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자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출판 : 현대문학
출간 : 16.01.11
장점과 단점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장단점'보다는 '특성'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는 쪽으로 흘러가게 된다. 어느 것이 장이고 단이냐를 나누는 기준은 상황과 목적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활용하느냐, 어떤 위치에 갖다 놓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는 많은 물질들처럼, 장단점 역시도 그저 하나의 특성이라고 봐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이런 흰소리를 하는 이유는-
히가시노 게이고만큼 꾸준하게 다작하는 작가는 정말 드물기 때문이다.
그를 보고 있으면 '소설 쓰기'란 영감과 예술의 영역이라기보다 구조와 스킬의 영역이란 생각마저 든다. 혹자는 반전을 위한 반전이라고 평할지도 모르겠으나- 100편이 넘어가는 소설들을 일정 수준 이상의 완결성, 관심 가는 사회 현상을 자연스럽게 녹아든 배경, 반전이 있는 사건과 매력 있는 캐릭터까지 갖춰 발표한다는 건 그 자체로 '기프트 gift'다. 히가시노 게이고에게는 케이스 별로 일종의 '양식'이 있어서, 소재만 발견하면 이야기가 스르륵 써지는 건 아닐까 싶어지고 만다.
소수의 '명작'이냐, 다수의 '평작'이냐-
전자가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겠지만 -나 역시 이쪽에 가깝지만-.
다작 작가만이 보여줄 수 있는 뛰어남 역시 틀림없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점묘화나 모자이크화처럼, 하나하나의 점만으로는 알 수 없는 거대함이.
<라플라스의 마녀>는 암세포를 활용한 뇌세포의 재생이라는 뉴로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한다. 하지만 의료 소송이나 뇌 질환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 기술을 활용해 뇌 수술을 받은 이들 중 일부에게서 나타난 '이능 異能'에 관한 이야기이자, '보여지고 싶은 자신'과 '실제 자신' 사이의 간극을 충격적인 방법으로 메우려 했던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다.
밝혀진 '변수'는 더 이상 변수가 아닌 상수의 영역으로 이동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우하라 마도카나 아마카스 겐토에게 특정된 시공간에서의 물리현상은 그런 상수의 세계다. '어떻게?' '어째서?'를 설명하기가 도리어 어려운.
하지만 대다수의 인간에게 세계란 변수를 기반으로 이루어진 미지의 영역이다. 아마카스 사이세이는 그 변수들을 자신이 지정한 수들로 치환하고 싶었다. 그것이 타인에게 고통이 될지라도.
그리고, 자유의지로 행동한다고 믿는 개개인들이 모인 사회는- 개인이라는 원자로 작동되는 거대한 회로이자 패턴이 된다. 동력이 존재하는 한 전체는 생명력을 가지고 변화할 수 있다. 그 변화의 끝은 어떤 그림을 보여줄 것인가-
작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그 지점이 아닐까.
그렇게 읽었다.
- 그 전화는 다케오 도오루에게는 그야말로 뜻하지 않은 행운이었다.
- 근무하던 경호보안 회사와의 계약이 끊기고 두 달쯤 된 참이었다. 회사에서 재계약을 해주지 않은 건 건강진단 결과가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산 수치가 규정보다 높게 나왔다. "여차할 때 통풍 증세가 나타나면 곤란하잖아"라고 인사부 담당자는 말했다. 건강관리에 유념해 곧바로 수치를 떨어뜨리도록 하겠다고 버텨봤지만 결국 들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아마 요산 수치와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회사의 실적이 전혀 호전되지 않는 것에 속을 끓이던 간부들이 경비 절감에 나선 것일 터였다.
- 곧바로 일거리를 찾아봤지만 좀체 자리가 나지 않았다. 다케오의 장점이라면 큰 체격과 전직 경찰이라는 경력뿐이다. 일을 찾다 보면 역시 경호 보안 업체 쪽이었다. 하지만 사십 대 후반이라는 나이가 걸림돌이었다. 최소한 두세 살만 젊어도 좋았을 텐데,라고 노골적으로 말한 인사 담당자도 있었다.
- 경찰을 사직한 이유에 대해 간단히 '가정 사정'이라는 설명만으로 끝내버린 것도 그리 좋지 않은 인상을 주었는지 모른다. 지방 경찰서에 10년 가까이 근무했지만, 상사의 거듭되는 부하 여경에 대한 눈꼴사나운 성추행을 넌지시 지적했더니 그 앙갚음으로 벽지 파출소로 밀려나게 되었고 그게 화가 나서 사표를 냈다,라는 게 진상이었다. 그런 저간 사정을 누누이 늘어놓지 않은 탓에 무슨 문제를 일으켜 경찰에서 잘린 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는 면도 없잖아 있었다.
- 경호 이외의 일은 더욱더 찾기 어려울 것 같았다. 게다가 다케오는 사무 일 쪽으로는 영 소질이 없다. 장부의 숫자는 암호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고향에 내려갈 수밖에 없는가,라고 슬슬 생각하던 참이었다. 다케오의 본가는 미야자키로, 조부 때부터 해오던 양계장을 형이 물려받았다. 그 양계장 일과 늙은 부모님의 봉양을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전부터 얘기가 있었다.
하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고향 떠난 게 열여덟 살 때 일이다. 이제 새삼 고향에 내려가봤자 친한 친구도 없다.
그러던 차에 이번 전화가 걸려 왔다.
- "아직 채용이 결정된 건 아니니까요."
세상 만만하게 되는 일이 없다. 실례합니다,라고 말하고 다케오는 소파에 앉았다.
테이블에 서류 몇 장이 놓여 있었다. 그중 한 장에는 다케오의 얼굴 사진이 붙어 있었다. 자잘한 글씨로 적혀 있는 건 그의 경력 사항일 것이다. 이런 것도 역시 이전의 경호보안 회사에서 훔쳐 온 모양이다.
"묻지 않으시는군요." 기리미야 레이가 어질러진 서류를 정리하면서 물었다. "방금 그분이 누구인지."
"물어보는 게 좋았습니까?"
그의 반문에 기리미야 레이는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아뇨, 그게 다케오 씨의 장점이에요. 공연히 뭔가를 알려고 하지 않으시죠. 제가 다케오 씨를 추천한 이유 중 하나예요."
"경호 대상이 아닌 사람에 대해 알아봤자 별 의미도 없으니까요."
"하지만 개중에는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 "그나저나 지난번에 하신 일의 내용은 기억하고 계세요?"
"물론이지요. 가방을 든 남자를 뉴욕까지 경호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가방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다케오 씨는 한 번도 묻지 않으셨어요. 궁금해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죠."
"상당히 고가의 물건이라는 얘기는 회사에서 들었어요. 나 한 사람의 목숨쯤으로는 감당이 안 될 정도라는 말도."
"그게 어떤 것인지, 알고 싶지 않으셨어요?"
다케오는 어깨를 으쓱 쳐들었다.
"위험한 물건만 아니라면 뭐든 상관없어요."
기리미야 레이는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런 자세가 아주 중요합니다. 알고 싶기는 한데 일을 위해 호기심을 억누르는 것뿐이라면 저희로서는 좀 불안하거든요."
