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문성실] 사이언스 고즈 온 - 바이러스와 싸우는 엄마 과학자

일루젼 2021. 8. 16.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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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문성실
출판 :  알마
출간 :  2021.04.29


 

이 책은 백신 연구원으로서, 과학자로서, 여성으로서, 엄마로서의 자신의 이야기들을 편안하게 담아냈다.

각 장에서 만나게 되는 대학원 시절의 저자와 현재 연구원으로서의 저자,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로서의 저자는 모두 다르면서도 굳은 심지를 지닌 닮은 사람들이다. 저자는 각각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자신과 지인들의 경험과 함께 글 속에 잘 녹여내었다. 조근조근 담담해서, 읽는 입장에서는 조금은 먹먹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글을 읽어나갈수록 담담한 서술이 저자의 화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 울컥하는 부분들이 있었다. 

대놓고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저자는 신앙이 있고, 아버님은 목사이시다. 사실 종교가 있는 과학자는 많지만, 생물학을 전공하고 유전자를 다루는 입장에서 종교 이야기도 한 챕터 넣어주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글에서 느껴지는 저자의 성격상 불필요한 논란이나 편견을 피하고 싶어 말을 아꼈겠지만, 그렇기에 저자의 생각은 어떤지 더 궁금해졌었다.

 

개인적으로는 학부시절 직접 해봤던 실험들이 에세이의 형태로 설명된 글을 읽으니 무척 새로웠다.

그게 벌써 15년도 전이라니- 시간이 참 빠르다. 

 

삶이란 서로가 서로에게 수많은 것들을 빚지는 작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오고 가는 빚들 중에 받는 것보다 많이는 무리라도, 일부라도 되갚는 것이 있기를 바라본다. 

 

행복하게 읽었다.


 

- 포괄적으로 자연현상을 연구하는 과학은 오랫동안 축척된 지식과 기술을 기반으로 발전한다. 기록으로 남은 형식지 explicit knowledge와 손에 손을 거쳐 암묵지 tacit knowledge로 남겨진 기술은 '시간'이 필요한 과정이다. 사회는 이 '과학의 시간'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 인생의 가장 기억에 남는 시절을 꼽으라면 대학원 시절을 꼽을 것이고,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꼽으라면 또 대학원 시절을 꼽을 것이다.

(리뷰자 주 : 떠오르는 문장.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 -황정은)

 

- 그 용기를 바탕으로 나는 연구와 실험에 아이디어를 내고 문제 해결을 도왔다. 나의 세미나를 듣고 질문하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팀에서 어드바이저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너는 자격이 있어 You deserve it." 

 

- 한국은 날짜를 '년/월/일' 순서로 쓰지만 실험실에서는 대부분 미국 방식인 '월/일/년'의 순으로 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시약을 만든 날짜, 세포를 키운 날짜, 바이러스를 키운 날짜, 배지를 만든 날짜 등 시간차로 인한 실험의 오차를 최소화하고 실험의 조건을 최적화시키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절차이기 때문이다.

(리뷰자 주 : 유럽의 경우는 '일/월/년'. 200423이라면 23년 4월 20일. 수입제품의 경우 혼란이 발생하는 경우가 잦다.)

 

- 실험실에서 동료의 글씨체가 가진 의미는 그렇다. 실험자의 노력과 시간이 담겨 있고, 반복적으로 이루어졌던 시각 자극으로 동료의 얼굴과 함께 뇌에 각인되는 그런 존재다. 실험에 있어 신의 손을 가진 누군가의 시약은 신뢰할 수 있고, 똥손을 가진 누군가의 시약은 불신하게 되는 잣대의 의미도 지닌다. 오래된 실험실일수록 실험실을 거쳐 간 많은 이들의 이름과 글씨체는 냉동고 안에서 그 실험실 역사의 증거가 되기도 한다.

(리뷰자 주 : 족보, 소스, 야마에는 항상 전설적인 인물 또는 졸업 구원자가 존재한다.)

