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지은
출판 : 상상출판
출간 : 24.09.12
지난 몇 해를 돌이켜 보건대, 나는 날씨가 따듯해진다 싶으면 일을 벌이는 경향이 있다. 새로운 걸 배워본다거나 취미와 관련된 수업을 수강한다거나 하는. 딱히 의식하고 행동한 건 아니었는데 스케줄러를 넘겨보니 항상 봄에서 초여름 사이에 뭔가를 시작하곤 하더라.
한편으론 조금 늦된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남들은 신년 목표, 새해 결심 등으로 1월에 시작했을 일을 미루고 미루다 그때쯤 미적미적 건드려보는 게 아닐까 싶어서.
그래도 한 해에 한 가지라도 도전해 보는 게 어디냐. 나는 내 편을 들어주기로 했다. 비록 한 해 이상 꾸준하게 공을 들인 적은 거의 없긴 했어도.
올해 나의 도전은 오일파스텔이다. 건식 재료 중 색연필과 연필, 콘테는 도전해 봤었는데 오일파스텔만은 건드려보지 못했다. 혼자서 시작하기엔 조금 주저되지만 오일파스텔을 배우려고 화실을 등록하는 건 내키지 않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화실 등록을 망설인 이유는 간단하다. 오일파스텔은 다양한 화풍, 다양한 터치를 보여줄 수 있는 재료이기 때문이다. 귀엽고 동글동글한 그림, 유화 느낌의 그림, 정밀하고 섬세한 극사실 화풍의 그림, 질감을 한껏 살린 현대 미술적인 그림. 모두가 가능한 것이 오일파스텔 화다. 그래서 수강 전 화실 소개에 그려진 예시 작품 만으로는 내가 배우고 싶은 터치를 즐겨 쓰시는 선생님이 계신지 확인하기가 어렵다. 기대하고 등록했는데 안타까운 상황이 생기면 서로 난감하지 않겠나.
물론 전공자이시니 기본적으로는 모든 재료, 모든 화풍을 기본 이상 -적어도 수강생보다는 훨씬- 잘 그리실 테지만. 선생님들께도 주전공과 개인의 취향이 있기 때문에, 내가 '기대하는' 그림을 그리는 법이나 재료에 항상 능통하신 건 아닐 수 있다. 게다가 수강생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인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하지 않은 채 수업을 진행하다 보면 더더욱 상호 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리는 방법'을 배우고 싶은지, '완성하고 싶은 그림'이 있는지 -선생님의 터치가 거의 80%가 되더라도-, '어떤 풍의 그림'을 그리고 싶은지 '어떤 주제'에 흥미가 있는지 등등.
개인적으로는, 상담 때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들을 준비해서 가는 것을 추천한다. 처음에는 다 예뻐 보이고, 막상 내가 그릴 수 있을까 싶겠지만 당장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그림이 아닌 '최종적으로 내가 그리고 싶은 풍'의 그림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그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준비 또는 배워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당장은 어렵더라도 어떤 그림들로 연습하면 좋을지를 들을 수 있다. 또 그 화실에 비슷한 느낌의 그림들이 있는지 없는지도 살펴볼 수 있다. 아무래도 비슷한 그림들이 많을수록 내가 원하는 것들을 배울 수 있을 확률이 높다. -유화 중심의 화실에서 컨투어링 드로잉을 수강하는 것은 다소 비효율적일 수 있다-
인터넷과 SNS의 순기능이 여기서 작동한다. 자신이 가장 따라 그려보고 싶은 그림을 그리는 선생님을 찾았다면, 그분의 화실에 등록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사설이 길었는데-
그래서 결론은 아직 여기다! 싶은 화실을 찾지 못해 미루기만 하고 있었는데 마침 눈에 띈 문화센터 강의가 있길래 냅다 신청했다는 것. 애초에 개인 수강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도 편하고, 재료도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되고, 기초를 배우기 좋을 것 같아서.
여기서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모순 같지만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과 '시작의 허들을 낮추는 것'은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선택해보지 않으면 어떤 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지를 알 수가 없다. 그러니 허들을 낮춰 일단 선택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보다 정확하게는 상황에 떠밀려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할 여지가 없도록 '의식적으로' 선택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아주 작고 가벼운, 일상 속의 무언가여도 좋다.
그런 연습들이 쌓여서, 내 주변을 내가 선택한 것들로 가득 채울 때.
그 삶은 아마도 훨씬 만족스럽고 나다운 어떤 것이 되어 있을 것이다.
지은 작가의 <취향껏 살고 있습니다>를 읽으면서 느꼈던 건 이런 것들이었다. 나를 위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 내 공간을 선택하고, 꾸미고, 책임지는 것. 그래서 내 곁에 있었으면 하는 것들로 내 주변을 가득 채우는 것. 거기서 오는 행복들.
어쩌면 때로는 타협이 필요한 순간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 역시 '내가 선택한 타협'이었으면 좋겠다.
'어쩔 수 없는' 것들에 짓눌리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들을 하는 요즘이다.
