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프랜시스 베이컨 / 김종갑
원제 : (The) New Atlantis
출판 : 에코리브르
출간 : 2002.01.24
흥미로운 단편이었다.
아메리카 대륙을 신 아틀란티스라고 불렀다는 설명이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본문 중에 등장하지만, 베이컨이 말하고 싶었던 '새로운 아틀란티스'는 아메리카도 아틀란티스도 아니다. 새로운 이상향, 유토피아로서 저자가 그려내는 사회는 물질적이다. 모자람이 없으므로 넘치게 추구할 일이 없는 사회로 묘사하고 싶었던 듯 하지만, 등장 인물들을 통해 보여주는 벤살렘은 기본적으로 호화롭다. 손등을 통해 흡수되는 영양수와 한 번 먹으면 오랜 기간 굶어도 괜찮은 고기가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 끼니를 즐기는 듯하다.
우리가 이미 가졌던 유산을 지키면서도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발전시켜 온, 오염되지 않은 순수하고 풍요로운 벤살렘. 신비의 베일을 벗겨내는 지식과 과학의 양날의 검 아래 쏟아지는 황금의 풍요. 외부로부터의 접촉을 피하기 위해 주의하지만 사고 등으로 고난을 겪는 이들에게는 자비롭고 친절한 도움의 손길을 내밀 줄 알며, 항시 여러 국가로 파견되어 그 나라의 이름과 문화 속에 숨어들어 세계 정세와 기술을 습득하고 돌아오는 솔로몬 학술원의 빛의 상인들. (중국과는 경우가 다르다고 말하지만, 무역이 주 목적이 아니라는 것 외에 큰 차이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오히려 목적 자체가 비밀 '스파이'가 되는 것이니 더...)
손가락을 바라보는 격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만족을 통한 욕망의 소멸이 과연 가능한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 묘하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이상향이 겹쳐지긴 하지만, 그렇게 단정지을 수는 없다. 노동과 평등, 욕망의 절제를 통한 유토피아를 그렸던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와 자주 비교된다는 점도 흥미롭다.
- 이 양피지에는 지품천사의 날개가 그려진 직인이 찍힌 데다가 십자가 표시도 함께 있었다. 천사의 날개는 접혀져 있었다. 이와 같은 취지의 양피지를 우리에게 전달한 다음 그는 배로 되돌아갔다. 답신을 받아오도록 하인 한 명을 배에 남겨둔 채. 이 광경을 목격하고 적잖이 당황한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상륙 금지나 출항 독촉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이 섬의 사람들이 여러 나라 언어를 사용한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에게 보여준 훈훈한 인정이 격려가 되었다. 무엇보다 양피지에 그려진 십자가 표식이 커다란 기쁨을 안겨주었다. 좋은 일에 대한 전조임이 틀림없었다. 깊이 생각한 끝에 스페인어로 다음과 같은 답신을 적었다.
- 그의 아들 가운데 한 명이 아버지를 모시며 함께 사는데, 특별히 그를 '포도의 아들' 이라 부른다. 이러한 호칭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기로 한다.
- 전차의 앞으로는 발까지 내려오는 리넨 의상에 파란 우단 신발을 신은 두 남자가 맨머리로 행진하고 있었는데, 한 명은 손에 권장을 다른 한 명은 목동의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권장의 재료는 서양 박하나무고 지팡이의 재료는 삼목이었다.
- 바빌로니아 남부를 가리키는 고대의 지명. 구약성경에서는 칼데아를 흔히 바빌로니아와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칼데아인은 BC 1000년기 전반에 바빌로니아 남부에서 활약한 셈계의 한 종족으로, BC 625년 나보폴라사르는 아시리아에서 독립, 메디아와 연합하여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를 함락(BC 613)시키고 칼데아(신바빌로니아) 제국을 창건하였다. 네부카드네자르의 시대에는 나라가 최성기를 맞이하여 많은 신전이 재건되었으며 수도 바빌론은 번영하여 함무라비 시대의 재현이라고 일컬어졌다. 또 지식계급인 신관들에 의하여 이 시대에 점성술이나 각종 점복술이 크게 발달하였다. 그러나 내분으로 87년 만에 멸망하였다.
