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모건 스콧 펙 / 최미양
원제 : The Road Less Traveled: A New Psychology of Love, Traditional Values and Spiritual Growth
출판 : 율리시즈
출간 : 2011.02.25
'사다리를 통해야만 천국으로 갈 수 있지만, 사다리를 버리면 어디에나 갈 수 있다.'
이런 계열 책들을 조금 읽다 보니 정신, 심리 쪽과 영성 쪽을 명확히 선을 그어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미묘한 경계에서 각자가 원하는 선에 맞추어 읽게 되는 게 아닐까. 정신과 의사인 저자가 자신의 심리 치료 경험담들을 토대로 크게 4부로 나뉘어진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굉장히 매끄럽게 읽히는데, 마침 시기가 좋았던 건지 책 자체의 문장이 편했던 건지 판단이 어렵다.
1부 훈육의 내용은 부모로서 자식을 대할 때 명확히 해둬야 할 방침이자 가치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스스로를 훈육할 때도 필요한 내용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큰 영향력을 가지는 것은 맞지만, 부모만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쉽지는 않은 일이지만 스스로가 스스로의 부모가 되어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한 정도라면 심리 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2부는 모든 것의 기반이 되는 것은 사랑임을 설명한다. '사랑'의 정의부터 가다듬고 시작하는데, 저자가 말하는 '사랑'은 감정의 일종이나 에로스적인 열정이 아니다. 스스로를 성장시키고 확장시키고자 하는 열망에 가까운데, 그것이 자신만이 아닌 모두를 위한 것이 될 때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는 종교에서 설파하는 사랑에 가깝다.
바로 이어서 3부 종교, 그리고 4부 은총으로 연결되는데 저자가 말하는 은총은 공시성과도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소제는 그렇지만, 저자가 종교적으로 접근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심리적 문제와 그 극복에 있어서 종교가 미치는 영향을 긍정적인 시각과 부정적인 시각 모두 다루는데, 저자는 각자의 단계와 상태에 따라 선택할 일이지 절대적인 답이 있지는 않다고 말한다. 개인적으로는 종교가 스스로에게 심리적 부채를 안겨줄 경우, 의식하건 하지 못하건 무의식 속에 죄책감과 지옥을 스스로 만들어 갇히지 않도록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종교의 가르침은 대체로 인간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가고자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준에 따라 오히려 체벌과 족쇄, 심지어는 퇴보를 일으킬 수 있지 않나 한다. 후나 철학에서 말하는 낮은 자아로 인한 사로잡힘과 악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읽테기가 가볍게 왔다 갔는데, 다시 안정기로 돌아오는 듯하다.
컨디션이 괜찮을 때는 어떻게든 붙잡고 늘어지면 완독이 가능한데, 상태가 안 좋을 때는 수월하게 흐름을 타는 책이 아니면 쉽게 포기하게 된다. 흐름을 타는 기준은 그때그때 달라서 딱히 문장이나 내용으로 구분 짓기 어렵다. <아직도 가야 할 길> 같은 경우는 앞서 3-4권의 책을 중도하차한 끝에 겨우 만난 잘 읽힌 책이다.
대상포진이 올해만 세 번 터졌다. 첫 번째 때 포진일 거란 생각도 못해서 된통 고생한 다음에는, 수포가 하나 둘 올라오면 바로 보양 스케줄로 와신했더니 다행히 바로바로 정리되었다. 한계점이 쉽게 오는 대신, 막상 그 지점을 넘어서면 체감 피로에 둔감해 잘 버틴다. 해서 신체적 증상이 나타나지 않으면 자가 체크가 잘 안 되는 편인데, 덕분이라면 덕분에 더 큰 탈이 나기 전에 잘 조절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코로나 시기에 근무와 여타 활동들을 병행하다 보니 나름대로는 체력의 한계를 갱신하고 있다. 내년에는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는 체력을 만들기 위해(게으름을 부려 못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힘이 모자라는 사태는 벗어나기 위해) 운동도 시작했다.
결론적으로는 이런 경험을 통해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현재 나이에 맞춰 다시 지도를 그릴 수 있었으니 얻은 점이 있다. 다만 한 번씩 루틴이 망가질 때마다 나태의 유혹이 찾아온다는 게 문제다. 이제 다시 결심의 시즌인 연말 연초가 다가오니, 잘 정돈된 '일상'의 루틴을 지켜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겨울에는 원래 골골대기 때문에 더 유의해서 현실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다.)
최근의 1년여 동안을 돌아보면 많은 것들이 변한 것 같기도 하고-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기도 하다. 상당히 미묘한 기분이다. 나름대로는 당시보다도 더 의미 깊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변하고 있는 방향이 어떤 쪽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대로 존재하기만 해도 되는 걸까라는 고민에서는 벗어난 듯하니 좀 더 즐겨볼까 싶다. 뭐든 하다 보면 늘겠지. 도저히 안되면 적성이 아닌 거고.
즐겁게 읽었다.
- 우선 정신과 의사로서 이 책의 두 가지 기본 전제를 밝혀둔다면, 그 첫째는 정신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구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적 성장과 영적 성장에 이르는 과정도 별도로 취급하지 않았다. 나는 이 둘을 동일한 개념으로 보고 있다. 두 번째, 이 '영혼과 정신의 성숙 과정'이란 복잡하고 험난할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이 걸리는 평생의 일이라는 것이다. 심리 치료가 정신적이고 영적인 성장 과정에 큰 도움을 주고자 한다면, 결코 단순하거나 짧은 과정이 될 수 없다. 나는 정신의학이나 심리 치료의 어떤 특정 학파에 속해 있지 않다. 프로이트 Freud 학파도 아니고, 융 Jung 학파도 아니고, 아들러 Adler 학파도 아니며, 행동주의 파도 경험주의 파도 아니다. 나는 어떤 한 가지 간편한 해결책은 없다고 믿는다. 물론 이들 학파에서 제시하는 간단한 심리 치료가 도움이 될 수 있고 그들의 방법이 매도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도움은 어쩔 수 없이 피상적이다.
- 그러므로 고통을 피하고 괴로움에서 도망치는 것이 당신의 목적이라면, 나는 당신에게 높은 수준의 의식이나 영적 성장을 촉구하지 않을 것이다. 첫째, 고통 없이는 이와 같은 것을 달성할 수 없고, 둘째, 이와 같은 것을 달성한다 하더라도 당신은 지금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게 봉사하도록 요청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는 그것이 최소한 당신에게 큰 짐이 될 수 있다. 그러면 왜 정신적 발전을 갈망하겠느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질문한다는 것은 아마도 당신은 기쁨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다음 부분에서 당신은 그 답을 찾을 수도 있고, 그러지 못할 수도 있다.
- 어떤 차원으로든 앞으로 나아가거나 성장하면 기쁨과 함께 고통이라는 대가를 치를 것이다. 충만한 삶은 고통으로 충만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삶을 충만하게 살든지 아니면 완전히 포기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 "인생에 있어서 유일하고 진정한 안전이란 생의 불안정을 맛보는데 있는 것이다."
- 나는 여전히 성장하고 있으나 내 욕심만큼 그리 빨리 자라지는 못한다. 우리가 선택하고자 하는 모든 조그마한 도약 중에는 커다란 것들도 있다. 예를 들면 내가 자라며 익힌 전체적 생활양식과 가치를 버리고 학교를 그만두었을 때처럼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거대한 도약을 절대로 택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실제로 전혀 성장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외양과는 달리 심리적으로는 아직도 부모의 아이로 남아 물려받은 가치에 따라 살고, 주로 부모의 승낙과 반대에 따라 움직이고(부모가 오래전에 사망해 땅에 묻힌 경우에도), 감히 운명을 자기 손안에 쥐어보지 못한다.
- 우리는 주변 사람들을 따라서 믿는 경향이 있으며, 어린 시절 자아 형성 과정에서 들었던 세계의 본질을 그대로 진리라고 받아들인다.