아무래도 이번 일 역시 상당히 민감한 업무인 모양이다. 공공연히 밝힐 수 없는 '뭔가'를 지키라는 뜻일 것이다.
- 그가 입을 다물고 있자 기리미야 레이가 말했다.
"그때 그건 소수 素數였어요."
"소수?"
"수학의 소수 2나 3이나 5처럼 1과 그 자신 이외에는 나누어지지 않는 숫자예요. 그때 가방 속에는 어떤 소수를 기록한 것이 들어 있었어요. 단지 단위 수가 엄청나게 큰 숫자였죠. 슈퍼컴퓨터를 사용해도 간단히는 발견할 수 없는 숫자예요. 현재 그런 소수가 정보의 암호화에 사용된다는 건 알고 계십니까?"
"들은 적은 있어요. 어떤 구조인지는 모르지만."
그런 건 설명을 들어봤자 아마 이해하지도 못할 터였다.
- "암호화된 정보를 원래대로 되돌리는 데는 그 소수가 필요합니다. 즉 대단히 중요한 것이죠. 수송하는 데도 엄중한 주의가 필요해요. 그래서 그쪽 회사에 경호를 의뢰했었어요."
"흠." 다케오는 고개를 끄덕이고 기리미야 레이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래서요?"
그녀는 웃음을 띤 채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별로 관심이 없으신 것 같네요."
- 마도카가 됐어요, 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뛰어도 아프진 않아요?" 다케오의 허리께를 가리키며 한 말이었다.
"아프다니, 어디가?"
"허리요, 오른쪽 허리. 요통이 있잖아요."
딱 잘라 말하는 바람에 다케오는 놀랐다. 맞는 말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요통에 시달려왔다.
"어떻게 알았지?"
"보면 알아요. 몸의 균형이 무너져 있거든요. 그나저나 어때요, 뛸 수 있어요? 여차할 때 뛰지 못하는 보디가드라면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요?"
그녀의 말에 기리미야 레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다케오는 자신의 가슴팍을 툭 쳤다.
"문제없어. 분명 요통은 내 지병이지만 평소에 충분히 케어하고 있으니까."
흥 하는 콧소리를 내더니 마도카는 손을 들어 다케오의 입가를 가리켰다.
"케어도 좋지만 치과에 가시는 게 더 빠를 걸요? 몸의 균형이 무너진건 위아래 이가 잘 맞물리지 않은 게 원인이니까요."
다케오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턱에 손을 댔다. 이가 맞물리지 않는다니, 그런 건 여태까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마도카는 손을 내리고 "이분, 좋아요"라고 기리미야 레이에게 말하더니 빙글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그 모습을 다케오는 멍하니 지켜보았다.
- 노파심에 일일이 응해줄 만큼 경찰도 한가하지는 않다.
그렇기는 해도 이런 장문의 편지를 받아놓고 아무 액션도 취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만에 하나라도 뭔가 일이 터졌을 경우, 사회적으로 엄청난 비난이 떨어질 터였다. 전혀 내키지는 않지만 나카오카는 일단 편지를 보낸 할머니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 편지 말미에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 미즈키 미요시가 사는 노인 요양 맨션은 조후 시에 있었다. 식당이며 대형 목욕탕, 케어센터 같은 시설이 각 동별로 있었지만 그것만 빼면 평범한 맨션과 전혀 다를 게 없었다. 오히려 더 고급스러운 편에 속할지도 모른다. 나카오카는 미팅룸이라고 불리는 작은 회의실에서 미즈키 미요시를 만났는데 그녀의 말에 따르면 방은 꽤 널찍한 원룸이라 침대와 테이블과 소파를 넉넉히 놓고 지낼 정도라고 했다. 화장실과 욕실은 물론, 주방도 딸려 있다는 것이다.
"7년 전에 입주했어요. 우리 아들 요시로가 비용을 다 대줬지요."
자그마한 몸집에 얼굴도 작디작은 미즈키 미요시는 흐뭇한 듯이 말했다.
- 얘기를 들어보니 분양을 받은 게 아니라 16년분의 임대료를 처음 입주 때 일시불로 낸 것이라고 했다. 나카오카는 머릿속에서 재빨리 계산해 보고 이곳이라면 4천만 엔은 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미즈키 미요시가 자랑스러운 얼굴을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 내내 웃음이 떠나지 않던 미즈키 미요시는 나카오카가 편지 얘기를 꺼내자 얼굴의 주름이 깊어질 만큼 입을 삐죽거렸다.
"정말 걱정, 걱정이에요. 머지않아 독약이라도 먹이는 게 아닌지."
- "이상과 같이 로이어는 CO2 농도가 500ppm 이하였던 시대에 전 세계적으로 빙상이 발달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한편으로 1,000ppm 이상으로 추정된 시기에는 지구가 예외 없이 온난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지구화학의 발상으로 CO2 농도의 온실효과와 기후의 관계에 대해 추적한 연구는 그 밖에도 몇 가지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은 현생대 전, 약 7억 년 전 무렵의 스노볼 어스 Snowball Earth, 즉 전 지구 동결이라는 가설, 그리고 5500만 년 전의 급격한 온난화 사건, 4000만 년 전 이후의 한랭화와 히말라야의 융기와의 관계를 논한 레이모 가설 등입니다. 다만 위의 가설들은 찬반양론의 논문이 지속적으로 발표되고 있기 때문에 아직 답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음 수업에서는 지구화학적 사실과 그 해석을 알아보기 위해 스노볼 어스 가설과 레이모 가설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 "지구 대기의 성분을 모두 화학식으로 표기하라. 그중 온실효과가 있는 성분은 어느 것인가. 그리고 그중 가장 농도가 높은 성분은 어느 것인가... 어떻습니까?"
"응, 좋은데?" 아오에는 눈썹 옆을 긁적였다. "딱 좋은 함정이야. 좀모자란 학생이라면 얼른 CO2라고 써내겠지."
- CO2는 지구온난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성분이지만, 압도적으로 농도가 높은 것은 H2O, 즉 수증기다. 실은 수증기에도 온실효과가 있는 것이다.
- "그럼 다음 문제입니다. 톨루엔을 지름 1.6밀리미터, 길이 50밀리미터의 가느다란 관이 달린 확산 튜브에 0.15그램을 넣었다. 이 확산 튜브를 섭씨 35도의 항온조에 설치하고, 확산 튜브를 설치한 실험용 상자에 0.5..."
오쿠니시 데쓰코가 거기까지 읽었을 때, 책상 위의 전화가 울렸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수화기를 들었다.
- "유족들은 뭐라고 했습니까?"
"근데 그게요, 아직 가족과 연락이 안 되고 있다네요?"
"그래요? 그러면 유체는 지금 어디에?"
"아마 현의 대학병원에 있을 겁니다. 부검을 끝낸 뒤에 그대로 안치해 둔 모양이에요. 가족에게 연락이 닿지 않아 경찰도 난처해하면서 인수해 갈 사람을 찾는 중이래요."
"혼자 살던 사람인가. 그렇다면 일과 관련된 쪽으로 알아보는 수밖에 없겠군요.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이에요?"
"그게 말이죠." 우치카와는 그 즉시 말을 어물거렸다. "알 수가 없어요. 소지한 명함에는 일단 배우라고 나와 있다는데..."
