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디아메이드 맥클로흐 / 배덕만
원제 : A History of Christianity
출판 : 기독교문서선교회
출간 : 2013.06.13
읽는 것도 일이었지만 발췌 정리가 정말 오래 걸렸다.
역자마다의 차이일수도 있겠고 원서 자체가 어조가 달랐을 수도 있겠으나 세 권 중에서는 가장 재미있는 권이 아니었나 싶다.
2권에서는 해당 시기인 중세 유럽을 중심으로 시대권와 지역권을 큼직한 덩어리로 나눈 다음, 그것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당대의 종교와 사상, 주요 인물적 변화를 다루고 그것들이 미친 영향을 연결해서 이어 설명하는 부분이 좋았다. 유독 2권에서는 저자의 유머러스한 반어법 문장이 살아난 느낌이었는데 몇몇 부분에서는 정확한 의미를 확인해야 하기도 했다.
일독으로 완전히 모든 흐름을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큰 흐름 안에서 어떤 식으로 영향력들이 변화해갔는지와 (이 저자가 주장하는) 각 교리들의 핵심 쟁점과 주요 인물들에 대해 개략적인 구조가 생긴 듯하다. 한 분야에 대해서 잘 모르겠을 때는 여러 권을 겹쳐 읽는 것이 가장 효율이 좋다고 생각한다. 자신만의 밑그림이 설 때까지는 덧칠이 답이다. 당분간 이 책을 재독할 생각은 없지만, 훗날 다시 읽어보면 지금과는 다른 문장들이 눈이 갈 것 같다.
사족이지만 용어를 조금 더 통일해주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한다. 특정 시기를 기점으로 변화한다면 일부러 나누어 표현했으리라 짐작이 가능한데, 주교와 감독 외에도 교리와 요리 등을 혼용해서 사용해 순간적으로 당황하는 일이 있었다. 혹시 차이에 관해 주석이 있나 싶어 살펴봤으나 나는 발견하지 못했는데, 사실 어찌 보면 내가 용어에 익숙하지 못한 탓이다. 감사히 읽었다.
- 고딕 양식은 라틴가톨릭 서방의 대단히 중요한 특징이었기 때문에 낯선 환경에서도 그 모습을 발견하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하지만 그런 곳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기독교 세계의 중심은 바로 교회 안, 즉 십자가 처형 장소와 구세주의 무덤에 세워진 예루살렘의 성묘 교회 안이었다. 동지중해를 여행하던 사람이 키프로스 섬의 떠오르는 태양 빛 속에서 파마구스타와 니코시아 같은 도시에서 프랑스 고딕 성당을 마주칠 때 깜작 놀랄 것이다. 현재 이슬람 첨탑만 제거한다면, 그것들은 북유럽의 어느 도시로 옮겨 놓아도 어떤 이질감도 없이 그곳에 자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건물들이 이렇게 먼 동쪽까지 올 수 있었을까? 그것들의 현존은 서방 라틴교회의 삶에서 가장 위대하나 궁극적으로는 가장 비극적인 모험 중 하나인 십자군에 대한 증거다.
- 카타리파를 진멸하려는 전쟁은 곧 북프랑스의 왕과 귀족들을 위한 정복전쟁으로 변했다. 종족 살해적 악행 속에, 이런 '알비파 십자군'(알비시는 카타리파 주교가 거주했던 카타리파의 중심지였다)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불명예스런 사건 중 하나로 꼽힌다. 대규모 화형식은 이 십자군들의 적에 대한 보복의 일반적 특징이었으며, 그렇게 희생된 사람들 중에는 카타리파가 아닌 사람들도 많았다. 13세기 동안 십자군 사상에 대한 해석은 그 이후 교황들이 이탈리아(주로 신성로마 황제와 그의 왕조)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라이벌들에 대항하여 전쟁을 선포했을 때, 종국에는 교황권이 권좌를 놓고 양편으로 분리되었을 때, 극단적으로 왜곡되었다. 그 전쟁은 1370년대까지 간헐적으로 지속되었다. 교황의 입장에서 십자군이 동방에서 교회를 보호한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교황을 지원하기 위해 대중들이 달려가지 않은 것과 많은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교황 군대와 싸울 준비를 완벽하게 한 것도 전혀 놀랄 일은 아니었다.
- 역동적인 대중운동들에 대한 보다 복잡하고 긍정적인 반응이 12세기 말에 출현했다. 종국에는 그것도 '박해하는 집단의 형성'에 기여했지만, 그것은 도미니크와 프란시스라는 두 명의 위대한 종교 지도자들을 배출했다. 그 두 사람은 본질적으로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그들은 나란히 최초의 두 탁발 수도회를 창설했다(friars는 형제를 뜻하는 라틴어 fratres의 영어식 표기다). 1194년에 도미니크는 스페인 북부의 오스마(Oma)에 있는 한 마을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규칙을 따르는 사제가 되었다. 그는 카타리파 이단들의 손에서 프랑스 남부를 탈환하는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피레네 산맥을 넘었다. 그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는데, 도미니크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 전쟁을 이끌어가는 고위 성직자들이 수많은 수행원들에 둘러싸여 방만한 태도로 그들의 임무에 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톨릭의 부패에 대한 카타리파의 비판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남길만한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 제국의 국경 너머 팔레스타인의 성 사바스(St. Sabas) 수도원에서 대단히 존경받던 다마스커스의 요한(John of Damascus)은 일생 동안 묵상하고 이슬람을 가까이서 비판한 후 그렇게 격화되던 갈등을 하나의 익숙한 싸움으로 이해했다. 그는 밀집 인형의 무슬림과 나눈 대화에서 무슬림들이 십자가 숭배를 경멸한다면 그들은 카아바(the Ka'aba)에 있는 검은 돌 숭배를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요한은 성상 파괴주의에 대항하는 가장 강력한 논객임을 입증했다. 그는 그 시대의 가장 탁월한 지성 중 한 사람이었으며, 후에 토마스 아퀴나스의 뜨거운 존경을 받았던 위대한 철학자였다. 아퀴나스는 자신이 어른이 된 이후 매일 요한의 책을 읽었다고 주장하면서 그의 글을 빈번하게 인용했다. 그리고 다른 여러 경우처럼 성상논쟁에서도 그 아랍 기독교 신학자의 모범을 따랐다. 요한은 근대까지 서방 기독교 사상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던 최후의 동방 신학자였다.
- 4세기 전 대 바실리우스와 카파도키아 교부들이 삼위일체를 위해 적합한 단어를 발견하려고 분투했던 것처럼 존은 성상 의미를 적절히 설명할 수 있는 그리스어를 발견하기 위해 분투했던 최초의 대가였다. 이 경우에 그는 절대적 예배와 상대적 예배를 구분했다. 숭배(adoration)로서의 예배를 뜻하는 “라트레이아”(Latreia)는 오직 하나님께 드려질 때만 적절하며 하나님의 피조물들에게 적합한 존경(veneration)은 "프로스퀴네시스"(proskynesis)다. 예를 들어, 그것은 콘스탄티노플에서 황제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런 피조물은 "진실로 본질이 아니라 적용에 의해 작은 신들(gods)로 불린다. 마치 빨갛게 달군 쇠가 불 같다고 말할 때 본질적으로 불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쇠가 불의 활동에 참여하기 때문에 그런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집이나 교회에서 예배자가 성상에 드리는 것이 프로스퀴네시스(존경)다.
