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김보영] 멀리 가는 이야기 - 김보영 중단편선 1

일루젼 2021. 7. 18.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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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보영
출판 :  행복한책읽기
출간 :  2010.06.05


 

하나

 

도서관에서 구해 읽다가 몇 장 넘기지 않아 중고도서를 찾아 구매했다.

이건 소장해야 할 도서다! (왜 절판이지?!)

 

김보영의 다른 도서 리뷰에서도 생각했었지만, 이제는 확실하다.

현재 저자가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이 글들을 쓰던 2000-2005년 당시에는 확실히 특정 사상에 관심이 있었다.

 

김보영은 낯설게 보기의 달인이다. 화려한 기교를 부린 것도, 트릭을 쓴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한순간에 독자를 당황스럽게 만든다. 담백하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어서 더 억울하다. 너무 억울한데, '이게 당연한 거잖아?'라는 세계관 앞에서는 할 말이 없다. 내가 멋대로 한 착각이니까. 나에게 '자연스러운' 상식과 환경이 그 글에서 '자연스러운' 그것과 다른 것뿐이니까.

 

그리고 그런 특기를 가진 저자의 시선을 통해 보는 빛과 우주는 매우 신선하다. 어쩐지, 이해하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들만큼.  

 

 

 

맨 마지막에 실린 <멀리 가는 이야기>는 다듬어져서 <미래로 가는 사람들>로 재출간되었다.

<스텔라 오디세이 트릴로지> 중의 세 번째 이야기인데, 발표된 순서로는 첫 번째라니 다소 아이러니하다.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와 <당신에게 가고 있어>는 읽었고 마침 <미래로 가는 사람들>만 남겨놓고 있었는데, 이렇게 원작(?)을 먼저 읽게 될 줄이야. 어떻게 수정되었는지 비교하며 읽어볼 수 있게 되어 기쁘다.  

 

 


 

- "자음과 모음을 숫자로 표현한다고 생각해 봐. 그러면 문장을 하나의 숫자로 바꿀 수 있어. 그 앞에 0.을 붙이면 백분율 표시가 되지. 막대기 위에 그 백분율의 정확한 위치에 선을 긋는 거야. 그러니까 한 권의 책도 표현 방법에 따라 한 줄의 선으로 축약될 수 있다는 거야."

 

- 잊고 있는 것. 편견. 상식. 상식은 늘 방해일 뿐이야. 상식이라는 것조차 귀납적 추리에 의한 가설에 불과한 거야. 

 

- "나머지의 90%에는 신들의 지식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일세. 신들은 자신의 문화와 문명을 우리의 두뇌에 기록해 놓았네. 우리는 그 기록의 보존 창고이며 그 지식을 운반하는 껍질일세. 우리의 무의식 속에는 신들이 남겨 놓은 무한한 지식이 담겨 있지. 마음을 맑게 하고 자신의 무의식을 들여다보면 그 무한한 진리에 접근할 수 있을 걸세. .... 그래, 이 그림도 마찬가지 일세."

INRI

- 항해는 구도의 길과 같다. 

 

- "문명의 죽음은 한 사람의 죽음과 같아. 윤회하는 사람처럼, 기억을 잃고 다시 태어나고 다시 죽고, 같은 일을 반복해."

셀레네의 생각을 읽은 듯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들이 아버지를 닮는 것처럼. 마치 사람의 무의식 속에 그 기역이 남아 있어, 옛날에 만들었던 것을 다시 만들어 내는 것 같아. 비슷한 것들이 생겨났고, 비슷한 일이 진행되었어. 편집이 조금씩 다른 같은 영화를 계속 돌려보는 것처럼. 그래서 나는 이번에도 인류가 살아남으리라 믿어. 또다시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 낼 거야. 그러니까 당신도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마."

 

- "문명의 죽음이나 한 사람의 죽음이나 비슷한 거야. 사람의 영혼이 윤회의 고리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문명의 영혼도 다시 태어나. 아들은 늘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아. 뇌는 기억하지는 못해도 그 유전자에는 새겨져 있으니까. 인류는 조금씩 성장하고 있어. 언젠가는 영생하는 문명을 창조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할 거야."

