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하라다 히카] 낮술 - ランチ酒

일루젼 2021. 9. 3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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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하라다 히카 / 김영주
출판 :  문학동네
출간 :  2021.06.07


<와카코와 술>이나 <고독한 미식가> 같은 느낌.

음식에 대한 묘사가 너무 구체적이라 꼭 먹어보고 싶은 마음까지 든다. 

고구마 소주라면 '모리이조'나 '나나쿠보' 같이 향과 맛이 달큰한 쪽을 좋아하는데, 이 책을 읽다보니 한동안 안 마시던 청주나 법주 쪽이 끌린다.   

<낮술>의 주인공의 성장 과정과 그에 따른 서사는 적당한 무게감으로 매끄럽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런 서사가 없었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든다. 

꼭 사정이 있어야 낮술을 즐길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예전에 '낮술은 마시고 깨도 환해서 계속 마실 수 있어서 좋아'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는데, 주종이 서로 잘 맞았더라면 더 즐겁게 달릴 수 있었을텐데 아쉽다. 개인적으로는 낮술은 가볍게, 취하지 않고 술의 맛을 즐길 수 있는 정도가 좋다. 

폴바셋에서 맥주 한 잔 사들고 교보문고로 걸어가면 딱 좋았는데.  

 

때로 여유로운 오후에 햇살과 함께 낮술 한 잔 어떠신지. 

주종은 자유롭게, 기분은 유쾌하게. 

 

 


 

- 불필요한 지출을 하거나 돈을 헤프게 쓰진 않지만 맛있는 것에는 확실히 돈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일 것이다.    

 

- 이누모리 쇼코에게는 점심 먹을 식당을 고르는 명확한 기준이 있다. 그곳의 음식이 술과 궁합이 맞느냐 안 맞느냐. 밤에 일하는 그녀에게 점심은 하루의 마지막 식사다. 아침은 거의 먹지 않으며 일하기 전에는 가볍게 요기하는 정도이고, 일이 끝난 뒤에야 제대로 된 점심을 먹기 때문에 하루 두 끼를 챙기는 게 보통이다. 그래서 기왕이면 술을 곁들이고 나른히 집으로 돌아가 그대로 잠들고 싶은 것이다. 

 

- '고기는 나쁘지 않은데, 술이 있으려나'
이렇게 고기 요리가 많은데 술이 없다면 안타깝다. 쇼코는 잠시 고민하다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바로 검색이다. 식당에 들어가기 전 맛집 앱을 살펴보는 게 식도락 소설의 주인공이나 미식가로선 실격 일지 모르겠지만, 이건 쇼코에게 더없이 소중한 한 끼, 한 잔이다. 자신은 미식가가 아니므로 감에 의존하지 말고 문명의 이기를 사용해야 한다. 

 

- "누군가 걸음을 내디디면 길가의 작은 돌멩이가 움직이지. 공기도 흔들리고, 어떤 일이든 아무 변화가 일지 않는 건 없어." 

 

- 아. 맛있는 음식이란 건 정말 근사하다. 사람의 마음을 이토록 포근하게 해 주니까. 우리는 부족한 인간이고 지금껏 그래 왔듯 앞으로도 분명 실수를 저지를 것이다. 그래도 오늘은 그럭저럭 잘 해냈다. 그러면 된 것 아닐까. 이후에도 문제는 얼마든지 생기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된다. 

 

-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커피를 마시고, 최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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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 주인이 약간 의외라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곧장 수긍하고 술을 준비해준다. 이럴 때 "네? 술을 드실 건가요?"라고 되묻지 않는 것도 낮술을 마실 식당을 고르는 중요한 기준이다. 쇼코는 어른이다. 어른에게는 대낮부터 술을 마시는 일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면 좋겠다. 

 

- 남아 있던 술잔을 비웠다. 얼음이 녹아서 거의 물에 가까웠다. 그것도 쇼코는 싫지 않았다. '체이서'처럼 깔끔하다.

'이사미는 얼마 전까지 좀처럼 마시기 힘든 술이었는데 요즘은 제법 눈에 띄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새 잔이 놓였다. 희석되어 은은해진 술도 좋지만 역시 새 잔을 보면 마음이 춤춘다.

