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김초엽
출판 : 자이언트북스
출간 : 2021.08.18
<지구 끝의 온실>은 내게 열린 창문 위로 부서지듯 떨어지던 빗방울들과 무초, 그리고 이제는 사라진 어린 시절의 모래밭과 강둑을 떠오르게 했다. 다시 마주하면 부서져버릴까 두려운, 꿈 속에서도 떠올리지 못할까 걱정이 되는 소중한 기억들.
나는 김초엽의 문장을 좋아한다.
과학자로서의 그녀도, 소설가로서의 그녀도, 그리고 김초엽 자신으로서의 그도 모두 녹아들어 있다.
묘한 곳에서 디테일한 상황 묘사를 읽다보면 피식 웃게 되어버린다.
이번 작품은 소설 자체로서도 매력적이었고, 식물에 대한 시각과 설정도 매력 있었다.
결국 모두는 각자가 품은 조각들을 안고 그것만을 기억하며 살아가게 된다. 한 세대의 상흔은 그 순간을 살았던 이들에게 모두 다른 기억을 남긴다. 그러나 그 세대와 이어진 다음 세대의 기억들은 한 점으로 모여 결국 잊혀졌던 프림 빌리지를 증명하고야 말았다. 각 개체들의 삶의 기억들이 결국은 종의 기억이 되듯이.
이데아는 구현할 수 없기에 아름다운 것이며, 유격 범위는 모든 영역에 걸쳐 피할 수 없는 천형이다.
그러나 바꿔 생각하면 -가시 영역과 비가시 영역 모두에서 어느 정도의 오차가 허용된다는 것은- 일종의 축복이기도 하다.
즐겁게 읽었다.
- 머그컵에 얼음 여섯 개, 에스프레소 투 샷, 찬물 약간을 넣고 영혼을 회복시켜줄 약물을 제조해 온 다음, 윤재가 말한 어제 뉴스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리포터가 자료 화면을 띄워놓고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을 인터뷰하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강이현 소장이었다. 소장이 걸친 가운은 과할 정도로 하얗게 반짝거려서, 대외용 인터뷰가 아니면 전혀 입지 않는 옷 같았다.
- 그 표정을 보면서, 나는 막연히 생각했다. 나에게 좋은 사람이 타인에게는 아닐 수도 있다고. 어쩌면 지수 씨가, 나와 레이첼에게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 "지켜준다고는 안 했어. 도움이 될 수도 있다고 했지."
- "제조에 필요한 재료와 무게, 과정을 정확히 기록하는 것이 과학의 원칙이지. 하지만 이건 달라. 감추는 것이 널 구할 테니까. 지금은 그런 시대야. 원칙이 네 약점이 되고, 편법이 네 무기가 되지. 이 비참한 시대가 끝날 때까지는, 네 머릿속에 제조법이 완벽하게 들어가 있어야 해. 남이 볼 수 있는 기록은 절대 남기지 마. 아무리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숨기는 게 좋아."
- 나는 이상하게도 지수 씨의 시선이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수 씨가 이 순간을 눈앞에 두고도 그리워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 그 짧은 침묵을 통해 나는 지수 씨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만큼 지수 씨는 나를 존중했다.
- '당신이 여기까지 온 이유를 알겠습니다. 우리가 결국 만나게 된 이유도요. 저는 운명을 믿지는 않지만, 같은 것을 쫓는 사람들이 하나의 길에서 만나게 되어 있다고 믿거든요. 우리는 그 기이한 푸른빛에 이끌렸고, 또 같은 사람을 통해 연결되어 있네요. 그 사람의 생사를 알게 되면 꼭 바로 알려주세요."
- 처음에는 아영의 주장에 회의적이던 연구자들도 새로운 증거들이 등장하며 조금씩 태도를 바꾸고 있었다. 더스트 생태학계는 대격변이 일어난 분위기였다.
- 아영은 어떤 이야기는 기록했고 어떤 이야기는 기록하지 않았다. 모든 이야기가 공개되고 남겨져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이보그의 신체조차 결국 녹슨다. 모든 것은 낡고 비틀어진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기록의 의미는 무엇일까.
- "그곳은 이미 제 기억 속의 그 장소와는 완전히 다른 곳이 되어 있겠죠. 그러면 다시는 마을을 꿈속에서도 떠올리지 못할까 봐 걱정이 되네요."
- 처음 「지구 끝의 온실」을 구상하기 시작했을 때 나에게는 막연한 이야기의 씨앗만이 있었다. 아직 무엇이 될지 모르는 이 씨앗을 소설로 완성하기 위해서는 아주 느리지만 끈질기게 퍼져나가는,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결국은 지구를 뒤덮어버릴 생물체가 필요했다. 박테리아, 바이러스, 곰팡이, 버섯, 심지어 곤충까지 진지하게 검토해봤지만 구상 과정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모두 탈락하고 내가 도달한 답은 하나, 식물. 오직 식물만이 내 소설을 구원해줄 생물이라는 거였다.
