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줄리아 쇼 / 이영아
원제 : The Memory Illusion
출판 : 현암사
출간 : 2017.05.25
기억이라는 착각.
우리가 매일 보고 감각하는 대다수의 정보들은 실제 일어났던 상황과는 괴리가 있을 확률이 높다. 지각할 수 있는 데이터 용량의 문제도 있고, 그 순간 나의 감정 상태나 집중 정도에 따라서도 정보의 내용이 윤색되기 때문이다. 그에 더해 기억을 다시 떠올릴 수록 변질되는 문제도 있다.
흔히들 오랜 친구들이 모여 과거의 공통된 추억을 회상할 때 각자가 기억하고 있는 내용과 중점을 두는 부분들이 다 제각각인 경험을 했을 것이다. <몹쓸 기억력>의 저자는 그것만이 다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 기억들 중 일부는 거짓 기억일 수도 있으며, 그날의 대화를 통해 옳은 기억을 가지고 있던 사람조차도 잘못된 기억이 덮어쓰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신은 손쉽게 그런 상태를 유도할 수 있다고도 말한다.
자아 정체성을 기억에 기반하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이 내용은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내가 기억하는 어제의 내가 있기에 오늘의 나와 연속되는 일상이 가능해지는 것인데, 그렇다면 '내가 기억하는 나'는 대체 무엇이며 '진짜 나'는 어떤 존재란 말인가?
기억의 선명함과 자세함으로는 '그것이 실제로 경험한 기억'이라는 보장이 될 수 없다는 저자의 실험 내용이 인상깊었다. 연이어 4권 정도의 기억법 관련 책을 읽었지만 제각각의 색깔이 모두 달라 신선했다. <몹쓸 기억력>은 기술적 접근보다는 기초 지식과 실험적인 접근에 가까운, 사회과학 도서에 가깝지 않았나 싶다.
최근 관심을 두고 있는 꿈과 심상화, 상상과 기억과의 연관성에 대해 흥미로운 지점들을 발견한 것에 의의를 둔다.
- 다행히도 앞서 언급한 극적인 기억 상실은 현실에서 드물게 일어난다. 그러나 우리의 기억이 쉽게 조작되고 왜곡되고 변질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 책에서는 바로 이 문제를 얘기해보려고 한다.
- 비슷한 연구를 하고 있는 여타 연구자들과 내가 다른 점은 허구로 만들어내는 기억의 성격이다. 나는 단 몇 차례의 친근한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기억에 관한 지식을 이용해 상대의 기억을 심하게 왜곡할 수 있다. 상대가 자신이 범죄를 저질렀다거나 부상을 입었다거나 개에게 공격을 당했다거나 하는 식으로, 일어나지 않은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설마 그런 일이 가능할까 싶겠지만, 기억의 과학적 원리를 주도면밀하게 응용하기만 하면 된다.
- 진짜 기억이라고 느끼지만 실제 사건에 근거하지 않은 거짓 기억 역시 우리가 항상 경험하는 현상이다. 거짓 기억을 믿어도 진짜 기쁨, 진짜 좌절, 심지어 진짜 정신적 외상까지 겪을 수 있다. 따라서 잘못된 기억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이해하면 기억에 담긴 정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며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적절히 이용해 우리 자신을 정의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있다.
- 실험 삼아 이런 생각을 해보자. 어느 날 아침에 깨어났더니 내가 이제까지 뭘 했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뭘 배웠는지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면? 그래도 나는 여전히 나일까? 이런 상황을 생각하면 본능적으로 두려워진다. 기억이 사라지면 내 모든 것을 빼앗겨 껍데기만 남을 것 같은 예감이 들기 때문이다. 기억이 사라진 후에는 무엇이 남을까? 어느 오싹한 SF 영화의 설정이 떠오른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 그들 중 누구도 자기가 누군지 알지 못했다." 어쩌면 정신능력과 인격의 기본은 온전히 남아 있으니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새 인생을 시작할지 모른다는 기대에 부풀 수도 있다. 아니면 두려움과 희망 사이에서 갈팡질팡할지도 모른다.
(리뷰자 주 : 하지만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라는 건 '기억'일뿐이다. 꿈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다른 자아가 되곤 하는가. 정말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이고 내일의 '내'가 되는 것일까?)
- 우리가 지각을 일관성 있고 흐르듯 막힘없이 경험하는 이유는 뇌가 끊임없이 경험에 근거한 추측을 하면서 정보의 빈틈을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 뇌의 거의 한가운데 있는 해마는 장소를 기억하고 장기 기억을 형성하는 능력을 담당한다. 하지만 나는 기억이 해마에 저장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짜증이 난다. 그건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이다. 기억은 네트워크로 뇌 전체에 저장된다. 해마의 역할은 중재인에 더 가깝다. 신경과학자 딘 버넷은 이렇게 말한다. "정보가 전달되는 해마는 새로운 기억 형성에 중요한 뇌 영역으로, 뇌에서 완전히 새로운 뉴런들이 정기적으로 생성되는 몇 안 되는 곳이다. 해마는 모든 유의미한 정보들을 서로 연결시키고, 새로운 시냅스를 형성해 정보를 암호화한다. 무시무시하게 복잡한 문양의 태피스트리를 실시간으로 짜는 것과 마찬가지다."
