대꾸하는 요령을 터득했다. 그럼 좋지~
사랑할 때 몸은 관능의 전쟁터가 된다. 상대방에게 미의 화신처럼 보이고 싶은 욕망은 인지상정. 나는 내 몸이 이상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의식한다. 옷을 벗을 때, 씻을 때, 함께 누울 때, 내 몸이 더는 숨겨지지 않는 '결정적 순간'에 노출될 때, 위기감과 수치심은 사랑의 기쁨을 가볍게 짓누르며 쇄도한다. 그렇지만 가슴이 크니까... 괜찮지 않을까? 오랜 콤플렉스로 여겨온 육중한 유방을 별안간 무기 삼는 모순. 나는 상대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안다. 나도 그를 사랑하기에 그에게서 결점을 발견하려 애쓰지 않는다. 마치 나는 몸이고 상대방은 오직 눈인 것처럼. 나는 보이고, 보여줄 수만 있다. 이 구도를 벗어난 관계 맺음은 몹시 어렵다. 나는 나보다 더 자기 몸을 불안해하는 상대를 거의 만나본 적 없기 때문이다.
지금은 무슨 생각을 해? 이렇게 묻는 연인에게 그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나는 내 피부 바깥으로 0.1밀리미터도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
하여 몸은 내가 아니지만 나는 몸이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곤란은 여기에서 비롯되었으며, 모든 곤란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
2024년 가을
박서련
- A.
어느 쪽이냐 하면 저는 바디 포지티브도 네거티브도 아닌 '바디 그대로티브'(방금 만든 말)인 것 같아요. 이건 제가 제 몸을 오랫동안 미워한 후에 겨우 다다른 합의점인데, 제 몸과 저는 이제 마치 크게 싸운 적도 없고 싸움을 걸어볼 만큼 친해본 적도 없는 서먹한 친척 같아요. 그런데도 저는 늘 제 몸과 함께 있고요. 이 어색한 동거를 늘 기이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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