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정대건
출판 : 은행나무
출간 : 2020.04.20
이번 주는 개인적으로 쉬어가는 주간이었다.
죄책감 없이 늘어져서 적당히 뒹굴 거리고 있으니 하루가 참 길면서도 짧았다.
슬슬 일상으로 복귀하려니 아쉽기도 하고, 안심되기도 한다.
고속열차에서 가볍게 읽으려고 골랐던 책에서 위로를 받았다. <GV 빌런 고태경>.
고전과 통속은 한 끗 차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좋은 말은 대개 흔한 말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앞뒤로 달려가는 사람들 틈에 휩쓸려 떠도는 느낌.
여기가 어딘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막막함.
멈춰 서자니 두려운데, 막상 멈추려 해도 앞뒤에서 미는 힘 때문에 힘주어 버티려 해 봐도 떠밀릴 때.
그렇게 해파리처럼 떠돌다 보면 어느덧 내 옆을 달리던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아득한 곳에서 달려온 젊은 패기들에게 발끝 하나 겨우 걸치고 있던 자리마저 내놓아야 할 때.
그런데도 여전히 가슴이 뛰고, 설레는 것이 있다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축복 같은 삶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즐거운 순간에는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정말 순수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웃을 수 있다면.
아이가 아닌 어른들은 그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연습을 해야 한다.
바로 몇 분 뒤에 눈물이 쏙 빠질 일이 기다리더라도, 그것들을 미리 섞어 이도저도 아닌 시간들로 만들어버리기에는 아까운 기회다.
인생과 영화를 함께 이야기한 사람들이 많다.
가장 '좋은 순간'들만을 모아낼 수 있도록,
러닝 타임의 몇 배나 되는 촬영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닮았고-
내 삶에서 '오케이'를 외칠 수 있는 건 나 뿐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GV 빌런 고태경>은 매끄럽게 읽히면서도 머릿속에서 각 장면이 영화처럼 펼쳐져서 좋았다.
기분 좋게 읽었다.
- 책에 연필로 밑줄 친 '영화와 인생 둘 중에서 무엇이 더 중요하냐는 질문에 망설이지 않고 영화라고 대답한 프랑수아 트뤼포'를 지우개로 열심히 지웠다. 밑줄을 지운다고 중고책 판매 가격이 크게 오르는 것도 아닌데, 전화통화의 화끈거림을 잊고 몰두할 게 필요했다. 그러나 아무리 지워도 흔적이 남았다. 중고책 사이트에 글을 올리자 재고 알림이라도 해두었는지 어떤 사람이 두 권을 금방 주문했다. 택배를 받을 부산에 사는 배영준 씨는 어떤 시네필일까. 부디 이 책을 읽고 영화 같은 걸 하지는 말기를.
- 항상 현장에서 벌어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시뮬레이션해보는 것, 그게 일상에서도 습관으로 굳어졌다. 종현은 내게 '걱정 천재'라고 했고, 나는 그게 감독의 미덕이라고 했다. 나는 불길한 일을 감지하는 촉이 꽤 발달한 편이다. 예방할 수 있는 능력은 부족하지만, 누구나 그런 쓸모없어 보이는 능력 하나쯤은 가지고 있지 않나. 그러나 그날 터진 일은 나의 예측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 "촬영은 촬영감독이 하고, 연기는 배우가 하고, 감독은 선택하는 사람이야. 그런데 선택에는 정답도 없고, 그래서 어렵지. 그 수많은 사람들이 왜 감독의 말을 듣겠어. 남들보다 잘 선택해야 돼. 선택의 프로가 되어야 해."
내 얼굴 한쪽에 그림자를 드리우던 그날의 햇살이 추운 날씨에도 따스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나는 그 와중에도 촬영하기 참 좋은 볕이라고 생각했다.
- '이런 순간이요'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그런 날은 인생에 아주 드물게 있었다. 간질간질한 기대감으로 가득 찬 날. 같이 본 영화도 좋았고, 술집의 분위기도, 시원한 맥주 맛도, 대화도 좋았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느껴지는 날. 그래서 두고두고 이 날이 기억되겠구나 싶은 날.
- 나는 그가 정말 엄격하게 원칙을 지키는 사람인지 궁금했다. 그런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타인의 폭력에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것처럼 굴면서 술자리에서 술을 강권하거나, 환경을 생각하는 척하면서 길에서 담배를 피운 뒤 담배꽁초를 아무 데나 버리는 사람들 천지였다.
