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이길보라
출판 : 문학동네
출간 : 2020.08.18
평가와 리뷰의 시대다.
별점과 좋아요와 하울과 각종 후기들이 컨텐츠가 되는 시대.
직접 가보지 않은 여행지의 숙소에서 어떤 어매니티를 제공하는지, 침구 브랜드가 무엇인지,
어떤 옵션이 가장 좋은지 각종 옵션별 상세 상태 사진과 변경 후기까지 볼 수 있는 시대.
모든 것이 그렇듯 장단점이 존재한다.
타인의 리뷰를 참고하는 경우, 흔히 기회비용적인 측면에서 손실을 막아준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는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손실'이라는 부분에 맹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경험과 평가를 참고하는 것은 분명히 도움이 되는 행위이다.
하지만 물품이 아닌 서비스나 체험에 대한 후기는 오히려 선입견을 키울 수도 있다.
내가 겪어보지 않은 경험에 대한 타인의 평가. 그리고 그것에 따라 결정하는 나.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가 광범위한 영역에서 일종의 보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도 있겠고, 가호의 차이도 있겠고, 혹은 미각 세포의 개체차에 의해 체감의 차이도 있을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단 맛', '쓴 맛'이라는 개념은 공유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써서' 별로였다고 평한 음식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써서' 좋은 평을 받을 수도 있고, '쓰지 않았다'는 평을 받을 수도 있다.
자신의 감각과 평가를 표현하는 것, 그리고 타인과 공유하고 그에 대해 대화하는 것은 건강하고 좋은 일이지만 스스로 경험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평가를 타인의 기준에 맞추어 내리는 것은 한 번 더 생각해봐야 할 일이라고 본다.
이렇게 말하는 나조차도 맛집도 자주 검색하고 추천 메뉴도 찾아보는 편이지만 말이다.
<당신을 이어 말한다>를 읽고 '이길보라'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겁이 많은 것도 같은데, 또 일단 부딪치고 보는 것도 같고.
아닌 걸 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 같으면서, 때로는 꾹 눌러 참고 후회하기도 하고 모른 체 해보려 하기도 하는 나와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참 반짝반짝한 느낌의 사람.
당시 이 책을 꼭 이어서 읽어봐야지 생각했었고, 기대대로 즐겁게 읽었다.
평생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과일의 맛을 누군가의 묘사를 통해 느껴보기가 가능할까? 가능하다손 치더라도 결국은 그 과일을 먹어봐야만 상상했던 맛이 맞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백 번의 상상보다 한 번의 노출이 나을 수 있다는 당연한 이야기.
하지만 안전하게, 되돌이킬 수 없는 실수는 하지 않게, 라는 제약을 걸면 자꾸만 고민이 된다.
가이드가 자기 자신밖에 없을 때는 조금 과하게 조심스러운 것이 맞는 일일 테니까.
일단은.
추천이라기에는 뭐하지만
그냥 별 생각이 없을 때나 뭔가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
사는 게 그날이 그날 같은데 묘하게 힘들 때나 매일이 너무 즐겁고 행복할 때, 읽어보기 괜찮은 책이다.
- 고등학교 때였나 한 언니가 물었다.
"너는 부모님이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공부를 엄청 잘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항상 자신감이 넘쳐? 왜 다 해보는 거야, 무작정?"
답은 단순했다. 하고 싶으니까. 그래서 했던 것뿐이다.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으니까 그래서 다 해봤다. 가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가봤고, 먹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먹어봤다. 만져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 만져봤고, 느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으니 직접 느꼈다. 그건 엄마, 아빠의 방식이었다.
- 네덜란드에 살면서 내가 가진 '다름'이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경계인으로 살아온 경험이 예술가로서의 가장 큰 자산임을 말이다. 차이가 차별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알았지만, '다름'이 지닌 풍성함은 알지 못했었다. 물론 세상에 유토피아는 없다. 네덜란드에도 인종차별을 비롯한 무수한 구별 짓기가 존재한다. 다만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있을 뿐이다. 그곳에서 배운 건 그 시도와 모험들이었다. 경계와 경계를 오가며 살아온 나의 삶을 꼭 안아주던 사람들, 예의와 존중을 갖추고 다름을 받아들였던 이들이 있었다.
