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이드리스 아베르칸 / 이세진
출판 : 해나무
출간 : 2017.12.15
원제 : Liberez Votre Cerveau! Traite De Neurosagesse Pour Changer L'Ecole Et La Societe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지만, 다 읽고 나서도 이 책의 정체를 잘 모르겠다.
에세이는 아니고, 자기계발서도 아니다.
인문 교양서라고 말하기도 좀 애매하지만, 과학서보다는 인문서에 가깝다.
뇌과학 주제의 책에서 수피교를 이렇게나 많이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저자가 하고 싶은 말'로 채워져있다.
물론 대다수의 책이 저자의 목소리를 담고 있긴 하지만 어느 정도는 반대편의 주장이라거나, 자기 의견을 뒷받침하기 위한 부연 설명들을 우아하게 곁들인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쿠션 없이 명상에서 슈퍼마켓을 거쳐 뇌 구조도와 fMRI까지 오가며 푹푹 찔러댄다.
'깨어나! 나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이게 우리의 한계는 아니니까 깨어나!'.
그런데도 꽤나 재미있다는 게 문제다. 다소 정신이 없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듯 모를 듯 한데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다음 챕터로 넘어가고 있다. 적어도 현 상황이 정상은 아니라는 것을 굉장히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저자가 프랑스 인이라 프랑스의 교육제도와 용어, 그리고 그 어원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부분이 많아 흥미로웠다. 유럽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미국과 아시아-대한민국도 몇 차례 언급된다-는 이런 이미지인가 싶어 신선하다. 오히려 미국이나 한국에서는 바칼로레아나 르몽드, 피가로 등을 찬양하는 경우가 많은데 프랑스 인의 시선에서는 또 다른 모양이다.
('스타니슬라스 드앤'에 관한 언급도 잦은데, 같은 프랑스 학자라는 것이 영향을 미쳤을지 조금 궁금하다.)
무엇이건 즐거워야 하고, 그 힘으로 힘든 고비들을 넘어갈 수 있어야 계속할 수 있다는 말이 인상 깊다.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기치 하에 고통스러운 것을 참아내야만 한다는 강압은 극도로 비효율적이라는 저자의 주장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발견'의 영역인가, '노력'의 영역인가? 저자는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투표권을 제한한다면, 공부에 대한 재미 역시 개인의 영역으로 남겨두지 말고 공적으로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학습의 장이 재미있고 흥미로워진다면 '그 결과물'과 '학생의 삶'이 바뀔 것이라고 말이다.
이를 조금 더 확장해서 생각해볼 때, 이미 그런 학습과정을 거친 성인이라 할지라도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즐거워하게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천성이 아닌 환경에 달린 문제인가?
저자는 책의 도입부에서 자신이 기획 참여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일반인들도 집중 훈련을 통해 충분히 특수해보이는 능력을 개발할 수 있음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가 지속적으로 주장한 것처럼 '사랑하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수많은 시도 속에서 운명적인 '만남'을 기다려야 하는가, 일정 수준까지는 고통을 참고 '개발'해야 하는가?
흥미로웠다.
- 우리는 정신적, 문화적, 물리적 상자들을 아주 다양하게 만들어놓고 철저히 그 안에 갇혀 사는 습관을 들였다. 이 감금이 우리 삶의 조건이고, 우리는 너무 자주 우리 자신을 우리가 속한 상자로만 정의하려 든다.
- 그 누구에게도 내가 누구인가를 정의하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인생의 가장 절대적인 의무다. 이 의무를 무시하는 한, 여러분은 자유롭지 못하다. 남들이 나를 정의하게 내버려 두면 나는 자유롭지 않다.
- 앙리 베르그송이 옳았다. "눈은 정신이 이해할 준비가 된 것만 본다."
- 허기를 느끼게 해야 한다. 경탄하기를 부끄러워하지 마라. 그 분야에서 더 이상 놀랄 일이 없어야 전문가라는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마라.
- "아는 자는 판단하지 않고, 판단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사람들의 상호작용이 자꾸만 늘어가는 사회에서 이러한 지혜는 여전히 유효하다.
