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퍼트리샤 포즈너] 나는 아우슈비츠의 약사입니다 - 악은 어떻게 조직화되고 보편화되는가

일루젼 2021. 9. 16.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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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퍼트리샤 포즈너 / 김지연

원제 : The Pharmacist of Auschwitz: The Untold Story 
출판 :  북트리거
출간 :  2020.11.16


'어쩔 수 없었어.'

 

이 말은 때로 듣는 사람보다 말하는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이, 과거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애써 부정할 때 종종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예전에 읽었던 김보영의 <진화 신화> 중 '노인과 소년'이라는 단편이 떠올랐다. 

똑같은 삶을 산 두 사람들. 매 쌍마다 한 명은 죄악감에 짓눌려 비루하게 살고 있고, 다른 한 명은 빛나는 충만함 속에 살고 있음에 관한 이야기였다. 단편 속의 인물들은 그에 대해 소설은 외부와 내부의 시각이라는 측면보다는, 완전히 내면적으로 접근했다.

 

'얼마나 자신에게 충실하게 살았는가'

 

작가는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빌려 '신 앞에서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삶이라면 다른 이가 어떻게 보건 그는 아름다운 삶을 산 것'이라고 말한다. 그가 그렇게 태어난 것과 그런 사건들을 겪는 것은 그가 선택한 것이 아니지만, 모든 순간에 스스로가 부음 받은 대로 '존재한' 삶은 목적대로 완성된 삶이라고. 삶이란 드러난 사실과 사건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매 순간 그 사람이 '느끼고 생각한' 것이 삶이라고. 

 

<나는 아우슈비츠의 약사입니다>를 읽고 쓰는 리뷰에는 부적절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나치와 전범들을 옹호하려는 것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도망칠 수 없는 절망과 공포 앞에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를 고민했을 때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일상은 수많은 크고 작은 비겁함을 요구한다. 작은 상냥을 베풀 수 있는 순간에도 '선례를 남기면 안 된다'는, 누구에 대한 충성인지 알 수 없는 기묘한 마음으로 '원칙', '규정'이란 허울 뒤에 숨곤 한다. 그런 반면 스스로에게는 대체로 너그럽고, 또 때로는 자신에게도 그런 잣대를 들이밀어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어렵고 두려운 일이다. 자신을 당당히 드러내는 것과 페르소나 사이의 간극은, 자아상과 실제 행동 사이의 간극보다는 좁을 것이며- 그것을 비겁한 자신과 이상적인 자신 사이의 간극보다 좁혀나가기 위한 노력이 삶일 것이다. 누구나 그 양단 사이에 위치할 수밖에 없으므로.   

 


 

- 제약 부서에서는 신약 개발 과정에서 동물실험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뜻밖에도 나치의 고위 간부들은 강경한 동물 권리 운동가들이었고 히틀러는 언젠가는 독일 전역에서 도살을 금지하고야 말겠다는 야심을 품은 채식주의자였다. 나치는 심지어 사냥꾼에게서 동물을 보호하고, 영화나 서커스에서 동물을 이용하는 행위를 금지할 뿐만 아니라, 유대교 율법에 따른 도축을 금하는 법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독일은 동물 생체 해부를 법으로 금지한 최초의 국가였다. 이를 어기고 동물실험을 할 경우 강제수용소에 수감되거나 일부는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다. 파르벤의 최고 의과학자 중한 사람이었던 하인리히 회를라인은 인간의 생명을 구하는 의약품의 안정성을 검증하려면 동물실험이 필수라고 주장했다. 나치는 그러한 주장조차 파르벤이 "국제 유대인 조직"임을 입증하는 또 다른 증거일 뿐이라고 치부했다.    