- 논리적으로 물질은 악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그들의 신앙적 관점에서 바울파들은 마리아 숭배나 물리적 형태의 세례식 같은 제국 종교의 육체적 측면을 경멸했다. 자연적으로 그들은 성상 증오자(iconophobes)였다. 하지만 비잔틴의 성상 파괴자들과는 달리 그들은 자신들의 중오를 십자가 자체에까지 확대했다. 그리고 성상 파괴자들처럼 그들은 군인들을 자신들의 신앙으로 끌어들인 것 같다. 콘스탄티누스 5세 같은 성상 파괴주의 황제들은 바울파에게 관용을 베풀 뿐 아니라 그들에게 군 복무 기회를 제공함에 있어 아무런 문제도 발견하지 못했다. 심지어 성상 애호 주의 황제들도 군인으로서 그들의 가치를 인정했고 후에는 그들을 비잔틴의 발칸 변경 지역에 고용했다. 그 결과 뜻하지 않게 그들의 메시지를 서쪽으로 확장시켰다. 9세기 무렵 이 그룹은 제국의 심각한 위험이 되어 불가리아 대주교가 그들의 가르침을 거절하도록 압력을 가할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조치가 10세기 불가리아에서 또 다른 이원론적 분파의 발달을 가로막지 못했다. 이 분파는 훨씬 더 금욕적이며 이 분파의 9세기 창설자 이름을 따라 보고밀파로 알려졌다. 보고밀(Bogomil)은 슬라브어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이란 뜻이며 그리스어로는 '테오필로스' (Theophilos)다. 보고밀파는 제국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1098년경에 비잔티움에서 이단으로 화형 당한 소수의 희생자 중 한 사람(아마도 마지막 사람)이 보고밀파 바실리우스(Basil)였다. 이단에 대한 화형이 동방에서 사라질 때 서방에서는 강화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보고밀파들이 서부 지중해의 비슷하게 금욕적인 카타리파들에게 영감이 되었던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바실리우스의 화형에는 미묘한 대칭이 존재했다. 특히 13세기 동안 알비파 십자군에서 카타리파들은 서방 기독교 역사상 가장 잔인한 박해의 희생양이 되었다.
- 역설적으로 유럽을 그토록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오스만의 정복은 그리스 문화를 서쪽으로 가져오면서 사본의 공급 면에서 균형을 깨뜨렸다. 중세 서유럽은 그리스 문헌에 접근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호머의 서사시 같은 대표적 문헌도 15세기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스어에 정통한 학자도 거의 없었다. 만약 그들이 라틴어 외의 학문적 언어를 알고 있었다면 그것은 히브리어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 이유는 서방에는 그리스인들이 거의 없었지만 히브리 문헌에 대한 지식을 토대로 기독교에 대해 기이한 질문을 던질 수 있었던 논쟁적이면서 순진했던 유대인 랍비들은 대단히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갑자기 손에 들어온 문헌을 활용하기 위해선 서방 인문주의자들에게 그리스어가 필요했다.
- 1430년대와 1440년대의 전환기에 피렌체 공의회에서 재결합을 위한 협상 테이블에 위대한 그리스 철학자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Georgios Gemistos Plethon)이 참석했던 것은 특별히 중요했다. 그가 탁월한 플라톤 전문가였기 때문이다. 그리스 교회 당국이 콘스탄티노플의 몰락 후 그를 버렸지만 피렌체의 메디치가 군주들은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여 비슷한 재능을 가진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에게 플라톤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맡겼다. 플라톤의 재출현은 특별히 중요했다. 12-13세기의 스콜라철학은 플라톤의 매우 다른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재발견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철학의 궁극적 문제에 대한 플라톤의 태도, 즉 가장 위대한 실재가 가시적이고 계량화할 수 있는 실재 너머에 존재한다는 그의 생각은 인문주의자들이 스콜라철학의 모든 양식, 그것의 세심한 분류와 정의를 불신하도록 만들었다. 정말로 피치노는 플라톤을 처음에는 오리게네스를 통해,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도시에서 한 번 더, 기독교 메시지를 설명하기 위해 하나님이 섭리 가운데 보낸 사람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그는 당대의 아리스토텔레스 전문가들을 "전적으로 종교에 파괴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플라톤의 저작이 초기 기독교 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통찰은 그의 묵시적 흥분이 사라진 오랜 후에도 기독교에 대한 우리 이해에 인문주의가 남긴 유산 중 하나였다. 서방 기독교 문화의 가장 중요하고 독특한 특징의 하나는 사회로부터 물러서서 과거 문화를 자신들만의 언어로 이해하려는 것이다. 1440년에 건축가이자 미술이론가인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가 이끌었고 그 지방 영주인 추기경 프로스페로 콜로나(Prospero Colona)가 후원했던 일군의 인문주의 친구들이 고대 세계에서는 전례가 없었고 아직까지 존경받는 학문분야로 인식되지 않았던 고고학을 거의 최초로 시도했다. 일군의 흥분한 군중과 교황청의 모든 지도자가 참석한 가운데 네미(Nemi) 호수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두 척의 거대한 로마 배 중 하나를 인양하려고 했다. 그들은 잘 몰랐지만 그것은 칼리굴라 황제가 주문한 유람선이었다. 그들은 선체를 쪼개는데 성공했고 그들이 회수한 파편들을 분석하여 그동안 망실되었던 로마 조선술을 스스로 터득했다. 교황은 자신들이 발견한 지식의 일부를 로마교회 지붕 건축에 다시 적용했다. 이런 선구적 고고학자들은 과거의 물품을 발견함으로써 현재가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과거가 현재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해서도 거의 최초로 알게 되었다. 그들은 똑같은 생각을 문헌에도 적용할 수 있었다. 그리스어를 재발견한 기쁨 외에 인문주의자들은 라틴어와 그 문화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되었다.
