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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로] 외눈고개 비화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by 일루젼 2026. 3. 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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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박해로
출판 : 북오션
출간 : 22.06.03


     

 

이렇게 보면 '아직 3월'이고, 저렇게 보면 '벌써 1분기'다.

3개월은 짧다면 짧은 기간이지만, 쑥과 마늘만 먹을 수 있다면 곰도 사람이 되는 100일이기도 하다.

'올해는 꼭'- 리스트를 적어보며 봄꽃을 기다린다.

 

<외눈고개 비화>는 그간 박해로 월드에 등장해 온 '이계의 신명' 및 그와 관련된 설화들의 뿌리와 닿아있는 이야기다. 

그 자체로도 흥미롭고 재미있지만- 다른 작품들과의 연결성을 살펴볼 때 더더욱 빛나는 작품.

 

<살: 피할 수 없는 상갓집의 저주>의 원대신왕과 검은 개. 

<올빼미 눈의 여자>의 치효성모.

<신을 받으라>의 장일손과 구원일인.

그리고 이 모두를 아우르는 '섭주'와 박해로식 크툴루.

 

'살아있는 가면'은 여러 작품에서 등장하는 모티브지만-

어쩐지 <죠죠의 기묘한 모험> 속 돌가면이 떠오른다.

 

현대물과 역사물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는 건 작가로서 큰 재능이다.

어느 쪽이건 뜻한 바를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문체를 구사한다는 점도.

 

잠시 다른 일들 때문에 밀린 <섭주>와 <사악한 무녀>가 기대된다.

즐거웠다.  

 

 


    

 

- [귀경잡록(鬼境雜錄) 그리고 원린자(遠麟者)]

세종 20년(1438년), 건국신화를 부정하고 백성들을 미혹시킨다 하여 금서 처분을 받게 된 <귀경잡록>은 당대의 악명 높은 도참비서(圖讖秘書, 미래의 모습을 예언과 그림으로 담은 비밀스러운 책) 가운데 하나였다. 시간을 초월하고 공간을 오로지하는 무변유일극존신(無變唯一極尊神) 육십오능음양군자(六十五能陰陽君子)가 우주 삼라만상의 진정한 창업자이며, 그가 부리는 이계별천지의 원린자(遠麟者)들이 호시탐탐 인간 세상을 노린다는 해괴한 예언서는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전대미문의 공포를 전염시켰다.

- '뱀 껍질의 선비'로 알려진 저자 탁정암은 <귀경잡록>에서 조선이 가장 경계해야 할 적을 '원린자'라고 예언하고 있는데, 후대의 사학자와 과학자들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이 원린자는 오늘날의 외계인과 같은 존재라고 한다. 이들이야말로 밤하늘을 이부자리 삼아 3천 년을 잠들어 있는 육십오능음양군자의 근왕병(勤王兵)이며, 하늘 바깥에서 천하 대지로 끊임없이 침략을 꾀하는 이계 오랑캐들이다. 

- 탁정암의 의도는 궁극적인 인류의 위기에 눈을 뜨게 하려는 우국의 발로였지만, 그의 진심과 상관없이 영악한 인간들은 이 책을 악용했다. 육십오능음양군자라는 지존 앞에서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음을 깨우친 반항적인 백성은 이 책을 혁명반란의 기치로 삼았고, 탐욕에 눈먼 세력가들은 권력형 범죄를 숨기기 위해 보이지 않는 원린자에게 자신의 혐의를 뒤집어 씌웠다.

- 순흥 관아 옥사에 갇힌 정겸은 중죄인들을 다루는 한양 서린옥으로의 이감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아무도 그를 찾지 않았다. 정겸의 어머니만이 석방을 위해 분주했을 뿐이었다. 남편을 잃고 아들까지 잃을 처지에 놓인 그녀는 몰라보게 수척해진 나머지 병색을 드러냈다. 문예의 붓 대신 그녀가 잡은 건 종교적인 구원이었다. 정신줄이 미약해진 그녀는 초암사를 매일 찾아 풍속에 어긋나는 혼인을 한 자신이 부처님의 벌을 받아 남편에 이어 아들마저 잃게 되었다고 흐느꼈다. 많은 사람들이 넋두리를 들었는데 승려 하나가 몰래 그녀에게 접근했다. 사람 눈을 요리조리 살피는 그 승려는 의금부의 정승이 속세 시절의 외가댁 숙부이니 아드님의 석방은 문제도 아니라며 얼마간의 비용을 제안했다. 정겸의 어머니는 이 승려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 나는 틈날 때마다 정겸에게 면회를 갔는데 한 사람이 그토록 빠른 시일 내에 보여준 변화에 깜짝 놀랐다. 정겸은 말수가 줄었고, 표정이 차가웠는데 불타오르는 눈은 한겨울의 폭설도 녹일 만큼의 원한을 내뿜었다. 


- 한양 이감 날짜는 점점 다가오는데 옥졸들은 면회를 위한 더 많은 뇌물을 요구했다. 정겸의 방면을 위한 노력은 물거품이 되어가고, 승려는 의금부에 쓴다고 받아낸 120냥을 들고 야반도주 해버렸다. 확인 결과 머리만 박박 깎은 그 사기꾼은 초암사에 적을 둔 승려가 아니었다. 충격받은 정겸의 어머니는 피를 ... 

- 죄수가 된 마당에 다른 선택이 있을 리 없었다. 이것이 운명이구나 하고 안지천을 따랐다.

 

- 추격대가 보이지 않아도 그들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송학도인(松鶴道人)은 행렬의 앞에서 척척 걸음을 옮겼다. 육십 나이에 절륜한 근골을 과시하는 그는 사실 묘옥의 아버지가 아니라 안지천의 오른팔 격인 장수라고 했다. 정겸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들과 걸음을 맞추었다. 
'이들은 나를 기다리느라 허비한 시간을 벌충하기 위해 쉬지 않고 걷는다. 제시간에 맞춰야만 하는 어떤 목적이 있음에 틀림없다.' 
수하들이 마탁봉을 넘겨받으려 했지만 안지천은 무시한 채 나아갔다. 밤의 어둠도 험한 산길도 그에게는 문제 되지 않았다. 실제의 전장터를 겪지 못한 정겸은 동행하는 이들에게서 고도의 훈련과 전문성을 느꼈다. 

 

- 날이 밝아왔지만 쉬었다 가자고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멀리서 닭이 우는 소리가 났다.
송학도인이 달리기 시작했다. 뒤따르던 자들이 달리자 탁봉을 둘러멘 안지천도 달렸다. 정겸도 달릴 수밖에 없었다. 문득 옆을 돌아보니 묘옥이 나란히 뛰고 있었다. 정겸은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나의 얼굴에서 고혹적이고, 차갑고, 정열적인 매력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는 특이한 여인이었다.

- "외눈고개? 순흥에 그런 곳은 없는데?"
"우린 벌써 순흥을 벗어났어요."
안지천에게 업힌 탁봉은 반쪽이 자줏빛인 얼굴로 두 남녀를 바라보았다. 묘옥이 탁봉의 뺨을 쓰다듬으려 했다. 탁봉이 성난 고양이처럼 이빨을 드러냈다. 깨물릴 뻔한 손가락을 거두며 묘옥은 웃었다.

