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 The Frog Who Croaked Blue : Synesthesia and the Mixing of the Senses
저자 : 제이미 워드 / 김성훈
출판 : 흐름출판
출간 : 2015.11.13
<우리의 뇌는 어떻게 배우는가>와 상당 부분이 겹쳐서 매우 수월하게 읽었다. 각자 자신들이 주장하고 싶은 방향으로 더 상세히 저술해 상호보완이 되기도 했지만, 만약 이 책을 먼저 읽었다면 <우리의 뇌>에 대한 내 평가는 많이 달라졌을 것 같다.
우선 <소리가 보이는 사람들>의 원서가 2008년에 출간되었음을 생각하면, 내가 신선하게 느꼈던 내용의 대부분은 단지 내가 한동안 책을 읽지 않아서 업데이트가 되지 않았던 것 뿐이었다. 또한 한 권의 책으로서의 완성도를 놓고 볼 때도 <소리가 보이는 사람들> 쪽이 완성도가 높다. 전반적인 짜임도 깔끔하고 말하고자 하는 바도 명확하다.
저자는 '공감각'에 대해 비공감각자로서 최대한 이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설명한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 어떤 형태들로 나타나는지, 그래서 일상에서는 어떤 영향력을 가지는지 등을 흥미롭고 유쾌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어째서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지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과 자신 또는 다른 연구자들이 세운 가설들을 검증해나간다. 결론적으로 '공감각'이 왜 존재하는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에 관해 '기억력'과 연결지은 저자의 생각에 상당 부분 동의한다.
인상깊었던 부분은 아기들이 가진 감각을 집단무의식적 원형이나 천성적인 기능으로 접근했던 다른 책들과 달리 아직 미분화된 공감각으로 보는 저자의 시각이었다. 어떤 언어든 배울 수 있다는 점, 그러나 나이가 들어 배우는 언어는 결코 모어를 대체할 수 없다는 점 등이 동일한 논거임에도 조금 다른 주장에 적용된 것도 재미있었는데, 개인적인 의견은 '제이미 워드'의 주장에 조금 더 가깝다.
(하루 차이로 같은 실험과 현상을 들어 다른 주장을 하는 것을 읽으니 더 즐거웠다.)
생각보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공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나 또는 그 이상을 가진 경우도 있으며, 흔하게 나타나는 것이 시각-색각, 청각-미각의 연결이다. 문자에서 색을 느끼는 사람들의 경우는 각 개인마다 상당히 일관적으로 감각하는데, 뇌 세포의 활성을 확인한 결과 그들은 '실제로' 색을 보고 있었다. 다만 개인마다 같은 알파벳이나 숫자에서 감각하는 색은 차이가 있었으나, 약 4-50%가 같은 글자에서 동일한 색을 감각한다는 점이 놀라웠다. 또한 생각보다 많은 수의 공감각자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도, 그들이 남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모른 채 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도.
모든 사람은 자신이 감각하는 대로 세상을 지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공유할 수 없으므로,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나 쉽게 상대에게 자신을 덧씌워 보는지. 사실 더 놀라운 쪽은 후자가 아닐까.
- "저는 숫자마다 특별한 색깔이 보여요. 남들도 다 그런 줄 알았는데, 저만 그런가요?"
공감각이란 정상적이라고 여겨지는 감각에 '추가' 감각이 덧붙여지는 현상이다. 예를 들면 글자가 남과 다른 특별한 색으로 보인다거나, 음악을 들으면 눈앞에 색이 펼쳐지거나, 달력 등이 주변 공간에 펼쳐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 등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공감각 현상은 질병이나 비정상적 증상이 아닌 생물학적인 변화에 기반한 실제 현상이며, 전체 인류의 1~2퍼센트 정도가 이러한 능력을 타고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물론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 주변에 적어도 한두 명은 공감각자가 있다는 뜻이다.
