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이와타 슈젠] 배신과 음모의 세계사 - 배신이야말로 승리로 가는 지름길

일루젼 2021. 7. 6. 0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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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와타 슈젠 / 오수근
출판 :  매일경제신문사
출간 :  2014.09.15


 

재미있게 읽었다. 

분류는 큰 시간 틀 안에서 지리적 위치에 따라 1차, 그 위치에서의 시간대 순에 따라 2차로 나눈 것으로 보인다.

근대와 현대에서는 동서양의 영향이 맞물리니 교차가 필요했겠지만 고대나 중세에서도 그렇게 해야 했을까는 약간 의문이다. 

 

자극적인 제목과는 조금 다른 본문이다. 배신과 매파 전략만을 다루기보다는 티포텟의 스탠스에 가깝다.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사건이나 그 사건의 시발점이 된 결정을 다루고, 그에 대한 비주류적인 관점이나 음모론적인 시각을 함께 다루어준다.

그 과정에서 처음 접하는 내용도 있을 수 있고 이미 들어본 적이 있는 내용도 있을 수 있는데, 전체적으로 복잡하지 않게 설명해주어 흥미롭게 읽었다. 

 

드라마나 영화, 소설 같은 작품에서 충격적이라고 평가받는 장면들이 사실은 역사적으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차용한 경우가 많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특히 피의 결혼식은 드물지 않았던 것 같다. - 목걸이 하니 삼총사도 생각나고. 

 

 


- 이 혁명은 미라보와 로베스피에르 등이 지도자가 되어 시민을 이끌었는데 그들은 사실 프리메이슨이라는 비밀결사 의회원이었다. 프랑스혁명의 성공은 '자유와 평등'을 중시하는 프리메이슨 없이는 불가능했다. 또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부부가 암살된 사라예보 사건에 관하여 학교 수업에서는 세르비아인 청년이 범인이었다고 밖에는 배우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배후에는 야망으로 가득 찬 세르비아 군인의 지휘를 받는 '검은손'이라는 결사가 존재했다.

 

- 그 때문인지 근대 이후로 프리메이슨과 유대인을 무수한 음모설의 주모자로 지목하는 경향이 있다. 그 배경에는 자신들과 인식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위화감과 편견, 반발, 그리고 사회를 움직이는 무리에 속하지 못한 자들과 이권을 갖지 못한 자들의 시샘과 질투가 있다.

 

- 이렇게 신하들이 음모하여 암살했을 것이라는 설과 함께 인도의 왕이 암살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알렉산드로스의 정벌에 위기감을 느낀 인도의 왕이 독낭을 자객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인도의 왕은 갓난아기를 독낭으로 키운다는 말이 있었다. 아기가 태어나면 요람과 이불 아래에 독약을 넣어서 아기를 독에 익숙해지도록 키우는 것이다. 또 지속해서 우유에 독을 집어넣어 독이 아기에게 생명의 양식과도 같은 것이 되도록 한다. 그러면 계집은 독과 다름없는 존재로 자라난다고 한다. 
인도의 왕은 이 독낭을 알렉산드로스에게 상납했다. 계집은 거무스름한 피부, 칠흑 같은 머릿결과 눈동자를 가진 절세미인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한눈에 반해 계집을 자신의 침실로 데리고 들어가서 그녀에게 입맞춤했고, 바로 그때, 대왕은 맹렬한 고통을 느끼고, 며칠 후 죽음을 맞이한다.

(리뷰자 주 : 독희 생각이 난다.)

 

- 이런 이유에서 로마교회의 교황 레오 3세는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에게 제관을 씌운 것이다. 
카롤루스 대제가 로마교회의 교황 레오 3세에게 관을 수여받았다는 것은 황제가 존재하지 않았던 서유럽에 로마제국이 재건되었음을 의미했다. 교황과 황제가 성과 속으로 역할을 분담하고 권위(교황 레오 3세)와 권력(카롤루스 대제)이 손을 맞잡음으로써 중세 서유럽 세계의 기초가 구축된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서로마제국은 카롤루스 대제의 아들인 루이 1세가 죽은 후에 그의 3명의 자녀에게 각각 동 프랑크, 서 프랑크, 중부 프랑크와 이탈리아로 각각 분할되어 나눠진다. 이 것이 후에 각각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가 된다.