 

- 그는 서론의 경우 이 논문을 읽게 만드는 작전을 짜는 과정이라고 했다. 첫 번째로 일반적인 주제와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배경 설명을 하고, 두 번째는 사례를 구체적으로 들면서 그것이 제기하는 논란 혹은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해야 하다. 세 번째는 필자의 공격을 담아 독자를 매료시키라고 이야기했다. '서론은 간단하고 명료한 문장으로 써야 하며, 서론에 독자를 참여시키지 않으면 논문을 심사하는 심사자들도 흥미를 잃을 것이다'라고 했다.  

(리뷰자 주 : 그리고 결론을 먼저 쓰고 서론을 마지막에 쓸 것. 과학서를 읽을 때 중점을 두는 포인트와 일치해서 잠시 놀랐는데, 아마 내가 논문들로 인한 영향을 받았던 모양이다.) 

 

- 분명 내가 좋아서 하는 것과 해야만 해야 하는 것 사이의 간극은 크다.  

 

- 내가 나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나 스스로 결심한 것이 있다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중요한 일과 좀 덜 중요한 일을 역할과 공간에 맞게 맞추거나 혹은 과감하게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처음으로 생명과학정보센터 브릭에 기고문을 썼을 때, 나는 나의 소개를 이렇게 썼다. 

 

순수 국내파 미생물학 박사로 현재는 미국에서 바이러스 백신 연구를 하고 있다. 

결혼을 통해 가정이란 또 하나의 일터를 가지고 있으며, 두 아이와 과학놀이를 즐기는 평범한 여성 생물학자이다. 

 

이 소개를 보고 누군가가 '과학놀이나 하는 사람이 치열한 과학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불쾌하다'라고 댓글을 달았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하찮게 보일 수도 있는 '과학놀이'는 내 삶에서 꼭꼭 접어 간직하고 기억하고 싶은 소중한 순간이다.

 

(리뷰자 주 : 저자의 담담한 화법. 어떻게 보더라도 현직 연구원에게 적절한 댓글은 아닌 것 같다. 직접적으로 SCI/SCIE지수나 IF를 명시하지는 않았지만-그리고 그것만이 중요하지 않다고도 하지만- 본문 중 다른 챕터에서 언급된 바에 따르면, 저자는 피인용 수치가 160인 논문이 있다. 논문은 발표되었다고 모두 같은 비중과 가치를 갖지는 않는다. 물론 오류도 존재하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발표 논문에는 '신뢰도'라는 것이 따라붙을 수밖에 없다. 어느 저널에 실렸느냐도 중요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의해주는가도 중요하다. 임팩트 팩터는 인용된 회수로 그걸 수치화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알 사람은 다 아니까 뭐라든 상관없어' 같은 느낌이라 좀 멋있기도 하다.)

(리뷰자 덧 : 저서에서 언급된 논문은 "Inhibitory effect of breast milk on infectivity of live oral rotavirus vaccines"이다.)

   

- 레퍼런스. 누군가가 참고할 만한 인생, 누군가를 추천해줄 만한 인생. 그거면 된 거 아닐까.

(리뷰자 주 : 그거면 다 가진 인생 아닐까.)

 

더보기

 - 2014년 타임지는 에볼라에 맞서 싸운 이들(예볼라에 감염되었던 의료진)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이들 대부분은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갔다. 이들에게는 신앙적 인도주의적 사명감과 더불어 에볼라 생존자라는 낙인 Stigma이 찍혀 있었다. 마을을 이루고 살아가는 서아프리카 사람들에게도 에볼라는 낙인이었다. 에볼라 환자가 발생한 집은 마을에서 고립되었으며 격리되어 치료받고 완치된 이들도 다시 자신이 살던 마을로 돌아갈 수 없었다. 실제 에볼라 대응에 참여했던 TED 연사는 완치자 한 명이 베이스캠프에서 자원봉사하면서 살게 해 달라고, 다시 마을에 돌아가면 낙인이 찍혀 살 수 없다고 간곡히 부탁을 했다고 이야기했다. 이에 시에라리온 정부는 에볼라 완치자에게 “생존자 ID"를 발급했고, 생존자들은 자신들에게 쏟아진 낙인을 지우고자 노력했다. 한국의 메르스도 예외는 아니다. 초기 대응 미비로 걷잡을 수 없이 퍼졌던 한국의 메르스는 생존자들에게 삶의 공간을 잃게 만들었다.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났으며 합병증과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으로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졌다. 위협적인 바이러스의 잔상은 이렇게 남는다.