- 나는 질리앵 뒤비비에 감독이 연출하고 장 가뱅이 주연을 맡은 영화 <페페 르 모코 Pépé le Moko>에 나오는 대사를 항상 기억할 것이다. 건달패가 훔친 장신구를 가지고 장물아비와 한 판 흥정을 한다. 페페는 건달 중 한 명에게 “저 사람 생각 좀 하게 가만히 있어봐!"라고 질책한다. 그러자 상대는 "저 사람이 생각을 하면 우리가 손해야!"라고 응수한다. 이 대사는 마케팅의 기본 그 자체다. 구매행동은 신속하고 감정적이어야 한다. '내게 필요한 것을 줘'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줘'로 결정 나야 한다.
- 첫째, 우리가 흔히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이 본질적으로는 기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켜주는 것을 우선적으로 기억한다. 따라서 뇌는 자연스럽게 우리를 불안정하게 하는 것보다 우리를 편안하게 하는 것으로 정신 활동을 채우게 마련이다. 우리 정신 속의 '사실'이란 이미 왜곡된 현실이다. 뇌는 자기 신념이 확고해지는 것을 좋아한다. 뇌가 어떤 관념을 세상에 투사했는데 이 관념이 인정을 받으면 도파민 대량 분비라는 강력한 보상이 따른다. 신념을 확인받는 활동이 왜 중독성을 띠는지 이제 이해가 갈 것이다. 우리 뇌는 편파적이다. 스티그머지의 심도와 규칙성은 우리가 경험하는 쾌감에 걸맞게 자리를 잡는다. 뇌는 우리 기를 꺾는 것은 거부하거나 망각하고 우리 마음에 편안함을 주는 것 위주로 편파적 기억을 구성하게끔 부추긴다.
둘째, 우리의 기억은 편파적일 뿐 아니라 그 자체도 그리 믿을만하지 않다.
셋째, 우리의 정신 활동에 공급되는 것들은 이미 미디어의 편파적이고 불완전한 선별을 거친 것이다.
넷째, 사느냐 먹히느냐 원리를 직접 적용해보건대 우리 뇌는 좋은 소식보다 나쁜 소식을 더 크게 받아들인다.
- 편향 1: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깎아내리는 정보보다 그 믿음을 확증해주는 정보에 더 주의를 기울인다. (확증 편향)
편향 2: 우리의 기억은 믿을 만하지 않다. (기억 편향)
편향 3: 미디어는 좋은 것보다는 나쁜 것을 더 많이 거론한다. (표본 선택 편향)
편향 4: 나쁜 소식은 좋은 소식보다 더 기억에 잘 남는다. (충격 편향)
- 이러한 이유에서 리처드 프랜시스 버턴은 '사실'이 결국은 "가장 게을러 빠진 미신"이라고 노래했다. '사실'을 말하고 싶다면 항상 그 사실의 콘텍스트를 환기해야 한다. 역사적 콘텍스트든, 실험적 콘텍스트든, 혹은 그 밖의 것이든.
- 신경인간공학은 우리를 경험이라는 가장 시원적인 개념, 즉 반드시 통제되리라는 법이 없는 조건으로 우리를 데려가고 우리 자신의 정신 활동, 우리 자신의 주관성을 관찰하도록 이끈다. 과학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하고 현대 신경과학도 예외가 아닌지라 아직 걸음마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를 들어 수면처럼 단순한 활동조차 아직 그 작동 방식이나 이유가 신경과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니 신경과학이 각성 상태의 뇌를 어떻게 벌써 이해하겠는가? 신경과학이 무엇을 밝혀내든지, 또 얼마나 진보를 이뤄내든지, 다음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지혜를 무시해도 좋은 날은 결코 오지 않으리라.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
- 미친놈에게 무기가 없다면 그래도 괜찮지만 미친놈이 총까지 들고 있다면 겁낼 만하다.
