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김상근
출판 : 시공사
출간 : 2020.10.22
이탈리아의 낭만이라.
육로를 통해 손쉽게 국경을 넘을 수 있는 문화는 한국에서는 다소 낯선 개념이다.
<삶이 축제가 된다면>은 역사와 문화, 인문을 찾아 떠나는 여행 - 익숙함 보다는 낯설고 신기한 것들이 더 많은 베네치아(베니스)에 관한 책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귀국하기 직전까지 베네치아에서 머물고 있던 저자는 건축, 미술, 문학, 음악과 신학 및 역사까지 다양한 관점에서 '베네치아'를 바라본다. 그의 글을 따라 과거와 현재를 오가다 보면 과장을 조금 보태 마치 카날 그란데를 따라 흔들리며 흘러가는 기분이다.
예전에는 쉽게 이해되지 않거나 잘 외워지지 않는 글을 읽으면 힘들어했었다.
지금은 조금 편하게 읽는다. 어차피 관심사라면 반복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익숙해지면서 자연스레 기억이 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덧칠을 하다 보면 형태가 어느 정도 잡히겠지-라고 생각하는 측면에서는 티치아노에 가깝고, 일단 빠르게 읽어나간다- 는 측면에서는 틴토레토에 가깝다.
겉보기에 아무 근심 걱정 없어 보이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분주한 백조가 나은지?
혹은 그 반대가 나은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살기 위한 아등바등의 어느 한 켠이라도 누군가에게 평온함으로 보였다면-
그건 그 나름대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또한 내게 좋게만 보이는 것들의 이면도 잊지 말고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해본다.
산다는 것에 정해진 답은 없는 듯하다.
- 베네치아는 전염병에 치명적인 도시다. 미로처럼 연결되어 있는 베네치아의 좁은 골목길에서는 앞사람이 호흡하면서 뱉어내는 공기 중의 비말을 뒷사람이 피할 수 없다. 구조적으로 개선될 여지가 전혀 없는 열악한 상하수도 시설 때문인지, 베네치아의 굴곡진 역사에는 여러 세균성 전염병이 늘 함께 해왔다. 습기를 잔뜩 머금고 있는 베네치아의 눅눅한 공기가 세균 배양을 위한 거대한 인큐베이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이른 새벽, 정강이까지 차오르는 짙은 안개를 발로 차며 골목길을 걷다 보면 혹사병 같은 돌림병이 베네치아에서 최적의 환경을 발견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베네치아는 단 한 번도 세계적인 역병의 유행을 비껴가지 못했다.
- 베네치아는 반듯하게 살아온 사람에게 반성을 촉구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원칙을 지키며 정도를 걸어온 사람, 자신에게 주어진 하늘의 준칙을 지키면서 살아온 사람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안한다.
- 베네치아 정부는 이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무라노로 이전하게 된 모든 유리 공예 장인들에게 일괄적으로 기사 계급을 부여했다. 또 무라노의 유리 공예 장인들에게 세금을 감면해주는 혜택을 주었을 뿐 아니라 특별법으로 그들의 신분을 보호하며 외부로 유리 공예 기술을 이전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을 준수하면 후손 대대로 기사 계급을 인정해준다는 조치를 발표했다.
- 베네치아의 모든 비밀은 곤돌라 뱃사공들에 의해 은폐되기도 하고 발각되기도 했다. 아무리 야심한 밤이라도, 또 아무리 얼굴 전체를 가리는 가면을 뒤집어썼다 해도, 베네치아에서는 곤돌라 없이 이동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베네치아의 뱃사공들은 도시의 모든 비밀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았던 니콜로티는 검은색 모자와 스카프를, 육지에서 배를 만들었던 카스텔라니는 붉은색 모자와 스카프를 착용했다.
- 식수가 귀했던 베네치아 사람들은 빗물을 모아서 요긴하게 사용했다. 두칼레 궁전의 우물은 식수를 퍼내는 곳이 아니라 빗물을 모아두는 곳이었다.
- 1720년에 산 마르코 광장에서 영업을 시작한 카페 플로리안은 세계 최초의 커피숍으로 알려져 있다. 가게의 홈페이지에도 당당하게 '세계 최초의 커피하우스'라고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과장이다. 에티오피아에서 처음 발견된 것으로 알려진 커피란 작물은 아라비아반도를 거쳐 1615년에 베네치아에 수입되기 시작했다. 런던의 로이드 커피하우스 Lloyd's Coffe House는 이미 1686년부터 영업을 시작했으니, 카페 플로리안보다 무려 34년이나 앞선 것이다.
-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효험이 있다는 소문에 귀를 기울이는 것뿐이었다. 오징어 먹물 스파게티를 먹으면 전염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소문이 퍼지자, 베네치아의 식탁은 온통 검은색 스파게티로 채워졌다. 아드리아해를 유유히 헤엄치던 오징어는 때 아닌 종말의 시간과 마주해야 했다. 이런 가짜 정보에 흔들리지 않은 귀족들은 서로 CLT라는 은밀한 암호를 주고받으며 황급히 이탈리아 내륙의 별장으로 도망쳤다. 'Cito, Longe, Tarde'의 약자인 CLT는 전염병이 돌던 베네치아에서 유일한 치료제였다. '도망쳐라, 먼 곳으로, 늦게 돌아오라'란 뜻이다.
- 페트라르카가 생애 끝부분에 파도바에서 쓴 <행운과 불운에 대처하는 법 De Remediis utriusque fortunae> 에는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책을 탐내던 베네치아 인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담겨 있다.