- 그들은 기원전 1세기에 정치가에서 철학자로 변모했던 마르쿠스 둘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그를 존경했던 영어권 독자들에게는 툴리(Tully)로 알려졌다)에 대단히 열광하게 되었다. 공직에 있었던 인문주의자들은 정부에 대한 키케로의 상세한 논의를 깊이 숙고했다. 그가 매우 불행했던 정치가였다는 불편한 진실은 무시한 채 말이다. 또한 1421년 연설에 대한 키케로의 논문이 북이탈리아의 로디(Lodi)에 위치한 대성당 도서관에서 발견되었을 때 이 책은 강력하고 설득력 있는 라틴어 산문의 이상적 모델로서 그의 명성을 확고히 해주었다. 키케로처럼 글을 쓰는 것이 모든 교양 있는 젊은 학자들의 야망이 되었다. 인쇄술, 화약, 그리고 대포를 위한 단어를 새로 만든 것처럼 불가피한 적응을 고려해 볼 때 말이다. 이런 인문주의자들의 문체는 그 이전의 수 세기 동안 스콜라 철학자와 신학자들이 말하고 썼던 라틴어와 많이 달랐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 문장이 어떻게 구성되고 어떤 단어가 사용되었는지를 보면 인문주의자의 산문과 스콜라적 문헌을 구별할 수 있다. 그런 대조는 인문주의 필사자들이 자신들이 선택한 고대 글씨체의 "로마적" 특징을 흉내 낼 때 더욱 분명해졌다. 사실 그것은 그 이전의 르네상스 때 카롤링 필사가들이 더 오래된 사본을 필사하기 위해 사용했던 고대 필기체 (minuscule)였다. 남유럽의 일부 인쇄업자들이 그들의 서체를 모방했는데 당신이 지금 여기서 읽고 있는 것과 비슷한 활자체를 만들었다. 그것은 다른 인쇄업자들이 중세 필사체를 모방하여 사용했던 고딕체와 전혀 달랐다.
- 마틴 루터의 경력에서 대중의식 속에 각인된 두 사건이 있다. 첫째, 그가 비텐베르크의 한 대문에 몇 가지 주제를 못 박은 것. 둘째, 그가 화장실에 앉아 있는 동안 영적 위기를 거쳐 새로운 신앙에 도달한다는 것, 즉 그의 "탑 경험"(Tower experience 혹은 Turmerlebnis)이다.
- 헨리 통치의 특징인 종교적 역설의 하나는 결과적으로 자기 때문에 죽은 사람이 번역한 성경을 헨리 자신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틴데일이 죽고 1년 후 토마스 크롬웰은 잉글랜드 모든 교구가 성경을 구입해야 한다는 왕실 명령을 받아냈는데, 그 성경의 대부분을 틴데일이 번역했던 것이다(헨리 8세는 결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것은 모든 영어 성경, 특히 1611년 흠정역 성경(the Authorized or Kimg James)의 조상이다. 틴데일의 전기 작가 데이비드 다니엘(David Daniell)은 흠정역 신약성경의 9/10가 틴데일의 것이라고 직설적으로 밝혔다. 1547년에 왕 헨리가 죽을 때까지 잉글랜드의 전통 종교는 심각한 공격을 받았다. 헨리의 신민들이 완성된 형태로 성경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 성경은 영국 복음주의자들이 틴데일의 업적을 토대로 만든 것이다. 물론 1543년의 예측할 수 없는 정책의 변화 속에 왕 헨리는 무지한 백성들에게 그 성경을 금지시키려 했는데, 그들이 함부로 그 성경을 읽었다가 급진적 사상에 오염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가 복음주의자들에게 몇 가지 중요한 양보를 했지만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모든 수도원, 수녀원, 그리고 탁발 수도원을 폐쇄함으로써 옛 신앙에 치명타를 날렸다. 이것은 유럽에서 최고의 행정조직을 갖춘 종교 공동체를 향해 전개된 가장 신속하고 철저한 공격이었다. 그 해산은 토마스 크롬웰이 권력을 쥐고 있던 기간에 그의 지휘 하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크롬웰이 처형된 후에도 왕과 그의 참모들은 챈트리 재단(chantry foundation)을 조직적으로 해체함으로써 망자를 위한 기도의 중심지를 더욱 거세게 공격했다. 그들은 그런 공격의 이념적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채 단지 헨리에게 돈이 필요하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1547년에 잉글랜드를 위해 보다 이념적으로 일관된 종교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 개혁을 헨리의 어린 아들 에드워드 6세가 열정적으로 추진했다.
- 그 책의 한 가지 독특한 특징은 그것이 기록된 언어다. 심지어 그 책의 내용에 대해 불평하는 사람들조차 예외 없이 그 언어에 존경을 표하고 있다. <공동 기도서> 원본이 구성된 과정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하지만 기도서 문구 배후에 하나의 강력한 목소리가 존재하는 것만은 확실하며 그것은 크랜머임에 틀림없다. 라틴어, 독일어, 영어로 된 엄청난 양의 자료들을 탁월하게 이용하고 변형하는 방식과 그 책 속에 부여된 통일성은 크랜머가 단지 초안준비위원회(a drafting committee) 의장 그 이상이었음을 보여준다. 비록 틴데일의 대화적이고 극적인 특성은 없었지만 그의 문학적 천재성은 공적 표현에 적합했고 바닷가의 조약돌처럼 부드럽고 단단해진 단어들은 세대가 흘러도 진부하거나 싫증 나지 않게 사용될 수 있다. 그 대주교는 처음에는 잉글랜드에, 다음에는 전 세계에 일종의 예전적 드라마를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그는 예배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을 통해 그 거룩한 드라마가 진행되길 소망했다. 그리고 그 소망은 현실이 되었다. 그의 <공동 기도서> 문장들은 영어권 사람들에 의해 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연설과 독백보다 훨씬 더 자주 암송되었다. 일부 문장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알고 있을 정도다. "부요할 때나 가난할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아끼고 사랑하길." 혹은 인간 경험의 다른 중요한 순간에, "흙에서 흙으로, 재에서 재로, 먼지에서 먼지로," 크랜머의 문장은 영어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의 공통된 유산이다. 그의 시대에 영어는 유럽 문화생활에서 대단히 소외되었지만 지금은 지극히 보편적이다.
- Lighten our darkness, we beseech thee, O Lord; and by thy great mercy defend us from all perils and dangers of this night; for the love of thy only Son, our Saviour Jesus Christ, Amen.
["Death us do part"는 크랜머가 처음에 썼을 때는 "death us depart"였다. 하지만 그"depart'의 의미가 변했음에도 계속 살아남았다.]
- 1550년대의 침체 속에서 개신교를 이끈 남자는 한 망명 중인 프랑스 인문주의 법률학자였다. 그는 이탈리아와 스위스를 여행한 후 우연히 스위스 변방의 도시 제네바(Geneva)에 1536년에 도착했다. 그의 이름은 존 칼빈(John Calvin)이었다. 그는 결코 제네바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이 어떤 목적을 위해 자신을 그곳에 보내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극심한 내적 갈등 끝에 그곳에 머물며 하나님의 사역을 이끌기 시작했다. 그는 한 차례 실패를 겪은 후 제네바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그 때문에 그는 부처가 있는 스트라스부르에 가서 종교개혁이 어떻게 실행되고 있는지를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제네바 인들이 극도의 혼란에 빠져 칼빈을 다급하게 다시 불렀을 때 그는 제네바에서 보다 나은 스트라스부르를 건설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541년에 시 당국이 그에게 초안을 부탁했던 <제네바 교회 규정>(Ecclesiastical Ondinances)에서 그는 부처가 스트라스부르 교회의 재구성을 위해 마음에 품고 있던 계획을 실천에 옮겼다. 그것은 주교, 사제, 부제라는 전통적인 삼중 제도가 아니라 사중 제도였다.