- 공감각을 지닌 사람들은 기억력과 예술성 등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가 반 고흐, 칸딘스키, 작가 오르한 파묵,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과학자 리처드 파인먼, 니콜라 테슬라, 가수 빌리 조엘, 레이디 가가 등 공감각자만의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는 이들은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 공감각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인간 본성의 핵심에 아주 오랫동안 뿌리내리고 있던 의문에 해답을 제시해줍니다. 과연 사람이 다르면 그 사람이 인식하는 세상의 모습도 근본적으로 달라질 수 있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공감각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 바닐라는 서구 사람들에게 달콤한 냄새로 느껴지지만,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짭짤한 냄새로 느껴진다. 그 이유는 바닐라가 서구 요리에서는 주로 설탕과 함께 이용되는 경향이 있지만 동양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레몬의 냄새는 베트남 사람에게는 달콤하지만 (레몬을 설탕과 함께 요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서구 사람들에게는 시큼하다.
- 당 르 누아르 Dans le Noir (어둠 속에서)라는 식당은 파리에서 문을 열어 성공을 거둔 이후, 2006년에 런던 지점을 열었다. 이 식당에서는 식사 경험이 시각적 기대에 의해 오염되지 않도록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식사를 내온다. 런던 지점을 담당하고 있는 에두아르 드 브로이 Edouard de Broglie는 내게 이렇게 설명했다.
"음식의 생김새를 보고 그 맛을 예상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모든 감각들이 갑자기 깨어나면서 마치 그전에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것 같은 음식의 맛을 느끼게 되지요."
(리뷰자 주 : <어둠속의 대화>가 떠오른다.)
- 나는 그에게 식빵을 먹는 동안 묽은 계란 노른자 맛이 나는 NewYork 뉴욕이라는 단어를 말해보라고도 부탁했다. 그러자 여기서도 실제의 맛과 공감각의 맛이 섞였다.
"아주 걸쭉하고 물컹한 빵과 묽은 계란의 맛이 느껴집니다. 빵과 단어에서 오는 맛은 질감의 대조가 아주 기분 좋게 느껴집니다. 실제 경험과 공감각 경험의 결함은 제가 공감각을 가진 덕분에 얻는 진정한 즐거움 중 하나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신문을 읽으면서 동시에 무언가를 먹는 것을 무척 좋아합니다. 아주 기분 좋은 조합을 우연히 만나는 경우가 상당히 많거든요. 토스트를 먹으면서 뉴욕에 대한 기사를 읽으면 그냥 토스트만 먹고 있을 때는 얻을 수 없는 아주 훌륭한 미각적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 이런 유형의 공감각(거울 촉각 공감각자)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특성은 사람에 따라 작동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공간 지도가 존재하는 것 같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의 공간 지도는 마치 거울을 바라보는 것 같다. 그래서 이들은 누군가의 왼쪽 뺨이 만져지는 것을 보면 자신의 오른쪽 뺨에서 촉감을 느낀다. (마치 눈에 보이는 사람의 모습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으로 보이듯)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공간 지도가 해부학적으로 이루어진다. 즉 왼쪽 뺨이 만져지는 것을 보면 자기도 왼쪽 뺨에서 촉감을 느낀다. (마치 눈에 보이는 사람이 회전해 들어와 자기 몸에 겹쳐지는 것처럼)
- 비공감각자에게만 공감각자의 경험이 당혹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로즈마리는 이렇게 말한다.
"가족들은 제 공감각에 당혹스러워하지만 저도 가족들의 머릿속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에요. 그럼 가족들은 흑백으로 생각하는 건가요? 머릿속에 그림도 안 그려지고 말을 하거나 들을 때 철자가 펼쳐지지도 않는단 말이에요? 시간이나 날짜는 어떻게 처리하죠? 예를 들어볼게요. 가족들은 다가오는 날짜를 어떻게 머릿속에 그리는지, 아니면 지지난 주말에 한 일을 생각할 때 지난 시간을 어떻게 뒤돌아 '보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가족들한테는 생일 날짜가 어떻게 보일까요? 한 세기 전 역사를 생각할 때는 어떻게 하는 거죠?"
- 공감각이 있는 사람을 다르게 만든 요인은 무엇인가? 모든 아기는 왜 공감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일까?
공감각이 있든 없든, 뇌에서 감각의 뒤섞임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을 생각하기에 앞서 제일 먼저 다루어야 할 질문이 있다. 대체 공감각이란 무엇인가?
- 노벨상을 수상한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 Richard Feynman도 글자에서 색깔을 보았다.