배우려고 책을 찾는 사람도 있고, 남에게 보여주는 게 좋아서 책을 찾는 사람도 있어. 책으로 실내를 장식하는 사람도 있고, 사실 책은 걸이 아니라 속을 장식하라고 있는 건데 말이야. 그런 사람들은 코린토스 산 도 기 화병, 그림, 조각상, 또 앞에서 말한 다른 가구처럼 책을 사용하지.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책을 사들이는 사람도 있어. 이것이 최악이지.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책의 진가를 모르고 책을 상품처럼만 취급하니까. 이건 최근에 휩쓸었던 몹쓸 페스트 같은 버릇으로, 얼마 전부터 책이란 오로지 부자의 욕심에 새로운 도구와 새로운 영역을 부여하기 위해서만 슬그머니 그들의 관심사가 된 것 같아.
- 페트라르카는 베네치아의 학자들이 자신의 장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는다고 불평을 터트렸다. 책의 소유에는 관심이 많지만 실제로는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사실 베네치아 인들은 페트라르카의 인문 고전보다 기술과 과학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베네치아 인들의 이런 태도에 실망하게 된 페트라르카는 1368년에 전격적으로 인근 도시 파도바로 떠나버렸다.
(리뷰자 주 : 독서가라기보다 장서가에 가까운 자로서 상당히 반성하게 된다.)
- 사실 베네치아에는 따로 운구차가 없었다. 실제로 망자를 산 미켈레 묘지 섬에 매장하기 위해 가는 배는 검은색 곤돌라였다. 지금은 장례 모터보트가 관을 싣고 가는데, 그 기이한 광경을 직접 목격한 적이 있다.
- '곤돌라'의 정확한 어원은 아무도 모른다. 현지인들은 '흔들리다'의 뜻인 '돈 돌라레 Dondolare'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1094년의 기록에 처음으로 등장한 이래, 곤돌라는 베네치아의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활용되었는데, 한창 전성기였던 15세기에는 약 1만 대의 곤돌라가 운영되었다고 한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곤돌라는 17세기부터 사용되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길이가 11미터, 폭이 1미터 40센티미터의 크기이고, 선체의 무게는 대략 350킬로그램이다.
- 1대의 곤돌라는 2달 정도의 완전 수작업을 거쳐 제작된다. 장인들의 철저한 분업으로 건조되는데, 선체의 골격을 만드는 조선공, 나무로 된 노를 만드는 목수, 쇠 부분을 만드는 대장장이, 청동 부분을 만드는 대장장이, 손님이 앉는 의자의 천 장식을 제작하는 장인 등이 철저한 분업 체계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여러 장인들의 손을 거쳐 완성되는 곤돌라는 약 4만 유로의 가격에 팔린다.
- 뒤러는 베네치아에 거주하는 독일인들을 위한 산 바르톨로메오 성당을 위해 중앙 제단화를 그렸다. 독일인들을 위한 성당이니, 독일 화가에게 맡긴 것이다. 뒤러가 그린 제단화 <장미 화관의 축제>는 그가 베네치아에서 받은 르네상스 예술의 직접적인 영향을 보여준다.
- 2번에 걸친 베네치아 방문을 마친 뒤러는 '독일에는 장인은 많지만. 진정한 예술가는 없다'는 다소 자학적인 결론을 남겼다. 그래서인지 베네치아 유학을 마친 뒤에 남긴 뒤러의 자화상은 그 이전의 자화상과 확연하게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 13세기부터 가톨릭 교회는 유럽의 각 도시 중심부에 두오모를 건축하고, 대표적인 수도회인 프란체스코 수도회, 도미니코 수도회,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혹은 베네딕트 수도회)의 주 성당 건물을 삼각형 패턴으로 배치했다. 수도회 간의 과도한 영역다툼을 막기 위한 대책이었는데, 베네치아에서도 이런 배치 패턴이 유지되고 있다.
- 베네치아 카니발은 1162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이탈리아 본토의 인근 도시국가였던 아퀄레이아 Aquileia 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 베네치아 시민들이 산 마르코 광장에서 함께 춤을 추며 승전의 기쁨을 함께 나눈 날을 기념해서 시작되었다는 설이다. 그러나 베네치아 법으로 카니발이 공표된 것은 1296년이었다.
- 베네치아 카니발 하면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가면 축제는 18세기 바로크 시대에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에 이어 베네치아를 점령한 신성로마제국(오스트리아)의 결정에 따라 1797년부터 카니발 축제는 금지되었고, 공공장소에서 가면을 쓰는 것도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이탈리아 정부의 결정에 따라 지금의 베네치아 카니발이 공식적으로 부활된 것은 1979년부터다. 매년 봄, 카니발 시즌이 되면 평균 300만 명 이상의 관광객들이 베네치아로 몰려든다. 베네치아 시민들이 가면을 쓰고 카니발을 시작하는 날은 매년 12월 26일인 성 스테파노 축일로, 크리스마스 다음 날이다.
- 부활절 이전에 40일간의 금욕 기간을 지키던 중세 교회의 절기와 카니발이 만나 새로운 축제가 된 것이다. 예수의 고난을 묵상하는 부활절 이전의 40일간 중세 교인들은 금욕과 절제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단식과 속죄를 행하는 절기이기에 술과 고기는 절대 금기였다. 이를 '사순절 Lent'이라 부르는데, 카니발은 이 금욕과 절제의 40일이 다가오기 전에 육체의 향연과 일탈의 즐거움이 잠시 허용되는 가톨릭 교회의 비공식 축제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기간에는 마음껏 술과 육식을 즐겨도 된다. 그래서 카니발은 '사육제'로 번역되기도 한다. 유럽 각국은 사육제와 연관된 카니발을 지역 전통에 따라 즐기지만, 어떤 곳도 베네치아 카니발의 재미와 명성을 따라갈 수 없다.