- 우리는 대부분 자기 능력보다 더 좁은 이해 범주에서 산다. 그러므로 개인을 둘러싼 특수한 문화, 부모, 어린 시절의 경험 등이 이해의 범주에 미치는 영향을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 세계가 이렇게 혼란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서로를 상대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 있으면서도 현실의 본질에 관해 굉장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견해란 각 개인이 이미 경험한 작은 우주관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저마다 자기 견해가 옳다고 믿으면서 산다. 더욱이 우리는 대개 자기 세계관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것이 유래한 자기 경험이 독특한 것임을 깨닫지 못한다.
- 충분하고도 면밀한 주의를 기울이면 우리에게 특별한 자각을 일깨워주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배적인 선입견과 개인적 이해에서 벗어나 보면, 세계를 그 안에서 그 자체로 경험하고 그것에 내재하는 위대성을 얼마든지 보게 된다. (...) 기적적인 것을 인식하는 데는 아무런 신앙이나 가정도 필요 없다. 단순히 생에 주어진 것을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볼 뿐이다. 즉, 무엇이든지 그렇게 존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주의 깊게 보는 것이다. 순수한 기적은 세상 곳곳에서 일어난다. 우리 육체의 섬세한 부분에서, 광대무변한 우주에서 또 이 모든 존재 사이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 우리는 정교하게 균형 잡힌 생태계의 일부분으로, 그 안에서 상호 의존은 각각의 개별 존재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우리 모두는 개별적 존재지만, 또한 더 큰 전체의 부분들이고, 설명할 수 없이 광대하고 아름다운 어떤 것으로 통합된다. 기적적인 것을 인식하는 것은 자아실현의 정수이며, 그것을 뿌리로 삼아 인간의 지고한 인격과 경험은 자란다.
- 이것은 대단한 사건이 아니다. 동네방네 나발 불 일도 아니다. 무시해버리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도 그런 것 없이 잘 지내왔으니까. 그러나 나는 은총을 입었다. 그 사건은 특별하면서도 동시에 평범하다.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느껴지는 점에서는 특별하지만, 이렇게 전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은혜로운 사건들이 실제로 주변에서 늘 일어난다는 점에서는 평범하다. 마치 풍뎅이가 조용히 창문을 두드린 사건처럼, 이러한 사건은 우리 의식의 문을 두드린다. 친구의 아내가 책을 건네준 일 이후로 이와 비슷한 사건은 수도 없이 생겼다. 내게 이런 일은 늘 일어나고 있다. 어떤 것은 의식하고, 어떤 것은 기적 같은 본질을 의식하지 못한 채 받는다. 내가 그중 얼마나 많은 것들을 스쳐 보냈는지는 알 길이 없다.
- 이 장에서 나는 여러 가지 현상을 다뤘다. 그 현상들은 다음과 같은 공통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1. 인간의 삶과 영적 성장을 육성한다. 즉 지지하고 고양시킨다.
2. 그것이 작용하는 메커니즘은 이해하기 쉽지 않거나 (신체의 면역 체계나 꿈의 경우처럼) 과학적 사고에 따른 자연 법칙의 원리에 비추어보면 전적으로 불분명하다(초자연적인 경우처럼).
3. 인간 사회에서 빈번히 일어나고, 일상적이며 보편적일 뿐만 아니라 대단히 본질적이다.
4. 잠재적으로는 인간의 의식에 영향을 받지만, 그 근원은 의식적인 의지와는 무관하며 의식적 의사 결정을 초월한다.
- 하느님이 자신처럼 성장하도록 인간을 적극적으로 양육한다는 사상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게으름에 직면하게 한다.
- 그러므로 원죄는 존재한다. 그것은 우리의 게으름이다. 게으름은 실재하는 현실이다. 그것은 우리들 모두에게 있다.
- "부름을 받은 자는 많지만 선택 받은 자는 적다"라고 한 그리스도의 말씀을 "모든 사람이 은총의 부름을 받지만,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 부름에 귀 기울인다"라고 풀이하고 싶다.
- 훈육은 괴로움을 감당하게 하며 문제로 인한 고통을 건설적으로 겪게 한다. 그렇다면 훈육이라는 이 도구는 과연 무엇인가? 훈육에는 즐거운 일을 뒤로 미루는 것, 책임을 지는 것, 진리에 대한 헌신, 균형 잡기 이렇게 4가지가 있다. 앞으로 분명해지겠지만 이것은 복잡한 도구가 아니라서 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훈련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아주 단순해서 거의 모든 아이들이 열 살이 될 때쯤에는 사용법에 능숙해진다. 그런데 대통령이나 왕과 같은 힘 있는 사람들이 종종 이 단순한 사용법을 잊어버려 삶을 망치기도 한다. 문제는 이 도구의 복잡함이 아니라 이를 사용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이 도구들은 고통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고통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을 피하고자 한다면 이를 사용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우리는 이 각각의 도구들을 분석해보고 그것을 사용하려는 의지, 즉 사랑이라는 것을 살펴볼 것이다.
- 지금쯤은 훈육이라는 것이 유연성과 분별력을 요구하는 힘들고도 복잡한 과제라는 것이 분명해졌기를 바란다. 용감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철저히 정직하려고 애쓰고, 그러는 한편 필요할 때는 진실을 모두 밝히지 않는 능력도 가져야만 한다. 자유로운 사람이 되려면 우리는 자신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또한 동시에 진실로 우리 책임이 아닌 것은 거절할 줄 아는 능력을 소유해야 한다. 정돈이 잘 되고 효율적인, 현명한 삶을 위해서는 그날그날의 즐거움을 뒤로 미루고 미래를 내다볼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기쁘게 살려면 파괴적이지 않은 한도 내에서 현재에 살고 즉흥적으로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훈육 자체가 또한 훈육되어야 하는 것이다. 훈육을 훈육하는데 필요한 훈육을 나는 균형 잡기라고 부른다. 이것이 여기서 논하고 싶은 네 번째이자 마지막 훈육 유형이다.
- 그렇다면 이 삶의 정신적 괴로움에서 자유로워질 가능성은 과연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좀 더 완곡하게 말해, 적어도 생존의 고통을 줄일 수 있는 단계까지 영적으로 의식 수준을 진화시킬 수 있을까? 그 답은 그렇다와 아니다, 둘 다이다. 그렇다는 이유는 고통을 완전히 받아들이면 더 이상 고통은 고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훈육은 정통함에 이르게 하고, 그리하여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어른이 아이를 다루듯 고통에 숙달된다. 아이들에겐 최대의 문제이자 고통스러운 일이 어른에겐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끝으로 그렇다고 대답한 이유는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남을 무한히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며, 그 사랑이 자신에게 무한한 기쁨을 되돌려주기 때문이다(이 점에 관해서는 다음 장에서 한다).
- 그렇지만 그들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자 할 때는 큰 고통을, 때로는 끔찍한 고통을 당한다.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점을 인식하면서 결정하는 과정이란, 제한되고 두루뭉술한 인식 하에 결정하는 것보다(대개의 결정은 그렇게 이루어지고 그래서 궁극적으로 이런 결정은 잘못이라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더 고통스럽다.
- 균형 잡기라는 훈육과 그 근본이 되는 포기에 관해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포기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먼저 소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진 것 없이는 아무것도 포기할 수 없다. 이긴 적도 없으면서 이기기를 포기하면 처음 시작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셈인데, 그것이 바로 실패자인 것이다. 정체성을 포기하기 전에, 자신을 위해 먼저 그것을 만들어놓아야 한다. 자아를 잃기 전에 당신의 자아를 발달시켜놓아야 한다. 지금 아주 기초적인 것을 말하고 있는데, 나는 이것을 분명히 언급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알기에 많은 사람들은 발전의 이상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의지력은 결핍돼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훈육을 거치지 않고 성자가 되는 지름길을 찾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을 뿐 아니라 바라기까지 한다. 가끔은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사막에 은거한다든지 목수 일을 하는 식으로 성자의 겉모습을 모방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모방을 통해 정말로 성자가 되고 선지자가 되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어린아이들이어서 처음부터 시작해서 중간 과정을 꿰뚫고 나가야만 한다는 고통스러운 사실에 직면할 능력이 없다.