- 낯선 골목을 걷다가 우연히 작은 카페를 발견했다. '이런 곳에 카페가 있다니!'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애매한 위치에 있는 카페이다. 큰 간판은 없다. 문 옆에 자세히 보아야 보일 정도로 작은 나무 간판이 붙어 있다. 가게 앞에 놓인 투박한 화분에는 푸른색 수국이 피어 있다. 빈티지한 느낌의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잔잔한 음악이 들려온다. 파니욜로(Paniyolo)의 연주곡이다. 커피를 내리던 주인이 나를 보고 조용히 인사를 건넨다.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설레는 마음으로 내부를 둘러본다.
- 짙은 색감의 4인용 원목 테이블이 띄엄띄엄 놓여 있고 자리에 앉아 있는 손님들은 조용히 책을 읽고 있다. 수형이 예쁜 휘커스 움베르타, 황칠나무, 구아바나무, 나비란, 팔손이, 파키라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서 싱그러운 느낌을 더한다. 주방 가까이에 놓인 원목 수납장에는 CD와 책이 빼곡히 꽂혀 있다. 그 주변 벽에 주인의 취향이 묻어나는 크고 작은 엽서가 붙어 있다. 들어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노란 햇빛이 비스듬히 드는 창가에 자리를 잡는다.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유리화병에는 네잎클로버 하나가 무심히 꽂혀 있다. 시그니처 음료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읽을 책을 고르러 수납장 앞으로 간다. 얇은 시집과 고양이 사진이 가득 담긴 에세이를 골라 자리로 돌아온다. 책장을 넘기며 고요하고 편안한 시간을 보낸다.
- 이 카페는 내가 방금 만들어 낸 상상 속 카페이다. 지금껏 내가 경험한 카페를 모두 떠올려 보며 좋았던 부분만 쏙쏙 뽑아 짜깁기했다. 작은 간판, 잔잔한 음악, 초록 식물, 원목 테이블까지. 내 취향이 반영된 카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진다. 나는 내 취향을 알기에 사람들이 북적북적한 핫플레이스에 가지 않는다. 인더스트리얼 감성의 넓은 카페에도 가지 않는다.
- 취향을 갖는다는 기쁨은 여기에 있다. 갈림길에 섰을 때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 내가 상상 속에서 편안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건, 나에게 취향이라는 나침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 잠깐 과거로 돌아가 볼까. 나는 오랜 시간 스스로를 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무색무취의 사람이라고, 뚜렷한 모양이 없어서 어떤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모습이 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취향'이라는 단어 앞에만 서면 작아졌다. 나도 좋아하는 게 있었지만, 어쩐지 드러내기 부끄러웠다. 근사한 무언가를 가진 사람만 취향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이런 나에게도 나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미래에 살고 싶은 집의 모습을 상상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 시간이 흘러 전셋집을 얻었고,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공간을 꾸몄을 뿐인데, 공간을 완성했을 무렵에는 스스로의 취향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단순히 인테리어를 해봐서 알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유행을 좇아 집을 꾸몄다면 나 자신을 파악하기까지 더 긴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공간을 꾸리겠다는 마음으로, 나와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며, 다양한 선택을 해 본 덕분에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찾을 수 있게 되었다.
- 이제 나는 취향을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를 웃음 짓게 하는 모든 것이 나의 취향이다. 과거의 나처럼 취향을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에게도 이미 취향이 있다고 말해 주고 싶다. 오늘 맛있게 먹은 음식, 힘들 때마다 듣는 음악,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장소. 그 모든 게 취향이다.
- 배스킨라빈스에서 아르바이트할 때는 한 아이가 "'엄마는 외계인' 싱글 레귤러 컵에 주세요. 초코볼 많이요!"라고 말하는 것을 보며 기껏해야 초콜릿, 딸기, 바닐라맛 아이스크림밖에 몰랐던 내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나는 31가지의 선택지가 주어져도 무난한 딸기 맛 아이스크림을 고를 애였다. 그게 아니면 발음하기 쉬운 걸로 아무 아이스크림이나 골랐다가 맛없다고 생각하며 꾸역꾸역 먹었겠지. 맛이 보장된 딸기 맛 아이스크림이나 먹을 걸 후회하며.
- 이러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취향을 찾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겪었다. 유행을 따라 옷을 샀다가 몇 번 입지 못했고, 예뻐 보이는 물건을 샀다가 질려 버리는 일을 반복했다.취향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생길 리는 없으니 당연히 겪어야 하는 과정이었다.
- 내 취향이 확고해진 건 자취방을 가꿨던 경험 덕분이다. 내가 행복해질 수 있는 공간을 꾸리기 위해서는 어떤 색깔을 좋아하는지, 어떤 질감을 선호하는지, 어떤 공간에서 살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했다. 그건 곧 내가 누구인지 묻는 것과 같았다. 나와 대화하는 시간을 갖다 보니 잘 몰랐던, 혹은 언어로 표현하지 못했던 취향들을 하나씩 발견하게 되었다.

