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017)

[은희경] 새의 선물

일루젼 2012. 3. 2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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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선물
국내도서>소설
저자 : 은희경
출판 : 문학동네 2010.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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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나는 이 책으로 처음 알게된 그녀의 이름을 아마도 오래도록 기억할 것 같다.
그녀가 첫 소설인 '새의 선물' (나는 처녀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이제는 거부감을 느낀다) 에서 그려낸 '나', '진희'는 아마도 어느 정도 작가 자신이기도 했겠지만 읽는 나에게는 또다른 나이기도 했다.
그녀의 약간 빈정거리는 듯 담담한 문체는, 어느 정도 나의 평소 말투 (겉으로 표현하는 일은 드물지만)와 닮아있다. 혹은 가끔 끄적이는 것들과도. 

유년 시절.
아이답게, 아이다운 천진함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기억이 거의 없는 나는 '진희'였다.
그러나 내가 다소 떨리는 마음으로 이 책을 내려놓는 것은, 마지막으로, 그녀의 시야가 흐려졌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마지막 어린 마음까지 앗아갔었다면 나는 아마도 많이 슬펐을 것이다.

12살.
지나치게 빨리 세상을 알아버린 한 소녀의 눈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가족과, 그 집에 세들어 살고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
너무도 현실감이 있어 오싹할 정도의, 다분히 자전적이라 의심되는 글.

소설은 어떤 것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없다. 물론 자전적 소설이라는 애매한 경계에 걸쳐진 작품들이 있지만, 실제 그런 일을 겪은 사람의 기억과 감정마저도 왜곡되기 마련인데 그것을 상상으로 풀어낸, 그것도 각색하고 짜맞춰 극적으로 부풀린 '작품'은 결코 사실에 대한 반증이 될 수 없다.
다만, 그것은 실제로 그와 유사한 경험을 했던 사람의 기억을 건드려 불현듯 과거를 되새김질하게 만들거나.
혹은 겪지 못한 사람에게 간접적인 상상의 세계를 선사하며 '나였다면...' 하는 역지사지의 공감과 경이를 이끌어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와 인물이 현실감이 있으면 있을 수록, 독자를 몰입시키고 일체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제외된 글은 아무리 좋은 플롯이라 해도 하나의 '이야기'일 따름이며, 감동과 수용, 또는 깨달음과는 거리가 먼 하나의 장식품으로 남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아름답겠지만.  

잘 짜여지고 군더더기 없는 논리. 그리고 그것 일체에서 나오는 정제미는 나에게 스왈롭스키의 크리스탈들을 연상시킨다.
아름답고, 순수하고, 깨끗하다. 하지만 그래서 부서지기 쉬우며, 생명의 부재가 더욱 부각되고 만다.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모순. 그리고 하나의 논리로 결코 설명할 수 없는 군집들.
그것이 뒤엉킨 배신과 사랑과 기쁨과 슬픔, 증오와 분노... 그런 일련의 감정의 소용돌이들이 얽힌 것이 삶이고, 그래서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지만 오히려 가장 예측하기 쉬운 것도 삶이 아닐까 한다.

'새의 선물'에서 나는 그런 삶의 조각과 함께 나의 어린 시절을 보았다. 예전, 아주 예전의, 어린 내가.
소설 속은 60년대였지만, 나의 90년대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학교를 마치면 부러 돌아가는 길을 골라 혼자 걷던 강둑, 산길, 흐르던 강물과 물잠자리들.
흔들리던 빨간 대 메밀과 아카시아들.

나는 '진희'만큼 세상을 빠르게 관찰하고 처신하지는 못했지만, 그녀와 유사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고, (라고 생각하고) 
나의 세상에서도 아이들은 아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잔혹함을 가지고 있었고, 학교에는 소소한 비리가 있었으며, 불륜도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어른들은 그 나이의 아이들은 모를 것이라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나는 알고 싶지 않은 것들까지 알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나의 유년기를, 순수할 수 있었던 시절을 박탈당했다. 

