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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 마력의 태동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by 일루젼 2026. 3. 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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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출판 : 현대문학
출간 : 19.01.30


       

한낮에는 조금 덥고, 새벽에는 아직 차가운.

일정에 따라 의복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하는 계절.

변화를 예감하는 일렁임과 혼란.

 

<마력의 태동>은 <라플라스의 마녀>의 스핀오프 작품이다.

우하라 마도카라는 동일 인물이 등장하지만, 시간대는 <라플라스의 마녀>의 중심 사건 전 또는 직후.

구도 나유타라는 침구사와 함께 여러 사람들의 고민에 도움을 주는 에피소드들이 이어진다.

 

하지만.

<마력의 태동>은 마도카가 <라플라스의 마녀>로 깨어나기 위한 각성 전 단계를 의미하는 것일까?

완전히 동떨어진 이야기인 줄만 알았던 에피소드들이 <라플라스의 마녀> 이면을 비추는 조각들이었다니. 보이는 것과 보여지는 것, 감추고 싶은 것과 존재하는 것들이 뒤섞이고 부서진다.

 

개인적으로는, 아주 만족스럽진 않았다. 다만 한 에피소드가 아주 인상적이었어서- 평균으로 따진다면 아슬아슬하게 호에 걸치는 작품이었다고 하겠다.

 

봄 야구는 사람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너클볼러 하면 RA디키, 조오금 억지를 부려서 노경은까지.

하지만 <마력의 태동>을 읽는 동안 내가 머리 속에 떠올렸던 건 일본과 미국을 마구로 휩쓸었던 BK 김병현이다.

한바탕 잘 놀았던, 지금 와서는 꿈만 같았던 어느 날들을 추억하며.

 

 


   

 

- 역삼각형의 등에 군살이라고는 전혀 없고, 그 대신 멋진 근육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다. 이 모습을 볼 때마다 나유타는 항상 비행기 날개가 떠오르곤 한다. 이 등 근육이 파워뿐만 아니라 혹시 양력까지 만들어내는 거 아닌가,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상대는 침대에 엎드린 자세로 누워 있었다. 나유타는 그 등줄기에서 허리에 걸친 부분을 두 손으로 가볍게 눌러보았다. 곧바로 위화감이 느껴졌다.
"어때?" 등의 주인인 사카야 유키히로가 그에게 물었다.
"왼편에 염증이 있어요."
"역시 그렇군."
나유타는 허리에서 양쪽 허벅지까지 손바닥으로 훑어 내렸다.

- "전체적으로 왼쪽이 경직됐어요. 평소에 오른쪽 무릎을 잘 안 쓰게 되지 않나요?"
사카야가 한숨을 내쉬는 바람에 둥이 살짝 들먹였다.
"그랬던 것 같아. 지난번 체력 테스트 때도 트레이너가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 오른쪽 근육의 힘이 떨어졌다고. 무의식 중에 힘을 주지 않으려고 한다는 거야. 경기 때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나름대로 조심하려고는 했는데."

- "무의식이라는 게 아무래도 조절하기가 힘들죠."
"정말 그렇다니까. 하지만 뭐, 어쩔 수 없지. 이미 만신창이의 고물이야. 이런 몸으로 젊은 친구들과 경쟁하겠다는 게 애초에 무리한 얘기지."
사카야의 입버릇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런 말을 꺼낼 때마다 나유타가 하는 대응은 정해져 있다.
"무슨 말씀이세요? 그런 소리를 하면서도 다시 다음 시합에서는 시상대를 노리잖아요. 게다가 한가운데를."

- 평소 같으면 "그야 그렇지"라는 넉살 좋은 말이 돌아올 터였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엎드린 자세 그대로 침묵에 잠겨 있었다.
왜 그러느냐고 굳이 캐묻지 않았다. 운동선수의 심리는 복잡하다.

"자, 그럼 시작할 테니까 왼편이 아래로 가게 돌아누워주세요."

- 잠깐 부탁 좀 하자면서 사카야의 전화가 걸려 온 것은 어젯밤의 일이었다. 그때부터 약간 눈치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목소리에 평소의 도도한 기세가 없었던 것이다. 몸 상태가 상당히 안 좋은 모양이라고 내심 걱정하며 나왔는데 진찰해 본 바로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 컨디션이 영 회복되지 않기 때문이겠지만, 원인은 꼭 몸 상태만은 아니라는 것인가. 


- 살갗을 소독하고 신중하게 차례차례 침을 놓았다. 일반인의 경우에는 환부에 닿으면 침에 엉기는 듯한 저항감이 온다. 하지만 톱클래스 프로 선수의 질 좋은 근육이라면 그런 게 거의 없다. 아무 저항도 없이 침이 쑤욱 들어간다. 하지만 그것이 곧 이상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근육 속 깊숙이 그들 스스로만 자각할 수 있는 미세한 환부가 존재한다. 거기까지 침을 꽂아 넣었을 때, 마침내 희미한 위화감이 손끝에 전해져 온다. 

- 사카야는 이따금 작게 신음했다. 침 끝이 신경을 자극하는 것이다. 나유타가 사카야에게 침을 놓기 시작한 지도 벌써 3년째다. 그의 급소가 어디인지는 이미 훤히 알고 있다.

 
- "같이 온 사람은?"
"없어요. 나 혼자."

마도카는 공기에 된장국을 담기 시작했다. 곁에 놓인 그녀의 쟁반을 보니 달걀프라이와 베이컨, 샐러드 등이 얹혀 있었다.
"그럼 우리, 같이 먹을까? 나도 혼자야."
그녀는 나유타를 올려다보고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 "나유타?"
"이름이 좀 이상하지? 일단 한자도 있는 이름이지만, 그냥 가타카나로 외우면 돼. 명함에도 그렇게 인쇄했으니까."
마도카는 잠시 생각하는 몸짓을 보이더니 "아승기 다음의?"라고 물어 왔다.
"어?"
"억조경해 자양구간 정재극 항하사 아승기 나유타 불가사의 무량대수." 줄줄줄 막힘없이 말하고는 "아승기와 불가사의 사이의 그 나유타 아니에요?"라고 물었다.
나유타는 눈만 깜빡거리며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걸 다 외우고 있어?"
"그냥 머릿속에 입력된 것뿐인데? 아무튼, 그거 맞죠?"

"웅, 딱 맞혔어. 바로 그 나유타야."
"역시."

빙긋이 웃더니 마도카는 샐러드의 방울토마토를 입에 쏙 넣었다.

- 나유타는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그녀가 주문처럼 외운 것은 모두 다 큰 수 數의 단위다. '억조경해'는 말할 것도 없이 '億兆京垓'이고, '항하사 아승기 불가사의 무량대수'는 한자로 '恒河沙 阿僧祇 不可思議 無量大數'라고 쓴다. 그리고 '나유타'는 ‘那由多’다.

- "그거, 본명?"

마도카가 다시 물었다.
"물론이지."
"누가 지어줬어요?"
"어머니가."
"흠, 좋은 이름이네요."
"드문 이름이지만, 나쁘지는 않지? 10의 60 제곱이나 되잖아."

"72 제곱이라는 설도 있죠."
그런 것까지 알고 있나 하고 내심 놀라면서 나유타는 말했다.

"어쨌거나 엄청 큰 숫자야. 기대의 표현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어."
마도카는 고양이를 떠올리게 하는 눈으로 지그시 나유타를 바라본 뒤에 "뭐, 그런 거라면 좋겠죠"라면서 다시 젓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

- "더 잘 뛰는 선수가 몇 명이나 있던데요, 뭘. 내가 본 것만도 세 명은 됐어요."

마도카는 손가락 세 개를 꼽으며 말했다.

"특히 사카야 선수 다음다음에 뛴 사람은 완전히 급이 달랐어요. 우승후보인가?"
나유타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예상은 정확했다. 실제로 현시점에서 사카야의 실력은 4위나 5위 정도다.
"어떻게 하면 우승할 수 있을까?"
글쎄요,라고 마도카는 어깨를 으쓱 쳐들었다.