- 광유전학 기술로 해마의 기억 생성을 조종한다고 하면, 복잡한 기억들을 통째로 사람들의 뇌에 심는 <매트릭스>나 <토탈리콜> 같은 SF 영화가 떠오른다. 아직 그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우리가 뇌에 사용할 수 있는 과학 기술은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 광유전학은 불과 2010년에서야 SF소설에서 과학적 현실로 바뀌었다. 2015년 말경에는 음파유전학(sonogenetics) 혁명도 시작되었다. 음파 유전학이란 오로지 소리, 구체적으로는 초음파를 이용해 세포를 바꾸는 기술을 말한다. 이 기술의 앞날을 말하는 건 시기상조겠지만 현재 바람직한 사용과 남용에 관한 윤리적 논쟁과 더불어 온갖 흥미진진한 발전의 조짐이 보이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미래의 언젠가는 뇌의 특정 부위에 빛을 쪼이거나 초음파를 사용해 특정 기억을 변경하고, 그로써 개인의 역사를 완전히 바꿔버리는 일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 6단계: 첫 인터뷰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났다는 얘기를 해주면 참여자들은 처음엔 "이 일은 기억 안 나는데요." 하는 식으로 맞는 말을 한다. 그러면 나는 기억나도록 도와주겠다면서 시각화 훈련을 제안한다. 참여자들에게 눈을 감고 그 사건을 머릿속에 그려보라고 한다. 내가 그들의 기억이 아니라 상상력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첫 인터뷰에서는 시각화 훈련을 한 후라도 참여자들이 그 사건의 세부 사항을 당연히 알지 못한다. 이 시점에 나는 그들을 집으로 보내면서, 연구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 것, 집에서 그 기억을 시각화하도록 노력할 것, 일주일 후에 다시 올 것 등의 지시사항을 전한다.
- 7단계: 일주일 후 참여자들이 연구실에 오면 나는 그들에게 진짜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그런 다음 가짜 사건에 대해 물어본다. 이 시점에서 많은 참여자들이 그 사건을 '기억하고' 그에 관한 상세한 내용들을 보고한다. "이파리들이 떨어지고 있었어요. 하늘은 파랗고, 나는 CD를 한 장 훔쳤어요. 나를 놀리는 여자애를 때렸어요. 경찰은 갈색 머리였어요." 나는 잘하고 있다며 그들을 격려한다. '정적 강화(positive reinforcement)'라고 하는 기법이다. 시각화 훈련도 되풀이해 진짜 기억이라고 착각할 만한 세부 내용들을 더 많이 상상하게 만든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다시 집으로 보내며, 좀 더 많은 세부 사항들을 떠올리도록 노력하라고 말한다. 다시 일주일 후 세 번째 인터뷰에서 그 과정을 마지막으로 반복한다. 진짜 기억을 회상한 다음 시각화와 함께 거짓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다.
- '나는 안 당할 거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통계를 보면 그렇지 않다. 이 연구에서 70퍼센트 이상의 참여자들이 범죄나 감정적 사건에 대한 완전한 거짓 기억을 만들어냈다. 내가 완전한 거짓 기억을 정의할 때 사용하는 기준이 몇 가지 있다. 예를 들어 참여자가 사건과 연관된 세부 사항을 열 가지 이상 말해야 하고, 연구가 끝난 후 우리가 연구의 진짜 목적을 설명할 때 그 거짓 사건을 실제 사건으로 믿었다고 말해야 한다. 참여자들이 우리에게 하는 이야기들은 대부분 아주 상세했다.
(리뷰자 주 : 심상화, 시각화 기법에서 말하는 '스스로 믿을 때까지' '선명하게' 기억하는 연습은 실제로 가능한 것이었다. 단지 그 시점을 미래로 두는 것이다.)
- 나는 동일 인물이 처음엔 진짜 기억을, 그다음엔 거짓 기억을 회상하는 장면을 각각의 참여자에게 보여주었다. 두 영상을 보는 동안 참여자들은 어느 쪽이 진짜 기억인지, 또 어느 쪽이 거짓 기억인지 분간해내지 못했다. 이는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에게 진짜처럼 느껴지는 기억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진짜처럼 보인다는 증거일 수 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든 아니든 그 기억들이 개인적인 과거의 일부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 참여자들 중 27퍼센트는 자기의 기억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인지 확실치 않은 기억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 스패로와 동료들은 정보를 나중에 언제든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 기억하려는 노력을 덜 하게 돼 나중에 그것을 기억하는 확률도 낮아진다고 주장한다.
- 거짓 기억 연구의 반대자들은 우리가 피해자들을 침묵시키고 죄인을 옹호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런 우려가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정신적 외상이 될 만한 사건을 겪은 사람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면 끔찍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거짓 기억이 정말 존재하고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경험적 증거가 있는 한 무고한 사람을 부당한 판결로부터 지켜주기 위한 노력 역시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분명 아주 민감하고 난해한 문제지만 거짓 기억이라는 개념 자체를 아예 무시하고 못 본 척하는 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치열한 고민이 필요한 문제다.
