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루스 볼] 저급한 술과 상류사회 - 음료의 문화사

일루젼 2021. 8. 12.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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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루스 볼 / 김승욱
출판 :  루아크
출간 :  2019.03.15


제목만 보고 재미있어 보여서 골랐는데, 상당히 알찬 책이었다!

4X6판의 큰 사이즈로 다양한 그림 자료들과 풍부한 배경 지식이 담긴 책이다. (그리고 재미있다.)

 

영국의 식음료 문화를 중세부터 근현대까지 흐름에 따라 살펴보는데,

어떤 음료가 주류를 이루었는지를 기준으로 챕터를 나누었다.

 

가장 대중적인 술이 변하게 되는 계기와 해당 시기에 각 주종이 가졌던 문화적 의미,

주로 마실 수 있었던 곳과 단골이었던 계층 등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처음 알게 된 지식들이 많아서 무척 신선했다.

 

후반부에서는 그 흐름이 차, 커피로 변해가게 된 이유와 그로 인해 함께 변화된 생활 풍경도 다룬다. 

개인들의 생활상이 어떻게 변화했으며 그로 인해 영향을 받은 계층은 어디였는가,

그 여파는 어떤 변화를 불러왔는가 등을 설명하되 '음료'라는 중심을 놓치지 않아 좋았다.

영국의 차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아편전쟁은 이야기하지 않는 식?

역사서 느낌은 거의 없다. 

 

'주류 역사 연구자'이자 '주류 제조 전문가'라는 저자답게 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뽐내는데,

다른 저서인 <반란의 화주 Rebellous Sprits>도 읽어보고 싶다.  

 

 

 

 

 


 

 

- 로마가 멸망하고 유럽에서 여러 민족의 힘이 강해진 뒤 한동안 음주의 계층 구분이 완화되었다. 로마 문화에 물들었던 영국의 일부 지역에서 포도주를 수입할 길이 막혀버리자, 그곳에 정착한 앵글로색슨족은 꿀을 발효시킨 술인 미드 mead를 서민적인 에일 ale보다 더 귀하고 자랑스럽게 여기게 되었다. 미드 홀이 마을의 중심이었고, 전사들은 전투에서 용감히 싸우겠다며 '미드의 맹세'를 했다. 그러고는 미드 홀 주인부터 시작해서 엄격하게 지위 순으로 미드를 마셨다.

 

- 그러나 여행자가 점점 늘어나고, 교회가 교회 관련 시설 내의 음주와 잔치에 대해 점점 보수적으로 변해가면서 서서히 변화가 일어나, 13세기와 14세기 내내 여행자와 주민이 따로 오락을 즐길 수 있는 장소들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그리고 15세기 말경에는 이런 장소들이 세 가지 유형, 즉 여관 inn, 와인바 tavern, 선술집 alehouse으로 뚜렷이 구분되었다.  

 

- 가장 활기 있는 와인바들 중 일부는 법학원 Inns of Court 주위에 있었다. 이름에 여관을 뜻하는 'inn'이 들어가서 착각할 수도 있지만, 이곳은 술을 마실 수 있는 여관이 아니었다. 예나 지금이나 법학원은 변호사들이 변호사로 활동하기 위해 반드시 소속되어야 하는 협회다. 현재 남아 있는 네 개의 법학원은 모두 그 역사가 1569년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법률가로 활동할 사람들 외에 예법과 정치를 배우고 중요한 인물들을 친구로 사귈 필요가 있는 젊은 귀족도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 앤디 워홀 Andy Warhol의 팩토리나 우드스톡이 그랬듯이, 인어 클럽의 모임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전설이 점점 자라나 나중에는 사람들이 증거 따위 상관없이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무조건 인어 클럽의 회원 명단에 포함시킬 정도가 되었다. 그 사람들이 모두 한 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는 모습을 상상해보면 즐겁다.

