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텐진 왕걀 린포체] 티베트 꿈과 잠 명상 - 마음의 본성으로 돌아가는 현대인의 수행법

일루젼 2021. 9. 14.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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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텐진 왕걀 린포체 / 홍기령
출판 :  정신세계사
출간 :  2021.06.30


 

한동안 쉬어가는 흐름이라고 여겼는데, 슬슬 다시- 싶은 타이밍에 닿았다.

계획도 중요하지만 신중함이라는 핑계 뒤에 숨지는 말아야겠다 싶다. 

 

흥미로운 책이었고,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족첸에 관한 내용이 많아서 즐겁게 읽었다. 

다만 '요가'와 '수행'의 단어가 명확히 정의되지 않은 채로 사용된 부분들이 있는데, 다소 혼란스럽지만 크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다. 

 

삶 또한 꿈이고 꿈 또한 꿈이니, 깨어서 꿈 꿀 수 있는 자는 깨어서 죽을 수 있으리라. 

 

메시지적인 측면에서는 오쇼와도 연결되는 부분이 많았다. 

어떻게 잘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어떻게 잘 죽을 것인가와 닿아있다.  

 

하지만 책에서 알려주는 방법대로 실천이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난감했다.

저자가 요가 실천시 일어날 수 있는 장애와 해법에 대해서도 다루어주고 있긴 하지만, 최종적으로 '공'을 감각하기 전까지는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판단할 방법이 상세하지 않다. 저자 또한 이 점을 의식한 듯 올바른 스승을 통해 배울 것과 의문이 생길 경우 스승과 상의하기를 권한다. '이런 것이 있다'를 알리는 것에 더 의의가 있는 책이 아닌가 싶다. 

 

그렇더라도 기본 준비 수행과 일상에서의 수행은 충분히 가능할 듯 하고, 꿈에 집중하는 연습 자체가 유의미할 수 있다고 하니 할 수 있는 건 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 버터를 아주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고 가죽 주머니 안에 두면 가죽이 나무토막같이 딱딱해져서 아무리 버터로 문질러주어도 부드러워지지 않는다. 수년간 공부한 가르침을 수행 경험 없이 지적으로만 방대하게 이해한 사람은 딱딱한 가죽과 같다. 가르침은 무지와 조건화로 인해 딱딱해진 가죽을 부드럽게 한다. 그러나 가르침이 오랜 기간 지성 안에만 보관된 채로 수행자에게 문질러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직접 경험의 따뜻한 햇볕, 즉 수행이 겸해지지 않는다면 그는 지적 이해에 갇혀 딱딱하고 융통성 없는 이가 될 것이다. 새로운 가르침은 그를 부드럽게 할 수도, 변화시킬 수도 없다. 그는 가르침의 핵심을 꿰뚫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가르침을 개념적 이해로만 남겨두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반드시 유의해야 한다. 개념적 이해는 지혜를 막는 방해물이 될 것이다. 가르침은 수집해야 할 개념이 아니라 따라가야 하는 길이다. 

 

- 가르침에서는 추상적이고 전문적으로 국한된 설명보다는 감각적인 경험을 불러 오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물론 실제 경험은 어떤 언어로도 쉽게 전달할 수 없긴 하지만, 가르침에서 이미지는 이성적인 마음 이상의 것을 인식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러한 은유들은 시 속의 심상과 같이 경험되어야 한다. 이것들은 숙고하고, 곰곰이 생각해보고, 실험해보고, 경험으로 통합되어야 한다. 

 

- 하지만 그것이 투사된 것이라고 해서 깨어 있는 삶의 의미가 가법지 않듯이, 이런 꿈의 의미도 하찮은 것은 아니다. 이 과정은 책을 읽는 것과 비슷하다. 책은 종이 위에 기호들이 쓰인 것뿐이지만,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꿈처럼 책의 의미도 해석의 대상이 된다. 어떤 사람은 책에서 발견한 의미로 인해 삶 전체가 바뀌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똑같은 책을 그럭저럭 재밌게 읽거나 아니면 그런 재미마저도 못 느낄 수 있다. 책은 바뀌지 않았다. 독자 자신이 그 단어들에 투사한 의미를 스스로 읽어낼 뿐이다. 

 

- 또한 우리의 모든 꿈이 더 영적이고 상위적인 근원에서 오는 메시지라고 믿는다면 개인적인 드라마에 빠져버릴 것이다. 이런 믿음들은 사실이 아니다. 