"좀 더 정확한 자세로 날아오르면, 이라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네요. 좀 더 합리적으로, 좀 더 멀리까지 날아갈 수 있는 자세로. 하지만 그게 안 되니까 본인도 괴로운 거잖아요."
시건방진 데다가 너무 단순한 말투였지만, 왜 그런지 불쾌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쓰쓰이가 말했던 '어쩐지 으스스하다'라는 표현이 생각났다.

 

- <저 바람에 맞서서 날아올라>

 

- "어떤 이유인데요?"
나유타가 묻자 쓰쓰이는 빙긋이 웃으며 마도카 쪽을 보았다.

"네가 직접 얘기해 주는 게 좋겠지?"
마도카는 카메라 삼각대를 세우던 손을 멈추는 일도 없이 "난류에 흥미가 있어서"라고 말했다.
"난류?"
"난은 어지러울 난, 류는 흐름, 즉 바람을 가리키는 거야." 쓰쓰이가 옆에서 설명해 주었다. "난류 亂流, 유체역학 용어야."

- "재미있잖아. 그래서 데려온 거야. 또다시 뭔가 신기한 일이 일어날 것 같기도 하고 말이지."

쓰쓰이가 의미심장하게 말한 것은 지난번 스키 점프 때의 일이 머릿속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유타는 마도카를 보았다. 자신에 대해서는 신경을 꺼달라는 듯이 묵묵히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 쓰쓰이가 우와, 하는 탄성을 흘렸다. 그의 시선은 이시구로와 미우라를 향하고 있었다.
나유타도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시구로가 투구 동작에 들어간 참이었다. 별로 크지 않은 모션으로 던져진 공이 완만한 커브를 그리며 미우라의 미트에 빨려 들어갔다. 그것은 얼핏 보기에는 단순한 느린 공으로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 이시구로 다쓰야가 프로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지명을 받은 것은 지금부터 7년 전의 일이다. 드래프트 5위의 지명이었다. 당시 이시구로는 기타간토 北関東 소재의 클럽 팀 투수로 공을 던지고 있었다. 거의 무명의 존재였지만 지명을 받았을 때는 잠깐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그 이유는 실력과는 관계가 없었다. 서른이라는 나이에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진 것이다.

 

- 구속은 그리 빠르지 않지만 컨트롤이 뛰어나고 변화구가 다채로웠다. 실전에 투입 가능한 구원투수를 원하던 구단의 방침과 맞아떨어졌다. 7~8년만 뛰어주면 감지덕지,라는 판단에 따른 지명일 터였다. 

 

- 하지만 그 계획은 어긋났다. 2군을 상대하는 것이라면 막을 수 있지만 1군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이시구로에 의하면 "입단 2년 차에 벌써 설 자리가 없어졌다"라고 한다. 하긴 본인은 별반 기가 죽는 일도 없었다. "처음부터 잘 해낼 자신이 없었어. 프로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앞으로의 인생에 도움이 되도록 하자는 정도의 기분으로 입단"했기 때문이다. 

- 그런 참에 한 가지 특별한 재능을 발견해 준 것이 미우라였다. 미우라는 1군의 예비 포수였지만 부상으로 2군에 내려와 있었다. 두 사람은 나이가 엇비슷해서 함께 연습하는 일도 많았다. 미우라를 상대로 투구 연습을 할 때, 이시구로는 작은 장난을 쳤다. 아마추어 시절에 배워둔 변화구를 던져본 것이다. 프로에 들어온 뒤로 이 기묘한 변화구는 본격적으로 던져본 적이 없었다.  

 

- 미우라는 그 공을 받지 못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얼굴로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래서 다시 한 개 던져보았다. 그랬더니 미우라는 이번에도 또 받지 못했다. 곧바로 뛰어와서 "뭐야, 방금 그 공은?"이라고 물었다.
미안, 하고 이시구로는 사과했다.
"잠깐 장난 좀 쳤어. 다음에는 제대로 던질게."
"어떤 장난이었는데? 뭘 던졌어?"

미우라는 진지한 표정으로 캐물었다.
어쩔 수 없이 이시구로는 공을 쥐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손가락을 구부려 공을 단단히 잡고 거의 회전을 주지 않으면서 던진다. 이른바 너클볼이다. 아마추어 시절, 선배에게서 던지는 방법을 배웠던 것이다. 

- "몇 개 더 던져봐."

그렇게 말하고 미우라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이시구로는 연달아 너클볼을 던졌다. 그중 몇 개를 미우라는 뒤로 놓쳤다. 그러자 그는 투수 코치를 불러다 자신의 뒤쪽에 세웠다. 의아해하던 코치의 얼굴 표정이 달라졌다.

 

- 그날이 운명의 분기점이었다. 당장 다음 날에는 1군 감독이며 피칭 코치 앞에서 이 공을 던져야 했다.
그 뒤로 이시구로는 너클볼을 철저히 연습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다른 변화구는 던지지 않아도 좋으니 너클볼로만 스트라이크를 잡으라는 것이었다.

- 너클볼은 지극히 특수한 변화구다. 궤도가 불규칙해서 어디로 갈지 그 행방은 공을 던진 본인도 알지 못한다. 투수에게 요구되는 것은 스트라이크존에 넣는 것뿐이다. 그런데 그게 그리 쉽지 않다. 컨트롤을 우선하면 변화가 부족해지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과거에 많은 투수들이 너클볼러가 되는 것을 단념했다. 하지만 원래 소질이 있었는지 이시구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높은 확률로 너클볼을 스트라이크존에 넣을 수 있었다. 그렇게 되자 수뇌진으로서는 당연히 실전에서도 써먹을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 일단 2군 경기에서 던져보기로 했다. 포수는 미우라가 맡았다. 그것은 일본 프로야구계로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시구로가 던진 모든 공이 너클볼이었던 것이다. 짧은 이닝이었지만 그는 이 공으로 완벽하게 방어에 성공했다. 
몇 경기쯤 던진 뒤, 이시구로의 1군 승격이 결정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그의 너클볼을 받아줄 수 있는 포수가 1군에는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미우라도 함께 올라가게 되었다. 
그 무렵부터 벌써 일부 팬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스포츠 미디어에서도 다뤄주었다. 홍보 문구는 '일본 최초의 풀타임 너클볼러 탄생'이었다.

- 하지만 이시구로 본인은 시큰둥했다. 1군 승격에 마음이 들뜨는 일도 없었다.
페넌트레이스는 종반에 접어들었고 팀은 우승 경쟁에서 이미 탈락했다. 관객 동원 수도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구단으로서는 이쯤에서 관객을 다시 불러들일 만한 화제가 필요했을 것이라고 냉정하게 ... 

- "맞는 말씀이에요. 완전히 자신감을 잃었어요. 이른바 '포구 입스'라는 병에 걸려버린 모양이에요."
"포구 입스?" 나유타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런 병도 있어요?"

입스라는 것은 골프 용어다. 대수롭지 않은 거리의 배팅에도 몸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지 않는 운동장애를 말한다.
"응, 그런 게 있더라니까. 야구에서는 투수나 야수가 공을 제대로 던지지 못하는 입스가 유명하지만, 드물게 포구를 못 하는 경우도 있어. 별것도 아닌 땅볼도 못 잡고, 높이 뜬 공까지 놓쳐버리는 거야. 내가 보기에는 산토가 완전히 그 증상이야."

미우라는 쓰쓰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주 난감한 게 이 증상은 웬만해서는 자연스럽게 낫는 일이 없어요. 내버려 두면 마냥 악화되기만 하죠. 실은 요즘 산토가 다른 투수의 공까지 점점 못 받고 있어요." 

- "교수님은 이시구로의 너클볼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보려는 거잖습니까. 그 참에,라는 건 말이 좀 이상하지만, 산토가 왜 공을 못 받는지 그것도 좀 밝혀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 원인은 정신적인 것이겠지만, 그것 때문에 캐치 동작이 어떤 식으로 잘못되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요."
아무래도 그런 목적으로 산토를 일부러 포수 자리에 앉혔던 모양이다.