하지만 이것은 적절치 못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와 같은 고통이나 힘든 상황에 놓이지 않았었고, 그것들은 누군가가 내게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내 눈에 띈 것이었다. 그런 부조리들은 지나칠 정도로 눈에 잘 들어왔는데, 나는 같은 것을 보면서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이들의 심상함이 부러웠다. 그러나 그 반면, 평범하고 당연한 것들은 내게 어려운 숙제로 남았고, 느끼는 대로, 욕망에 충실하게 살면 되는 자연스러운 삶은 항상 동경의 대상이었다. 나는 '금기'에 대한 두려움을 지나치게 일찍 잃어버렸다.
힘든 것이 닥쳤을 때 나의 대처 역시 그녀처럼 한 발 물러선 '관찰하는 나'를 만들어 그 상황을 마치 영화를 보듯 즐기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나의 특수성을 잃고 그녀와 동질감을 느낄 수 있어서 무척 기뻤다. 

지금은 잘 살고 있을까, 이젠 마흔을 앞두고 있겠구나, 하고 소식이 궁금했던 그 누군가는 소설 속 '허석'의 위로 드리워졌다.
나에게도 '허석'같은 존재가 있었고, 종일토록 틀어박힐 수 있는 아버지의 책들이 가득한 서재가 있었으며, 그리고... 내게는 그녀에게는 없었던 부모님이 있었다.

그렇게 나는 '진희'와 닮았으며, 또한 달랐다. 어쩌면, '봉희'나 그녀의 '이모'와 더 닮았을 지도.
만약. 어쩌면. 내가 조금만 더 그녀와 닮았더라면, 나는 훨씬 더 일찍 좀 더 어른스러워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발췌]

나에게 있어 사랑은 거의 마음먹은 대로 생겨나고 변형되고 그리고 폐기된다. 삼십대 중반을 넘긴 나에게 지금까지 사랑으로 인한 가벼운 비탄과 회한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쩌면 그것도 달콤한 구색이었을 뿐이다. 나는 사랑이란 것은 기질과 필요가 계기를 만나서 생겨났다가 암시 혹은 자기최면에 의해 변형되고, 그리고 결국은 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
나의 분방한 남성편력은 물론 사랑에 대한 냉소에서 온다.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만이 쉽게 사랑에 빠지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위해 언제라도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나의 열정은 삶에 대한 냉소에서 온다. 나는 언제나 내 삶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왔으며 당장 잃어버려도 상관없는 것들만 지니고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해왔다. 삶에 대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만이 삶에 성실하다는 것은 그다지 대단한 아이러니도 아니다.


나에게도 귀와 눈이 있다는 것 따위는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그들은 할머니가 들어오실까봐 바깥 기척에만 신경을 쓰며 내 앞에서는 드러내놓고 그 얘기를 길게 늘어놓았다. 자기들의 얘기를 더욱 실감나고 흥미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나라는 물증을 수시로 흘깃흘깃 두드려보고 뒤집어보고 흔들어보면서....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남의 시선을 싫어하게 된 것은. 한동안은 누가 나를 쳐다보고 수군거리기만 해도 엄마 이야기라고 지레 짐작했으며 남에게 그것을 눈치채이기 싫어서 짐짓 고개를 숙여버리곤 했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남에게 관찰당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나는 누구보다 일찍 나를 숨기는 방법을 터득했다.
누가 나를 쳐다보면 나는 먼저 나를 두 개의 나로 분리시킨다. 하나의 나는 내 안에 그대로 있고 진짜 나에게서 갈라져나간 다른 나로 하여금 내 몸 밖으로 나가 내 역할을 하게 한다.
내 몸 밖을 나간 다른 나는 남들 앞에 노출되어 마치 나인 듯 행동하고 있지만 진짜 나는 몸속에 남아서 몸 밖으로 나간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하나의 나로 하여금 그들이 보고자 하는 나로 행동하게 하고 나머지 하나의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때 나는 남에게 '보여지는 나'와 나 자신이 '바라보는 나'로 분리된다.
물론 그 중에서 진짜 나는 '보여지는 나'가 아니라 '바라보는 나'이다. 남의 시선으로부터 강요를 당하고 수모를 받는 것은 '보여지는 나'이므로 '바라보는' 진짜 나는 상처를 덜 받는다. 이렇게 나를 두개로 분리시킴으로써 나는 사람들의 눈에 노출되지 않고 나 자신으로 그대로 지켜지는 것이다.
진짜의 나 아닌 다른 나를 만들어 보인다는 점에서 그것이 위선이나 가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다. 꾸며 보이고 거짓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나를 두 개로 분리시키는 일은 나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작위'라는 말을 알게 된 뒤부터 그런 의혹은 사라졌다. 나의 분리법은 위선이 아니라 작위였으며 작위는 위선보다 훨씬 복잡한 감정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부도덕한 일은 아니었다 .