- 그러나 애착과 사랑의 느낌 없이도 사랑할 수 있다. 순수하고 초월적인 사랑과 단순한 애착의 구별은 바로 이러한 가능성의 실현에 달려 있다. 이러한 구별을 위한 핵심어가 '의지'이다. 나는 사랑을 정의하기를, 자신이나 타인의 영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신을 확대시키려는 '의지'라고 했다. 진정한 사랑은 감정보다는 의지에서 나온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려는 마음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은, 사랑의 느낌이 없어도 사랑하겠다고 결심할 수 있다. 사랑의 느낌이 있으면 더욱 좋다. 그러나 느낌이 없을 때도 사랑하려는 의지와 헌신은 여전히 존재할 수 있으며 이를 실천에 옮길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느낌으로 행동하는 것을 억제할 능력이 있고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 좀 더 게으르면 우리는 그것을 전혀 이행하지 않을 것이다. 좀 덜 게으르면 그것들을 더 자주하거나 더 잘 이행할 것이다. 사랑은 노력이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음의 본질은 게으름이다. 게으름이란 주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은 지금까지 다루어온 훈육과 사랑이라는 주제에 내재된 숨겨진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에 가서 이 부분을 좀 더 명확하게 다룰 것이다.
- 이 여인은 어떤 사람인가? 우리는 그녀의 마음 속은 어떤지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녀의 삶은 오로지 위험을 피하고자 하는 것만이 목적이며 이를 위해 자아 확장은커녕 움츠러들기만 한 나머지 거의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녀는 살아 있는 어떤 것에도 애착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까지 단순히 애착이 사랑은 아니며, 사랑은 애착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사랑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애착이 필요하다. 우리는 무엇인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만을 사랑한다. 그러나 애착에는 항상 잃거나 거부당할 위험도 있다. 다른 누군가에게 나아갈 때, 거기에는 항상 그가 당신을 떠날 위험이 존재한다. 그러면 당신은 전보다 더 고통스럽도록 외로운 상태가 될 것이다.
- * 생물학적 부모 역할과 심리학적 부모 역할의 구별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골드스타인 Goldstein과 프로이트 Freud와 솔니트 Soinit의 공저, <아이의 최고 관심사를 넘어서>(맥밀란 사, 1973)에 훌륭히 서술되고 구체화되어 있다.
- 이러한 딜레마는 고통스러운 자기 성찰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 즉,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지혜'가 정말 가치 있는 것인지,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당위성 뒤에 숨겨진 동기가 어떤 것인지 엄중하게 점검해야 한다. "내가 정말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건가, 아니면 애매한 짐작만으로 이러는 걸까? 정말 그를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그가 선택한 길이 현명한 것인데도 그렇지 않다고 보는 생각은 나만의 편협한 관점이 아닐까? 내 사랑이 새로운 방향으로 가도록 하는 게 나 자신을 위한 것은 아닐까?" 등등. 이러한 것은 모두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계속 자문해야 할 질문이다. 이렇게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자신을 철저하게 성찰하는 것은 겸손이나 온유의 본질이다. 14세기 영국의 익명의 수도자는 가르침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온유한 것은 사람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알고 느끼는 것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보고 느끼는 사람이면 누구나 진정 온유함에 틀림없다." <무지의 구름>, 이라 프로고프 Ira Progoff 번역, 줄리안 출판사, 1969.
- 나르시시즘적인 사람들은 타인을 타인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의 연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정 이입 능력이 모자란다. 감정 이입이란 바로 다른 사람이 느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다. 나르시시즘적인 부모는 감정 이입 능력이 결핍돼 있어서 보통 감정적인 면에서 아이에게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하고 아이의 감정을 인정하거나 확인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런 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는 자신의 느낌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더나아가서는 어떻게 관리할지 몰라 심각한 곤란을 겪는다. 대체로 수전 어머니 정도로 나르시시즘적이지는 않더라도, 대다수의 많은 부모가 어느 정도는 아이들이 '타인'이며 자신만의 개성을 지닌 독립체임을 적절히 인정하거나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 깜짝 놀란 것은, 남녀할 것 없이 여섯 사람이나 아주 비슷하게 답변했다는 것이다. 그들 모두 남편과 아내의 목적과 역할을 자신과 관련해서 정의했다. 배우자가 자신과는 근본적으로 분리된 존재이고 결혼과는 별도로 다른 삶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모두가 인식하지 못했다. "아주 슬픈 일입니다." 나는 탄식했다. "그러니까 모두 결혼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겁니다. 각각 실현시켜야 할 개별 운명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전까지는 당신들 모두 계속해서 난관에 부딪쳐야 할 거예요."
내 발언에 모임 사람들은 심하게 질책받은 듯 매우 혼란스러워했다. 그러면서 다소 호전적으로 내 아내의 목적과 역할에 대해 정의해보라고 요구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릴리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성장하는 것이고 그것은 내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 자신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 집중적인 심리 치료는 여러 가지 면에서 부모 역할을 대신하는 과정이다. 심리 치료사가 환자에게 갖는 사랑의 느낌은 좋은 부모가 아이에게 갖는 사랑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치료를 성공적으로 이끌려면 환자를 사랑하는 것이 필수다. 치료가 성공하려면 치료사와 환자의 관계는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치료사가 환자에게 보여주는 진정한 사랑과 동시에 사랑의 감정이 생기는 것은 불가피하다. 대부분 정신적인 병은 성공적인 성숙과 영적 성장을 위해 부모에게서 받았어야 할 사랑의 결핍이나 결함 때문에 생긴다. 그러므로 심리 치료를 통해 치유되기 위해서는 환자가 받지 못했던 진정한 사랑의 최소한만이라도 심리 치료사에게서 받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치료사가 환자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면 진정한 치료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화려한 경력을 갖춘 숙련된 치료사일지라도 환자에 대한 사랑을 통해 자신을 확장하지 못하면 어떠한 치료도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화려한 경력도 없고 훈련도 충분히 못 받은 평범한 치료사일지라도 사랑의 큰 능력을 발휘한다면 최고의 정신과 의사들과 맞먹는 큰 성과를 거둘 것이다.
- 환자와 사랑에 빠진 치료사는 환자의 욕구에 객관적일 수가 없고 환자와 자신의 욕구를 구분할 수 없어진다. 치료사들은 환자에 대한 사랑 때문에라도 그들과 사랑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독립된 개체로 존중해야 하므로, 진정한 사랑을 하는 치료사라면 환자의 인생은 자신과 분리돼있으며 또 분리되어야 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이다. 어떤 치료사에게 이것은 치료실을 벗어나면 둘의 인생이 결코 엮여선 안된다고 받아들여질 것이다. 이러한 입장을 존중하긴 하지만 한편으론 불필요할 정도로 엄격한 것 같다. 내 경우, 치료가 끝난 환자와 알고 지낸 것이 환자에게 확실히 해가 됐던 적은 있지만 환자였던 사람과 알고 지내는 것이 나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도 분명 유익해 보였던 경우도 몇 번 있었다. 또한 운이 좋아서 몇몇 매우 친한 친구들도 성공적으로 정신 분석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환자와 상담 시간 외에 연락하며 지내는 것은 치료사와 환자라는 관계가 공식적으로 종결된 후라 할지라도 아주 조심스럽게 철저히 자기 성찰을 거친 후에만 실행하는 것이 좋다. 치료사는 환자와의 접촉을 통해서 자기 욕구를 채우느라 환자의 욕구에 손상을 준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 "그건 정말 큰일이에요. 그것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항상 생각을 해야 한다는 말이니까요. 나는 그렇게 많이 생각하기를 원치 않아요.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고 싶지도 않고요. 나는 그저 즐겁게지내고 싶답니다." 모든 인간의 상호 작용은 배우거나 가르치는(치료를 주거나 받는) 기회이므로 이를 통해 배우지도 가르치지도 않는다면 좋은 기회를 지나치고 마는 것이라고 지적하면, 환자들은 흔히 이와 비슷하게 대답한다. 대부분 그러한 고고한 목적을 성취하거나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면서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할 때 그들의 말은 정확히 맞는 말이다. 대다수의 환자들은 매우 숙련되고 사랑할 줄 아는 치료사들에게 상담받는데도 그들의 잠재된 능력을 완전히 성취하기에는 매우 모자라는 지점에서 치료를 종결한다. 그들은 영적 성장이라는 길을 따라 짧게 또는 상당한 거리까지 여행한 셈이지만, 여행을 완수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너무 어려워 보인다. 그들은 보통 사람으로 만족할 뿐 신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지 않는 것이다.