- 산길은 갈수록 복잡해졌다. 바위는 험준하고 수풀은 울창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들이 빽빽했다. 밝아오는 하늘에 잎사귀의 푸르름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마치 이파리 위에 초록색 염료를 들어부은 듯 과도한 심상의 신록이었다. 자연보다 인공의 기미가 묘하게 느껴지는 나무에서는 새소리도 풀벌레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정겸은 잘려진 나무 그루터기에 칼로 파놓은 표식을 발견했다. 불가사리 형태의 도형 가운데 사람의 눈을 새긴 표식이었다. 산신과 연관된 무화와도 달랐고 어린아이 장난이라고 보기에는 솜씨가 정교했다. 무언가 '조선의 것'과는 다른 이색적인 사조가 느껴졌는데, 까마득한 원시의 여운이 감돌았다. 길을 나아갈수록 표식은 계속 나타났다. 동심원의 문양도 여기저기서 발견되었다. 나뭇가지는 거미줄처럼 서로 엮이어 휘감겨 어두운 그늘을 만들었다.  

- 그들은 살기 위해 집요하게 싸우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끝까지 죽이는 잔혹한 종자들이다.
박고헌은 그날 최한수의 충언을 들었어야만 했다. 그는 적을 가벼이 보았고 판단도 가벼이 했다.
차갑고 어두운 별에 살았던 비천자는 밝은 대낮에 출몰하지 못한다. 볕에 닿으면 눈이 멀고 피부가 썩어 죽는다. 그러나 그중에는 희생을 무릅쓰면서까지 볕으로 나오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경우가 그렇지 않을까. 일단 살아남아야만 생산과 전쟁이 가능하니까. 

- 만약 박고헌이 경계병을 남겨놓고 쇠기구 안에서 적이 나오는 기미가 보일 때 또 한 번 징이라도 치는 슬기를 발휘했다면 비천자들은 남김없이 토멸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존재에 의문까지 품었으면서도 '밝은 대낮에는 요괴가 활보하지 못한다'는 미신 하나로 불안한 자리를 비워버린 것은 난리와 진압의 책임자로서 경솔했다. 비천자 중 몇몇이 경계가 소홀한 틈을 타 햇볕에 몸이 타들어 가면서까지 종자고개에 보이지 않는 장벽을 세웠음은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요상한 광선이나 신비의 법력으로 눈속임을 하는 원린자들은 흔했다. 수많은 조선 사람들을 무참하게 죽인 '웃는 낯의 남자'는 미지의 거울만으로 비밀의 장소를, 더 나아가 자신이 원린자라는 사실도 숨길 수 있었다. 교령(交靈)의 문외나한(門外羅漢)은 환각으로도 눈속임을 보이고, 물체 변형의 술법으로도 사람 눈을 속인다. 

- 책은 신성하게 여긴 것들의 실체를 인정할 줄 알아야 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정겸은 미지의 두려움에 몸을 떨었고 인간의 왜소함에 절망했다.
"믿기지 않는 얘기군요."
"외눈고개의 땅을 직접 디디고 있으면서도 믿지 못하겠단 말인가?"
송학도인이 책을 돌려받았다.
"나는 박고헌의 후손을 직접 만난 적이 있네. 언변이 좋고 판단이 빨라 외교사절단의 정사(正使) 자리를 몇 번이나 연임하신 인재일세. 그런 분이 조상 이야기만 나오면 안색이 변해 상대방을 경계한다네." 

- "그럼 저 탁봉이가 바로 당랑자입니까?"
송학도인의 답이 이어졌다.
"흔히 말하길 이 세상의 짐승은 오충(五蟲)으로 나뉘어져 있네. 털이 달린 길짐승인 모충(毛蟲), 날개가 달린 날짐승인 우충(羽蟲), 거북이처럼 껍질이 달린 갑충(甲蟲), 비늘이 달린 물고기 인충(鱗蟲), 그리고 벌거숭이인 나충(裸蟲), 이 나이 바로 우리 인간일세. 비천자는 우충, 모충, 나충의 성질을 고루 갖추었지만 그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네. 탁봉이도 똑같아. 지금은 둔갑을 한 상태지만 원래 모습은 징그러울 테니 안 보는 게 나을 걸세. 유념해 두게. 인간의 탈을 쓰고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는 원린자는 수두룩하다네. 염정소설에 나오는 천상계, 천하계를 논하는 게 아니야. 그것들은 우리들 사이에 실제로 있어. 어떤 나라든 다른 나라의 첩자가 몰래 숨어서 그들과 같이 살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일세. 제각기의 목적을 가진 첩자 말일세." 
정겸은 송학도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당신들은 나와 같은 사람이 맞나요? 내가 어떻게 당신들을 믿지요?"
송학도인이 칼로 자신의 손가락에 상처를 냈다. 홍옥 같은 빨간 피가 묻어 나왔다. 피의 맹세를 하는 것처럼 다른 이들도 송학도인을 따라 하며 피를 보여주었다. 
"우리 모두 자네와 같은 피를 갖고 있네. 탁봉이의 몸 안에는 흰색 피가 돌아."

- "그 쇳덩어리 기구는 하늘을 나는 물체라네. 우리 수군이 배를 타고 바다를 누비는 것처럼 당랑자들은 그 비행기구를 타고 별과 별 사이를 떠돈다네. 학식이 뛰어나고 발달된 문명을 가진 그들의 목적은 다른 세상을 염탐하는 것이지. 그들은 신비한 힘이 있는 빛을 우주를 이동하는 원천으로 삼고 있네. 이 빛은 수많은 노동력이 물레방아 같은 기구를 돌리면서 파생되는데 이 일을 맡은 이들이 바로 비천자였다네. 원래 그들은 작은 별천지에서 짐승과 같은 야생의 삶을 살고 있었지. 당랑자들이 그들을 정복해 사육을 하고 번식을 시켰어." 

- "난 몰랐어요. 모든 건 오라버니가 아셨던 거예요!"
묘옥의 목소리가 떨렸다. 탁봉이 날카롭게 말했다.

"흥, 육번 안지천은 합리적이고 냉철한 사람이야. 그는 몸속에 이계 기생 벌레가 들어가기 전까지 <귀경잡록> 따위는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어. 그가 순흥 옥사에서 너한테 군자금 이야기를 하지 않았나?"
"그가 모셨다던 장군의 군자금 말인가?"

정겸이 반문했다.
"모든 군자금이 다 현금은 아니지. 비단일 수도 있고 황금두꺼비일 수도 있고 도자기일 수도 있어. 그런데 육번 안지천이 제아무리 한풍검이라는 명성을 얻은 영웅이라 해도 운반할 도자기 안에 백 년 묵은 이계 기생 벌레가 잠들어 있는 것까진 모를 수도 있는 거지. 그 벌레는 언젠가 다가올 기회를 위해 몸을 숨기고 있었는데 드디어 기회가 온 거야. 몸을 차지한 사람이 막강한 군대와 권력을 가진 자였으니."
"그렇다면 그것은... 그런 것이었나...?"
정겸은 지하동굴 속의 벽화를 떠올렸다. 비천자가 은빛 벌레를 입으로 삼키는 그림은 잡아먹는 수렵을 묘사한 게 아니라 신체 강탈을 조심하라는 암시였단 말인가?
그는 묘옥을 바라보았다. 고아한 처녀의 배 속에 징그러운 기생 생물이 자리하고 있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탁봉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 비천자들의 괴성이 가까워졌다. 이두조도 날개를 푸드득거렸다.
"이곳도 안전하지 않아. 빨리 뛰어."
탁봉의 명에 정겸은 숨 가쁘게 달렸다. 묘옥이 곁을 따랐다.

"외눈고개를 벗어날 때 저 여자는 남겨두고 가야 해."

