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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다.
어려운 건축학적 지식도 필요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인문적 철학적 소양도 필요하지 않았다.
(건축 용어들이 조금 나오지만 저자가 잘 설명해주었기 때문에 그리 어렵지는 않다.)
오히려 아주 조금은, 가볍지 않은가 싶을 정도의 글.
스쳐지나가던 건물에 다시 한 번 눈길을 주기를, 그리고 거기서 무언가를 느끼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써나간 글임이 잘 느껴졌다. 사진들도 몇 장을 제외하고는 저자가 직접 찍었다고 한다.
아주 조금 기뻤던 것은, 지금은 사라진 건물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건물은 내가 직접 본 적이 있다는 것.
서울에 있어서 좋구나- 라고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부석사'.
아무래도 감정을 배제하고 읽기는 힘들었다. 자주 접하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감정을 제하고 바라보기가 쉽지 않다.
봄이 오면 오랜만에 부석사를 가고 싶어졌다. 국립현대미술관도 다녀와야지.
[발췌]
여기서 건축가들이 타협하는 방법은 돌을 쓰되 오해를 막는 것이다. 즉 돌을 '쌓았음'이 아니라 '붙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쌓았음의 의미가 줄눈에서 표현된다면 줄눈을 바꾸는 수밖에 없다. 돌을 쌓을 경우에는 그 줄눈들이 벽돌의 줄눈처럼 서로 어긋나야 한다. 그래야 돌들이 쐐기처럼 서로 맞물리면서 벽이 튼튼해지기 때문이다. 건축가들은 붙인 돌의 경우에는, 쌓은 돌로 벽을 만들 경우 사용하지 않는 격자형의 통줄눈을 만들어 돌들이 붙여져 있음을 고백하기도 한다. 돌을 세워서 붙이기도 한다. 돌을 세워서 쌓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가장 값싼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사회에서는 가장 값싼 문화가 만들어진다.
인간은 평등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소리 높여 주장해야 하는 상황이면 이미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 이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은 우리가 모두 추구하고 받아들여야 할 원칙이지만 실제로 그리 태어난다고 믿는 것은 섣부르고 위험하다. 평등하게 만들려는 노력은 중요하지만 실제로 이 세상은 그리 공평하지 않다.
남녀문제가 대표적이다. 단군신화에서 출발하여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서 남녀가 평등해 본 적은 없다. 그 수직적 관계는 건축에서 고스란히 표현된다. ... 현대의 주택에서 부엌은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노동의 공간이다. 이제는 부엌이라고 하면 냉장고와 식탁이 들어선 입식생활의 모습이 상정된다. 그러나 여전히 주방에서 노동하는 사람은 주부, 즉 여자로 인식된다. 문제는 이 부엌이 여전히 노동하는 사람을 소외시키는 건축 형식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부엌에서 작업대는 항상 벽을 면하고 배치되어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른 가족 구성원들을 등지고 작업을 해야 한다. 입식생활이 전제가 되는 상황이어도 베란다에는 쪼그리고 걸레를 빨아야 하는 높이로 수도꼭지가 설치되어 있곤 한다.
건축가들 중에는 낮 시간에 주택에서 체류하는 주부의 노동 공간인 부엌이 안방 대신 남족에 배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상당한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이지만 사회적인 관성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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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화장실의 변기는 각각 몇 개씩을 놓아야 할까. 그 사무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남녀 비율로 놓아야 할까? 그러나 여자는 남자보다 화장실에 더 오래 머물고 좀더 다양하게 이용한다. 이름 그대로 화장실이니까. 그렇다면 숫자 비례로 변기를 놓는 것은 오히려 불공평하다. 게다가 건물을 설계할 때는 도대체 이 건물을 사용할 사람들의 남녀 비율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대개의 경우 사무소 건물에서는 여자 직원의 수가 적다는 이유로 여자 화장실이 더 작은 규모로 계획도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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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 화장실의 설치 및 관리 기준을 설정해 놓은 ... 남녀의 변기 비율은 8:8이 되었다. 그러나 이는 1997년에야 개정된 내용이고, 1973년에 제정된 이래로 이 비율은 8:5로 유지되던 것이다. 남녀가 화장실을 통해 공평한 대우를 받게 되는 데 근 25년이 걸렸다. 아니면 25년이 걸려서야 여자는 남자만큼 빈번히 공중 화장실을 이용할 정도로 사회 활동을 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문제는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니다. 여자의 화장실 이용 시간이 남자보다 약 두 배 정도 길다는 사실은 아직 고려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 남자들의 화장실 이용 시간이 여자의 두 배라고 가정할 때도 이 비율이 8:8로 남아있을지는 모를 일이다. 법을 만드는 곳에는 남자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건축하는 이를 아무나 붙들고 한국에서 가장 훌륭한 건물이 뭐냐고 물어보라. 많은 사람들이 <부석사 浮石寺> 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대답하지 않은 사람도 옆의 누군가가 <부석사>라고 하는 데 굳이 반박하지는 못할 것이다. <부석사>는 건축의 영원한 고전이다.
"저 건물은 멋있는 겁니까?"
이 질문은 잘못된 것이다. 잘못되어 있지 않다면 위험하다. 우선 이 질문의 대답은 질문자 스스로 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두 눈으로 보아야 한다. 대상의 감상과 판단은 스스로 하여야 한다. 그 판단의 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받침이 지루하게 이 책에서 서술된 것이다. 건축의 화두는 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건축의 가치는 멋있다고 표현될 수 있는 것 너머에 있다. 건축은 우리의 가치관을, 우리의 사고 구조를 우리가 사는 방법을 통하여 보여주는 인간 정신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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