- 온실의 모순성을 좋아한다. 자연이자 인공인 온실, 구획되고 통제된 자연. 멀리 갈 수 없는 식물들이 머나먼 지구 반대편의 풍경을 재현하는 공간 이 소설을 쓰며 우리가 이미 깊이 개입해버린, 되돌릴 수 없는, 그러나 우리가 앞으로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이곳 지구를 생각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세계를 마주하면서도 마침내 그것을 재건하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아마도 나는, 그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 같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맛있거나 예쁘거나, 하다못해 약으로 쓸 수 있는 식물 외에는 더 이상 지구 상에 존재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 수연의 반응은 조심스러웠다. 노인들을 주로 상대하는 수연은 다른 지역에 비해 온유에 사는 공헌자 노인들이 좀 더 품위 있고, 친절하고, 대하기가 까다롭지 않은 고객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것이 그들이 정말로 존경받을 만한 사람들인지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전부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고 수연은 덧붙였다.
- "더스트 시대에는 이타적인 사람들일수록 살아남기 어려웠어. 우리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후손이니까, 우리 부모나 조부모 세대 중 선량하게만 살아온 사람들은 찾기 힘들겠지. 다들 조금씩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딛고 살아남았어. 그런데 그중에서도 나서서 남들을 짓밟았던 이들이 공헌자로 존경을 받고 있다고, 그게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거든. 아영이 네가 이해하기는 아직 어렵지?"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해가 될 것 같다가도 혼란스러워지곤 했다. 당장 목숨이 걸려 있다면, 죽음 앞에서 누구나 이기적인 선택을 할 텐데,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수연의 말대로 아영 자신이 '이타적이지 않은 사람들의 후손'이어서 그런 것일까. 생각이 꼬리를 물다 보면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갔고, 결국은 더스트 이후에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는 원죄가 있는 것인가 하는 심오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 종류가 다른 진한 생과일주스를 층층이 담아 파는 노점이 블록마다 자리 잡고 있었다.
"저걸 스프리스 쯔마끼라고 불러. 아보카도에 망고, 파파야를 올리면 엄청 맛있거든. 꼭 먹어봐."
이 옆에서 윤재가 알은척을 했다. 이전에 아디스아바바 학회에 와본 윤재와 달리 아영은 이번이 첫 참가였다. 이국적인 음식과 화려한 색상의 공예품에 시선이 이끌리다가도, 아영은 또다시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여기서 정말로 '랑가노의 마녀들'을 만날 수 있을까? 거짓 제보에 속은 것이라면 어쩌지?
- "좋아요. 딱 한 번만 더 이야기를 해볼게요. 어쩌면 당신이 말한 정원의 주인은 제가 아는 사람일지도 몰라요. 당신은 답을 아직 알지는 못하지만, 답을 찾기 위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지요. 그곳으로 가겠다는 생각도 있고요."
- 말을 들으며 나는 왜 망해가는 세상에서 어른들은 굳이 학교 같은 것을 만든 걸까 생각해보았다. 나를 비롯한 아이들은 대체로 하품을 하며 수업을 듣는 반면, 칠판 앞에 선 어른들은 늘 의욕에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이것이 어른들의 몇 안 되는 즐거움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배워야 해서 학교를 운영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행위 자체가 어른들에게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 나는 하루와 다시 숲 정찰을 시작한 이후에도, 틈이 나면 지수 씨의 오두막으로 갔다. 마을에서 느껴지던 불안감은 이상하게도 오두막에 들어설 때면 사라졌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것도 아니고 기계 외에는 그다지 관심도 없는 지수 씨가 이 마을의 리더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지수 씨는 안정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문제가 생겨도 어떻게든 해결해줄 것 같다는 그런 종류의 안정감을.
- "하지만 공개적으로 알려줄 순 없지. 그랬다간 레이첼이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 눈치를 챌 테니까. 연금술사들이 제자에게 비법을 조심스레 전하듯이 그렇게 알려줘야 해. 지금 여기가 바로 그 고대의 비법 전수실인 거지, 네가 첫 제자인 거고. 가능하다면 다음 제자들도 가르쳐야겠지만."
- 하지만 막상 제조법을 배우기 시작하자, 자신감은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단지 사용량이나 제조 순서를 외우는 것만으로는 분해제를 완성할 수 없었다. 식물들에서 필요한 성분을 추출하고, 그것을 혼합하고 가열하고 냉각하고 걸러내는 과정은 아무도 대신해주지 않았다. 내 손으로 직접 해야 했다. 부단한 연습이 필요한 일이었다. 지수 씨는 계량 도구들이 없을 때 간이로 사용할 수 있는 계량법까지 알려주었다. "어렵지? 네가 만든 걸 네가 먹는다고 해도 망설여지지 않을 때까지 연습해야 해."