 

- 은하 지도를 모두 외우고 별과 별 사이의 복잡한 상호작용과 간섭효과, 시시 각각 변하는 우주지도를 예측하여 새 항로를 개척할 수 있으려면 평생을 공부해야 한다. 그러므로 항해사인 항법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계산식을 모두 익혔을 때에 항법사는 여행을 떠나기엔 너무 늙은 나이가 되고 만다. 셀레네는 계산을 했고, 목숨이 아까운 줄 모르는 젊은이들의 우주선에 프로그램을 입력해 주었다. 그들의 절반은 완전히 절망한 사람들이었고, 다른 절반은 무엇에도 절망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 ".... 과학적 탐구는 누구에게 자랑하기 위해서 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하더군. 인간의 위대한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거라는 거야."

 

- "공과 비슷한 거야. 공이란 이론상 2차원 전개도가 없는 3차원 물체야. 생각해 보면 상식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물체지. 이 우주도 그와 같아. 그러니까 지구에서 출발해서 똑바로 가게 되면."

셀레네는 마분지 위에 원을 하나 그렸다.

"다시 지구로 돌아오게 되는 거다."

 

- 우주선은 광속에 진입하게 되면 다른 차원에 걸쳐진다. 그렇게 알려져 있다.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성간물질과 수소원자에 부딪쳐 파괴되어 버릴 테니까. 광속 우주선이 최고 속도에서 무언가와 부딪쳤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 "생각해 봐라. 평행이 아닌 두 직선은 그 각도가 아무리 작다고 해도 언젠가는 서로 만나게 되지? 그리고 모든 곡선은 곡률이 일정하면 언젠가는 원을 그리게 돼. 빛이 계속 진행하다 보면 언젠가는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거야.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겠나?"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수십억 광년 밖의 우주는, 사실 거울에 비친 우리 자신의 입체영상이란 이야기야. 여기 원 위에 사람이 하나 산다고 생각해 봐라. 그리고 빛이 공 위를 회전한다고 생각해 봐요. 그럼, 네가 망원경으로 저쪽을 보게 되면 망원경은 지면을 한 바퀴 돌아서 바로 네 뒤통수들 비추게 될 거다."

 

- "물론 그게 너라는 것은 결코 알 수 없지. 망원경에 비치는 건 어린 아기일 테니까. 빛이 한 바퀴 돌아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에는, 그곳이 우리 자신의 영상이라는 것을 비교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남지 않으니까. 별과 은하는 물론이고, 성간 구성 물질, 분자와 원자 하나하나까지 같은 것이 없을 테니까. 그런 것을 같은 공간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 50억 광년 떨어진 곳에서 이 태양계를 본다면 어떤 모양이겠어? 아무리 배율이 높은 망원경으로 보아도 관측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태양뿐이야. 하지만 50억 년 전의 태양계에는 태양조차 없었어. 지구는 말할 것도 없지. 직접 날아가서 보려고 해도, 도착했을 때에는 다시 50억 년이 지나 버리니까. 그 자리에 있는 건 항성이 폭발하고 남은 먼지 구름 아니면 블랙홀, 아니면 완전히 다른 계야. 100억 년의 변화를 계산할 수 있는 기준은 없어. 우주의 모든 것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변하게 되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이 우주는 무한한 거다. 자신이 있던 곳으로 되돌아와 봤자 그곳은 완전히 다른 세계니까."

 

- "그러니까, 그게 이 시대의 우주관이로군."

 

- 성하는 허공에 누워 항법사의 말을 떠올렸다. 이곳은 다른 차원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른 규칙과 다른 궤도에 의해 움직이는 세계일지도 모른다. 시간과 공간은 같은 것이다. 시간을 거치지 않고 그 누구도 공간을 이동하지 못한다. 공간을 이동하는 사람은 누구나 시간을 흘려보낸다. 그가 살았던 세계는 이미 어느 차원에서인가 소멸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고 조용히 잠을 청했다.
 