'결국은 뭐, 술이라면 다 좋다는 거잖아.' 

 

- 지난밤 고객이었던 소메노 요는 전에 쇼코의 말을 듣고 위로하는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다. 별다른 뜻 없이 그저 대화를 이어가기 위한 화제였을 뿐인데 동정하는 듯한 말을 들으니 쇼코는 자신이 사는 장소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한심한 인간처럼 느껴졌다. 요는 배려가 지나친 나머지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면이 있었다. 그 점을 스스로도 알아서 지금의 직업을 선택한 듯했다. 

 

- "이런 일을 맡겨 죄송하네요." 그녀가 죄송해하면 할수록 어떤 상대는 더 비참함을 느끼고 도리어 원망하는 경우도 있다는 걸 모르는 것일 테다. 요는 정말이지 오해받기 쉬운 사람이다. "상관없습니다. 그게 제 일인데요. 다른 데서도 반려동물 지킴이를 한 적이 있고요." 

 

- 낮부터 음주 가능합니다, 라고 당당하게 간판을 내건 식당도 있다. '좋은 지하상가다! 훌륭한 동네야.' 

 

- 상대의 반응을 살핀 다음 거기에 따라 내용을 바꾸지 않는 솔직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 "재미있는 일이네요. 예전에 누군가의 곁에서 잠을 자주는 일에 대한 만화를 본 적이 있어요. 잘생긴 남자가 여자의 집에 가서 곁에서 함께 자는 거예요. 물론 섹스 없이. 그것만으로 여자는 위안을 얻는 거죠." 

(리뷰자 주 : 슬리핑 파, 였던가? 일본에 실제로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진위여부는 잘 모르겠다.)

 

- '당신은 아직 나랑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

이제 와서 무슨 얘기를 하겠어, 하는 목소리가 속에서 끓어올랐다.

'이미 늦었나? 그래도 나는 다시 한 번 당신과 얘기를 나누지 않으면 어디로도 나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아. 어디로 나아갈지는 나도 몰라. 그래도 당신과 다시 마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 "그럼 그걸로 주세요." 아카리는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흥미진진한 모양이다. 평소 동그란 눈이 한층 더 커졌다.

그래. 이런 대화를 들려주고 싶었다. 쇼코가 홋카이도를 떠나왔을 무렵에 최소한의 매너는 알고 있었어도 아직 판단력이 없어 어디를 가도 불안했으니까. 마침 취직한 회사의 촉탁사원 중에 식도락가인 중년 남자가 있었는데, 그가 점심때 쇼코와 다른 직원들을 데리고 프렌치 레스토랑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 크게 배운 건 어디를 가더라도 주뼛거릴 필요 없이 모르는 게 있으면 점원에게 물어보면 된다는 간단한 사실이었다. 그 촉탁사원 역시 와인의 종류부터 나이프와 포크의 사용법까지 넉살 좋게 점원에게 질문했었다. 제대로 된 식당이라면 반드시 손님에게 정중히 설명해준다는 것도 그때 배웠다. 

 

- "그런데 말이야, 선생님들의 의견은 달랐어. 구시로의 호텔에서 열리는 프랑스 식사예절 강좌를 듣는 건 어떨까 제안하시더라고. 프랑스 요리를 먹으면서 강사가 포크나 나이프의 사용법이라든지 와인잔을 쥐는 법 같은 걸 알려주는 거지."

"와, 나는 그런 수업 받아본 적 없는데." 줄곧 잠자코 있던 요시노리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다들 굉장히 망설였어. 화제가 된 목장에도 가고 싶고 놀이공원에서도 놀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선생님이 '중학교를 졸업하면 취직하는 사람도 있을 거야. 어쩌면 취직한 곳에서 근사한 프랑스 요리를 먹을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잖아, 결혼식에 초대받을지도 모르고. 그럴 때 부끄러워하지 않으려면' 하고 말씀하셨어."

"그랬구나. 훌륭한 선생님들이셨네.” 요시노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모의 마음 같은 것이었겠지. 하고 쇼코는 작게 중얼거렸다. 부모의 마음. 취직하거나 가업을 돕기 위해 고등학교로 진학하지 않는 학생은 몇 명뿐이었다. 하지만 그 학생들이 정식 예절을 배울 기회는 그때가 아니면 두 번 다시 없을지도 몰랐다. 