- "이제 이야기의 본론으로 돌아오기로 하지요. 백성들이 영해를 벗어난 지역으로 항해하는 것을 왕이 금지했음에도, 그는 한 가지 예외적인 조항을 두었습니다. 일 년에 한 번씩 두 척의 배가 이 왕국을 벗어나 여러 지역으로 항해할 수 있다는 규정이 그것입니다. 이 배에는 솔로몬 학술원 회원이 세명씩 탑승을 해서 각자 맡은 나라의 상황과 사정을 파악하는 임무를 수행합니다. 특히 세계 도처에서 이루어지는 과학이나 예술, 기술의 발달, 발명품 등이 연구의 목적이 됩니다. 그리고 중요한 서적, 기구, 모형들을 가지고 귀국하게 됩니다. 이 배는 타국에 학술원 회원들을 떨어뜨려 놓고서 우리 왕국으로 되돌아오는데, 이들 회원은 새로운 임무가 주어질 때까지 타국에 머무릅니다. 배에 싣고 온 상당량의 음식물과 보석을 가지고 그들은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며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들에게 답례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평범한 선원들은 이국 땅에 발을 디디면 발각될 염려가 있기 때문에 선실에서 숨어 지내야 합니다. 부득이 육지에 오르는 선원은 본토인처럼 변장을 하고 그들의 이름을 사용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항해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는 장소가 어디인지, 또 이들 학술원 회원의 자세한 활동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당신네들도 구태여 알고 싶어 하지 않을 줄로 압니다. 아무튼 우리가 금이나 은, 보석, 비단, 향료, 혹은 이와 비슷한 물건들을 얻기 위해서 외국으로 항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당신들도 분명히 납득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첫날에 창조한 빛을 찾아 항해를 합니다. 빛이 항해의 목표입니다. 세계의 방방곡곡에서 점점 밝아오는 빛을 우리는 추구하는 것입니다."
- 그러면 사자는 소년에게서 금 포도송이와 가지를 인계받는다. 이 포도송이에는 정교하게 에나멜이 칠해지는데, 만약 가족 구성원 중 남자의 수가 많으면 진흥색으로 채색하며 꼭대기에 작은 태양의 문양을 그려 넣는다. 반대로 여자의 수가 많으면 연초록으로 채색하고 꼭대기에는 초승달을 그려 넣는다. 여기서 포도송이의 숫자는 터산의 후손 수와 정확히 일치한다. 사자로부터 금 포도송이를 전달받은 터산은 이것을 다시 자기를 모시는 아들에게 인수한다. 터산이 외출할 때마다 아들이 동행한다. 이때 아들은 아버지의 앞에 나아가며이 명예의 표시인 금 포도송이를 달고 다닌다. '포도의 아들'이라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리뷰자 주 : 다산과 풍요와 포도의 연결. 다만 맥락상 포도송이의 숫자가 아니라 포도알의 숫자가 아닐까 싶다.)
- "유럽의 결혼제도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것이지요. 불법적인 육욕의 예방책이 바로 결혼이 아니겠습니까? 자연스러운 육욕은 결혼으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사악한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보다 수월한 방법이 있으면 결혼은 타기시 될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유럽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면서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결혼이란 멍에에 묶이지 않고서 욕망을 실컷 채우겠다는 속셈이지요. 결혼을 해도 아주 늦게, 청춘의 힘과 패기가 시들어버린 다음에야 결혼을 합니다. 이들에게 결혼이란 한갓 거래에 불과합니다. 결혼을 통해서 자손에 대한 약간의 욕심을 채우거나, 인척 관계를 맺거나 명예를 얻고 싶어하는 것이지요.
(리뷰자 주 : <매너의 문화사>에서 비슷한 인용구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 이 대목에서 당시 성관계와 결혼의 함수 관계를 어느 장도 집어낼 수 있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에도 이와 비슷한 논지가 전개된다.
- "그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준비 절차와 도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거대한 규모의 깊은 동굴을 여러 개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깊은 동굴은 깊이가 1킬로미터도 넘습니다. 언덕이나 산을 파서 동굴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산의 깊이와 동굴의 깊이를 더하면 깊이가 5킬로 미터 에이를 정도입니다. 지상의 표면에서 보면 산의 깊이나 동굴의 깊이나 매한가지이지요. 둘 다 태양의 햇살이나 대기로부터 똑같이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요. 우리는 이들 동굴을 하부세계라고 부릅니다. 사물을 응고하거나 경화, 냉동시키며 다양하게 보존하는데 이 동굴이 사용됩니다. 우리는 천연 광산을 본떠서 동굴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다양한 재료를 혼합해서 새로운 인조 금속과 물질을 만들며 그곳에 오랫동안 보관하기도 합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 물질을 가지고 우리는 병을 치유하며 생명을 연장하기도 합니다. 필요한 물자를 풍족하게 갖추고서 지하세계에서 사는 사람들은 실제로 매우 오래 삽니다. 이들로부터 우리는 많은 지식을 얻기도 하지요."
- "우리에게는 천연의 우물이나 분수를 모방해서 만든 인공우물이나 분수도 있습니다. 황산이나 황, 강철, 청동, 납, 초석을 비롯한 기타 광물질이 섞인 온천도 있습니다. 많은 물질들을 주입해서 실험하기 위한 자그마한 우물도 있습니다. 여기에 물질을 넣으면 그릇에 담긴 것에 비해서 물의 반응속도가 훨씬 빨라집니다. 이러한 실험 결과, 우리는 천국의 물이라고 불리는 물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물을 마시면 건강이 증진되고 생명이 연장됩니다."