지금 그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장군이 되고 싶어하는 것과 반대로 장군이를 보고는 많은 사람들이 장군을 시시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어쩌면 시시한 장군이란 것은 군인이란 개념을 전혀 다른 뜻으로도 보여줄 수 있다는 상징적 의미에서 훌륭한 장군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이 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군이는 장군이 되기는 틀렸기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장군을 시시하게 여길 수 있도록 시시한 장군의 역할을 할 기회마저 분명히 없을 테니 그것이야말로 장군이 엄마의 비애가 아닐 수 없다.


할머니는 그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다. 지금 할머니가 머릿수건과 밀짚모자, 그리고 호미를 챙겨드는 것을 보면 밭에 나가는 길임은 물어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뻔한 일을 아무 짐작 없이 일일이 물어보는 것이 이모의 버릇이라면 그렇게 뻔한 일에는 절대 대답을 해주지 않는 것이 또 할머니의 고집이다.


나는 봉희처럼 어른스럽게 보이려고 하는 어린애들을 경원한다. 어른처럼 보이고 싶어하는 것처럼 스스로 어린애임을 드러내 보이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어른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가장 어린애답게 보이는 것이다. 어린애로 보이는 것은 편리하기도 하지만 비상시에는 강력한 무기도 된다. 그런데도 아무런 이지적 노력 없이 가만히 있기만 해도 시간이 해결해주는 그따위 신체적 성장을 남의 눈앞에 앞당겨서 보이려 한다거나 다만 금기라는 사실 때문에 본뜰 가치도 없는 어른 흉내에 매료된다거나 하는 것은 역시 봉희 같은 어린애들만의 생각이다.