- 아직 논의되지 않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차원의 사랑은 분명히 존재한다. 이런 것들(그리고 더 많은 것들)에 대한 질문은 사회생물학으로 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아 경계에 대한 지식을 주는 일반 심리학이 조금은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주 조금뿐일 것이다. 이런 것을 가장 많이 아는 사람들은 종교인 중에서도 신비주의 학파 사람들이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통찰력을 얻으려면 이들과 종교라는 주제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의 나머지 부분은 종교의 어떤 측면들을 다루려고 한다. 매우 제한된 방식이지만 다음 장에서는 종교와 성장 과정과의 연관성을 논의할 것이다.
- 이러한 이해가 곧 종교다. 비록 그것이 제한적이거나 원시적이거나 혹은 부정확하다 할지라도 인간이면 누구나 어떠한 세계관을 갖고 있으므로 누구나 종교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널리 인식되지는 않았지만 이것은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즉, 누구나 종교를 갖고 있다. 나는 우리가 종교를 너무 편협하게 정의하기 때문에 괴로워진다고 생각한다. 즉, 우리는 종교란 반드시 신을 섬겨야 하며 어떤 의식이나 예배 집단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교회를 안 다니거나 초월적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종교적이 아니라고 말하기 쉽다. 심지어 나는 학자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도 들었다. "불교는 진정한 종교가 아니다"라든가 "유니테리언파 사람들은 신앙에서 종교를 배제했다"든가 "신비주의는 종교라기보다는 철학이다" 등등. 우리는 종교를 커다란 원목에서 잘라낸 한 조각처럼 일률적으로 보려고 한다. 이런 단순한 개념 때문에, 성향이 전혀 다른 두 사람 모두 자기가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당혹스럽다. 또 때로는 꼬박꼬박 미사에 참여하는 가톨릭 신자보다 무신론자나 유대교도가 기독교 윤리에 더 철저한 의식을 갖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 사람들의 세계관은 저마다 다르다. 정신 치료 과정에서 대개의 치료사들은 이내 환자가 어떻게 세계를 보고 있는지를 인식할 것이고, 치료사가 찾아보려고만 한다면 보다 빨리 인식할 수도 있을것이다. 환자의 세계관은 항상 문제의 근본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치료사는 근본적으로 이를 알아야 하고 치료를 위해선 필수적으로 그들의 세계관부터 교정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지도하는 치료사들에게 "환자의 종교를 찾아내십시오. 혹 종교가 없다고 하더라도 찾아내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보통 사람들은 종교나 세계관을 기껏해야 단지 불완전한 상태로 의식할 뿐이다. 환자는 자신이 세계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인식하지 못한다. 때로는 어떤 종류의 신앙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자기는 그와는 다른 종교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 브라이언트 웨지라는 정신과 의사는 국제 관계 분야의 전문가로 미국과 소련과의 협상을 연구했다. 그 결과 인간 존재와 사회, 세계의 본질에 관한 소련인과 미국인의 기본 가정의 윤곽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 가정들이 양측의 협상 태도를 좌지우지하고 있는데도 양측 모두 상대방이 다른 가정에서 행동한다는 사실은 물론 자기 측의 가정도 제대로 몰랐다. 그러므로 소련과 미국 모두 상대방의 협상 태도를 미치광이 짓이라고 보거나 고의에서 나온 악랄한 행동으로 간주한 것은 필연적인 결과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속담에 나오는 세 명의 장님과 같다. 각각 자기가 만지는 코끼리의 일부분을 코끼리 전체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다른 작은 우주의 세계관을 갖고 논쟁하며 그래서 이러한 모든 전쟁은 성전이 되고 마는 것이다.
- 영적 성장이란 작은 우주에서 출발해 보다 더 큰 우주로 들어가는 여행이다. 초기 단계(이 책이 가장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부분)에서 그것은 인식의 여행이지 신앙의 여행은 아니다. 이전의 경험으로 이루어진 작은 우주에서 탈피하고 또 스스로를 전이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반드시 배워야 한다. 계속 인식망을 확장하고 시야를 넓혀가야 하는데, 그것은 새로운 정보를 철저하게 소화하고 통합함으로써 가능하다. 인식을 넓히는 과정이 바로 이 책의 주된 주제다. 앞에서 사랑은 자기 확장이라고 정의하면서, 사랑의 모험 중에서도 새로운 미지의 세계로 뛰어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훈육에 관한 1부의 마지막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려면 오래전에 형성된 낡은 자신을 포기하고 낡아빠진 지식을 죽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넓은 시야를 발달시키기 위해서는 기꺼이 좁은 시야를 죽여야만 한다. 단기적으로 볼 때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더 평안할 것이다. 즉, 있던 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고, 여전히 작은 우주관으로 그려진 지도를 사용하고, 깊이 간직해 온 생각을 말살시키는 고통 등은 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 성장의 길은 반대 방향에 놓여 있다. 우리는 낡은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회의하며, 두렵고 익숙하지 않은 것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이전에 배워 소중히 간직해온 가치관에 과감히 반기를 듦으로써 영적 성장을 시작한다. 성스러움으로 가는 길은 '모든 것'을 회의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 그러므로 정신 건강과 영적 성장을 위해서는 자신의 종교를 발달시켜야 하며 부모의 종교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도대체 이 '종교로서의 과학'이란 무엇일까? 과학을 일종의 종교로 보려는 이유는 과학이 여러 중요한 신념을 가진 매우 복잡한 일종의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이 중요한 신념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즉, 우주는 실재하며 따라서 관찰할 수 있는 객관적 대상이다. 인류가 우주를 관찰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우주는 이해 가능하다. 즉, 우주는 어떤 법칙을 따르고 있으므로 예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은 형편없는 검사관이다. 편견이나 미신을 추종하며,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원하는 것만 보려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므로 정확히 고찰하고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과학적 방법이라는 훈육을 따라야 한다. 이러한 훈육의 핵심이 바로 경험이다. 그러므로 실제로 경험하지 않는 한 우리는 안다고 할 수 없다. 과학적 방법의 훈육은 경험으로 시작되지만, 단순한 경험 그 자체만을 믿을 수는 없다. 그것을 믿기 위해서는 그 경험이 실험 형식으로 반복되어야 한다. 더욱이 그 경험은 정당성이 입증되어야 하는데, 다른 사람도 똑같은 처지에서 똑같은 것을 경험해야 한다는 얘기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실제 ·조사·지식 ·의심· 경험 ·훈육이다. 이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들이다. 과학은 회의의 종교다.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비롯된 소우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그리고 문화라는 소우주에서 도피하기 위해 또 부모가 물려준 반쪽짜리 진리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까지 배워온 것에 회의를 품어야 한다. 이것이 기본적인 태도다. 과학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소우주의 경험을 대우주의 경험으로 변경시킨다는 뜻이다. 우리는 과학자가 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 그래서 우리는 질문을 하게 된다. 하느님을 믿는 것은 병일까? 그것이 전이의 표현일까? 부모라는 소우주에서 유래된 세계관을 부적당하게 대우주적 세계관으로 투사한 것일까? 또는 그러한 신앙이란 더 높은 단계의 인식과 성숙을 갈구함에 따라 버려야 할 원시적이고 어린애 같은 생각의 한 형태일까? 이런 질문에 과학적으로 대답하려면 실제 임상 자료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 그녀는 다시 미사에 참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사에 나가 신부에게 자신의 환상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죄를 짓는 것이 된다는 점을 인식했다. 그래서 미사에 참석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다시 기도의 속도를 평상시의 두 배로 높였다. 이것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의 음절을 외우면 그것이 어떤 특정한 기도문 전체를 대신하는 정교한 기도 체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녀의 주문의 시작이었다. 얼마 안 가서 그녀는 이 기도문을 완전히 통달해 5분 동안 수천 가지의 기도를 읊조릴 수 있었다. 처음에는 기도문을 완전히 통달하는 데 바빠서 부정의 공상이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그것에 익숙해지자 환상들은 전보다 더 강한 힘으로 밀려왔다. 그녀는 이 환상을 행동으로 옮길 궁리를 했다.