- 이슬람의 초승달 상징이 수피교도들에게 지니는 의미도 다르지 않다. 초승달은 관찰자의 시각에서 두 개의 원이 나란히 위치함을 뜻한다. 첫 번째 원은 '나'이고 두 번째 원은 '전체'다. 인지과학에서 이 개념은 특히 흥미로운 것이, 인지와 메타인지(자기에 대한 의식)는 불가피하게 나머지 세상에 대한 무지를 바탕에 두고 수립되기 때문이다. 모든 인지 체계들의 정체성은 '전체'는 알지 못한다는 사태를 바탕에 깔고 있다. 모든 인지는 일종의 제한이다. 자기를 의식한다는 것은 더 이상 자기 외의 것들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것이 자율의 기반이다. 이러한 메커니즘이 관여하기 때문에 인간의 뇌는 반드시 어떤 행위의 동기를 알아야만 그 행위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 특히 반복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행위라면 더욱 더 그렇다.
- 자율이 억제를 요구한다면 어떤 면에서 자율과 무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결코 가볍지 않은 의미에서 "나는 모른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소위 '서구적인' 지혜의 본질적인 메시지는(환상 속의 서양만이 그러한 지혜를 독점하지는 않는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정면에 새겨져 있었다. "너 자신을 알라, 그러면 우주와 신들을 알게 되리라." 소크라테스도 그 메시지를 자기 철학의 모토로 삼았다. 수많은 영적 전통들이 자기에 대한 앎만으로도 -기능성 자기 공명 영상, 뇌파 측정, 전기생리학, 광유전학 없이도- 만물에 대한 앎에 충분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건 문제도 아니다. 영성과 과학을 대립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온전히 이성과 과학으로만 이루어진 존재도 아닌 이상, 그런 대립은 유치하다. 인간은 의식으로 이루어져 있고 의식은 과학보다 크다. 과학과 의식, 또는 과학과 영성을 대립시키는 것은 우리 존재의 기본 모듈들을 대립시켜 내전을 일으키는 거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러한 내전에서 결코 승자가 되지 못한다. 과학과 영성의 대립은 함께 일하도록 만들어진 오른손과 왼손의 대립이나 마찬가지다. 뉴로네상스는 당연히 신경 과학을 필요로 하지만 지혜, 거리 두기, 인간다움도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우리 문명에서는 사람들이 풍요 속에서 굶어 죽지요. 문명은 자기를 구원할 지식이 없어서 몰락하는 게 아니라 아무도 그 지식을 실제로 사용하려 하지 않아서 몰락하는 겁니다." - 이드리스 샤
- 이를테면 베르트랑 티리옹과 스타니슬라스 드앤이 프랑스에서 개발한 역망막위상 retinotopie inverse은 단지 피험자의 시각피질을 fMRI로 관찰하는 것만으로 그가 마음속에 그리는 이미지를 추론할 수 있었다(망막위상이란 시각적 신호에 대한 뇌의 반응이 공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역망막위상이란 반대로 뇌의 활동 패턴으로 이미지의 시각적 콘텐츠를 파악하는 것이다.-옮긴이). 이 기술은 물론 조정과 선별이 필요하다. 피험자에게 단순한 이미지 군, 예를 들어 동그라미, 십자, 삼각형 따위를 생각하라고 여러 번 요청하고 그 자극에 대한 뇌 반응을 관찰해야 한다. 이렇게 뇌의 자발적 활동과 유발된 활동을 알아보는 수단을 도입함으로써 뇌 영상만으로 심적 상태를 알아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뇌에 대한 관찰이 어떤 면에서는 제한적으로나마 생각을 '읽는' 것이라고 하겠다. 아직 뇌 영상을 보고 정말로 생각을 추론할 수는 없지만 그 경지로 다가간다고 할까.
- 그런데 이 한계를 깨고 더 많은 단어를 굳이 발음할 필요도 없이 투사할 수 있을까? 개념, 관념소, 비언어적 심상을 곧바로 투사하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도 있을까?
