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헤르만 헤세 / 안인희
출판 : 창비
출간 : 2021.06.01
추석에 어울리는 책이었다.
눈 앞에 헤세가 바라보던 것 같은 숲과 정원은 없지만, 나름대로의 식물들을 보며 조용하고 편안하게 읽기 좋았다.
책에 실린 그림들은 모두 아름답고 매력적이지만, 헤세가 그린 그림이 아니라는 점을 좀 더 확실하게 명시해주었다면 더 좋았을 듯 하다. 폴커 미헬스의 편집 판에 실린 것도 아니라는 점도. 그 점을 확실히 해두더라도 충분히 멋진 그림들인데.
동물과는 사뭇 다른 식물의 춤들을 멍하게 바라본 게 언제였더라.
아주 어릴 적에 사랑했던 강둑은 이제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와 그 당시의 풍경들을 떠올려보면 너무 아름답게 기억되어서- 마치 현실이 아닌 꿈이었던 것만 같다.
지금 다시 그렇게 풀숲을 헤치고 강에 뛰어들어 놀라고 하면 멈칫거리겠지만.
그때 그 강을 다시 볼 수 있다면, 다리를 베이고 풀독이 올라도, 갈아입을 옷이 없어도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 얼마나 경이로운 저녁과 밤이었던가! 여름 향기와 가볍고 따스한 거리의 먼지, 윙 — 하는 모기떼 소리, 전류를 띤 섬세한 후덥지근함이 공중에 퍼져서 은밀한 경련을 만들어냈다.
- 그 여러 해가 지난 지금, 밤나무 해자 곁에서 보낸 이 더운 저녁들이 마치 삶 속의 섬처럼, 동화처럼, 잃어버린 청춘처럼 값진 감동을 주면서 나를 바라본다. 그 시간들은 그토록 깊고도 행복한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고 마비시킬 듯 달콤하고 뜨겁게 속삭이며 낙원의 전설처럼, 사라진 아발론의 그리움의 노래처럼 경이로운 슬픔을 만들어낸다.
- 도시 주변의 사방에서는 오로지 잔해, 구덩이, 풀처럼 베어지고 부서진 숲의 경사면, 탄식하며 태양을 향해 뿌리를 드러낸 나무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나와 내 어린 시절 사이에 틈이 벌어졌다. 내 고향은 이제 더는 예전의 고향이 아니었다. 지나간 시절의 사랑스러움과 어리석음은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이제 나는 도시를 떠나 어른의 삶을 견뎌야 했는데, 삶의 첫 그림자들이 이 며칠간 나를 훑고 지나갔다.
- 오. 방랑하는 도제들이여, 즐거운 떠돌이들아, 내 비록 너희를 불쌍히 여겨 너희 중 누군가에게 동전 5 페니를 선물해주는 경우라도 나는 너희 모두를 왕처럼 높이 우러러본다. 존경과 경탄과 질투심을 품고 바라본다. 너희 모두는 설사 가장 망가진 자라 해도 보이지 않는 왕관을 쓰고 있다. 너희는 모두 행복한 사람이자 정복자다. 나도 전에는 너희와 같았기에 방랑과 낯설음이 어떤 맛인지 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결핍과 불안에도 그것은 달콤한 맛이 난다.
- 나는 그 목소리에 불성실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제 그 목소리는 방랑과 우정으로, 횃불과 노래를 곁들인 술판으로 나를 이끌지 않고, 나직하고 절박하게 되어서 점점 더 고독하고 어둡고 고요한 길로 이끈다. 그 길이 즐거움으로 끝날지 고통으로 끝날지 모르지만 나는 그 길을 걷고자 하며 또 걸어야 한다.
- 어린 시절부터 나는 자연의 기묘한 형태들을 바라보리는 성향이 있었다. 관찰이 아니라 그 본래의 마법에, 그 뒤에 얽힌 깊은 언어에 마음을 빼앗겼다. 목화된 긴 뿌리, 암석에 나타난 여러 색깔의 광맥들, 물 위에 떠다니는 기름얼룩, 유리에 난 균열들- 이 모든 것이 내게는 때때로 대단한 마법을 부렸으며, 무엇보다 물과 불, 연기, 구름, 먼지, 그리고 특히 눈을 감으면 보이는 빙글빙글 도는 색깔점이 그랬다. ... 내가 그 뒤로 느낀 어느 정도의 활력과 기쁨, 내 안에서 나오는 감정의 상승이 순전히 활활 타오르는 불을 오래 바라본 덕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불을 바라보는 일은 특이하게도 좋은 영향을 줘서 마음을 풍요롭게 해 주었다!