(리뷰자 주 :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부터 부활절까지의 40일을 말한다.)
- 베네치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가면은 얼굴 전체를 가리는 바우타 Bauta다. 흰색으로 된 남녀 공용 가면으로, 보통 모자를 쓴 채로 착용하고 얼굴을 제외한 부분은 검은색 망토 Tabarro로 몸을 가린다. 코 부분을 크게 만들어 대화하고 식사하는 데 지장이 없기는 하지만, 입 자체의 모양은 만들지 않는다. 새의 부리처럼 생긴 입 부분은 바우타 가면을 쓴 채 포도주를 마실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을 위한 것이다. 어떤 바우타는 눈 주위를 검은색이나 붉은색으로 칠하기도 한다. 바우타는 오직 베네치아 시민들만이 착용할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토론을 할 때, 베네지아 시민들은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바우타 가면을 쓰고 발언했다.
- 우선 여성들을 위한 가면인 콜롬비나 Colombina는 즉흥극 속에 등장하는 순진한 하녀의 이름을 딴 것이다. 얼굴의 윗부분, 즉 눈만 가리고 눈 주위를 화려한 보석이나 깃털로 장식하며, 리본으로 뒷머리에 묶어 고정시킨다.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를 가리고 싶지 않았던 베네치아 여성들이 선호했던 가면이었지만, 지금은 남녀가 모두 사용하고 있다.
- 즉흥극에 우스꽝스러운 하인 역으로 등장하는 아를레키노 Arlecchino가 썼던 가면도 인기가 있다. 콜롬비나처럼 얼굴 상단만 가리는데, 봉산탈춤의 부네탈처럼 광대뼈가 튀어나와 있다. 그 외에도 탐욕스러운 얼굴을 상징하는 초록색의 브리겔라 Brighella 가면과 상스러운 농담을 잘하는 하인 잔니 Zanni가 착용했던 흰색의 코가 길쭉하게 나와 있는 가면도 이탈리아 즉흥극에서 유래되었다. 늙은 남성의 슬픈 표정을 익살스럽게 표현한 판탈로네 Pantalone 가면도 자주 볼 수 있다. 판탈로네는 남성 전용 가면으로 까마귀의 부리로 코를 강조하고 있으며, 얼굴의 윗부분만 가린다.
- 흑사병을 치료하던 의사들의 가면인 메디코 델라 페스테는 검은색 망토로 온몸을 덮고 있고, 얼굴은 부리가 긴 검은 새 모양을 하고 있다. 원래 이 가면은 카니발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전염병을 피하기 위해 방역용으로 만든 의사들의 복장이었다. 이 기괴한 가면과 복장을 처음 만든 사람은 프랑스의 왕실 의사로, 메디치 가문 출신 왕가의 전속 주치의 었던 샤를 드 롬 Charles de Lorme (1584 ~ 1678년)이었다.
- 모레타 Moretta는 베네치아의 귀족 여성들이 착용하는 가면으로 검은 벨벳으로 만들어진 타원형이고, 눈 전체와 입술 상단을 가린다. 검은색을 뜻하는 모로 Moro에서 온 명칭이다. 눈 주위뿐만 아니라 윗입술까지 가리기 때문에 대화를 나눌 수 없고, 따라서 가면을 쓴 사람의 정체를 절대로 알 수 없다. 윗입술이 가면에 가려져 있어서 대화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무타 Muta라고도 불렸다. 18세기 베네치아의 화려한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하는 모레타 가면을 착용한 여성은 어깨를 완전히 드러내고 가슴은 흰색 망사로 이른바 '시스루'의 매혹적인 모습이 대부분이다. 관능적인 베네치아 여성들의 특징을 보여주는 가면이다.
- 베네치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면 볼토 Volto는 얼굴 전체를 가린다. 볼토란 단어 자체가 '얼굴'을 뜻한다. 원래는 흰색이었으나 최근에는 부분적으로 금박을 입히거나 악보나 그림을 그려 넣어 장식한다. 얼굴 전체를 가리기 때문에 볼토 가면을 쓰고 식사를 하거나 와인을 마실 수 없다.
- 원래 베네치아의 망자들은 모두 수장되었다. 집 지을 땅도 부족한 그곳에 묘소를 만든다는 것은 사치이며, 위생상으로도 현명하지 못한 일이다. 베네치아에서는 '흙은 흙으로, 먼지는 먼지로' 돌아가라는 장례식 설교가 허용되지 않는다. 그들은 흰색 천에 싸여 바다에 수장되었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물에서 왔으니, 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침공은 죽어서 가는 베네치아 사람들의 황천길조차 바꿔놓았다. 수장은 금지되었고, 대신 산 미켈레 공동묘지가 인공으로 조성되었다. 베네치아의 망자들은 이제 그야말로 검은 관처럼 생긴 장례식용 곤돌라를 타고, 산 미켈레 공동묘지 섬을 향한 마지막 항해를 해야만 했다. 산 미켈레 공동묘지 섬은 베네치아의 망자들이 적막 속에 누워 거친 바닷바람과 마주하고 있는 쓸쓸한 곳이다.