- "레이첼은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것뿐이야. 세상을 구할 의도도 없고, 그렇다고 마을 사람들을 자기 마음대로 어떻게 하겠다는 것도 아니지. 레이첼이 여기에 머무르는 건... 그건 아마도, 이곳이 자신에게 가장 편안한 장소이기 때문일 거야."
레이첼에 대해서 말할 때, 지수 씨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레이첼을 가깝게 여기는 것 같으면서도 조금은 냉소적인 태도가 묻어났다.
"자신이 원한다면, 레이첼은 인류의 구원자가 될 수도 있겠지. 정보도 있고 능력도 있는데다, 운도 따라줬으니까. 하지만 레이첼은 그걸 원하지 않아."
- 어떤 학자들은 가설을 세우고 실험을 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결론을 내린다. 혹은 관측으로부터 데이터를 축적하고, 정확한 분석을 거쳐 귀납적으로 하나의 이론을 이끌어낸다. 그것이 일반적으로 과학이 수행되는 방식이다. 하지만 어떤 기묘하고 아름다운 현상을 발견하고, 그 현상의 근거를 끈질기게 쫓아가 보는 것 역시 하나의 유효한 과학적 방법론일지 모른다. 실패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대부분은 실패하겠지만, 그래도 일단 가보지 않으면 발견하지 못할 놀라운 진실을 그 길에서 찾게 될지도 모른다고, 아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 "저도 나오미 당신을 만나서 다행이에요. 이렇게 하나의 이야기를 끈질기게 뒤쫓아가 보는 건, 이렇게 연구를 하는 건 아마도 삶에서 다시없을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 "언제나 의심하고, 매일 서로에게 물었어요. '우리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프림을 떠난 이후 우리는 어디에서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프림에서 하던 일을 반복하고 있었죠. 어떤 사명감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 시절이 그리웠고, 그것만이 우리를 잠시나마 과거로 되돌려 보내주었으니까요."
- "시간이 흐를수록, 모스바나가 무엇인지가 제게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지요.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에요. 저는 그냥 그곳에서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던 거예요. 프림 빌리지를 다시 만들 수 없다는 것도, 그런 곳은 오직 프림 빌리지뿐이었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식물들을 심었어요. 오직 그것만이 저를 살아가게 했으니까요."
- 아영을 비롯한 식물팀 연구원들은 그동안 전시회 기획 담당자들에게 너무 많이 시달려서, 이제는 '전시회'라는 말만 들어도 등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전시회 기획팀은 모스바나에 대한 특별 전시를 갑자기 준비하게 되었는데 자신들은 식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거의 없다며, 더스트생태연구센터로 거의 매일 전화를 걸어 필요한 자료를 요청하고 설명을 부탁했다. 정작 전화를 거는 담당자는 원치 않은 일을 갑자기 떠맡게 된 팀 막내인 것 같아서 화를 낼 수도 없고, 본업에 도저히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요청이 쏟아지고 있으니 기꺼운 마음으로 도울 수도 없어서 모두 괴로워했다. 막상 모스바나의 사진이 전시회의 메인인 것처럼 걸려 있는 것을 보니 괜히 감격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전시회 내용은 과학을 잘 고증하기보다는 낭만적으로 포장한 신비주의에 가깝다는 것을 떠올리자, 그 즉시 감동이 차갑게 식고 말았다. 담당자는 약간 민망해하며 '흥행을 위해서는 예술성이 가미되어야 하고, 너무 과학적이기만 해서는 곤란하다'라고 했지만, 그럴 거면 도대체 왜 그렇게 식물팀을 몇 달간 괴롭혀 댄 건지 모를 일이었다.
- "엉터리 같은 소리를 해댈 게 뻔한데 그걸 왜 보겠습니까."
"안에 들어가 보시면 꽤 재밌는 게 있을 거예요. 앞에 걸린 태피스트리는 그래도 괜찮지 않던가요?"
"그건 모스바나에 대한 기만으로 보이더군요."
- 문득 아영은 레이첼의 눈빛이 어릴 적 정원에서 보았던 지수의 눈빛과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후회와 그리움이 섞인, 하지만 고통이라고만은 단언할 수 없는 어떤 복잡한 감정이 그 시선 속에 있었다. 생의 어떤 한순간이 평생을 견디게 하고, 살아가게 하고, 동시에 아프게 만드는 것인지도 몰랐다.
- "저는 그렇게 한 사람의 평생을 사로잡는 기억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죠. 그때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당신의 마음이 실제로 전부 유도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 무엇도 지수 씨의 잘못을 해명해줄 수는 없어요. 어쨌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마음도 감정도 물질적인 것이고, 시간의 물줄기를 맞다 보면 그 표면이 점차 깎여나가지만, 그래도 마지막에는 어떤 핵심이 남잖아요. 그렇게 남은 건 정말로 당신이 가졌던 마음이라고요. 시간조차 그 마음을 지우지 못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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