(리뷰자 주 : 20장은 다른 역자가 번역한 게 아닌가 싶다. 문장 느낌이 달라졌다. 일부 혼용되었던 '주교'와 '감독'이라는 단어가 완전히 바뀌어 번역된 점도 유의.)
- 제임스를 배제시키려는 노력들로부터 그를 구하기 위한 찰스의 전략은 대서양 제도 전역에서 경쟁관계에 있던 잉글랜드 국교회 내의 한 정치 집단과 왕실이 동맹을 맺음으로써 제임스를 배제시키려던 휘그당(Whig)의 반대를 억누르는 것이었다. 그들은 보다 급진적인 개신교 라이벌들에 의해 "토리당"(Tories)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것은 아일랜드의 가톨릭 산적을 부르던 모욕적 이름이다(비슷하게 휘그당도 개신교인 스코틀랜드의 가축 도적을 부르던 명칭이었다). 토리당은 세 왕국의 국교회에서 감독이 다스리는 정치제도를 옹호하던 개신교인들이었다. 그들은 경쟁하던 개신교인들을 억압하고 (아일랜드에서) 가난한 가톨릭들의 분노를 극복하도록 도움을 준 왕실의 후원에 대한 답례로 감독과 왕의 신적 권위를 열정적으로 지지했다. 찰스 2세는 자신의 동생을 가장 유리한 위치에 올려놓은 후, 1685년에 죽었다. 하지만 제임스 2세는 찰스가 한 정당의 하수인이 됨으로써 성공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동료 가톨릭들의 이익을 증대시키려는 제임스의 계략이 토리당의 반발을 불러오자 그는 토리당을 버렸다.
- 알프레드의 후계자들인 에델스탄(Aethelstan, 924-39년 재임)과 에드가(Edgar, 944-75년 재임)는 비드(Bede)의 저서들과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회에서 예견했던 통일된 잉글랜드를 건설했다. 영국의 통일은 민족주의적 성향이 농후한 자부심을 분출시켰고, 그것은 잉글랜드국교회에 독특하고 자극적인 영향을 끼쳤다. 잉글랜드의 개혁은 에드가 왕이 주교와 대주교로 임명했던 일군의 위대한 개혁가들의 작품이었다. 에델스탄 왕의 충복이자 전직 수도승이며, 963년부터 에드가의 왕도인 원체스터의 주교였던 이텔올드(Aethelwold)는 학자요 열정적인 교사였다. 그는 부패한 수많은 수도원들이 자신들의 삶의 표준으로 베네딕트회의 규칙을 채택하도록 영향을 끼쳤으며, 자신이 그 규칙을 라틴어에서 고대 영어(Old English)로 번역했다. 잉글랜드국교회에 끼친 그의 특별한 영향은 유럽의 다른 곳에서는 쉽게 찾을 수 없는 독특한 특징을 지녔으며, 그것은 1066년의 노르만 정복 이후까지 지속되었다. 즉 16세기 헨리 8세 때 해체될 때까지, 주임사제와 참사회원 대신 탁발승과 수도승을 보유한 잉글랜드국교회는 수도원 기능을 함께 했던 것이다. 수도인 윈체스터(Wincester)가 그런 경우였고, 워체스터(Worchester)와 캔터베리(Canterbury)도 그러했다. 비록 요크 '민스터'(Minster)의 성당 참사원들은 수도원적 삶으로 재구성되길 거부했지만 말이다.
- 더욱이 클뤼니 원장들은 자신들의 영적 제국 성장의 특별하고 국제적인 목적을 발견했다. 거대한 수도원들의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자신들의 교회를 어떤 유명한 성인의 분파적 중심지로 만들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가톨릭 제국의 남서부 변방, 즉 스페인 북서부 지역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캄포스텔라(Campostela) 시에 소재한 한 성소를 바라보았다. 9세기부터 캄포스텔라 성당은 최초의 12사도들 중 한 사람의 육신을 보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스페인어로 산티아고(Santiago)인 야고보 말이다. 유럽 전역에서 경건한 신자들이 그 먼 이베리아 반도의도시까지 멀고도 험한 여행을 시도했다. 전략적으로 부르고뉴에 위치한 클뤼니는 유럽의 길들을 따라, 이 여행객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때 각 지역에 세워진 소수도원들이 그 여행을 위한 길 안내 및 숙박을 제공했다. 캄포스텔라 순례는 11세기 동안 만개했던 유럽의 성지순례라는 대규모 사업의 유일한 중심이었다. 그 시대에 지어진 거대한 교회들 중 지금까지 남아있는 대부분의 것은 순례길 사이의 중간 휴식처나 목적지로 건축된 것이며, 그것들의 건축양식은 클뤼니를 본뜬 것이다. 캄포스텔라 도상에 위치한 성 에델드레다의 엘리 성당, 막달라 마리아의 베즐레 수도원, 툴루즈의 성 세르넹 성당, 혹은 캄포스텔라 성당 자체의 중앙 대문을 들어서면, 클뤼니 교회의 사라진 부분이 어떠했을지에 대해 감을 잡을 수 있다. 주랑(nave, 교회 중앙의 중심 공간)은 길고, 동굴 모양의 천정 (vault, 건물에서 아치들이 배열되어 이루어진 구조물)으로 이루어진 길로서, 순례객을 멀리 떨어진 제단으로 인도한다. 제단 주위에는 앰뷸러토리 (ambulatory)라고 불리는 통로가 있어, 교회 전체의 원형구조를 완성한다. 각 교회의 입구 상단에는 엄위하신 그리스도(Christ in Majesty)나 피조물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부조가 있어, 순례의 목적을 상기시켜준다. 천국이라는 멀리 떨어진 목적지 말이다. 그 교회들은 중세 조각예술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감동적인 표본들에 속한다.
- 결국 1215년에 라테란 궁에서 개최된 그 위대한 교회 회의는 이 규칙의 과도한 엄격성을 약화시키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했다. 이처럼 친화성에 대해 황당할 정도로 과도하게 통제한 근본적 동기(물론 결혼을 규제하려는 교회의 일반적 관심이 일차적 동기였다)가 가족 내의 광범위한 유산 상속자들 대신 교회에 재산이 남겨지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소망이었다고 냉소적으로 발언하는 것도 가능하다. 합법적 결혼에 더 많은 제약이 가해질수록 불법적 상속자들이 존재할 가능성도 많아졌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더 많은 토지와 재산이 교회의 것이 되었다.