- 쓰쓰이에게서 '흥미로운 사실을 알아냈으니 이쪽으로 올 일이 있으면 들러달라'라는 연락이 들어온 것은 이시구로의 너클볼을 촬영한 날로부터 나흘 뒤의 일이었다. 마침 근처에 갈 일이 있어서 그다음 날, 나유타는 나가노현에 있는 호쿠료 대학의 유체공학 연구실을 찾아갔다.
"너클볼이라는 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물건이었어."

쓰쓰이는 테이블 위의 노트북을 켜면서 말했다.

- 쓰쓰이는 노트북 화면을 나유타 쪽으로 돌려 보여주었다. 그곳에는 며칠 전 초고속 카메라로 촬영한 이시구로의 투구가 슬로모션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공의 실밥까지 또렷이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선명한 영상이다.
"공에는 전혀,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회전이 주어지지 않아. 원래 투수가 던지는 공은 직구든 변화구든 고속으로 회전하는 게 일반적이야. 그 회전으로 축이 안정되어서 포수의 미트에 안착하기까지 자세가 바뀌는 일이 없어. 이걸 자이로 효과라고 해. 자전거나 팽이가 넘어지지 않는 것과 똑같은 거야. 포크볼은 회전을 억제하는 것으로 공기저항을 증가시켜 타자의 예상보다 빠르게 떨어지는 변화구지만 그래도 약간은 회전을 하거든. 근데 너클볼은 거의 무회전이야. 그 때문에 축이 불안정하고, 게다가 공기저항은 포크볼보다 더 커지게 돼. 단 그것뿐이라면 공은 똑바로 아래로 떨어지기만 하겠지. 여기를 잘 봐, 이다음 순간이야."
쓰쓰이가 화면을 가리켰다. 그러자 지금까지 무회전이던 공이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앗, 하고 나유타는 탄성을 흘렸다.

 

- "투구 때 회전을 걸지 않은 공이 왜 중간부터 갑자기 돌기 시작하는가. 그 이유는 바로 야구공의 실밥에 있었어. 실밥은 지극히 미세하지만 외부로 튀어나와 있어. 이 부분에 공기저항을 받는 것 때문에 회전하기 시작하는 거야. 멈춰 있는 선풍기에 바람을 쐬면 날개가 돌아가는 것과 같은 원리야. 문제는 야구공의 경우, 회전을 하면 진행 방향과 실밥 선의 위치 관계가 달라지게 돼. 그것에 의해 공기저항을 받는 방식에 새로운 변화가 생겨나고 공은 좌우 어느 쪽인가로 움직이지. 그리고 그 움직임 때문에 다시 공기저항을 받는 방식이 달라지면서 궤도가 약간 어긋나게 돼. 즉 흔들리면서 떨어지는 거야." 
공이 미트에 안착하는 장면의 영상에서 쓰쓰이는 정지 버튼을 클릭했다.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너클볼이란 그런 변화구라는 얘기가 되겠지. 거기에 다시 공기의 점성이나 습도, 기압의 영향 등도 관계가 있으니까 공을 던진 본인조차 변화를 예측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 "역시 이렇게 된 거였어."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며 미우라는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공을 받으려고 미트를 앞으로 내밀고 있잖아. 이래서는 너클볼은 잡을 수 없어." 
화면에 나온 것은 쓰쓰이가 연구실에서 보여준, 미우라와 산토의 포구 동작을 비교한 영상이었다.
나유타는 커피 잔을 잡으려던 손을 멈췄다.
"역시,라고 하시는 걸 보면 미우라 씨도 어느 정도 원인을 알고 있었군요?"
미우라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너클볼을 받는 요령은, 아무튼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눈을 떼지 않고 공이 미트에 뛰어들기를 기다리는 거야. 공이 흔들리면서 떨어지니까 나도 모르게 받으러 나가고 싶어 지는데 그걸 꾹 참아야 해. 처음에는 산토도 그렇게 했었어."

- "이시구로가 퀵으로 던지기 시작하자마자 공을 받지 못했어. 아마도 원인은 퀵이 아니라 주자가 출루한 것이었을 거야. 주자에게 도루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너무 강했겠지. 너클볼은 구속이 떨어지니까 도루를 노리기 쉽거든. 그래서 이시구로가 퀵으로 던진 것인데 산토는 산토대로 조금이라도 더 빨리 공을 잡고 싶었겠지. 그 결과 낙구를 하고 결국 주자를 2루로 보내버렸어. 그러니 점점 더 마음이 급해져서 다음에는 틀림없이 공을 받아야 한다고 초조해지는 거야. 그렇게 되면 점점 더 공을 받기가 어려워져. 또 실수를 해버리고 결국 패닉 상태에 빠졌지. 그런 악순환이 거듭된 거야. 실수 따위는 얼른 잊어야 하는데 본디 성격이 착실한 친구라서 그게 안 돼. 거꾸로 트라우마가 되어버렸어." 
"그렇다면 이 영상을 산토 선수에게 보여주면 되지 않을까요? 원인을 알면 고칠 수 있잖아요."

나유타는 옆에 놓인 가방에서 납작한 케이스를 꺼냈다.

"이 DVD-R에 똑같은 영상이 들어 있어요."
미우라는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보이다가 DVD-R를 받았다.
"일단 보여주긴 하겠지만 아마 별 효과는 없을 거야. 스포츠에서 한번 몸에 밴 것은 쉽게 고쳐지지 않아. 특히 이런 한순간의 동작인 데다가 정신적인 것이 원인이라면 바로잡기가 어려워. 중요한 것은 자신감을 되찾느냐 마느냐는 거야. 자신감만 되찾으면 틀림없이 다시 공을 받을 수 있어. 근데 지금 그 친구에게는 자신감이라고는 한 조각도 찾아볼 수가 없단 말이지. 진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네." 

- "그냥 내버려 두면 되잖아요."

나유타 옆에 있던 마도카가 말했다. 엇, 하고 나유타는 그녀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무슨 말이야?"
"슬럼프에 빠진 선수는 그냥 가만히 놔두면 돼요. 프로니까 자기 힘으로 일어서야죠. 그걸 못 하면 그만두는 수밖에 없어요."

- "이거 혹시 초능력인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이건 뭐..."

이시구로는 글러브를 벗고 두 손을 번쩍 드는 포즈를 취했다.

"믿어주지 않을 수가 없네."
"이제 약속 지킬 거죠?"

마도카는 자신이 이겼다고 의기양양해하는 일도 없이 이시구로에게 물었다.
"대체 원하는 게 뭐야? 내가 뭘 해야 되지?"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에요. 잠깐 연극을 해주시면 돼요."

- 그렇게 마도카가 꺼낸 제안이 최면술을 사용하는 연극이었다. 최면술에 의해 야구 경험도 없는 소녀가 이시구로의 너클볼을 받아낸다,라는 스토리다. 그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산토에게 보여준 뒤, 그에게도 최면술을 건다. 물론 진짜 최면술이 아니다. 게다가 이시구로는 일부러 변화하지 않는 공을 던진다. 그거라면 산토도 너끈히 받을 수 있다. 공은 무회전이기 때문에 그는 너클볼을 받았다고 착각할 것이다. 스스로 암시를 걸어준다면 얘기는 더 빨라진다. 이제 이걸로 됐다,라는 자신감을 되찾고 이윽고 진짜 너클볼도 받아낼 수 있게 된다,라는 것이 마도카의 시나리오였다. 

- 재미있는 아이디어라고 나유타는 생각했다. 마도카처럼 가녀린 여자애가 이시구로의 너클볼을 차례차례 캐치하는 모습을 보면 분명 최면술을 믿어줄 것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시구로의 의견은 달랐다. 변화하지 않는 너클볼을 던지면 분명 산토가 눈치를 채 버린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슬럼프에 빠졌다지만 그 친구는 프로 선수야. 프로의 눈은 속일 수 없어. 게다가 최면술 같은 것에 기대겠다는 사고방식이 나는 마음에 안 들어. 슬럼프에서 빠져나오느냐 마느냐는 결국 각자의 노력에 달린 문제야." 