-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언어를 모르기도 했지만, 안다고 해도 자신의, <신>의 입으로 그 어떤 말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말' 이 어떤 위력을 갖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하가 어떤 말을 하게 되든, 그것은 절대 규칙이 되어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어리석은 규약으로 사람들을 속박하게 될 것이다. 
 

- "그렇기도 하지만, 광속에 도달했다면 내가 살아서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어떻게 확신하지? 사실 너도 한 번도 광속에 도달해 본 적이 없다면서."

"의심의 여지가 없어요. 시간이 정지하니까요."

 

- "다시 말하면, 시간이 완전히 정지하기 때문에, 두 번 다시 감속할 수 없어요. 설령 백만분의 1초 뒤에 감속하려 해도, 그땐 이미 영원의 시간이 지난 뒤니까. 아니 영원의 시간이 지난다고 해도 백만분의 1초라는 시간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아요. 자동 프로그램을 입력해도 소용없어요. 컴퓨터의 시계 역시 정지하니까. 영원히, 우주의 종말이 올 때까지 여행하다가 이 우주의 소멸과 함께 사라지겠지요. 물론 우리에겐 한순간에 죽음이 찾아온 것과 동일하게 느껴질 겁니다. 느낄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 광속에 근접하게 되면 광행차 효과 때문에 우주선 뒤의 별빛이 앞으로 모아지게 된다. 별빛은 진행 방향으로 조금씩 쏠리기 시작하고, 광속에 가까워지면 거대한 하나의 태양이 된다.

 

- 그 주위를 빛의 안개가 둘러싸고 있었다. 빛은 살아 있는 것처럼 그들의 주위를 뛰어놀았다. 획획 지나가던 섬광의 속도가 느려지고 있었다. 속도가 느려진다는 것은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빛〉그 자체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빛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던 <어떤 것>이라는 의미였다. 광속으로 이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눈으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오래전부터 이 우주선의 항로를 따라 같이 비행하고 있었다. 

 

- 새하얗고 눈부신 빛. 셀 수도 없는 많은 빛들이 그들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빛의 구체에서 하얀 팔이 나왔다가 사라지고, 얼굴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졌다. 가벼운 웃음소리와 재잘대는 소리가 떠올랐다가는 사라졌다. 

 

- '의식'은 오랫동안 -오래라는 개념이 얼마나 긴 시간을 함축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공간을 떠돌고 있었다. 만약 공간이라는 단어가 '비어 있다'는 의미를 갖는다면, 그보다 더 적절하게 그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없으리라.

 

- 오래된 시간은 질병처럼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죽음의 나락으로 끌고 들어간다.  

 

-  오직 무한한 시간을 사는 <빛>만이 아직 생존하여, 우주가 살아 있었던 때의 영상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길 뿐이었다. 빛이 여행을 계속하는 한 우주의 모든 순간의 영상은 영원히 우주를 떠돈다. 모든 죽은 별은 우주의 어딘가에서 아직도 빛나고 있다. 이 세계가 탄생된 후 조 단위의 연도가 지났건만, 우주가 탄생한 순간 시작된 최초의 빛은 아직도 그 영상을 품은 채 비행하고 있다. 그러나 <빛> 안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으므로, 빛 자신은 그 시간을 느끼지 못한다. 우주의 탄생과 종말은 <빛>에게 순간이다. 빛은 아득한 시간을 살지만 태어난 순간 죽는다. 자신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더보기

- 유시헌은 내 예상답안을 슬쩍 비껴가며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다니요."
나는 의학도 신경학도 약학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이유만으로 자연스럽게 내 위에 올라앉아 버린 이 조그맣고 건방진 꼬마 녀석을 잠시 깔아 보며 되물었다.
"엄마의 뱃속에 있는 아기도 꿈은 꾸잖습니까."
"검증되지 않은 이론입니다만, 그 문제는 넘어가도록 하지요. 아무튼 아기는 꿈을 꿀지 모르지만 클론은 꾸지 않습니다."
 "어째서요?"
그는 흥미 있다는 얼굴로 물었다. 나는 그 녀석이 그런 얼굴을 할 때마다 면상을 한 번 패 주고 싶은 유혹에 시달린다.
"아기는 어머니를 통해 정보를 얻습니다. 어머니의 뱃속에 심장박동의 변화를 느끼고, 체온 변화와 감정 변화를 느낍니다. 엄밀히 말해서 뱃속에 있을 때 아기는 어머니와 반쯤은 섞여 있는 상태니까요. 하지만 클론의 경우는 다릅니다."
"뭐가 다르지요?"
"클론은 시험관 속에서 수정되고, 감각기관이 발달할 때쯤에는 이미 배양기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배양기는 완벽하게 외부와 차단되어 있습니다. 링거를 통해 항상 영양이 공급되고, 항상 똑같은 온도가 유지됩니다. 클론은 움직일 수도 눈을 뜰 수도 없고,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클론에게는 아무런, 일체의, 정보가 제공되지 않아요."