 

- 때로 학생들은 미래에 대해 뭔가를 알려주는 꿈이 우리의 미래가 정해져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지 묻는다. 티베트 전통에서,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믿는다.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의 원인은 이미 지금 여기에 나타나 있다. 왜냐하면 과거의 결과가 미래의 상황을 만드는 씨앗이 되기 때문이다. 미래에 일어날 어떤 상황에 대한 주요 원인들은 이미 발생한 것들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업의 씨앗이 발현되는 데 필요한 이차적 원인은 정해져 있지 않고 상황에 달려 있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수행이 효과가 있는 것이며 질병이 치료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즉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면 무언가를 시도할 이유가 전혀 없다. 만일 우리가 내일과 관련된 어떤 꿈을 꾸고 다음 날 모든 것이 그 꿈과 똑같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미래가 정해져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바꾸지 않았다는 의미다.  

 

- 마음이 안정될수록 꿈은 더 길어지고 덜 파편적이게 되며, 꿈을 기억하는 일이 쉬워지고 명료하게 자각하는 능력도 향상된다. 우리를 산란하게 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습관적이고 감정적인 반응들에 점점 더 끌려다니지 않으면 않을수록 깨어 있는 삶도 그만큼 동등하게 향상된다. 

 

- 세 번째 장애물은 해이이다. 이 장애물을 마주했을 때 마음이 고요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사실 이것은 집중력이 강하지 못하여 정신적으로 약하고 수동적인 상태다. 이 상태가 무엇인지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기분 좋고 편안한 경험이 올바른 명상이라고 착각한다면 수행자는 이를 함양하느라 의식의 질적 변화 없이 수년을 허비할 수도 있다. 집중이 흐려지고 수행이 해이해졌다면 자세를 바로 하고 마음을 일깨우라. 주의력을 강화하고 현존의 안정성을 유지하라. 수행을 귀중한 것으로 여기라. 그것은 실제로 귀중한 것이다. 그리고 이 수행을 최상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해주는 수행으로 여기라. 실제로도 그렇다. 의도를 강화하면 마음의 각성도 자동적으로 강화된다.  

      

- 자기 자신을 막힌 채로 내버려 두지 말라. 

 

- 꿈과 시각이 진정으로 통합되면 세상에 대한 개인의 반응에 엄청난 변화가 생긴다. 집착과 혐오가 엄청나게 감소하며, 한때는 너무나 흥미로워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감정적 얽힘도 꿈속 이야기의 끌어당김으로 경험될 뿐이다. 

 

- 우리는 삶에서 일어나는 상황들에 스스로 어떻게 반응하는지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우리 자신이 수행과 얼마나 통합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너무나도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을 때, 통합의 아름다운 노랫말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가? 우리는 고통을 경험한다. 그리고 이 고통조차 반드시 통합되어야 한다.  

 

- 지식은 사용되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 그저 자신이 릭빠 안에 거하는 중이라고 생각하거나 청정한 빛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진정한 앎으로써 그 안에 거하는 것은 그저 그 가르침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이 가리키는 경험을 실제로 살아가는 것이다. 

 

- 일단 한번 당신이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게 된 가르침은 더 이상 의무가 아니게 된다. 가르침은 자유를 향한 길이고,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기쁨도 느낄 수 있다. 가르침의 목적에 대한 이해 없이 가르침의 형식이라는 수렁에 빠진 이는 그것을 짐스럽게 느낀다. 가르침과 어떻게 헤어져야 할지를 배워야 한다. 가르침과의 이별은 말이나 개넘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일어난다. 다른 한편으로는, 수행에 발목이 잡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 만약 성과 없는 수행을 계속하고 있다면, 그리고 삶에 긍정적인 변화가 아무것도 없었다면 수행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해도 하지 못한 채로 단순히 어떤 동작을 한다고 해서 당신이 수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공허한 의례에는 성취가 따르지 않는다. 당신은 무엇이 본질이며 그것을 어떻게 적용하는지 알아내고 이해함으로써 수행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더보기

 - Dzogchen: 위대한 완전함 혹은 위대한 완성. 티베트 불교의 닝마파와 뵌교에서는 족첸을 가장 높은 가르침과 수행으로 간주한다. 족첸의 기본적인 교의는, 개체를 포함한 모든 실체는 이미 완전하고 완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탄트라와 같이 변화를 피하거나, 수트라와 같이 무언가를 단념해야 할 필요가 없다. 단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알아보는 것만이 필요하다. 족첸 수행의 핵심은 '자기 해방'에 있다. 이것은 개념적 마음에 의한 설명이나 집착, 혐오 없이 그저 경험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다. 