- 과하지 않은 친절과 관심, 적절히 가능한 의사소통은 이방인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무엇보다 8월 말은 암스테르담과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시기였다.
- 그들의 삶은 '파트타이머'여도 '정규직'이어도 별다를 게 없었다. 그들에게는 얼마나 일하고 얼마나 쉴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문제였다.
- "보라야. 괜찮아, 경험." ...
당신의 그 말에 용기를 얻었다. 붙어도 경험, 떨어져도 경험이다. 눈으로 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니까. 옆에서 누가 그게 좋고 저게 좋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내가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거니까. 그 기회를 걱정만 하다 날려버리는 건 엄마, 아빠의 방식이 아니니까. 괜찮아, 경험. 나는 그렇게 네덜란드로 향했다.
- "석사과정에 함께 하게 되면 동료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연구 주제, 공부하고 싶은 이유, 앞으로의 작업들에 대해서는 세세하게 예상 질문을 뽑아놓고 철저히 준비했다. 그러나 이건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질문이었다.
- 새로운 방식의 관계 맺음이 어쩌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이게 '기본이고 당연한' 디폴트 값이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타인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관계 맺음의 가장 기본일 텐데 왜 그리 어렵고 힘든 것일까.
- 예술가, 작업자로서의 지속 가능성을 고민하고 모색하기 위한 이번 유학이 나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해나갈 작업들은 지구에 폐를 덜 끼치려고 노력하는 일이자 아름다움을 좇는 일이라고 확신했다. 앞으로 써나갈 글들과 만들어갈 영화가 나만의 성취가 아닌 이 사회를 위한 것이라 믿었다. 그렇다면 그건 내 개인과 부모만의 부담이어서는 안 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 시스템에 균열을 내야겠다고 판단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내가 유학을 통해 작업자로서의 삶의 방식을 고민하고 어떤 작업을 해나갈 수 있을지 그 지속가능성을 탐색하여 글과 영화라는 결과물을 통해 사회에 환원한다면, 나아가 그것을 접한 이들이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건 꽤 괜찮은 교환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이길보라의 성공적 유학을 위한 크라우드 펀딩 장학금 모집'을 기획했다. 말 그대로 크라우드 펀딩이었다.
- 이건 나 개인을 위한 시도일 뿐만 아니라 나와 같은 처지에 있거나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다른 이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돈이 없다고 공부를 못하고, 유학을 가지 못하고, 작업을 이어나가지 못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사회의 손실 아닐까. .... 한 지인은 개인적으로 유학을 가는데 왜 공개적으로 후원을 받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나를 암시하는 글을 SNS에 올렸다. 내 이름을 적시하고 공개적으로 비판한 건 아니라서 대응할 수도 없었다. 영화를 불법으로 다운받고 음악을 공짜로 듣고 책을 무료로 읽으며 예술가의 창작물을 소비하면서, 왜 그에 대한 비용을 후원의 형태로 지불하는 건 안된다는 걸까.
- 내가 해온 작업의 맥락들이 이곳에서는 그다지 놀랍고 특이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어떤 것을 다루어야 하는 걸까. 무얼 가지고 작업해나갈 수 있을까. 관객의 성격이 백팔십도 달라졌다. 나를 둘러싼 환경과 맥락이 달라졌고 그에 따라 나의 작업 역시 달라져야만 했다.
- "여기 영어 원어민은 아무도 없어요. ...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필요는 전혀 없어요. 보라는 보라의 속도대로 성장해나갈 거고, 중요한 건 보라가 자신의 연구를 해나가는 거예요. 제가 아는 보라는 빠르게 습득하는 사람이니까 여기서도 굉장히 많은 걸 저 나름의 속도로 배워나가겠지요. 저는 그걸 굳게 믿어요."