탁봉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정겸은 숨을 몰아쉬며 탁봉을 내려다보았다.
"너의 형제들은 다 죽었다고 그랬지?"
"그렇다."
"그럼 네 목적은 형제들 곁에 묻히는 것이 아닌가?"
"맞아."
"네 소원을 들어주긴 하겠지만 나는 이 여인과 함께 나갈 거야."

묘옥이 복잡한 감정을 담은 눈으로 정겸을 바라보았다. 탁봉이 칼날 입을 빠르게 움직거렸다.
"이런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저 여자의 진짜 목적은 언젠가 세력을 키워 너희 인간들을 정복하는 거야. 지금은 너한테 불쌍한 표정을 지으니 마음이 흔들리겠지만 여기서 나가면 본색을 드러낸단 말이다."
"생사고락을 같이 한 여인이다. 여기 두고 갈 수는 없어."

- "오라버니는 나라 일에 충실한 장군이셨어.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이 변했어. 사람들을 모아서 외눈고개라는 곳을 알렸고 거기 있는 무기를 꺼내 와야 한다고 주장했지. 성격이 돌변하니까 사람들은 오라버니가 어디 아픈 게 아닌지 의심했었어." 

- 동심원을 돌고 돌아 들어간 사당은 외눈 모양 표식이 늘어선 마루로 이어졌다. 표식 위로는 그들이 이미 보아왔던 벽면석화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지하동굴에서 본 것보다 훨씬 솜씨가 정교했다. 주로 박고헌과 비천자들과의 싸움을 묘사한 그림이었다. 정겸과 묘옥은 탁봉의 지시로 마루를 따라 걸었다. 마루 끝에는 속이 비치는 천이 걸려 있었다. 정겸은 천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온 방 안이 낯선 문자로 도배되어 있었다. 인간이 쓰는 문자가 아니었다. 정겸과 묘옥은 물론 마탁봉조차 내용을 해독하지 못했다.

- 그들은 창자처럼 생긴 일곱 개의 줄로 허공에 매달린 단 한 명의 사람을 보았다. 흔들림 없이 공중 박제된 그는 지하동굴의 사람들처럼 알몸이 아니었다. 완전한 백골 상태이긴 했지만 그가 걸친 옷은 무관이 입는 구군복이었고, 머리에 쓴 것은 공작새 깃털이 달린 전립이었다. 염주알 같은 밀화패영(蜜花貝纓, 밀화구슬을 꿰어 단 끈)은 턱까지 늘어졌고 장칼은 허리춤에 붙어 용맹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 옛날 태양의 힘을 보여 비천자들의 조선 침략을 좌절시킨 슬기로운 무장 박고헌이었다. 정겸도 묘옥도 잠시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비천자들이 그를 박제해 놓은 취지가 존경심인지 경계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동심원을 타고 울리는 괴성이 그들의 귀를 때렸다. 우려한 일이 드디어 생기고 말았다. 비천자들이 코앞까지 쳐들어왔음은 분명했다. 정점이 탁봉에게 급히 물었다.
"격섬채동포는 어디 있나?"
"여기 없다."
"적을 물리칠 수 있는 병기가 있다고 했잖아!"
"대포라고 하진 않았어."

- "비천자가 정말 두려워하는 건 격섬채동포도, 우리들도 기생벌레도 아니다. 바로 저기 허공에 있는 사람이다. 낯선 땅에 불시착하자마자 대포로 두들겨 깨고, 백병전에서도 무수한 적을 죽이며, 심지어 낮과 밤이 바뀌어도 끄떡없던 존재, 명령만 내리면 모든 이가 행동을 같이 해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 존재. 놈들은 지금까지도 바깥세상에 박고헌이 더 있을까 봐 겁을 내고 있다."
"이미 죽어 백골이 된 사람이 아닌가."
정겸은 탄식했다. 수만 군졸의 진격처럼 놈들이 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진동에 둘이 떨리고 박고현의 몸이 조금씩 허공을 부유했다. 정점은 노여움을 띠고 탁봉의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분노에 찬 손가락이 당랑자의 번쩍이는 눈을 뚫으려 했다. 
"이놈! 네놈이 일부러 우리를 이리로 끌고 온 거지?”
"머리를 써. 이 바보야! 지금부터 힘을 합쳐 최후의 모험을 해보잔 말이다! "

- 묘옥이 탁봉에게 말했다.
"오라버니 몸은 네 말대로 벌레가 장악했을 수도 있어. 믿어줘! 나는 아니야! 내 몸에는 은빛 벌레 따위는 들어 있지 않아."
"거짓말하지 마! 내면을 들여다보는 당랑자의 눈은 못 속여. 너의 배 속에선 지금도 꿈틀대는 생명이 보여."
"그건... 아기야!"
"뭐라고?"
"내 아기란 말이야."
"허튼소리! 네게 남편이 있다고 했었나?"
"오라버니의 아기야."
묘옥이 절망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 머리를 절구공이로 찧는 느낌에 정겸은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배에 눈과 입이 붙은 수많은 형상들만 가득할 뿐이었다. 묘옥은 그런 정겸의 팔을 잡고 매달렸다. 살려달라는 애원 사이로 비천자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저항을 잃은 정겸을 건드리지 않고 지나쳐 묘옥을 잡으려 했다. 홀로 남게 된 그녀는 배를 움켜잡고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그녀가 도망칠 곳이라고는 없었다. 탁봉이 차갑게 말했다. 
"네가 죽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하는구나. 아기인지 벌레인지는 배를 갈라 보면 알아."
"살려줘요, 정겸! 저들이 나를 죽이려 해요."
묘옥이 애원하자 정겸은 땀이 흥건한 얼굴을 들었다.
"나를 옥사에서 이곳까지 따르도록 만든 건 결국 미인계를 쓴 거요?"
"그렇지 않아요!"

- "자객에게서 나를 구해줬을 때부터 당신이 좋았어요. 일부러 속였던 건 아니에요. 오라버니는 세상을 정복할 유일한 왕족이 되려면 한 가지 혈통만을 유지해야 한다고 그랬어요. 미안해요. 변명 같지만 그는 내 오라버니일 뿐이에요. 내 마음은 아직도 당신을 향하고 있어요." 
정겸은 머리에 손을 댔다. 비천자를 세상에 풀어놓을지 말지, 내면의 갈등에 머리가 폭발할 것 같았다. 

- 비천자 하나가 긴 팔을 뻗쳐 묘옥의 어깨를 붙잡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그녀는 대항할 힘조차 잃었다. 묘옥이 정겸을 쳐다보았지만 정겸은 시선을 외면했다. 다른 비천자가 묘옥의 배를 향해 칼을 치켜들었다.
"날 지켜준다고 했잖아요!"

- 깨어난 후 아무리 찾아봐도 검은 표지석은 보이지 않았다. 정겸은 산속을 헤매다가 사람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정겸이 입은 옷과 품에 안은 돌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정겸이 따라오기라도 할까 봐 찌푸린 인상으로 길을 가르쳐주었는데 하나같이 '어르신' '노인' '할아버지' 따위의 호칭을 썼다. 정겸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거나 육신은 사라지고 혼백만이 저승을 떠도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살을 꼬집어보니 아팠다. 꼬집힌 팔도 꼬집은 손가락도 젊은이의 신체가 아니었다. 

- 그는 산길을 따라 걸었다. 길 곳곳마다 어제는 보이지 않던 다리나 사찰 따위가 생겨나 있었다. 같은 길을 태풍 같은 기세로 걸어갔던 게 바로 어제 일이었다. 하루 만에 어떻게 이런 변화가 가능한 건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외눈이 표시된 나무는 보이지 않았다. 곳곳에 등장했던 동심원의 문양도 사라졌다. 가을이 한창인 고개는 울긋불긋한 단풍 아래 새소리 벌레 소리만이 요란했다. 

