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은모든
출판 : 숨쉬는책공장
출간 : 2019.07.05
간혹 시간 감각이 이상해지는 순간들이 있다.
몇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1-2분이 흘러있기도 하고, 잠깐이었던 것 같은데 한두 시간이 훌쩍 지나있기도 하다.
어쩐지 시간적 득을 본 기분이 들어서 기왕이면 전자였으면 하는 편이다.
스르륵, 슬슬.
그렇게 읽은 책이었다.
이 책은 총 10편의 테이스팅 노트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그중 반은 각각 한 편의 소설과, 반은 에세이와 연결되어 있는데 해당 술이 직접적으로 등장하거나 모티브가 된다.
소설과 에세이를 섞은 것은 현실감을 높이고 싶어서였는지, 색다른 시도를 해보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소설들은 한 편으로 완결되는 이야기이지만 등장인물들을 공유한다. 얽히고설켜 첫 이야기로 돌아오는 일종의 옴니버스 구성으로 <피프티 피플>에서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방식이다.
개개인의 이야기이면서도 하나의 이야기.
따뜻하고 매력적이지만, 5편이라는 적은 수에서 한정된 등장인물들이 얽히다 보니 자연스러운 느낌이 줄어들어 아쉬웠다.
연결성을 강조하고 있지는 않았으므로, 독립적인 단편들로 읽어도 상관은 없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따로 떼어봤을 때 더 마음에 들었다.
등장하는 술 중에서는 마셔본 것도 있었고 처음 알게 된 것도 있었는데, 그중에서 '한산소곡주'는 소개가 매력적이라 메모해두었다.
주제가 술인 것도 그렇지만 본문 중에 싱글몰트 위스키를 스트레이트(니트)로 마신다는 언급에서 내적 반가움이 솟아오른다.
(다만 나는 셰리파인데, 저자는 피트파로 보인다.)
한 잔 하게 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마음으로 건배. 짠.
-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자기 사정을 봐 달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억지를 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바로 그런 민원인들이 평소에 자신을 괴롭혀 왔다는 사실을 모른 척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 그 순간 윤선은 일초 전에 비해 한결 너그러운 사람이 됐다. 순간적으로 뾰족하게 치솟았던 마음의 끄트머리에 진하고 달콤한 크림이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그 위로 다시 한 모금의 커피를 흘려 넣었다. 초콜릿 크림의 묵직한 단맛과 커피에서 느껴지는 달콤 쌉쌀한 여운. 방금 전까지 간절히 원하던 것이 가장 원하는 형태로 입안에 번갈아 가며 들어왔다. 윤선은 이 카페가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 식사 때를 놓친 뒤에 배를 끓으며 야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 허겁지겁 컵라면에 부을 물을 올리면서 윤선은 무엇이 정말로 중요한 일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어떤 일이 후회를 남기고, 어떤 일 앞에 신중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 그 이야기의 앞뒤 맥락을 윤선은 알지 못했다. 다만 “전 엄마처럼 살지 않으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니까 아빠처럼 돼 버린 것 같아요."라는 말이 귓가에 남았다.
- 평소 식생활 사정이 그토록 각박하다면 호선은 간식을 제공할 용의가 있었다.
- 특색 없고 맛이 덜 든 떡볶이에 감칠맛을 더하기 위해 재현에게 필요한 것은 컵라면으로 나온 짜장 라면, 그리고 단 오 분의 시간이었다.
① 두 컵 분량의 물을 끓인다.
② 짜장 라면의 면발과 건더기 스프가 적당히 익도록 꿇는 물 한 컵 반을 부어 놓는다.
③ 남은 반 컵의 물을 프라이팬에 붓고 막 사온 떡볶이와 짜장 스프를 넣어 중간 불에서 뒤섞는다.
④ 삼분 후에 면만 건져 프라이팬에 투하한다.
⑤ 면이 마저 익으면서 국물을 빨아들이도록 센 불에서 살짝 섞어 주면 완성.