-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던 계획을 부정당해버려서인지 마도카는 웬일로 실망의 기색을 드러내며 기분이 상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그녀에게 이시구로는 "하지만 발상은 아주 재미있어"라고 말을 이었다.
"마도카처럼 얼핏 보기에 평범한 소녀가 포구하는 것을 코앞에서 목격한다면 산토가 큰 충격을 받으리라는 건 확실해. 그 충격이 산토가 다시 분발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지." 
그리고 이시구로는 산토가 최면술이 가짜라는 것을 눈치챈 다음의 스토리를 새로 짜주었다. 즉 마도카가 너클볼을 받아낸 것은 최면술이 아니라 맹렬한 연습의 성과였다,라는 대반전이다. 
"프로 선수라면 그게 훨씬 더 충격이 크지."

이시구로는 단언했다. 나아가 그래도 분발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프로 선수를 그만두는 편이 좋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 그렇게 그날의 작전이 펼쳐졌던 것이다.
"특히 마도카의 박진감 넘치는 연기는 정말 훌륭했어." 나유타가 말했다. "왼손이 시퍼렇게 멍든 것을 봤을 때도 깜짝 놀랐어. 속임수인 걸 다 알고 있는데도 가슴이 철렁했다니까." 
"꽤 리얼했죠?" 그렇게 말하고 마도카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메일이 들어왔는지 화면을 보면서 입이 뾰로통해졌다. "기리미야 씨예요. 빨리 들어가지 않으면 또 잔소리 듣겠어요." 
"기리미야 씨에게도 큰 신세를 졌어. 고맙다고 인사 전해줘."

"그건 신경 쓸 거 없어요. 기리미야 씨도 덕분에 재미있었을 테니까요."

마도카는 재빨리 주스를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언젠가 또 만나자."
"그래요. 언젠가."
빠이빠이, 라면서 마도카는 왼손을 흔들었다. 그날 특수 분장을 했던 그 손이 오늘은 아무 흠집도 없이 깨끗했다.

- <이 손으로 마구 魔球를>

 

 
- 나유타가 와키타니 마사키의 모습을 발견한 것은 7월로 접어든 직후의 더운 저녁나절이었다. 니시아자부 사거리에서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기를 기다릴 때, 도로 맞은편에 서 있는 체격 좋은 반바지 차림의 남자가 고교 동창이라는 것을 알았다. 마지막으로 만난 게 벌써 10여 년 전이다. 살이 좀 찐 것 같지만 예리한 얼굴 생김새는 변함이 없었다. 

- "그러는 너도 대학에 가라는 부모님의 뜻을 꺾고 요리인의 길을 선택했잖아. 학교 성적도 나쁘지 않았는데 말이야." 
"그래봐야 나쁘지 않다, 하는 정도의 성적이었지. 너는 만날 결석하다가 시험 보는 날에만 불쑥 나타나는 주제에 척척 100점을 받았는데 말이야. 의대에 합격했다는 소식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어. 그러니 더더욱 의대를 포기하는 게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무엇을 아깝다고 생각하느냐는 사람마다 다 다른 것 같아. 와키타니도 대학에 가봤자 꿈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해서 진학하지 않은 거잖아. 그거 하고 똑같아. 의대는 내가 꿈꾸던 곳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
"그런가. 하긴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런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와키타니는 맥주잔을 비우고 점원을 불러 추가로 주문했다. 

"그래서 넌 요즘 무슨 일을 하고 있어?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뭔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 "침구사? 네가 침을 놓는 거야?"
"의대에서 공부하는 동안 민간요법에 관심을 갖게 됐어. 특히 침구의 무한한 가능성에 매력을 느꼈지. 마침 후계자를 찾는다는 침구 스승님을 소개받을 기회가 있어서 머리 숙이고 제자로 들어간 거야. 의대는 그때 그만뒀고." 
"부모님이 용케도 허락해 주셨네." 
"허락해 줄 리가 없지. 내 마음대로 정했어. 그 바람에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했고. 벌써 몇 년째 서로 간에 연락한 적이 없다."

"어이쿠, 그래도 괜찮냐?" 
"괜찮고 말고 할 것도 없어.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나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수밖에. 예전에 우리 둘이서 자주 그런 얘기를 했었잖아. 잊어버렸어?" 
"잊어버린 건 아니지만 사람이 살다 보면 아무래도 그렇게는 안되잖냐. 그런 의미에서는 너도 참 대단한 녀석이다."
추가로 주문한 맥주가 나왔다. 와키타니는 잔을 기울인 뒤 입에 묻은 하얀 거품을 손등으로 닦았다.

 

- 우하라 마도카가 창밖을 가리켰다. 그 너머에 입체 주차장 출입구가 있었다.

"그 직전의 1분 동안에 차석 대가 연달아 주차장으로 들어갔거든요. 소형 트럭, 초보자 스티커를 붙인 세단, 원박스 차의 순서로 오늘 꽤 붐비는 것 같아서 나유타 씨가 주차 공간을 확보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라고 예상했죠. 특히 초보자 스티커를 붙인 그 세단 때문에 상당히 번거로웠을 거예요. 운전에 익숙하지 않아서 차 넣는 것도 서툴 테니까." 

"아닌 게 아니라 붐비기는 했는데, 우연히 가까이에 빈자리가 있었어. 행운이었지."
"아, 그래서 예상보다 일찍 왔구나. 이제야 알겠네." 마도카가 나유타를 올려다보았다. "그보다, 잘 지냈어요?"
"그럭저럭. 마도카도 여전한 것 같구나."

- "... 여전히 마도카답다는 얘기."
"뭔 소리래. 문법적으로 틀린 말 같은데."

마도카는 미간을 좁혔다. 까다로운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눈이 인상적이다. 긴 머리를 어떻게 돌려 감았는지 머리 위에 소프트볼 크기로 얹혀 있었다. 민소매 블라우스 옆으로 드러난 가느다란 팔이 호리호리한 몸매를 강조하는 것 같았다. 

- 다시금 파르페를 입에 옮기던 마도카는 이윽고 반절쯤 남기고 스푼을 내려놓았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지만, 나는 가이메이 대학병원의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할 수 있는 입장이고, 아빠의 업무 내용도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어요. 그래서 두 분의 기대에는 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단 미리 양해를 구하겠는데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솔직히 말해 병원 관계자로서는 규칙 위반이에요. 프라이버시 침해고, 의사라면 비밀 엄수 위반이죠. 하지만 두 분은 프라이버시를 지켜줄 거고, 나는 의사가 아니니까 특별히 알려드릴게요. 단,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얘기하면 안 돼요. 약속하실 수 있죠?" 
나유타는 와키타니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러면 아버지는, 우하라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지?" 나유타는 물어보았다. "그 병에 대해 세계적인 권위자시잖아. 회복될 전망이 있을까?" 
"글쎄요. 아빠한테 그런 건 안 물어봤어요. 물어봤자 아마 대답해주지 않을 거예요. 의사는 원래 100퍼센트 자신이 없는 한 낙관적인 말은 안 하니까." 
마도카의 말투는 냉담하게까지 들렸지만 아마도 그게 진실일 것이다. 

- "힘겨운 상황이지만 그 사고에서 1년 이상 지났으니까 차츰 현실을 받아들인 모양이죠. 다만 그건 어머니 쪽 얘기예요. 아버지는 한 번도 병실을 찾지 않았대요." 
"이시베 선생님이?" 와키타니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왜?"
"이유는 모르죠. 간호사들도 이상하다고 하던데요. 우리 아빠도 잠깐 얘기하더라고요. 이제 슬슬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데 영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고." 