- 며칠 전에는 편의점에 소주를 사러 갔던 수가 어묵탕을 들고 돌아왔다. 편의점 사장님이 단골이라며 쥐여 주셨단다. 부동산 사장님은 괜찮은 구옥이 나왔다며 전화를 주시기도 하고, 귤 따기 아르바이트를 제안해 주시기도 한다. 내 성정상 동네 사람들과 너무 친밀하지 않은 지금의 거리가 편안하다. 여기가 정말 내 고향이었다면, 우리 집 수저 개수까지 아는 이웃들 때문에 부자유스럽게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이곳이, 나 혼자 사랑하게 된 이곳이 더 좋은가 보다.
- 누군가 나에게 좋아하는 곳에 사는 기분이 어떻냐고 묻는다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부유하던 내가 드디어 뿌리를 내리고 싶어졌노라 말하겠다. 스스로 선택한 곳에서 살고 있다는 자부심, 마음 편히 머무를 곳이 있다는 안도감, 동네를 떠올리기만 해도 느껴지는 편안함은 덤이다.
- 아마 내가 이곳에 살며 가장 많이 한 말은 '감사하다'일 것이다. 동네를 걷기만 해도 감사한 마음이 솟는다. 누구에게 감사한 건지도 모르면서 입버릇처럼 감사하다는 말을 많이 써왔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마 나를 여기에 데려다준 나 자신에게, 아름다운 자연에게, 옆에서 같이 걸어 주는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었던 것 같다.
-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때였다. 사소한 일로 가족과 다툰 뒤 그때까지 억눌러 온 감정들이 폭발했다. 더 이상 이대로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가진 가장 큰 가방을 꺼내 중요한 물건만 챙겨 집을 나섰다. 그날 나는 먼 길을 떠날 때 곰인형까지 챙겨갈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양손으로 들 수 있을 정도의 무게만, 꼭 필요한 것들만 챙기는 경험을 하며 단출하게 살고 싶어졌는지도 모른다.
- 그날부터 친구 집에서 신세를 지며 고시텔을 알아보았다. 고시텔은 방 안에 화장실이 딸려 있는 숙박 시설로 공용 화장실만은 피하고 싶던 나에게 한 줄기 빛 같은 공간이었다. 친구 집과 가깝다는 이유 하나로 한 곳을 선택해 계약했다. 입주하던 날, 입구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본 건 내 방문 앞에서 있는 경찰들이었다. 내 옆 방을 쓰는 아저씨가 소란을 피워서 출동했다고 했다. 들어가기도 전에 겁이 났지만, 나에게 주어진 작은 방에 들어가 문을 닫는 순간 무서움이 싹 사라졌다. 1.5평은 될까 싶은 그 작은 세계가 내겐 완벽했던 것이다. 가장 먼저 방 왼쪽에 푸른빛이 나는 유리 벽으로 구분된 화장실이 보였다. 화장실 오른쪽으로는 세미 싱글 사이즈 침대가 딱 붙어 있고 발치의 벽에 옷을 걸 수 있었다. 문과 화장실 사이에 책상이 있었다. 책상 아래에는 작은 냉장고가, 위에는 TV가 올려져 있었다. 책상 위 벽에 수납장도 달려 있었다. 좁은 공간에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테트리스 하듯 껴 맞춰져 있는 작은 방. 그리 멋진 곳은 아니어도 나에겐 완벽했다.
- 완벽한 방이었지만 바깥으로 난 창문이 없었다. 창이 있는 방은 5만 원이 더 비쌌기 때문에 고민 없이 창을 포기했다. 고시텔에 사는 동안 이 선택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방에 햇빛이 들지 않으니 자다 일어났을 때 몇 시쯤인지 감도 오지 않았고, 좁은 방에 온종일 머물러야 하는 주말에는 방이 나를 옥죄는 것 같았다.
- 여러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행복했다. 힘든 일들도 다 재미있는 에피소드처럼 느껴졌다.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이불이나 화장지를 사던 날도, 친구들이 먹을 걸 잔뜩 사서 냉장고와 선반을 채워 주었을 때도, 혼자 TV를 보며 라면을 먹던 것도 다 재미있었다. 내 TV, 내 화장실, 내 침대, 나만 있는 공간이라니. 혼자라는 게 정말 좋았다.
- 처음 혼자 살아 보았던 창문 없는 고시텔과 처음으로 보증금을 마련해 구한 원룸 중 어느 곳을 나의 첫 자취방이라 불러야 할지 가끔 헷갈린다. 그래도 첫 자취방 하면 은행나무집이 떠오른다. 언제든 친구들을 초대해서 편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었던 곳, 아무 때나 주방에서 요리해도 다른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던 곳, 창문 밖 은행나무가 봄엔 연두로 여름엔 초록으로 가을엔 노랑으로 겨울엔 하얗게 옷을 갈아입던 곳. 일 년 살았을 뿐이지만 추억이 깃든 곳이다.