- 예를 들어, 잉글랜드의 북쪽 끝에 있는 덜햄 성당(Durham Cathedral)과 파리 북쪽에 재건축된 생드니(St-Denis) 왕실 수도원 모두 12세기 초반에 건축되었다. 장엄한 이 두 교회들과 그 이후의 다른 교회들에서, 건축가들은 수치스럽게 붕괴되지 않고 대담하게 하늘에 도달하려는 건축공학의 기술적 도전과 씨름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15세기 르네상스 이탈리아인들이 "고딕"이라고 명명했던 양식이다. 그들은 이 양식을 가톨릭 신자들 내에서 오래전에 사라진 야만인들과 연결지은 것이다. 고딕 성당만큼 암흑시대와 이질적인 것도 없을 것이다. 그 성당은 빛으로 가득한데, 그곳에 들어오는 모든 이에게 기독교적 진리의 빛에 대해 알려주도록 설계되었다. 12세기 초반에 이 새로운 양식의 개척적 후원자였던 생드니의 수도원장 쉬제르(Suger)는 위-디오니시우스의 저작들에 심취했다. 정체가 모호한 그 동방 신비가를 자기 수도원의 수호성인인 갈리아-로마의 순교자 성 드니로 오해하면서 말이다. 자신의 수도원 교회를 새로 멋지게 증축한 후 쉬제르는 청동 대문에 글을 새겼다. 그 글은 한 무명 시리아 단성론자가 물리적 빛의 성질을 영적 각성의 경험과 연결 지었던 내용을 담고 있다. 돌로 지은 교회가 다음과 같이 변형될 수 있었다.
고귀한 사역은 찬란하도다.
하지만 고귀하게 찬란한 그 사역은 마음을 비추어,
그 마음이 참된 빛들(true lights)을 통해
그 참빛(the True Light)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
그 빛에서 그리스도가 참된 문이시다.
- 1307년부터 1312년까지 성지 재탈환에 기여할 기회를 잃은 것이 분명해지자 성전기사단 전체가 탄압을 받았다. 그것은 그 기사단이 성지 탈환에 실패하고 동지중해와 서유럽까지 확장된 영토에서 계속 부와 권력을 유지해야 할 명분이 약화됨으로써 초래된, 이해할 만한 반응이었다. 그들을 존중했던 11-12세기 군주들과 귀족들이 이 모든 토지들을 제공했으나 이제 그들의 후손들은 그것이 현명한 투자가 아니었다고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기사단의 해체는 고문을 통해 신성모독과 성적 방종이란 죄를 뒤집어 씌워 이룬 것이다. 특히 이것은 부도덕한 프랑스 군주 '공평왕' 필립에 의해 조작된 것이다. 이 기사단의 해체는 극도로 잔인하게 이루어져, 단장부터 아랫사람들까지 비참한 생존자들과 이단으로 고문당하고 화형 당한 사람들에 대해 대중들의 동정이 일어났다. 18세기 이후 그들의 운명은 수많은 음모론의 영감이 되었다. 구호 기사단은 이 위기를 잘 극복하고 살아남았다. 그리고 동지중해의 요새에서 이슬람을 방어해낸 영웅적 행위로 인해 17세까지 유럽의 존경을 계속 얻을 수 있었다. 또 다른 무장 기사단인 독일 기사단은 성전기사단의 운명을 지켜보며 교훈을 얻고 13세기에 중동에서 패배를 경험한 후 자신을 완전히 재조직했다. 즉 북유럽으로 이전한 후, 발트해 연안에서 멀지 않은 마리엔부르크(Marienburg, 폴란드어로는 말보르크 Malbork)의 비스툴라 강(the River Vistula) 지류에 자신들이 예루살렘에 세웠던 병원을 그대로 재건했다. 여기에서 기사들은 리투아니아에 남아있던 유럽 최후의 비기독교 세력과 싸울 수 있었다. 비록 모든 라틴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잔인함과 권력추구를 존경한 것은 아니지만, 15세기까지 그들에 대한 후원의 물결이 독일뿐만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처럼 먼 곳에서도 꾸준히 이어졌다. 그 기사단은 발트해 주변에 일련의 식민지를 건설했다. 이 식민지들은 문화적으로 기독교적이면서 독일적이었고,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를 희생한 대가로 얻은 것이다. 1386년에 리투아니아인들이 라틴기독교로 회심함으로써 그 기사단은 자신의 진정한 목적을 상실하며 당황했다. 대신 기사단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등을 돌리고 자신의 엄청난 경제적, 정치적 이익을 위해 계속 싸웠다. 비록 두 민족이 이제는 한 명의 군주에게 충성을 맹세한 완전한 가톨릭 기독교인들이란 사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결과 이 기사단은 1410년에 타넨베르크(Tannenberg)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에게 괴멸당했다. 하지만 그들은 완전히 해체되지 않았고, 그 일파가 16세기 종교개혁에서 개신교인들이 장악한 독일 북부지역에 살아남았다.
- 그래서 적이었던 이슬람에 대항하여 시작된 일종의 성전이 결국 기독교인들끼리의 싸움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런 비논리적 발전의 전례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이전에 기독교인들을 대항해 벌인 싸움의 일부는 반란자들과 벌인 것이었다. 1209년부터 교황은 남 프랑스에서 '순결한 자들'(그리스어로 카타로이 <Catharoi>나 카타르<Cathars>)로 알려진 운동의 위협으로부터 서방 라틴교회를 방어하기 위해 십자군을 소집했다.
- 그들은 물질의 악, 그리고 영적 정결을 성취하기 위해 물리적인 것을 초월해야 할 필요성을 믿었다. 이 운동의 그리스 명칭은 이 운동이 수 세기 동안 그리스계 동방에서 재현된 이원론적 신앙에서 기원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런 흐름의 최신판은 8세기 이후 비잔틴 제국에서 현존해 온 바울파(Paulicians)였으며, 그 뒤를 보고밀파가 이었다. 카타리파는 제1차 십자군 원정 동안 콘스탄티노플에서 보고밀파와 라틴세계의 접촉으로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분명히 동시대인들은 동방과 관계를 맺었다. 즉 영어 단어 'bugger'(욕설의 일종)는 Bulgarian (불가리아인)에서 기원한 것이며, 이단은 자신의 비자연스런 특성 때문에 성적 방종으로 경도된다는, 적에 대한 주류 기독교인들의 일반적 유언비어를 반영한다. 카타리파는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고 독일에서 자신들의 위계질서를 확립했다. 이것은 그레고리우스 개혁에 의해 형성된 획일적이고 강력한 성직 구조에 대한 직접적 비판이었다. 육체에 대한 카타리파의 이원론적 거부는 육체적 위계질서로 보일 수 있었던 것에 대한 거부였다.