- 내가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정확한 연구 방식을 알고 싶어 한다. 본문에서 설명하겠지만 세뇌나 고문, 최면술 같은 수법을 쓰지는 않는다. 심리적·생리적 구조 때문에 우리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사건들도 자신만만하고 생생하게 기억해낼 수 있다. 이 책에서 나는 기억의 기본 원리를 설명하면서 우리가 무언가를 망각하거나 기억하는 생물학적 원인들을 파고드는 동시에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고 기억하는 방식에 사회적 환경이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설명할 것이다. 또 자아상과 기억이 서로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하고, 기억이 할 수 있는 일에 관한 우리의 이해나 오해에 대중매체와 교육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도 설명할 것이다. 그리고 기억이 얼마나 오류를 일으키고 변질되고 잘못 해석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흥미진진하면서도 믿기 어려운 사례들을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이 책이 철저한 연구서라고 할 수는 없지만 관련 과학에 관한 기초 지식을 다지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과 스스로를 과연 제대로 알고 있는지 한 번쯤 의심해보길 바란다.
- 연구자들은 각각의 참여자에게 그들 부모로부터 알아낸 진짜 사건에 대해 묻고 난 후, 가짜로 지어낸 화채 그릇 사건을 물었다. 각 기억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주고 사건의 생생한 이미지를 떠올려 기억에 접근해보라고 했다. 눈을 감고 그 사건을 상상하며, 당시의 사물과 사람들, 장소를 머릿속에 그려보라고 조언했다. 연구자들은 참여자들을 일주일 간격으로 세 번 불러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했다. 실험 결과는 놀라웠다.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반복적으로 상상하고 그 상상을 소리 내 말한 것만으로도 참여자의 25퍼센트가 화채 그릇을 쏟은 사건을 명백한 거짓 기억으로 갖게 되었다. 12.5퍼센트는 연구자들이 제공한 정보를 상세히 설명하면서도 실제로 화채를 쏟은 기억은 없다고 주장했다. 즉, 다수의 사람들이 세 번의 짧은 상상 후에 그 사건이 실제로 벌어졌다고 생각했고, 그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지 정확히 설명해냈다.
- 이처럼 기존 믿음에 위배되는 새로운 증거가 나와야지만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음을 깨닫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기억을 꼬치꼬치 따지지 않는다. 우리의 메타기억이 방심한 틈을 타서 허구의 기억 파편들이 슬그머니 들어온다. 이런 경우에는 메타기억을 적극적으로 사용해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 가능성이 낮거나 아예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몰래 들어온 거짓 기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처럼 메타기억은 고맙게도 우리가 사실과 허구를 판별할 수 있게 도와주지만, 허점도 갖고 있다.
- 청색-황색 비대칭이라는 현상인데, 표면의 실제 색이 노란색이나 빨간색, 초록색일 때보다 푸른 색조를 띠고 있을 때 이 푸른 색조가 회색이나 흰색으로 지각될 확률이 훨씬 더 높다는 것이다. 사람들 대부분이 푸른 색조를 보면 사물 자체보다는 하늘과 같은 광원에서 비롯된 색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원피스의 경우엔 그 색깔들이 조명의 산물 아니면 천의 실제 색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높았다.
- 베빌 콘웨이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번 원피스 논란은 뇌가 애매모호한 상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처럼 저마다의 사고 모델에 따라 삶의 패턴을 다르게 경험하는 원리에 과학계의 관심이 뜨겁다. 그동안 우리는 누구나 같은 사고 모델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덧붙여 아직 궁금증을 풀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정답을 밝히자면 그 원피스는 검은색과 파란색이었다.) 원피스 논란이 일면서, 만인 공통인 것 같은 지각 시스템을 통해서도 세상을 각자 다르게 보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물론 시각뿐만 아니라 다른 유형의 지각들에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 사실 인간에게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감각들이 있다. 오감만 존재한다는 통념이 오래전부터 끈질기게 이어져왔지만, 이는 우리의 몸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 물론 우리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일이 거의 없고 대개는 자신의 시간 지각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비교적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시간을 알려주는 마법의 시계 같은 것이 우리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좋아하지 않는 과제를 할 때 시간이 굼벵이처럼 기어가는 듯한 상황이나 몹시 신이 나면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3차원을 넘어서서 4차원이라 언급되기도 하는 시간은 기본적으로는 내적 현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 직선적이고 연속적이며 변화하고 커지거나 파괴된다. 이러한 우리의 주관적인 시간 지각을 '크론에스테시아'라고 하며, 신경생리학, 심리학,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분야들은 기억이 우리의 시간 지각 능력에 꼭 필요하다는 그다지 놀랍지 않은 사실을 증명했다.
-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런 이유 때문에 곤충들과 여타 동물들,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는 공통된 인지적 특징들이 많이 나타난다. 그러니까 벌들만 이런 오류를 범할 리 없다. 헌트와 치트카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체계적인 기억 오류는 동물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 다양한 자극에 대한 '기억 흔적'들이 '결합될' 수도 있다. 즉, 훈련 시간에 학습한 특징들이 머릿속에서 합쳐지는 것이다. 그래서 기억을 떠올리면, 전에는 본 적 없지만 훈련에서 마주쳤던 특징들이 결합된 형태를 선택하게 된다." 그러므로 기억이 뒤죽박죽으로 뒤섞이는 현상은 종을 가리지 않고 모든 생물에게서 일반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 벌 연구자인 헌트와 치트카는 이렇게 말한다. "거짓 기억들이 어디에나 퍼져 있는 걸 보면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정확한 기억력이 생존에 유리했을 텐데 그런 구조적 결함이 어떻게 진화의 시간을 견뎌내고 지속될 수 있었을까? 기억 오류는 우리 기억의 적응력이 높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겨나는 부산물일 것이다." 이를테면 벌들이 과거에 꿀을 얻었던 꽃을 헷갈리는 것도 나쁜 일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기억이 뒤섞인다는 건 뇌가 변하고 학습하고 추론한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가끔의 실수는 그에 대한 작은 대가라 생각하면 된다. 이 같은 뇌의 적응력을 '신경 가소성(neuronal plasticity)'이라 부르는데, 우리가 기억이라는 걸 할 수 있는 것도 오로지 이 신경 가소성 덕분이다.