- "뭐 별 게 있겠어요. 제 재능이 어쭙잖은 수준이라는 거죠."
"재능?"
고태경은 코웃음을 쳤다.
"재능이니 뭐니 하는 건 이십대에나 하는 거 아냐? 그냥 하는 거지. 이 나이 되니까, 재능 있다던 사람들 그만두고 재능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성공하는 것도 다 지켜봤어. 꾸준히 계속하는 의지야말로 진짜 재능이지.”
"어쭙잖은 재능은 저주라던데요."
"누가?"
"조병훈이요. '구린 영화를 찍으면 구린 사람이 되는 거야'. 조병훈이 그렇게 말했어요. 그렇지만 어느 정도 맞는 말이죠. 잔인한 사실 같은 거죠..."
나는 고개를 떨구고 기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서 자네가 구린 사람이다?"
나는 부정하지 못했다. 졸업한 지 오 년이 다돼 가는데도 그 저주의 말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정수리에 시선이 느껴져서 봤더니 고태경이 나를 한심하다는 건지, 안쓰럽다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고태경의 걸음이 느려졌다. 지하에서 지상으로 이어진 계단을 오르던 고태경이 우뚝 멈춰 섰다.
"그런데 그게 선생이 제자에게 할 소리인가?"
"그러게요..."
나는 같이 멈춰 서서 중얼거리고는 새삼 내가 받는 취급을 당연하게 생각해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태경은 각자 제 몫이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조병훈은 학생들에게 독설을 퍼부으며 선생으로서 자부심을 느꼈을까. 우리는 빛이 가득한 지상으로 올라왔다. 눈이 부셨다.
- 내가 고태경에게 놀란 점은 패배 의식이나 자격지심이 거의 없다시피 한 거였다. 나는 그가 GV에 나타나서 질문하는 게 비틀린 질투나 원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의 질문은 비난이나 조롱이 아니었고,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고 뽐내기 위함도 아니었다. '저 연출자는 어떤 생각이었고 자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영화 제작을 시뮬레이션해보기 위한 질문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GV 시간에 제작과정에 대해, 현장에 대해, 후반 작업에 대해 꼬치꼬치 물었다. 극장이 곧 그의 영화학교였던 것이다.
- 영화를 찍으면서 드물게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좀처럼 확신을 못 갖던 내가 배우의 감정과 카메라의 움직임,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프레임에 들어오는 햇빛의 반사, 지저귀는 새소리까지 모든 게 만족스러워 시원하게 오케이를 외칠 때가. 그렇게 얻은 화면이 영원한 지속의 순간이 되어 스크린에 상영될 때, 그 쾌감은 영화 만들기라는 미친 고생을 다시 하게 만드는 희열이 되었다. 삶에서도 확신을 가지고 오케이를 외친 순간들이 드물게 있었다. 무언가가 좋다는 감정,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을 느끼는 순간들. 사람들은 그래서 무언가를 혹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아닐까. 태어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만큼, 불확실한 생에 확신이라는 것을 가져보고 싶어서. 결국 영화를 만드는 것은 많은 선택지 앞에서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고백하는 것이었다. 삶은 엉터리고 대부분 실망스러운 노 굿이니까 사람들은 오케이 컷들만 모여 있는 영화를 보러 간다. 우리가 '영화 같다' '영화 같은 순간이다'라고 하는 것은 엉성하고 지루한 일상 속에서 오케이를 살아보는 드문 순간인 거다.
- 그러나 계속 후회 속에 빠져 멈춰 있을 순 없다. 다음 챕터로 넘어가야 한다. 때로는 오케이가 없어도 가야 한다.
- 남은 단팥죽을 싹싹 긁어 먹으면서 언젠가 이 시절이 그리워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영화는 내게 좋은 것만 줬는데. 영화가 나한테 상처를 준 게 아닌데. 영화가 미워지고 극장도 안 가게 되더라. 영화도 밉고 나도 밉고... 내가 사랑하는 걸 미워하는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걸 더욱 사랑하는 방향으로 가고 싶어. 행복해지지 않는다면 뭘 위해서 이 모든 일을 하겠어?"
포기나 도망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에는 승호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단단함과 당당함이 느껴졌다.
- "선생님은 무슨 힘으로 버티세요?"
고태경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술을 한 잔 들이켰다.
"그런데 말이야. 사랑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이번 생에 뭘 더 좋은 걸 했겠어?"