- 우리는 나름의 방식에 따라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각자에게는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식이 있고 그 방식은 동일하지 않다. 그런데 우리 한국인의 삶은 총체적으로 그리고 일괄적으로 '피로 사회'의 삶이라고 말한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이 예리하게 파헤친 것처럼, 현대 한국 사회에서 우리의 경쟁자는 억압하는 타자가 아니라 성공을 향해 질주하는 자기 자신이다. 우리를 괴롭히고 억압하는 사람은 남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남들보다 더 일찍 일어나고,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남들보다 더 늦게 자는 삶을 선택하면서 우리는 성공을 향해 질주한다. 누구도 그렇게 하라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자발적인 고문을 가하고 쉬면 안 된다, 게으르면 낙오한다고 다짐하며 채찍으로 자기 몸에 상처를 낸 것이다. 스스로에게 노동의 강도를 더 높이라고, 남들보다 앞서가려면 절대로 쉬지 말라고 다그치는 사람은 남이 아니라, '피로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이다.
- 이곳에서 연인들은 헤어지면서 뜨거운 인사말을 건넨다. "차오 Cao!"라고. 이 열정적인 인사는 중세 베네치아 인들이 일찍부터 사용하다가 이제 이탈리아의 보통 인사법이 되었지만 "차오"는 원래 "Sono il suo schiavo!"를 줄인 말이다. 그 뜻은 "난 당신의 노예예요!"이다. 생각해보라. 애인에게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겠다고 고백하는 사람을!
- 베네치아는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 겉돌지 않고, 더불어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바다와 육지가 만나는 곳, 물과 뭍이 친구가 되는 곳, 바다와 하늘이 도화지 한 장 같은 수평선으로 중첩되는 곳, 동양과 서양의 문명이 조우하는 곳, 세상에서 가장 저속한 파티인 카니발을 즐기고 다음 날 예수의 무덤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떠나는 곳이 바로 베네치아다.
- 1797년 5월 12일, 프랑스의 작은 거인 나폴레옹은 바로크 시대의 추억을 되씹으며 살고 있던 베네치아 공화국에 마지막 철퇴를 가했고, 몇 달 후 오스트리아에 강제 할양해버렸다. 오랜 정치적 혼란을 거듭한 끝에 베네치아는 1866년 이탈리아에 편입되었고, 이로써 베네치아의 독립 국가 시대는 끝이 나고 말았다.
- 리도섬과 관련된 베네치아의 오래된 축제가 있다. 정확하게 기원후 1000년이 되던 해에 베네치아 공화국은 아드리아해의 해적들을 완전 소탕한 기념으로 '바다의 축복 Benedictio del Mare'이라는 축제를 열었다. 이 바다의 축제는 약 200년간 계속되다가 1177년부터는 '바다와의 결혼식 Sposalizio del Mare'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행사 규모도 확대되었다. 베네치아의 행정 수반인 도제는 베네치아 주교단과 함께 특별하게 장식된 관용 선박 Bucintoro을 타고 산 마르코 광장 앞바다에서 출발하여 리도섬까지 항해를 한 다음 아드리아해를 맞이하게 된다. 도제는 바다와 결혼하기 위해 교황이 직접 하사한 기념 반지를 바다에 던지면서, "이제 베네치아는 바다인 그대와 결혼하니, 오 대양이여! 참되고 영원한 지배의 상징으로(이 반지를 그대에게 주노라)!"라고 외친다. 물론 던져진 반지는 다시 건져낼 수 있도록 가느다란 실에 묶여 있다.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의 주인공 아센바흐가 산타 루치아 역에서 베네치아 여행을 시작하지 않고 리도섬에 바로 도착한 이유가 있다. 이 작품이 발표되었던 1912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부유층 인사들은 이탈리아 본토와 베네치아 본섬을 연결하는 철도가 아닌 증기선(스팀 보트)을 타고 바로 리도섬에 도착했다. 그러니까 작가 토마스 만이 그랬던 것처럼 작품의 주인공인 아셴바흐도 스팀 보트를 타고 베네치아에 도착한 것이다.
- 단연코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이 우리에게 선물하는 백미의 문장이다.
귀여운 애야, 이제 너는, 정신적인 것으로 가기 위해 감각적인 것을 통과하는 길을 걸어온 사람이 언젠가는 지혜와 진정한 품위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너는 이것이 오히려 위험스럽고도 쾌적한 길, 즉 필연적으로 잘못에 이르게 하고 마는 정말 잘못된 길, 죄악의 길이라고 생각하느냐? 이렇게 묻는 이유는 네가 꼭 알아둬야 할 게 있어서인데, 그것은 우리 시인들은 에로스가 옆에 와서 안내자로 나서 주지 않고서는 아름다움의 길로 갈 수 없다는 사실이야.
- 파도바 대학은 지동설을 주장해 그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초래했던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Nicolaus Copernicus (1473 ~1543년)를 배출한 대학이며,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1592년부터 1610년까지 천문학교수로 재직했던 북이탈리아의 명문 대학이었다. 1222년에 설립된 이 대학은 유럽에서 최초로 세워진 볼로냐 대학(1088년 개교)의 일부 재학생들이, 보다 자유로운 교육 환경에서 공부하기 위해 파도바에서 새로 문을 연 대학이었다. 그런 역사적 전통을 가지고 설립된 파도바 대학은 지금도 자유로운 학풍을 이어가고 있다. 자랑스러운 동문으로 카사노바를 배출한 대학이니, 성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지극히 개방적이다. 이 대학의 졸업생들은 졸업식을 마치고 재학생 때 있었던 성적인 경험들을 공개 색인 자리에서 발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노골적인 성애의 표현은 기본이고, 성적 모험을 함께 나누었던 상대방의 신체적 특징까지 자세히 (문학적으로) 묘사해서 카사노바의 후배다운 면모를 지금도 과시하고 있다.