- 우치카와는 다시 수첩을 들여다보며 '나스노 고'라는 이름의 배우였다고 알려주었다. 분명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이름이었다. 본명은 '모리모토 고로'라고 하는 모양이었다. 아오에는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해 보았다. 몇 가지가 나오기는 했지만 하나같이 오래된 정보들이었다.
- 인터넷에 올라온 이미지는 꽤 오래전 것이었다. 험상궂은 얼굴 생김새인데도 연예인답게 세련된 분위기가 있었다.
- 이 물음에 마도카는 부루퉁한 얼굴이 되었다.
"자기소개를 할 때, 아버지에 대해서도 꼭 말해야 돼요?"
아오에는 말문이 턱 막혔다. 반론이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마도카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 "아카쿠마 온천 여관의 여주인에게서 들었어. 이곳 프런트에서도 들었고. 여주인 말에 의하면 그 청년이 네 친구라고 했다던데?"
마도카는 스마트폰을 꺼내 빠른 손놀림으로 터치한 뒤에 아오에 쪽으로 화면을 내보였다. 스무 살 전후일까. 예민해 보이는 청년의 웃는 얼굴이 찍혀 있었다.
"아주 소중한 친구예요. 꼭 찾아야 해요."
"왜, 실종이라도 됐나?"
"뭐, 그런 셈이죠. 그래서 좀 도와주셨으면 해요."
마도카는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 말에는 웬일로 정감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아무래도 적당히 둘러대는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고 아오에는 느꼈다.
-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겠지만..."
고맙네요 라고 말하고 마도카는 부츠를 신기 시작했다. 아오에는 초조했다. 이대로 가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위험하기 때문에,라는 것도 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여기서 이렇게 헤어지면 다시는 이 여학생을 만날 수 없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만나지 못한다면 맹렬히 커져버린 자신의 호기심은 영원히 허공에 떠버린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
- "갈게, 나도 함께 간다고. 젊은 여자 혼자서는 위험해. 나와 같이 못 가겠다면 경찰에 신고할 거야. 자, 어떻게 할래?"
그녀는 곤혹스러움과 망설임이 뒤섞인 표정을 보였다. 하지만 불쾌해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 아오에로서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윽고 마도카의 입이 움직였다. "그럼 빨리 준비하세요."
- "조금 전까지 눈이 내렸잖아. 산책로에도 쌓여 있어. 이런 곳을 걸어가면 우리 발자국이 줄줄이 찍히게 돼."
"아무렴 어때요? 우리 발자국인 줄 알 리도 없고."
"그래도 누군가 들어갔다는 걸 알고 한바탕 시끄러워질 거야."
"아뇨, 괜찮아요."
마도카는 전혀 개의치 않는 기색으로 산책로를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녀의 부츠 발자국이 또렷하게 찍혔다. 안절부절 못하면서도 아오에는 그 뒤를 따라갔다..
- 바람도 없어서 산책로는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귀에 들어오는 것은 두 사람이 눈을 밟는 소리뿐이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것은 흰 눈이 덮인 나무들뿐. 주변이 온통 새하얀 색깔이어서 손전등 불빛은 상상 이상으로 멀리 퍼져나갔다. 어둠 속에 떠오른 눈경치는 실로 환상적이었다.
- "반대쪽? 거기까지는 어떻게 왔는데요? 버스든 뭐든, 운행하는 거예요?"
"그런 건 없다고 했어. 탈 수 있는 건 택시뿐인데 그런 어중간한 곳에서 내리는 손님은 없다는 거야. 내가 탔던 택시 운전기사가 이상하다고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어."
마도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오에도 새삼 의아한 마음이 깊어졌다. 피해자는 왜 그런 짓을 했을까. 굳이 온천가 반대쪽의 산책로로 가다니,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나저나 마음에 걸리는 건 역시 마도카의 친구라는 청년이다. 황화수소 사고와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일순 머리를 스친 것은 그 청년이 이번 사고를 일으킨 게 아닌가 하는 상상이었다. 그렇다고 하면 마도카가 사고가 일어난 장소를 알아보고 다니는 것도 설명이 된다.
- 하지만, 하고 아오에 자신의 지식이 즉각 그런 상상을 부정했다. 그런 일은 있을 리 없다. 인위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사고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카쿠마 온천의 경우라면 형사 나카오카가 말했던 대로 강제적인 방법도 혹시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번은 무리다. 피해자는 달랑 혼자였다. 발자국은 한 사람 것밖에 없었다. 무슨 본격 미스터리 소설도 아니고, 범인이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눈 위를 이동할 방법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도카가 "아, 저건가?"라면서 자신의 손전등을 앞쪽으로 향했다. 아오에도 그쪽으로 시선을 던졌지만 벤치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 단 그녀의 사랑을 얻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지 "그 여자는 내 재산에 흘렸고 나는 돈으로 치사토를 사들인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자신들의 결혼을 평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어머니 미즈키 미시의 편지에 적혀 있었던 내용과도 합치한다.
- 문제의 미즈키 치사토는 니가타 현 출신으로, 고등학교 졸업 후 도쿄에 올라왔다. 롯폰기의 클럽에서 일하기 시작했지만 곧바로 긴자로 옮겼다. '레드'는 긴자에서 두 번째로 일하게 된 바였다. 호스티스로서의 이름은 계속 '레이카'를 사용했다. 긴자로 옮긴 이유에 대해 치사토는 친한 호스티스에게 "돈 많은 노인네를 사귀고 싶어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롯폰기에도 부자가 많지만 대부분 나이가 젊어서 안 된다는 것이다.
"아직 젊은 축이면 그 남자가 늙었을 때는 나도 노인이 돼. 노인이 노인을 돌본다는 건 너무 힘들어. 어차피 노인을 모셔야 한다면 그나마 내가 젊을 때가 낫겠지. 남자가 사망했을 때, 나는 아직 충분히 인생을 즐길 수 있는 나이잖아. 게다가 상속한 유산으로 풍족하게 지낼 수 있어. 어때, 최고잖아?"
그 이야기에 그것도 그렇겠다고 묘하게 납득해 버렸다,라고 나카오카가 만난 호스티스는 말했다.
- 치사토가 왜 그런 극단적인 인생 계획을 세웠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실제로 그녀는 자산가이면서 혼자 사는 노인 손님을 만나면 상당히 적극적으로 접근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노골적으로 색기를 드러내는 게 아니라 그리 표 나지 않게 배려해 주면서도 상대에게 마음이 분명하게 전달되도록 어필하는 것이 그녀의 방법이었다.
- 신문을 덮고 "어떻게 생각해?"라고 조교에게 물었다.
"딱히 문제는 없는 거 같은데요? 타당한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그거야. 타당하다고 하면 듣기야 좋지만 한마디로 두루뭉술 무난한 얘기라는 뜻이야. 일부러 현지까지 갔는데 이 정도 코멘트밖에 못했다는 건 전문가로서 실격이라고 해야겠지."
"그렇게까지 자책하실 건 없죠. 기껏해야 신문인데."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한심해. 자네니까 솔직히 말하지만, 사실은 불가사의한 점이 너무 많아서 원인이 뭔지 도통 알 수가 없더라고.”
- "그래요?" 오쿠니시 데쓰코는 희미하게 미간을 좁혔다. "불가사의하다니, 이를테면 어떤 점이?"