- 지금까지가 나를 찾아온 정겸의 외눈고개 이야기다. 그에게는 하루였지만 내게는 40년의 세월이었다. 그의 진술을 토대로 나는 정겸이 겪었던 수기를 영웅 신화처럼 완성했는데 이는 한때 나의 가장 소중한 벗이었던 사람에 대한 작은 배려였다. 정겸이 미쳤음을 좀처럼 인정하기 어려웠다. 어떻게든 좋은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었고, 우리가 나누었던 의리가 사후에도 잊혀지지 않길 바랐다. 그럼에도 무책임한 첨삭이나 과장은 없었다. 대부분의 묘사는 정겸의 입에서 나온 그대로를 옮긴 것이다. 

- 내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자신보다 이 세상을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쌍한 내 친구가 쫓기는 몸으로 살다가 그만 미쳐버렸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사람을 죽인 일에 연루되어 실패한 인생을 살았고 숨어 사는 세월 동안 홀로 온갖 심적 괴로움을 감수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 그의 정신이 온전치 못했대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그는 미쳤다. 

틀림없이 미쳤다.
나는 정겸의 정신에 악영향을 끼친 원인이 나라에서 금하는 불온서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도망자의 몸으로 앞날의 희망을 상실한 그는 어느 날, 어떤 연유로 사특함이 가득한 귀신의 이야기를 접했고 자아를 잃을 정도로 빠지고 말았다. 

 

- 지금 내 머리를 떠도는 예감은, 정겸이 세상을 향해 바람직한 경고를 해놓고도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박고헌의 길을 따른 것 같다는 쪽으로 쏠리고 있다. 
정겸이 비천자 괴수들을 이끌고 이 세상을 향해 분노의 창질을 시작했다고 생각하기는 싫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원인 제공자는 내가 아닐까? 머리가 혼란스럽다. 

- 자, 이제 곧 나는 관찰사의 부름으로 수색 지원을 하러 간다. 목적지는 섭주의 종자고개다. 단단히 무장을 하고 가라는 관찰사의 명에는 생각보다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한 달 후면 퇴임할 몸이건만 감히 명을 거역할 수는 없다. 전투가 벌어진다면 나는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휘하의 장졸들은 담력이 세고 일당백의 실력을 지닌 대장부들이다. 하나 불행하게도 내게는 화포가 없다. 

 

-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예감도 든다. 그래서 어렵게 완성한 이 <외눈고개 비화>를 튼튼한 궤짝에 넣어 잠궈 놓을 생각이다. 아들을 불러 만약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궤짝을 개봉한 후 이 기록을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라고 신신당부할 작정이다. 
오늘 밤이 지나고 날이 밝으면 나는 장졸들과 함께 종자고개로 오를 것이다. 그곳에 내 친구가 있기를 바라며, 사태가 원만하게 해결될 수 있기를 바란다. 나의 벗 김정겸이 미치지 않았음을 뒤늦게야 인정하노니, 다시 만나 서로에 대한 사심(邪心)을 거두고 정답게 술잔을 기울일 수 있기를 고대한다. 

- "까마득한 산골 오지에요?"
"당연하지. 이게 다 주상전하께서 조선팔도의 구획을 두루 정비하고 살피신 덕이야. 고립무원 산야에서도 하룻밤 묵어갈 집이 나오니 감군은(感君恩)이란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지. 아둔한 네가 큰 분의 큰 뜻을 알기나 하겠느냐?"
"나리를 이런 곳으로 보낸 그 주상이요?"
"어허! 그놈의 입!"

- "어두워서 안 보이는 거겠지. 어디 저 오두막 하나 뿐이겠느냐?"
"집 주인이 재워줄지, 안 재워줄지도 모르는데 김칫국물부터 마시지 마세요. 이런 산골짝에 사는 작자라면 자기 아버지도 알아보지 못할 놈일지 모르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냐?"
"사람 죽이고 도망친 죄인이 숨어 사는 덴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권윤헌은 자기보다 열 살 더 먹은 바우가 던진 말에 겁먹은 얼굴이 되었다. 바우는 미심쩍은 눈길을 오두막에서 거두지 않았다.

- 하늘에는 별 하나 떠있지 않았다. 그 아래 펼쳐진 산간 오두막은 귀신이 나올 것처럼 을씨년스러웠다.
아무리 깊은 산속이라도 그렇지 그곳은 집을 올릴 만한 택지가 아니었다. 나무를 베어내지도 돌을 치우지도 않았다. 마치 산에게 양해를 구한 듯 빽빽한 나무와 바위틈을 비집고 들어가 누추한 집을 지어 올렸다. 그게 아니라면 먼저 집을 지은 후 나무와 돌을 새로 심고 갖다 놓았다는 말인데, 무질서한 배치는 가히 집 안팎의 활동을 방해할 정도였기에 그런 가능성도 들어맞지 않았다. 
오두막이 비탈길에 세워진 것도 이상했다.

- 사흘 전, 권윤헌과 바우는 어명을 받들어 함경도 함흥으로 길을 떠났다. 그리고 오늘, 정평을 지나 걸어올라간 북향 산간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산을 내려가면 역참과 여각이 있을 텐데 날이 저물도록 길이 나오지 않았다. 울창한 나무들이 끝도 없이 반복되면서 어느 때부터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었다. 
바우가 노숙을 하자고 제안했지만 산속에서 자야 한다는 말에 겁이 난 권윤헌은 계속 길을 찾으라 야단을 쳤다. 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이상한 첩첩산중을 죽도록 헤매던 둘 앞에 진로방향이 전혀 다른 새 길이 나타났다. 길은 앞이 막혔고 좌우로 만나있는 ㅜ자 형국으로, 왼쪽으로 내려가거나 오른쪽으로 올라가야만 하는 비탈길이었다. 문제의 오두막은 경사가 급한 비탈길의 정중앙에 한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채 서 있었다. 집 뒤편에 뭔가가 줄을 지어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울창한 수림에 달도 뜨지 않은 밤이어서 시야가 뚜렷하지 않았다. 

- "이상한 집이야..."
바우가 말을 오두막 쪽으로 이끌었다. 권윤헌은 집이 점점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오두막 뒤편에 '웅크리고 있는 것'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났다. 나무와 짚을 이용해 삼각 꼴로 지은 움집이었다. 뿔처럼 생긴 똑같은 움집 12채가 비탈면에 줄을 맞추어 서 있었다. 안은 텅 비어 있었으나 겉모습은 꺼림찍했다. 시대와 동떨어진 양식, 그럼에도 나름의 질서정연함에서 불교나 도교와는 다른 사교(邪敎)의 원시성이 느껴진 까닭이다. 빗살무늬토기나 돌로 만든 도끼가 유행하던 고대시대의 자연 신앙과 관련이 있어 보였다. 

- "맙소사, 나리! 저게 뭐지요?"
"낸들 알겠느냐?"
권윤헌의 불안한 눈이 비탈을 훑었다. 산사태라도 나면 피할 방법이 없을 텐데 이런 곳에 움집을 지은 이유가 뭘까. 해괴한 기운을 눈치챈 건 짐승도 마찬가지였다. 말은 더 나아가지 않겠다는 듯 앞발을 굴러대며 코로 훈김을 뿜었다. 
말에서 내린 권윤헌이 오두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이 집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집이 사람에 가까워진다는 착각이 자꾸만 들었다.