- 은행나무가 보이는 창가를 가운데 두고 오른쪽에 침대를 왼쪽에 책상을 배치했다. 책상 앞 벽에는 좋아하는 사진을 붙이고 아이보리색 방수 천을 사다가 책상 위를 덮었다. 갈색 호피무늬가 그려진 분홍색 침구와 분홍색 의자도 샀다. 중고 가전을 판매하는 곳에 방문해 작은 냉장고도 마련했다. 기본적인 것들이 갖추어지니 이제야 조금 집 같았다.
- 첫 자취라서 서툰 점이 많았다. 회사에 있는 시간이 길다 보니 주말에 요리하려고 사다 둔 식재료들이 썩어 나갔다. 빨래 건조대가 옷장을 대신했고, 꽃 시장에서 사 온 식물들은 제대로 키우지 못해 금방 죽었다. 나를 먹이고 입히고 챙기고 공간까지 관리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이구나. 음식물 쓰레기가 되어 버린 대파와 양파 따위를 버리며 그런 생각을 했다.
- 리리와 함께 살 집을 구하기 전, 마음에 드는 동네부터 정해야 했다. 가장 중요한 조건은 산책로였다. 양재천을 걸으며 위로받던 밤들을 떠올리며 하천 양옆으로 산책로가 길게 뻗어 있는 동네를 골라 집을 알아보았다. 첫 자취방을 알아볼 때는 예산만 정해 두었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원하는 조건을 생각해 보았다.
1. 빛이 잘 드는 남향집일 것 2. 리리가 놀기 좋은 환경일 것 3. 원룸이라도 분리형 구조일 것
- 집을 구한다는 건 여전히 쉽지 않았다. 세입자의 직업도 중요해진 시대인지 어떤 부동산에서는 직업이나 직장 위치를 물어 왔다. 은근히 공무원이 들어오길 바라는 집주인도 있었다. 집도 면접 보듯 구해야 하다니. 어쩌다 마음에 드는 집을 만나도 고양이가 있다고 하면 계약할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집을 스무 채 이상 보고 실망하길 반복하던 어느 날, 1층에 식당이 있는 빌라 2층 매물을 발견했다. 남향이었고, 방 2개에 거실까지 있는 집이었다. 새벽에는 아래층에 사람이 없으니 리리가 뛰어다녀도 괜찮았다. 내가 생각한 조건에 딱 맞는 데다 집주인이 집을 꾸미는 것도 상관없다고 해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 그 집을 보러 간 날, 꽤 밝은 낮이었는데도 집 안이 우중충하게 느껴졌다. 사랑받지 못한 집이라는 건 조금만 둘러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집의 구조가 아기자기해서 마음이 갔다. 거실은 아늑한 휴식 공간으로 꾸미고, 거실에 딸린 베란다는 세탁실로 만들면 될 것 같았다. 빛이 잘 드는 큰 방에 침실을 꾸리고 작은 방은 옷방이나 창고로 쓰면 딱 좋을 듯했다. 은행나무집에서 그랬듯 그곳에서 생활할 내 모습이 바로 그려졌다. 미리 생각한 조건에도 부합하고, 세도 저렴하고, 그곳에서 웃는 내 모습도 그려지는 집. 이번에도 나의 직감을 믿고 계약했다.
- 전 세입자가 빠져나간 집을 둘러보니 방 2개 모두 한쪽 벽에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오래되어 누렇게 뜬 벽지도, 거실의 꽃무늬 벽지도 거슬렸다. 내 마음에 드는 집을 만들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이 되는 벽지부터 바꿔야 했다. 곰팡이를 처리하기 위해 벽지를 뜯어내고 곰팡이 제거제와 방지제를 발랐다. 도배는 전문 업체에 맡겼다. 꽃무늬 벽지를 찝찝해하고 누런 얼룩을 볼 때마다 한숨을 쉬느니, 마음에 드는 공간에서 웃으며 사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내가 집을 예뻐해 주면 집은 나에게 더 큰 힘을 줄 거라고 믿었다.
- 자우림의 곡 <샤이닝> 가사 속으로 숨는 날들이 있었다. 시작과 끝이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 나를 받아줄 그곳이 있을까'로 같은 노래.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꿈꾸며 둥둥 떠다녔다.
- 마음의 심연을 들여다보면 집에서 온전히 쉬지 못했던 어린 내가 떠오른다. 우리 집은 일 년에 며칠 정도 화목했지만 나머지 날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를 원망했다. 나는 가족들과 마주치기 싫어서 자주 밖으로 나돌았다. 집에 있을 때면 방에 처박혀 있다가 참을 수 없이 배가 고파졌을 때만 주방으로 나갔다. 밥을 마시듯 빨리 먹고 다시 방에 들어올 때마다 내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라 저 멀리 다른 곳이라고 생각했다. 매일 꺼림텁텁한 기분으로 살았다. 가끔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내가 너무 아까웠다. 지금 힘들 뿐이지 나는 더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막연히 먼 곳에 가고 싶었다. 여기가 아닌 어딘가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이라면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나를 받아줄 그곳이 어딘지는 몰라도 저 멀리의 섬 같은 공간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내 맨몸으로 그곳에 닿는 건 무리였다.