 

- 지금은 코리앳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당시에 그는 명성과 인기를 모두 누리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에게 명성을 안겨준 것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의 여러 지역을 도보로 여행하며 겪은 일들을 기록한 책 <코리앳의 미숙함 Coryat's Crudities>이었다. 이 책이 엄청난 인기를 얻은 덕분에 코리앳이 이탈리아에서 처음 본 포크가 영국에 소개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는 궁정에서도 재치 있는 사람으로 인기를 끌었으며, 또한 많은 농담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재미는 있지만 우스꽝스럽다는 평판을 얻은 그는 궁정의 어릿광대에 가까운 존재였다. 

(리뷰자 주 : 디즈니의 <인어공주 Little Mermaid>에서 포크 장면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 중세에 에일은 대개 비공식적인 경로로 판매되었다. 즉일반 가정집에서 일시적으로 에일을 너무 많이 만들었을 때 친구나 이웃에게 남는 양을 파는 식이었다. 에일을 팔고 싶은 사람은 에일 장대를 집 앞에 내걸어 그 사실을 알렸다. 에일 장대는 긴 막대 끝에 덤불을 붙인 형태였다. 에일이다 떨어지면, 집주인이 에일 장대를 내렸다. 한편 고용주가 평일에 인부들에게 식사를 제공할 때 에일을 함께 내놓았으므로, 노동자들이 에일을 사서 마실 수 있는 특별한 장소가 그리 필요하지는 않았다.

 

- 찻집은 젊은 아가씨가 샤프롱 없이 식사를 즐기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최초의 공공장소였다. 여성들은 이곳에서 여성의 투표권 등 정치적인 주장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더보기

 - 알코올은 세 가지 약물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알코올이 생산되었음을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고고학 증거는 중국의 지아후 지역에 있는 한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쌀, 꿀, 포도, 산사나무 열매를 발효시킨 흔적이 기원전 7000~6600년경의 토기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는 차가 이 지역을 지배하기 수천 년 전이었다.

 

- 이집트 왕조시대인 기원전 3000년경에는 상류계급과 하층계급이 마시는 알코올이 벌써 분화되어 있었다. 잉글랜드에서는 이런 분화가 4000여 년 뒤에야 나타났다. 최하층 노예까지 포함해서 이집트의 노동자들은 흐크트 hqt라고 불리는 맥주를 매일 허용된 양만큼 마실 수 있었다. 곡물이 많이 들어 있는 이 술은 일종의 음식으로 간주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음식 치고는 알코올 함량이 꽤 높아서 5도쯤 되었다. 그런데도 노예에게 하루에 허용된 양은 10 파인트(영국에서 1 파인트는 0.568 리터-옮긴이)가 넘었다. 이처럼 매일 노예에게 주어지는 알코올이 그들을 고분고분하게 만드는 쪽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지배계급은 이르프 irp라는 수입산 포도주에 맛을 들였다. 처음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 이 술을 수입했지만, 나중에는 이집트 국내에서도 생산했다. 일부 파라오의 무덤에 함께 묻힌 수많은 포도주 단지는 당시 생산시스템이 이미 얼마나 정교하게 발달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단지에 붙은 라벨에는 해당 포도주가 생산된 나라와 지역만이 아니라 포도원 이름까지 적혀 있다. 라벨에는 또한 평범한 포도주(단순히 이르프라고만 표시)에서부터 좋은 포도주(느프르 nfr 이르프)를 거쳐 아주 아주 좋은 포도주(느프르 느프르 느프르 이르프)에 이르기까지 상품의 등급도 표시되어 있다. 당시 누가 어떤 술을 마셨고, 몇몇 종교예식에서 술이 어떤 식으로 이용되었는지에 대해 우리는 아주 조금만 알고 있을 뿐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음주 형태와 술을 바라보는 문화적 시각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다.