- "이 아이, 중증 발달장애아였어. 매일 날뛰고 뭐든 다 입에 넣어버리고 서로 의사소통을 하기도 힘든 상태였으니까."
나유타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렇습니까,라고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와키타니는 왜 미리 알려주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한밤중에 갑작스레 난동을 피우면 내가 밤새 한숨도 못 자는 일도 부지기수였어. 고함을 지르면서 머리를 벽에 부딪치고 그때마다 크게 다치는 일도 많았고... 그런데 요즘은 그나마 잠은 잘 수 있게 됐지. 이 아이가 이렇게 얌전하니까."
부인의 말투를 통해서는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아니면 자학적인 농담인지 선뜻 판단이 되지 않았다. 나유타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곤혹스러웠다.  


- "연락은 가끔 하고 있어. 너희가 병문안 왔다는 거, 나중에 꼭 전해줄게."

그렇게 말하고 테이블에 놓인 스마트폰을 손에 들었다.

"어라.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구나. 미안하다, 모처럼 여기까지 와줬는데 지금 아이를 돌봐줘야 할 시간이야. 몸을 닦아줘야 하거든."
조금 전에는 자신이 별로 할 일이 없다고 했는데,라고 나유타는 생각했다. 어쩌면 그만 돌아가달라는 뜻으로 둘러댄 것인지도 모른다.
"네. 그럼 저희는 이만 가야겠네요. 힘드실 텐데 죄송합니다. 아드님이 빠른 시일 내에 쾌차하기를 바랍니다."
와키타니가 애써 인사를 건네는 옆에서 나유타는 말없이 머리를 숙였다.

- 병원에 다녀오고 사흘 뒤, 와키타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사고에 관한 정보를 얻었다는 것이다.
"마쓰시타에게 부탁해 알아봤어. 사고 직후에 학교 측에서 이시베 선생님에게 경위서를 제출하라고 했던 모양이야. 근무시간은 아니었다지만 교사가 동행했으면서도 아이의 수난 사고를 막지 못했다는 것으로 학부모들 사이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아.
와키타니의 말을 듣고 나유타는 가슴속에 불쾌감이 번졌다. 학교 측으로서는 혹시 모를 학부모의 문제 제기에 대한 대책을 세워두고 싶었겠지만, 아들이 생사의 기로에서 헤매는 상황에서 그런 경위서를 써야만 했던 이시베 선생님의 심정을 생각하니 숨이 막힐 것 같았다. 

- "아이가 다운증후군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셨어요."
나유타는 숨을 헉 삼키며 와키타니를 보았다. 거북스러운지 그는 이쪽에 시선을 맞추려 하지 않았다.
"그, 그래서요?"
"지금 망설이는 중이에요, 다시 자세한 검사를 받아야 할지 말지. 검사를 하면 좀 더 확실한 것을 알 수 있거든요."
"그렇다면 당연히..."
"당연히 검사해봐야 하지 않느냐,라고 생각하세요?"
나유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안 될 무슨 이유라도 있습니까?"
히토미는 등을 꼿꼿이 세우고 심호흡을 한 차례 하고 난 뒤에 입을 열었다.
"검사를 한다는 것은, 만일 다운증후군이라면 아이를 지우겠다는 얘기잖아요."
앗, 하고 나유타는 저절로 놀란 소리가 새어 나왔다.
 

- <그 강물이 흘러가는 곳은>


 
- 현관으로 들어서자 안쪽에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클래식 음악인 듯한데 그 방면에 문외한인 나유타는 어떤 곡인지 알지 못했다.
"아사히나 씨는 거실에 계시지요?"
에리코에게 물었더니 그렇습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녀의 안내를 받아 복도로 들어갔다. 막다른 곳에 문이 있다. 그 문을 열고 에리코가 안을 향해 말했다.

"오빠, 구도 씨가 오셨어."
나지막하게 뭔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음악 소리에 묻혀서 나유타는 알아듣지 못했다.
"들어가세요."

에리코가 손을 안으로 펼치며 말했다.

- 실례합니다,라고 말하고 나유타가 안으로 들어선 것과 음악 소리가 멈춘 것은 거의 동시였다.
거실은 30제곱미터쯤이나 될 만큼 널찍하지만 가구라고 할 만한 것은 소파와 테이블뿐이다. 그 대신 벽 쪽에 고급스러워 보이는 음향기기가 나란히 놓였다. 
3인용 소파의 한가운데 자리에 머리가 긴 남자가 앉아 있었다. 언제였는지, 이제 곧 마흔이라는 얘기를 나유타는 들은 적이 있다. 회색 스웨터에 감싸인 몸은 남자치고는 가녀린 편이다. 


- 그의 이름은 아사히나 잇세이. 원래 잇세이는 '가즈나리'라고 읽는 이름이지만 사람들 사이에서는 '잇세이'로 통하고 있다. "예명도 아니고, 내가 그런 식으로 이름을 밝힌 것도 아니야. 근데 어느새 다들 그런 식으로 부르고 있더라니까"라는 것이 본인의 설명이다.

- "등산을 간다는 얘기는 못 들으셨던 거군요."
"응, 그런 얘기는 못 들었어."
"오무라 씨는 가족이..."
"도야마에서 어머님이 형님 부부와 살고 계셔. 아버님은 오래전에 타계하셨다고 들었어. 하지만 사무는 요즘 그쪽 식구들과는 거의 왕래가 없었어. 자신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너무 번거롭다면서. 하지만..."

아사히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건 사무가 억지를 부리며 했던 말인 것 같아. 사실은 어떻게든 가족에게 이해받고 싶었을 거야."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유타도 희미하게, 아니, 분명하게, 이해했다. 오무라가 말한 '삶의 방식'이 무슨 뜻인지도.

- "가족에게는 소식이 전해졌겠지요? 오무라 씨가 사망했다는 거."
"물론이지. 곧바로 찾아와 사무의 유체를 도야마로 실어 갔어. 그쪽에서 장례식을 치르겠다면서. 그때 그의 형이 나한테 그러더라. 우리 집안은 옛날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많으니까 미안하지만 장례식 참석은 삼가 줬으면 한다고."
침울한 목소리로 아사히나가 털어놓은 그 이야기는 묵직한 의미가 담긴 것이었다. 섣부른 대답을 할 수 없어서 나유타는 입을 꾹 다 물었다.
오빠,라고 에리코가 말했다.

"오늘 구도 씨에게 침 맞기로 한 거 아니었어?"
"아 참, 그렇지. 미안해, 구도 씨. 바쁠 텐데 재미도 없는 얘기를 늘어놓았네."

- 특정 파트너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받고 아사히나는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커밍아웃에 대해 그 파트너의 양해도 얻었노라고 말했다. 오랜 세월 함께 일하면서 좋은 관계를 지속해 왔다고 덧붙였다. 구체적으로 이름까지 밝히지는 않았지만 아사히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파트너가 오무라 이사무라는 건 금세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10여 년 전이라고 들었다. 아사히나는 작곡가로서 큰 성공을 거뒀지만 시력이 점점 떨어져서 악보를 보기가 어려워졌다. 그래서 자기 대신 악보를 작성해 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 오무라를 소개해준 것은 두 사람 다 알고 지내던 이였다. 아사히나에 의하면 오무라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오래도록 찾아 헤매던 것을 만난 듯한 충격'이 덮쳤다고 한다. 그리고 오무라 쪽 역시 그 만남에서 운명적인 것을 감지했다.
그 이후로 오무라는 아사히나가 만든 곡을 악보에 옮겨 적는 일뿐만 아니라 창작의 의논 상대가 되어주고, 외부와의 중개 역할도 하고, 평소 생활을 돌봐주는 일까지 맡게 되었다. 그야말로 유일무이의 파트너였다. 