- 먼 곳에 가고 싶다는 꿈은 나이가 들수록 흐려져 갔다. 좋든 싫든 나를 지키려면 현실에 발붙이는 방법을 배워야만 했으니까.
- 무기력이 몰려왔다. 나는 여전히 내가 아까웠다.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 환경을 바꿀 수 없을 때는 환경보다 중요한 게 내 마음가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행복하지 못하면 어디에서도 행복할 수 없다는 흔한 말을 스스로에게 건네며, 사는 곳에서 행복해지려고 노력했다.
- 그러나 '이 정도면 괜찮다'와 '여기라서 행복하다' 사이에는 큰 간극이 존재한다. 나의 돌파구가 이 지점에 있는 것은 아닐까. 집을 통해 자라난 공간에 대한 관심이 어느새 동네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되었다. 나를 둘러싼 환경을 바꾸어보고 싶었다. 생각해 보면 서른이 넘도록 한 번도 좋아하는 곳에서 살아보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살아서 익숙하다는 이유로 비슷한 지역에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별생각 없이 살아갈 게 뻔했다.
- 왜 그런 삶에 한 번도 의문을 가져 보지 않았을까?
의문이 생겼을 때 나를 돌아보니 더 이상 맨몸이 아니었다. 금전적인 여유가 있었고, 나를 믿어 주는 수와 사랑스러운 리리가 곁에 있었다. 자립한 스스로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이 모두가 나의 배가 되어 주었는지도 모른다. 그 배를 타고 더 멀리까지 나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느새 좋아하는 동네에서 사는 꿈을 꾸게 되었다.
- 이 중 한 가지 특징만 있어도 좋아하지만, 모든 특징을 다 가진 노래도 있다. 그중 하나가 이상은의 <비밀의 화원>이다. 이 곡을 듣고 있으면 몽글몽글한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 든다. 김연우의 <우리 처음 만난 날>도 좋아한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만큼은 내가 있는 장소와 계절을 잠시 벗어나, 겨울밤 설레는 마음으로 삼청동에서 있게 된다. 루시드폴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 유재하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빛과 소금 <그대에게 띄우는 편지>도 오랜 시간 좋아해 온 곡이다.
- 아래쪽 칸은 특별한 목적 없이 좋아하는 물건들을 진열해 둘 용도로 만들었다. 현재는 가지고 있는 책들과 달력, 조명을 올려 두었다. 오른쪽에는 서랍이 있다. 이 서랍은 선반장의 귀여운 포인트가 되어 준다. 꽤 깊고 넓게 만들어져서 크기가 큰 음반들을 보관해 두었다. 한 칸 아래로 내려가면 턴테이블이 있다. 오래전부터 턴테이블에 관심이 있었지만 선뜻 구매할 수는 없었다. CD까지는 내가 직접 경험한 문화이지만, 바이닐은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색하고 허세 같기도 했다. 그러다 보사노바 음악을 좋아하게 되면서 <Getz/Gilberto> 앨범에 수록된 <The girl from Ipanema>를 바이닐로 들으면 어떤 느낌일까 ...

- 나만의 리틀 포레스트를 찾다
- 이층집에서 일 년을 살고 이사를 해야 할 시점이 왔다. 동네에 매물이 없어서 반경을 꽤 넓혀 보았지만 어딜 가도 빈집이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 포기하는 심정으로 들어간 마지막 부동산에서 지금의 집을 만났다.
- 이 집의 첫인상은 평범했다. 평소 내가 선호하던 남향집도 아니었고 내부도 좁아서 가지고 있던 짐을 대거 버려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단 하나, 서쪽으로 난 창문 밖으로 길게 늘어선 나무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나무가 보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집을 선택했다. 나에게는 창밖으로 보이는 몇 그루의 나무가 다른 단점을 모두 커버할 정도의 가치가 있었다. 지금껏 방을 구하러 다닐 때마다 부동산에서 "다른 조건은 없고요?" 하고 물으면 "나무가 보이는 집이면 정말 좋겠어요."라고 말하곤 했지만, 이렇게 나무에 둘러싸인 집을 만난 건 처음이다.
- 이사 후 매일 아침 행복한 마음으로 창을 열었다. 봄이 되자 창밖 멀구슬나무에 보랏빛 꽃이 피었고, 종일 은은한 향기가 감돌아서 창문 여는 일이 더욱 즐거웠다. 일 년 뒤쯤이었나, 제주 곳곳에서 귤밭 방풍수로 조성했던 삼나무를 잘라내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크게 자란 삼나무가 햇빛을 가려서 감귤의 당도가 떨어진다고 했다. 설마 했는데 우리 집 앞 귤밭에 있던 방풍수도 곧 사라졌다.