- "이리 오너라!"
"나리! 여기가 어디 한양의 기와집인 줄 아세요? 산적이 사는 집인지도 모르는데."
바우가 주인의 팔을 잡아당기고는 직접 목소리를 높였다.

"주인장 계시우?"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없었고, 촛불 빛이 움직이지도 않았다. 권윤헌이 뭔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가만, 여긴 혹시 사당이 아닐까?"

- "위치를 보거라. 이 오두막은 열두 채의 움막 중 가운데 자리에 지어지지 않았느냐?"
"어, 그러고 보니..."
바우가 오두막과 열두 움막의 위치를 살펴보았다. 정확한 삼각형. 움집의 외형처럼 13채의 배치 역시 세모꼴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더욱 흥미로운 도형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촛불을 켜놓았음은 누군가 다녀갔다는 말일 텐데 아마도 치성을 드리는 무당인지도 모르겠구나."
"무서운 소린 그만하세요, 나리. 사당이 아니라 주인이 잠시 출타 중인 평범한 집일 테니."
마침내 권윤헌은 결심했다.
"확인해 보면 알겠지. 문을 열어 보거라."

- "나리! 여긴 당집이 아닙니다요! 서책밖에 없어요!"
"뭣이? 서책?"
바우가 주인을 돌아보았다.
"산적이 아니라 다행입니다요! 산속에 숨어 지내는 선비의 오두막인가 봅니다요."


- 서책이란 말에 얼굴이 밝아진 권윤헌은 바우를 밀치고 열려진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허물어져 가는 외관과는 달리 깨끗하게 만들어놓은 사랑방이었다. 가구는 전혀 없었으나 누울 자리를 제외하고는 온통 서가였다. 엄청나게 많은 책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는데 자리가 없어 바닥에 쌓인 것들도 있었다. 책방이라고 해도 손색없을 공간이었다. 오동나무 재질의 서안(書案)이 방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위에는 귀퉁이가 닳은 벼루와 두꺼비 모양의 연적, 그리고 붓 네 필이 놓여 있었다. 벽에는 커다란 곳간 열쇠 하나와 두 개의 활이 걸려 있었다. 선비의 몸가짐을 알려주는 정갈함에 권윤헌은 감동받았다. 

 

- "오오, 어떤 고명하신 분이 세상을 멀리하고 이런 첩첩산중에 은일한단 말인가?"
처음의 불길했던 예감은 사그라들었다. 저명한 은둔 학자가 불쑥 나타나 처세의 가르침을 선사하는 행운이 자신을 기다릴 것만 같았다. 
이렇게 된 이상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실례다. 문을 닫고 바깥에서 공손하게 주인을 기다려야 한다. 촛불을 켜놓았으니 아마 멀리 가지는 않았을 터이다. 그러나 금석문과 서지학에 조예가 있던 권윤헌은 오두막에 가득한 책이 어떤 학문을 담고 있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제목만이라도 볼 수 있기를 원한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바우에게 말했다.

- "이건 선비가 읽는 책이 아니니라."
"무슨 책인데요?"
권윤헌은 답하지 않았다. 속도를 더해 다른 책들을 꺼내가며 제목을 확인하고 있었다.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고 손발도 부르르 떨렸다.
"나리! 무섭습니다요! 대체 왜 그러세요?"
"여기 있는 어느 한 권도..."

그는 책을 떨어트렸다.

"갖고 있어서는 아니 될 책들이다."
바우가 책을 주워 들었지만 글을 몰라 닭 고갯짓만 했다.

- 권윤헌은 충격을 받았다. 서가의 책들은 국법으로 금지하는 이단에 관한 서적이었다. 지은 지 100년이 넘은 책도 있었고, 근래에 나온 책도 있었다. 선현의 가르침이란 예상은 틀렸다. 깨끗한 사랑방 안에 모인 것은 동서고금을 통튼 사악함의 정수였던 것이다!

- 서가에는 280명의 신도를 죽여 제물로 바친 밀승신성교(蜜蠅神聖敎)의 교주 천승도가 저술한 교리문답서 <만씨멸구유일승집(萬氏滅口唯一蠅集)>이 있었고, 한때 조정의 사관이었다가 '생명을 알아보고 변화하는 빛'을 쏘인 후 발광하여 세자의 어린 사촌 둘을 쇠도리깨로 때려죽였던 살인마 고탁규의 무서운 가짜 역사서 <동국원린사초(東國遠麟史草)>도 있었으며, 미지의 세력과 결탁해 방화와 살인을 일삼고 나라를 뒤엎을 반란을 주도했던 완덕의 <서역신왕직설(西域辰王直說)> 등이 있었다
.


- 권윤헌이 떨어트린 책이 바로 <서역신왕직설>이었다. 그 역시도 이 불경한 서책에 관해 들은 바 있었으나 직접 책장을 넘겨보긴 처음이었다. 완덕은 노비였으나 그 문장은 믿기지 않을 만큼 탁월했다. 소문에 의하면 완덕은 이상한 약초를 씹고 100일 동안 금식한 뒤 '붉은 하늘이 귀띔해 주는 목소리(血雲之蒼天)'로부터 미지의 법력을 전수받아 상전벽해의 지혜자로 거듭났다고 하는데, 그 말이 진실이거나 이 책이 가짜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물론 권윤헌은 금서에 얽힌 소문을 요망한 잡설이라고 일축해 온 사람이었다. 그러나 내용의 어처구니없음을 떠나 이런 사악한 물건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음에는 모골이 송연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이런 서책 더미에 파묻혀 은거하는 놈은 누굴까?'

- 권윤현은 또 다른 책 한 권을 꺼내다가 팔뚝에 소름이 끼쳤다. 앞에 꺼내본 책들은 지금의 충격에 비하면 약과였다. 수없는 왕조가 참초제근(斬草除根)의 수배를 내렸음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았고 오히려 왕조의 비참한 교체를 내려다보며 기세등등했던 예언서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살인과 저주, 역성혁명의 반란을 몰고 온 사특한 책, 바로 뱀 껍질의 선비 탁정암이 지었다고 알려진 <귀경잡록>이었다. 

- <귀경잡록>은 권윤헌도 잘 알고 있었다. 되살아난 시체, 혼백을 소환하는 비술, 천상계의 사악한 존재, 죽음을 몰고 다니는 요승 따위 온갖 요설이 장마다 가득한 이 책이 일으킨 풍파는 그리 멀지도 않다. 불과 한 달 전에도 의금부에서 이 책과 관련된 자를 참수형에 처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 "나리! 어서 열쇠를 갖고 와 저흴 구해주셔요!"
청아가 가슴에 손을 모은 채 권윤헌을 바라보았다. 권윤헌은 이 여인이 계속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길 진심으로 원했다. 만백성을 범죄의 위기에서 구할 관리가 바로 자신이라며 평정심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떨리는 가슴은 진정되질 않았다. 그는 관을 내려다보지 않으면서 위로 올랐다. 