고태경이 쓸쓸하게 웃으며 나에게 물었다.
"어떻게 버티느냐고 물었지. 진정으로 응원해주고 지켜봐 주는 한 사람만 있으면 돼."
나는 고태경의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건 내가 가지고 싶었으나 갖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술을 마시면 가슴이 달래지기라도 할 것처럼 술을 들이켰다. 술기운이 올랐다. 내가 고태경에게 정말 하고 싶던 질문은 단순히 어떻게 포기하지 않고 버티느냐가 아니었다. 영화 속 친구들 말고는 외톨이로 홀로 살면서, 어떻게 버티세요. 사람들이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함께 일상을 나누고, SNS를 열심히 하는 것도 삶의 목격자가 필요해서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삶은 너무 쓸쓸하잖아요. 그 외로움과 고독을 어떻게 버티세요. 그러나 고태경은 확신하고 있었다.
- 우리는 빛을 만드는 사람들이니까. 빛을 보려면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지. 한국에 돌아가면 내가 단팥죽은 얼마든지 사줄게.
- "누군가 오랫동안 무언가를 추구하면서도 이루지 못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비웃습니다. 자기 자신도 자신을 비웃거나 미워하죠. 여러분이 자기 자신에게 그런 대접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냉소와 조롱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값싼 것이니까요. 저는 아직 생각만 해도 가슴 뛰는 꿈과 열망이 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제 영화를 상영하는 겁니다."
- 이제는 실패가 나의 일부라는 것을 명확하게 안다. 인생이 '원 찬스'가 아니고 내가 다 날려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나는 하루하루 최선을 다할 뿐이다. 기회를 만들기 위해 시나리오와 연출 노트를 열심히 쓰면서. 기회가 왔을 때, "나는 준비가 아직 안 된 것 같아”라고 말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언젠가 마침내 극장으로, 그 어두컴컴한 곳으로 사람들을 초대한다. 신기루를 좇는 사람들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땀 흘리고, 완성된 영화가 빛이 되어 먼지를 뚫고 흰 스크린 위에 움직이는 환상의 그림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우리가 보낸 세월이 빛이 된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 선택의 프로, 그런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나는 앞으로도 실수하고 후회하고 반복하겠지만, 적어도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미워하지는 않을 거다.
- 몇 년 전 나는 뜻대로 풀리지 않는 삶에 절망한 채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먼저 손 내밀 줄도, 도움을 청할 줄도 모르는 사람이었고 혼자 고립되어서 위태로웠다. 그런 사람에게도 극장과 도서관은 열려 있었다. 그 두 곳은 사회적 안전망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도서관에서 소설이 될지도 모를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렇게 고태경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 모든 준비생들과 지망생들, 기회만 주어진다면 잘 해낼 사람들이지만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 놓인 누군가가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미워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자신을 미워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이 소설을 썼다. 그건 나에게 누군가 해주었으면 하는 이야기였다.
- 두 번째 이유는 GV 빌런을 맞닥뜨릴 확률이 높아서다. GV 빌런은 GV(Guest Visit)와 빌런(Villain, 악당)의 조합어다. 관객과의 대화에 등장해서 분위기를 흐리는 GV 빌런은 다양한 유형이 존재한다. 질문은 하지 않고 자기 블로그에나 쓸 감상을 장황하게 연설하며 지식을 뽐내는 '나 이렇게 영화 많이 알아' 유형. 그것의 변용인 '제 해석이 이러한데 이게 맞나요?' 유형. 저는 A대학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제가 처음 감독님 영화를 본 건 칠 년 전이었는데요. 그때도 질문했는데 감독님 저 기억하시나요? '세상의 중심은 나' 유형. 셔터 소리를 과하게 내며 계속 사진을 찍거나, 사생활에 대한 난처한 질문을 하는 '파파라치' 유형. 그 장면은 이렇게 찍었어야 하는 거 아니냐, 캐스팅 후회하지 않느냐 같은 '훈계 및 평가' 유형. 통역사가 있는데 굳이 외국인 게스트에게 본인이 영어, 불어, 일어 등으로 직접 질문해서 통역사 일 두 번 하게 만드는 '나 외국어 능력자야' 유형 등등. 그들이 느끼지 못하는 부끄러움은 나머지 관객들의 몫이었다.
(리뷰자 주 : 애정의 표현 방식은 다양하겠지만 모든 것에는 정도가 필요하다. 그 대상이 무엇인지도 항상 자각해야 하겠고.)