 

- "응, 두세 번쯤." 둘이 과거에 사귀었던 건 알지만 현재의 관계는 잘 모른다. 제법 둘이서 바람도 쐬러 다니는 건가. 

 

- 지금, 이 두 친구가 내 지킴이다. 달리는 차 안의 기분 좋은 진동에 몸을 맡기며 쇼코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 하지만 그조차 할 수 없을 때가 있음을 쇼코는 알게 됐다. '술 마시는 데도 체력과 기력이 필요한 법이니까.' 

 

- '생각이 지나쳐서 전남편과 새부인을 의심하고 원망하다니. "남을 의심하려거든 일곱 번 찾아보라"라고 예전부터 할머니가 종종 말씀하셨잖아. 뭔가를 잃어버렸으면 반드시 몇 번이고 찾아본 다음에야 누군가 훔친 게 아닐지 의심해야 하고 인간관계도 그렇다고. 타인을 의심하는 건 마지막의 마지막에 하라고 가르쳐주셨지. 다시 한번 찬찬히 생각해보자. 처음부터 하나씩.' 

      

- 다이치와 사치에가 데려가준 보소반도의 농가는 훌륭했다. 여든네 살 노부인이 혼자서 밭을 일구고 있었다. 겨울부터 봄까지는 비단향꽃무와 금어초를, 여름에는 꽈리고추를 재배한다고 했다. 일이 없을 때는 여행을 가는 게 취미이고, 그런 즐거움을 위한 돈을 스스로 벌고 있다며 가슴을 쫙 펴고 자신만만해하던 노부인의 미소가 눈부셨다. 쇼코는 정기적으로 확실한 수입이 있다는 사실이 부러웠고, 흙을 밟는 육체노동이 인간과 자연의 근원적인 힘을 보여주는 듯해 감격스러웠다. 

 

- '음, 고민되네. 아무도 없을 만큼 인기가 없는 가게라면 바로 포기할 수 있는데 오전 11시 30분에 이 정도 손님이 있는 건 미묘해, 미묘하단 말이지.' 

 

- '하지만 내게 한 끼가 지닌 무게는 아주 크다고. 실패하고 싶지 않아. 어쩌지.'

맛집 사이트의 평가를 떠올려본다. 라멘도 볶음밥도 무난하게 맛있는 듯했지만 평가가 아주 높은 건 아니었다.

'어째서 나를 고민하게 하는 거야. 역 앞의 도삭면이라면 솔직히 실패하지 않을 것 같긴 해. 분명 맛있을 테니까. 하지만….'

뭐랄까, 오늘은 왠지 그런 '무난'한 선택을 하고 싶지 않았다. 모처럼 이 동네를 탐색하고 새로운 가게를 개척하고 싶었다. 

 

- 지킴이라는 모호한 일이라서 좋지 않아? 도시에 피는 열매 맺지 않는 꽃이랄까, 하고 그는 웃으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쇼코는 다이치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알면서도 한편으론 '아직 그렇게까지 책임지고 싶지 않은' 그의 속내를 어렴풋이 본 것 같았다. 

 

-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 소설은 술과 음식을 주요 소재로 다루고 있으며, 그 구체적이고 세밀한 묘사가 흥미와 재미를 한층 더한다. 소설 속 많은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지기도 하는데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작용했으리라 생각한다. 하나는 드라마 각본가 출신인 작가의 이력이고, 다른 하나는 소설에 나오는 음식점이 실재하는 곳이라는 점이다. 도시의 지명과 음식 이름을 키워드로 검색하면 알아낼 수 있는 식당들을 배경으로 작가의 취재가 더해져 그 현실감이 그대로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 <낮술>을 통해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하라다 히카는 독특한 직업이나 사연을 가진 여성과 음식 이야기를 소재로 한 다양한 작품을 통해 폭넓은 독자층의 호평을 받는 작가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무언가를 상실한 사람이 그 시점에서부터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성장해가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한다고 말한 바 있다. 어떤 삶이든 살아 있는 한 희망이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작가의 마음을 이 소설에서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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