- 하지만 로크의 추론 과정이 전적으로 정확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는 일단 시야가 회복되고 나면 시력도 즉각적으로 정상이 된다고 가정했다. 하지만 사실은 시력이 정상적으로 회복되려면 뇌가 어떻게든 보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 만약 눈이 손상되어 자극을 받을 수 없게 되면 시각을 담당하던 뇌 영역에는 무슨 일이 생길까? 정상적으로는 시력에 이용되던 뇌 영역을 청각과 촉각 같은 다른 감각이 인수한다는 확실한 증거들이 축적되어 있다. 뇌 영상을 보면 시각장애인이 촉각으로 점자책을 읽을 때 정상적으로는 시각에 할당되어야 할 뇌 영역이 활성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리뷰자 주 : 해당 내용과 신생아들의 감각, 고릴라 실험 등 상당 부분이 <우리의 뇌는 어떻게 배우는가>와 중복되어 빠르게 읽을 수 있었다.)
- 이런 종류의 감각 재조직이 신속하게 일어날 수 있음을 암시하는 증거가 있다. 알바로 파스콸레오네 Alvaro Pascual-Leone와 그 동료들은 정상적 시력을 지닌 대학생들의 눈을 며칠 동안 완전히 가려놓는 실험을 진행했다. 그러자 실험 참가자들 대부분은 무언가를 보기 시작했고, 이런 시각적 경험 중 일부는 본질적으로 공감각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한 참가자는 TV 소리를 들으며 번쩍이는 불빛을 보았다고 했고, 또 한 참가자는 팔을 자기 앞으로 움직이면 유령 같은 빛의 흔적이 보인다고 했다.
- 이 실험에서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공감각이 없는 대조군 참가자들로 하여금 단어와 색을 연관시키도록 훈련시켰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photo에는 연보라색, fish에는 초록색을 암기하게 하고, MRI에 들어가서 그 색을 떠올리거나 상상하도록 했다. 그러나 대조군 참가자들은 단어-색상 연합을 학습한 이후에도 V4가 활성화되지 않았다. 이 결과는 공감각이 그저 학습된 색 연관 과정에 불과하다는 오랜 주장을 반박하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였다. 색을 본다고 주장하는 공감각자들에게 이제 과학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입장이 된 것이다. "맞아요. 당신은 실제로 색을 보는 것입니다."
- 이 시점에서 심리학자들이 '감각 sensation'과 '지각 perception'이라는 용어를 구분해서 사용하는 경향이 있음을 짚고 가는 것이 중요하다. 감각은 무언가에 대한 가장 원초적인 느낌이라고 비유할 수 있다. 이를테면 빨간색에 대한 감각 같은 것이다. 반면 지각이란 현재 느껴지는 감각을 기존의 모든 감각과 비교할 때 생기는 것이다. 이를테면 토마토의 '지각'에는 단순히 빨갛고 둥근 물체를 '감각'하는 것 이상의 과정이 관여하고 있다. 여기에는 토마토를 보았던 기존의 경험과 비교하는 과정이 들어간다. 이런 구분에 따르면 신생아에게는 '감각'은 있지만 '지각'은 없다. 아기들이 자신의 감각을 이해하려 애쓰는 동안에는 '활기차고 부산스러운 혼란'만이 존재할 뿐이다.
- 신생아는 자신의 감각들을 서로 구분하지 않는다. 아기에게는 보이는 것, 소리, 감촉, 냄새 등이 모두 뒤섞인다. 눈에 보이는 것이 소리를 띠고, 촉감이 맛을 내고, 냄새가 어지러운 느낌을 줄 수도 있다. 1960년대에 불었던 사이키델릭 열풍도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가 겪는 일상의 경험에 비교하면 새발의 피다. ㅡ 다프네 모러, 찰스 모러
- 예를 들면, 유아들은 처음에는 전 세계의 언어를 구성하는 미묘한 소리를 모두 들을 수 있다. 그러다가 자라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에 맞춰진다. 그 결과 다른 언어에 존재하는 미묘한 소리에 대해서는 귀머거리가 되고 만다. 모든 언어는 유한한 크기의 말소리 집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말소리를 음소라고 한다. 영어의 일부 음소는 다른 언어에서 사용되지 않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 정리하면, 다중감각 지각은 실험실에서나 연구가 가능한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다중감각 지각은 우리가 구입하고 사용하는 사실상 모든 상품에서 나타나는 특성이며, 광고는 우리의 다중감각 처리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총동원하고 있다.