- 지금까지 내 삶의 본래 목적을 향해 가며 겪은 몇 안 되는 경험에 이 새로운 경험도 더해졌다. 그런 형태들을 관찰하다 보면, 그러니까 비합리적이고 이상하고 꿈틀거리는 자연 형태에 몰두하다 보면, 이 형태들을 있게 한 의지력과 우리의 내면이 서로 일치한다는 느낌이 생겨난다 -물론 곧바로 그런 일치감을 우리 자신의 변덕으로, 창작으로 여기려는 유혹을 느끼지만- 우리는 자신과 자연 사이에 있던 경계가 흔들리면서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되고, 이런 형태들이 외부의 인상이 우리 망막에 맺혀서 생긴 것인지, 아니면 내면의 인상이 눈앞에 나타난 것인지 모르는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 창조자인지 우리 영혼이 끊임없는 세계의 창조에 어느 정도 깊이 동참하고 있는지를 그렇게 쉽고 간단하게 알아낼 수 있는 길은 이런 연습 말고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 나뉘지 않은 동일한 신이 우리 안에서 그리고 자연에서도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외부세계가 붕괴한다면 우리 중 한 명이 세계를 다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산과 강, 나무와 잎사귀, 뿌리와 꽃, 자연의 모든 형태가 우리 안에도 미리 새겨져 있으며 바로 우리 영혼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영혼의 본질은 영원성이며 우리는 그 본질을 알지 못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대개는 사랑의 힘, 창조의 힘으로 느껴진다.
- 다만 그들은 거기 빠져들어 자신을 잃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해 오로지 한 가지만을 추구한다. 자기 안에 깃든 본연의 법칙을 실현하는 일, 즉 자신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 자신을 표현하는 일에만 힘쓴다.
- 그것은 모든 바라봄이 그렇듯 위대하고 영원한 것이 눈에 보인 일, 모순들의 붕괴, 즉 모순들이 현실이라는 불꽃에 녹아 없어짐이 눈에 보인 일이었다.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었고 그 어떤 경고도 아니었다. 또는 모든 것을 의미했다. 존재의 비밀을 뜻했다. 그것은 아름다웠고 행운이었으며 의미였다. 바흐의 음악으로 가득 채워진 귀, 세잔의 그림이 가득 담긴 눈길처럼 바라보는 자에게 주어진 선물이자 발견이었다. 이런 이름이나 해석은 체험이 아니었고 그런 의미들은 나중에야 나타났다. 체험 자체는 그저 현상, 기적, 비밀로서, 아름답고도 진지했으며 사랑스럽고도 가차 없는 일이었다.
- 나뭇가지에서 부지런히 꽃을 따서 모으는 여자들은 호흡 곤란이 오거나 열이 날 때 그걸로 차를 만들기는 하겠지만 거기서 가장 좋은 것, 실로 섬세한 것을 얻지는 못한다. 여름 저녁에 후덥지근하고 달콤한 도취 상태에 빠진 연인들도 그것을 얻지 못한다. 하지만 지나가면서 더욱 깊이 숨을 쉬는 떠돌이 방랑자는 그것을 얻는다. 방랑자는 모든 즐거움 중에 최고의 것, 가장 섬세한 것을 얻는다. 즐거움을 맛보는 것 말고도 모든 즐거움이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모든 샘에서 목을 축일 수없다고 근심하지 않으며, 많은 것이 넘치도록 넉넉하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익숙한 일이 되었다. 또 잃어버린 것은 오래 아쉬워하지 않고 한번 좋았던 모든 장소에 금방 뿌리내리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많은 여행자들이 해마다 같은 장소를 찾아가고 아름다운 광경과 작별하면서 머지않아 다시 오리라고 결심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아마 좋은 사람들일 테지만 훌륭한 방랑자는 아니다. 그들은 연인들의 후덥지근한 도취가 지닌 요소, 보리수 꽃을 따는 여인네들이 지닌 조심스러운 수집광적인 면모를 갖고 있다. 하지만 진지하게 즐거움을 만끽하고 작별하는 조용한 방랑의 감각을 갖지는 못했다.
-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지팔」에 등장하는 마법사 클링조르의 정원, 온갖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 있다.
- 거인 함박꽃나무는 다양한 성장의 상징과 충동적이고 자연스러운 삶, 온갖 근심 없음과 탐욕스러운 다산성의 상징처럼 보인다. 그에 반해 조용한 난쟁이는 거의 의심의 여지없이 그 반대이다. 녀석은 공간이 별로 필요치 않고 낭비가 없으며 집중과 지속성을 추구한다. 이 나무는 자연이 아니라 정신이고 충동이 아니라 의지이다.
- 아직은 가늘고 곧게 뻗은 막대에 지나지 않는 어린 밤나무들의 숲이다. 이들은 진짜 어린 나무들은 아니고 수십 년 전부터 차례로 베어낸 아주 늙은 나무들의 힘 있는 땅속뿌리에서 솟아 나온 수천 개의 서두르는 어린 충동들이 우습고도 변덕스럽게 헝클어진 모습으로 숲을 이룬 것이다. 5월과 6월 초에 첫 잎이 나온 이들은 경이롭다. 아주 커다란 잎들을 매단 이 어린 밤나무 막대들은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빗질이라도 한 것처럼 하늘을 향한다. 또 이 막대들이 날개처럼 양쪽에 매단 잎사귀들도 모두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어서 밝은 숲 전체가 같은 각도로 자른 십만 개의 줄로 이루어진 그물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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