- "이제 학술원 회원의 임무나 활동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신분을 감추고서 외국인의 이름을 가지고 외국에서 활동하는 회원이 열두 명 있습니다. 이들이 세계 곳곳에서 행해지는 발견이나 실험에 관한 자료와 책을 벤살렘으로 가져옵니다. 이들을 '빛의 상인''이라고 부르지요. 서적에 적힌 실험을 수집하는 회원이 세 명 있습니다. '약탈자'라고 불리는 회원들입니다. 기계 기술에서 비롯된 결과물을 수집하며 인문학의 연구결과, 또 아직 체계적으로 연구되지 않은 사회적 관행들을 수집하는 회원의 수가 세 명입니다. 이들을 '신비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유용하다고 판단되는 새로운 분야를 실험하고 연구하는 회원이 세 명 있습니다. '파이어니어'나 '광부'라고 불리는 회원들입니다. 앞서 언급한 회원들의 연구활동에 이름을 붙여 목록을 만들며, 이 연구활동으로부터 새로운 이론이나 원리를 도출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회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편찬자'라고 불립니다. 동료들의 실험과 연구 결과로부터 인류의 삶을 향상시키며 지식을 증진시킬 수 있는 효용성을 찾아내려고 고심하는 회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인과관계를 설명하며 자연현상을 예측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모색합니다. 또 육체의 기능과 역할을 알기 쉽고 명료하게 설명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지참금 지급자' 나 '은혜 수여자'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전체 학술원 회원이 모여 토론하는 회의가 열립니다. 여기에서 기존의 연구와 정보 수집의 현황을 점검하는 역할을 맡은 회원이 세 명 있습니다. '등불'이라 불리는 회원으로, 이들이 더욱 자연의 비밀을 밝히며 진리에 가까이 다가서도록 새로운 연구 과제를 선정합니다. 또 지시된 연구를 수행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는 회원이 세 명 있는데, '예방 접종자'라고 불립니다. 마지막으로 기존의 발견 결과를 다시 관찰하고 연구하면서 새로운 원리나 격언을 도출해내는 회원이 세 명 있습니다. '자연의 해석자'라고 불리는 회원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초심자와 견습생도 있습니다.
- 프랜시스 베이컨은 1561년 1월 22일, 런던에 있는 아버지의 관저 요크하우스에서 태어났다. 당시 대법관으로 권력의 정상에 있던 니콜라스 베이컨 경의 막내아들이었다. 프랜시스의 어머니 앤은 세도가 당당하던 세실 경의 가까운 친족(세실 경 부인의 동생)인 데다가 여러 외국어와 고전 지식을 해박하게 갖춘 재원이었다. 베이컨은 열두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형 안토니와 함께 입학하는데...
- 프랜시스 베이컨의 <새로운 아틀란티스>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1세기 앞서 1516년에 출판된 모어의 <유토피아>와 병치해놓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비교· 대조되면서 두 저서의 차이와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앞서 설명했듯이, 대법관이라는 당시 최고의 지위에 올랐음에도 모어는 어디까지나 철두철미한 성직자였다. 성직자로서 그에게 지식이란 덕에 이르는 길이다. 그가 설계한 유토피아는 무엇보다도 미덕의 유토피아이며,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이 유덕한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은 성직자이다. 그러나 베이컨의 이상 사회는 전혀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타고난 탁월한 재능과 기량에다 출세의 욕망에 박차를 가하면서 성공의 사다리를 꾸준히 밟아 올라 마침내 모어와 마찬가지로 대법관의 자리에 오른 베이컨에게 지식이란 힘이었다. 이 힘은 인간의 마음을 감화하며 움직이는 도덕적 힘이 아니다. 그것은 물질세계를 좌지우지 엿가락 주무르듯이 지배하는 권력의 손길이다. 그래서 그에게 지식의 모델은 자연과학이며, 두말할 여지없이 그의 유토피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도 과학자이다.
- 땀 흘려 일하지 않아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면, 무심결에 우리는 황금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17세기 이후로 과학이 이룩한 눈부신 성과는 인간에게그러한 환상을 조장하기에 충분했다. 베이컨의 유토피아는 그러한 환상의 기념비이다. 새로운 천년을 살아갈 우리에게 <새로운 아틀란티스>가 의미심장한 울림을 갖는다면, 그것은 현대 문명의 거울에 비추어 그 내용을 음미하며 다시 읽는 일이다. 다시 말해, 현실의 거울에 얼굴을 비추어보면서 자신의 환상에서 어서 깨어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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