- 여러 시대에 걸쳐 의도적으로, 혹은 우연한 기회에 이 약물을 복용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한다. 종교적 의식을 치르며 이런 약물을 사용했던 기록은 거의 모든 고대의 전통에서 찾아볼 수 있다. 환각 경험은 일반적으로 또 다른 세계에 대한 통찰을 안겨주거나, 혹은 이 세계에 대한 예언을 꿈과 같은 모습으로 보여준다고 여겨져 왔다. 음악 소리를 내고 주문을 외우는 것이 이런 약물로 하여금 공감각적 차원을 발휘할 수 있도록 촉진시켜 주었을지도 모른다. 아즈텍 문화에서는 페요테 peyote 선인장을 이용했다. 호주 원주민들은 사막에서 자라는 관목인 피처리 pituri를 씹었다. 아마존 강 상류의 원주민들은 야헤 덩굴 yagé vine을 이용했다. LSD의 원료인 맥각균 ergot fungus은 호밀 위에서 자라며 엘레우시스 신비 의식 Beusinian Mysteries 이라 불리는 서구의 고대 종교의식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1년에 한 번씩 이 의식이 열릴 때면 수백만 명의 순례자들이 '성스러운 술 holy brew'을 마시기 위해 찾아왔다(이 순례자들 중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있었다). 유럽의 중세 연대기를 보면 빵이 맥각균에 감염되어 마을 전체가 며칠씩 미쳐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성 안토니 열 Saint Anthony'sfire로 알려지게 되었다. '열'이라는 표현 탓에 이를 중세에 있었던 뜨거운 사랑 이야기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맥각을 다량으로 복용하면 독성이 생기기 때문에 독실하고 순진무구한 사람들은 환각 경험, 즉 공감각 경험을 대단히 두려운 것으로 생각했다.
- 이 약물은 또 다른 실재를 열어주는 독특한 창이 된다. 그래서 작가, 음악가, 미술가들은 이 약물을 통해 영감을 받곤 했다. 베르너 스톨 밑에서 일하다 LSD를 발견한 알베르트 호프만은 이렇게 얘기했다.
"내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다가온 부분 중 하나는 흔히들 '실재'라고 여기는 것이 어떤 고정된 무언가가 아니라 애매모호한 무언가를 나타내며, 그 실재가 하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이 존재한다는 통찰이었다."
- 정확히 어떤 색이 보이는지는 사람마다 아주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 같고 이런 다양성을 모두 설명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이 모든 다양성을 거슬러 작용하는 내적인 힘, 즉 우리의 감각이 어떻게 연결될 것인지를 알려주는 다중감각 규칙이 존재한다. 이 규칙은 공감각을 갖고 있는 사람의 의식적 경험에서, 그리고 공감각이 없는 사람들의 무의식적 편향 속에서 스스로 발현되어 나온다.
- 흥미롭게도 공감각은 환상지 현상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고, 심지어는 통증을 치유할 수 있는 간단한 해결책이 되기도 한다. 자연발생적 유형의 공감각에 비교하면 후천적 유형의 공감각은 불안정한 특성이 있다. 1장에 나왔던 팻 플레처의 경우를 떠올려보자. 그녀는 시각적 이미지를 소리로 바꿔주는 감각 치환 장치를 착용했고, 그녀의 뇌는 그 소리를 공감각 이미지로 바꾸었다. 그러다 장치의 전원을 끄면 공감각도 함께 꺼졌다. 사지를 절단한 환자에게도 잃어버린 팔다리의 시각적 이미지를 보여주면 비슷한 치환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이것은 자기의 환상 팔이 있다고 느껴지는 공간에 플라스틱 팔이나 의수를 가져다 놓는 방식으로 만들 수 있다. 아니면 거울을 이용해서 진짜 팔이 거기에 반사된 모습이 사라진 팔이 느껴지는 위치와 일치하게 만들어도 가능하다. 이런 상황을 만들면 마치 사라졌던 팔이 되돌아온 것처럼 느껴진다.
(리뷰자 주 : '올리버 색스'의 <환각>에서도 동일한 내용이 나온다.)