- 나유타는 커밍아웃 직후에 아사히나를 만났지만, 그때 그는 환하게 웃으면서 이런 말을 했었다.
"역시 다들 어렴풋이 눈치는 채고 있었던 모양이야. 어디든 함께 다니고, 우리 둘의 모습을 지켜보면 특별한 관계가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나? 하지만 본인들이 아무 말 안 하는데 그걸 확인해 볼 수도 없고, 솔직히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감했던 부분도 있었다는 거야. 다들 앞으로는 그런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니까 좋다고 ... "

- 조금 전에 커밍아웃 따위 자기만족일 뿐이었다고 내뱉은 아사히나는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
"커밍아웃으로 게이에 대한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는 건 아니야. 바뀌는 것은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뿐이지. 나와 사무를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 나는 그런 건 상관없다고 생각했었지만 사무에게도 그만큼의 각오가 있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어. 커밍아웃하고 싶다는 말을 먼저 꺼낸 것은 나였으니까. 사무는 내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도 된다고 했어. 그가 먼저 커밍아웃을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그저 내 기분을 존중해 준 것뿐이었는지도 모르겠어. 아니, 분명 그런 거였겠지." 

 

- 커밍아웃의 반향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아사히나 자신이 불쾌한 일을 겪은 적은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지. 나는 집에 틀어박혀 작곡만 하면 되잖아. 내가 만나는 사람이래야 음악 관계자나 일부 친한 사람들뿐이야. 눈이 보이지 않으니 인터넷에 어떤 글이 올라오는지도 알지 못해. 하지만 사무는 달라. 비상근 강사로 대학에도 나가야 하고, 내대리인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야 했어. 인터넷도 분명 봤겠지. 그는 나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다양한 상황에서 수많은 편견에 부딪혔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어. 정말 바보 같은 얘기지만 나는 그를 잃은 지금에야 그런 것을 깨달았어." 
그것이 자살의 동기다,라고 아사히나는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무를 잃은 뒤로 나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아. 건반에 손을 대고 싶은 마음도 없어. 어쩌면... 아니, 분명 앞으로 피아노를 치는 일은 없을 거야. 음악계에서는 사무가 나의 고스트라이터였던 게 아니냐고 소문이 난 모양이야. 앞으로 내가 작곡을 중단해 버리면 이번에는 그 소문이 사실이었다는 얘기가 퍼지겠지?"

그렇게 말하고 아사히나는 자학적인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 천재 작곡가의 몸에 침을 놓으면서 나유타는 그저 그의 고뇌를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섣불리 맞장구조차 칠 수 없었다. 힘을 내세요,라는 둥의 무책임하고 태평한 인사 따위 금물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침을 다 놓기까지 나유타는 제대로 된 말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오빠는 구도 씨를 진심으로 신뢰한다,라는 에리코의 말이 떠올랐다.
나유타는 핸들을 잡은 채, 아뇨, 과분한 칭찬이십니다,라고 중얼거렸다. 나한테 뭔가를 기대한다면 그건 정말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 "나유타 씨도 알잖아요, 아마카스 사이세이라는 사람. 그렇죠? 출연했었잖아요, 그 영화감독이 찍은 영화에."
태연히 내던져진 그 말은 다시 한번 나유타의 가슴속에 충격을 몰고 왔다. 이 소녀는 대체 누구인가. 한두 번도 아니고 번번이 예상을 뛰어넘는 언동으로 사람을 놀라게 한다. 
"왜 아무 말이 없어요?"

마도카가 나유타의 눈을 골똘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나유타는 눈을 질끈 감고 한 차례 심호흡을 한 뒤 눈을 떴다. 마도카는 아직도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알았어?"

목쉰 소리로 나유타는 물었다.

- "쓰쓰이 교수님 연구실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거든요." 마도카는 말했다. "그 자리에서는 생각이 안 났는데 나중에 기억을 더듬어보다가 아마카스 사이세이의 영화에 나왔던 그 소년이라는 걸 알았죠."
나유타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마도카가 그런 영화를 봤단 말이야?"
"그럴 만한 사정이 있어서 그 사람 영화는 몇 편 봤어요."
"잘도 얼굴을 알아봤네. 벌써 20여 년 전 일인데."
마도카는 후훗 입술을 풀었다.

"얼굴 모습은 사라지지 않아요."

 

- "왜 지금까지 아무 말도 안 했어?"
마도카는 어깨를 으쓱 쳐들었다.
"옛날 일을 들먹이는 건 기분 나쁠 것 같아서. 옛날... 아역 배우였던 시절."
"왜 내가 기분 나빠할 거라고 생각했지?"
"지금 가명을 쓰고 있잖아요. 구도 나유타,라고. 하지만 진짜 이름은 구도 게이타 아역 배우 시절에는 그 본명을 썼어요. 그 이름을 이제 쓰지 않는다는 건 그때 일을 감추려는 거라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죠."
나유타는 시트에 몸을 기대고 한숨을 쉬었다.

- "프로야구에 무라타 조지 村田兆治라는 유명한 투수가 있었어. 외할아버지 이름도 똑같은 한자를 쓰는 조지여서 부모님이 그걸 뛰어넘는 사람이 되라고 이름에 경을 붙였다고 하셨어. 조 兆보다 더 높은 경 京. 단순하기 짝이 없지?"
"그리고 본인이 가명을 지을 때는 그 경을 뛰어넘자는 뜻에서 나유타라고 했다,라는 얘기?"
"응,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하긴 그것도 상당히 단순한 발상이네."

나유타는 마도카 쪽을 보았다.

"그나저나 내가 싫어할 줄 뻔히 알면서 오늘은 그 옛날 얘기를 일부러 꺼냈어?"
"마음이 좀 아프긴 했지만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없었어요. 지금 어떤 사람을 찾고 있거든요.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까 단서를 잡아야 해요."
"그 찾고 있는 사람이라는 게 아마카스 사이세이?"
"아뇨, 내가 찾는 건 소중한 친구. 근데 아마카스 사이세이와 관계가 있어요." 


- 마도카는 눈길을 떨궜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래요? 뭐, 그렇다면 별 수 없죠."
"지금 가볼 데가 있어서 이만 실례할게."
알았어요,라고 말하고 마도카는 차 문을 열고 조수석에서 몸을 일으켰다.
"근데요," 차 밖으로 내려선 뒤에 마도카가 말했다. "그때의 연기는 정말 훌륭했다고 생각해요."
"그때라니?"
"도착된 섹스에 고뇌하는 중학생 역할, 영화 <얼어붙은 입술>의."

스르륵 입 밖으로 내뱉은 마도카의 말이 나유타의 가슴을 쿡 찔렀다. 그 충격에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도카는 그런 그의 반응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안녕"이라면서 차 문을 닫았다.

- 왜 자신이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하게 되었는지, 사실 나유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여기저기 학원에 보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그중에 댄스, 노래, 연극을 배우는 학원도 있었다. 그곳이 연예기획사와 연결된 스쿨이라는 것은 한참 나중에야 알았다.
어머니 아야코는 우연히 길을 가다가 스카우트된 거라고 말했지만 그건 거짓말이라고 나유타는 짐작하고 있다. 아야코는 사람들 앞에 나서기 좋아하고 유명 인사에 혹하곤 했다. 자만심도 강했다. 아들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유독 눈에 띄는 미소년이라고 생각하고 연예학원에 보내기로 했던 게 틀림없다. 

- 하지만 나유타도 마지못해 어머니의 의향에 따랐던 것은 아니다. 작은 배역을 몇 번 하다 보니 연기라는 것이 점점 즐거워졌다. 짧은 시간이나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게 재미있었다. 어느새 슬픈 장면에서는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그것을 어른들이 크게 칭찬해 주는 것에서도 쾌감이 느껴졌다. 
이대로 배우의 길을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다른 직업을 가질 것인가. 답을 내리지 못한 채 아역 배우 생활을 계속 이어갔다. 답을 내리는 것은 한참 나중에 해도 된다는 생각도 있었다.

- 그 역할이 들어온 것은 나유타가 중학교 2학년에 올라간 무렵이었다. 주목받는 신인 기예라고 일컬어지는 감독의 작품에 주인공으로 낙점된 것이다. 
시나리오를 읽어봤지만 지극히 난해한 내용이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아름다운 얼굴의 소년이 우연히 한 매춘부를 만나면서 그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계로 서서히 추락한다는 내용이다. 주인공 소년에게는 대사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대사가 없다고 편하게 연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높은 연기력이 요구된다는 것을 나유타는 그때까지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 처음 아마카스 사이세이 감독을 만날 때는 잔뜩 긴장했다. 뭔가 엄청난 몸짓을 요구하는 게 아닐까 하고 움찔움찔했다.