- 미셸 보드리는 생화학적 측면에서 기억을 파고들어 우리의 이해를 크게 진척시킨 저명한 연구자다. 2011년 그가 이끄는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연구진은 25년 넘게 진행한 연구의 결과를 발표하면서 기억의 생화학적 원리를 두 가지로 요약했다. 장기 강화 작용과 칼슘 의존성 프로테아제인 칼페인의 영향이다. 보드리와 연구진의 연구에 따르면, 시냅스가 기억과 관련된 지속적인 변화를 견달 수 있는 이유는 뇌 속의 단백질 덕분인데, 이 단백질을 활성화하려면 칼슘이 필요하다. 기억들의 연합(이를테면 '공원'과 '나무들')처럼 뉴런들 간의 연결이 반복적이거나 강하게 활성화되면 바로 그곳에서 칼페인이 활성화된다. 이 칼페인은 시냅스의 구조를 바꿔놓는데, 그러고 나면 뇌에서 활성화된 기억 세포들이 더욱 강하게 연결된다. 칼페인이 찾아와야 단순한 경험이 지속적인 기억으로 변하는 것이다.
- 프리온에 대한 평판이 워낙 나빴기에 캔들은 프리온이 기억 형성에 작용하는 중요한 역할을 설명하기 전에 "신이 프리온을 창조한 건 그저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서일까요?"라는 말로 선수를 쳐 사람들의 부정적인 반응을 미리 막기도 했다. 기억 형성에서 프리온이 하는 주된 역할은 장기 기억을 만들어내는 시냅스를 안정시켜, 장기 강화 작용과 칼페인 유입으로 이미 벌어진 물리적 변화에 영속성을 더하는 것이다. 칼페인이 통신의 흐름을 계획하는 시냅스의 설계사라면 프리온은 그 변화를 좀 더 영속적으로 만드는 공사장 인부들이다. 하지만 한 번 맺은 연결이 영원하리란 법은 없다. 칼페인과 프리온이 언제든 돌아와 한번 더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다.
- 이때 눈여겨볼 점은 쥐들이 기억을 떠올리는 동안 아니소마이신이 주입될 때에만 연상 기억을 잊었다는 사실이다. 충격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음을 들려주지 않은 채 아니소마이신만 단독 주입했을 때에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이 결과는 약물 자체가 기억을 없애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보다는 뇌에서 활성화되는 기억과 약물 사이에 어떤 상호작용이 이루어져 기억이 지워진다고 판단할 수 있다. 장기 기억을 떠올리는 동안 혹은 그 직후에 단백질 합성 억제제를 주입하면 기억의 재응고화가 정지된다. 요컨대 기억이 뇌에 더 이상 저장되지 않는 것이다. 이 현상은 오늘날 가장 유행하고 있는 생화학적 기억 이론인 '인출 유도 망각(retrieval-induced forgetting)'으로 이어진다. 인출 유도 망각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기억할 때마다 망각한다. 어떤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그것이 응고되고 더 강해지고 더 정확해지는 것처럼 느끼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얘기다.
- 오키프와 동료들은 쥐들이 뇌에 전선을 단 채 주변을 탐색하는 동안 특정 장소에서 어떤 세포가 활성화되는지 주목했다. 특정한 장소들을 저장한 세포들을 확인하고 난 후에 그 세포들을 추적 관찰할 계획이었다. 나중에 쥐들이 잠들자 연구진은 쥐들이 꿈을 꾸는 동안 장소 세포들이 자발적으로 활성화되기를 기다렸다. 쥐들이 특정한 장소에 대한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안 연구진은 쥐들의 쾌락 중추에 전기 충격을 주었다. 그 결과 특정한 장소와 연관된 장소 세포들이 긍정적인 감정과 연결되면서 인위적인 기억이 만들어졌다. 쥐들의 행동이 이 실험의 성공을 증명해주었다. 잠에서 깨어나자 쥐들은 행복하다고 지각된 장소에서 시간을 더 보내려 했다. 실제로 그곳에서 좋은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말이다. 뇌의 물리적 구조가 변화해 거짓 기억이 형성된 것이다.
- 과잉기억능력은 자신과 상관없는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고 기억하는 초기억력과는 다르다. AJ는 자신의 인생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비범하게 잘 기억하면서도 그 외의 정보를 기억해내는 능력은 그만큼 뛰어나지 않았다. 반면 초기억력을 가진 자들은 그런 과제에 탁월하고 숫자와 사실들을 웬만해서는 잘 잊지 않는다. 초기억력자들의 뛰어난 기억력은 타고난 능력이 아니라 연습을 통해 기억 전략을 습득한 결과라는 것이 현재의 중론이다. 그들과 달리 자신과 관련된 일에 한해서만 뛰어난 기억력을 보여주는 AJ는 다른 종류의 정보를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전략을 의식적으로 사용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 이젤에 낯선 그림을 올려놓고 참여자들에게 30초 동안 보여준다. 연구자들은 이 30초를 '무한 관찰 시간'이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똑같은 그림을 30초간 본 후에는 더 이상 세부 내용을 기억하기 위해 부호화하지도 않고 집중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한번 시도해보라. 단 하나의 이미지를 보고 있으면 30초가 정말 길게 느껴진다. 30초 후 그림을 치우고 나서 참여자들에게 이젤을 계속 보게 한다. 그런 다음 그림에 관해 기억나는 모든 사항을 얘기해보라고 한다. 직관적 기억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직도 그 그림이 보인다고, 그림이 아직도 자기 앞에 있는 것처럼 그 이미지에 대한 기억을 훑고 음미할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방금 치운 그림을 설명할 때 대개 현재 시제를 사용해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이야기한다.