- 캐시의 경우를 이렇게 길게 설명한 이유는, 이 사례가 종교적 양육과 정신 병리와의 관계를 나타내주는 전형적인 경우이기 때문이다. 수백만 명의 캐시들이 존재한다. 나는 가끔 우스갯소리로, 가톨릭 교회가 나를 정신과 의사로 먹고살게 해 준다고 말한다. 침례교회나 루터교회, 장로교회 또는 다른 어떤 교회도 마찬가지다. 물론 교회가 캐시의 신경증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교회는 바로 캐시의 어머니가 부모로서의 지배권을 확고하게 굳혀가는 데 사용된 도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부권의 부재로 더욱 가속화된 어머니의 지배적인 성격이 신경증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도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캐시가 다닌 가톨릭 학교의 그 어떤 수녀와 신부도 종교의 교리에 의문을 갖거나 스스로 생각하도록 가르쳐주지 않았다. 지나치게 교리만 가르치거나, 비현실적일 정도로 엄격하게 적용하거나, 교리가 오용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부분에 대해 교회에서 관심을 둔 증거는 전무하다. 캐시의 문제를 분석하자면, 전심을 다해 하느님을 믿고 십계명과 죄의 개념을 믿었지만 종교와 세계에 대한 이해는 그저 물려받은 것일 뿐, 자기 욕구와 이해에 맞게 선택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 문제였다. 그녀에게는 질문한다거나 도전한다거나 또는 스스로 생각할 능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시가 다닌 교회는 그녀가 적응을 잘하는 훌륭한 인간이 되도록 도와준 적은 없었다. 오히려 교회는 대개의 경우 주어진 것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좋아하는 듯하다. 캐시 같은 사례를 많이 접하면서 심지어 어떤 심리 치료사들은 종교를 적으로까지 인식하게 된다. 그들은 종교 그 자체를 일종의 신경증이라고까지 생각한다. 즉, 종교는 본래 타고난 비합리적 사고들의 종합체로 이것은 사람의 마음을 쇠사슬로 채우고 정신적인 성장을 향한 본능을 억압하는 데 종사한다는 것이다. 합리주의자요, 뛰어난 과학자였던 프로이트는 사물을 대략 그러한 관점에서 본 것 같다. 현대 정신 의학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인물인 그의 이러한 태도는, 곧 종교를 신경증으로 보는 데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들은 자신을 고대 종교의 미신과 비합리적이며 권위적인 태도의 파괴적인 힘에 대결하는, 고귀한 투쟁에 갇힌 현대 과학의 기사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심리 치료사들은 낡아빠진 종교적 사고와 명백하게 파괴적인 관념에서 환자의 마음을 해방시키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 앞의 사례들은 다음 질문의 대답으로 나온 것들이다. 신에 대한 믿음은 정신 병리의 현상인가? 만약 어린 시절에 배운 것, 지역적인 관습과 미신의 진흙탕 속에서 뛰쳐나오기 위해서라면 이것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그런데 이 사례들을 보면 그 답이 결코 단순하지가 않다. 그 답이 어떤 때는 "그렇다”이다. 교회와 어머니가 캐시에게 가르쳐 준 하느님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은 분명히 그녀의 성장을 더디게 했고 영혼에 독이 되었다. 신앙을 회의하고 그것을 박차고 일어났을 때 그녀는 더 넓고 만족스러우며 생산적인 삶으로 과감히 걸어 들어갔다. 바로 그제야 자유로이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또 어떤 때는 그 답이 "아니다"이다. 마르시아는 어린 시절의 차갑던 소우주에서 벗어나 더 넓고 따뜻한 세계로 들어가면서 하느님에 대한 신앙 역시 그녀 안에서 조용히, 자연스럽게 자랐다. 그리고 테드가 버렸던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부활은 영혼의 해방과 부활이 가져다주는 당연한 결과물이었다. 같은 질문의 긍정적인 대답과 부정적인 대답 앞에서 어찌해야 할까? 과학자들은 진리를 찾으면서 열성적으로 질문을 해나간다. 그렇지만 그들도 인간이므로,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답이 정확하고 명백하며 또 간단하기를 원할 것이다. 단순한 해결을 바라는 과학자들이 하느님의 실재를 회의하게 될 때는 두 가지 함정에 빠지게 마련이다. 그 첫째가 아기를 목욕물과 함께 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좁은 동굴 속에 갇힌 것처럼 시야가 좁아지는 것이다.
- 이런 현상은 신에 대한 믿음이 무지, 미신, 강직, 위선 등과 밀접하게 관련된 문화나 가정 출신의 사람이 과학에 입문했을 때 더욱 두드러진다. 그런 경우 지적인 동기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동기에서 기존 신앙의 우상을 깨뜨린다. 과학자들의 성숙도를 재는 지표는, 과학도 어떤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독단으로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느냐에 있다. 나는 영적인 성장을 위해 지금까지 배운 것을 회의하는 과학적인 태도를 길러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해왔다. 그러나 과학 자체의 주장은 가끔 문화의 우상이 되므로, 우리는 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회의적이 되어야 한다. 성장한 뒤에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성장함에 따라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깊이 들어갈 수도 있음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회의적인 무신론이나 불가지론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인식 상태라고는 말할 수 없다. 이와 반대로 하느님에 대한 허위 주장과 거짓 개념들의 배후에는 진정한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개념들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신학자 파울 틸리히 Paul Tillich가 '하느님을 초월한 신'이라고 언급했을 때 의미한 바이고 또 지적인 기독교도들이 "하느님은 죽었다. 하느님이시여, 영원하시라"라고 부르짖은 이유다.
- 이제는 주의사항을 언급하면서 마무리를 짓고 싶다. 과학과 종교 사이에 있는 중간지대란 흔들리는 위험한 장소다. 우리는 기적의 다양한 모습 뿐만 아니라 초감각적인 직관과 '영적' 또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다룰 것이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분별력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나는 얼마 전 '믿음에 의한 치료'라는 주제의 학술회의에 참석했다. 거기에서 수많은 강사들은 과학적이지 않은 일화를 통해 증거를 제시하면서, 그들 또는 다른 사람들이 치료 능력을 지닌 것은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염증으로 부풀어 오른 환자의 관절 부위에 손을 얹었더니 다음날 그것이 사라졌다고 해서 이것이 치료사가 치료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부어오른 관절은 서서히 또는 갑자기 어쨌든 부기가 내리게 마련이고, 어떤 조치를 취하든지 결국은 부기가 가라앉는 게 보통이다. 두 사건이 시간적으로 동시에 일어난 것이, 인과적으로 연관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 초자연적인 현상의 전체 영역은 희미하고 모호하므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현상에 건전한 회의주의를 갖고 접근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을 잘못 인도할 수도 있는 것 중에, 회의주의적 자세 및 엄격한 현실 검증 태도가 결여된 상태에서의 사물 인식이 있다.