- 그러나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는 속담은 카사노바에게 그대로 적용되어도 무방하다. 하루는 귀족 브라가딘 Bragadin 가문의 일원이자 유력 정치가였던 어떤 사람이 동료 2명과 함께 곤돌라를 타고 가다가 발작을 일으켰다. 급히 현장으로 달려온 의사는 당시 유행하던 치료법이었던 객혈과 수은 마시기로 환자를 돌봤지만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환자가 거의 임종하기 직전, 현장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카사노바는 파도바 대학에서 배웠던 의학 지식을 총동원해 그 귀족을 기적적으로 살려낸다. 하필 그 브라가딘 가문의 귀족과 동행하던 친구들이 모두 유대 신비주의인 카발라 Kabbalah 신앙의 신봉자들이었는데, 죽어가던 사람을 구해내는 카사노바의 능력을 보면서 그에게 어떤 치료의 힘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 기적적인 사건 이후부터 브라가딘 가문은 카사노바의 후원자가 되었고, 일개 배우의 아들이자 삼류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카사노바는 이때부터 베네치아 귀족들의 상류사회에 진입할 수 있는 열쇠를 손에 쥐게 된다.
- 카사노바가 파리에 당도하자 에로스는 그 도시에 함께 강림했다. 카사노바가 파리를 베네치아로 만들 참이었다. 귀족 상류사회를 동경했던 카사노바는 프랑스의 귀족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비밀결사 단체인 프리메이슨에 가입해야 한다는 조언을 듣고, 결국 1750년 프리메이슨의 가장 높은 지위인 '마스터 Master'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된다
- 베네치아는 카사노비스트들의 성지다. 그들이 베네치아를 방문하면 꼭 찾아가는 곳이 있으니, 리 알토 시장에서 지척에 있는 도 모리 Do Mori란 작은 식당이다. 도 모리는 '2명의 무어인'이란 뜻으로, 지금도 그곳에는 2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다.
- 이 고백의 의미를 정확하게 포착한 츠바이크는 카사노바의 생애가 우리에게 제기하고 있는 의미를 이렇게 확장시킨다.
영원성을 이루는 데 중요한 것은 영혼의 형식이 아니라, 한 인간의 충만함이다. 오직 강력한 밀도만이 영원해질 수 있다. 한 인간이 강력하고, 활력 있고, 일관되고 그리고 순간적으로 살아가는 강도가 높을수록 그는 더욱 완전한 모습이 된다. 불멸성은 도덕과 비도덕, 선과 악을 구분하지 않는다. 불멸성은 오직 작품의 내용과 강도만을 측정한다. 불멸성은 인간의 순수함이 아닌 일관성을 요구한다. 불멸성은 도덕이 아니라, 오직 밀도에 의해서만 좌우된다.
- 베네치아에는 악명 높은 두 직업군이 있었으니, '배를 만드는 사람들'과 배를 타고 '고기 잡는 사람들'이었다. 조선공과 어부다. 이들을 각각 '카스텔라니 Castellani (조선공)'와 '니콜로티 Nicolotti (어부)'로 불렸다.
- 1577년 화재로 입은 피해를 복원하기 위해 건축가 팔라디오 Andrea Palladio (1508 ~ 1580년)가 동원되었는데, 그는 신고전주의 양식을 도입하여 건물을 재건축하기로 결정했다(추후 설명). 이로써 두칼레 궁전은 고딕. 르네상스, 신고전주의 양식이 모두 반영된 독특한 건물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이른바 '탄식의 다리'가 건축되어 신감옥과 두칼레 궁전이 연결된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두칼레 궁전은 1797년 프랑스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행정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고, 오스트리아의 통치를 거쳐 1866년에는 통일 이탈리아로 편입되기에 이르렀으며, 1923년부터 현재의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사용되고 있다.
- 의회의 방에 이어지는 10인회의 방은, 1310년 일부 귀족들이 쿠데타를 시도하자 비밀정보의 필요성 때문에 급히 만들어진 10인회가 사용했던 회의장이다. 당연히 10인회 위원을 임명하는 것은 도제의 권한이었고, 10인회 회의에는 반드시 도제가 참석해야 했다. 그런데 10인회의 방에 배치되어 있는 의자는 17개다. 도제와 그의 핵심 참모 6명이 10명의 위원들과 함께 회의를 개최해야 하기 때문이다.
- 베네치아에서 귀족이 되려면 두칼레 궁전에서 보관하고 있는 <황금의 책 Libro d'Oro>에 가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야 한다. 그 책에는 귀족 집안의 출생 신고와 결혼 관계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담겨 있고, 베네치아 정부가 이를 직접 관리했다. 어느 집안이 귀족으로 분류되는가는 1297년대 의회 Great Council에 의해 결정되었는데, 그 이후부터는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야만 <황금의 책>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 귀족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 <황금의 책>에 이어 <은의 책>도 만들어졌다. 외부 사람이 아닌 순수한 베네치아 출신 가문을 확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록이다. 대회의장의 대의회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은 <황금의 책>과 <은의 책>에 기록되어 있는 가문의 성인 남자로 엄격히 제한되었다. 납부하는 세금의 규모나 가문이 가지고 있는 부의 정도와는 상관이 없었다. 베네치아의 귀족 남성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곳! 그래서 이 대회의장에 출입하는 것 자체가 베네치아에서는 사회적 신분의 상징이었다.