- 비가 온 다음 날이면 파인 부분에 물이 샘처럼 고여서 새들이 샤워를 하거나 목을 축이는 모습도 지켜볼 수 있다. 돌담 위를 느긋하게 걸어가는 까투리와 그 뒤를 몰래 쫓아가는 고양이를 본 날에는 꼭 만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고, 봄에 붉은 잎을 보여 주다가 여름이 오면 초록빛으로 물드는 저 나무의 이름이 홍가시나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 북쪽으로 난 창으로 바깥의 소소한 풍경들을 볼 수 있다면, 서쪽으로 난 창으로는 너른 귤밭을 지켜볼 수 있다. 창문 크기만큼 하늘이 꽉 차 있어서 맑은 날이면 창을 활짝 열어두고 멍하니 구름을 보며 걱정을 잊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창으로 들어오는 노을빛을 좋아한다. 막힌 것 없이 펼쳐진 초록 숲과 그 뒤로 지는 노을을 함께 볼 수 있다는 건 무엇보다 큰 기쁨이다. 우연히 서향집을 경험하게 되었지만, 앞으로도 서쪽 창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노을을 보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삶에 만족한다.
- 이전에 살았던 집들로부터 집에 애정을 가지면 집도 나에게 힘을 준다는 것을 배웠다면, 이 집을 통해서는 자연 가까이에 사는 기쁨을 배워간다.
- 태양이 크다고, 하늘이 분홍빛으로 꽉 찼다고 입을 벌려 감탄하던 날도 있었다.
붉게 타오르던 해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면 노을을 보던 사람들은 모두 자리를 뜨지만 나는 매직 아워를 기다린다. 해가 지고 30분 동안 더 짙게 물드는 하늘을 볼 수 있는 시간이다. 가로등이 켜지고 고깃배에 등이 켜지는 낮과 밤의 경계, 마법 같은 순간 속에 있으면 특별한 일을 하지 않았더라도 그날 하루를 잘 살아 낸 것만 같다. 노을에는 그런 위로의 힘이 있다. 내 마음속 슬픔에도 색이 있다면 붉은색이 아닐까. 마음속 붉은 슬픔이 붉은 노을을 만나 잠시나마 안도한 것만 같다. 우리는 보통 자신과 닮은 것에서 위로받곤 하니까.
- 서귀포 치유의 숲을 걷다 보면 휴식 공간인 쉼팡에 닿는다. 이 공간에는 앉을 수 있는 벤치와 누울 수 있는 편백나무 침대가 여러 개 있다. 같은 숲이지만 걸으면서 보는 숲, 앉아서 보는 숲, 누워서 보는 숲이 조금씩 다르다. 편백나무침대에 누우면 마음이 고요해져서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배 위에 가지런히 모으고 눈을 감게 된다. 눈을 감으면 바로 청각이 곤두선다. 귀를 쫑긋 세우고 숲 속 소리를 흡수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파도 소리가 들린다. 바람이 불 때마다 높게 솟은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 나는 그 소리를 '숲 파도 소리'라 부른다.
- 내 안에는 영화를 두 배속으로 보면서도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는 나와, 수평선 너머 사라지는 해를 유심히 바라보는 내가 존재한다. 이왕이면 한 장면을 오래 바라볼 줄 아는 내 모습을 자주 만나고 싶다. 세상을 훑어보기보다 자세히 바라보는 사람이고 싶다. 그러니까 나는 앞으로도 아름다운 풍경 앞에 자주 멈춰 서서 멍해질 작정이다.
- 아쉬움이 몰려왔다. 그날 스쳐간 건 그냥 노을이 아니라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노을이었다. 아직도 그날만큼 아름다운 노을은 만나지 못했지만, 언젠가 더 아름다운 노을을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며 해 질 녘마다 하늘을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 두근대는 마음으로 노을을 쫓던 그날의 강렬한 느낌은 분명 행복감이었다. 노을을 보는 게 무슨 행복이냐 묻는 이들도 있겠지만, 내 행복은 그런 사소함 속에 있다. 나는 계절감을 느끼고 오늘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누릴 때 생생히 살아 있다고 느낀다. 살아 있다는 감각은 행복하다는 증거였고, 지금 잘 살고 있는가를 판단할 때 중요한 기준이 되어 주었다.
- 어느 봄날에는 내 삶의 목적이 예술을 향유하는 데 있다는 걸 깨닫기도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이 찾아와 마음속에 꽉 차올랐다. 그날의 분위기와 맞아떨어지는 음악에 취하고, 마음을 어루만지는 문장을 만나고, 꿈같은 영화 속 세상에 몰입하며 살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깨닫고부터 한정된 시간을 함부로 쓰고 싶지 않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하나라도 더 찾고 음미하는 데 시간을 쏟고 싶다.
- 언젠가 일기장에 '산다는 걸 느끼면서 춤추듯이 살고 싶다'라고 썼다. 움츠리지 말고 춤추듯이 살며 나와 세상을 ...
- 아침부터 부슬비가 온다. 가라앉은 공기만큼 차분해진 마음으로 침구를 정리하고 청소기로 바닥을 민다. 다른 일들을 하느라 소진된 상태로 책상 앞에 앉고 싶진 않다. 눈에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만 정리한 뒤 의자를 빼서 책상 앞에 앉는다. 책상 앞 창문을 통해 흙냄새와 나무 향이 동시에 들어와 나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살짝 서늘해도 상쾌한 날이라 창을 닫는 대신 카디건을 걸쳤다. 갑갑한 건 질색이라 눈이 오는 추운 날에도 두툼한 옷을 챙겨 입고서 창을 열어두는 편이다.