 

- 어느새 하늘엔 동이 터오고 있었다. 어둠이 한결 옅어진 하늘 아래에는 바우의 뚝심에 무릎을 꿇은 천승도가 몸을 심하게 떨고 있었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기가 꺾인 모습이었다. 
"제발 나를 풀어주시오. 포도대장 나리! 내가 도와준단 말은 저런 계집들을 드린다는 말뿐이 아니오. 주상전하가 아들을 낳을 수 있도록 '그분들'께 부탁드리겠단 말이오! 주상전하가 아들을 낳을 수 있도록. 그분들은 지상에서 온갖 영묘한 술법을 부릴 수 있소!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나리가 대대손손 호강하도록 그분들과 내가 만들어주겠단 말이오! 제발 부탁이오! 내가 없으면 당신들은 이 산을 절대로 못 내려가요!" 
권윤헌은 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방 안에 있던 열쇠가 지하뇌옥을 여는 열쇠가 맞냐고. 그의 마음은 온통 청아에게로 쏠려있었다. 천승도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 "무지몽매한 것들!"
천승도가 소리쳤다. 밝아오는 아침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육십오능음양군자는 우주의 기운을 지배하는 자다! 너희처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은 물론, 100년 전의 나에게도 생명을 주신 분이다. 그분이 바로 천지신명이란 말이다! 내가 한번 죽었을 때 그분은 자연의 근간을 뒤흔드는 법력으로 숨과 피를 재생시켜 주셨다. 이제 그분의 제자들인 12사도가 내려온다! 너희는 알에서 깨어난 옛 왕조의 시조며 군사들에 쫓김 당해 물고기를 밟고 강을 건넌 선현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런 이야기들이 거짓인 줄 아는가? 아니면 다 진실인 줄 아는가? 그것은 실제 있었던 일로서 진실이며, 인간이 살을 갖다 붙인 위조로서 거짓이다. 이제 곧 알게 될 거다. 이제 곧 후회하게 될 거다. 너희가 모르는 저 세상에는 지혜로 가득 찬 만년존자들이 가득하다. 그들은 지혜로운 만큼 모질기도 하다. 나의 경고를 무시한 너희 미련한 것들! 이제 잔혹하게 처단받을 것이다. 그 어떤 형틀보다 무서운 이계의 고문 도구들이 너희를 품에 안고 싶어 안달을 할 것이다. 도망쳐도 소용없다. 나를 빼놓고 영기가 가득한 이 산을 내려갈 방법을 아는 이는 없다. 그들은 너희들이 어디에 숨든 부처 손바닥 안의 손오공처럼 찾아낼 것이다."
"이놈! 노망난 소리 그만 지껄여라!" 

권윤헌이 떨면서 소리쳤다.
어디선가 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 청아는 어둠 속을 달리고 있었다. 더 이상 밤이 두렵지 않았다. 나뭇가지가 얼굴을 찔러 대고 밤의 기운이 귀신을 흉내 내도 상관없었다. 여섯 여자들과 달리 청아에게는 목적지가 있었다. 이 낯선 산에서 찾아야만 하는 장소가 있었다. 그녀는 머릿속의 목소리를 따라 제 발로 이곳을 찾았지만, 탈을 쓴 괴한에게 잡히게 되자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어떻게 도망쳐야 할지 가르쳐주지 않았고 침묵만 지켰다. 청아는 괴한이 자기를 해칠까 봐 겁이 났고 아버지를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까 봐 좌절했다. 
그러나 지하 뇌옥을 탈출하자마자 머릿속에서 다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그녀가 어디로 가야 할지 알려주었다. 청아는 다시 아버지의 음성이 들리도록 자신을 구해준 젊은 남자가 고마웠다. 그는 나랏일을 하는 사람 같았지만 잘생긴 도련님 같은 남자이기도 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고 아버지를 찾도록 도와달라 말하고 싶었다. 

- 청아는 선녀도 울고 갈 용모로 한양 유흥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 기생이었다. 총명한 머리로 일찍부터 사서삼경을 떼었고 시부(詩賦)는 물론 악기에도 능해 팔방미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녀를 만나려고 돈 있는 남자들이 앞다투어 몰려들었다. 황진이가 그랬듯 청아 앞에서 지조를 무너뜨린 남자가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중에는 선비들의 우러름을 받는 대 유학자도 있었고 속세와의 단절로 이름난 고승도 있었다. 그들은 수십 년을 따랐던 진리의 가르침을 버리고 청아를 만난 후 생긴 욕망을 쫓았다. 그녀 앞에선 선비도, 학자도, 장군도 아이가 되었다. 대장부들이 무릎을 꿇고 울기까지 했다. 억만금을 가져오겠다 처자식도 벼슬도 다 버리겠다, 파계를 하겠다, 피가 끓어 눈이 멀어버린 그들은 스스로의 감정만 포장했을 뿐, 불행한 여인이 어째서 기생이 되었는지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 청아는 처음부터 기생이 아니었다. 그녀는 운명의 희생자였다. 그런 아버지의 딸로 태어난 운명.
중인의 딸임에도 엄한 양갓집 교육을 시킨 사람은 그녀의 아버지였고, 금지옥엽 외동딸을 신분상승은커녕 오히려 기생으로 떨어지게 만든 사람도 바로 그녀의 아버지였다.

- 그날 낮 동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농민들의 수색은 지지부진해 성과가 없었다. 그러나 오후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난데없이 군졸 300여 명이 마을에 당도한 것이다. 수북한 활과 잘 벼린 창으로 무장한 군졸들은 여기저기 차출된 사람들로 섞인 지방군이 아니라 날랜 젊은이들로 구성된 정예병이었다. 그들은 정체를 숨기려는 건지, 아니면 역병을 예방하려는 건지 검은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사또에게 보낸 심부름꾼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사또가 전대미문의 괴생명체에 관한 보고를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해도 너무나 신속한 군사적 조처였다.   

- 촌장은 예전에 경상도 섭주의 외눈고개라는 곳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이 서슬 퍼런 군대가 사또가 보낸 지방군이 아니라 그보다 높은 지위의 사람이 특별한 목적을 위해 파견한 특수군이라고 확신했다. 이런 특수군은 언제나 은밀한 임무를 수행하며 임무의 완수를 위해서는 어떤 짓이라도 서슴지 않는 법이라 나이 지긋한 촌장은 경계심을 바짝 세웠다. 

- 군사를 인솔한 장군이 최근 이곳에서 이상한 일이 없었는지 물었다. 촌장은 머리를 조아리며 어제 있었던 일을 보고하고는 이미 썩은 내를 풍기는 괴생명체를 보여주었다. 옷에 醫자가 적힌 군졸들이 괴생명체를 빈집으로 데려가 몸통을 해부하고 속을 샅샅이 살폈다. 장군은 수염이 있을 자리의 두건을 쓰다듬으며 남은 괴물이 몇 마리인지, 이상한 작물을 재배하는 밭이 있는지, 거기서 나온 열매를 먹은 사람이 몇인지 따위를 촌장에게 물었다. 그는 모든 사정을 알고 있었다. 촌장은 아는 사실을 전부고한 뒤, 향직에서 물러나 쉬고 있던 안덕구를 데려오고 나무꾼 한개동도 불렀다. 

- 장군은 사람을 시켜 마을 호구(戶口)를 조사하고, 역병을 부르는 괴생명체가 있으니 어느 누구도 여기서 나갈 수 없다고 선언했다. 아울러 밤이 되면 괴생명체가 다시 활동하게 되니 서둘러 잡아야 한다며 군사 200명을 수색 작전에 보냈다. 안덕구와 한개동을 길잡이 삼아 남은 군사 100명을 보내 '살아 있는 식물'이 있는 그 밭을 찾아내라고 명했다. 안덕구와 한개동은 산에 오르기가 죽기보다 싫었으나 사태의 심각성을 헤아리고 군졸들을 안내했다. 