- 이 같은 수단을 그에 걸맞은 지혜를 갖추지 않은 채 원하는 것이 곧 인간의 어리석음이다. 수피교에는 이런 말이 있다. "인간은 솔로몬 왕이 되어야 자기가 쥔 마법 반지를 쓸 수 있다." 뉴로닉스가 아무리 능력과 지식을 확대해준대도 오만을 막아주지는 못한다. 지식을 기성품처럼 손쉽게 안겨주지는 못한다. 지식과 능력이 조건화된 형식들로, 흡사 용기에 담긴 제품이나 통조림처럼 제시될 수도 있다. 우리는 그러한 '레디메이드 지식', '레디메이드 능력'을 게걸스레 밝힌다. 그러나 지혜는 통조림처럼 유통될 수 없고 지혜의 기술 또한 있을 수 없다.
- 리처드 프랜시스 버턴은 "인생은 네가 무시하는 위대한 가르침이니 네가 아는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님을 알라"고 했다. 19세기를 살았던 버턴은 29개 언어와 방언을 유창하게 구사했다. 특히 아랍어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해서 변장을 하고 메카 순례를 다녀올 정도였다.
- 하지만 나는 연구를 하면 할수록 그들이 재능을 타고났다기보다는 자기 능력을 계발하려는 욕망으로 성장해왔다는 설명에 마음이 기운다. 그들은 대부분 그러한 능력 계발에 집착했고 아주 재미있는 것, 만족감을 주는 것으로 여긴다. 또한 그들에게는 오랜 시간 흥미를 계속 유지하게끔 받쳐주는 연료가 있었다. 어떤 주제든 5만 시간 동안 거침없이 파고들면 전문가가 되고, 나아가 인류의 보물이 될 수 있다.
- 인간은 어떤 정신적 탐색을 스스로 삼가고 동류 집단과 비슷해져야 한다는 압력 때문에 스스로를 가둔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정신 활동권 안에서 가능한 모든 상태, 모든 운동을 자유로이 탐색한다면 엄청난 가능성, 뇌의 새로운 물길, 새로운 정신의 움직임이 열릴 것이다.
- 뇌는 일은 덜 할수록 좋은 것이라는 신념을 지지한다. 그래서 우리들 대부분은 인지적 자원을 활용하는 데 인색하다. 인간의 한없는 불행들이 그런 이유로 빚어지기도 한다. 생 종 페르스의 시가 읽기 힘든 이유도 여기에 있다.
- 1980년대에 심리학자 로버트 플러칙 Robert Plutchik은 인간이 느끼는 감정의 다양성을 파악하기 위해 '정서바퀴' 혹은 '정서원뿔' 이론을 내놓았다. 이 장미꽃 모양의 도식은 색깔처럼 서로 대비되지만 배합도 가능한 8개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 지도 제작 전문가로 출발해 기업가가 된 세르주 수도플라토프는 1984년에 IBM 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물질적 자원을 공유할 때는 그 자원을 나눠야 하지만 비물질적인 자원을 공유할 때는 그 자원이 배가된다." 책의 가치는 종이라는 재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 적힌 글에 있다.
- 오늘날 정보는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넘쳐나지만 주의력은 되레 점점 제한되고 있다. 주의력을 끌면 쏠쏠하게 돈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을 사려는 사람은 주의력 곱하기 시간을 지불해야 한다.
- 슈퍼마켓에 가서 아무것도 사지 않고 빈손으로 나오면 그 사람의 구매력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식 슈퍼마켓에서 한 시간을 보내 놓고 아무것도 사지 않는다면 나는 한 시간을, 혹은 1At를 잃어버린 셈이다. 지식경제에서 구매력은 저축할 수가 없다.
- 내가 제시한 방정식들로 발생 가능한 상황들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이 방정식들은 특정 학습들, 특히 지식의 수신자가 해당 분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단순한 경우들에만 들어맞는다. 셀프 인테리어 문외한이 유튜브에서 튜토리얼을 본다든가, 위키피디아에서 새로운 페이지를 발견한다든가... 그렇지 않은 경우들에서는 새로이 들어오는 지식이 기존 지식과 상호작용을 하고 공명을 한다. 이 공명은 전자의 경우(문외한의 학습)보다 훨씬 흥미진진하고 예측 불가능하다.
- 지식경제를 살펴보면서 이미 언급했듯이 애정에서 우러난 탁월성과 즐거움에서 우러난 탁월성에는 비교 상대가 없다.