- 어떤 특정 장면의 완벽한 엔그램은 누구나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서번트들의 기억은 HSAM들의 기억과 완전히 반대인 것처럼 보인다. HSAM들은 자신의 인생은 아주 잘 기억하면서도 다른 유의 기억에서는 그다지 특출한 능력을 과시하지 못하는데, 서번트들은 자전적 기억력은 떨어지는 것처럼 보여도 그 외의 사실들과 정보는 기가 막히게 잘 기억한다. HSAM들은 거의 전적으로 개인적인 일만 기억하는 반면 서번트들이 기억하는 건 거의 전적으로 비개인적 인일이다. 말하자면 두 그룹은 비상한 기억력의 음과 양인 셈이다. 한 유형의 비범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으면 다른 유형의 비상한 기억력은 가질 수 없는 걸까? 혹은 인지 자원의 양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의 뇌가 모든 부분을 기억하기에는 역부족인 걸까?
- 게다가 우리의 기억은 잊도록 설계되어 있다. 망각은 뉴런 연결을 깔끔하게 손질해 뇌가 가장 중요한 정보만 저장할 수 있게 해주는 멋진 메커니즘이다. 망각의 아름다움을 깨달으면, 모든 것을 기억하는 능력이 특별한 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크나큰 부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 그 결과는 어땠을까? 우리가 잠든 사이에 새롭고 복잡한 정보를 학습하거나 강화할 수 있다는 가설을 뒷받침해줄 만한 증거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역설 수면 동안 냄새에 다시 노출된 참여자들의 기억력은 더 나아지지 않았다. 잠재 학습 옹호자들이 주장하듯이 우리는 잠든 사이에 새롭고 복잡한 정보를 학습하거나 기억을 크게 강화할 수 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잠든 동안 단어나 사실을 습득한다거나 자기 계발 장치로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 최면? 기억의 과학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내 생각은 그대로다. 최면이라는 것은 없다.
- 이런 종류의 잠재의식적 효과들은 아직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고 항상 재검증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점화(priming)라는 또 다른 기역 현상을 그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점화는 '암묵 기억'의 한 기능으로, 이 과정을 통해 우리의 이전 경험들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현재나 미래의 경험에 영향을 미친다. 암묵 기억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억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형태의 기억이다. 시각적· 청각적 · 촉각적 표상이 아니라 인상이나 느낌에 가까운 좀 더 원시적인 종류의 기억이다.
- 이 장의 내용을 요약해보자. 기억을 만들어내려면 일정 형태의 주의력이 필요하고 수면은 그런 기억을 견고하게 굳히고 강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지능을 높여주는 영아 교육용 비디오들, 수면 학습, 최면, 잠재의식 메시지들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창작 소설에 불과하다.
- 에든버러 대학교의 도미닉 존슨과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제임스 파울러는 2011년 <네이처>에 발표한 논문에서 "인간은 수많은 심리적 편향을 갖고 있지만 그중 가장 일관되고 강력하며 만연해 있는 것은 과신"이라고 썼다. 과신의 이유 중 하나는 '우월 착각(superiority illusion)'일 것이다. 우월 착각이란 자신의 장점을 과대평가하고 부정적인 면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을 말한다. 이는 본질적으로 기억과도 연결된다. 자신의 장점을 생각해내려면 자신이 살면서 했던 좋은 일들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집안일을 했던 시간들을 떠올리면서 자신이 정말 좋은 배우자라고 생각한다. '내가 쓰레기를 치우고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했잖아.' 하지만 집안일을 하지 않고 배우자에게 더 많은 일을 떠맡겨서 불만을 샀던 기억은 잊어버리거나 축소해서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 실험 결과 백인 피험자는 얼굴을 볼 때 대체로 삼각 패턴을 사용했다. 눈, 입, 코를 본 후에 다른 부위로 넘어갔다. 동아시아인 피험자들은 패턴이 달랐다. 중앙에 집중해서 주로 코를 보았다. 사진 속 인물의 인종에 상관없이 똑같은 패턴을 보였다. 연구진은 그 원인을 문화에서 찾았다. "다른 사람과 직접적이거나 과도하게 눈을 마주치는 행동은 동아시아에서 무례하게 여겨질 것이고, 이런 사회 규범 때문에 동아시아인 관찰자들에게 시선을 회피하는 경향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 한편 특정 문화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특성들에 초점을 맞춰 얼굴을 구별하는 전략도 있다. 예를 들어 서양 백인들은 눈동자 색을 암호화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인다. 하지만 백인이 아니라면 눈동자 색깔로 사람을 구분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근원적인 이유가 뭐든 간에 이 연구는 피험자들이 얼굴을 구별할 때 문화적인 요인에 영향을 받으며, 그래서 낯선 얼굴을 보거나 식별할 때 엉뚱한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적어도 블레 팀의 주장에 따르자면 얼굴의 특정 성질에만 과도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자기 인종 편향의 주된 이유처럼 보인다. '엉뚱한' 특성에 집중하면 상대의 생김새를 식별하고 기억하기가 더 어려워지는데, 자신과 다른 인종일 경우에는 그럴 확률이 더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는 얼굴뿐만 아니라 다른 면모에도 적용된다. 예를 들어 머리카락 색깔이나 키가 별로 다채롭지 않은 인종의 경우 이특 성들을 암호화하는 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 그 사건을 담당하고 있던 한 형사가 내게 연락을 해서는 내가 수사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얘기해보자고 했다. 나는 기쁘기도 하고 감동받기도 했다. 좀처럼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학자들이 돕고 싶어 하는 바로 그 전문가들이 우리에게 선뜻 손을 내미는 경우는 흔치 않다.