 

- 연합국 정보국 입장에서는 나치에게 죄를 물어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보다는 공산주의의 위협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도와줄 인재를 찾는 것이 더 시급했다. 일례로 미국은 전쟁이 끝난 후 비밀리에 나치 출신 엔지니어 및 로켓 과학자 700명을 포섭하는 일명 페이퍼 클립 작전 Operation Paperclip을 수행했다. 영국 정보국 또한 비슷한 작전계획(오소아비아힘 작전)을 가지고 있던 소련과의 경쟁을 의식해 화학전 탄도학, 의학, 과학, 암호 해독 분야의 나치 출신 전문가를 포섭하는 일에 발 벗고 나섰다. 이 중에 일부는 신문 차 미국과 영국으로 송환하기도 했다. V2 로켓을 발명한 베르너 폰 브라운과 헤르만 베커-프라이셍 박사 같은 몇몇 인재는 전범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고도 나중에 나사에서 버젓이 일했다. 다른 이들도 워싱턴과 런던에서 은밀한 제의를 받고 일하기도 했다. 극소수는 소위 내려 주는 줄사다리(나치 도망자들의 탈출로를 뜻하는 은어_옮긴이)를 타고 풀려나 자유의 몸으로 남아메리카나 중동으로 떠나기도 했다.  

 

- 카페시우스는 새로운 독일에서 이 기업인들이 전범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고도 아무런 뒤탈 없이 경영 일선으로 복귀하는 모습을 기쁜 마음으로 지켜봤다. 연합국은 원래 전범자들이 동일 산업군으로 복귀하지 못하도록 금지했다. 그러나...  

 

- 파르벤이 해체되면서 자회사 네 개가 다시 분리되어 나왔다. 바이엘은 그 규모로 즉시 세계 10대 제약 회사로 올라섰다. 아그파는 이미지 관련 제품 분야에서 선도적인 제조업자가 됐다. 바스프는 분리되자마자 세계 최대의 화학 기업이 됐다. 회흐스트 Hoechst는 화학기업으로 분리되자마자 독일에서 가장 수익성 높은 기업 반열에 올랐다. 이 기업들을 운영하기에 전범죄로 징역살이를 끝내고 석방된 전 파르벤 고위 간부들보다 더 나은 인물이 어디 있겠는가? 피고인들 가운데 유일하게 두 가지 기소 항목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던 프리츠 테어 메이르는 위풍당당하게 바이엘 회장으로 취임했다. 파르벤 수석 엔지니어였던 프리드리히 예네는 회흐스트 회장으로 임명됐다. 파르벤 임원진이 하나둘 경영 일선으로 복귀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이들을 정의의 심판대에 올려놓으려 애썼던 이들은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 이 암묵적 규칙은 다음과 같았다. 전쟁 중에 무엇을 했는지 서로 절대 묻지 말 것.  

 

- 카페시우스는 스트라우흐가 치클론 B를 "파리 그린"이라고도 알려진 소금과 구리와 비소 혼합물 "슈바인푸르트 그린"과 착각했을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 혼합물은 19세기에 물감으로 사용되다가 독성 때문에 20세기 들어서는 살충제로 널리 사용됐다. 실제로 이 물질은 아우슈비츠에서 다른 SS 장교들의 통제하에 “방충" 목적으도 살포되기도 했다. 확실하진 않지만 슈바인푸르트 그린도 조제벙커에 보관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카페시우스는 주장했다. 

 

- 이 재판을 다룬 <뉴요커 The New Yorker> 커버 기사와 책으로 찬사를 받은 독일 태생의 작가이자 철학자 한나 아렌트 Hanah Arendt는 아이히만의 냉정하고 인격이 결여된 관료주의적 태도를 가리켜 "악의 평범성 Banality of evil"이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했다. 나치 사냥꾼 시몬 비젠탈은 "전 세계는 이제 '책상머리 살인자'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 "도망칠 순 없었냐고? 없지, 당연히! 탈영하면 바로 잡혔을걸! 그러면 가장 가까운 기둥에서 교수형을 당했겠지. 일개 개인이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어. ... 체제에 맞설 순 없었지. 규율이 최고의 가치였지. 그게 전쟁이야." 

 

    

 

더보기

 - 카페시우스 같은 약사가 아우슈비츠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이해하려면 우선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어떻게 생체 실험과 강제 노역과 집단 말살을 통한 이익 창출 조직이 되었는지, 즉 나치와 독일에서 가장 큰 기업이었던 이게 파르벤 사이에서 어떻게 치명적인 군사적-산업적-정치적 협력 관계가 태동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특히 카페시우스라는 인물을 들여다보는 일은 단순히 아우슈비츠에 얽힌 어두운 역사를 이해하는 것 그 이상이다. 왜냐하면 카페시우스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파르벤의 자회사인 바이엘에서 일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력 덕분에 카페 시우스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함께 복역했던 수많은 나치 가운데서도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 (염료 산업 이익 공동체 주식회사라는 의미를 지닌) 이게 파르벤은 1925년 19월에 설립됐다. 히틀러가 독일 수상이 되기 불과 8년 전이었다. 화학과 제약 분야를 선도하던 여섯 개 기업이 합쳐져 거대 복합기업이 탄생한 것이다. 그중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합성염료 기업인 바이엘 Bayer과 회흐스트 Hoechst와 바스프 BASF, 그리고 아그파 Agfa도 포함되어 있었다.  