 

- 한국의 보도를 보면 하루에 진단할 수 있는 진단 건수가 어마어마하게 높게 나온다. 그 숫자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전염병 응급 대응 때면 진단 실험실 지원에 나섰던 나는 그 숫자 뒤의 사람들이 보인다. 직접 환자를 대면하고 환자의 검체를 수거하는 이들과 환자를 돌보는 의료진들은 미디어에 노출되는 확률이 높아 이들만 부각되기 쉽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의 헌신도 있다. 한국의 진단 시약이 히트를 치면서 진단 시약을 생산하는 기업들의 노력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전국 보건소, 환경 평가원과 진단시설을 갖춘 중대형 병원들의 실험실에도 밤낮없이 진단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

(리뷰자 주 : 일상도 중요하고, 경제도 중요하고, 의료진도 중요하고, 지원팀도 중요하다. 이해 상충하는 모든 집단들 사이에 단 하나의 정답은 없는 것 같다.)

 

- 2009년 TED 강연에서는 모기가 든 유리병을, 2018년 베이징에서 열린 '화장실 엑스포'에는 인분이 담긴 유리병을 가지고 나왔다. 저소득국가에서 모기로 인해 감염되는 말라리아 퇴치를 위한 사업과 위생적인 화장실이 없어 설사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을 그는 독특한 시청각 자료를 이용해 사람들에게 설명했다. 고소득 국가의 정책은 물론 과학자들도 저소득국가의 모기와 인분에 대한 관심은 없다. 빌 게이츠는 오히려 고소득 국가에서는 대머리 치료제에 더 많은 투자와 연구를 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고소득 국가의 부자들과 정책 결정자들에게는 말라리아 모기나 위생적이지 못한 화장실로 인한 죽음보다 대머리 문제가 더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 뭔가 잘못되었다. 그땐 누구도 일개 대학원생의 후각엔 관심이 없었고, 학교와 실험실 내의 안전관리 수칙도 없었다. 선배들로부터 구전된 실험을 잘하기 위한 기술 전수만 있었을 뿐, 실험실에서 화학약품으로부터 바이러스로부터 박테리아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 나에게 처음이었던 것은 엄마에게도 다 처음이었다.

 

- 대학병원에서 근무하시는 교수님은 낮에는 진료를 밤에는 실험을 잔뜩 해놓고 가셨고, 연구원은 달랑 나 혼자에 가끔 펠로우 선생님이 논문 쓰러 들리곤 했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시키는 일만 반복적으로 하는 것은 정신 건강에 그다지 좋지 못하다. 그때가 그랬다. 아침에 출근해 냉장고를 열면 들어보지도 못한 암에 관련된 유전자 이름들이 적힌 수백 개의 작은 튜브가 가득 차 있었다.

 

- 사실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따로 시간을 내 영어 공부하기는 쉽지가 않다. 그나마 영어로 된 논문을 보는 게 조금 도움은 되는데, 논문에 사용하는 영어는 늘 쓰는 용어가 정해져 있고, 명확한 설명을 위한 단순한 구조의 문장들이 많아서 대학원 영어시험과는 차원이 다르다. 새벽마다 열람실에서 공부를 했어도 기출문제집 3분의 2도 못 풀었는데, 아마 동기들도 하루 종일 수업 듣고 실험하고 했을 테니 집에 가서 밤을 새우지 않는 한 공부할 시간이 많이 부족했을 것이다.

 

- '내가 떨어지면 지방대 출신이라고 날 깔보겠지.' 모난 마음이 불쑥 올라왔다. 지금 생각하면 참 유치한데, 슬기롭지 못한 대학원 생활을 하다 보니 남들과 비교하고 시기, 질투, 뒷담화가 빈번하던 그 시절엔 영어 시험 하나도 나에겐 정신적으로 버거웠다. 학교 서점에서 기출문제집을 하나 사서 아침 일찍 출근하는 아빠 차를 얻어 타고 실험실과 멀리 떨어진 인문 캠퍼스 열람실에 들렀다. 실험실 출근 전까지 한 시간 동안 기출문제를 풀었다. 풀었다기보다는 모르는 단어 찾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그때 꽤 많은 단어를 외웠는데 지금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면 내 영어실력의 문제는 공부한 게 '단기 기억'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 지금도 논문 발표를 끝내고 들었던 질문이 기억난다. 함께 박사과정 마지막 학기를 보냈던 학생의 질문이었다. 그 학생은 다른 교실이어서 전공이 완전히 달랐다. "그래서, 로타바이러스 rota virus 가 일으키는 질병이 됩니까?" 한 시간 동안 영어로 설명하고, 한 100번 이상 나온 단어를 그 학생은 모르고 그 자리에 앉아 있던 거였다. 대학원 영어는 다른 사람의 전공은 못 알아들을 만큼 자기 전공에만 특화된 것인가 보다. 