- 대다수 사람들이 별 어려움 없이 견뎌내는 질환을 누군가는 개인적 특성 때문에 이기지 못한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모른다. 심장병이나 뇌졸중, 암, 위궤양 등과 같은 흔한 질환을 포함한 거의 모든 질병에 대해서 우리는 똑같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최근 병의 상태는 정신의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연구자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즉, 정신이 신체의 저항 체계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실패와 관련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방어 체계가 실패한다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방어 체계는 잘 가동되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평상시에 우리는 박테리아를 산 채로 먹고 발암물질들에 침해당하며 지방질과 혈당 때문에 애를 먹고 산성 물질에 침식당한다. 우리가 병들어 죽어가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 병에 걸리거나 쉽게 죽지 않는 게 더 놀랍다. 여러 가지 정신 질환처럼 육체적 질병에 대해서도 우리는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즉, 이 세상에는 어떤 미지의 힘이 있어 최악의 상황에서까지도 육체적 건강을 지켜주고 더욱더 건강해지도록 북돋워준다는 것이다.
- 꿈을 많이 분석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이 꿈이 전형적인 것임을 알 것이다. 이 꿈의 전형적인 요소 중의 하나인 그 유용성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해 보자. 그는 자신의 문제를 직면하기 시작했으며, 그 즉시 무의식은 문제의 원인을 설명해주는 드라마를 한 편 만들었다. 그 원인은 전에는 몰랐던 것들이었다. 무의식은 잘 짜인 한 편의 희곡처럼 여러 가지 상징을 이용하여 훌륭하게 이 일을 해냈다. 그를 치료하는 데 이 꿈보다 더 명쾌한 도움을 준 것은 없었다. 그의 무의식이 치료를 도왔고, 실제로도 이 꿈 때문에 치료가 가능했다. 심리 치료사들이 꿈의 분석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것이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물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꿈도 있다. 무의식이 보다 분명한 언어로 무엇인가를 제시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성급한 기대이다. 그러나 앞의 경우처럼 성공적으로 꿈의 의미를 분석했을 때, 그 메시지는 늘 우리의 영적 성장을 북돋우려고 고안해 낸 것처럼 보인다. 내 경험에 의하면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꿈들은 꿈을 꾼 사람에게 유익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러한 도움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 무의식은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는 물론이고, 방식은 물론 약간 다르겠지만 깨어 있을 때에도 대단히 유효적절한 정보를 제공한다. 이것은 '엉뚱한 생각'이나 심지어는 생각의 파편 같은 형태를 띤다. 꿈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대개의 경우 이러한 엉뚱한 생각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의미 없는 것을 대하듯이 무심코 지나쳐버린다. 언뜻 보기엔 무의미하고 우스꽝스럽게 보여도 정신 분석을 받는 환자들에게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은 '무엇이든' 말하라는 것은 이 때문이다.
- 내 환자에 대한 심오한 직관은 흡사 초대받지 않은 손님처럼 의식 속에 불쑥 나타났다. 나는 초청한 적도 없고 원했던 적도 없다. 그 출현은 뜻밖이었고 내 일을 방해하는 불필요한 간섭처럼 보였다. 처음에는 그것에 저항해 몇 번이나 의식의 저 문 밖으로 차 내려고 했다. 이처럼 너무나 낯설어 환영받지 못하는 것이 바로 무의식의 세계이고 그 무의식이 의식 세계에 나타나는 방식이다. 프로이트를 위시한 초기 추종자들이 무의식을 원시적이고 반사회적이며 악마적인 것의 저장소로 취급한 이유도,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특성과 이와 연관된 의식의 저항 때문이다.
- 때로 '어떤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은 우리 내부에 이미 모든 지식과 지혜가 갖춰져 있는데 그것을 새삼스럽게 발견해 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개념은 교육이라는 단어에도 반영돼 있다. 교육을 뜻하는 education은 라틴어 educare에서 파생된 단어다. 글자 그대로라면 '밖으로 드러내다' 또는 '앞으로 이끌다'라는 뜻이다. 즉, 누군가를 교육한다고 할 때, 말 그대로라면 그의 마음속에 뭔가 새로운 것을 넣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뭔가를 끄집어내는 것이다. 무의식 속에 있는 것을 의식의 세계로 나오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무의식은 모든 지식의 창고다.
- 그러나 겉보기보다 훨씬 현명한 우리 내부의 무의식은 어디에 그 근거를 두는가? 알수 없는 일이다. 융의 집단 무의식 이론은 우리의 지혜가 유전된 것임을 시사한다. 기억 현상에 관련된 유전자를 대상으로 한 최근의 과학 실험에서 밝혀진 바로는 유전자는 지식을 유전시킬 수 있다고 한다. 지식이 핵산 코드 형태로 세포 속에 저장된다는 것이다. 지식을 과학적으로 저장할 수 있다는 개념은 인간에게 유용한 여러 지식이 어떻게 해서 조그만 두뇌 속에 저장될 수 있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런 종류의 과학적인 설명은 유전된 지식이나 좁은 범위의 경험적 지식 등을 저장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게 하지만 정작 마음을 괴롭히는 문제들에는 답하지 못한다. 이를테면 그러한 전문적 가설을 좀 더 파고들면 -그 가설이 어떻게 구성되었고 또 어떻게 작용하는지 등등- 아마도 우리는 여전히 인간의 정신이라는 현상 앞에 경외심으로 설 수밖에 없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이런 문제를 파고드는 것은 본질적으로 이 우주의 질서를 사색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하느님이 군단과 세라핌과 세루빔의 대천사들과 천사들을 거느리고서 다스리는 이 우주의 질서 말이다. 기적 같은 것은 없다고 믿는 그 마음 자체가 바로 기적이다.
- 지금껏 논의대로, 무의식의 놀라운 지혜는 두뇌의 어떤 부분이 기적에 가까운 방식으로 작용하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무의식의 작용과 명백히 관련된 '심령 현상'이라 불리는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무런 해명도 못하고 있다. 신학박사 몬태규 울만 Montague Ullman과 스탠리 크리프너 Stanley Krippner는 깨어 있는 사람이 반복적 지속적으로 먼 곳에서 잠자는 사람에게 어떤 영상을 '전송'할 수 있고 그 영상은 잠든 사람에게 꿈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연구 결과를 말한 바 있다. 아직도 초감각적 지각의 존재를 확신할 수 없거나 과학적 타당성에 대해서 회의적인 사람에게는 이 논문을 적극 권유한다.
- 행운을 가져다주는 초자연적인 사건과 관련해 말하고 싶은 것은 '우연한 깨달음 serendipity'이라는 현상이다. 웹스터 사전에는우연한 깨달음을 '가치 있거나 호감이 가는 것을 일부러 애쓰지 않고도 찾아내는 재능'이라고 정의한다. 이 정의에는 몇 가지 숨겨진 요소가 있다. 그중 하나는, 우연한 깨달음을 재능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어떤 이는 이것을 갖고 있는데 또 다른 이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여지를 준다. 즉, 어떤 사람들은 운이 좋고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은총은 일부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소중하고 바람직한 것'에 의해 나타나며 누구에게나 주어진다는 것. 하지만 어떤 사람은 이것을 이용하고 어떤 사람은 그러지 못한다는 것이 4부의 주제다. 융은 풍뎅이를 방 안으로 끌어들여 붙잡아 환자에게 줌으로써 이 은총을 확실히 활용했다. 사람들이 은총을 놓치게 되는 까닭과 은총을 이용하지 못하는 이유 등에 관한 것은 '은총에 저항하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다룬다. 그러나 지금은 은총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 실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서라는 것을 지적하는 선에서 그치자.
- 나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지금 암초에 걸려 도무지 작업에 진전이 없다고 말했다. 그녀는 손에 책을 한권 들고 있었다.
"우연히 이 책을 찾았어요. 이 책에 관심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아닐지도 모르지만 어쩐지 꼭 도움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이유는 저도 모르겠어요."