- "난 사랑에 빠진 게 아니에요. 당신을 사랑하기로 내가 선택한 거지.”
- "여기서 영화가 싫은데 부모님이 원해서 억지로 온 사람 있습니까? 여러분 모두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들어온 불효자들입니다. 어떤 영화를 만들지 이제는 영화에 대한 태도를 진지하게 정해야 합니다.”
- 정현영의 단편영화는 내 단편과 비슷한 결의 성장물이라 반가웠지만, 나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예감했다. 일 년 동안 우리 둘이 비교되리라는 걸. 캐릭터가 겹치면 하나만 살아남는다.
- 그날 밤 꿈에 월터 머치가 나왔다. 그는 내 촬영 소스가 담긴 편집기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의자에 앉지 않고 선 채로 편집기를 만졌는데 그의 훤칠한 키, 지적으로 보이는 안경, 신중하게 어휘를 고르는 저음의 목소리는 엄청난 신뢰감을 줬다. 영화는 어쨌든 편집의 예술이다. 실낱같은 희망으로, 나는"플리즈" 하고 애원하며 심폐소생술을 바랐다. 한참 씨름하던 월터 머치는 슬픈 눈빛으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왓? 왓? 노! 노!" 하고 울부짖으며 편집실 라꾸라꾸 침대에서 깼다.
- 어릴 때 고도비만이었다는 승호는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에 가고, 열심히 운동해서 삼십 킬로그램을 감량해 본, 노력해서 성취의 경험을 해본 사람의 자신감 같은 게 있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승호의 모든 전제에는 '열심히 하면 된다'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여럿이서 만드는 영화는 홀로 열심히 한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나와 동기들은 영화 지식은 해박하지만 영화 제작 경험은 거의 없던 승호에 대해 '시네필 범생이 샌님'이라고 생각했다.
- 냉정하게 말하면 승호는 동기들에게서 현장의 모든 것을 배울 수 있었지만, 동기들은 승호에게서 배울 점이 없었다.
- 나는 그래도 B선배가 대단해 보였다. 현장과 편집실에서의 어마어마한 수난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나쁜 영화는 없다. 나도 이런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자극을 주는 좋은 영화,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용기를 주는 좋은 영화뿐이다. 오늘 본 영화는 후자에 가까웠다.
- 아무리 세상에 동기 부여되는 말들이 많이 있다지만 '나도 하겠는데?' 만큼 효과적인 동력은 없다. 그래, 쟤도 했는데 내가 왜 못해. 나는 남은 맥주를 원샷으로 비웠다.
- 원래 기획서 쓸 때는 재미있는 법이다. 세상의 온갖 방해와 영화 현장의 별의별 잡귀들이 들러붙기 전이니까.
- "최강호 감독님이 호통치시며 하신 말씀이 있지. '일본에서는 팔방미인이 욕이다. 다재다능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한 가지를 똑바로 잘해야 한다.'"
- 고태경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늘 극장을 찾았고, 그것을 수행자의 의식처럼 십 년 넘게 행하고 있었다. 마치 그 루틴을 깨지 않고 지켜야만 감독 데뷔를 할 수 있는 것처럼.
- 나는 머릿속이 헝클어져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잘하고 싶었지만 잘 해내지 못한 것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내 능력에 대한 믿음이나 내가 확신하던 것들은 다 무너졌다. 그때 열악한 조건에서 작품을 찍은 건 내 선택이었다.
"정말 좋은 기회였죠... 제가 다 망쳤어요. 그땐 사람들 원망도 많이 했는데 누굴 원망하겠어요. 다 제 잘못이에요.”
"반반 하자."
"네?"
고태경은 마치 양념 반, 프라이드 반, 반반 하자는 듯이 툭 말했다.
"자네도 살아야지. 어떻게 다 자네 책임이야. 반반 해. 상황이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잖아. 자네 탓만 하지 말고 세상 탓도 절반 하자고."
고태경에게 위로를 받게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게 효과가 있을 줄은 더욱 몰랐다.
"비싼 수업료 치른 거로 생각해. 실패도 못 해본 사람들이 수두룩해. 실패에 자부심을 가져."
그 수모를 겪은 게 잘한 일이라고? 영화를 만들며 겪은 고난을 통해 배운 기술들은, 영화를 만들 때 이외에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쓸모가 없다.
"기회라는 게 원체 오지 않기 때문에 나는 조 감독이 잘했다고 생각해. 그때 안 했으면 뭐 어떻게 다르게 했겠어?"