- 날이 흐려서 방이 어둡지만 그렇다고 너무 밝은 건 싫어서 책상 위 스탠드만 하나 켜 두었다. 노란색 불빛이 이 자리를 포근하게 밝혀 준다. 지금 내 책상 위에는 사놓고 몇 달째 읽지 않은 책들, 흰색 갓을 쓴 단 스탠드, 오트 콜드 브루가 담긴 민트색 텀블러, 안경과 핸드크림, 블루투스 스피커, 이 글을 쓰고 있는 10년 된 맥북이 놓여 있다.
- 스피커에서는 다이지로 나카가와(Daijiro Nakagawa)의 <Voyager>가 흘러나온다. 부드러운 기타 연주가 오늘 날씨와도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기분 좋은 달달함이 퍼진다. 이제 나만의 세계로 한 발짝 디딜 준비가 끝났다. 책상과 컴퓨터가 있으니 나는 어디로든 갈 수 있다.
- 분위기에 취하자 왠지 여행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고, 마음이 들떠 더 다정한 대화가 오고 갔다.
"내년 여름에도 여기서 준치 먹자!"
우리는 추억을 하나 더 공유했다. 같은 안주라도 배달시켜 먹는 게 더 저렴하지만 이런 낭만을 느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평범했던 하루에 재미난 이야기를 하나 더한 날은 왠지 기분이 좋다.
- 매일 똑같은 해가 떠오르는데 1월 1일의 일출을 보러 먼 길을 가는 사람들도 같은 마음 아닐까. 그들은 다른 사람들 틈에 껴서 새해 분위기도 느끼고, 떠오르는 해를 보며 새로운 한 해에 대한 희망도 가져 볼 것이다. 새해 첫날부터 자기만의 이야기를 써내려 가는 것이다. 일찍 일어나야 하고, 일출이 잘 보이는 곳까지 이동해야 하고, 사람들이 북적북적해서 불편했을 수도 있다. 그런 것들을 다 감수하고 추억을 쌓는 일. 그런 게 낭만이고 세상 사는 맛인 것 같다.
- 나이가 든다는 건, 누가 마법처럼 내 하루를 바꿔 주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가끔 우연히 마법 같은 일이 생기기도 하지만 나의 소중한 추억 대부분은 스스로 몸을 움직여 얻은 결과였다. 나의 하루가 특별해지길 바란다면, 특별한 일을 계획해 보자. 내가 만든 분위기 있는 순간이 모여 낭만적인 삶이 된다고 믿는다.
-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로망을 실현하기 위해 구매한 흰색 침구였다. 시원해지는 흰 색감과 덮었을 때 느껴지던 바스락거리는 촉감이 참 좋았다. 무늬가 화려한 차렵이불만 써오다가 호텔에서 쓸 법한 침구를 갖게 되니 나를 대접하는 기분까지 들었다. 침구처럼 자주 쓰는 물건의 질은 생활 만족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침구 하나 바꿨을 뿐인데 내 삶이 더 나아진 것만 같았다.
- 반면 한 철 잘 썼지만 지금은 쓰지 않는 레이스 커튼, 인테리어 콘셉트였던 사랑스러움과는 거리가 있던 검은색 선반, 취향이 변하면서 애물단지가 된 라탄 소재 소품들, 사고 보니 타 브랜드 모조품이었던 조명은 실패한 소비였다. 자취를 시작할 무렵에는 쇼핑에 성공하기보다 실패할 때가 많았는데, 이제는 취향의 데이터가 어느 정도 쌓였는지 거의 성공적이다. 어쩌면 예전보다 고심하면서 물건을 들이기 때문에 실패가 줄었는지도 모르겠다. 물건을 집에 들이면 관리하고 관심을 가져야 하기에 걱정도 함께 들어온다. 이제는 긴 시간 고민해 보고 오래 함께하고 싶은 것들만 집에 들이고 있다.
- 집에 관심을 가질수록 유행에서 멀어지고 싶다는 생각도 확고해진다. 지금은 가구나 소품을 제작해서 사용하고 있다. 보통 내가 디자인하고 수가 제작한다. 제품에서 우리의 취향과 고민이 묻어나니 더 애정이 갈 수밖에 없다. 세상에 하나 뿐 ...
- 내가 머무는 공간이 아름답길 바라지만, 아름다운 집에 산다는 건 내가 생각하는 멋진 삶의 모습 중 하나일 뿐이다. 집을 예쁘게 꾸미는 것보다 생활을 다듬는 데 더 관심이 많다. 그러니까 나는 생활을 다듬는 데 관심이 많기 때문에 집을 예쁘게 꾸미고 싶은 것이다. 생활을 다듬는다는 건 나의 일상을 조금 더 정성 들여 매만진다는 의미다. 단정한 잠옷을 입고, 반찬을 그릇에 덜어 먹고, 5분이라도 창을 열어 집 안을 환기하고, 나를 닮은 집에서 활기차게 생활하고 싶다.