- 쾌감, 즐거움을 다시 학교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 우리 뇌가 공연히 쾌감을 추구하고 쾌감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다. 맛과 요리에 대한 식견을 발전시키듯 지식도 스스로 찾아다니며 맛보는 자세로 계발해야 한다. 지금의 학교 안에서는 아이들 못지않게 교사들도 괴롭다. 그런데 학교가 건강하면 교사도 지식을 요리하는 실력파 셰프로서 학교생활이 즐겁고 학생은 지식으로 배를 불리고 요리법도 배울 수 있으니 학교생활이 즐겁다.
- "다들 여러분이 하는 일에 열정이 필요하다고 말하는데, 그건 백번 옳은 말입니다. 일이 몹시 어려워서 열정이 없으면 제정신 박힌 사람은 누구나 때려치울 게 분명하니까요. 정말 가혹하게도 여러분은 그 일을 장기간 해야 할 겁니다. 여러분이 일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 일에서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정말로 일에 애정이 없다면 그만두게 될 겁니다. 사실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사회의 눈으로 봤을 때 '성공했다는' 사람들을 보면 대개 자기가 하는 일이 좋아서 정말 죽도록 일이 힘들어졌을 때도 버틸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을 버렸던 거고요... 그게 정신적으로 건강한 겁니다! 좋아하지도 않는 걸 힘들게 계속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힘든 작업도 많고 불안할 일도 많기 때문에 진짜 좋아하지 않으면 실패할 거다, 이게 다예요. 그러니까 맞는 말입니다. 사랑이 필요하고, 열정이 필요합니다." - 스티브 잡스
- 의전에 따르면 제자가 스승보다 한참 위에 있으니 스승은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행사하는 권력을 자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우위성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빈치,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틴토레토는 모두 르네상스 시대의 보테가 bottega, 즉 다학문적 성격이 강하고 수준도 각기 다른 장인들이 실무를 함께 연마하는 아틀리에에서 지식을 쌓았다(지금의 제작실험실은 그 시대 보테가의 유쾌한 재래파일 것이다). 보테가에서 다양한 앎은 실용적인 의도에서 콘텍스트를 얻고 유포되었다. 보테가에서 스승은 제자보다 높은 지위에 있었다.
- 우리 사회의 관료주의는 열정보다 순응을 선호한다. 학교에서의 평가와 시험, 그리고 이후의 취업까지 이어지는 이 연속 공정은 사랑과 순응 사이에서 매번 어김없이 후자를 택한다. 그러니 이 공정이 불행과 고통을 대량생산해도 무에 그리 놀라울까. 순응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순응은 결코 한 인간의 삶을 온전히 채워줄 수없다. 순응만 하고 살면서 아침마다 행복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고 한층 더 성숙한 모습으로 잠을 청하기란 불가능하다... 죽기 전에 "아, 평생 틀에 맞게 살았구나!" 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 심리학자 이드리스 샤 Idries Shah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일이 두려운가? 그렇지만 어제가 더 위험하다." 우리 뇌는 과거의 실패로 미래의 시도를 억누른다. 그래서 쉬이 거둘 수 있는 소소한 성공의 연속은 큰 성공에 날개를 달아주지만 소소한 실패의 연속은 사기를 확 떨어뜨린다. 지정학에서 이 원칙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 안타깝게도 프시카트리스는 육체의 상처보다 더 음험하게 작용한다. 내 손바닥에 잘 아물지 않은 큰 흉터가 있다고 치자. 누가 이 손을 멋모르고 덥석 잡기만 해도 나는 아파서 비명을 지를 것이다. 이 경우, 나는 위험을 맨 먼저 파악한 사람으로서 상대에게 손을 꽉 잡으면 아프니까 조심해 달라고 미리 양해를 구할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불의의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 사고가 정말로 (미리 말하지 않은)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경향이 있다.