다른 때 같았으면 귀찮고 성가셔 그 책을 볼 틈이 없다고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이상하리만치 겸손한 태도가 내 마음을 움직였다. 나는 그녀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되도록 빨리 읽어보겠노라 말했다. 그 책을 집에 갖고 오면서도 '되도록 빨리'가 언제가 될지는 몰랐다. 하지만 바로 그날 저녁, 나는 어떤 힘에 이끌려 다른 것을 제쳐두고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앨런 휠리스 Allen Wheelis가 쓴 <사람은 어떻게 변화하나 How people change>라는 얇은 책이었다. 책임감에 대한 내용이 그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장은 내가 꼭 하고 싶던 말을 아주 깊이 있고 멋있게 표현했는데, 덕분에 나는 그동안 골머리를 앓아온 부분을 확장시킬 수 있었다. 다음 날 나는 책임감 부분을 짧고 명확한 단락으로 요약한 다음 이 주제를 더 알고 싶은 독자를 위해 각주를 달아 휠리스의 책을 참고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여 나는 곤경에서 해방되었다.
- 무서운 결론에 이른다. 하느님이 바라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과 같아지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경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하느님이 곧 진화의 목적이다. 하느님이 바로 진화시키는 힘의 원천이자 도착지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느님은 알파며 오메가라고 말하는 의미다. 하느님은 시작이자 끝이다. 무서운 생각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그래도 다소 온건한 표현이다. 이는 굉장히 오래된 관념이지만 그 오랜 세월 동안 우리는 말할 수 없는 공포 때문에 이 생각을 외면해왔다. 어떠한 관념도 이보다 더 무겁게 마음의 짐을 지우는 것은 없다. 이것은 인류의 역사상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많은 것을 인간에게 요구하는 사상이다. 그것이 심오하고 까다로워서가 아니라 반대로 지나치게 단순하기 때문이다.
- 인간이 하느님과 같아질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이 믿음은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모든 가능성을 시도할 의무를 지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의무를 바라지 않는다. 그토록 노력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다. 신과 같은 책임을 짊어지고 싶지도 않다. 언제나 모든 것을 생각해야 하는 책임을 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인간이 신처럼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버리기만 하면, 영적 성장을 근심할 필요도, 우리 자신의 의식 수준을 높이려고 애쓸 필요도, 사랑을 실천할 필요도 없다. 그냥 되는 대로 주어진 인간으로 지내면 되는 것이다. 하느님은 하늘에 있고 인간은 땅에 있으며 그 둘은 결코 합치될 수 없다면, 우리는 진화라든가 우주의 질서 유지 등 모든 책임을 하느님에게 돌리면 된다. 자기 몫을 다한 다음 행복하고 건강한 자녀와 손자 손녀들과 더불어 안락하고 편안한 노후를 즐기면 그뿐이다. 그 이상의 일로 스스로를 괴롭힐 필요가 없다. 물론 이런 목표가 성취하기 쉬운 것은 아니며, 절대로 가볍게 볼 일도 아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느님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때야말로 "자, 일을 끝냈어. 목적을 이룬 거야."라고 말하며 쉴 수는 절대로 없다. 우리는 스스로를 더욱 지혜롭고 더욱 현명해지도록 믿고 끌어올려야 한다.
- 이 책의 1부 '훈육'에서는 꼭 필요한 고통을 피하려 하거나 쉬운 길을 택하려는 게으름을 살펴보았다. 2부 '사랑'에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자아의 경계를 확장하려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했다. 게으름은 사랑의 반대말이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영적 성장을 위해서는 반드시 노력이 필요하다. 이제 게으름의 본성에 관해 보다 넓은 시야를 가지고 살펴보기로 하겠다. 게으름은 바로 우리 모두의 삶에서 나타나는 엔트로피의 힘이다.
- 게으름이란 단지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거나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하지 않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게으름의 주된 형태는 두려움이다. 아담과 이브의 신화를 다시 인용해 설명해보자. 아담과 이브가 하느님의 율법 뒤에 숨은 이유를 묻지 못한 진정한 까닭은 게으름이 아니라 두려움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 자기 속의 게으름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게으름을 줄여 나가는 첫걸음이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보다 성장한 사람은 자신의 게으름을 잘 아는 사람이다. 자신이 게으르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덜 게으를 수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성숙을 위한 투쟁에서 새로운 통찰력을 얻었다. 그러나 그것은 쉽게 빠져 달아나는 경향이 있다. 아니 그보다는, 새롭고 건설적인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 바로 그 순간에 나도 모르게 멈칫거리게 된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이런 귀중한 생각들을 무심코 흘려보내고는 어떻게 할지 당황해하며 이것들을 찾아 헤맨다. 그래서 나는 주저하고 있음을 깨달으면 영 내키지 않은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고 애쓴다. 엔트로피와의 싸움은 끝이 없다.
- 단순한 게으름은 사랑이 아닌 것에 불과하지만 악은 사랑을 막는 것이다. 세 번째 결론은 인간의 진화에 있어 적어도 지금 단계에서는 악의 존재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갖고 있고 엔트로피의 힘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게으름을 이겨낼 수 있으나 또 어떤 사람은 그것이 힘겨울 수 있다. 엔트로피의 힘이 존재하는 한편에 사랑이라는 진화를 부추기는 힘이 있어, 이 두 상반된 힘에 의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교적 균형을 잘 유지한다. 그러나 한쪽 극단에는 순수한 사랑만 드러나는 사람이 있고 반대편 극단에는 순수한 엔트로피나 악만 드러나는 사람이 있다. 이 둘은 서로 갈등하는 힘이라서 양 극단은 부딪칠 수밖에 없다. 선이 악을 미워하듯 악이 선을 미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 그동안 '알고 있는 aware'과 '앎 awareness'이라는 말이 되풀이해서 등장했다. 악한은 자신의 상태를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게으름의 자각은 영적 진보를 가늠하는 잣대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 종교나 세계관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종교적으로 성숙해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가설과 편견에 치우치기 쉬운 경향을 알 필요가 있다. 괄호 묶기와 사랑의 관심을 통해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세상을 더 알게 된다. 훈육의 기본적인 요소는 책임감과 선택의 위력에 대한 인식을 발달시키는 것이다. 그러한 정신적인 부분을 인식하게 만드는 능력을 의식이라고 부른다. 이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영적인 성장을 의식의 성장이나 진화라고 정의할 수 있다.
-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은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만큼 충분히 깨어 있다. 그래서 보다 위대한 앎의 경지로 나아가 무지에서 자신을 건져 올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들의 생각이 옳다. 또 그것은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좀 더 위대한 앎의 경지란 어둠 속에서 번쩍 불빛이 빛나는 것 같은 깨달음으로 오는 게 아니다. 그것은 천천히 조금씩 오며, 그 조금이라는 것도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물을 관찰하고 탐구하는 각고의 노력 끝에 얻어진다. 그들은 겸손한 학생이다. 영적 성장의 길은 평생 걸리는 배움의 길이다. 열심히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지식의 조각들이 모양을 갖추기 시작한다. 점차적으로 사물이 의미심장해진다. 막다른 골목과 실망스러운 순간과 페기해야 할 관념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점차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한 깊고 깊은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점차 자신이 하는 일이 실제로 어떤 일인지도 자각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권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영적인 힘을 경험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기쁜 일이다. 어떤 일에 정통했을 때 오는 기쁨이 있다. 실제로 전문가가 되어 자신이 하는 일을 진정으로 잘 아는 것보다 큰 만족은 없다.