(리뷰자 주 : 웃프지만 자기 세부 전공이 아니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 사람들은 세균과 바이러스를 종종 혼동한다. 쉽게 생각하면 숙주가 있어야만 살 수 있는 게 바이러스이고 숙주가 없어도 자연계에서 생존과 번식을 하는 것이 세균이다. 세균은 한천이 들어가 반고체 상태의 페트리 접시나 액체 상태의 영양 배지가 들어간 튜브에서 키우는데 반해, 바이러스를 키우기 위해선 숙주가 필요하다.  

 

- 나는 요리와 실험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똑같은 레시피로도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내는 사람과 먹지 못할 음식을 내놓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똑같은 프로토콜로 한 번에 실험을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이 존재한다.

 

- 원래부터 손끝이 야무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꼭 실험에 적합한 손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 번에 성공하는 것이 신의 손이라면, 꾸준한 반복과 연습을 통해서 금손까지는 충분히 올라갈 수 있다. 플라크 어세이도 사실 몇 번 반복해서 하다 보면 얼마 가지 않아 금손이 되어 이쁜 플라크를 관찰할 수 있다. 프로토콜을 미리 숙지하고 각 과정에서 필요한 시약들을 미리 준비하고, 필요한 기계들을 미리 세팅해놓고, 필요한 실험기기들을 동선이 얽히지 않도록 준비하는 것. 여기서부터 금손은 시작된다.

(리뷰자 주 : 반복하면 기본은 가능하다는 희망고문. 사실 뭐든 한 번에 되는 쪽을 재능이라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 이 검출 방법에 대해 검토 validation 과정을 거치는데 같은 시약으로 한 명이 20번 이상의 실험을 했을 때 오차값 내에서 변화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한다. 또 같은 시약으로 세 명의 다른 실험자가 실험을 했을 때에도 오차값 내에서 동일한 결과가 나오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우리 팀의 두 명의 테크니션과 함께 이 검토 과정을 몇 번 반복했다. 실험실 경력이 최소 15~20년인 이들은 나름 금손이라고 자부하는 이들인데 세 명의 결과가 오차값 내에서 유의하긴 했지만 결과를 나타내는 숫자는 생각보다 많이 달랐다. 동일한 시약으로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장소에서 실험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실험 중간의 아주 작은 과정들, 예를 들어 플레이트를 세척할 때 세척액을 얼마나 깨끗하게 털어냈는가와 플레이트가 마르기 전에 얼마나 신속하게 다음 과정의 용액을 넣어줬는지 등 프로토콜에는 나오지 않는 아주 작은 부분들이 변수로 작용한 것이었다. 이는 언어로 프로토콜에 표현될 수 없는, 경험을 통해 몸에 배어 있는 실험자들의 암묵적 지식(암묵지)인 것이다. '과학하다' 라는 동사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길은 과학을 하는 과정 곳곳에 수도 없이 숨어 있는 암묵지를 깨닫는 데 있다. 과학자들의 암 북지는 어벤저스의 인피니티 스톤을 닮았다. 타노스가 스톤을 하나하나 모아 건틀렛에 장착해 슈퍼파워를 소유하듯, 과학자도 암묵지를 하나하나 익혀 신의 손이 된다. 실험의 베테랑인 우리 셋의 결괏값이 이 정도면 경험이 없는 실험자들의 결괏값은 어떨까? 여기서 깨달은 게 있다. 상용화된 시약 키트는 초보자들도 결과를 낼 수 있도록 '하향 평준화'된 것이라는 사실.