"황화수소 냄새. 이 기사에도 나왔지만, 그 달걀 썩은 듯한 냄새, 이번 현장 부근에서는 여태까지 그런 냄새가 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거야.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인 것이 애초에 그런 험한 장소에 산책로 같은 걸 만들 리가 없지. 그 지역 사람들에게 물어봤는데, 산책로 주변은 어디든 초목이 무성하게 잘 자랐고 야생동물의 사체가 자주 발견되었다든가 하는 일도 없었대. 만일 거기에 황화수소가 분출되는 곳이 있었다면 식물의 생육이 나빠지고 동물도 더러 죽어 있었을 텐데 말이야. 어때, 뭔가 좀 이상하지?"
오쿠니시 데쓰코는 안경을 손끝으로 밀어 올렸다.
-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돌아와 혼자 식탁을 마주하고 카레를 먹었다. 어제는 햄버거, 그저께는 돈가스, 그 전날은 분명 새우튀김이었다. 벌써 몇 년 전부터 아오에 가의 메뉴는 아들 소타가 좋아하는 음식을 최우선으로 하고 있다. 찌개나 나물 반찬 같은 건 한참 동안 먹어본 적이 없다. 소타가 싫어하기 때문이다.
아들과 함께 먼저 저녁을 먹은 아내는 소파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엄마가 저런 모습이니 아들 소타에게 주의를 줄 수도 없다. 휴대전화 시절부터 그런 기미가 있긴 했지만 스마트폰은 아예 가정에서 대화를 앗아갔다. 최근 들어 아오에는 아들의 얼굴을 정면으로 본 적이 없다. 목소리조차 제대로 들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저 건강하게 지내주는 것만도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 카레라이스를 입에 떠 넣으며 학교 교수실에서 읽은 블로그 글을 다시 떠올렸다. 그것은 아마카스 사이세이의 블로그였다. 위키 백과사전의 '바깥 고리'에 <NON-SUGAR LIFE(아마카스 사이세이의 근황)>이라는 블로그가 링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걸 클릭했더니 즉시 연결되었다. 틀림없는 아마카스 사이세이의 블로그였다. 하지만 날짜는 벌써 6년 전 것이었다. 톱 페이지의 글제목은 '잠시 동안의 이별'이었다. 슬슬 읽다 보니 상당히 심각한 분위기의 글이어서 당황스러웠다.
- [잠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혼자가 되고 싶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모른다.
여태껏 잃어버린 가족에 대해서만 생각해 왔다. 할 일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을 생각하며 이 블로그 글을 줄곧 써 내려왔다. 어떤 형태로든 나와 그들의 일을 남겨두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그다음 단계를 생각할 때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가족은 나의 소중한 보물이었으나 이제는 어차피 과거일 뿐이다. 저세상으로 떠난 유카코와 모에는 물론이고, 기적적으로 회복한 겐토조차 나에게는 과거가 되어버렸다. 나에게 아들이라는 존재는 지금의 겐토가 아니다. 지금의 겐토에게 내가 아버지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인간은 과거만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는 없다. 한 걸음씩이라도 좋으니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러면 분명 새로운 뭔가가 차츰 눈에 보이리라. 확증은 없으나 그렇게 믿는 수밖에 없다.
어디로 갈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아무튼 지금 이 자리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어느 날인가 다시 영화를 찍을 수 있으면 좋겠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든,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내가 영화인이라는 것만은 변하지 않는다. 드디어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하긴 그게 언제가 될지, 지금의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어쩌면 아직 좀 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나의 가족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고마워, 유카코, 고마워, 모에. 그리고 고맙다, 겐토.]
- 아내와 딸을 잃은 슬픔이 얼마나 클지, 자식을 둔 아오에로서도 상상이 잘 안 되었지만 아마도 악몽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자살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음 글을 보니 제목이 딱 맞힌 것처럼 '죽음만을 생각하다'였다.
- [경찰서 영안실에서 유카코와 모에의 유체를 대면했다. 두 사람 모두 파자마 차림이었다. 그 파자마는 눈에 익었지만 유체를 보고 그게 내 아내와 딸이라는 생각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정신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만일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황화수소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부디 당장 중지하라고 말하고 싶다. 꼭 죽고 싶다면 다른 방법을 선택하는 게 좋다. 황화수소로 편안히 죽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코 거짓이다. 거짓이 아니라면 그토록 모습이 변해버릴 리 없다. 피부 색깔까지 인간의 그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상황을 설명해 준 형사의 말에 의하면, 일단 변사였기 때문에 부검에 들어갔다고 한다. 하지만 황화수소 중독사라는 건 틀림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도 할 수 없었다. 이야깃거리가 고갈되어 버린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똑같은 이야기를 되풀이했지만 점점 그것도 허망해졌다.
나는 최근의 겐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학교에 어떤 친구가 있는지, 평소에 무엇을 하고 노는지, 먹을 것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앞으로의 꿈은 무엇인지, 어처구니가 없을 만큼 나는 무지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인 것이, 나는 몇 년째 가정을 돌아보지 않는 생활을 해왔다. 집안일은 모두 아내에게 떠넘기고 영화 제작에만 힘을 기울였다. 그뿐인가, 그런 내 삶의 방식에 자부심마저 품고 있었다. 참으로 어리석은 인간이라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아내 유카코에 대해서도 내가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 자문해 보니 실로 미심쩍었다. 그녀와 마지막으로 여유롭게 대화를 나눈 것이 언제인지조차 분명치 않은 것이다. 예전에는 나에게 이런저런 일을 상의하기도 했었다. 아이 키우기에 관한 고민을 털어놓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런 일이 없어졌다. 상의할 일이나 고민거리가 사라진 건 아닐 것이다. 분명 집안일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 남편에게 정나미가 떨어져 힘들 때도 자기 혼자 해결책을 찾거나 다른 누군가와 상의했을 게 틀림없다.]
- 753 : 자녀의 성장을 축하하는 행사. 아들은 3세와 5세, 딸은 3세와 7세 되는 해의 11월 15일 예 전통 옷을 차려입고 신께 참배한다.
- [형사에게서 자살 동기에 대해 짐작하는 것이 없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던 것은 머리가 혼란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모에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니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거기에 생각이 이르러서야 나는 깨달았다. 나는 이번 사건에서 가족을 잃은 것이 아니다. 이미 오래전에 가족들은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떠나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그런 사태를 불러들인 장본인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사건 이후, 나는 수없이 눈물을 흘렸지만, 실은 울 자격조차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아내와 딸은 죽어버렸고 아들은 의식이 없다. 이제 더 이상 어떻게도 해볼 수 없는 건가.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한 가지 결론에 가닿았다. 그것은 지금이야말로 내 가족을 되찾자는 것이었다. 아내와 딸과 함께 사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 하지만 가족이었던 날들을 되찾는 것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유카코와 모에, 그리고 겐토에 대해 알아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 우하라 젠타로가 들어왔다. 이제 안경은 쓰지 않았다. 두 사람에게 앉으라는 듯 오른손을 들더니 의자를 당겨 자리를 잡았다.
"어땠습니까." 우하라는 다케오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내 대답에 뭔가 문제는 없었어요?"
