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강보라] 나만 잘되게 해주세요

일루젼 2021. 9. 29.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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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강보라

출판 :  인물과사상사
출간 :  2019.06.27


제목만 보면 적당히 유머러스한 에세이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회학 도서로 분류가 되어 있는 이 책은 '한병철'과 '김혼비' 중간쯤의 어조로 현시대적 현상들에 대한 통찰을 풀어낸 책이다. 

 

어째서 '우리'가 아닌 '나'가 중심에 서게 되었는가. '혼술'과 '혼밥'은 이런 개인화와 관련이 있는가, 그에 따른 결과인가. 

그럼에도 '먹방'이나 '라이브'를 관음하며 관계 속에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나'의 여러 이름은 조각난 자아인가, 보다 구체화된 개별적 특성들인가.

 

한 권의 완결된 책으로 보자면 조금은 단단하지 못한 구성이지만, 마침 최근에 하던 생각들과 연결되는 부분이 많아 좋게 읽었다. 

 


- 나와 너는, 나와 우리 사이는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는 자존과 타인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자 하는 관종의 사이는 또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좀 더 괜찮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 혹은 좀 더 쓸모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 오늘도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정작 벅찬 일상의 전투 뒤에 숨은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있는 그대로 이해해 볼 기회는 많지 않다. 그렇기에 개인과 사회의 거리를 따지거나 자존과 관종의 간극을 헤아려보는 시도는 늘 '다음번'으로 미루어진다. 

 

- 이 책의 제목인 '나만 잘되게 해 주세요'는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가만두지 않을 테야'라고 으르렁거리는 것만 같은 뾰족한 시대를 살아가느라 그 어디와도 마찰이 생기지 않도록 아주 납작하게 줄여버린 이 시대의 마음들이 되뇌는 자기 최면이다. 이 말 안에는 나만 잘될 수도 없고, 나만 잘된다고 해서 좋은 것만은 아님을 알지만, 나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시대의 양가성이 배어 있다. 

 

- 다시 소설 <편의점 인간>으로 돌아가 '편의점 인간'이 어떤 인간을 지칭하는 것인지 살펴보자. 작가는 제목으로 '편의점의 인간'도 '편의점형 인간'도 아닌 '편의점 인간'을 선택함으로써 '편의점'과 인간' 모두에게 동등한 의미를 부여한 합성어를 만들어냈다. 한 인터뷰에서 작가는 편의점이 자신에게 성스러운 장소이며, 자신이 인간에게 관심이 많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작가에게 편의점이 성스러운 장소가 될 수 있었던 배경으로 편의점 안의 사람들이 반복하는 행위와 그것을 기반으로 한 시스템의 구축을 생각해볼 수 있다. 

 

- 공통된 상상을 공유하는 것을 종교라고 할 때, 편의점 내부의 사람들은 편의점이라는 장소에서 약속된 의례로 자신을 규율함으로써 종교적 의미에 다가간다. 본디 성스러운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스러운 장소로 여기는 누군가에 의해 모든 장소가 성스러운 장소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곳이 편의점이라 할지라도.

 

- "편의점에 계속 있으려면 '점원'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건 간단한 일이에요. 제복을 입고 매뉴얼대로 행동하면 돼요. 세상이 조몬(B.C. 1만 3000년경부터 B.C. 300년까지에 해당하는 일본의 선사시대)이라면, 조몬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보통 사람이라는 거죽을 쓰고 그 매뉴얼대로 행동하면 무리에서 쫓겨나지도 않고, 방해자로 취급당하지도 않아요. ... 그러니까 모든 사람 속에 있는 '보통 인간'이라는 가공의 생물을 연기하는 거예요. 저 편의점에서 모두 '점원'이라는 가공의 생물을 연기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죠." 