미카는 그 정신없는 파티 와중에 나를 울렸다. 이 세심한 말들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와 이야기를 하면서도 미카는 다른 입학생들과 파티 구성원을 살폈다. 그래, 여기 영어 원어민은 아무도 없지. 다 나처럼 처음이지. 남들과 절대 비교할 필요가 없지.
- "보라, 너는 항상 모든 걸 알아서 해결하려고 하지. 그런 모습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돕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해. 그게 너의 장점이야. 그러니까 도움이 필요하면 받아. 너 혼자 모든 걸 다 해낼 수 없어."
- "내가 암스테르담에 처음 왔을 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나를 도와줬어. 그래서 정착할 수 있었던 거야. ... 울면서 길을 걷는데 어떤 여성이 왜 우느냐며 무슨 일이냐고 묻고는 그 돈을 받을 수 있게 도와줬어. 그렇게 여기까지 온 거야. 그때 내가 받았던 도움을 보라 너에게 돌려주는 거야. 그러니 너무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 스트레스를 받아 얼굴에 트러블이 생겨도 "요새 힘든가 봐. 얼굴이 많이 안 좋네."라는 말을 안부 인사로 하지 않았다. ... 신기할 정도로 외모, 몸매 품평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필요한 곳에 시간과 마음을 쓸 수 있게 되었다. ... 타인의 가치판단보다 나의 가치판단이 우선이 되었다.
- 그와 함께 산다면 그건 동거의 형태인지, 파트너십인지, 결혼인지 비혼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어떤 방식을 택할 수 있을지, 얼마나 일하고 얼마나 쉬며 함께 시간을 보낼 것인지, 최소한의 삶의 조건을 영위하기 위해 얼마나 벌고 얼마나 쓸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야 했다.
- "음, 꼭 그렇지만은 않아. 난 이게 세 번째 석사과정이고, 다른 예술학교에서 학부를 졸업했는데 여기만큼 개방적이고 관용적이지는 않았어. 여기가 좀 특별하다고 할까. 그런데 보라, 네가 불편하면 언제든지 말해야 해. 사실 나도 시끄럽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그 동기는 자신이 수업을 들을 권리를 그렇게 찾은 거거든. 너도 너의 권리를 말하고 지킬 필요가 있어."
야핏은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쓰는 것보다 나의 의견을 정확하게 밝히는 것이 우선이라고 했다. 자유와 관용은 거기서부터 출발한다고 말이다.
- "박사를 하게 되면 어떤 분야를 집중해서 연구해야 하는데 나는 석사과정에서 하는 좀 더 폭넓은 공부 방식이 좋아. 그래서 석사과정을 또 하기로 한 거야. 별 다른 이유는 없어."
- 다른 이들이 간 길을 무작정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지금 꼭 필요한 걸 선택하고 직접 해보고 책임지는 사람들이 내 옆에 있었다.
- 그러나 메노는 우리를 학생 혹은 신인이 아니라 그저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 대했다. 거기에는 나이에 따른 위계가 없었고, 실력과 경험으로 인한 차별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 그러자 그 두 신이 원래 의도했던 바와는 다른 의미를 생성했다. 절대 붙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신이었다. 제 3자의 시선이 개입했기에 가능한 편집이었다. 아, 이래서 감독과 다른 시선에서 촬영본을 읽어낼 수 있는 편집자가 중요하구나. 사실 다큐멘터리 영화 편집을 감독이 아닌 편집자가 하는 데 의문이 있었다. 현장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편집자에게 현장이 핵심인 다큐멘터리 영화의 편집을 맡기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인가 하는 물음이었다.
- "일단 시간을 두고 들여다봅시다. 모든 촬영분과 아이디어는 다시 들여다볼 가치가 있어요. 버린다면 버리는 이유 역시 확실해야 하고요. 그걸 사용하지 않는다면 왜 사용하지 않는지 들여다봐야 해요. 거기에 답이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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