 

- "아무리 깜깜한 곳에 가둬 놓는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은 공복을 느끼고, 추위와 더위를 느끼고, 자신의 신체가 커 가는 것도 느끼 고, 근육의 움직임도 느낍니다. 밥을 먹어서 얻는 미각에 의한 경험이 있고, 손으로 자기 몸과 벽을 만져서 얻는 경험도 있습니다. 아무리 외부로부터 차단시켜도, 그 사람은 어디선가 뭔가를 배우게 됩니다. 하지만 클론은 무엇을 만져 본 적도 없고, 미각도 느낀 적이 없으며, 추위와 더위도 모릅니다. 근육 역시 움직여 본 적이 없어요. 클론에게는 아무 정보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일절!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모든 외부 정보와 자극으로부터 차단되어 있어요."
"정말로, 외부 정보와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사람의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물론이지요."
"그렇다면, 인간에게서 후천적인 것을 제하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그야말로 '무' 그저 텅 빈 인형 대가리 같은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 "다시 말해서, 우리는 선천적인 정보를 갖고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그 영역이 어디까지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단 말입니다. 하지만 클론은 다릅니다. ... 말씀하셨다시피, 클론은 외부의 정보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어있는 인간입니다. 우리가 클론의 꿈을 보게 되면, '오직 선천적인 정보'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사회적인 정보는 아무것도 받지 않은 사람의 순수 무결한 '선천적인 정보만 있는' 사람의 꿈을 보게 되는 겁니다. 어때요, 이래도 흥미가 동하지 않습니까?"

 

- "세계와 접촉하지 못한 정자와 난자의 유전자 다발에 들어 있는 몇십억 년에 걸친 생물의 진화 정보에 대해서요."

 

-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요. 눈꺼풀 안쪽이 보이고, 빛이 느껴지고, 잔상도 있죠. 단지 그런 것들이 눈을 뜨고 있을 때에 비해 너무나 미미하기 때문에 우리는 보통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고,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고정관념을 버리고 잘 관찰하면 틀림없이 뭔가가 보입니다."

(리뷰자 주 : 확실히, 빛깔부터 문양까지 다채롭다. 눈을 감은 채 특정 문장이나 단어를 말해보면, 혹은 어떤 생각을 해보면, 변하는 경우도 있다.) 

 

- "이런 것이군요.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에 관한 꿈을 꾼다."

 

- "저는 지금까지 클론의 꿈에 영상이 있다고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보고서를 다시 살펴보니,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보고서 어디에도 '보았다'는 말도, '들었다'는 말도 없더군요. 그저 '있다'는 표현뿐이었어요."

 

- 머릿속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글씨가 몇 번이고 나타났다. TV에서 내가 모자이크 처리되어 '처음에는 호기심에 시작했어요' 하고 말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경찰이 기자들의 접근을 막는 동안 내가 머리를 숙이고 수갑을 찬 채 경찰차로 들어가는 모습과, 저녁 뉴스에 20대 문화원 청소부 마약 중독으로 체포'라는 자막이 나오는 모습도 떠올랐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내게 손을 내밀고 있는 그 사람은 너무나 정상적으로 보였고, 마약중독자 같지도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독서회라도 오라고 권유하고 있는 줄 알 것 같았다.