"전혀 아무 문제도 없었습니다. 매우 타당한 대답이었어요. 형사가 지금 이 자리에서 마도카에게 전화를 걸어달라고 했을 때는 저도 좀 당황했지만요."
"음, 허를 찔렸죠. 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마도카에게 전화해 봤자 연결되지 않는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으니까.”
"현명한 결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전에 살인 사건 수사인지 아닌지 확인하라는 충고가 아주 좋았어요. 덕분에 나도 각오를 했죠. 근데 왜 그런 질문을 하라고 했어요?"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는, 형사가 마도카를 용의자로 보느냐 아니냐를 확인하는 겁니다. 살인 사건이라면 반드시 알리바이를 확인했겠지요. 하지만 그는 그런 질문은 일절 하지 않았어요. 즉 마도카는 용의자는 아니라는 얘깁니다."
"오호, 그렇군요. 또 하나는?"
"사건의 유무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하려는 것입니다. 그 형사는 아자부기타 경찰서 소속이었어요. 만일 살인 사건 수사라면 보통 경시청 수사 1과에서 주도합니다. 그러니까 현시점에서는 아직 사건성을 확인하지 못했고 기껏해야 내사 內査 단계일 겁니다.”
"아, 그렇군. 역시 대단하시네."
우하라는 감탄한 듯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지만, 별로 대단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다케오로서는 시선을 떨굴 수밖에 없었다.
- "그러면 이제 문제는 우리가 마도카를 찾아낼 만한 단서를 얻어냈느냐는 것이로군. 나카오카 형사의 말속에 뭔가 힌트가 있었던가?"
"우선은 어떤 사고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리미야 레이가 태블릿 단말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중독이라고 했지요? 이를테면 최근 한 달 동안의 신문 기사를 중독이라는 키워드로 검색해 보면..."
액정 화면 위에서 매끈하게 손끝을 움직인 뒤 후우 숨을 내쉬었다.
"70건이 넘는군요."
- 유리 케이스 안을 아오에는 홀린 듯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높이 50센티미터, 폭 40센티미터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도 등재된 인도의 타지마할이지만, 이건 단순한 모형이 아니다. 놀랍게도 레고 블록으로 만든 것이다. 부품 수가 무려 6천 개에 달한다. 처음 가격표를 봤을 때는 저절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28만 엔이 넘는 가격이다. 이런 걸 집안 어디에 놓을 셈이냐고 툴툴거리는 건 고사하고, 우선 신용카드 명세서를 보자마자 아내가 노발대발할 게 분명하다. 그래서 꾹꾹 참으면서 그저 구경만 하기로 했다.
- 아오에의 방에는 다양한 모양의 레고 블록이 천 개 가까이 있다. 모조리 자신을 위해 사들인 것이다. 저녁을 먹은 뒤 위스키 잔을 찔끔찔끔 기울이며 다양한 것을 만들어보는 그 자신만의 취미 활동이다. 좋은 작품이 나왔을 때는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 지난달에 만든 스카이트리 모조품은 제법 괜찮게 나왔다. 하지만 마음이 풀릴 때까지 감상한 뒤에는 해체해야 한다. 완성품을 전시해 둘 만한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 "현재 도쿄 데이코쿠 호텔은 이 모형과는 전혀 다르지요?" 갑자기 가까이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아오에는 흠칫 놀라 옆을 보았다. 검은 정장을 입은 콧날이 뾰족한 여자가 서 있었다. "레고 블록으로 재현한 이 호텔은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대표작으로, 지금은 아이치 현 메이지무라로 이전되었다던데요. 하긴 그것도 현관 부분만 옮긴 것이죠."
"그래도 그 메이지무라 안에서는 가장 큰 건물인데요." 아오에는 말했다.
여자가 그를 돌아보았다.
"네, 저도 그렇게 들었습니다. 아오에 교수님."
처음 보는 여자였지만 가슴이 철렁할 만큼 미인이었다. 아오에는 혈압의 상승을 자각했다.
- 집에 돌아오자 저녁밥이 준비되어 있었다. 지라시즈시였다. 이 또한 소타가 좋아하는 메뉴지만, 햄버거나 카레 같은 것에 비하면 일식을 좋아하는 아오에로서는 감지덕지였다.
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식사를 마치고 제 방에 틀어박혔을 것이다. 아내 게이코는 밥을 차려주고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오늘도 가족 간에 대화가 없는 채 아오에 가의 밤은 깊어갔다.
- 지라시즈시 : 식초와 소금으로 간을 한 밥 위에 생선, 고기, 달걀부침, 양념 채소 등을 얹어 내는 요리.
- 우하라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예언이 아니라 예측입니다. 자세히 보십시오. 겐토 군이 숫자를 말하는 것은 주사위가 손을 떠난 직후예요. 이걸 거꾸로 말하면, 주사위가 아직 손바닥 위에 있을 때는 겐토 군도 어떤 숫자가 나올지 모릅니다. 손을 떠날 때 주사위에 작용하는 힘은 중력, 그리고 거의 무시해도 무방한 공기저항뿐이지요. 그리고 책상에 떨어진 뒤에는 낙하각도, 관성모멘트, 책상과의 반발계수, 책상 표면과의 마찰력 등의 지배를 받으면서 데굴데굴 구르다가 이윽고 정지합니다. 이런 일련의 물리 현상에는 사실상 예측 불가능한 요소는 일절 관여하지 않아요. 그래서 어떤 숫자가 나올지는 주사위가 손을 떠난 순간에 정해집니다. 겐토 군은 그것을 입 밖에 내서 말하는 것이지요."
- 우하라가 말했다.
"이미 다 아셨지요? 왼편 화면에 나온 손의 주인은 겐토 군입니다. 그는 선수가 화살을 쏜 직후에 과녁의 어느 위치에 맞을지 예측한 거예요. 물론 그러기 위한 데이터는 필요합니다. 실은 이 실험 전에 선수에게 몇 번 화살을 쏴달라고 했습니다. 겐토 군은 그 모습을 관찰하는 것으로, 발사된 화살의 탄도 경향, 바람의 영향 등을 뇌에 입력해 나갔죠."
아오에는 새삼 화면을 응시한 뒤에 긴 숨을 내쉬었다.
"믿어지지는 않지만 믿을 수밖에 없네요."
"기적이라고 말했던 것도 그다지 과장은 아니었지요?"
우하라는 태블릿을 터치해 영상을 껐다.
- "하지만 그 전에 잠깐 다른 얘기를 해야겠군요. 예전에 우리 연구실에서 다루었던 엑스퍼트 브레인이라는 것에 대한 얘기입니다."
"엑스퍼트 브레인? 뭔가 난해한 얘기 같군요."
"교수님이라면 간단히 이해하실 겁니다. 나는 당시 뇌의 고차 기능을 분자와 세포 수준에서 분석하는 연구를 하고 있었어요 그 결과, 뇌의 신경 활동과 기억 및 학습의 관계에 대해 상당한 단계까지 해명하는 데 성공했죠. 그래서 그다음으로 주목한 것이 공예품이나 재료 가공 분야에서 수작업을 통해 초인적인 기술을 이뤄낸 명인, 이른바 달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뇌였어요. 몇몇 달인의 협력을 얻어 조사해 본 바, 놀랄 만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들은 복수의 뇌를 갖고 있었어요."