(리뷰자 주 : 꼭 과학이 아니더라도 모든 분야에서 그럴 것이다. 숙달자들의 스킬과 입문용 키트.)

 

- 후배에게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연습하라고 일러두었다. 실험실은 대단하지 않은 작은 손기술들이 중요할 때가 많다. 이왕이면 처음 실험을 배울 때 이런 손기술을 잘 익혀두면 후배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리뷰자 주 : 한 번 망칠 때 날아가는 금액과 시간을 생각하면 확실히. )

 

- 몸으로 익힌 동물을 다루는 기술은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 그 덕에 다른 사람들에게 없는 소중한 경험들을 안겨주었던 그 시간들은 이제 손녀를 둔 할아버지가 되신 교수님과 함께 허허 웃으며 나누는 과거 속 '우리의 기술'은 자부심이자 현재의 내가 있기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  

 

- 실험은 힘들지 않았다. 새로운 실험법을 계속 배우는 것이 아닌 기본을 익히고 응용하면서, 대부분은 결과가 잘 나올 때까지 반복하는 실험이 대부분이었다. 어느새 손이 기억하는 실험을 하고 있었고, 자주 사용하는 시약의 조성은 머릿속에 그냥 남아 있을 만큼 익숙해져 갔다. 실험의 과정을 하나하나 세세히 기록하던 실험 노트는 목적과 과정보다 결과만 남아 있기 일쑤였다.

(리뷰자 주 : 기록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 실험실은 평화의 전당이 아니다. 같이 입학했지만 같이 졸업을 하느냐 못하느냐가 달렸다. 누구는 실험이 잘되고 결과가 나오는데 누구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경우도 있고, 누구는 어디에 논문을 냈는데 누구는 못 냈다더라, 누가 어느 회사에 취업을 했느냐 못 했느냐 등등 꼬투리를 잡으려고 하면 끝도 없는 무지막지한 일들이 벌어지는 곳이다. 나는 과학자가 되고 싶은 이들에게 특히 대학원을 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실험실은 과학과 함께 시기와 질투의 서스펜스가 같이 피어나는 곳이라고 이야기한다.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그 시기를 함께 의지하며 지낸 친구는 인생의 친구가 될 수 있다. 귀에 쏙쏙 박히는 내 욕을 함께 들어주던, 참으면 속병 날 걸 알아 직접 부딪쳐보라고 권유했던 진구는, 아름답지만은 않았던 그 공간, 그 시간을 함께 지냈기에 큰 산을 함께 넘은 동지이자 내 인생의 친구가 되었다.

(리뷰자 주 : 대학생이 잘못하면 가는 곳이 대학원이라는 농담은, 사실 순수하게 농담은 아니다.)

 

- 꼼짝없이 옆에 붙어서 한 시간 동안 논문 지도를 받았다. 그냥 개괄적인 내용만 봐준 것이 아니라 논문의 개요부터 시작해서 결론과 고찰까지 앉은자리에서 논문 한 편을 거의 다 쓰다시피 한 것이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논문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고 헤어짐의 악수를 하며 그는 내가 보냈던 논문 편집본을 나에게 돌려주었다. 그 앞장에는 "당신은 개척자이다 You are the Pioneer"라는 파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스스로 가면 뒤에 숨어 있을 때, 자존감과 연구에 대한 자신감마저 떨어져 있을 때, 닥터 G가 내게 남겨준 그 한 문장이 가면을 깰 수 있는 망치가 되었다. 다음을 증명하고 또 그다음을 증명해야 하는 과학의 굴레처럼, 결국 타국에서의 이 삶도 다음을 또 그다음을 증명해야 함을 깨닫는, 그리고 그 길이 개척자의 길이라면 즐거이 걸어갈 것임을 다짐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리뷰자 주 : 저자는 지인들의 이름을 공개하지 않지만, 언급된 바들을 종합하면 충분히 띠지로 두를 만한 인물들이 다수 등장한다.)

 

- 미국에서는 1978년 이전에 지어진 집들은 페인트의 납 성분으로 인해 납중독의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 그래서, 유독 오래된 집이 많은 보스턴은 아이들이 학교 갈 때 필요한 건강검진 서류에 납 검사가 필수로 들어가 있다는 설명을 들으며 집으로 들어섰다. 남부 집에선 상상할 수 없는 온돌이 깔려 있고 집의 연식보다 꽤 관리가 잘된 집이었다. 