- 애초에 시나리오 자체가 난해하기 짝이 없었다. 나유타는 카메라를 받으면서도 어떤 작품이 나올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주인공이 어떻게 묘사되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다만 나유타도 알고 있는 것이 있었다. 주인공은 수많은 사람들과 성적인 관계를 갖고 더구나 상대는 꼭 여성만이 아니었다. 직접적인 묘사는 없었지만 소년이 남자와 사랑을 나눈다는 것을 내비치는 장면이 많았다. 그건 시나리오를 처음 읽는 단계에서는 알지 못했던 것이었다. 

- 완성된 영화 <얼어붙은 입술>은 전문가들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해외 영화제에서 상까지 받으면서 더욱더 화제가 되었다. 아마카스 사이세이라는 이름은 단숨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나유타는 사실 그 영화를 본 적이 없다. 학교 수업 때문에 시간이 없었던 탓도 있지만, 한 발 앞서 시사회에서 영화를 보고 온 부모님이 안 보는 게 낫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특히 아버지는 격노해서 출연을 승낙한 어머니를 몹시 나무랐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아들이 연예계에 들어가는 것에 난색을 표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얼어붙은 입술>은 나유타가 출연한 마지막 영화가 되었다. 부모님의 강력한 희망으로 연예기획사를 탈퇴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나유타 자신도 이대로 연예계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얼어붙은 입술>이 공개된 이후, 주위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명백히 달라진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 나유타는 평범한 중학생이 되었다.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은 없어졌다. 세상 사람들은 뭐든 금세 잊어버린다. 

 

- "단순한 비즈니스 파트너가 아니었어."
나유타는 주위에 혹시라도 귀를 쫑긋 세우고 엿듣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뒤에 오무라 이사무가 사망하던 당시의 상황이며 아사히나와 오무라의 관계에 대해 짤막하게 설명했다. 
동성애라는 단어에 마도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마음에 걸렸지만 그녀는 거의 표정이 변하는 일도 없이 "한마디로, 아사히나 씨는 소중한 연인을 잃은 거네"라고 태연히 말했다. "그리고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거고." 
"뭐, 말하자면 그런 얘기야."
"하지만 진상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잖아요. 자살 동기가 무엇인지, 애초에 자살이었는지 아닌지도 아직 모른다면서요. 근데 그런 일로 괴로워한다는 건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데?"

- "아무튼 그런 일이라면 더욱더 찾아가 봐야죠. 누군가 자기 얘기를 들어줬으면 하는 거잖아요."
"그런 얘기라면 지난번에 충분히 들어줬어."
"정말로 충분했어요? 그게 충분하지 않았으니까 나유타 씨를 다시 만나려는 거 아녜요?"
"그 사람은 뭔가 착각하고 있어. 나한테 환상을 품고 있는 거야. 근데 그런 걸 원해봤자 나로서는 응해줄 수도 없고 난감할 뿐이라니까?"

답답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 "파트너가 폭로해 버리는 바람에 세상 사람들에게서 차가운 시선을 받게 되자 고민 끝에 자살했다... 근데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자살로 몰아넣은 것은 아사히나 씨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 아닌가요?"
아사히나의 초점을 맺지 못하는 눈이 마도카 쪽으로 향했다. 입가에는 희미하게 웃음이 떠올랐다.
"젊은 사람다운 의견이야. 순수하고 올바른 얘기지.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볼까? 절친한 친구 둘이서 함께 살 집을 짓기로 했어. 한쪽이 바다 옆이 좋다고 주장해서 바닷가에 집을 지었어. 예쁜 2층집이야. 바다 옆을 원했던 친구가 2층에서 살고, 다른 친구는 1층을 선택했어. 어느 날, 쓰나미가 몰려와 1층에 살던 친구가 파도에 휩쓸려 사망했어. 자아, 남겨진 쪽은 쓰나미를 원망해야 할까? 바다 옆이 좋다고 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아도 될까?" 
"그것과 이것은 얘기가 다른..."
"아니, 똑같은 얘기야." 아사히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다를 게 뭐가 있나."

 

- "쓰나미를 인간의 힘으로 막는 건 불가능해요. 하지만 세상 사람들의 편견은 개개인의 이해력이 진보한다면 막을 수 있어요." 
아사히나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이번에도 순수하고 아름다운 의견이군. 그렇다면 다시 묻겠는데, 이 세상 어딘가에 과연 차별 없는 나라가 있을까? 미국은 어떻지? 중국은? 영국은? 프랑스는? 우리 나라는 어때? 차별 따위 없다고 말할 수 있어?" 
마도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없다,라고 단언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법률로 금지하는 것은 어쩌면 가능하겠지."

아사히나가 말을 이어갔다.

"나는 차별 따위 안 합니다,라고 각자에게 입 끝으로만 서약하게 하는 것도 어쩌면 가능할 수 있어. 하지만 마이너리티를 배제하는 보이지 않는 힘은 그런 것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얘기야. 따돌림이나 험담처럼 알기 쉬운 것만이 차별이 아니야. 그건 손에 잡히지도 않고, 소리도 없고, 너무도 견고해.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면에 있는 다른 부류에 대한 작은 혐오감,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아주 작은 위화감의 집적이 압도적인 악의의 물결이 되어 우리를 덮치는 거야. 그건 그야말로 눈에 보이지 않는 쓰나미야. 나는 그 존재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깜빡 방심하고 말았어. 그 엄청난 파도에 사무가 먹혀버린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 아사히나는 크게 숨을 토해낸 뒤, "내가 그를 죽인 거야"라고 중얼거렸다.
방 안의 공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나유타는 숨이 막힐 듯한 분위기에서 달아나기 위해 화제를 바꿔보기로 했다.
"조금 전에 방송국 프로듀서가 다녀가셨지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메인 테마곡을 작곡해 달라는 얘기였다던데요."
한껏 환한 목소리를 냈지만 아사히나의 미간에 새겨진 주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 그만 포기해 달라고 말했어. 차바퀴의 한쪽이 없어졌으니 더 이상 달릴 수가 없어."

- 마도카는 똑바로 앞을 향한 채 "인간은 원자"라고 중얼거렸다.

"원자?"
"원자핵의 원자. 물질을 구성하는 기본 입자예요."

-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이 세상은 일부의 인간들만으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다. 얼핏 보기에 아무 재능도 없고 가치도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야말로 중요한 구성 요소다. 한 사람 한 사람은 범용하고 무자각적으로 살아갈 뿐이라 해도 그것이 집합체가 되었을 때, 극적인 물리법칙을 실현해 낸다. 인간은 원자다.." 
마도카는 나유타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정말 멋진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무리 범용한 인간이라도 살아만 있으면 이 사회의 흐름에 관여할 수 있다는 얘기니까요. 하지만 아사히나 씨의 말을 듣고 약간 생각이 달라졌어요. 사회라는 것은 항상 좋은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것은 아니죠. 무자각한 편견이나 차별 의식의 집적이 잘못된 흐름을 만들어내는 일도 있다는 걸 알았어요."
"아사히나 씨가 커밍아웃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얘기야?"

마도카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걸 알아보려는 거잖아요."

끝이 치켜 올라간 눈으로 나유타를 빤히 응시했다.

"맞아, 그렇지."
나유타는 앞을 보면서 차에 시동을 걸었다.