- "물론 이건 비유로서 한 말입니다."
우하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해부학적으로는 일반인의 뇌와 전혀 다르지 않아요. 하지만 일단 작업에 들어가면 그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우선 그들은 약간 복잡한 작업이라도 대뇌의 극히 일부밖에 쓰지 않았어요. 깎고 구부리고 조립하는 등의 작업을 할 때, 보통 사람들은 대뇌를 광범위하게 써야 합니다. 약간 복잡한 작업이라면 뇌의 거의 전역을 써야 해서 누가 옆에서 말을 걸어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지요. 집중력이 뛰어나다고 하면 듣기야 좋지만, 요컨대 정보처리 능력이 한계에 달한 상태인 거예요. 그런 점에서 명인이나 달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정보처리 능력에 여유가 있어서 작업을 하면서도 동시에 다양한 것을 관찰하고 생각해 가면서 그것을 작업에 피드백하는 게 가능합니다. 게다가 좀 더 믿을 수 없는 사실은 그들 자신이 그걸 자각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수많은 정보처리가 무의식 중에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들이 '직인의 감 感'이라고 표현하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아오에는 끄응 신음 소리를 냈다. 명인이나 달인이라고 불리는 직인들이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과학적으로 설명을 듣고 보니 또 다른 박력이 있었다.
- "훈련은 불가결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나는 유전자적 요소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복적인 훈련으로 뇌는 효율성이 뛰어난 신경 회로를 만들어내지만, 그 속도나 성과에는 분명 개인차가 있는 것이지요."
- "아뇨, 이건 아오에 교수님께서도 알아두시는 게 좋아요." 기리미야 레이는 천천히 이쪽 자리로 다가왔다. "마도카에 대한 수술은 우하라 박사님이 처음 말을 꺼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누군가가 그런 제안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마도카 본인이 나서서 실험대가 되기를 희망했던 일이에요."
아오에는 흠칫 몸을 물리며 엇 하는 소리를 냈다.
"설마."
"사실입니다. 제가 직접 마도카에게서 들었으니까요. 왜 그런 수술을 받으려고 하는지 마도카 본인이 내게 얘기했습니다."
기리미야 레이는 숨을 가다듬으려는지 잠시 가슴이 들먹거린 뒤, 마치 중대한 고백이라도 하듯이 말을 이었다.
"나는 라플라스의 마녀가 되고 싶다,라고 했어요."
- 마도카가 머뭇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말을 건넸다. 돌아보니 한 남자애가 이쪽으로 뛰어오는 참이었다. 그가 급하게 소리쳤다.
"우산을 펴!"
"응? 뭐라고?"
마도카는 당황스러웠다.
남자애는 곁으로 다가와 마도카의 손에서 우산을 빼앗았다. 그러고는 잽싸게 펼쳐 들더니 마도카의 머리를 꾹 누르며 말했다.
"빨리 앉아!"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마도카는 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러자마자 트럭 한 대가 바로 옆을 휘익 지나갔고, 다음 순간에는 흙탕물이 우산에 촤아악 튀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남자애는 후우 한숨을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행이다, 라면서 우산을 접었다.
"운전을 진짜 난폭하게 하더라고. 내 예상대로, 물웅덩이를 피하지도 않았고 속도도 줄이지 않았어."
그렇게 말하고는 자아, 라면서 마도카에게 우산을 내밀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우산을 받아 든 마도카에게 남자애는 통로를 가리켰다. 길가에 커다란 물웅덩이가 있었다.
그것을 보고서야 마도카는 이해했다. 트럭 타이어가 빠른 속도로 물웅덩이를 밟고 달려가는 바람에 그 물벼락이 이쪽으로 튄 것이다.
- "어떻게 알았냐고? 나는 그 질문이 제일 괴롭더라. 그냥저냥, 이라는 말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그래?"
똑같은 질문을 받는 일이 많았던 모양이라고 마도카는 내심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런 일이 자주 있다는 뜻인가.
하지만 그런 생각보다 우선 마도카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고마워. 덕분에 물벼락을 피했어."
그리고 마도카는 남자애의 면바지 자락이 젖은 것을 보고,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 "나에 대해서 우하라 박사님에게 아무 말도 못 들었어?"
"아무 말도 못 들었는데?" 마도카는 고개를 저었다. "아빠는 집에 와서는 병원 얘기는 전혀 안 해."
"그렇다면 나도 말하면 안 되겠다. 외부에 발설하지 말라고 하셨거든."
"비밀인 거야?"
"뭐, 그런 셈이지."
그는 어깨를 으쓱 쳐들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공연히 더 궁금해진다.
"절대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는다고 약속해도 안 돼?"
마도카는 한번 더 버텨보았다.
그는 웃음이 담긴 얼굴로 말했다.
"안 되지. 그런 약속은 믿을 게 못 된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대꾸할 수 없었다.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 "자세히 설명하려면 한이 없어. 엄마 쪽은 주스를 끝까지 다 마시려고 했고, 이미 커피를 마셔버린 아빠 쪽은 답답한 듯 테이블을 손끝으로 툭툭 치고 있었어. 아들아이는 따분한 듯 다리를 덜렁덜렁 흔들었고, 그 세 사람 사이에는 별다른 대화가 없었어. 뭐, 대충 그런 거야. 그중 어떤 게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도 없어. 그냥 전체적인 분위기를 통해 감지한 거지. 인간이란 다음 행동으로 옮겨 갈 때, 반드시 일정한 신호를 발하거든 본인들은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겠지만."
마도카는 눈을 깜빡거리며 겐토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런 세세한 것까지 다 관찰했어? 한번 쓰윽 쳐다보기만 했었는데?"
"한번 쓰윽 쳐다보면 충분해."
겐토가 입가를 풀며 웃었다.
- "수학자 라플라스를 아십니까? 풀네임은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 프랑스인이에요."
기리미야 레이가 아오에에게 질문을 던졌다.
"라플라스? 아니, 들은 적이 없는데."
"만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원자의 현재 위치와 운동량을 파악해 내는 지성이 존재한다면 그 존재는 물리학을 활용해 그러한 원자의 시간적 변화를 계산할 수 있기 때문에 과거와 현재의 모든 현상을 설명하고 미래까지 완전하게 예지가 가능하다..."
기리미야 레이는 마치 시를 읊는 것처럼 말을 이어나갔다.
"라플라스는 그런 가설을 세웠습니다. 그 존재에는 나중에 라플라스의 악마'라는 별명이 붙었어요. 겐토 군의 예측 능력은 그 라플라스의 악마와 이미지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죠. 그래서 수리학 연구소에서는 겐토 군의 능력에 대한 연구를 '라플라스 계획'이라고 명명하기로 했습니다."
- "누구에게서 들었느냐고 물어봤더니 겐토 군에게서,라는 대답이 나왔습니다. 분명 겐토 군만은 서약서에 사인한 적이 없었어요. 당연한 일이죠. 우리 연구소는 전적으로 그의 협력을 받아 일을 추진하는 입장이었으니까요."
"지원한 이유에 대해 마도카는 어떻게 말했죠?"
"자신도 겐토 군 같은 능력을 갖고 싶다고 했다는군요. 나비에 스토크스 방정식의 수수께끼를 풀어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다, 라고요."