 

- 이보다 조금 더 잘 알려진 아즈텍의 음주문화는 훨씬 더 흥미롭다. 아즈텍 사람들이 주로 마시던 술은 풀케 pulque 인데, 누가 언제 얼마나 마실 수 있는지를 복잡하게 규정한 법이 엄격하게 시행되었다. 사제, 귀족, 전사, 양조업자, 풀케의 원료인 용설란 재배 농민, 임신부는 각자 다양한 양의 술을 일상적으로 마실 수 있었다. 허용된 양이 가장 많은 전사와 양조업자는 여러 신전에서 신들을 기리며 술을 채워둔 통에서 직접 술을 퍼 마셨다. 쉰두 살이 넘은 사람에게는 노인을 공경하는 차원에서 언제든 마시고 싶을 때 술을 마실 수 있게 허락해주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이들 외에 이처럼 자유로운 음주가 허용된 집단은 딱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음주 허용이 경멸의 표시이자 운명이었다. 아즈텍에서 음주를 관장한 신은 '신성한 400마리 토끼'인 센트손 토토치틴 Centzon Toto-chtin이었다.

(리뷰자 주 : 엘리아데는 전투력을 잃은 노인들 역시 멸시와 위로로 술을 제공받는다고 말했으나, 저자는 노인은 공경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 14세기 말에 집필된 <캔터베리 이야기 The Canterbury Tales>도 서더크에 있는 타바드 여관에서 시작된다. 그 시기에는 아직 하룻밤 신세를 질 수 있는 곳이 많이 있었다. 특히 종교시설에 그런 곳이 많았다. 따라서 여관에 머무른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뚜렷한 취향을 보여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여관에 돈을 내고 투숙한 <캔터베리 이야기>의 다양한 손님들 중에 수도사와 여성 수도원 부원장이 한 명씩 섞여 있는 것이 조금 놀랍다. 이 두 사람이 인근 수녀원이나 수도원을 찾아갔다면 공짜로 숙박을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이 여관을 선택한 이유는 순진무구하기 그지없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여관의 위치가 좋아서 순례 여행을 일찍 시작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캔터베리 이야기> 본문에는 두 사람이 이곳을 선택함으로써 종교의 구속에서 이탈했으며, 교단 소속이 아닌 여행자들과 어울릴 기회와 이곳에 흘러넘치는 술에 매력을 느꼈음이 암시되어 있다. 또한 초창기 여관들은 평판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이 글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 여관 서열 맨 꼭대기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부유한 여관들은 사치품을 다뤘다. 가장 일반적인 품목은 비단, 새틴, 벨벳 브로케이드 등 고급 수입 천이었으나, 사치품을 취급하는 여관들은 특정한 품목만을 가리지 않았다. 물건의 품질이 높기만 하다면 무엇이든 환영이었으므로, 유리제품, 은제품, 서적, 가구, 카펫, 예술품, 보석 장신구 등 흔히 볼 수 없는 다양한 사치품의 거래만이 아니라 주택이나 채소 농원의 경매도 이루어졌다. 그들은 또한 단순히 물리적인 실체가 있는 상품을 다루는 데서 그치지 않고, 여행을 함께 할 수 있는 의사와 약종상은 물론 신비로운 비술을 행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전문 직업인들의 추상적인 서비스의 거래도 주선했다. 노샘프턴 최고의 여관인 빨간 사자 여관도 이런 곳이었다.

 

- 독립적인 사업자라면 이런 소액의 대가만으로 살아남기 힘들었겠지만, 여관에는 언제든 손님을 맞을 수 있게 직원들이 대기하고 있고 마구간도 갖춰져 있었으므로 우편사업에 협조하는 것은 그들에게 약간의 추가 수입을 가져다주는 최고의 부업이었다. 게다가 여관 지배인이 지역에서 유지로 대접받을 뿐만 아니라 수도와 궁정의 중요한 소식도 자주 접할 수 있다는 보너스까지 딸려 있었다. 여관 지배인은 최초의 우체국장이었다. 

 

- 제1차 영국 내전(1642~1651)이 끝난 뒤, 우편국은 의회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우편국은 심지어 밀랍 봉인을 열었다가 감쪽같이 다시 붙일 수 있는 특수장비까지 갖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 첩보 예술의 걸작은 런던 대화재 때 총 우편국 General Letter Office이 불에 타면서 소실되었다. 이 장치는 딱 하나뿐이었으므로 다시 만들 수도 없었다. 발명가가 제작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간 탓이었다.