어떻게 달랐을까. 수십, 수백 번도 더 상상해본 일이다. 그러나 그 순간들을 경험해 보기 전에는 내 부족했던 점들을 몰랐다. 그 당시엔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었다.
"작품 완성하려고 무릎까지 끓었다고 했지? 그런 거 아무나 못 해. 난 말이야, 이제 나한테 그런 기회가 주어지면 무릎 꿇는 거보다 더한 것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진짜 부끄러운 건 기회 앞에서 도망치는 거야."
고태경이 잠시 간격을 두었다가 덧붙였다.
"완성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모든 완성된 영화는 기적이야."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그의 말에 가슴 한편이 뜨거워졌다. 콧날이 시큰했다. 고태경이 나의 표정을 흘깃 살피더니 말없이 조수석의 창을 조금 내렸다. 시원한 바람과 소음이 어색한 공기를 채웠다.
- "집념이라는 게 잘됐을 때나 그렇게 부르는 거지, 그게 한 끗 차이거든."
나는 굳은 얼굴로 되지도 않는 억지 미소를 짓고는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고 돌아섰다. 나는 항상 반응이 늦었다. 특히 타격이 있는 말, 상처가 되는 말들에 대해서 내 감정을 알아채는 게 늦었다. 뒤늦게 돌아서서 민 대표에게 쏘아붙이고 싶었다.
- "그토록 오래 바라던 일인데 한 번은 펼쳐 보이고 싶어. 앞으로 오 년, 십 년? 그다음은... 죽어가는 거지. 영화는 계속 볼 수 있으니까. 팔십이 돼도 구십이 돼도 극장에 올 거야. 그때는 실버 영화관을 자주 가겠지. 나는 포기하지 않을 거야."
- "사람이 목표를 잃어버리면 그때부터 확 늙는 거야."
- "돌이켜보면 뭔가를 도모하고 거기에 몰두할 때가 제일 행복한 것 같아."
- 나는 승호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새삼 승호가 어떠한 포장도 없이 나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 열등감을 느끼지 않고 서로를 축하할 수 있는 편안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승호에게 진행 중인 편집본을 보여주고 싶어졌다. 그것이 진실이 아니어도, 그렇게 말해주는 승호 때문에 마음이 짠했다. 승호는 빤한 말을 굳이 표현하는 애였다. 꼭 자기 영화처럼 나이브했다. 예전에는 그게 촌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게 내가 갖지 못한 승호의 재능이라는 것을 안다.
- 재미있는 건 신 피디와의 미팅 이후 나의 변화였다. 기회가 생기면 얼마든지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분 좋은 긴장감이 정신과 몸을 팽팽하게 만들었다. 머리만 대면 잠에 빠지던 우울감은 어디 가고, 네 시간밖에 안 잤는데도 잠이 저절로 깨고 정신이 또랑또랑했다. 나는 규칙적으로 운동도 하고 <올드스쿨>과 비슷한 영화들을 분석하며 연출 노트를 성실히 적었다. 그런 나 자신의 변화를 인지하면서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나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있기는 하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렇게나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도록 만들다니. 나는 너무 고립되어 있었구나 싶었다.
- 그건 바르샤바가 내게 가져다준 변화였다. 벌어지지 않은 일을 기대하며 품게 되는 행복보다, 지금 내가 느끼고 있고 손에 잡히는 행복에 집중하는 것. 새삼 고태경이 정말 강인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을 독려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외부에서 누군가 지지해주는 사람이 없으면서도 그러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체감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지지자가 되어주고 싶어졌다.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 > Book1' 카테고리의 다른 글
[퍼트리샤 포즈너] 나는 아우슈비츠의 약사입니다 - 악은 어떻게 조직화되고 보편화되는가 (0) | 2021.09.16 |
---|---|
[루이스 캐럴] 스나크 사냥 (0) | 2021.09.11 |
[박한선, 구형찬] 감염병 인류 - 균은 어떻게 인류를 변화시켜왔나 (0) | 2021.09.10 |
[김초엽] 지구 끝의 온실 (0) | 2021.09.07 |
[사이 몽고메리] 문어의 영혼 - 경이로운 의식의 세계로 떠나는 희한한 탐험 (0) | 2021.09.04 |
[신기율] 은둔의 즐거움 - 나를 성장시키는 혼자 웅크리는 시간의 힘 (0) | 2021.09.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