- 마지막으로 장군은 청아 모녀를 불렀다.
장군은 서방 이름이 장양권인지, 이방철을 따라 청나라에 다녀온 사실이 있는지, 거기서 뭘 가져왔고 그 시기가 언제인지, 지금 어디에 있고 무슨 짓을 하는지 따위를 물었다. 청아 어미는 장군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는 예감에 극도로 겁에 질렸다. 그러나 남편의 작물재배에 실제로 아는 게 하나도 없어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했다. 


- 트인 공간은 매장지가 아니었다. 땅은 평평했고 묘비 하나 있지 않았다. 거친 자갈과 일부러 가져다 놓은 듯한 낙엽은 이곳을 그냥 지나치도록 유도하는 눈속임의 장치였다. 푸르름이 지나친 주변의 나무들은 낙엽을 떨어트릴 일이 없었다. 진짜 나무가 아니었으니까. 이제 청아에게는 보통의 토양과 뚜렷이 구분되는 다른 색깔의 흙이 분명하게 보였다. 그녀는 진실을 볼 수 있는 신통한 눈을 준 아버지에게 감사를 올렸다. 머릿속에서 어서 나를 꺼내달라는 목소리가 아우성을 쳤다. 청아는 손으로 흙을 파기 시작했다. 

- 시간이 흘렀다. 무릎이 들어갈 깊이로 구덩이가 생기자 땅속에 박혀 있던 나무 자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뽑아보니 녹슨 칼이었다. 원형으로 스무 개가 박혀 있었다. 혈맥과 기운을 막으려는 누군가의 사악한 짓이 틀림없었다. 청아는 칼을 도구 삼아 땅을 파헤쳤다. 태극문양이 아로새겨진 부적이 연달아 튀어나오고 엽전 꾸러미와 실뭉치도 나왔다. 누가 내 아버지에게 감히 이런 저주를! 청아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흙을 파헤쳤다. 손톱이 갈라지고 살이 까져 피가 나도 멈추지 않았다. 해는 중천에 떠 정오를 넘어섰지만 청아는 그조차도 알지 못했다.

- 초인적인 몰두 끝에 큰 구덩이가 파였다. 태극 문양과 별표가 합쳐진 기괴한 표식이 등장했다. 조선은 물론 서양에서도 볼 수 있는 문양이 아니었다. 머릿속의 아버지가 그것은 이계의 부적이며 나를 구속하기 위해 사악한 자들이 음모한 결과물이라고 가르침을 주었다. 어떻게 치우면 좋겠냐고 묻자, 아버지는 이계의 부적은 산 사람에게까지 힘을 발휘하지 못하니 떼어서 ...

- 기괴함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림을 채운 건 해맑은 아이의 얼굴이 나타내는 애틋한 감정일 뿐이었다. 화풍을 바꾸라는 지시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최응하는 못 그리는 게 아니라 안 그렸을 뿐이었다. 그는 마음먹은 대로 화풍을 이끌어갈 수 있었다. 결코 따라잡지 못할 실력을 알아본 박현백은 출신이 미천하여 성공하지 못한 최응하의 현실을 동정했다. 다 쓰러져가는 집을 보자니 인정받지 못한 그의 실력이 너무나도 아까웠다. 
문득 박현백은 이 외로운 화가가 배고픔과 생활고 끝에 집에서 죽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별좌에게 보고할 문제도 있고 해서 그냥 돌아갈 수도 없었다. 문고리를 흔들어보니 잠겨있지 않은 것 같아서 그대로 방 안에 들어갔다. 

- 최응하는 없었다. 그는 아마도 그림을 그리다가 어딘가로 나간 것 같았다. 살림도 가재도구도 그대로였고 옷도 무질서하게 널려 있었다. 노파가 본 문지방의 그림자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게 확실했다. 문 앞에 놓인 서안 위에 완성된 지 얼마 안 된 그림이 두 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어린아이의 초상화에 감동했던 박현백은 새로운 그림을 보는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 그것은 무서운 짐승을 그린 그림이었는데 그런 기괴한 생김새는 난생처음이었다. 짐승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악귀라고 불러도 좋을 모습이었다. 호랑이를 닮았지만 비늘이 있었고 눈도 여럿이었다. 어딘가 두꺼비를 닮았는가 하면 또한 올빼미를 연상시켰고 뱀이나 자라와 흡사하기도 했다. 거대한 날개가 네 개나 붙어 있었다. 모든 흉칙한 짐승들의 외양은 바로 이 괴물로부터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앞을 노려보는 그 거대한 짐승은 살아있는 것처럼 사실적으로 그려져, 당장에 피가 흐르는 이빨을 들이밀고 종이를 솟구치고 나와 쳐다보는 이의 머리통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최응하는 과연 이 괴물을 꿈에서 보았기 때문에 놀란 것일까? 박현백은 단서가 될 만한 게 없나 싶어 그림을 샅샅이 뜯어보았다. 과연 오른쪽 아래에는 작은 한자로 육십오능음양군자지충견(六十五能陰陽君子之忠犬)이라는 뜻 모를 이름이 있었다. 

- 또 하나의 그림은 불덩이들을 그린 그림이었다. 하늘을 나는 불덩이는 모두 열두 개였는데, 제각기 커다란 눈과 입이 붙어있었다. 죄지은 인간에게 벌을 내리려는 저승 불의 모습을 보자 박현백은 간이 콩알만 해졌다. 이번에도 뭔가 적혀있지 않을까 싶어 눈을 돌리던 그에게 이런 글귀가 보였다. 
'나 최응하는 계시를 받아 이제 그분들을 만나러 간다.'

- 박현백은 한숨을 토해냈다. 어두운 그림만 그려왔던 최응하가 결국 마음이 병들어 실성을 한 모양이었다. 집을 나간 그가 어디를 배회하는지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았고 찾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박현백은 갓끈을 대충 묶고 서둘러 그곳을 나와 도화원으로 돌아갔다. 무서운 그림 두 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단지 최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보고만 별좌에게 올렸다. 퇴청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그는 주막으로 달려가 독한 ...

- 그가 메고 온 관은 어두컴컴한 별실 구석에 세워져 있었다. 벽에 붙은 횃불이 남자의 얼굴을 비추었다. 탈로 얼굴을 가려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는데 탈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해괴한 짐승의 머리를 형용하고 있었다. 저승사자가 기르는 개라고 표현하면 어울릴 ...

- 그것은 비늘과 지느러미가 붙어 있지만 호랑이의 눈과 무늬를 갖고 있었으며 악룡의 수염과 이빨을 붙인 모습이었다.


- 감히 포교를 능멸하는 처사에 이원출이 호통을 치려는 순간, 남자가 이 탈은 얼굴과 붙어버려 떼어낼 방법이 없다고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겉모습만큼이나 어두운 면모가 다분했으나 차분했고 기품이 있었다. 한때 도화원의 화공으로 일했던 최응하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여기까지 오게 된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 그는 예지력이 있는 꿈을 꾼 후 그 광경을 그림으로 그려왔는데, 8년 전 육십오능음양군자와 12사도가 꿈에 나타나 속세와의 모든 인연을 끊고 우주와 합일하라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했다. 잠에서 깬 그는 일장악몽(一場惡夢)일 뿐이라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지만 꿈은 계속되었다. 잠이 들 때마다 눈과 입이 붙은 거대한 12개의 불덩어리가 나타나 검은 진리의 길을 보여줄 터이니 운명을 따르라 말을 걸어왔다. 
"네가 그간 그렸던 그림이 우리를 부른 것이다. 너는 깨닫지 못할지라도 우주의 비밀에 어렴풋이 다가간 진심이 네 화풍을 결정한 것이다. 너는 이제 우리를 만나 한갓 환쟁이의 하루살이에서 벗어나 심오한 우주의 천체도를 이룩할 것이다. 그것이 너를 부른 위대한 분의 대의다. 우리를 따라가자." 
불이 건네는 말은 무서운 한편 매혹적이었다. 최응하는 일렬로 날아가는 불을 따라 꿈결 속을 걸었는데 발아래 집들이 지나가고 성곽이 지나가고 국경선이 지나갔다. 그는 어느 깊은 산속에서야 땅에 발이 닿아 걸음을 멈출 수 있었는데 ...