- 신들의 재판이 열렸다. 아폴론은 오레스테스를 변호하기 위해 자신이 그로 하여금 어머니를 죽이도록 모든 상황을 조작했으니 오레스테스는 책임이 없다고 말했다. 이때 오레스테스는 펄쩍 뛰면서 반박했다. "어머니를 죽인 것은 접니다. 아폴론이 아니고." 신들은 놀랐다. 아트레우스 가문 사람 중 신을 비난하지 않고 전적으로 책임을 떠안은 자는 여태껏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신들은 오레스테스를 용서하고 가문에 내린 저주를 풀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퓨리스를 사랑의 영들인 에우메니데스로 변신시켜 현명한 조언으로 오레스테스가 영원히 행운을 누릴 수 있도록 했다. 이 신화의 의미는 명백하다. 에우메니데스 또는 '상냥한 자'는 또한 '은총을 가져오는 자'이다. 오레스테스만이 인지할 수 있었던 환각 속의 퓨리스는 곧 그의 증상을 나타내며, 정신 질환이라는 개인적 지옥을 의미한다. 퓨리스를 에우메니데스로 변신시킨 것은 우리가 지금껏 말해왔다시피 정신 질환을 행운으로 바꾼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오레스테스가 자신의 정신 질환에 기꺼이 책임지려고 한 덕분이다. 끝내는 퓨리스에게서 놓여나긴 했지만, 오레스테스는 그들의 존재가 부당한 형벌이라거나 자신을 이 사회 또는 다른 무엇의 희생양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 대부분의 환자는 심리 치료 과정 동안 자기 상태와 회복이 전적으로 자기 책임이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처음에는 정신 요법에 아무리 열광하던 사람이라 해도 금방 상담을 그만둬버린다. 다시는 남을 비난하지 않는 건강한 삶보다는 신들을 비난해가며 병든 채로 선택한다. 상담을 계속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치료의 한 부분으로 자신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떠맡아야 함을 배운다. 이러한 가르침 -'훈련'이 보다 적합한 표현이다- 은 몹시 힘들다. 심리 치료사는 상담할 때마다, 달이 바뀔 때마다, 해가 바뀔 때마다, 환자가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또 다시 계획적으로 일깨워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게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에 환자들은 고집불통인 어린아이처럼 소리 지르고 발을 구른다. 그러나 끝내 그들은 해낸다. 처음부터 모든 책임을 기꺼이 떠맡으려는 자세로 치료를 시작하는 환자는 드물다. 그런 경우에도 여전히 1~2년이 걸리지만 치료는 비교적 짧고, 비교적 무리 없이 진행되며, 흔히 환자와 치료사 모두에게 대단히 즐거운 과정이 된다. 상대적으로 쉽든 어렵든, 또 시간이 많이 걸리든, 그 어떤 경우에도 퓨리스를 에우메니데스로 전환시키는 일이 일어난다. 정신 질환을 직면하고 전적으로 그에 따른 책임을 지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스스로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은 치유에 성공해, 어린 시절과 선조로부터 비롯된 저주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다. 한때는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 오히려 기회가 된다. 한때는 위험천만의 장애였던 것이 이제는 멋진 도전이 된다. 반갑지 않던 상념들이 유익한 통찰력을 제공하며, 전에는 부정하고 싶던 감정이 활력과 지침의 원천이 된다. 자신이 극복한 그 증상까지 포함해서 한때는 짐으로 여겨진 사건들이 이제는 선물로 느껴진다. 치료를 성공적으로 끝낸 사람들은 "내 우울증과 나를 공격한 불안은 최고의 경험이었다”라고 말한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치료를 받다 보면 이런 현상을 경험할 수 있지만, 성공적으로 치유된 환자들은 그들이 은총을 입었다는 것을 매우 실감한다.
- 그런 한편 이러한 지식과 인식은 커다란 의무를 지우는 것이기도 하다. 하느님과 가까이 있음을 경험하는 것은 즉 하느님의 의무를 체험하고 그의 권능과 사랑의 대리자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은총에의 부름은 사랑으로 세상을 돌보고 수고하는 삶, 봉사와 회생이 요구되는 삶에로의 부름이다. 그것은 영적으로 어린이에서 어른의 상태로 나아가라는 부름이며, 인류의 부모가 되라는 부름이다. T.S. 엘리어트는 <성당의 살인 Murder in the Cathedral >이라는 시극에서 등장인물 중 하나인 토머스 베케트의 크리스마스 설교를 통해 이 문제를 잘 묘사했다.
- 심리 치료의 주된 업무 중에는 환자를 정신적으로 건강한 상태에 도달하게끔 하는 것뿐만 아니라, 위로하고 위협하고 엄격하게 구는 등 모든 방법을 적절히 뒤섞어서 환자가 일단 도달한 그 지점에서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런 두려움은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그 자체만으로는 전혀 병적인 것이 아니다. 힘을 행사할 수 있게 되면, 그것을 오용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 우리는 다시금 역설에 직면한다. 이 책에서 나는 영적 성장을 마치 질서 있고 예측 가능한 과정인 것처럼 말해왔다. 그것을 어떤 지식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따듯 배워서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암시하기도 했다. 등록금을 내고 열심히 공부하기만 하면 물론 학위를 딸 수 있다. 나는 '부름 받은 사람은 많지만 선택받은 사람은 적다”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은총에 따르는데 수반되는 어려움 때문에 극소수의 사람만이 은총의 부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러한 해석에 입각하여 우리가 은총에 의해 축복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는 선택의 문제라고 했다. 요컨대 은총은 획득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우리가 은총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우리가 차지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은총이 우리를 비껴갈 수 있다. 그러나 찾으려고 애쓰지 않을 때 우리를 찾아내기도 한다.
- 재빠르고 기계적으로, 상당히 공을 들여 모든 꿈을 아주 자세한 부분까지도 세밀히 기록하여 심리 치료사에게 가져온다. 그러나 정작 그들의 꿈이 도움이 된 적은 거의 없다. 실제 이들의 꿈이라는 재료는 치료에 방해가 될 때도 있다. 그 모든 꿈을 분석하고 있을 시간이 거의 없다는 것이 한 가지 이유이고, 또 다른 이유는 꿈이라는 재료가 지나치게 많아서 보다 생산적인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작업을 저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료들은 분명치 못하고 흐릿할 수도 있다. 그런 환자들에게는 꿈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노력을 중단하고 꿈이 자기에게 오도록 내버려 두라고 말해야 한다. 즉, 무의식이 어떤 꿈을 의식 속에 등장시킬 것인가를 선택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렇게 가르치는 것 자체가 대단히 어렵다. 환자에게 자기 자신의 통제를 얼마간 포기하고서 마음을 느긋하게 바라보는 수동적 자세를 유지하라고 요구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환자가 꿈에서 무엇인가를 끌어내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포기할 수만 있다면, 기억된 꿈은 양적으로는 줄지만 그 질에 있어서는 극적이라 할 정도로 증가한다.
- 수동성과 의존성, 두려움과 게으름 때문에 가야 할 길을 속속들이 미리 보기를 원하며, 매 발걸음이 안전하고 가치 있다는 것을 보장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영적 성장의 여행은 용기와 주체성, 생각과 행동에서의 독립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예언자의 말이나 은총의 조력이 유용하긴 하겠지만 그 길은 반드시 혼자 가야 한다. 어떠한 스승도 당신을 거기에 데려다줄 수 없다. 확고한 공식도 없다. 종교 의례는 배움을 위한 보조수단이지 배움 자체는 아니다.
- 이 현대적인 주석(이 책)이 제공하는 것보다 더 깊은 이해를 원한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스스로 진보하거나 아니면 고대의 문헌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더 깊이 이해하기를 원하되 더 자세한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될 것이다.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 > Book2'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이 윈터] 쉽게 읽는 에녹서 (0) | 2021.11.24 |
---|---|
[디아메이드 맥클로흐] 3천년 기독교 역사 2 - 중세, 종교개혁사 (0) | 2021.11.21 |
[맨리 P. 홀] 천사가 된 악마 - 종교와 영성의 길, 그리고 함정에 관한 이야기 (0) | 2021.11.21 |
[맥스 프리덤 롱] 호오포노포노 후나의 기적의 치유법 (0) | 2021.11.13 |
[피터 스탠퍼트] 예정된 악인, 유다 - 누가 그를 배신자로 만들었는가 (0) | 2021.11.11 |
[스티븐 라버지] 루시드 드림 - 성공하는 사람들의 비밀스런 꿈꾸기 (0) | 2021.1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