- 생활을 다듬고 싶다는 생각은 다이어트를 하며 생겨났다. 나의 첫 다이어트는 마른 체구의 연예인 사진을 벽에 붙여놓고 결의를 다지는 것으로 시작했다. 적게 먹어야 살이 빠지는 줄로만 알고 굶듯이 살며 매일 줄넘기를 했다. 한 달간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겨우 2kg 정도 빠졌다. 목표했던 몸무게에 도달하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예상에 없던 수확이 있었다. 스스로를 돌보는 데서 오는 행복을 느낀 것이다. 소식을 하니 몸이 가벼웠고 운동을 하니 상쾌했다. 아침에 일어날 때 피로감 없이 개운한 기분도 좋았다. 무엇보다 스스로를 관리하는 사람이라고 여기게 된 점이 고무적이었다.
- 그때부터 다이어트라는 단어를 지웠다. 그저 내 생활을 다듬으며 살자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 행복해지기 위한 노력이자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그걸 깨달은 지금의 나는 나와 내 일상을 뒷전에 두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급한 일을 처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잠깐 기지개를 켜고 어깨가 굽지 않도록 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스스로에게 말해 준다. 충분한 시간 동안 질 좋은 수면을 취하는 일은 더 중요하다고, 무리하지 말라고 스스로에게 말해 준다. 가족인 리아의 건강을 위해 장난감을 흔들어 주는 일은 더 중요하다고 스스로에게 말해 준다.
- 급한 일과 중요한 일을 혼동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중요한 건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걸, 우리가 행복하려면 소중한 일상을 윤이 나게 관리해야 한다는 점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 생활을 정갈하게 다듬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부단한 노력이 없다면 금방 무너지고 마니까. 나는 매번 정갈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지만, 쉽게 약해지기도 하는 사람이다. 야식 앞에 무너지고 바쁘다는 핑계로 집에 먼지가 쌓여 갈 때도 있다. 그래서 생활을 다듬는 데 더 관심이 많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 흐르듯 정갈하게 생활하는 날이 올 때까지 노력해야지. 내 행복은 내가 만든다는 마음으로
- 간단한 집 정리가 끝나면 점심을 준비한다. 메뉴는 매번 달라지지만 오늘은 삶은 달걀, 체리, 살구를 준비했다. 얼마 전까지는 사과에 땅콩버터를 곁들여 먹었고, 지중해식 샐러드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전기 포트에 물을 끓이면 침대에 누워 있던 리아가 주방으로 달려와 대차게 울어댄다. 리아는 물 끓는 소리가 나면 내가 밥을 먹는다는 걸 정확히 알고 있다. 그 소리가 꼭 "내 밥 먼저 딜라냥!" 하는 것 같아 귀엽다. 물이 끓는 동안 리아가 먹을 밥을 챙기고 물그릇의 물을 갈아 준다. 밥을 기다리는 리아의 얼굴이 예뻐서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 엉덩이를 세 번 톡톡톡 두드려 준다. 리아가 사료를 오독오독 씹는 소리를 들으며 준비한 메뉴와 커피를 가지고 책상으로 간다.
- 나의 하루는 주로 책상 앞에서 흘러간다. 자리에 앉아서 커피가 적당히 식을 동안 창밖을 멍하니 바라본다. 장마철이라 매일 습하고 꿉꿉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오늘도 아침부터 비가 내려 마을에 안개가 자욱하다. 빗방울이 나무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고요한 시간을 갖다 보니 듣고 싶은 노래가 불현듯 떠올랐다. 빗소리와 잘 어우러질 것 같은 류이치 사카모토(Ryuichi Sakamoto)의 피아노 연주곡 <Merry Christmas mr. Lawrence>를 골라 듣는다.
- 정말 공유하고 싶은 건 방에서 느낀 감정이나 그날의 분위기이다. 보는 사람들도 내가 느낀 평화를 느끼길 바라는 마음으로 공유 버튼을 누른다.
- 이제 여름밤의 소소한 행복을 누릴 시간이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와 시원한 선풍기 바람에 머리를 말리고, 작게 썰어 냉장고 안쪽에 넣어 둔 수박을 꺼내 먹으면서 일기 쓰는 행복을 촘촘히 누린다. 오늘은 일기를 쓰며 들을 노래로 여행스케치의 <별이 진다네>를 선곡했다. 이 노래가 흘러나오면 나의 여름밤이 낭만으로 가득 찬다. 일기장에 글을 적어 내려가다 보면 나의 하루가 많은 사람이 추구하는 '갓생'과는 거리가 멀다는 걸 알게 되지만, 부끄럽지 않다. 내가 이렇게 평범하고 무탈한 하루를 얼마나 꿈꿔 왔던가. 마음속에 감사를 품고 있기에, 잔물결 같은 행복이 은은히 스며든다. 내일은 잊지 말고 분리배출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일기장을 덮고 별걱정 없이 이불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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