   

- 다른 한편으로는 여행과 관련된 정보가 양적으로 방대 해경을 뿐, 정보가 가리키는 방향이 유사해 이전보다 다채로운 여행을 한다고 말하기 어려워진 부분도 있다. A라는 여행지로 떠날 계획이 있다고 했을 때, 우리 중 대부분은 여행지의 숙소와 맛집, 명소 등을 검색한다. 검색 결과를 보면 흥미롭게도 여행자들이 각기 다른 여행을 하기보다는 사람들이 이미 경험한 내용과 방식을 그대로 따르는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어 말하자면 '여행 후기의 아바타'처럼 행동하는 셈이다. 이를 두고 여행이 패턴화 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가지각색의 여행이 존재한다기보다 일정한 패턴을 반복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행의 패턴화 뒤에는 정해진 여행 기간을 허투루 쓰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숨어있다. 내가 갈 여행지를 이미 다녀온 누군가가 미리 먹어보고 체험해 본 정보가 곧 여행을 가치 있게 보내게 만들어줄 기준이 되고, 이 기준을 따르게 되면 적어도 비슷한 정보를 갖고 여행을 할 다른 사람들에게 '완벽한 여행'으로 보일 수 있다. 

(리뷰자 주 : 거의 같은 생각이다.)

 

- 패키지 여행이든 개별 여행이든 조금이라도 손해 볼 수 없다는 강박에 이토록 시달리는 건 왜일까?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건 여행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다. 지금의 우리는 여행을 소비의 연장선상으로 바라보는 듯하다. 여행을 소비로 인식하는 마음가짐이 강할 때, 시간이든 재화든 이를 통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진다. 

 

- 이처럼 여행과 거주의 중간 형태를 띤, 머무르는 여행이 갖는 매력 중 하나는 우연성에 있다. 패키지 여행이나 철저히 계획된 개별 여행에서는 우연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한 목적지에서 다른 목적지로 이동하는 동선과 그에 따라 계산된 시간표 안에서 미처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경험할 가능성이 낮아진다. 

 

- 일본 문화연구자인 아즈마 히로키는 여행이 주는 우연성을 '노이즈'라고 표현했다. 그에 따르면 정보화 사회 안에 사는 현대인은 인터넷을 통해 필터링된 정보만을 접하다 보니 자신에게 늘 익숙한 기호 환경에 젖어 있다. 일상 안에서 필터링되지 않은 노이즈를 접할 기회가 적다 보니 더 친숙한, 그렇기에 더 좁아지는 세계를 벗어날 기회가 없게 된다. 노이즈란 표현은 언뜻 듣고자 하는 소리를 방해한다는 의미에서 부정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소리를 더 잘 듣기 위해서는 적당한 노이즈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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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과 사회에 얽매이지 않고 행복하게 배를 채울 때 잠시 동안 그는 이기적이고 자유로워진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누구도 신경 쓰지 않으며 음식을 먹는 고독한 행위, 이 행위야말로 현대인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최고의 치유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일본 만화 원작으로 만들어진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오프닝에는 이 내용을 담은 내레이션이 항상 등장하는데, 이 내레이션이야말로 오늘날 혼자 먹는 밥의 의미에 대해 적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설명이 아닌가 싶다. 

 

- 단어인 'taste'는 미각, 즉 혀로 느끼는 감각을 일컫는 동시에 취향이라는 뜻도 함께 품고 있다. 우연 같아 보이지만 한편으로 몸의 감각이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감각과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같은 단어가 미각과 취향이라는 두 가지 뜻을 담고 있는 것이 필연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 프랑스 사회학자인 피에르 부르디외 Pierre Bourdieu는 취향을 통해 사람들이 사회화되는 가운데, 말하자면 사회적 위치에 따라 특정한 성향을 만들어간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취향이란 본질적인 방식으로 서로 간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인데, 사람들은 취향을 기준으로 나와 타인을 분류하게 된다. 같은 원리로 나 자신 또한 나의 취향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어떤 유형의 사람으로 분류 또는 특정지 어진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음식에 관한 나의 취향을 드러내는 것은 내가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드러내는 표현이자 남이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받아들이게 되는 준거가 된다. 