- 그리스의 '아고라 Agora'는 사람들이 모이는 공공장소다. 그리스에서 문명의 원천을 발견했던 로마인들은 시민들의 자유로운 왕래가 보장되던이 아고라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로마인들은 이를 '포럼 Forum' 이란 이름으로 수입했다. 로마 시민들은 이 공공장소에 모여 보통 때는 물건을 사고팔고, 축일에는 축제를 즐겼으며, 국가의 대사를 앞에 놓고 함께 토론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을 확보하게 되었다. 로마를 포함한 중남부 이탈리아에서는 포럼을 이탈리아어로 '피아차 Piazza'라고 불렀는데, 중북부 지역에서는 이런 시민의 광장을 '감포 Campo' 라 불렀다. 이탈리아 반도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베네치아도 '캄포'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유일하게 '피아차'로 불리는 곳이 있다. 바로 여기서 소개하게 될 산 마 드코 광장 Piazza San Marco이다.
- 시계탑 건축물 자체는 1499년에 완공되었지만 정확한 시간을 알리는 기계적 장치는 그 이후 계속 개선되어 왔다. 꼭대기에 있는 2명의 종 치는 사람은 원래 목동(양털 옷을 입고 있다)으로 조각되었는데, 청동의 색깔이 어두운 색으로 변하면서 베네치아 사람들은 '무어인 Moor'이라고 부른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에 등장하는 장군 오셀로가 바로 베네치아의 무어인이었다. 종탑 위에 서서 매시간 타종을 하는 무어인은 청동으로 굳어 있고, 셰익스피어의 무어인 오셀로는 질투심 때문에 마음이 굳어진다.
- 비록 커피숍의 이름은 황급히 바뀌었지만 카페 플로리안은 베네치아 민족 독립의 열기가 들끓는 민족의 회합 장소로 변해갔다. 프랑스 군대가 베네치아를 점령하고, 산 마르코 광장의 한쪽 면이 총독 관저로 사용되면서 카페 플로리안은 외국 점령군의 본부에 가장 인접해 있는 모임 장소가 되었다. 점령군인 프랑스인들이나 뒤이어 베네치아를 통치했던 오스트리아인들은 산 마르코 광장 건너 편의 다른 커피숍에 모였고, 자연스럽게 카페 플로리안은 베네치아 인들의 아지트로 변해갔다. 산 마르코 광장을 사이에 두고 사람들은 커피 전쟁을 벌였다. 어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가에 따라 애국심의 방향이 달라지는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 베네치아의 수호 성자인 성 마르코는 성경을 들고 있는 날개 달린 사자로 표현된다. 성경에 나오는 4마리의 신비한 동물(요한계시록 4장 7절) 중하나인 사자는 예수의 부활과 용맹을 상징한다. 산 마르코 광장에서 대성당을 지나 바다 쪽을 바라보면, 날개 달린 사자로 표현된 산 마르코와 용을 죽인 기사의 모습으로 서 있는 성 테오도로가 2개의 높은 기둥 위에 전시되어 있다. 성 테오도로와 성 마르코는 마치 임무를 교대하듯이 베네치아의 수호 성자 위치를 주고받았다. 성 마르코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용을 죽인 성 테오도로는 비잔틴을 향해 열린 베네치아의 정신을 보여준다.
- 아예 고유명사가 되어버린 '팔라디오 양식'으로 건축된 이 모범적인 신 고전주의 성당은 다른 이탈리아 성당과 달리 내부 조명이 밝은 편이다. 중앙 제단을 사이에 두고 틴토레토의 대형 작품들이 서로 마주 보고 전시되어 있으며 이 그림들은 '하늘의 양식'과 연관된 주제를 담고 있다.
- 산소비노의 건물이 웅장함을 추구했다면, 팔라디오의 건물은 규칙과 절제를 강조했다. 산소비노가 베네치아에 르네상스를 소개하면서 경착륙을 시도했다면, 팔라디오는 연착륙을 시도한 것이다. 팔라디오는 고대 로마의 건축이 모든 아름다움의 기준이라는 원칙을 고수했다. 그의 건물은 모두 기둥(칼럼)의 지름에서 출발한다. 모든 기둥의 위아래 길이는 좌우 지름의 7배이어야 한다. 기둥을 받치고 있는 대들보의 두께는 기둥 지름의 4분의 3이어야 하고, 대들보의 길이는 반드시 기둥 지름의 5배이어야 한다. 팔라디오의 원칙에서 예외는 있을 수 없다. 예외는 아름답지 않은 건물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 고대 로마제국의 개선문을 연상시키는 정면 파사드에는 복음서 저자 4명의 모습이 크게 장식되어 있고, 삼각형 페디먼트 Pediment 에는 8개의 빛 날개를 가진 '성모의 별 Stella maris' 이 높이 걸려 있다. 밖에서는 원형으로 보이지만 내부로 들어가서 보면 성당의 구조가 정팔각형으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팔각형 구조는 모자이크 장식으로 유명한 라벤나의 산 비탈레 대성당 Basilica di San Vitale을 연상시킨다. 그리스도를 잉태한 마리아의 자궁을 상징하는 중앙에서 양 사방 팔각형으로 뻗어나간 꼭짓점에 채플을 설치한 것은 다시 성모 마리아의 별을 상징한다. 천장의 돔은 롱게나가 설명한 대로 마리아의 왕관을 상징한다.
- 당시에는 설탕을 가공할 때 생기는 블랙 트리클 Black treacle (당밀)을 만병통치약으로 믿었는데, 로흐의 허벅지에 보이는 흑사병의 일반적인 증상인 허벅지의 검은 물혹을 블랙 트리클로 치료하라는 의미다.
(리뷰자 주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당밀을 먹으면 몸이 안 좋아질 거라는 앨리스와 잠쥐의 대화는 이를 유머화 한 것이라고 한다.)