「위험할지도 몰라요.」 

그는 여전히 한 손을 내게 내민 채로 말했다. 이 손을 잡을지 말지 결정하라는 듯이. 이 세계로 들어올지 말지 결정하라는 듯이.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 돌아가면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장소를 옮길 것이고, 내게 들킨 모든 것을 정리하고 모습을 숨길 것이다. 그 편이 백 번 나은 길이었다. 이성적으로 몇 번을 생각해 봐도 나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 수많은 질문을 해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겨우 한 가지 질문을 했을 뿐이었다.

 

- 언젠가 선배님과 논쟁했던 일이 떠오릅니다. 선배님은 평등이란 같아지는 것에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는 것에서 온다고 하셨지요. 사회를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것은 획일이 아니라 조화이고, 키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키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를 보완하는 것이라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역사는 언제나 어느 한 부분을 배제하고 축소시키고, '더 낫거나' '더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과다하게 확장하는 데에만 주력해 왔다고요.

 

- "케이, 진정해야 해. 정말로, 진정해야 해.”
진정해야 할 건 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케이는 아무튼 몇 번이나 진정하겠다는 다짐을 해 주며 세실을 안심시켰다. 배양실에 들어 선 케이는 순식간에 세실과 같은 병에 걸리고 말았다.

 

- 에키온(빨리 달리는 자)이란 광속 우주선의 연료를 말한다. 처음에는 타키온이나 액시온이라고도 불리웠지만 정확한 의미가 아니었기에, 아르곤 호의 승무원이었던 헤르메스의 아들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연료라기보다는 우주선을 끄는 천마에 가깝다. 에키온은 부정형의 반딧불이 같은 생물로, 모든 생명에너지를 오직 속도를 내는 데에만 쓰는 생물이다. 평상시에는 결정화되어 동면하고 있다가 단백질과 지방 화합물을 조금 제공하면 눈을 뜬다. 우주선은 에키온에게 제공하는 화학물질의 종류로 속도를 조절한다.

 

- 성하는 자신이 떠나온 세계를 떠올렸다. 지상의 인간들이 천상의 세계라고 부르는 곳. 공간이 정지하지 않는 곳. 시간이 정지한 곳. 자신이 살아왔던 시간과 공간 모두를 포기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세계. 빛으로 가득한 세계.

 

- 성하는 이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성하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앞에, 여덟 개의 괘를 '올바른' 순서대로 그렸다. 5백 년 전, 그가 이곳을 떠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문자가 없던 이들에게 알려준 자신이라는 증명. 
그것이 신이 표식을 남기는 이유인 것이다. 

- 신은 목적 없이 지상에 내려오지 않고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면 인간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이 인간의 오만한 신념이며, 인간이 신을 숭배하는 유일한 이유다. 신이 인간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신은 숭배받을 자격이 없다. 그들을 도울 생각이 없는 자는 신이 아니다.

 

- "배가 너무 크니까요. 이런 규모의 배를 건조하려면 국가 단위의 예산이 필요해요. 국가는 돌아오지 않을 차에 예산을 들이붓지 않아요. 이 배는 되돌아갔어야 했을 거예요. 최소한 그 국가가 존속해 있는 동안에."

 

- 물론 정상적인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단위는 킬로그램 단위에 불과하겠지만, 오랫동안 경험이 쌓인 인간의 감각이란 때로 정밀한 기계보다 더욱 정밀할 때가 있다.

 

- 광행차 현상으로 창에는 거대한 태양이 빛나고 있었다. 빛이 최대 각도로 기울어져, 뒤에 있는 별은 물론이고 이 우주의 모든 별이 배의 진행 방향 한 점에 집중되어 있었다. 마치 거대한 빛의 터널처럼 보였다.
"사람이 죽을 때 저런 것을 본다고 하지."

 

- 에키온은 기뻐하고 있었다. 흥분과 기쁨이 동력실에 가득 넘치고 있었다. 에키온은 그 쾌락과 환희의 순간에 깜깜한 압축장치로 들어가는 것에 격렬히 저항했지만, 10여 분간 투쟁하자 압축기의 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근거는 없었지만, 성하는 원래 자신의 우주선에 있던 에키온이 조금 아쉬워하며 그에게 돌아오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 "사랑했지. 많이 사랑했어. 뭐 이런 몸이긴 하지만 그 여자도 그랬으니까. 죽었지."