   

- 또한 '오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주목할 만한 건 특정한 음식에 관한 취향을 드러내는 행위에 엄청난 사회적 동력이 응집될 수 있다는 점이다. 나아가 이 사회적 동력이 취향을 있는 그대로 존중받지 못하고 '원래 이 음식엔 00가 들어가야 해', '편식하지 마', '주는 대로 먹어' 등 강요된 사회적 규범에 시달렸던 개인들의 억압된 욕망에서 비롯된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오이'가 있다고 가정해보면 어떨까? 즉,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형성된 취향이 아니라, 즉자적으로 생겨난 취향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 관점에서 개개인의 음식 취향을 존중하는 사회적 유연성을 측정한다면 한국 사회는 어느 정도의 유연성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 덕질의 첫걸음은 자신만의 덕질을 가능케 만든 대상을 발견하는 것이다. 무언가의, 또는 누군가의 덕후가 되었다는 자기 고백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요소는 우연성에 있다. '덕질을 시작해봐야지'라고 마음을 먹고 그 대상을 찾기보다는 우연한 기회에 '입덕(덕질에 입문)하게 되는 것이다. 2010년대 들어 덕질이 대중화되면서 입덕 하는 순간을 교통사고에 빗대어 '덕통 사고'라거나 '무언가에 치인다'라고 표현한 부분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 1990년대 초 헨리 정킨스 Henry Jenkins는 <텍스트 밀렵꾼들 Textual Poachers>이라는 책을 통해 당시의 팬과 팬 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거두려고 시도했다. 

 

- 20세기 유럽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페르난두 페소아 Femando Pessoa는 작품 활동을 위해 페소아라는 이름 외에도 알베르투 카에이루, 알바루 드 캄푸스, 리카르두 레이스 등의 여러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가는 어린 시절 상상의 인물과 놀이를 하듯 '하나이자 여럿인 존재'를 창조해냈고, 창작 활동을 하는 동안 여러 개의 자아를 넘나들었다. 

   

- 그런데 카니발에서나 가능한 줄 알았던 가면놀이가 실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하는 이론이 있다. 일상의 의례를 연구했던 미국 사회학자인 어빙 고프먼 Erving Gofiman은 '인상 관리 이론'에서 우리의 삶을 연극에 비유한다. 

 

- '내 속에 여럿의 내가 있다'라고 인식하는 태도는 한편으로 너무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존재의 고정성이 강조되는 사회 안에서 자아의 다성성을 인정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미국 사회학자인 피터 버거 Peter Berger는 전통사회에서 현대사회로 넘어오면서 이 부분에 대한 감각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보았다. 과거의 전통사회가 개인에게 주어진 규범적 역할이 얼마나 잘 이행되었는지를 '명예'를 통해 확인하고자 했다면, 오늘날의 사회는 외적인 강요에서 벗어난 인간의 내면을 강조해 '존엄'이 얼마나 준수되었는지를 살핀다. 말하자면 타자와 외부가 나를 어떤 사람으로 평가하는지가 중요했던 시대에서 그와 관계없이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한 시대로 옮겨왔다는 이야기다.  

 

- 우선 <배트맨>과 같은 슈퍼히어로를 그리는 방식에서도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초기의 슈퍼히어로물이 절대 선과 악의 대결 구도에서 슈퍼히어로를 절대 선의 상징과 같이 그렸던 반면에 요즘의 슈퍼히어로물은 외적인 선악 구도보다 영웅의 내면에 존재하는 여러 번민에 초점을 맞춘다. 그 안에서 그려지는 내면의 고민은 단순하지 않으며 어떤 선택을 내리더라도 절대적으로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없다. 

 

- 한 사람이 하나의 소셜미디어 플랫폼 내에서 여러 개의 계정을 만드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덕질' 대상에 따라 각기 다른 계정을 만들고, 주로 다루는 소재나 주제에 따라 완전히 상반되는 성격의 계정을 동시에 운영할 수도 있다. 기분에 따라 계정을 더 늘릴 수도 반대로 모두 없앨 수도 있다. 언제든지 새로 계정을 만들 수 있음은 물론이다. 