- 남부 프랑스에서 성장하고, 또 잦은 외교 업무 수행을 위해 알프스 이북의 여러 도시를 방문했던 페트라르카는 다수의 그리스와 로마 고전을 사들였고, 직접 필사본을 만들어 소장하고 있었다. 페트라르카도 일종의 '책 사냥꾼'이었던 것이다. 포조 브라촐리니와 같은 피렌체의 유명한 '책 사냥꾼'들은 메디치 같은 유력 가문에게 북유럽에서 수집한 고대의 서적을 팔아넘겼지만 페트라르카는 그 고전들을 직접 소장하고 있었다. 베네치아 정부는 페트라르카에게 팔라초 몰리나를 제공하는 대신, 사후에 소장하고 있는 그 고전들을 산 마르코 도서관에 기증해달라고 요구했다.
- 그리고 성녀인 루치아를 찬양하는 노래가 아니라, 나폴리의 명소인 계란 섬 Castel dell' Ovo 인근 바다 '산타 루치아'의 멋진 풍경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나폴리 앞바다가 '산타 루치아'로 불린 것은 해안에 '바다의 산타 루치아 Santa Lucia a Mare' 성당이 있기 때문이다. 나폴리 민요가 베네치아에서 남용되고 있으니, 가뜩이나 성질 급한 나폴리 사람들이 발끈할 만도 하다. 그러나 이 베네치아의 뱃사공들이 이 노래를 부를 때 정작 기분이 상할 사람들은 나폴리 사람들이 아니다. 시칠리아 섬 동쪽에 있는 도시 시라쿠사 Syracusa 사람들은 베네치아에서 이 노래를 들으면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훔친다.
- 그러나 베네치아 인들은 실용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신앙은 유대인 축출을 원했지만, 그들은 경제적인 조건을 먼저 생각할 만큼 현실적이었다. 유대인들을 완전히 내쫓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전염병의 창궐이 잦았던 베네치아에 유대인 의사와 약사는 필요 불가결한 존재였다. 무엇보다 해외 무역으로 부를 축적해오던 베네치아 인들에게는 초기 투자금을 빌려주는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들이 꼭 필요했던 것이다. 안토니오에게 샤일록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 베네치아도 마찬가지다. 직선으로 난 큰 도로가 거의 없고, 일터와 주택이 한 곳에 뒤섞여 있다. 근대 도시의 개념으로 설명하자면 상업 시설과 거주 지역, 여가 지역을 구분해서 설계하는, 이른바 조닝 Zoning의 구분이 없다는 것이다. 일하고, 먹고, 자고, 노는 공간이 같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강남'처럼, 특정한 계층(물론 경제적인 의미에서)을 위한 특별한 지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베네치아에서는 부자와 서민이 같은 동네에서 공존한다. 거대한 팔라초와 초라한 오두막집의 벽면이 붙어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 베네치아 고딕 양식은 카날 그란데의 수변 저택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지름이 작아진 기둥이 전면에 촘촘히 배치되어 있고 그 위에 화려한 장식이 더해졌으며, 전체 파사드가 화려한 색으로 채색되기도 했다. 대략 14세기에 건축된 건물에 이런 후기 고딕 양식이 적용되었다.
- 15세기 중반부터 르네상스 양식이 도입되었다. 르네상스 양식의 팔라초는 큰 창문을 뒤로하고 전면에 베란다가 설치되었으며, 그 앞에 대리석 기둥이 일렬로 서 있는 공통된 구조를 보여준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1527년부터 베네치아에 거주하며 로마의 르네상스 양식을 소개했던 산소비노의 영향이 크다. 16세기 말, 르네상스 양식이 퇴조하고 바로크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살루테 성당을 건축해 베네치아의 풍경 자체를 바꿔버린 발다사레 롱게나에 의해 시작된 양식이다. 건축과 조각, 회화가 중첩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건물 지붕이나 베란다 위에 농성이 서 있는 특징을 보여준다. 파사드에서 음양이 느껴질 정도로 장식이 다양하고 화려해졌다. 내부의 화려한 장식도 모든 바로크 건물의 또 다른 특징이다.
- 프라리 대성당의 이름에 걸맞게, 중앙 제단화의 제목은 <성모의 승천>이다. 가히 베네치아의 국민화가라고 할 만한 티치아노가 그린 것이다. 피렌체에 미켈란젤로가 있고, 로마에 라파엘로가 있었다면, 베네치아에는 티치아노가 있었다. 그래서 이 세 사람을 '르네상스 시대의 3대 예술가'라고 표현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빠졌다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에게, 그는 이탈리아 사람이었지만 프랑스에서 임종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피렌체에서 태어났고, 로마와 베네치아를 방문했지만, 그곳에 정착하지 못했다. 워낙 뛰어난 위 세 사람이 각도시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는 티치아노의 몫이었다.
- 벰보의 아버지는 단테의 마지막 유배지였던 라벤나 출신이었는데 베네치아에서 대사로 재임하고 있을 때 피에트로 벰보가 태어났다. 외교관을 아버지로 둔 덕분에 벰보는 어린 시절부터 많은 곳을 여행하면서 식견을 넓힐 수 있었고, 베네치아 인근의 명문 파도바 대학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베네치아의 정통 관료로 성장할 길이 보장되어 있었지만 그는 페라라 Ferrara의 영주 에스테 Este 가문에서 첫 번째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곳에서 영주 알폰소 데스테 Alfonso d'Este (1476~ 1534년)의 아내 루크레치아 보르자 Lucrezia Borgia (1480 ~ 15 19년)와의 염문을 뿌린 것으로 유명하다. (1502~1503년).
- 특정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단체인 길드나 소 스쿠올라 Scuola piccole 와는 달리, 대 스쿠올라는 직업에 상관없이 구성되었다. 전통 귀국들은 스쿠올라 활동에 참여할 수는 있었지만 임원이나 대표로 선출될 수 없었다. 스쿠올라의 대표를 '비카리오 Vicario' 라 부르고, 관리 임원의 모임은 '방카 Banca' 라 불렀다.