- 11세기와 12세기의 다양한 수도원 운동에서 또 하나 중요한 산물은 아우구스티누스 운동이었다. 이렇게 불리게 된 이유는 이 운동이 베네딕트가 아니라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통제하에 있던 종교 공동체들을 위해 만들었거나, 혹은 그가 만든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일련의 발언 및 간단한 규칙을 주목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은 베네딕트 규칙보다 훨씬 더 일반적이고 간단했기 때문에 호소력이 있었고, 다양한 환경에 처한 공동생활을 위해 채택될 수 있었다. 각 아우구스티누스 회 공동체 회원은 하나의 규칙(Rule, Regulam)하에 사는 사제로서, 비수도원적 성당과 대학의 '세속' 수사신부(secularcanons)와 반대로, '정규' 수사신부(Canons Regular)로 알려졌다. 그들의 사제적 의무 때문에 그들은 평신도들에게 목회적 돌봄을 제공할 수 있는 곳으로 갔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에 대해 시토회 수사들과는 정반대의 태도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마을을 새로 발전시키는 데 헌신했으며, 성과 부자들의 집 근처에 수도원을 세웠다. 흔히는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어려웠던 기존의 큰 교회들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들은 경건한 사람들의 보편적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기 때문에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들의 공동체는 베네딕트나 시토 수도원만큼 규모가 크거나 부를 쌓으려고 하지 않았다.
- 최소한 성당 학교는 교회 제도의 일부였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는 규모와 재산 면에서 북유럽의 어떤 곳보다 큰 도시들이 있었고, 11세기 동안 그 도시들은 자신들의 학교를 발전시키고 재정적으로 후원했다. 이 학교들의 모델은 기독교 세계 밖에서 왔다. 그들은 무슬림들이 자신들만의 지적 탐구의 보편적 문화를 위해 만들었던 고등교육 기관들, 특히 카이로에 있는 알-아자르(AI-Azhar)의 훌륭한 학교를 기막힐 정도로 상세하게 모방했다. 강의, 교수, 학위처럼 지금은 낯익은 제도들 말이다! 이것들이 최초의 기독교 대학들이었다. 기독교적이었지만, 교회 당국의 통제하에 있지는 않았다. 교회의 후원을 받은 경우들이 예외적으로 한두 번 있었지만, 이탈리아 대학들은 장차 수 세기 동안 평신도 중심의 특성을 굳건하게 유지했다. 심지어 교황이 새로운 설립을 허가했을 때에도 이슬람의 전례를 따라 볼로냐(Bologna) 같은 기관들의 경우 신학보다 법학이 더 강조된 학문이었다. 그것들 외에도, 몇몇 북유럽의 성당 학교들이 대학들로 발전했다. 파리 대학이 12세기 유럽에서 신학 탐구의 중심이 되었고, 이 대학의 신학부(후에는 소르본느로 알려졌다)는 교황들이 논쟁적인 문제들에 대해 전문적인 자문을 요청할 때마다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런 자문 역할은 기독교에서 완전히 새로운 발전이었다. 이것도 이슬람의 종교법학자들이 이슬람 세계에서 통치자들에게 자문했던 방식으로부터 빌려온 또 다른 예다. 이 모든 기관은 새로운 지적 생활을 가능케 했다. 즉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간의 고대적 대화의 새로운 무대가 마련된 것이다. 이제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식인들을 열광시키면서 정보를 제공했다. 이전에는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 약간 차이가 있지만 플라톤이 기독교 사상을 지배했다. 오직 보에티우스만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적 체계들을 많이 다루었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보에티우스 자신도 플라톤에서 기원한 세계관에 깊이 침잠했고, 그것을 서방 기독교 내에 배양한 주요 인물 중 하나였다. 서방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역으로 이슬람 세계의 학자들과 무슬림들이 보호했던 유대인 공동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의 저작들은 대체로 동방교회 학자들에 의해 보존되었다. 점차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이 서방에 도착했다. 첫 번째 유입은 1083년에 톨레도의 무슬림과 그곳의 도서관들을 스페인의 기독교인들이 점령했을 때, 그리고 그 후에는 십자군운동 기간의 접촉을 통해 발생했다(이것은 그런 접촉의 긍정적 결과들 중 하나였다). 일단 그 저작들이 라틴어로 번역되자 그 효과는 엄청났다. 고전적 지식을 담고 있던 문헌들에 의해 새로 힘을 얻은 서방 사상은 "12세기 르네상스"라고 불린 또 다른 갱신운동을 체험했다. 초기의 극심한 공적 적대감에도 아리스토텔레스와 세상에 대한 그의 분석적 접근, 그의 탁월한 논리적 사고는 기독교 신학자들의 플라톤주의와 대결했다. 고대 사상에 대한 아랍 및 유대학자들과의 대화에서, 특히 이성의 작용을 기독교 신앙의 계시된 진리와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하는 오래된 문제를 논의하면서 논쟁이 벌어졌다.
- 세 개의 계시 종교가 동일한 문제에 직면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고방식은 인간 지성에게 닫혀있는 특별한 신적 지식의 은총 없이도 세계는 이해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비록 이 논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때때로 자신들의 반대자들을 이단으로 정죄할 정도로 서로 간에 의견이 매우 달랐지만, 그 운동은 "스콜라주의"라는 용어로 요약될 수 있었다. 새로운 대학인 스콜라(Scholae)의 사상과 교육방법. 본질적으로 그것은 토론을 통해 지식을 쌓는 방법이었다. 즉 질문, 주장, 부정, 반박, 그리고 그 논쟁을 조화시키려는 최후의 노력. 그것은 권위자들을 존중했으나 이것은 놀랍고 예상치 못할 정도로 확장된 권위의 기구였고 그 안에도 불일치는 존재했다. 스콜라주의는 논쟁적이고 회의적이며, 분석적이고, 대부분의 서방 지성인들이 스콜라주의 자체와 이별한 후에도 오랫동안 서방 지적 탐구의 특징으로 남아있었다. 또한 그것은 이슬람의 고등교육에서 사용된 방법을 채용했었다. 십자군 시대에 발전한, 라틴서방의 문화적 일치의 위대한 표현 중 하나가 정작 서방이 그토록 파괴하려고 노력했던 문화에서 기원했다는 사실은 행복한 아이러니다. 12세기 말엽 서방교회는 (새로운 조직인 대학에서 육성된) 스콜라 사상의 통제불능적 본성과 이단의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교회 내의 어떤 구조도 그 목적에 잘 부합하지 못했고, 이단의 성장에 대한 교회의 최초 반응은 억압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었다. 알비 십자군이 최악의 경우였다. 서방교회는 단지 성직자들의 끔찍한 상상력 탓으로 돌릴 수 없는 처벌의 충동을 드러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중부의 페루기아(Perugia) 시에서, 하나의 놀랄만한 새로운 운동이 1260년에 시작했다. 이것은 채찍질하는 고행자들(Aagellants)에 의해 일어났는데, 이들은 세상과 자신들의 죄에 대한 참회 행위로 집단적인 채찍 의례를 실천했던 평신도 집단이다. 그들은 한 겨울에 알프스를 넘어 중앙 유럽을 가로질러 멀리 떨어진 폴란드 영토에 이를 때까지 피를 흘리며 걸어갔다. 그 도중에 그들은 용서의 축제 속에서 지방의 다툼과 비극을 역전시켰다. "의견이 달랐던 거의 모든 사람이 일치를 이루었고, 고리대금업자들과 도둑들은 그들이 빼앗은 것을 서둘러 돌려주었고... 포로들이 풀려나고, 망명객들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라고 한 이탈리아 역사가가 열변을 토했다. 1260년에 그가 본 환상의 실체가 무엇이든 집단적 채찍 고행의 후기 이야기들은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 제4차 라테란 공의회는 평신도에게 적절한 성결을 제시하고 신앙과 경건 생활에 통일성을 부여하려는 그레고리우스 개혁의 목적을 구체화했다. 그래서 공의회는 유년기를 지난 모든 가톨릭 신자들에게 최소한 일 년에 한 번은 미사에 참석하여 성체(실제로는 빵과 포도주 모두가 아니라 빵만)를 받고 고해성사를 통해 그런 성례를 준비하도록 명령했다. 고해성사는 자신의 사제에게 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말한 것은 절대적으로 비밀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공의회 조항들은 특별히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대신 새로운 것은 그런 요구의 보편성이었다. 모든 사람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삶을 면밀히 검토하도록 한 것은 분명히 예외적인 조치였다. 이제 사제들이 자신의 양들을 돌보고 교육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목회적 돌봄과 설교를 위한 지침서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이런 지침에서 중요한 것은 성찬식에 참석한 신자들이 지금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공의회는 미사의 기적을 이해하기 위해 한 가지 철학적 설명을 추천했다. 즉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빵과 포도주의 형태로 성체 속에 담겨 있다고 주장했다. 이 빵과 포도주가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화체설"로 알려진 교리다. 주목할 것은 그 공의회가 그런 주장을 했을 뿐, 그것에 대해 상세한 분석은 제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반종교개혁 때까지 성만찬 신앙에 상당한 정도의 자유가 남아있었다는 뜻이다. 성찬식의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동일한 것이라는 일반적 믿음, 즉 "실재적인 현존"(Real Presence) 교리와 단지 이런 기적에 대한 한 가지 설명에 불과한 화체설 교리를 혼동하기 쉽다. 그 공의회가 추천한 설명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차용한 개념들로 표현된다. 성경에 존재하는 셈족 사고방식에 대한 일체의 언급 없이 '실체'와 '우연'이란 그의 추상적 개념들은 하나의 구체적 예를 통해 최고로 설명될 수 있다.