입술을 비죽거리며 방바닥으로 내려앉는 이모는 스무 살을 어디로 다 먹었는지 아무리 봐도 어른스러운 모습을 느낄 수가 없다. 저렇게 어린애 상태에서 머물러버린 것은 어쩌면 어린 시절을 고뇌없이 보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내게 있어서는 태생의 고뇌야말로 성숙의 자양이었다. '고뇌'라는 그 자양이 삼촌 방의 다락에서 이루어진 '독서'라는 자양과 합해지면서 비로소 삶에 대한 나의 통찰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처럼 할머니가 마땅히 이모를 야단을 쳐야 할 때 어이없이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면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내 정통성이 뿌리를 내린 곳은 할머니의 사랑이 아닌 책임감이나 의무 따위의, 그러니까 사랑보다 훨씬 저급한 감정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에는 이쁘고 좋기만 한 고운 정과 귀찮지만 허물없는 미운 정이 있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언제나 고운 정으로 출발하지만 미운 정까지 들지 않으면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고운 정보다는 미운 정이 훨씬 너그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또한 확실한 사랑의 이유가 있는 고운 정은 그 이유가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지지만 서로 부대끼는 사이에 조건 없이 생기는 미운 정은 그보다는 훨씬 질긴 감정이다. 미운 정이 더해져 고운 정과 함께 감정의 양면을 모두 갖춰야만 완전해지는 게 사랑이다.
할머니의 사랑 중에 고운 정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나라면 이모는 물론 미운 정 쪽이다. 이모는 고운 정을 갖기는 틀렸기 때문에 할머니에게서 완전한 사랑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다. 그러나 나는 미운 정을 얻기 위해 할머니에게 함부로 군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자신이 없다. 어쩌면 미운 정이란 고운 정보다 훨씬 더 얻기 힘든 무르익은 감정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런 장면을 가금 상상하곤 했다. 기우제 때 처녀를 바치는 제단이 있다. 비가 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무기에게 처녀를 바쳐야 하는데 처녀라고는 이모와 나 뿐이다. 이때 할머니는 우리 둘 중에 과연 누구를 그 컴컴한 동굴 속에 집어넣을까.
그에 대한 내 대답은 놀랍게도 나였다. 또한 그럴 줄을 알면서도 번번이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내가 가진 간절함이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일찍이 광진테라 아줌마의 인생 속에서 통찰했듯이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삶에 대해 갖는 애정이란 집요한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배신감과 질투의 탁류 속에 버려두지는 않는다. 내가 나를 탁류가 아닌 옥류로 데려와 정갈하게 씻긴 다음 날개옷을 입히는 방법은 이러하다.
먼저 나는 이무기에게 처녀를 바치는 일은 항상 있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하고 반문한다. 우리가 흔히 부닥치는 것은 누가 아름답고 누가 아름답지 않은 처녀인가 하는 일상적인 문제이지 어떤 처녀를 죽음의 동굴 속에 집어넣는가 하는 극적인 문제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누구를 선택함으로써 누구를 배반해야 하는 극한 상황은 자주 오는 것이 아니다. 이모냐 나냐 하는 기회가 온다면 할머니는 이모를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그 기회는 일상적인 것이 아니다.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다. 그리고 '운명'이라고 부르는 그런 기회는 어디까지나 우연히 오는 것이다.
따라서 이모가 아닌 나 자신이 폐기되고 말 그런 운명의 순간을 평소에 굳이 의식할 필요는 없다. 평소에는 일상적인 현실 안에서의 우월감을 갖고 살면 그만이다. 서자를 선택할 기회는 극한상황에서나 있는 것이지만 보통의 현실에서 공개적 사랑을 받는 것은 언제나 적자가 아닌가. 나와 이모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이 할머니의 여생에 오지 않기가 쉽다. 그렇게 생각하자.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 발걸음이 꽤 무거웠다는 것만을 깨닫는다. 왜 이러지? 내 기분을 살펴본다. 내 감정에 대한 거리유지가 몸에 배다보니 나의 정서적 반응은 이렇게 한참 뒤에 온다. 때문에 나는 내가 지금 왜 이런 기분인지 항상 돌이켜서 그 이유를 유추해내곤 한다.
탱자잎을 손에 쥔 채 나는 한참을 그대로 서 있다. 자신이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않은지 기억을 더듬어가면서.
식은 잿더미를 천천히 헤쳐보니 그 안에 불씨가 하나 있긴 있었다. 깊이 묻혀 있던 불씨는 잿더미 밖으로 나오자 산소를 빨아들이며 갑자기 불꽃이 커진다.
'그거였어?'
나는 짜증이 난다.


미리 그런 상상을 통해 스스로 상처를 내놓으면 단련이 되어서 실제로 닥쳐오는 상처는 작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도 깊은 것을]


사람의 감정이란 언제 변할지 모르며 특히 젊은이를 변심하게 만드는 일은 이 세상에 너무나 많다. 그러므로 상대가 나를 사랑할 때 내가 행복해진다면 그것은 상대의 사랑을 잃을 때 내가 불행해진다는 것과 같은 뜻임을 깨닫고 그 사랑이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한편 그것이 사라질 때의 상실감에 대비해야만 하는 것이다. 타인을 영원하고 유일한 사랑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이세상에 그런 사랑은 있지도 않다는 것을 이모는 진작에 알았어야 했다.


사람의 마음에 선과 악이 함께 있다는 것은 굳이 할머니 말씀을 듣지 않아도 나 스스로 체득한 지 오래이다. 나는 선이나 악 모두가 내 마음 깊이에 똑같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중 어느 한쪽만을 나의 진실한 모습이라고 주장할 마음은 전혀 없다.


대체 우리들이 나라고 생각하는 나는 나라는 존재의 진실에 얼마나 가까운 것일까.