 

- 유럽에서 십자군 원정은 3대 순례지의 형성을 의미한다. 총본산인 로마 바티칸, 성 야곱(Jacob)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지는 이베리아 반도(Iberia Pen)의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Santiago de Compostela), 그리고 예루살렘이다. 상업 르네상스와 화폐경제의 진보를 배경으로 사회경제가 발전함에 따라서 3대 순례지를 방문하는 서민 여행객도 계속해서 증가한다.

(리뷰자 주 : 산티아고 순례길도 한 번 걸어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고 말하자 오랜 지인이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라고... ㅠㅠ)

 

- 템플 기사단의 정식 명칭은 '크리스트와 솔로몬 신전의 청빈 기사단'으로, 구성원을 '템플 기사'라고 불렀다. 요한 기사단(Ordo Equitum Sancti Johannis), 독일 기사단(Deutscher Orden)과 함께 3대 수도 기사단의 하나로 꼽히는 유서 깊은 기사단이다. 
창설자는 12세기 프랑스의 기사 위그(Hugues de Payens)와 그의 동료이며, 성지 예루살렘을 이교도로부터 지키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했다. 당시 예루살렘의 왕은 그들에게 솔로몬 신전 근처에 숙소를 제공했고 이것에서 유래하여 '템플(성당) 기사단'이라고 불리게 된다. 중동과 유럽에서 이슬람 세력을 상대로 뛰어난 활약을 펼치자 로마 교황도 이들을 인정한다. 

 

- 결행의 날은 마르그리트와 앙리 드 나바르의 결혼식 날이었다. 카트린은 딸의 결혼식을 피로 물들이는 일도 주저하지 않는다. 1527년 8월 24일 생 바르텔레미의 밤에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해주기 위해서 많은 위그노 귀족이 집결한 가운데 세기의 대학살을 자행된다. 
위그노는 물론이고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서 파리를 방문한 다수의 일반인까지도 모두 살육되어 궁전은 순식간에 붉은 피로 물들었다. 나아가 폭도로 변한 가톨릭 시민이 프로테스탄트 시민의 집을 차례로 습격하는 사태까지 발생하면서 사상자의 수는 프랑스 전역에서 5만 명에 이르렀다. 
국가를 지키고자 했던 카트린의 책략은 실패로 끝난다. 그 결과로 그녀는 세기의 대학살을 자행한 '검은 베일 속의 여왕'이라고 후세에 불리게 된다.

 

- 한편 그의 항해 중 일부는 영국의 국가전략과도 관련이 있었다는 설이 있다. 

1768년 쿡은 범선 인데버 호를 이끌고 세계 항해에 나섰다. 목적은 금성이 태양 앞을 지나갈 때의 궤도를 천문학적으로 관측하는 것이었다. 멀리 떨어진 지구 상의 두 지점에서 관측을 함으로써 지구와 태양의 거리를 산출하려고 했다.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국왕이 자금을 댔고, 과학자 팀도 한 배에 탔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순히 학술적인 탐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금성 관측은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사실 쿡은 영국 정부로부터 극비 임무를 부여받았다.

 

- '자유', '평등', '박애'는 한 비밀결사의 이념이었다. 

 

- 이렇게 프로이센은 북독일 연방의 맹주가 되었다. 그러나 주 독립 성향이 강했던 남독일 연방은 통일을 합병으로 간주해서 프로이센을 따르려고 하지 않았다. 
특히 완고했던 나라가 강국 바이에른이었다. 바이에른을 제압하지 않으면 독일 통일은 불가능했지만, 바이에른은 저항을 굽히지 않았다. 통상적이라면 이때 바이에른을 치는 게 자연스러운 수순일 것이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다음 표적으로 바이에른이 아니라 프랑스를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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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레오파트라 7세의 무기는 다름 아닌 '여성으로서의 매력'이었다. 그녀는 당의 황제 현종이 총애했던 양귀비와 함께 '세계 2대 미인'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미인이다. 금발과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진 그리스 계통의 미인이었다고 전해진다. ... 그뿐만이 아니다. 그녀는 미모와 동시에 지성도 갖추고 있었다. 수많은 외국어를 구사했으며 언변이 유려하고 사교성이 뛰어났다. 클레오파트라 7세의 무기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미모와 지성이었다. 