 

- 작가 김한민은 페소아의 여러 이름이 지녔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명들은 정체성이라는 개념에 끊임없이 저항한다. 정체성이란 일관되고 변치 않는, 말 그대로 '정체된 어떤 존재'를 전제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기만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을 갖기 쉬운데, 그런 일념으로 정체성을 추구하다 보면 자신을 고정된 틀 속에 가두고 다른 가능성과 욕구들은 부정하는 방향으로 흐르기 쉽다. 한마디로 정체성 추구는 통제와 배제의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서로 모순되고 충돌하는 존재의 잠재태들은 이 과정에서 억압되기 마련이다. 반면 이명의 사용은 우리 안의 무한한 복수성을 적극 긍정하면서 단 한 명의 나'에 갇힘 뻔한 '다양한 나'들을 해방시킨다." 

 

- 소비문화 안에서 탕진잼과 함께 회자되는 '작은 사치'나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도 함께 눈여겨볼 만하다. 이 신조어들의 공통점은 소비를 통해 정서적 만족감을 추구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적인 탕진 뒤에 재미가 붙는 이유도 유사한 선상에서 이해 가능하다. 

 

- 일찍이 장 보드리야르 Jean Baudrillard는 1960년대 프랑스의 소비문화를 면밀히 관찰하면서 이와 같은 분석을 내렸다. '소비를 학습하고 소비에 대한 사회적 훈련을 하는 소비사회'의 화려한 모습 뒤로 사회적 안정에서 멀어진 이들의 허탈감과 저항의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 '이상한 아이'로 살아가는 고통은 혼자라는 외로움보다 남들 눈에 무엇이 이상하다고 비치는 것인지 모른다는 데 있다. 이상함은 이해 또는 타협의 영역에 머무른 적이 없었고, 그저 정상과 반대되는 도저히 바뀔 수 없는 상태로 남겨지기도 했다. 그런 주인공이 성인이 되어 세상을 '정상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택한 방식은 본래의 자신을 철저히 말살시키는 것이었다. 그와 더불어 주인공은 '보통 사람'이라고 여겨지는 모습들을 학습한 후 그대로 연기하기 시작했다. 

 

- 유명 건축가들이 지은 집과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 일라 베카 Ila Beka와 루이즈 르모안 Louise Lemoine 감독은 일본 도쿄의 '모리야마 집 Moriyama House'에서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이들을 조명한다. '모리야마 집'의 집주인은 집과 같은 이름을 가진 이로 다큐멘터리 <모리야마 씨 Moriyama-San>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 집에서 나고 자라 흔한 여행조차 한번 하지 않고 살아온 모리야마는 자신이 물려받은 공간의 설계를 건축가 니시자와 류에에게 의뢰한다. 모리야마가 자연과 책 읽기를 무엇보다 사랑함을 간파한 건축가는 거실과 주방, 욕실 등이 각각의 별채로 존재하도록 만들고 그에게 필요한 최소 공간 이외는 다른 사람들에게 세를 내주도록 제안했다. 그리고 별채 사이에는 크고 작은 나무들을 심어 '모리야마 집'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생활을 존중하면서도 도심에서 자연을 한껏 느낄 수 있도록 했다. 

 

- 제목에서도 엿보이듯이 시즈오는, 그리고 이 이야기는 생물학적으로 어른의 연령을 훌쩍 넘겼다 할지라도 '아직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자신의 더딘 성장을 다독인다. 어른이라고 해서 성장이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어른으로 자랄 수 있다고 말한다. 어른의 성장 가능성은 어른이라는 개념이 변화할 수 있다는 점과 오늘날의 사회 환경이 어른 개념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성장하고 있는 중이니 다그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는 '어른'의 말이 값싼 자기 연민으로 변질되지 않으려면 시즈오처럼 계속 성장하는 수밖에는 없다. 어른의 성장을 바라보는 현실이 아무리 매몰차더라도 말이다.

 

- 스스로 성장을 되묻기에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누군가를 함부로 대하지 않고, 다른 어른들 앞에서도 성장을 완결하지 못한 자신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자라나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어른의 생물학적 조건에 사회적 조건이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것은 아니며, 어른이라고 인정할 만한 사회적 조건이 반드시 가시적인 지표로 드러나야 하는 게 아닐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어른은 누구인가? 어느 정도 성장했지만 계속 성장해야 한다고 여기거나 성장의 모양이 하나가 아니라 다양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면, 그게 어쩌면 어른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중 그 누구도 어른이 아니거나 이미 모두 어른이다. 