- 12세기 동안(언제 어디서 기원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나의 새로운 예전 전통이 미사에서 일반화되었다. 성직자들은 성체와 성배를 봉헌하면서 높이 들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에서 하셨던 말씀을 라틴어로 선포했다. Hoc est enim corpus meum("이것은 나의 몸이다"). 이 성체거양(elevation of the host)은 가톨릭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바라볼 때 초점이 되었다. 이것은 서방 라틴미사의 극적인 정점이다.
- 그 이전 세기 동안 왈도파 및 후밀리아티와 나란히 여인들이 수녀원에 들어가지 않고 독신생활을 하며 섬김과 기도생활에 헌신했다. 북유럽에서 이들은 베귄(beguine)으로 불리었는데, 이 명칭의 유래는 분명하지 않다. 그들의 변칙적인 지위는 교회 당국의 근심을 자아냈다. 그래서 그들은 점차 존경심과 동료애를 목적으로 함께 모이기 시작했고, "베귄회 수도원"이라는 공동생활을 위한 건물도 소유하게 되었다. 그들의 신분은 늘 의혹의 대상이 되었지만 말이다. 다른 그룹들도 도미니크회나 프란체스코회처럼 수도회로서 공적인 조직을 갖추는 데 성공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카르멜회 수사들(Carmelites) 혹은 백색 수사들(Whitefriars)이었다. 이들은 예루살렘 라틴왕국의 카르멜 산(갈멜산)에 살던 은자들의 비공식적 집단으로 시작했다. 아마도 이들은 1187년에 무슬림들이 예루살렘을 처음으로 재탈환했을 때 도피한 난민들이었을 것이다. 그 왕국이 완전히 붕괴되었을 때, 그들은 더 이상 그곳에서 살 수 없게 되어 지중해를 건너 서쪽으로 이주했다.
- 프란시스의 운동은 도미니크회처럼 수도회를 재조직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일체의 재산과, 함축적으로는 모든 조직사회를 거절하고 싶어 했던 "신령파"(Spirituals)로 양분되었다. 신령파의 주장은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결코 사유재산을 소유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초한 것이며 이렇게 고통스런 진리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고 사도 바울이 진지하게 고민한 문제이기도 했다. 신령파는 그 이전 세기에 시토 수도원의 원장으로서 신비적 성향을 지녔던 남부 이탈리아 출신 피오레의 요아킴(Joachim of Fiore)의 가르침을 받들었다. 그는 인간 역사의 과정을 숙고한 후, 그것이 성부, 성자, 성령에 의해 차례로 지배되는 세 시기로 구분된다고 확신했다. 그는 성령의 제3시대가 1260년에 시작될 것이며 세계가 수도원적 삶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아킴의 예언들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즉 그의 사후 50년이 지난 1254년에, 그리고 1260년이 끝나기 전날, 한 광신적인 프란체스코회 수사가 파리에서 요아킴의 저작들 이요한 계시록 14:6에서 예언된 "영원한 복음"으로서 신구약 성경을 대체했다고 선포했다. 아무튼 채찍 고행 운동이 처음 유럽에 출현했던 것은 1260년이었다. 요아킴의 사상은 예이츠(W. G. Yeats)와 로렌스(D. H.Lawrence)를 포함하여 근대까지 대단히 다양한 기독교인들과 배교자들을 지속적으로 매료시켰다. 맥 빠진 록음악 "물병자리 시대"(the Age of Aquarius)를 듣는 사람들은 새 시대의 도래를 꿈꾸었던 그 12세기 시토회 수사의 마지막 메아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 마침내 심지가 굳고 항상 존경할만한 성직자는 아니었던 요한 22세가 1318년에 신령파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그들 중 네 사람이 마르세이유에서 화형 당했다. 그리스도께서 완벽한 청빈 속에 사셨다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말이다. 성직자들의 부와 권력을 고려할 때 그것은 민감한 문제였다. 가장 극단적인 신령파들이 물리적 폭력으로 교회 권위에 도전할 준비가 된 운동을 이끌었다. 이 그룹의 한 지도자는 순교당한 제라르도 세가렐리에게 충성을 선포하기도 했다. 그들의 저항은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 이 시기를 가장 생생하게 문학적으로 환기시킨 작품은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유명한 소설, <장미의 이름>(The Name of the Rose)이다. 이 책은 1980년에 이탈리아어로 출판되었다.]