-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현대 소액 신용 대출의 창시자 무함마드 유누스는 동류 집단의 압력을 이용할 줄 알았다. 그는 빈곤층을 구제하려면 개인이 아니라 집단에 손을 써야 한다는 사실을 금세 깨닫고 긍정적 압력의 역학("내가 할 수 있으면 너도 할 수 있어")을 마련했다. 그는 또한 어떤 사람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기존 집단에서 끄집어내는 것이라는 점도 간파했다. 집단을 벗어나면 심리적 장벽이 생기기 때문에 이 작업은 각별히 더 어렵다. 빈곤한 개인을 받아주는 새로운 집단이 있을 때, 함께 곤경을 극복할 준비가 되어 있는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 빈곤 극복 프로젝트는 더 잘 풀린다. 신념의 크기가 당연히 모두 같을 순 없어도 집단 수준에서 웬만큼 일정할 때 어려움은 좀 더 쉽게 극복되었다. 예를 들어 장기 복역을 마친 죄수가 사회로 돌아가기란 무척 힘들다. 사회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많지만 감옥에서처럼 한계가 분명하면서 인지적으로 편안한 자리는 줄 수 없다. 극도의 빈곤도 비슷한 효과를 일으키기 때문에 집단 차원에 주목하지 않고는 빈곤과 싸울 수 없다.
- 어쩌면 미래 세대는 우리의 과오에서 좀더 지혜를 얻어 좌절을 환경오염, 대기 오염에 맞먹는 정신적 공해로 볼지도 모른다. 그 세대는 이렇게 말하리라. "아시겠지요? 이 돼먹지 못한 신중세 사람들이 얼마나 불결했느냐 하면요, 그들은 자기네가 숨 쉬는 공기나 마시는 물, 자식들에게 먹이는 우유가 오염되는데도 그러려니 하고 살았답니다. 자기네 피, 뼈, 머리칼까지 오염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어요. 우리가 그 당시 사람들의 신체 조직을 분석해보았더니 납, 카드뮴, 수은, 비소, 다이옥신이 검출됐답니다. 하지만요. 더 고약한 문제가 있었어요. 그들은 오로지 경제를 살리겠다는 이유로 지속적인 불안과 좌절로 정신을 오염시키는 것도 당연시했다대요."
- 체리는 우리의 에고가 욕망하는 신기루들이다. 모든 사기는 에고를 기반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사기는 자기 자신을 아는 기회, 나의 좌절과 유치한 욕망과 허망한 환상을 발견할 기회이기도 하다. 거짓 예언자, 가짜 신, 사이비 도사, '에소투리즘 ésotourisme' 장사꾼들은 여러분의 기대에 꼭 맞춘 듯한 세계를 제시하고 여러분이 그 세계에 의존하게 만든다(에소투리즘은 밀교, 불가사의한 비밀을 뜻하는 ésotérisme과 관광을 뜻하는 tourisme을 결합해 만든 말이다. 난해한 종교와 영성의 문제를 관광 상품처럼 가볍게 접하는 태도를 비꼬는 의미가 있다. 옮긴이). 뛰어난 사기꾼은 여러분이 원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여러분을 그만큼 잘 이해하는 사람이 달리 없어 보일 만큼. 그래서 여러분은 그에게 자기애적인 관심을 더욱더 기울이게 될 것이다. 이 함정에 깊이 들어갈수록 빠져나오기는 힘들다. 진실의 비용이 높아질수록 진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기술의 역학이다. 사기꾼의 거짓 예언이나 폰지 피라미드에 이미 수천 달러를 투자한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현실을 외면하려 든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을 정신적으로 철통같이 감금하는 간수 겸 죄수가 되는 것이다.
- 우리의 첫 번째 르네상스에도 '기억술', 관념을 더 잘 기억에 남기기 위해 고안된 그림들이 있었다. 인문주의자 조르다노 브루노의 <이데아의 그림자 De umbris idearum>에도 다음과 같은 삽화들이 있다. 지금과 같은 '마인드맵'이 개발되기도 전에 당시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글로 조직하는 과정에서 기하학적 도형을 잘 활용했다.
- 처음에는 브라이언 무어와 브라이언 글래스버그가 지도교수였는데 두 분은 심리음향 psychoacoustics, 달리 말하자면 우리 뇌가 소리를 지각하는 방식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내가 참여한 연구 중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모달 우회 contournement modal', 혹은 트라이앵글을 눈으로 보기보다는 소리로 듣게 될 가능성이랄까.