- 경찰이 유죄 판결을 받아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큰 만큼 그런 실수를 저지를 확률이 더 높지 않을까 싶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범죄든 일상적인 일이든 어떤 사건에 대한 진짜 기억이나 정확한 설명을 식별하는 문제에 관한 한 우리 모두 불완전한 탐정들이다. 우리 모두 기억 오류나 과신의 늪에 쉽게 빠질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확신은 문제 해결의 열쇠가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내게 지나친 확신은 오히려 경고 신호처럼 보인다. '이 사람은 자신의 편향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라는 경고, '이 사람은 기억의 허점과 결점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라는 경고, '이 기억은 너무 선명해서 오히려 믿기 어렵다'라는 경고, 나는 자신의 기억에 자신만만한 사람들을 보면 그들에게 매우 신중하게 접근한다. 과신은 파멸적인 결과를 볼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 또한 외상 기억론은 사람들이 아주 감정적인 사건을 겪는 동안 해리(dissociation) 장애가 일어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해리'라는 단어는 여러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세상이 진짜가 아니라고 느끼는 현실감 상실(derealization)이나 자기 자신이 진짜가 아니라고 느끼는지 인증(depersonalization) 같은 증상을 의미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아주 감정적인 사건을 겪는 동안 자신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거나 그런 사건 후 비현실감이 지속될 때 해리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 이처럼 특정 기억이 부정확하거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는 과정을 '회상 거부(recollection rejection)'라고 한다. 코넬 대학교의 찰스 브레이너드와 동료들이 2003년에 만들어낸 용어다. 이런 식으로 기억을 거부하는 사례들에서 놀라운 점은 그 기억이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일이 벌어졌다는 확신이 크게 줄어들거나 완전히 없어질 뿐이다. 하지만 대개는 우리의 기억과 모순되는 증거를 만나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그 이야기들이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더라도 개인적인 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외상 기억들은 우리가 직접 경험했거나 경험했다고 생각하는 사건들에 대한 터무니없이 잘못된 정보가 통합될 가능성이 있다. 감정적으로 아주 강렬한 기억도 완전히 거짓일 수 있다. 내가 이런 사실을 아는 이유는 우리의 가장 생생한 기억조차 말썽을 부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연구자인 나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원래 시각적으로(혹은 다른 감각으로) 암호화되었던 정보를 언어 정보로 옮긴다. 감각으로 유입되는 정보를 말로 바꾸는 것이다. 하지만이 과정은 완벽하지 않다. 이미지나 소리, 냄새를 받아들였다가 그것을 말로 표현할 때 우리는 정보를 고치거나 잃어버린다. 언어를 통해 전달할 수 있는 상세한 정보의 양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생략하고 단순화한다. 이 과정을 '언어의 그늘(verbal overshadowing)'이라 하는데, 심리학자 조너선 스쿨러가 만들어낸 용어다.
- 얼굴 생김새를 말로 자주 표현할수록 더 잘 기억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범인의 사진을 골라내는 과제에서 범인의 얼굴 생김새를 글로 적었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나쁜 성적을 거두었다. 한 실험에서는 범인의 얼굴을 글로 묘사한 참여자들 가운데 27퍼센트만이 범인의 사진을 제대로 골라낸 반면 글을 적지 않았던 참여자들은 61 퍼센트가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차이가 엄청나다. 말로 쉽게 표현할 수 있는 특징들만 계속 되새긴 참여자들은 원래 가지고 있던 시각 기억의 중요한 세부 요소들을 무시하게 되어 기억에 접근하기가 더 어려워지는 이치다.
- 간단히 말하면 기억력을 높이려는 그릇된 시도가 오히려 기억에 해를 끼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언어화가 항상 나쁜 건 아니다. 스쿨러의 연구에 따르면 단어장이나 진술처럼 원래 언어의 형태로 되어 있는 정보는 언어화를 해도 기억하는 데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더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한다.
- 그 결과 사건을 상상하기만 한 참여자들은 45퍼센트가 거짓 기억을 떠올린 반면 사건을 상상하면서 옛 친구들의 진짜 사진을 본 참여자들은 무려 78퍼센트가 거짓 기억을 만들어냈다.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고 있는 참여자들에게 사진을 보여주자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기억을 만들어낼 확률이 훨씬 더 올라간 것이다. 참여자들은 거짓 이야기도 진짜 사진들에 엮어 넣으니 실제 사건처럼 받아들였다. 사진이 고의적인 거짓 정보와 짝을 지으면 우리의 기억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다. 언어의 그늘 효과가 생기는 원인과 비슷한 이유 때문이다. 우리가 사진을 보면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기억이 실제로 경험한 (혹은 경험하지 않은) 사건에 대한 기억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 그 사건을 생각할 때 사진을 본 기억과 실제 경험이 잘 분간되지 않아 원래의 시각 기억이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뀌어버릴지도 모른다. 감정적이든 아니든, 언어적이든 시각적이든 기억은 언제든 조작될 수 있다.