- 그래도 집합 장소에 나타난 마도카를 보고 마음이 놓였다. 제법 장비도 갖췄고, 단단히 준비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등산복은 새로 산 모양이다. 등에 멘 배낭도 등산화도 새것이라는 게 표가 났다. 헬멧은 광택을 내뿜고 있었다. 
한편 그녀와 동행한 다케오는 겉모습만 봐서는 그야말로 당당한 등산가였다. 이쪽도 옷차림이며 장비는 새것이지만, 서 있는 자세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단순히 건장한 체격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와는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지만 그날 처음으로 마도카가 정식으로 소개해주었다. 이름이 '다케오 도오루'라고 했다. '다케오'가 성씨라는 것이 나유타에게는 특이하게 느껴졌다.
등산 경험을 물어보니 "약간"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전에 등산이 취미인 분을 경호한 적이 있어서."  

- "그렇지 않아. 그것도 사랑이겠지. 그러니까... 두 사람의 사랑에 감동했다. 그렇게 표현해도, 뭐, 괜찮지."

중언부언하는 자기 자신에게 나유타는 화가 났다.

"왜 그래, 너? 단어 따위는 상관없잖아. 어떤 단어를 쓰건 내 마음이지."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아니, 상관없지 않아요." 나유타와는 대조적으로 조용한 어조로 마도카는 말했다. "그 점을 그냥 애매하게 넘어가버리면 그간 고생한 보람이 없어요. 오무라 씨의 죽음의 수수께끼를 풀어낸 의미가 없다고요."
"뭐야?” 나유타는 입을 헤벌렸다. "마도카가 오무라 씨의 사망 원인을 조사한 것은 아버지를 위해서, 우하라 박사님의 연구를 위해서였잖아. 아사히나 씨가 다시 힘을 내서 작곡할 때의 뇌의 움직임을 조사해 보려고...?"
하던 말을 멈춘 것은 마도카가 중간부터 고개를 저었기 때문이다.

- "미안. 그런 거 아니에요. 그건 거짓말."
"거짓말이라니?"
"우하라 수술법에 아사히나 씨의 곡이 효과적이라는 얘기는 거짓말이에요. 그냥 내가 지어낸 얘기죠."
"뭐라고? 대체 무슨 소리야!" 나유타는 마도카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나를 속였어? 왜, 뭣 때문에?"
"사정이 있었어요."
"대체 무슨 사정이길래 사람을 속여?"

어깨를 움켜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 "구도 나유타 씨를 구도 게이타로 되돌리는 것. 내 목적은 처음부터 그거였어요."

- "영화 <얼어붙은 입술>을 처음 봤을 때, 큰 충격을 받았어요." 마도카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평론가가 칭찬한 대로 인간의 본질을 파헤치는 대단한 영화라고 생각했죠. 끝없이 쾌락을 추구하면서 나이도 성별도, 자신이 처한 입장도 따지지 않고, 오로지 쾌락과 애정의 크기에만 집착하는 인간을 그야말로 뛰어난 영상미로 그려냈으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꾸 마음에 걸렸어요. 뭐가 마음에 걸렸느냐고? 그 주인공, 아니,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을 연기했던 남자애, 구도 게이타라는 아역 배우가 자꾸 마음에 걸렸어요. 저 아이는 대체 어떤 기분으로 저런 연기를 했을까, 저 역할을 연기할 때 어떤 생각이 마음속을 지배했을까, 궁금한 게 점점 많아졌죠. 왜냐면 그게 성을 탐닉하고 마지막에는 동성애에도 눈을 뜨는 역할이잖아요. 열세 살 소년이 연기하기에는 지나치게 하드 하다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겠죠." 

 

- "난 아무 생각도 안 했어." 나유타는 말했다. "머릿속을 텅 비운 채 감독이 지시하는 대로 몸을 움직이고 대사를 읊었을 뿐이야. 내 마흙속에는 어떤 생각도 없었어."
"하지만 그 영화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나유타 씨의 내면에 남아버린 것은 있겠죠."
"아니, 아무것도." 나유타는 즉각 답했다.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

"그래요? 근데 왜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을까."

"응?"
"내가 아마카스 사이세이에 대해 물었을 때, 그 영화에 대해서는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고 했잖아요. 아무것도 안 남았다면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텐데요." 
나유타는 작게 신음 소리를 올렸다. 똑똑히 답변해야 한다고 마음만 급할 뿐, 변명할 말은 얼른 생각나지 않았다.

 

- "그 말을 들었을 때 생각했죠. 아, 이 사람도 희생자구나,라고."

"희생자?"
"아마카스가 만든 영화의 희생자."

마도카는 말했다.

"아마카스 사이세이는 천재였지만, 배우를 일회용품처럼 쓰고 내버리는 것으로도 유명했어요. 작품을 위해서는 한 사람의 장래를 희생물로 삼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인생을 망가뜨리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라고들 했죠. 그래서 나유타 씨한테도 그랬던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어요."
나유타는 마도카를 쏘아보았다.

"나는 인생이 망가지거나 하지 않았어."

- ... 느꼈던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어때요?"

마도카가 물었다.
나유타는 숨을 가다듬고 그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
"좋아, 그게 불쾌했다면 어쩔 건데? 인권침해로 나를 고소할래? 어떤 사람에게나 왜곡된 부분은 있게 마련이야. 마도카 역시 완벽한 인간은 아니잖아."
마도카는 눈을 깜빡거리더니 지그시 나유타를 응시하며 후우 숨을 내쉬었다.

"... 다행이다.”
"뭐?"
"자기 마음속에 왜곡된 부분이 있다는 건 인정했네요. 그럼 됐어요. 한 걸음 진보했네요. 이제 얼굴을 들 수 있겠어요."

- "당신을 구해주는 건 어떤 사람의 바람이기도 했거든요."
"어떤 사람이라니?"
"내가 찾고 있는 사람. 전에 말했었죠? 그 사람이 나보다 더 걱정했었어요. <얼어붙은 입술>의 주인공을 연기했던 아역 배우의 장래를 마음에 상처가 남지는 않았나 하고, 만일 아직도 치유되지 않았다면 어떻게든 구해줘야 한다고 했어요. 어디선가 길을 잃고 헤매더라도 분명하게 제자리로 되돌아올 수 있게 도와주고 싶다고." 
"나는 딱히..."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여전히 나유타를 빤히 바라보는 마도카의 눈빛에 압도되어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 <어디선가 길을 잃고 헤맬지라도>

 

- "몸무게 60킬로그램인 성인의 체내 합계 칼륨이 120그램일 때 그 체내 방사능 양을 구하라-. 이 문제로 하면 어떻겠어?"

의자 등받이를 한껏 젖히고 겨울의 파란 하늘을 유리창 너머로 올려다보며 아오에 슈스케는 말했다.
하지만 옆자리의 오쿠니시 데쓰코에게서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오에가 돌아보니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었다.

"왜, 불만인가?"
오쿠니시 데쓰코는 검은 테 안경을 슬쩍 올리고 미간을 찌푸린 얼굴로 이쪽을 보았다.
"너무 간단한 거 아닌가요?"
아오에는 아랫입술을 툭 내밀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 "됐어. 이건 서비스로 내주는 문제야. 여기서 점수를 얻게 해 줘야지 안 그러면 낙제하는 학생이 많아져. 그러잖아도 환경분석화학은 학점 따기 어렵다고 인기가 바닥인데."
오쿠니시 데쓰코는 한숨을 내쉬며 노트북 키보드에 손끝을 올렸다.

"단서는 '아보가드로 수'만으로도 괜찮겠지요?"
"칼륨 40의 동위원소 존재비와 반감기도 적어줘."
"그런 건 대학생이라면 당연히 외우고 있어야지요."
"깜빡 잊어버린 경우도 있을 거잖아."
"자애로우시네요."

비아냥거리듯이 말하고 오쿠니시 데쓰코는 키보드를 치기 시작했다.

- 아오에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오늘은 정말 좋은 날씨다. 전형적인 겨울형 기압 배치여서 도쿄가 이만큼 날씨가 맑으면 동해 쪽은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 장기예보에 따르면 올겨울은 드물게 추운 날씨가 될 것이라고 한다. 도쿄는 대부분 겨울 끝물에나 눈이 내리지만 올해는 설날 무렵이면 눈을 볼 수 있을 거라는 예상이었다.

 

- <마력의 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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