다시 낯선 단어가 나왔다.
"무슨 방정식이라고요?"
"나비에 스토크스 방정식. 유체역학에 관한, 아직껏 풀리지 않은 난제예요. 장기간의 연구를 통해 겐토 군의 예측 능력이 그 방정식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밝혀졌어요. 그것이 앞으로 좀 더 밝혀진다면 과학은 비약적으로 진보하겠지요. 슈퍼컴퓨터로도 100퍼센트 시뮬레이션이 불가능한 난류를 수학적으로 해석해 낼 수 있게 됩니다. 이론적으로는 100년 후의 날씨까지 알 수 있는 것이죠. 마도카의 어머니의 목숨을 앗아 간 토네이도의 발생도 정확한 예측이 가능하게 됩니다."
- 보는 이에게 뭔가 호소하는 것이 있었다. 천재의 작업이란 이런 것인가 하고 예술에는 문외한인 나카오카도 감각적으로 납득했다.
"아마카스는 그런 아버지를 강하게 의식하는 것 같았어요." 우노가 말했다. "자기도 똑같은 피가 흐를 텐데 그 혈통에 부끄러운 짓은 할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거든요. 자신은 조각가가 되기는 좀 어렵지만 분명 뭔가 해낼 것이고 그건 아마도 영화일 것이다, 그런 식으로 말했습니다."
- "그 블로그는 읽어보셨어요?"
커피를 마시려던 우노는 찻잔을 다시 내려놓고 순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읽어봤어요."
아마카스 사이세이의 블로그 얘기다. 나카오카는 우노에게 연락했을 때, 가능하면 그 블로그 글을 읽고 와달라고 인터넷 주소를 알려주었다.
"어땠습니까?"
- 인테리어 잡지를 보고 있는데 곁에 둔 스마트폰이 울렸다. 액정 화면을 확인하고 치사토는 한 차례 심호흡을 했다. '기무라'라고 찍혀있었기 때문이다. 전화를 연결하고 네,라고 대답했다.
"지금 혼자?"
"응, 집 거실이야. 나 말고는 아무도 없어."
좋아,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치사토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딱히 감출 일도 아니라서 뭐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별 재미도 없다고 생각한 내용에도 그는 표정을 바꿔가며 민감하게 반응을 보여주었다. 이런 손님만 있다면 클럽에서 일하는 것도 훨씬 더 즐거웠을 텐데,라고 옛날 일을 떠올리기도 했다.
"다시 만날 수 있어요? 다음에는 내가 낼게요. 아르바이트비가 들어올 예정이니까."
식사 후에 기무라가 말했다.
"응. 꼭."
치사토는 대답했다. 그저 빈말로 한 대답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떤 예감을 품었다. 언젠가 이 청년과 섹스를 할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요시로와 결혼한 이래, 다른 남자와는 잔 적이 없었다. 별로 그런 욕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고 단순히 그럴 만한 만남이 없었던 것뿐인지도 모른다.
- 그리고 그날은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찾아왔다.
다음에 만나 식사를 한 뒤, 기무라의 청으로 들어간 호텔 바에서 실은 방을 예약해 두었다,라고 그가 말했던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 유혹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었는데, 미안." 카운터석에서 그는 머리를 숙였다. "지난번 식사가 정말 즐거워서 멋진 여자분이라는 생각이 들어버렸어요. 물론 싫으시다면, 뭐 괜찮아요, 앞으로 절대 청하지 않을 테니까."
기무라가 여자를 사귀는 데 익숙한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착실한 성품이라는 건 지난번에 만났을 때 이미 알았다. 나름대로 큰 용기를 내서 하는 말이라는 게 느껴졌다.
- 빵을 꺼내 먹었다. 적당히 단맛을 줄인 빵이라서 꽤 맛있었다.
그러자 겐토가 유난히 단것을 좋아했던 게 생각났다. 연구소에서 두 사람은 기본적으로 따로따로 테스트와 훈련을 받았지만, 휴식 시간은 늘 함께 보냈다. 그런 때에 그는 초콜릿 같은 달콤한 간식을 즐겨 먹곤 했다.
둘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세상에서 오직 두 사람만이 나눌 수 있는 내용도 많았다. 해저의 기복과 리얼타임의 온도 변화를 지구상의 몇 개소에서 모니터 하면 지진의 예지가 가능할 것인가,라는 토론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런 얘기가 무척 즐겁다는 것을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둘만의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겐토가 오랜 세월 동안 깊은 고독감을 품고 살아왔다는 것을 서서히 알게 되었다. 다양한 일들의 예측이 가능하더라도 그것을 공유할 동료가 없다면 도리어 홀로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마도카에게는 겐토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때까지 내내 혼자였다.
- 마침내 얻게 된 동료에게 그는 마음의 문을 열어준 모양이었다. 어느 날, 중대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것은 선뜻 믿을 수 없는 엄청난 얘기였다. 아마카스 가에서 일어난 황화수소 사건에 관한 것이었다. 그건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었다,라는 것이다. 게다가 겐토는 범인을 알고 있다고 했다.
"범인의 입으로 직접 들었어. 그러니까 확실해."
그 범인의 이름을 겐토는 말하지 않았다.
- 우하라 젠타로가 보여준 영상이 뇌리에 되살아났다.
그것은 수컷 마우스가 신생아 마우스를 공격하는 영상이었다.
"이 수컷 마우스는 교미 미경험으로, 당연히 이 신생아 마우스는 친자식은 아닙니다. 이 수컷 마우스만 특이한 것이 아니라 교미 미경혐의 수컷은 신생아 마우스에 대해 예외 없이 이런 공격 행동을 보입니다. 그 원인은 신생아 마우스가 발하는 페로몬에 있어요. 그 페로몬에 의해 수컷 마우스의 서비 신경 회로라는 부분이 활성화되면서 공격 행동을 유발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미를 경험했고 임신한 암컷 마우스와 동거한 경험을 가진 수컷 마우스의 경우에는 페로몬을 감지하는 기관에서 정보 전달이 억제되기 때문에 이런 공격행동은 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새끼를 보호하고 몸을 핥아주는 등, 양육 행동을 하지요. 실제로 이 교미 미경험의 수컷 마우스도 페로몬을 감지하는 기관을 절제해 주면 이렇게 됩니다."
그렇게 말하며 우하라가 보여준 것은 조금 전의 수컷 마우스가 신생아 마우스에게 몸을 비벼대는 영상이었다.
"교미 미경험의 수컷 마우스가 신생아 마우스를 공격하는 것은 그 모친인 암컷 마우스와의 교미 기회를 좀 더 빨리 얻어보려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자식에게 수유하는 동안에는 암컷 마우스의 발정이 억제되기 때문이에요. 한편 아버지가 된 마우스는 제 새끼를 자칫 죽이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공격 행동이 억제됩니다. 어느 쪽이든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자손을 확보하기 위한 행동이지요. 생물학적으로 지극히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그리고 우하라는 아오에에게 옅은 웃음을 건넸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의아하게 생각하시겠지요?"
"아뇨, 나도 어쩐지 짐작이 갑니다. 아마카스 부자의 얘기지요?"
우하라는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와 고개를 끄덕였다.