(리뷰자 주 : 나는 일상적인 꿈에서 본 이미지와 섞일 경우 이런 현상을 겪은 적이 있는데, 내가 물어보는 행위 자체로 인해 상대방에게도 같은 거짓 기억이 유도될 수도 있으므로 조심스럽다. 해서 굳이 확인이 필요하지 않지만 검증이 어려운 기억인 경우 신뢰성을 낮춰둔다.)
- 하지만 나는 이 기법의 거의 모든 부분에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다. 이 기법의 문제는 기억의 과학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선 이런 집단 회상 상황에서 사람들의 기억은 좋든 싫든 서로 뒤섞이기 마련이다. 언어의 그늘 효과 때문에 자신의 이야기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 모두가 기억에 영구적으로 새겨진다. 우리가 듣는 모든 새로운 이야기가 우리의 기억을 오염시킬 수 있다. 이런 염려를 하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다. 멜버른 대학교의 그랜트 데블리와 피터 코튼이 2003년에 발표한 학술 문헌 검토서에 따르면 위기 상황 스트레스 해소법은 해로운 결과를 낳을 수 있고 심지어는 참여자에게 간접적인 외상까지 입힐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어떤 사건에 대해 듣고 나서 정신적 외상과 비슷한 유해한 증상을 경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A와 B 모두 같은 사건을 겪었는데 A는 B가 보지 못한 끔찍한 장면을 목격했다고 해보자. 집단 상담에서 A는 당시의 상황을 상세하게 전하고 그 장면의 끔찍한 여파를 설명한다. 나중에 B가 그 사건을 생각하면 자신의 이야기뿐 아니라 A가 들려준 무시무시한 내용까지 떠오른다. B는 그 불행한 기억의 단편을 나눠 받지 않는 편이 더 좋았을 것이다.
(리뷰자 주 : 마음공부를 하시는 분들이 사건 사고 뉴스 영상을 가급적 보지 않으려고 하시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일 수도 있겠다. 여러 사람에게서 기억과 상상이 강화된다는 건 영향력이 있을 수 있다.)
- 밀러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멀티태스킹이라고 생각하는 상황은 사실 '작업 전환(ask-swiching)'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린다고 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멀티태스킹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한 작업에서 다른 작업으로 아주 빨리 넘어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마다 우리의 인지력은 손해를 입는다." 따라서 우리가 일을 더 빨리 하고 있는 것처럼 느낄 때에도 실은 뇌에 엄청난 부담을 주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밀러와 부슈먼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순간순간 다른 뉴런들이 동시에 진동하기 때문에 앙상블은 근본적인 뉴런 네트워크의 물리적 구조를 바꾸지 않고도 형성과 해산, 재형성을 유연하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앙상블은 구성의 유연성이라는 중대한 특징을 갖게 된다." 우리의 뇌는 한 가지 복잡한 생각에서 다른 생각으로 대단히 매끄럽게 넘어간다. 뉴런들이 특정 주파수의 전기 신호로 함께 활성화되면, 물리적으로 어떻게 결합되든 상관없이 동시성을 필 수 있기 때문이다. 밀러와 부슈먼은 이를 "뉴런들이 함께 콧노래를 부른다"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뉴런들 사이의 즉각적이고 일시적인 연결을 통해 사고하는 이런 능력 때문에 오히려 진정한 의미의 멀티태스킹이 불가능하다. 우리의 뇌는 신경 네트워크의 결합과 재결합을 거의 동시에 할 수 있지만, 이런 정신적 유연함은 한 번에 한 가지 일밖에 할 수 없게 한다. 똑같은 뉴런들이 동시에 다수의 앙상블을 형성할 순 없다. 그러려면 다른 파장을 동시에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합창단 단원들은 모두 악보의 같은 페이지를 불러야 한다.
- 반면 뇌의 다른 두 영역에게 동시에 일을 해달라고 부탁하는 건 가능하다. 크리스와 애덤에게 한 가지씩 맡기면 된다. 그러면 두 사람이 가끔은 서로 얘기를 주고받으며 진행 상황을 챙겨야 하니 일의 속도가 떨어질 수는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그들은 두 가지 과제 모두 제법 훌륭하게 해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의식적인 과정과 무의식적인 과정이 동시에 일어날 때 생기는 일이다. 의식적인 크리스는 생각과 판단에 능숙하고, 무의식적인 애덤은 운전하기나 걷기처럼 우리가 거의 습관적으로 하는 일에 능숙하다. 하지만 작업 전환의 위험성에 관한 연구를 보면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과제들이라 할지라도 주의력을 두 갈래로 나누는 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한다.