(리뷰자 주 : <언니에게 보내는 행운의 편지>에서 생각하던 주제다. '어른이란?')

 

- 이와 같은 질문들은 지식에 대한 정의뿐만 아니라 지식이 만들어지고 받아들여지는 사회적인 맥락에 대해서도 새로운 설명을 요구했다. 즉, 지식이 비단 이성-언어-이론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인지, 그리고 이런 가정 안에 포함되지 않는 지식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 결과 영국 사회학자인 앤서니 기든스 Anthony Giddens의 예견대로 현대의 지식은 완결된 서사가 아닌 가설의 형태로 존재하는 가운데 대중의 머리가 아닌 마음을 얻기 위해 경쟁하기에 이르렀다. 

 

- 이를 잘 설명해줄 수 있는 개념 중 하나가 '망탈리테 mentalne' 다. 심성 또는 사회적 마음이라고도 번역하는 망탈리테는 마르크 블로크 Marc Bloch나 뤼시앵 페브르 Lucien Febre와 같은 프랑스 역사학자들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사회의 특성을 살피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망탈리테는 감정이나 심리라는 개별적인 사례 안에 묶어 놓는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을 포함한다. 그보다 망탈리테는 현실 사회 안에서 개인과 개인 간, 개인과 사회 간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구성되는 정서석 복합물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이성과 감성을 별개의 것으로 분리하지 않는 가운데 여전히 현실에 발 딛고 있다는 점에서 망탈리테는 오늘날의 지식에 대한 개인과 사회의 마음을 살피는데 유용한 관점을 제시한다. 

 

- 오늘날 네트워크를 통해 폭발적으로 정보의 양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도 지식의 망탈리테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된다. 과잉된 정보 환경 내에서 대중은 종종 정보의 양에 압도되어 자신에게 필요한 지식을 구성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지식 구성에서 혼란을 겪는 가운데 사안을 상대주의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인식은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구성된 지식이 개개인에게 정서적 안정을 주는 경우라면 그 지식을 지탱하는 힘은 더욱 강해지는 것이다. 

 

- 이와 같이 오늘날의 지식과 지식을 구성하는 환경이 지닌 특징을 이해한다면 '저탄수화물 고지방 다이어트'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지식의 망탈리테가 중요함을 깨닫게 된다. 관련 지식들의 참과 거짓을 따지기보다 특정 시점에서 특정 지식이 왜 부각되었는지, 어떤 반동적인 의미를 갖는지, 나아가 어떻게 힘을 얻었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그 어느 때보다 현대사회의 지식이 일종의 신앙 faith과 유사한 형태로 존재하고, 이에 따라 각각의 지식을 일부분으로 포함하고 있는 전체, 즉 지식이 속해 있는 믿음 체계까지 받아들이고자 하기 때문이다. 

(리뷰자 주 : 이 또한 최근 리뷰에서 끄적여보았던 내용이다. 현시대의 신의 이름은 '과학'과 '이성'- 더 나아가 '지식'이라고.) 

 

- 이들 리액션 비디오는 나(시청자)에게는 익숙한 것이지만, 너(리액션 비디오 속 인물)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을 안전하게 바라보며, 약간은 우월적인 시각에서 타인을 관망하는 기분을 선사한다. 

 

- 그리하여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거나 때로 자신의 마음을 감추어야 하는 끊임없는 타협의 관계에서 벗어나 마음을 입력하는 대로 산출하는 기계적 마음의 시대로 기꺼이 진입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신경 써야 할 유일한 존재는 타인과 기계를 넘어 기계에 투사되는 우리 자신의 마음이다. 기계의 마음이란 결국 우리 인간이 입력한 마음 그것 자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길 원하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 what do we want to want?"라고 묻는 유발 하라리 Yuval Harari의 질문이 자못 묵직하게 다가온다. 

 

- 사건의 존재와 순간의 존재, 심지어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데에도 시각적으로 인증하는 절차가 당연하게 포함되었다. 