  

- 토리당도 키트캣클럽과 경쟁하기 위해 브라더스 클럽 Brothers Club을 만들었으나, 키트캣클럽만큼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 이 클럽은 키트캣클럽과 똑같은 날 똑같은 시각에 초가집 와인바에서 모임을 열었다. 회원 중에는 <걸리버 여행기 Gulliver's Travels>의 작가인 조너선 스위프트 Jonathan Swift, 원래 키트캣클럽 회원이었으나 변심해서 토리당으로 온 매튜 프라이어가 포함되어 있었다. 토리당은 휘그 로즈 클럽에도 대응하기 위해 1710년에 벨 와인바에서 옥토버 클럽 October Club을 만들었다. 회원들이 즐겨마시던 독한 술인 옥토버 에일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그들이 와인바에서 이 술을 기꺼이 마실 수 있었다는 사실은 이 무렵부터 와인바와 선술집 사이의 장벽이 무너지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 선술집이 항상 문을 열고 영업을 할 수 있게 된 데에는 호프 hop의 도입으로 맥주 주조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도 한몫을 했다. 호프를 사용하지 않고 만드는 전통적인 에일은 진하고 텁텁했으며, 단 며칠 만에 상해 버렸기 때문에 오랫동안 보관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남는 에일을 이웃에게 판매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나 호프를 사용해서 만드는 새로운 맥주는 가볍고 맛이 좋았으며, 호프에 함유된 성분 덕분에 전통적인 에일보다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었다. 특별히 도수가 높은 맥주는 심지어 통에 넣어 일 년 넘게 보관하면서 숙성시킬 수도 있었다. 이런 맥주에는 생산하기에 가장 좋은 달의 이름을 따서 '3월'이니 '10월'이니 하는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봄가을에는 날씨가 너무 춥지도 너무 덥지도 않기 때문에 효모를 이용해서 가장 도수가 높은 맥주를 생산할 수 있었다. 또한 새로운 맥주는 예전의 에일보다 질이 좋다는 점 외에 생산비가 적게 든다는 장점도 갖고 있었다. 엿기름 1 부셀(약 36리터 -옮긴이)로 전통 에일을 만든다면 8갤런밖에 나오지 않는 반면, 새로운 맥주는 총 18갤런을 생산할 수 있었다.

 

- 17세기에는 선술집이 항상 영업을 하는 장소가 되었다 해도, 처음부터 선술집으로 지어진 건물이 아주 드물었기 때문에 대부분 칸막이로 구분된 공간이 두세 개밖에 없었다. 소박한 의자들이 놓여 있는 기본적인 휴게실, 바가 있는 객장 겸 주방으로 쓰이는 곳, 그리고 건물 안에서 유일하게 손님들에게 공개되지 않는 공간인 주인의 침실. 술을 마실 때 쓰는 잔은 대개 수액을 끓여서 겉에 발라 방수처리를 한, 커다란 검은색 가죽 잔이었다. 선술집 마당에서도 술판이 벌어질 때가 많아서 인근 주민들이 불만을 늘어놓곤 했다. 남자들이 거리가 훤히 보이는 곳에서 용변을 보았기 때문이다. 17세기 초까지 선술집을 경영할 수 있는 사람의 자격에 대해서는 거의 또는 전혀 규제가 없었다.

 

- 선술집은 대개 지역 양조장에서 외상거래로 맥주를 공급받을 수 있었으며, 술이 상하거나 쏟아져서 못 쓰게 되는 경우를 대비한 여유분도 넉넉히 주어졌다. 따라서 선술집 사업을 시작하기가 쉬운 편이었다. 그러나 선술집과 고객들 사이에도 외상거래가 이루어졌으므로 선술집이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지기도 쉬웠다. 분노한 선술집 주인이 봉급날 손님에게서 가장 먼저 외상값을 받아내기 위해 손님의 뒤를 미행했다는 이야기가 많이 들려왔다. 빚이 너무 많아서 갚을 수 없게 된 선술집 주인이 그대로 이웃 도시로 도망쳐 다시 선술집을 여는 경우도 많았다. 선술집 주인이 한 곳에서 영업을 계속하는 기간은 대개 5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다음 1세기 동안 음주 및 주류 관련 사업은 점차 많은 규제를 받게 되었다. 현대식 영업 허가제의 전조라고 할 만했다. 따라서 선술집 주인의 생계가 판사의 손에 좌우되곤 했다. 18세기 중반 무렵에는 선술집 지배인이 훨씬 더 전문적이고 존경할 만한 직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부유한 여관 지배인의 사회적 지위와는 아직 비할 바가 아니었다.