- 거울을 이용해 이런 유형의 공감각을 만들어낸다고 해서 꼭 감각에 큰 재조직이 일어났다는 것은 아니다. 공감각이 없고 사지절단을 하지 않은 사람도 이와 비슷한 착각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에는 고무손 착각 luber hand illusion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 캐나다의 마이크 딕슨 MieDixon과 그 동료들은 이들을 투사 공감각자 projectors와 연합 공감각자 ssociators로 나누었다.
- 후광이 '저기 바깥에서' 얼굴과 몸 주변으로 나타난다는 이런 묘사는 오컬트와 신비주의에 대해 다루는 책에서 묘사되는 것과 분명 비슷한 점이 많다. 대개 이런 이야기에는 모든 사람이 숨은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지만 그것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는 설명이 붙는다. 하지만 나는 그런 숨은 에너지를 내뿜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소수의 사람만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자신의 감정적 반응을 공감각적 색 경험으로 변환할 수 있을 뿐이라 주장한다. 이 감정적 반응은 차분한 성격인지, 쾌활한 성격인지 등 지각되는 성격에 영향을 받는다. 색 자체는 공간에서 바깥으로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자체는 미스터리가 아니다. 이것은 그저 거기에 어떤 지도가 사용되었느냐에 달려 있다. 공감각을 바탕으로 하는 설명이야 말로 현상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신뢰할 만한 최초의 기술이다. 시중에는 공감각이 없는 사람이라도 숨은 에너지에 맞게 '조율'하는 훈련을 거치면 다른 이의 후광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책도 더러 있다. 나는 이런 주장에 대해 회의적이다.
- 빵 굽기의 경우 각각의 단계는 그 안에 삼차원 공간 요소가 있다. 그녀는 빵을 구울 때 풍경 속을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고 한다. 그리고 어려운 과정은 넘어야 할 수직 장벽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녀는 이렇게 고집한다. "이건 그냥 비유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실제로 보이는 풍경이에요." 순서도 없고 본질적으로 공간적 속성도 없는 다른 개념들 역시 그녀의 두뇌에서는 공간적으로 표상된다. 그녀는 저자, 미술가, 작곡가들이 뒤틀린 세계지도 안에 기하학적으로 배열되어 있고, 그것을 자기가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 같은 감각을 느낀다고 한다.
- "원주율에서 제일 유명한 숫자 순서는 파인먼 구간 Feynman point입니다. 이 구간은 소수점 아래 762번 제자리부터 767번째 자리까지인데 999999 …가 이어지지요. 이 구간은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 Richard Feynman의 이름을 따서 이름 붙여졌습니다. 그가 원주율 값을 그 자리까지는 암기하고 싶다고 말했었거든요. .... 파인먼 구간은 제게 시각적으로 아주 아름답게 보입니다. 짙은 파란빛이 깊고 두껍게 테를 두르고 있는 모양으로 보이거든요."
- 대니얼은 다른 놀라운 일들도 할 수 있다. 영국과 미국의 텔레비전에서 방송된 다큐멘터리 <브레인 맨 Brainman>을 촬영하며 그는 일주일 만에 아이슬란드어를 배웠다. 이 과정의 막바지에서 그는 아이슬란드어로 텔레비전 생방송 인터뷰에 참가하는 시험을 거쳤다. 그는 그전에도 리투아니 아의 한 학교에서 교생 실습을 하면서 리투아니아어를 독학한 적이 있었고, 지금은 열 가지 언어를 할 수 있다. 대니얼은 자신의 뇌가 패턴을 아주 좋아하고 언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런 패턴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공감각은 단어 내부, 그리고 단어와 단어 사이에 존재하는 소리와 글자들의 패턴에 조율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 된다. 실제로 공감각자들 중에는 언어 학습을 자기의 강점 중 하나로 꼽는 사람이 많다. 그 후로 대니얼은 사람들이 언어를 좀 더 직관적으로 배울 수 있게 돕는 회사를 차렸다.
- 대니얼 태멋은 자신의 기억력이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고 믿지 않는다. 또한 자신의 기억이 사진처럼 정확하다고 믿지도 않는다. 그는 자신의 기억력을 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중심으로 떠있는 '능력의 섬 islands of ability'으로 묘사했다. 자폐증이 있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사람의 얼굴에는 거의 관심이 없으며, 스스로도 얼굴을 기억하는 능력은 형편없을 것이라 믿고 있다. 그는 종종 사람을 숫자와 동일시한다. 그래서 키 큰 사람을 보면 숫자 9가 떠오르기도 한다(공감각적으로는 이 숫자가 키가 큰 수다). 또한 원주율의 풍경은 아주 생생하게 기억하지만 실제 세상의 길을 기억하는 것은 어렵다고 호소한다.