할머니는 이모가 안쓰러운 거였다. 갈상머리 없고 덤벙대는 막내 딸이 속을 끓이며 아파하니 그것이 더 할머니 마음에 와 닿는 모양이었다. 성숙한 어른이 슬퍼하는 것보다는 철없는 아이의 슬픔은 더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러므로 철없는 사람은 마음껏 철없이 행동하면서도 슬픔에 닥치면 불공평하게도 더 많은 사랑과 배려를 받는 것이다. 성숙한 사람은 으레 슬픔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그같은 배려를 받지 못한다. 성숙한 사람은 언제나 손해이다. 나는 너무 일찍 성숙했고 그러기에 일찍부터 삶을 알게 된만큼 삶에서 빨리 밑지기 시작했다.


나는 이모와 허석과 할머니에게 한꺼번에 배신당햇으며 더욱 비참한 것은 그렇게 배신당한 것을 아무에게도 눈치채여서는 안 되므로 이모처럼 노골적으로 비탄에 빠질 수도 없고 위로나 배려를 받을 수도 없다는 점이었다. 내 고통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의 내면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모와 나 또한 그라는 존재를 가슴에 간직한 채 그대로 덮어두고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를 가슴속에서 끄집어내 뭔가를 물어보려고 한다거나 지나간 일의 의미를 확인해보려고 한다면 그날로 우리 모두의 삶이 다시 한번 흔들리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질문에 대답을 들은들 현재의 아무것도 바꿔놓을 수 없으며 과거의 감정에 대해 진의를 알고 싶어하는 것 자체가 헛된 미련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모든 것을 우리는 함께 치러냈다. 그 가을 이후 이모는 많이 성숙했다. 그리고 내가 이모를 그렇게 느끼는 것만큼이나 이모 역시 나를 보고 많이 성숙했다고 느끼는 모양이었다.
내가 생각하기로 나는 더이상 성숙할 게 없었다.
어느 날 나는 지나간 일기장에서 '내가 믿을 수 없는 것들'이라는 제목의 긴 목록을 발견했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믿지 않는다 말인가. 이 세상 모든 것은 다면체로서 언제나 흘러가고 또 변하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사람의 삶 속에 불변의 의미가 있다고 믿을 것이며 또 그 믿음을 당연하고도 어이없게 배반당함으로써 스스로 상처를 입을 것인가. 무엇인가를 믿지 않기로 마음먹으며 그 일기를 쓸 때까지만 해도 나는 삶을 꽤 심각한 것이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
나는 그 목록을 다 지워버렸다.
이제 성숙한 나는 삶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또 어린애의 책무인 '성숙하는 일'을 이미 끝마쳐버렸으므로 할 일이 없어진 나는 내게 남아 있는 어린애로서의 삶이 지루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나는 왼쪽 털신 속에 발을 집어넣고 이번에는 오른쪽 털신을 벗어들고는 그 안의 눈을 털어냈다. '보여지는 나'가 말한다. 공손하게 인사를 해. 침착하게. '바라보는 나'가 말한다. 반가워하지 마. 아버지라고? 농담이야. 60년대엔 나에게 아버지가 없었지. 그러니 이건 새로운 농담임이 틀림없어. 70년대식 농담인 거야. 시대라는 구획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건 어쩔 수 없이 인정하더라도 맙소사, 아버지라니, 70년대엔 내게 아버지가 있다니. 이건 대단한 농담이다.
한쪽 손으로 마루 기둥을 잡고 한쪽 손으로 댓돌 위에 털신을 연신 패대기치면서, 그리고 한쪽 다리로 서 있었지만 나는 조금도 비틀거리지 않았다.
눈이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 때 나도 이런 눈을 만들어본 적이 있다. 붓에 흰 물감을 듬뿍 적셔서 검은 켄트지에 마구 뿌려대는 것이다. 그러면 검은 밤 위로 흰 눈이 쏟어지는데 눈이 너무 많이 쏟아지니 시야가 흐릴 것이므로 당연히 다른 풍경은 그릴 필요가 없었다. 지금 나도 시야가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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