- 브라운의 연구는 기억 도둑질이 들킬 때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참여자들 가운데 53퍼센트는 누군가가 그들의 사연을 자신의 이야기인 양 얘기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다고 말했고, 57퍼센트는 어떤 사건을 두고 서로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이라며 누군가와 다툰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런 종류의 기억 도둑질은 특히 가족 사이에 많이 일어나는 듯하다. 그래서 가끔 나는 과거에 실제로 일어난 일에 관해 가족에게 확인하려다가 그만두곤 한다. 기억이 전염되는 것은 분명하다. 내가 한 가지 기억을 뱉으면 누군가가 그걸 붙잡아 자기 기억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사건을 다시 이야기할 때 다른 출처에서 나온 내용을 뒤섞으면 부정확한 세부 사항들까지 포함될 수 있다. 2001년에 발표된 한 논문에서 워싱턴 대학교의 헨리 뢰디거와 동료들은 이에 걸맞은 용어를 만들어냈다. '기억의 사회적 전염(Social contagion of memory).' 그들은 한 사람의 기억이 다른 사람의 기억 오류에 영향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일종의 거짓 기억 증식 효과다. 이런 현상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연구자들은 두 가지 요인을 꼽는다. 첫 번째 요인은 기본적인 기억 왜곡이다. 어떤 사건에 관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의 뇌가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내 우리의 원래 기억을 방해할 수 있다. 이는 앞서 논했던 오정보와 상상에 의한 기억 변질에 관한 연구 내용과도 일치한다. 두 번째 요인은 출처 혼동이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정보의 출처를 잊어버리면 남에게 들었던 일을 자기가 경험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 예를 들어 '2003년 2월, 우주왕복선 컬럼비아호가 텍사스 상공에서 대기권 재돌입을 하다가 폭발했다'라는 문장이 '사실', '자료', '정보', '이름', '아이템', '요점'이라는 이름의 폴더들 중 하나에 저장되었다고 알려주었다. 나중에 문장들을 기억해서 적어보라고 했더니 참여자들은 문장들의 내용보다 문장들이 '어디에' 저장되었는지를 더 잘 기억했다. 그러나 문장과 그것이 저장된 폴더를 모두 기억하는 데에는 유독 서툴렀다. 문장을 기억하면 저장 장소를 기억하지 못하고, 문장을 기억하지 못하면 저장 장소를 잘 기억했다. 우리의 뇌는 인지적 구두쇠인 모양이다. 문장 자체 아니면 그걸 다시 찾을 수 있는 장소 중에 더 기억하기 쉬워 보이는 정보만 골라내는 것을 보면 그렇다. 스패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컴퓨터 도구들과 공생하기 시작하면서, 정보 자체보다는 정보를 찾을 수 있는 곳을 잘 기억하는 상호 연결 시스템이 만들어지고 있다."
(리뷰자 주 : 내 경우에는 그걸 위해 발췌문들을 기록해두고 있다. 다만 블로그 내 검색이 정확히 되지 않는 것 같아 좀 아쉽다.)
- 스패로는 이런 전망을 내놓았다. "대학 교수든 의사든 기업 경영자든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암기보다는 개념과 사고방식을 이해시키는 데 점점 더 전념하게 될 것이다." 학생들이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특정한 세부 정보를 전하는 데 집중하기보다는 검색이 불가피할 때 높은 질의 정보를 찾고 그것을 분석하는 방법을 알 수 있도록 비판적인 사고를 가르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정보를 나중에 다시 찾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우리가 정보를 암호화하고 기억하는 방식이 달라진다. 갈수록 높아지는 미디어 의존도가 우리 기억의 질에 미치는 영향은 이것 말고도 또 있다.
- 이런 연구 결과들이 의미하는 바가 뭘까? 앞서 말했듯이 함께 기억하는 건 아주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기억을 남들과 나누는 상황에서 우리는 기억을 훔치거나 왜곡하거나 완전히 새롭고 복잡한 거짓 기억을 만들어낼 수 있다. 브레데벨트 같은 연구자들은 기억의 가소성이라는 문제에 동의하면서도, 거짓 기억을 만들고 오류를 범할까 봐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들도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상대를 아주 잘 알거나 혹은 힘을 합쳐 기억 복구 전략을 사용한다면 기억 오류의 위험을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연구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는 알 수 없다. 함께 기억하는 것의 이점은 아직 상세하고 깊이 있게 연구되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과 함께 할 경우에도 이런 긍정적인 상황을 재현할 수 있을지, 아니면 사건을 함께 목격하고 기억하는 것은 무조건 기억 왜곡이라는 해로운 결과로 이어질지 확실치 않다. 현재로는 오염되지 않은 기억들이 사회적 과정으로 변질되기 전에 종이에 적어두는 것이 좋다는 걸 알아두면 된다. 나중에 접근할 수 있는 곳에 기억을 기록해둔 다음 다른 사람들과 그 기억을 나누어도 좋을 것이다. 친구들과 가족들이 우리의 기억에 도움이 될 수도 있고 방해가 될 수도 있음을 알고 경계하기만 하면 된다.
- 대중적인 기억술이 또 하나 있으니 바로 기억의 궁전(memory palace)이다. '장소법(method of loci)'이라고도 불리는 기억의 궁전은 우리가 이미 기억하고 있는 어떤 장소를 기반으로 연상을 구축하는 것이다. 우리의 궁전으로 삼을 한 집의 정확한 공간 배치와 각 방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 강렬한 기억을 형성한 다음 그곳을 진짜 기억의 저장장소로 삼는 것이다. 말하자면 진짜 기억을 저장할 수 있는 가상의 기억 세계를 가지는 것과 비슷하다. 가상 세계로 들어가 그 안에 물건들을 두는 것이다. "이 기억은 당분간 여기 둬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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