- 이원출은 그를 옥에 넣지 않고 쫓아 보냈다. 최응하는 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포졸들은 밥을 얻어먹고 싶으면 나가서 도로 보수 작업을 하라고 매질하여 보냈다. 

 

- 다음 날 이원이 출근을 하니 야간에 수직을 선 포졸들이 몸을 떨면서 달려왔다. 조금 전 동이 틀 무렵, 짐승의 탈을 쓴 미친놈이 나타나 포교 어른을 찾았는데 해가 뜨자 몸에 큰 녹색 불이 붙어 타버렸다는 것이다. 그가 남긴 것이 두 개 있었는데, 하나는 '눈을 떠라! 그렇지 않으면 그놈들한테 다 죽는다!'라는 유언이었고, 또 하나는 덩그렇게 남은 해괴한 탈바가지였다. 


- 이원출은 탈을 받아 들고 요리조리 관찰했다. 그 안에는 처음 보는 붉은 돌기들이 무수하게 튀어나와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지렁이처럼 움직이는 것 같았다. 무생물인 탈이 마치 생명을 가진 듯해 꺼림칙했다. 이원출은 재수 없는 탈바가지를 최응하의 부탁대로 포도청에 바쳐 조사를 요청하는 대신, 나루터의 초소를 순시하는 오후의 업무 중에 한강에다 던져버렸다.
도로 정비 작업은 계속되었고 인근에서 처녀들이 실종되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 우주의 만세 군주를 입에 담고 스스로 위대한 존재의 신하임을 자처하는 12사도는 요망한 술법을 부리는 괴력난신(怪力亂神)이요, 인간을 공물 받아 우주를 나는 기구 안에서 해부하고 실험하는 사악한 원린자들이다. 절대로 그들에게 속으면 안 된다. 이들은 음양의 조화가 맞지 않아 낮에는 활동할 수 없는데 이를 위하여 행동을 대신할 첩자를 만드니, 이가 곧 제사장이라 이름 붙여진 인간이다. 
12사도에게는 파동을 일으켜 사람의 꿈을 들여다보는 재주가 있어 적절한 수행자를 선택한 뒤 제사장이란 그럴듯한 자격을 부여한다. 병마에 걸리지 않고 천수를 누릴 수 있다는 거짓 불멸의 몸을 주는 한편 살아있는 인간을 채집해오게 한다. 
이들은 속임수가 업이요, 실제로는 용력이 강하지 않은 종족들일 것이다. 변신을 자주 하는 것만 보면 알 수 있다. 이들의 본래 형상은 불분명한데 그것은 어느 별을 침공하든지 거기 거주하는 자들이 무서워할 만한 모습으로 탈바꿈을 하기 때문이다. 위압적인 과시로 상대방을 공포로 몰아넣는 동시에 그 별에 사는 이들을 연구한다. 이 글을 읽는 자들은 12개와 관련된 초자연의 봉변을 당하면 놀라지 말고 분연히 일어나 싸울 것을 촉구한다. 속임수가 업인 작자들의 전법은 기껏해야 어설픈 허허실실(虛虛實實)일 터이니. 
이들의 진의는 결국 그 별을 침범해 손아귀에 넣으려는 야욕인데, 우리나라에서 특히 여인들만 납치한 것은 이들이 번식, 즉 사람의 생산과 관련한 기능을 연구하기 위함인 듯하다. 더 이상 낳을 수 없도록 씨족을 근절하고 번식을 막음은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병법 전술이기 때문이다. 

- 최응하는 특유의 예지력으로 원린자가 흥미를 가질 법한 그림을 그렸고, 결국 그런 그들에게 유인당해 잠결에 집을 건너고 강을 건너서 첩첩산중까지 끌려갔다. 12사도는 가마솥처럼 생긴 그들의 비행기구 안으로 사람을 끌고 가는데, 최면 상태에서 벌어진 납치니만큼 당하는 사람은 신이 들려 영험함을 얻은 줄 착각하게 된다. 실제로 최응하가 사라지기 전날 개가 짖고 폭풍우가 몰아쳤음은 신령스런 분위기를 더하는 데 일조했겠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몰고 온 거대한 쇳덩어리 비행기구가 내뿜는 추진의 힘 때문이며, 예상대로 일각에서는 '하늘을 채우는 이상한 빛'에 관한 목격담까지 있다. 
그들은 신이 아니며 구성 가운데 제 삼성인 녹존성 부근의 원린자일 뿐이다. 원린자는 모셔야 할 신이 아니라 척화의 값어치도 없는 또 다른 오랑캐이다. 
조상이 아닌 괴력난신을 모시는 행위는 제사가 아니라 우상의 숭배에 불과하다.
조상은 요구하지 않는다. 스스로 그러한 마음이 우러나 음식을 준비하고 추모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 제사다. 원린자는 하나를 베푸는 척하면서 두 가지를 가져감으로써 사특한 농간을 부린다. 거듭 말하노니, 그들의 야욕은 곧 인간의 파멸이다.

- 이 장을 쓰는 지금도 육십오능음양군자의 이름을 판 12사도의 음모에 넘어간 자들은 팔도에 하나둘이 아니며, 바다 건너 나라에도 떨어지지 않는 탈박을 쓴 자들이 무수히 존재한다. 한 가지 우리가 가져볼 만한 희망은 최응하처럼 눈을 뜬 자들이 얼마든지 더 나올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원출 같은 무능한 관리 때문에 최응하의 거룩한 양심선언은 성과를 얻지 못하였으나, 만약 이 글을 진지하게 읽어 도를 깨우친 자가 있다면 ...

- 조총을 권윤헌의 이마에 겨누었다.
"잠깐만요!"
이판사판이 된 권윤헌은 무서운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작정했다. 그는 채홍사였고 천승도 역시 일종의 채홍사 노릇을 해왔다. 전임자가 죽었으니 저들에겐 후임자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희망은 없었으나 유일한 가능성이라고는 그것뿐이었다. 손에 쥔 천승도의 탈을 얼굴에 뒤집어쓰자 귀와 뺨, 정수리와 이마 한가운데에 날카로운 못이 들어와 박히는 고통이 엄습했다. 탈이 저절로 구부러지고 얼굴을 덮어 피부를 조였다. 그 순간 권윤헌은 녹색의 밤하늘에 공처럼 둥근 별들이 무수히 떠다니는 광경을 보았다. 인간을 닮았으면서도 인간과는 다른 형체의 생명들을 보았고, 검은 강물이 흐르는 낯선 세상과 돌로 만든 삼각 움집이 가득한 기묘한 거리를 보았다. 폭발과도 같은 섬광이 모든 영상을 덮어버리면서 그는 현실로 돌아왔다. 이제 그의 눈에 비친 12사도는 거대한 빛의 덩어리로 보였다. 그 빛은 찬란한 위협으로 가득 찼고, 다가가기만 해도 설레는 미지의 지혜로 충만했다. 
권윤현은 땅을 짚고 일어나 여자들을 버리고 빛 가운데로 걸어갔다.
"12사도께 아뢰오! 저는 천승도를 대신할 사람이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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