 

- 1872년에 영업 허가제가 다시 도입되기는 했지만, 세 가지 영업허가가 존재했던 과거와 달리 이때의 영업허가는 한 종류뿐이었다. 이로써 여관, 와인바, 선술집, 맥줏집이 모두 합쳐진 현대식 주점이 본격적으로 생겨났다. 이들 외에 새로운 형태의 신참도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기존 업체들과 경쟁하던 음식점 cook shop은 금방 먹을 수 있는 값싼 음식을 손님들에게 제공했고,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화주를 마실 수 있는 곳도 생겨났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 일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거나 신문을 읽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순전히 남자들만 드나들 수 있는 커피하우스가 있었다.

 

- 사람들이 맨 처음 어떻게 해서 커피를 음료로 마시게 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오로지 커피만을 마시는 장소로 생겨난 최초의 공공장소는 오스만 제국의 커피하우스였다. 제국의 영토가 넓어지면서 새로 정복된 도시마다 새로운 공공건물들이 지어졌다. 제국이 문명을 전파하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400년 뒤 대영제국이 철도를 놓은 것과 마찬가지다.

 

- 런던 최초, 아니 사실 유럽 전역을 통틀어 최초의 커피하우스인 이곳은 런던 시티의 성 마이클스 성당 마당에 있는 작은 헛간에서 문을 열었다. 간판에는 전통적인 복장을 한 파스쿠아 로제가 그려져 있었다.

 

- "파스쿠아 로제가 콘힐의 성 마이클스 길에서 자신의 얼굴을 그린 간판을 내걸고 커피를 만들어 팔고 있습니다"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이 문구는 로제가 영국을 떠나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변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다른 커피하우스 주인들이 이 광고지의 내용에 더욱더 황당한 주장을 덧붙이고, 맨 아래의 주소를 바꿔서 사용하기도 했다. 따라서 누구나 이 광고지를 알게 되었으므로, 패러디에도 자주 이용되었다. 아무리 베끼고 변형해도 누구나 그 정체를 알 수 있는 18세기의 밈 meme (비유전적 문화요소- 옮긴이)이 된 것이다.

 

- 1986년에 유리와 강철로 지은이 놀라운 현대적 건물의 출입구 한 곳에는 옛날 벽돌 건물의 외관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로이즈의 역사가 처음 시작된 커피하우스가 있던 곳은 여기서 겨우 두 블록 떨어져 있고, 항해에 나선 배가 난파해서 돌이킬 수 없게 되었을 때 그 사실을 '재해 기록부 Casualty Book '에 깃털 펜으로 기록하는 전통은 300년 전 그대로 지금도 남아 있다.

 

- 19세기 초 여성들의 상황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1839년에 제정된 '유아 법 Children's Act'은 사상 처음으로 어머니들에게 자식에 관한 법적 권리를 부여해주었다. 그때까지 자식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재산이었다. 1849년에는 여성을 위한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인 베드포드 칼리지가 런던에 세워졌다. 그러나 이 학교가 런던 종합대학의 일원이 된 것은 그로부터 50년이나 흐른 뒤였다. 1870년에는 기혼여성의 재산권 법이 제정되어, 여성들에게 처음으로 재산을 소유할 권리를 허용해주었다.

 

- 그러고 일 년도 되지 않아 최초의 여성 의원이 탄생했다. 미국의 사교계 명사인 낸시 애스터 자작부인 Viscountess Nancy Astor이 그 주인공이었다. 그녀는 하원의 토론에 참여할 수 있었지만, 의사당 내의 술집과 흡연실에는 여전히 들어갈 수 없었다. 법보다 인습이 더 질기다는 사실이 증명된 셈이었다. 남성들의 보루인 주점에 대한 최종적인 공격은 다음 세대의 몫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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