필레몬의 말은 뚝뚝 끊겼다. 조금이라도 감정이 흘러나오지 않도록 입을 뗄 때마다 지근지근 마음을 밟고 있었다. 성하는 그 짧은 말에 담겨 있는 무시무시한 고통을 읽어내었다.

 

- 그들이 이동하는 방향으로 거대한 빛의 터널이 눈부시게 타오르고 있었다. 죽음의 순간에 사람들이 본다는 거대한 빛의 동굴처럼. 광속으로 이동하는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터널로, 시간이 흐르지 않는 세계로.

 

- -3차원의 이동 방식으로 이 우주에 외부는 없어요. 빠져나갈 수 있는 길도 없어요. 내가 어디로 가든 우주의 곡률에 묶여 곡선을 그리게 되니까. 하지만 그 곡률을 역으로 계산하여 거대한 에너지로 다른 각도를 그려 탈출하게 되면, 로켓이 지구의 중력 곡선을 탈출하여 우주로 나가듯이, 3차원의 공간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는 결론이 나왔어요. 그렇게 되면 이 우주를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 ㅡ 당신이 걱정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당신이에요. 만약 당신이 그 '별'이라는 것을 아무 장비 없이 탈출했다면 십중팔구 당신은 분명히 죽었겠지요. 당신이 이 우주에 나와 있을 수 있는 것은 우주에 대한 지식이 있기 때문에 그나마 가능한 일이지요. 4차원의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는 우리도 알지 못합니다. 4차원으로 돌입하는 순간 당신의 수명이 끝날 수도 있어요.

ㅡ 가속도의 문제는 어떻게 하지요? 제 몸이 견딜 수 있을까요? 
성하는 대답하지 않고 질문했다. 
ㅡ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의 껍질은 내버려 둘 테니까. 가속도를 견딜 수 없는 건 그 몸이지 당신이 아니에요.

 

- ㅡ그것이 당신에게 죽음을 뜻한다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우리의 계산에 의하면 이동이 시작된 뒤에도 몸은 살아 있을 겁니다. 당신의 언어로 표현하면 일종의 유체이탈이라고 생각하세요. 끈 같은 것이 이어져 있다고 할까. 

 

- 매실을 까뒤집는 것처럼 안에서부터 뒤집어지면서 그의 영혼이 밖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성하는 자신이 죽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이동하고 있는 것인지 파악할 수없었다. 하지만 어렴풋이, 이것이 네 번째의 공간 좌표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부에서 외부로 가는 것. 혹은 외부에서 내부로 오는 것. 그의 영혼이 뇌의 영역을 벗어나 스멀스멀 밖으로 퍼져 나갔다. 성하는 문득 자신이 클러스터의 영혼에 접근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클러스터의 안에 살아 있는 수많은 영혼이 폭포처럼 성하의 의식을 파고들었다.

 

- 죽어 가고 있는 우주의 바깥에 수많은 새로운 우주가 태어나고 있었고, '영혼'은 이제 그중 한 우주를 택해 이동했고, 다시 그 우주와 하나가 되었다. '영혼'의 내부에서 가스 성운이 회전하며 새로운 우주가 태어났다. 1천억 개의 우주 안에 1천억 개의 은하계가 태어났고, 은하계마다 140억 개의 태양이 태어났으며, 각각 1억 개의 지구가 만들어졌다. 
무한의 시간 속에서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을 지켜보고 있던 '영혼'은 어느 순간, 이동을 거꾸로 시도했다. '영혼'은 그 이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고, 아무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오랜 옛날부터 이런 방식으로 자신을 성장시켜 왔던 것이다. 우주 전체를 감싸고 있던 영혼의 조각들이 점점이 흩어져 1억 개의 지구에 쏟아져 내렸다. 그중 하나의 조각은 아직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푸른 별의 바다에 떨어졌다. 영혼 조각은 번개가 치는 걸쭉한 유기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조용히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 작은 별 가득히 자라나게 될 수많은 생물과, 앞으로 펼쳐질 그들의 찬란한 삶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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