(리뷰자 주 : 수학자들이 얼굴 인식력이 떨어진다는 내용 또한 <우리의 뇌는 어떻게 배우는가>에 실려있었다.)
- 언뜻 봐도 새로운 아이디어와 해결책 (두 번째 주장)을 내놓을 수 있다면 전체 인구 속에서 그 유전자가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지리라 생각할 수 있지만, 과연 예쁜 그림을 그리는 경향(첫 번째 주장)도 전쟁이나 기아 등의 참화로부터 살아남게 해 줄 수 있을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그 반대의 증거도 있다. 붓은 칼보다 강하지 못하겠지만 예술적 기질이 풍부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성관계를 더 많이 갖는다는(따라서 자기 유전자의 생존을 촉진한다는) 증거가 있다. 최근의 한 연구를 보면 시각 예술을 접하거나 시를 읽는 데 소비되는 시간의 양으로 그 사람이 그때까지 관계를 맺은 섹스 파트너의 숫자를 예측할 수 있다고 한다.
- 필리파 스탠턴 Philippa Stanton은 제인과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는 초상화가다. 그런데 그녀는 유명한 사람들의 얼굴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를 그린다! 내가 아는 한 이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며, 이러한 그림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필리파의 공감각 덕분이다.
- 우리는 애니메이션 제작자인 서맨사 무어 Samantha Moore와 함께 이런 공감각적 경험들을 동영상으로 제작해보았다. 이 동영상에는 시간 속에서 리듬과 함께 맥동하고 소용돌이치며 움직이는 질감과 모양이 담겨 있다. 공감각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 애니메이션을 보여주었더니, 그들은 이 동영상이 비공감각자가 만든 비슷한 애니메이션이나 이 공감각적 애니메이션 원본을 90도 돌려서 보여준 것보다도 더 심미적으로 만족스럽게 느껴진다고 판단했다. 이는 공감각자들의 소리-시각 연합이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고유의 매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들 공감각자들이 음악과 미술에 강한 호기심이 있다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전반적인 공감각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 물론 그렇다고 내가 일부 공감각자들이 창조적이라는 사실과 일부 사람들은 자신의 공감각을 창조적인 방식으로 사용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들이 공감각이 없다 해도 여전히 창조적일지의 문제다. 나는 공감각이 어떤 아이디어들을 표면화하는 작용을 한다는 느낌이 든다. 예를 들면 시간과 숫자가 공간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개념이나 음표가 크기나 모양을 암시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공감각이 있는 사람에게 더욱 분명하게 다가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아이디어들이 창조적으로 이용될지, 혹은 이 연관들이 그저 연관에 불과할지는 공감각과 상관없는 요인에 달려 있다.
- 장미를 영어로는 rose라 하고, 스페인어로는 rosa라 하고, 그리스어로는 triantafulla라 하다. 하지만 이런 단어 자체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어쨌거나 장미는 여전히 장미일 것이기 때문이다. 장미라는 아이디어는 언어에 상관없이 같다. 셰익스피어 Shakespeare는 〈로미오와 줄리엣 Romeo and Juliet>에서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름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우리가 장미라 부르는 것을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여전히 향기로운 것을."
하지만 언어가 항상 이랬을까? 그리고 지금도 정말 이럴까? 단어가 내는 소리(그리고 소리를 만들어내는 입술의 움직임)가 단어가 지칭하는 아이디어와 의미 있는 상관관계가 있을 때가 많다는 한 대담한 주장이 있다. 현재의 수많은 연구자들에 따르면 이런 연결 덕분에 언어의 진화 그 자체가 뿌리를 내릴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소리 자체가 그 소리에 의해 전달되는 아이디어와 유의미하게 관련되어 있다면 아이디어가 한 사람의 머리에서 다른 사람의 머리로 (언어를 통해) 좀 더 쉽게 옮겨갈 수 있을 것이다. 감각들 사이의 그런 의미 있는 연결 관계가 어디에서 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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