- 베네치아 전역에 흩어져 있는 스쿠올라 건물은 비슷한 구조로 건축되었다. 1층은 미팅 홀이었는데 '안드로네 Androne' 라 부르고 일반 베네치아 시민들이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는 곳이다. 2층은 회원들의 전용 공간으로 안쪽에 임원 회의실 용도의 작은 방이 딸려 있었다. 이를 '알베르고 Albergo' 라 부른다.
- 티치아노의 화실에서 쫓겨난 틴토레토는 독학으로 당대 최고의 예술정신을 모두 습득했다. 아름다움의 근본 이데아를 '완벽을 향한 충동으로 모색해 들어갔던 미켈란젤로와, 아름다운 색채로 보는 사람의 마음을 무한 감동시켰던 티치아노를 모두 종합한 인물이 바로 틴토레토다. 그러나 그의 등장에 가장 심기가 불편했던 사람은 티치아노였을 것이다.
- 문학, 회화, 음악 중에서 베네치아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예술 장르는 무엇일까?
- 나는 청각을 이용하는 음악이야말로 베네치아를 가장 적절하게 느끼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음악이야말로 가장 고차원적인 베네치아 체험 방식이다. 왜냐하면 베네치아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음악을 들을 때처럼 언제나 즉흥적이고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베네치아에서 비발디의 <사계>를 들을 때는, 비발디가 베네치아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사계>를 베네치아에서 작곡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그가 유명한 바이올린 콘체르토인 <사계>를 작곡한 곳은 만토바였다. 이탈리아 내륙에 있는 호수의 도시다. 이 호수의 도시는 알프스 산맥에서 불어오는 북풍 때문에 겨울 추위가 지금도 유명하다. 혹독한 겨울 추위가 닥치면 만토바를 에워싸고 있는 호수는 꽁꽁 얼어붙었다.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에서, 넘어질까 조심스러운 까치발로 얼음 위를 걸어 다니는 장면에 대한 묘사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베네치아의 겨울에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베네치아의 짠 바닷물은 좀처럼 얼지 않는다. 겨울철에 베네치아를 찾아온 관광객들이 밤에 <사계>의 "겨울" 연주를 들으며, 자신이 베네치아의 겨울에 와 있다고 '일시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착각일 뿐이다.
- 나폴리를 소개하는 책자에 단골로 등장하는 문구는 '세계 3대 미항' 중의 하나라는 표현이다. 루브르 박물관을 소개하는 안내문에서도 '세계 5대 박물관' 중 하나라는 표현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극장 Teatro La Fenice을 소개할 때도 '이탈리아 3대 오페라 극장'에 속한다는 표현을 관용적으로 사용한다. 밀라노의 라 스칼라 La Scala와 시칠리아 팔레르모의 마시모 극장 Teatro Massimo과 함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곳이자 베네치아의 자랑, 라 페니체 극장이다.
- 2명의 아틀라스가 무릎을 꿇은 채 짊어지고 있는 둥근 지구 위에, 돛을 들고 서 있는 청동 조각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 청동 조각은 포르투나 Fortuna 여신이다. 청동으로 된 돛은 바람이 부는 대로 방향을 이리저리 바꾸고, 둥근 지구 위에 서 있는 포르투나 여신도 함께 방향을 바꾸며 금속 마찰음을 낸다.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운명의 여신이 서 있는 곳, 푼타 델라 도가나 건물이다.
- 1941년생인 안도 타다오는 널리 알려진 대로,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다. 오사카 출신의 복싱 선수였던 그는 도쿄에서 프랭크 라이트 Frank L. Wright (1867 ~ 1959년)가 건축한 제국호텔 건물을 보고 건축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복싱을 그만둔 그는 15살 때 우연히 중고 책방에서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건축가인 르 코르뷔지에 Le Corbusier (1887~ 1965년)의 책을 읽고 독학으로 건축에 입문한 독특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 베네치아 시는 안도 타다오에게 까다로운 재건축 조건을 걸었다. 현재 건물의 넓이나 높이를 절대로 변경할 수 없고, 흰색 대리석으로 된 외벽은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강화 콘크리트 노출을 통해 현대적 미니멀리즘 건물을 표방해왔던 안도 타다오에게 중세 시대의 갑옷을 입고 나가서 싸우라는 말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도 타다오는 르네상스의 전통과 바로크의 역사를 자랑하는 예술의 도시에서, 베네치아의 건축 역사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면서도 본인 특유의 미니멀리즘적인 절제의 미학을 발휘했다.
- 베네치아에 르네상스 건축을 최초로 소개했던 야코포 산소비노의 아들은 아버지를 닮지 않고 문학가가 되었다. 세계 최초의 여행 가이드 북 저자 프란체스코 산소비노는 베네치아를 소개하는 책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 '베네치아'란 이름이 라틴어 '베니 에티암 Veni eitam'에서 왔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부디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세요!' 혹은 '아름다운 이곳을 잊지 말아요' 란 뜻이다.
- 이제 우리도 베네치아를 떠날 시간이 되었다. '세상의 다른 곳 Alter Mundi'과 이별을 고할 시간이다. 첫 만남부터 운명처럼 뜨거운 사랑에 빠진 두 연인이 헤어지면서 서로의 이름을 묻는 영화 장면이 떠오른다. 첫눈에 반했기에, 너무 열렬히 사랑했기에, 이름조차 물어볼 시간이 없었던 것이리라. 베네치아, 그런데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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