 

- 브이로그가 내포하는 '해설'과 '대화' 기능은 갈수록 더 많은 사람이 브이로그를 찾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나의 삶을 설명하고(해설) 나의 삶에 대해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대화)은 타인의 존재를 확인함과 동시에 타인과 대화하는 나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 넷플릭스가 2018년 말에 공개한 시리즈 '블랙 미러'의 인터랙티브 영화 <밴더스내치 Bandersnatch>는 시청자가 극 중 주인공의 관점에서 선택을 내릴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일종의 게임처럼 진행되는 이 영화에서 시청자는 주인공이 어떤 시리얼을 먹을지 고르는 간단한 선택에서부터 게임 회사와 함께 게임을 개발할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선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갈림길에 서게 된다. 극중 주인공이 겪는 일들을 지켜보며 '수락' 혹은 '거절'이라는 선택지 중 하나밖에 고를 수 없지만, 시청자는 스토리와의 인터랙션 interaction을 통해 영화 안의 일부가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물론 여기에서 인터랙션이라는 것도 결국 제작진이 미리 짜 놓은 여러 개의 시나리오 중 하나에 불과한 걸 수도 있다. 영화에서도 "결정을 네가 내리는 줄 알지만 그렇지 않아. 우리 세계와 연결된 저 외부의 영혼이 우리 행동을 결정하면 우린 그저 즐길 뿐이지"라는 모의실험 가설 simulation hypothesis을 연상시키는 대사가 등장하니 말이다. 영화가 끝나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의심하게 된다. 영화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누가 실제로 무엇을 결정하는지. 

 

- 이에 어린 딸은 셰리 터클에게 '저렇게 꼼짝 않고 앉아 아무 일도 안 할 바에는 굳이 태평양 섬에서 거북이를 힘들여 데려올 필요가 있느냐'며 '로봇을 갖다 놔도 되었을 텐데'라고 말했다. 셰리 터클을 포함해 그 전시장에 온 많은 부모는 아무리 움직이지 않는 거북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진짜라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셰리 터클의 딸처럼 어떤 이들에게는 '진짜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별다른 의미를 주지 못했다. 그보다 홍미를 끌어내는 대상이나 상황이 더 중요해졌다. 즉, 누군가에게는 흥미와 재미가 곧 '현실' 그 자체가 되었다. 그 외의 것은 설사 '살아 있는 진짜'라 하더라도 죽어버린, 현실이 아닌 것으로 전락하고 있다. 

 

- 현실에서는 끊임없이 타인과 비교하며 되도록 주류에 동화되려고 하는 반면, 가상에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집단주의적 가치가 우선시되는 사회에 살고 있는 경우 개인 서사를 향한 열망은 한층 커진다. 더불어 나의 이야기를 내가 만들어갈 때 나는 세계의 창조자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다른 말로 가상에서는 개개인이 현실에서보다 자신의 능력을 경험할 기회가 많은 셈이다. 

 

- 가상이 제시하는 또 다른 이상적인 조건은 유동성에 있다. 현실세계에서 유동성은 불안을 야기하는 부정적인 성격의 것으로 치부된다. 안정된 직장이나 주거 환경처럼 그 성격이 고정적일수록 추앙받는다. 사람 간의 관계까지도 수직적인 질서 안에 고정시켜 위계를 만들어낸다. 나이와 연차, 능력치 등에 의해 사람들을 줄 세운다. 현실과 반대로 가상에서는 그 어떤 것도 영원히 고정적일 수 없다. 고정성을 구가하려고 시도하는 것들은 이 세계의 룰을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지루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런 가상세계에서 유동성은 오히려 새로운 변화를 이끄는 원동력으로 평가받는다. 


- 현실에서 자신이 처한 조건 중 그 어떤 것도 쉽사리 바꿀 수 없다는 무력감에 시달리지만, 가상에서는 그렇지 않다. 출신지나 직업, 교육의 정도나 외모, 성별을 떠나 얼마든지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원한다면 가상에서 삶은 리셋될 수 있다. 여러 번 '플레이'하고 또 다른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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