"부친이 친자식을 죽인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고 물어보면, 사랑스럽기 때문에,라는 게 일반적인 답변이겠지요. 그러면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서 생겨난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근원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뇌예요."
- "자식을 지키기 위해 부모가 양육 행동을 취하는 것은 모든 포유류에 공통된 습성입니다. 그 목적은 자신의 유전자를 보다 효과적으로 남기려는 것이지요. 그 점은 마우스든 인간이든 똑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마우스처럼 신생아에게 공격 행동 따위는 취하지 않고, 페로몬 같은 단순 구조에 행동이 지배되는 일도 없어요. 하지만 마우스가 그렇듯이 인간의 양육 행동, 남성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부성 행동이라는 것을 봐도 결국은 유전적으로 프로그래밍된 것이에요. 그리고 그 프로그램을 편의상, 사랑 혹은 애정이라고 부르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그 프로그램이 고장 나거나 애초에 결락되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양육 행동, 부성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라는 말씀인가요?"
우하라는 깊숙이 고개를 끄덕였다.
- "한 가지만 더 질문해도 될까요?"
아오에는 검지를 세우며 말했다.
"마도카를 라플라스의 마녀로 만든 것에 대해 박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물음에 우하라는 한동안 침묵한 뒤에야 입을 열었다.
"언젠가 마도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빠, 이 세상은 물리법칙에 의해 움직이고 있어,라고."
아오에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무슨 뜻일까요?"
"나도 그렇게 물어봤어요, 무슨 뜻이냐고. 마도카에 의하면, 인간을 하나의 원자로 보면 이 세계를 파악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거예요. 그 일례로, 축제 날의 인파 얘기를 해줬습니다."
- 아오에는 축제 날의 상황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이윽고 깨달았다.
"그런 곳에는 인파의 흐름이 생기지요? 저쪽으로 가는 사람과 이쪽으로 오는 사람의 흐름. 그걸 따라가기 때문에 부딪히지 않고 걸어갈 수 있는 거 아닐까요?"
"네, 맞습니다." 우하라는 말했다. "안내해 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런 흐름이 자연스럽게 생기죠. 왜 그런가. 우선 무질서한 상태를 상상해 볼까요.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을 피하기에 급급해 걸음을 떼기도 힘들 겁니다. 하지만 한 가지 방법을 사용하면 걸어가기가 아주 수월해져요. 즉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 뒤에 따라붙는다,라는 것이죠. 그렇게 하면 굳이 피해 가며 걷지 않아도 돼요. 모두가 그렇게 하다 보면 행렬이 만들어집니다. 맨 앞에 선 사람은 힘이 들겠지만, 그 사람도 누군가의 뒤에 따라붙는 방법을 선택하면 부담이 줄어듭니다. 그리고 이쪽에서 피하는 게 아니라 맞은편에서 오는 사람이 피해가게 하려면 행렬을 굵직하게 만드는 게 효과적이에요. 가는 사람과 오는 사람, 양측의 사람 수가 비슷하면 결과적으로 길을 좌우로 양분하는 인파의 흐름이 생겨납니다."
- "중요한 것은, 아무도 그런 현상을 의식하면서 걸어가는 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무의식 중에 자신에게 가장 편한 방법, 이익이 되는 길을 선택하는 것뿐이지요. 이건 단순히 축제 날의 행렬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사랑이라는 것도 유전적인 프로그래밍의 산물입니다. 개개인은 자유의지에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하지만 인간사회라는 집합체로서 바라볼 경우에는 그 행동을 물리법칙에 적용해 예측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라는 얘기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 것 같아요."
"마도카와 겐토의 눈에는 단순한 물리 현상뿐만 아니라 현대사회가 어디로 나아갈지, 그리고 인류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희미하게나마 보일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단지 예측할 뿐이지요. 최근에 마도카가 크게 변했습니다. 명랑한 모습은 부쩍 줄어들고 염세적이 됐어요. 입 밖에 내지는 않지만 그 아이의 눈에 보이는 것이 그리 바람직한 미래상이 아닌 것이겠지요."
우하라는 혼잣말처럼 내 딸아이에게 참으로 몹쓸 짓을 했다고 중얼거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사람은 꿈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나는 아마카스 사이세이를 비난할 자격이 없어요. 내 딸아이에게서 꿈을 가진 인생을 빼앗았다는 점에서는 그 죄가 똑같이 막중하다고 해야겠지요."
- 우하라 박사의 그 말을 다시금 머릿속에서 되새겨보면서 아오에는 마도카를 생각했다. 몇 번 만났을 뿐이지만, 그 아이가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다.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마카스 겐토를 찾아내기는 했을까.
어디에 있건 부디 무사하기를 빌었다. 아리스가와노미야 공원에서의 일이 눈꺼풀 안에 되살아났다. 그 기적을 꼭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 겐토는 팔을 허공에 대고 후려쳤다.
"진실을 왜곡한 주제에 완벽이라고? 어이가 없네."
"흥, 진실?" 아마카스 사이세이는 한쪽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웃기는 소리를 하는구나. 그렇다면 좀 물어보겠는데, 진실이란 게 뭐지? 그걸 누가 판정하는 건데? 결국은 기록된 것만이 진실이야. 기록되어서 사람들이 인식해 주었을 때, 그게 바로 진실이야. 이 폐허를 봐. 이 건물에는 어떤 진실이 있지?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건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사라져 버린 것은 진실이라고 할 수 없어. 그런 의미에서 대다수의 범용한 인간들은 아무런 진실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리는 거야. 인터넷을 봐. 타인의 험담과 하소연만 가득하지? 공격의 창끝을 겨눌 곳을 찾아내면 앞다투어 비난을 퍼붓고 있어. 스스로는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그러면서 제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마냥 불평만 늘어놓는 인간들이 어떤 진실을 만들어낼 수 있지? 진실이라는 단어로는 알아듣기 힘들다면 역사라고 말을 바꿔도 좋아. 그런 인간들은 태어나든 태어나지 않았든 이 세상에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해 너희도 마찬가지였어. 이 세상에 없어도 무방한 인간들이었단 말이야. 그러니 행복한 줄 알아. 내 영화에 등장인물이라는 형태로 영원히 남겨지게 됐잖아. 게다가 훌륭한 인간으로."
- "부디 양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런 말씀을 전하는 역할은 제가 자원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이번 일로 교수님께 큰 폐를 끼쳤는데, 그런 저간 사정을 알지 못하는 공무원들이 혹시라도 명령하듯이 다그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가까운 시일 내에 양쪽 온천지에서 아오에에게 의견을 청해 올 것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부디 진실은 가슴속에만 담아두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악질적인 장난이었다는 것으로 처리하면 온천지 쪽은 모든 문제가 풀립니다. 그렇게 매듭을 짓는 것으로, 어떠신지요."
담담히 말하는 기리미야 레이에게 절대로 안 된다고 자기주장을 고수할 생각은 없었다. 잘 알겠다고 말한 다음에 아오에는 물었다. 아마카스 부자는 어떻게 되느냐,라고.
그건 잘 모르겠다고 그녀는 대답했다.
- 그런 악행을 저지르고도 아마카스 사이세이는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것인가. 그건 불합리한 일이라고 여기면서도 한편으로, 그자가 앞으로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지 생각하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자에게 살아갈 의미 따위, 과연 있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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