-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는 스타니슬라스 드앤의 우리 의식의 '전체 작업 공간'에 대한 연구가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았다.
- 그러나 뇌에 대한 지식을 두루 퍼뜨리려면 이 지식을 달고 맛나게 만들어야 한다. 재료는 준비됐다. 이제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풍기게끔, 정신을 한껏 만족시킬 만한 수준으로 조리를 해야 한다. 그런데 책들에는 부분적으로 '알음알음으로만 전해지는' 냄새가 있다.
-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정신의 우주를 탐색하는 방식은 우리의 인지적 자세에 좌우된다. 우리는 어떤 사유나 해법을 우리 자신에게 금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인들은 무리수에 대한 사유를 금기시했다. 뇌의 작업은 스스로를 '억제하는' 방식에 따라 굉장히 상이한 방향들을 취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정신 자세를 바꿈으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다.
- 이게 바로 메타인지의 문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줄 모른다. 우리가 안다는 것을 알려면 뇌는 비용을 치러야 한다. 이 비용은 주로 전두피질을 거침으로써 삭감된다. 우리가 어떤 작업을 의식적으로 수행하기에 앞서 우리의 전두피질이 그 작업 수행 능력의 모델을 웬만큼 수립해주기 때문이다. 전두피질은 종종 우리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다(실제로 전두피질이 단어를 조합할 능력은 없지만 말이다). '너 이거 할 수 있는 거 맞아?' 우리는 그런 식으로 의심에 사로잡히게 된다. 아는 것인데 모르는 것처럼 생각될 때에 작용하는 것이 바로 이 현상이다. 그런데 메타인지는 '무엇을 아는지'에 대한 앎뿐만 아니라 '어떻게 아는지'' 혹은 '왜 아는지'에 대한 앎에도 관여한다. 무엇을? 어떻게? 왜? 어디서? 언제? 이런 것들이 우리 앎의 주요한 '메타데이터'다.
- 내가 보기에는 신경과학은 엘리트의 전유물이라고 대놓고 말하는 연구자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연구자보다 차라리 낫다. 어차피 둘 다 바보이지만 첫 번째 바보는 자기 견해를 화제에 올려놓고 비판 정신에 노출시키기라도 한다. 그로써 이 바보는 그나마 자신의 편향과 편견을 깨달을 여지가 있다. 하지만 인정하지도 못한 채 속으로 품고만 있는 두 번째 바보는 아직 이해할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다.
- 자기 신넘에 맞는 증거는 취하고 자기 신념을 흔드는 증거는 거부하는 저 유명한 '확증 편향'의 예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꼭 연결되란 법은 없는) 사실들을 응집시키는 신념의 체계를 만들고 그 체계를 현실에 투사한다. 우리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우리의 신념, 우리의 조건화는 현실을 왜곡하는 필터와도 같다.
- 결국 로젠한의 실험은 과학적 설정 혹은 의료 행위라는 규제된 틀 안에서 우리가 객관적이라고 믿는 것조차 위장된 주관성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그런데 인간의 객관적 행동을 찾을 수 있기는 한가?
- 하지만 우리가 주관성과 객관성이라는 두 개념을 파악할 수 있다면, 그 둘이 미묘하게 서로 얽혀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동류가 아니라 자신과 다른 부류를 통해 배우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루미는 노래했다. "하여, 네가 날아오르려면 날개가 두쪽 있어야 하느니라." 내적 성찰의 데이터와 외부 관찰의 데이터를 대립시키지 말자. 모든 인간은 자아의 필터를 통해 세상을 본다. 자아가 투명해질수록 세상은 심도 있게, 정묘한 구석까지 선명하게 보인다. 과학에 대한 편협한 사고는 주관성을 완전히 거세하려 든다. 심각하게 실수하는 거다. 그런 일이 애초에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객관성을 편협하게 추구하는 자세는 되레 주관성을 강화한다.