 

- 필립 4세의 계획은 완벽하게 성공을 거둔 셈이다. 아비뇽 교황청은 클레멘스 5세 이후의 7명의 교황이 재임하는 기간까지 계속해서 유지된다. 이 시대를 고대에 유대인이 바빌론으로 강제로 당했던 사건에 빗대어 '교황의 바빌론 유수'라고 부른다. 

 

- 필립 4세가 악마 숭배 집단으로 모함하여 템플 기사단을 파멸시킨 것으로 알려졌는데, 실제로 기사단 내부에는 의심스러운, 비밀의식과 계약이 존재했다고 전해진다. 예를 들어 입단식 때에는 교회의 어느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모두 벗고 알몸을 물로 정화했다고 한다.

 

-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독약! 보르자 가문은 독살의 명수 르네상스 시대에 악명을 떨쳤던 이탈리아 · 로마의 보르자 가문은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에 걸쳐서 전성기를 누렸다. 10년 남짓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사이에 보르자 가문의 정점에 있던 로마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체사레 보르자는 수많은 정적과 라이벌을 독살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음모를 꾸몄다. 독살에 사용된 것은 보르자 가문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칸타렐라(cantarella)'라는 독약으로, 조합하는 방법에 따라서 사망까지의 기간을 조절할 수 있었다고 한다. 즉사를 시킬 수도 있고 1년에 걸려서 죽일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독살에서는 보르자 가문을 능가할 사람이 없다고 했을 정도로 독살의 명수였다고 한다.

 

- 마리아 테레지아는 카우니츠를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에 외교관으로 파견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는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카우니츠는 우선 그의 애첩이자 재상과 맞먹는 실권을 쥔 것으로 알려진 퐁피두 백작부인에게 접근했다.  
퐁피두 백작부인은 성격이 도도한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카우니츠의 세련된 화술, 품위와 절도 있는 매너, 넘치는 교양에 호의를 품었다. 카우니츠는 그녀가 야만적이고 횡포를 일삼는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2세를 몹시 싫어한다는 점을 알았다.

 

- 라 모트 백작부인은 왕비의 편지를 위조해 창녀를 왕비 대신 로앙과 만나게 하는 등 감쪽같이 로앙을 속여 대금을 받아냈다. 그리고는 가로챈 대금을 갖고 런던으로 도망쳤다. 거기서 그녀는 해체한 목걸이를 내다 팔아 사치와 향락을 즐겼다. 

 

- 이 무렵에 잔 다르크는 농민을 중심으로 하는 군대를 이끌고 있었고, 샤를 7세의 전쟁 불확대 방침을 방해할 우려가 있었다. 확실히 잔 다르크는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이었다. 그녀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프랑스는 잉글랜드에 패했을 것이고 샤를 7세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녀에게는 그 어떤 존재가치도 없었다. 오히려 귀찮은 존재로 변했다. 그래서 샤를 7세가 잔 다르크를 버렸을 것으로 추측한다.

(리뷰자 주 : 질 드레도 함께 찾아보면 흥미롭다.)

 

- 처음에는 그랑 로제 내셔널이라는 로지(집회 장소)가 프랑스 국내의 프리메이슨 세력을 주도했다. 그것이 점차 규모가 커지면서 프랑스 대동사, 프랑스 대로지, 혼성 대로지, 전국 대로지 등으로 분열되었고, 프랑스 국내에 600개가 넘는 로지가 설립되게 되었다. 국민회의 성원 중 3분의 2에 달하는 사람들도 프리메이슨 단원이었다고 한다.  
그중에는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끈 인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치적 지도자 미라보, 혁명의 사상적 지주가 된 몽테스키외, 자코뱅파 리더 로베스피에르 등이다. 

 

- 미국 독립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지도자 중 프리메이슨 단원으로 추정되는 인물로는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벤저민 프랭클린 등이 거론된다. 워싱턴은 식민지군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했고, 후에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제퍼슨은 독립선언의 초안을 만들고, 프랭클린은 그에게 협력했다. 특히 프랭클린은 프리메이슨의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등공신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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