 

- 포닥의 빠듯한 월급으론 미국의 살인적인 미취학 아동의 데이케어 비용을 감당하기 힘들다. 게다가 더 살인적인 보스턴의 물가는 박사학위가 있는 친구의 취업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한국 가면 다시 실험실 나갈 거야?'라는 나의 물음에 친구의 입은 천천히 벌어진다. 한 실험실에서 가족이 함께 일할 수 없다는 한국의 규정 때문에 바로 일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친구의 말은 참 어렵게 뱉어졌다. '나 다 까먹은 것 같아' 수도 없이 했을 피펫질이, 밤새가며 수도 없이 찍었던 MRI가 이제는 어색할 것 같다는 친구의 말이 마음에 남았다.

                     

- 이 두 여성 과학자의 결혼, 그 중심에는 상황에 따라 강요로 해석되기도 하고 요청으로 해석되기도 하는 디멘드라는 단어가 있다. 배우자를 억압하기 위한 강요인지 배우자를 존중하기 위한 요청인지에 따라 완전히 뜻이 바뀌는 그 단어 말이다. 여성 과학자의 결혼은 이 소설의 주인공이 이야기하듯이 그 중간 어디쯤일 것이다. 상향과 하향이 아닌, 그들이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하고 경쟁하며 나아가야 하는 길에서 자신에게 어떤 형태의 디멘드가 있는 것인지 깨닫는 것, 그것이 본질일 것이다.

 

- 사전적 의미의 현숙함은 '어질고 정숙하다'이지만 히브리어 원어로는 '에쉐트 하얄 ליה תשא' 로 직역하면 '유능한 여인' 혹은 '야성 있는 여인'이란 뜻이란다. 남편이 히브리어의 뜻을 알고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리뷰자 주 : 히브리어는 어순이 반대이므로 אשת היל 가 맞는 표기이다.)

 

- 세상은 여성 과학자의 롤모델로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들만을 보여준다. 그들이 걸어온 현실적인 삶의 모습보다는 그들이 만들어낸 빛나는 업적만을 보여준다. 이미 다 이룬 분들은 그렇지 못한 이들을 이해하려는 마음보다 능력이 없거나 노력이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된다. 마치 나만 열심히 하면 걸을 수 있는 꽃길 같아 보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 길의 초입에 서면 누구나 느낄 수 있다.

 

- 더 많은 언니들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 지금은 이 길에 서 있지 않은 나의 선배 언니들의 이야기도 듣고 싶다. 이 길을 함께 걷지 않으면 실패라고 생각했던 나의 무지를 내려놓고, 완벽하게 반짝이지는 않지만 이 길로 걸어가는 방법, 저 길로 걸어가는 방법도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누군가의 한 발 먼저 딛는 그 걸음을 찾았으면 좋겠다.

 

- 앤 마리 슬로터의 《슈퍼우먼은 없다》에서는 현재 미국 내 여성들의 위치를 숫자로 이렇게 보여준다. ... 헤지펀드나 사모펀드의 경우 3퍼센트, 기계 관련 엔지니어의 6퍼센트, 세계 억만장자 중 8.5퍼센트가 여성이다.

(리뷰자 주 : 이 수치로 보건대 '뉴욕주민'은 그 3퍼센트 중에서도 소수인종이다.)

 

- 우리가 속해 있는 작은 조직부터 지역사회를 넘어 한 국가 안에서 주류가 다양성 없이 천편일률적으로 구성돼 있다면 조직과 국가의 정책 결정 및 제도, 복지 등에 한편으로 치우친 시각이 반영될 수 있다. 조직과 국가에서 결정한 사항이 실제 우리가 사는 삶과 괴리감이 느껴지는 것은 주류에 있는 이들은 겪어보지 못하고 생각조차 못 해본 환경과 생각 그리고 관점이 있기 때문이다.

(리뷰자 주 : 사회가 분화되어 갈수록, 타자화가 손쉬워질수록, 갈등은 생각지 못한 곳에서 터져 나온다. 갈등을 귀찮은 문제라기보다는 '너와 내가 다름'을 발견했다는 신호로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렵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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