 

- 초기 제약 업계에서 일어난 혁신은 거의 다 독일 과학자들 손에서 탄생했다. 독일 약학자 프리드리히 제르튀르너는 22세에 양귀비에서 유효 성분만을 추출하는 데 성공하여, 이를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꿈의 신의 이름을 따라 모르페우스 Morpheus라고 명명했다. 1898년에는 바이엘에서 근무하던 제르튀르너의 제자 중 하나가 모르핀 분자와 아세틸기를 이중 결합해 헤로인을 개발했다. (헤로인은 독일어로 '강력한' 또는 '효과적인'이라는 뜻을 지닌 'heroisch'라는 단어에서 이름을 땄다) 이듬해 같은 제자가 살리실산을 분리 추출하는 데 성공했고, 활발한 내부 논의를 거쳐 바이엘의 주력 상품 아스피린이 탄생했다. 카페 시우스는 파르벤/바이엘이 신약 개발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 카페시우스가 전근 명령을 받았을 당시에 원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아우슈비츠 I이라 불리며 대개 행정 업무를 전담하고 있었고, 비르케나우 수용소가 아우슈비츠 수용소 II, 모노비츠 수용소가 아우슈비츠 수용소 III으로 통용되고 있었다. 

 

- "사람들은 폴란드어, 러시아어, 헝가리어를 사용했지만 독일어와 이디시어를 쓰기도 했고, 아우슈비츠에서  '라게슈프라하 Lagerszpracha'라 불리던 수감자들만의 특별한 언어도 사용했습니다." 

 

- "클라인 박사는 억양이 없는 고급 독일어를 구사했습니다. 저는 클라인 박사가 루마니아 사람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죠. 두 사람의 말투도 전혀 비슷하지 않았어요. 클라인 박사는 독일 본토 사람처럼 말했습니다. 그의 독일어를 들어보면 어머니가 독일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1944년 이전에 트레블링카, 소비보르, 혜움노에 있는 죽음의 수용소 세 곳은 나치를 대표하는 절멸 수용소라는 비도덕적인 명예를 서로 얻으려고 경쟁했다. 그러나 5월부터 그 수치스러운 명예는 아우슈비츠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이면에는 카페시우스의 고향인 트란실바니아가 정치적으로 얽혀 있었다. 

 

- 모든 독일인은 이제 멜데보겐Meldebogen이라고 하는, 프라케보겐보다는 간소화된 2쪽짜리 설문지를 작성했다. 스푸흐카머 Spruchkammer라 불라는 나치 심사청이 500개 넘게 새로 생기면서 독일인 2만 2,000명이 고용되었다.  

 

- 작가 라디슬라스 파라고는 바우어를 가리켜 다음과 같이 썼다. "바우어는 그가 하려는 일로 전 나치와 신나치의 열렬한 증오, 과거는 과거로 묻어 두길 원하는 사람들의 맹렬한 비난, 사법부 내부의 숨겨진 적대감을 사게 됐다. 이들은 바우어를 이성이 앞서야 할 때 감정을 앞세우는 현실을 모르는 개혁가, 복수심에 불타는 유대인, 길길이 날뛰는 불평가로 여겼다."  

 

- "'스크립타 마넨트(scripta manent, 라틴 속담으로 "말은 날아다니고 글은 남는다"는 뜻)'라더니 내가 어린이 1,200명을 가스실로 보냈다는 혐의만 남았다.”  

 

- 6월에는 한껏 기대를 모았던 카페시우스와 다른 의뢰인들을 위한 한스 라테른저의 최종 변론이 있었다. 독일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은 라테른저의 최종 변론을 가리켜 “모순적이고 모욕적이지만 대단히 논리적이고 영리했다"라고 평가했다. 라테른저는 20년 전에 일어난 그토록 끔찍한 사건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라며 모든 목격자 증언의 신뢰성을 폄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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