- 알 가잘리, 미켈란젤로, 조르다노 브루노, 레오나르도 다빈치, 리처드 프랜시스 버턴 같은 팔방미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모두 새로운 것을 좋아하고 열광하는 사람, '네오필néophile'이었다. 그러한 열광은 미국인들이 말하는 할 수 있다는 자세, 진정으로 자기 가능성을 믿는 마음가짐에서만 나온다. 즉, 학습된 역량과 직결된 능력인 것이다.
- 사유를 공간화하라. 이 기술이 완전히 몸에 익을 때까지 훈련하라. 마음속에 궁전을 하나 짓고 구석구석 철저하게 다루어보라. 버턴은 "네 생각을 제국으로 만들라"고 말한다. 이것은 상당히 일반적인 아이디어다. 정신적 삶의 궁전은 공간으로 시작되지만 감정 기억과 연상 기억으로 유지된다.
- 정신적 삶 속에 궁전을 지으면 여러분의 인지를 눈으로 보는 것처럼 의식할 수가 있다. 그래서 투명한 주관성을 훈련하기에도 이만한 도구가 없다. 자기 지식의 박물관을 세우는 이 훈련은 자신의 능력과 잠재력을 늘 확인시켜주기 때문에 학습된 역량이라는 면에도 이롭게 작용한다.
- 동류 집단은 우리를 자기네의 정신적, 지적, 영적 수준에 놓는다. 그래서 긍정적 효과가 있을 수도 있고("나도 하는데 네가 왜 못 해?") 부정적 효과가 있을 수도 있다("이 잘난 척 대장아, 내가 못 한 일을 네가 어떻게 한다는 거야?"). 어쨌든 남들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한, 그 사람은 자유롭지 않다. 지능이 자유라면 당연히 지능의 근간에는 스스로 생각하는 힘,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걱정하지 않는 자세가 있을 것이다.
- 모두에게 권한다. 운신의 자유를 최대화하라. 은연중에 어떤 생각을 금지하려 드는 동류 집단과는 거꾸로 가라. 버턴도 이렇게 권한다. "네가 생각하기에 인류가 너에게 명하는 바로 그 일을 하라. 너 자신 외에는 누구에게도 박수받을 기대를 하지 마라. 자기가 만든 규칙을 따르는 사람은 가장 고결하게 살다가 가장 고결하게 죽는다. 그 밖의 생은 좀비의 생, 유령들로 가득한 세상일 뿐이다." 덧붙일 말이 없다. 자기 힘으로 생각하고 살아가지 못하는 유령들이 두렵지는 않지만 나는 살아오면서 그런 자들을 너무 많이 봤다.
- 수피교 전통에서 자히드(아랍어로는 '자히르 zahir', '외부', '드러남'이라는 뜻)는 코란을 피상적이고 일반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사람, 사물의 표면에 머무는 옹색한 정신의 소유자다.
- '사방튀리에'는 에르제의 만화 <탱탱> 시리즈의 등장인물 해바라기 박사의 모델이 되었던 오귀스트 피카르의 별명이기도 했다. 위대한 해양학자 자크 피카르가 그의 아들이고 '솔라 임펄스 프로젝트'의 첫 번째 조종사 베르트랑 피카르는 그의 손자다.
- 우리는 명석한 신경학자 필 케네디의 경우를 상기할 수 있겠다. 그는 자기가 개발한 향신경성 전극 모델(두개골 안에 전극을 삽입하면 그 주위 뉴런 성장이 촉진되고 나중에는 뇌 안에서 안정화되는 유형으로, 흉터 조직이 아물어 덮어주지 않더라도 장기간 착용 가능하다)을 시험하기 위해 결국 자기 뇌에 이 장치를 심었다. 뇌에서의 언어적 분절 코딩에 정확성을 기하려면, 그리하여 언젠가 감금 증후군 환자들이 말을 할 수 있게 하려면 데이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필 케네디는 미 FDA의 승인을 얻어 벨리즈에서 수술을 받았다. 그 결과 귀중한 데이터를 얻기는 했지만 수술 후 회복은 예상보다 훨씬 더뎠고 아마도 평생 가게 될 것으로 보이는 언어 장애까지 생겼다. 그가 개발한 전극은 평생 그의 머리에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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