 

- 티베트의 영적 전통에서는 스승이 제자에게 특정한 가르침을 전수하는 것이 적절할지 판단하기 위해 제자의 꿈을 활용하는 일이 자주 있다. 당시의 나는 꿈 요가를 공부하거나 수행하지는 않았지만 그 경험을 통해 꿈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티베트 문화와 뵌교에서 꿈이 지대한 영향력을 지녔다는 점, 그리고 종종 의식적 마음이 제공하는 정보보다 무의식이 주는 정보가 더 큰 가치가 있다는 점에 대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 나는 당신이 이러한 가르침들을 자격 있는 스승에게 직접 전수받기를 바란다. 수행에 관한 책을 읽는 것도 도음이 되지만 법맥과의 강한 연결을 형성할 수 있도록 스승에게 구두 전승을 받는 것이 더 좋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수행 중 장애를 마주치기 쉬운데, 이러한 장애는 우리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극복하기 힘들다. 이러한 장애를 극복할 수 있게끔 우리를 돕는 것이 바로 경험 있는 스승이다. 위의 사실들은 매우 중요한 것들이므로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 * gong-ter: 티베트에는 뗄마terma라고 불리는 전통이 있다. 뗄마는 먼저 오셨던 스승들이 다가올 세대가 발견하여 유용하게 사용하도록 감추어둔 신성한 물건이나 문서, 가르침을 일컫는 말이다. 벨마를 발견한 탄트라 스승들을 뗄똔terton, 즉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뗄마는 동굴이나 묘지처럼 물리적 장소에서 발견되기도 하고 물, 나무, 땅, 공간 같은 원소들을 통해 드러나기도 한다. 아니면 꿈, 계시적인 경험, 의식의 깊은 곳에서 직접 발견될 때도 있다. 후자의 경우를 공뗄, 즉 마음의 보물이라 일컫는다. 

 

- 경험 속의 즉각적인 알아차림, 반응(행동) 속의 알아차림, 꿈속의 알아차림, 그리고 죽음 이후의 알아차림. 이것이 수행의 바른 순서이다. 앞의 순서를 건너뛰고 바로 끝의 순서로 갈 수는 없다. 당신의 수행이 얼마나 원숙해질 수 있을지는 당신 자신에게 달려 있다. 

 

- (족첸 가르침에서의 쿤지는 수트라 전통의 씨타마트라cittamatra학파, 즉 유가행파에서 사용하는 쿤지와 동의어가 아니다. 이들은 아뢰야식이나 쿤지를 중립적인 것이라고 설명하며, 쿤지가 업의 흔적과 생각의 모든 분류를 포함하고 있는 깨어나지 못한 정신적 의식이라고 설명한다.)

 

- 족첸은 이와는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족첸에서는 마음의 본성이 지닌 공과 명료함이 감각을 통해 직접적으로 파악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영적인 과업에 있어 감각을 사용하는 것이 개념적인 마음을 사용하는 것보다 더 쉽고 타당하다고 가르친다. 개념적인 마음이 끼어들지 않는다면, 감각이야말로 순수한 알아차림과 아주 유사한 직접적인 인식의 관문이기 때문이다. 어떤 수트라 해설서는 족첸 수행자들이 평범한 사람들도 접근 가능한 시각적 대상, 예컨대 빛의 시각화 따위에 너무 매여 있다는 식의 말을 하며 족첸을 비판하곤 한다. 하지만 수행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우리에게 인식되는 마음의 본성은 실로 모든 것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 예를 들어 시각 의식이 우리가 '탁자'라고 부르는 물체를 보았다고 치자. 그때 시각 의식이 인지하는 것은 '탁자'가 아니라 선명하고 감각적인 색과 빛의 경험이다. 개념적인 마음은 시각 의식의 경험을 구성하고 있는 날것의 활기 넘치는 현상을 직접적으로 인식하지 못한다. 그 대신 개념적인 마음은 시각 의식이 경험한 것의 정신적 이미지를 창조한다. 그러고선 탁자를 보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개념적 마음이 본 것은 탁자의 정신적인 이미지다.  

 

- 이것들 역시 마음의 투사다. 존재(쿤지)의 근본 바탕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현현시킬 능력이 있다. 그것이 자신의 진정한 본성으로부터 멀어져 산란해진 존재일지라도 말이다. 이는 꿈속에서 우리 마음이 우리와 분리되어 보이는 어떤 존재를 투사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가 잠에서 깨어나면, 인습적인 자아인 꿈은 순수한 공과 빛나는 명료함으로 용해된다.

 

- 이 경험은 쉬지 않고 분투하는, 윤회하는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경험이다. 이는 우둔한 상태에서 느끼는 평화와는 정반대다. 이것은 순수한 각성이자 빛, 열림, 찬란함, 지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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