- 윤기가 흐르는 검붉은 국물 위에는 채 썬 대파 몇 점이 균형 잡힌 식생활을 의식한 양심의 마지막 흔적처럼 아스라한 존재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 외에는 오직 탄수화물과 지방, 당분과 염분만이 팽팽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재현은 싱글벙글이었다. 호선은 재현에게 이 레피시는 비빔면 계열 외의 컵라면에는 어떤 것에나 응용할 수 있다는 사실도 일러 줬다.
- 백제가 멸망하자 유민들이 소복 차림으로 빚었다는 의미에서 '소곡주'라고 불렸다는 한산소곡주는 '앉은뱅이 술이라는 별칭이 있다고 한다. 한 번 마시기 시작하면 잔을 내려놓을 수가 없어 못 일어날 지경까지 마시게 되는 술이라는 의미에서 다. 마냥이 슬슬을 주저앉힌 꼴이다.
- 말이 나와서 말인데 현대 한량이 추구해야 할 삶의 자세는 '마냥'과 '슬슬' 사이에 걸쳐져 이리 기울었다 저리 기울었다 하는 게 아닐까 싶다.
- 그 '옛날'에는 나도 하루빨리 대입을 치르고 '인 서울' 할 날만을 꿈꿨다. 집에서 벗어나는 게 절실했다. 그로부터 십수 년 뒤에 이토록 절실하게 서울에서 탈출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될 줄은 몰랐다. 물론 그때 늘 1등을 도맡아 하며 엄마의 자랑이자 유일한 희망이었던 동생도 훗날 자신이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 아드벡은 병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으므로 호선은 새빨간 악마가 입에서 불을 내뿜는 그림이 그려진 시나몬 위스키, 파이어볼을 꺼냈다. 잔에 따른 후 한 방울의 생수를 더해서 아랫입술을 적시듯 살짝 머금었다가 천천히 삼켰다. 생전 처음 '양주'라는 것을 마신 날 역시 예의 입이 짧은 친구와 함께였다는 사실을 호선은 떠올렸다. 그날 이후에도 호선은 그 친구 덕에 다양한 술을 맛봤다. 친구는 한동안 와인 바에 빠져 있었고, 그 다음에는 싱글몰트 위스키를 즐겼기 때문이다.
- 세상에는 듣는 것만으로도 압박감이 느껴지는 단어가 다양하게 존재하는데, 내게 부동의 1위는 '치과'라고 말할 수 있다. 적지 않은 확률로 목돈이 들고, 대체로 신체적 고통이 수반되는 데다 한동안 금주를 명 받는 심적 고통마저 뒤따르기 마련이므로. (마지막으로 스케일링을 한 게 언제인 줄 아느냐는 준엄한 꾸짖음의 목소리가 지금도 귓가를 맴돈다.)
- 그와 반대의 단어. 즉, 보기만 해도 해방감을 느끼는 단어 1위는 펍이나 바의 메뉴판에 적힌 '해피 아워'라 하겠다. "일과를 마치셨나요? 할인해 드릴 테니 한잔하시죠!"라는 말을 압축한 이 단어에서는 절로 '해피'가 솟아난다.
(리뷰자 주 : 나는 '해피아워'를 들으면 자동으로 주류 무제한이 떠오른다.... 상황이 좋아져야.... 이젠 마셔봐야 맛이나 보는 정도.)
- 페더 바의 불바디에는 너티하고 무거운 와일드 터키와 카카오 닙스의 뉘앙스가 있는 친자노 로쏘, 캄파리가 섞여 균형 잡힌 중후한 맛을 냈다. 또한 얼음 잔에 담긴 불바디에가 처음에는 진득한 바디감을 가지다가 묽어지는 것과 달리, 혀 전반을 살짝 누르는 듯한 견고한 바디감을 끝까지 균일하게 즐길 수 있었다.
- 집에서는 곧잘 위스키 플로트를 시도해 보기도 하는데 제조에 실패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생수 위에 위스키를 띄운 형태가 되지 않고 위스키가 그대로 물 안에 퍼져 버리는 것이었다. 단순하지만 간단하지만은 않은 위스키 플로트를 만들기에 실패할 때면 이따금씩, 더없이 단순하고 간단한 칵테일을 만들던 B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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