- 요아킴이 예언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처럼 1260년은 세상의 종말이 아니었다. 13세기 중반은 클뤼니의 개혁과 함께 시작했던 시대의 절정이었다. 사람들은 도미니크회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경력이 절정에 이르는 것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그레고리우스가 11세기 교회의 가장 결정적인 인물이었고, 클레르보의 베르나르가 12세기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였다면, 13세기에 아퀴나스의 사상체계인 토마스주의 (Thomism)가 중세 서방 신학의 결정적 순간을 대표한다. 그는 남부 이탈리아 아퀴노(Aquino) 출신의 귀족 아들이었지만 그의 경력은 당대의 국제적 특성을 보여준다. 당시에는 라틴어를 알면 스톡홀름부터 세비야까지 사회에서 중요한 인물들과 충분히 교류할 수 있었다. 도미니크회에 가입한 후, 그는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파리와 쾰른에서 계속 공부하며 사역했다. 아퀴나스의 방대한 저작은 아리스토텔레스(아퀴나스에게 그는 간단하게 '그 철학자였다)에 대한 서유럽 열정의 정점을 표시하며 그는 당시에 알려진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저작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힘을 불어넣었다. 특히 13세기 후반에 신학자들의 많은 반대와 의혹에 시달린 후 아퀴나스 저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이 기독교 신앙에 끼칠 부정적 영향에 대한 교회의 두려움에 종지부를 찍었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체계와 합리적 분석이 신앙의 중심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의 진리를 드러내며 심지어 증명해준다고 확신했다.
- 미사 중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아퀴나스의 찬미는 사람들의 삶이 점점 더 악화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대중의 반응이 차가웠던 때에 라틴 유럽을 위해 쓰여진 것이다. 대략 1200년 이후 거의 2세기 동안 북반구의 날씨가 더 추워졌다. 유럽의 농업은 비효과적이어서 권력을 가진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 사이에서 음식이 공평하게 배분되지 못했다. 지난 2세기 동안 인구 증가로 농업자원의 압력이 가중되면서 새로운 상황들이 사람들에게 불행을 더해주었다. 그런 배경과 종교적 신앙을 연결 지으려는 시도는 언제나 위험요소를 지닌다. 그것 외에 다른 많은 요소들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피조물 삶에 적극 관여하시는 인격체로서 하나님, 그리고 그리스도와 성모의 인간적 본질에 집중하는 독특한 형태의 서방적 경건이 13세기 동안 풍성하게 출현했다. 사실 이런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 탐구는 이전 세기에도 감지할 수 있었다. 11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캔터베리 의대 주교 안셀무스(Anselm)는 형식논리와 변증법에 대한 저작 외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열정적인 묵상을 저술로 남겼다. "주 예수 그리스도, 나의 구속자, 나의 자비, 나의 구원... 내 욕망은 얼마나 형편없으며 당신의 사랑은 얼마나 달콤한가!" 라틴어 단어 메디타티오(meditatio)는 안셀무스 사후 수십 년 후에야 그런 저작을 묘사하기 위해 처음으로 사용된 것 같다. 하지만 생전에도 이미 그의 묵상은 널리 회자되고 있었고 사후에 많은 모조품이 양산되었다(그것들 대부분은 새로운 저서들에 그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 중세 서방교회 경건이 이런 형태에서 상당히 다른 무언가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 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다. 특히 속세를 떠난 종교적 여인들 안에서 발견되는 개인적 신비주의의 발전. 서방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기독교 이야기에 대한 보다 개인화된 견해들이 출현했던 것과 함께 이런 경향에도 선례들이 있었다. 가장 유명했던 12세기 여성 신비가는 루페르츠베르크(Rupertsberg) 수녀원장이었던 빙엔의 힐데가르트(Hildegrad of Bingen)였다. 그녀는 피오레의 요아킴보다 한 세대 전에 자신의 환상을 기록했고 종말을 예언했으며, 그녀의 저술들은 당시의 수녀원장들뿐만 아니라 남성 학자들에게도 특이했던 관심사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신학뿐만 아니라 우주론, 의학, 작곡 등, 힐데가르트는 수도원에서 여성들이 남성들 못지않게 학문에 접근할 수 있던 시대의 끝 무렵에 연설하고 글을 썼다. 그녀의 생애 동안 최초의 대학들이 형성되고 있었는데, 이것은 오직 남성들로 구성된 조직이었다. 그 결과 서방 라틴문화의 지적 활동 대부분은 오직 남성들에게만 허용되었다. 그런 이유로 이제 여성들이 형식적인 지적 훈련에서 자유로운 영성에 그토록 매력을 느끼게 되었고, 그 속에서 마음과 상상력은 스콜라주의의 교리적 명제와 논쟁적 충돌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감추어진 것을 추구했다. 그런 신비가들은 침묵과 타자성을 강조하던 동방교인들에 가담하기 위해, 하나님에 대한 적극적인 지식을 중시하고 그분에 대한 기독교적 가르침을 긍정하던 서방 영성의 일반적 우선순위를 뒤집었다. 한 시골의 사제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익명의 14세기 영어 묵상으로서, 이런 전통에서 출현한 최고의 작품 중 하나인 <무지의 구름>(the Cloud of Unknowing)은 동방 영성의 신비롭고 전복적인 원천인 아레오파고스의 디오니시우스를 인용할 때 아퀴나스를 넘어섰다. 저자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가장 거룩한 지식은 무지에 의해 알려진 것이다." 신비주의의 또 다른 차원들은 교회의 중앙집권적 충동으로부터 신비가를 자유롭게 했다.
- 14세기 초반에는 새로운 종류의 음모자들이 첨가되었다. 사탄과 지상에서 그의 부하인 마녀들. 교황 요한 22세는 이미 신령파 프란체스코회처럼 교회의 적대자들이나 훼방꾼들을 통해 단련된 사람으로서, 지난 50여 년간 틀을 갖추어 온 마술과 요술에 대해 엄청난 학문적 토론을 이끌어냈다. 1320년에 그는 일군의 신학전문가들에게 특정한 형태의 사악한 마술 행위가 이단으로 정죄될 수 있는지를 검토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런 논쟁적인 입장은 마술, 주문, 그리고 악마와의 만남을 실체 없는 악마적 환상으로 취급했던 신학자들에 의해 이전에는 대체로 거부되었던 것이다. 그런 명령을 내리고 6-7년이 지난 후 그 교황은 칙령, "수페르 일리우스 스페쿨라"(Super illius specula)를 발표했다. 이 칙령은 어떤 마술 행위나 악마와의 접촉도 본질상 이단적이기 때문에 이단재판에 회부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것은 아직까지 자신의 때를 기다려야 했던 사상 중 하나였다. 당분간 마녀들은 교회에 의해 별로 시련을 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1세기 후 자신들만의 망상에 사로잡힌 새로운 종류의 선전가들의 도움을 받으며 서방교회와 그 뒤를 이은 개신교인들이 2세기 이상 동안 적극적으로 마녀들을 박해하게 된다.
- 정교회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과 클뤼니 수도원 교회처럼 서방의 중요한 교회들보다 훨씬 더 영향력 있는 단 하나의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다. 이것은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거룩한 지혜의 성당' (하기아 소피아, Hagia Sophia)이다. 이 건물의 구조는 클뤼니의 것보다 더 잘 보존되었지만, 후에 이슬람 사원으로 탈바꿈했던 이 교회의 운명은 정교회 역사의 트라우마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그림 5). 그것은 발칸반도 출신으로 라틴어를 사용했던 한 소년과 전직 서커스 단원 간의 협력, 즉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 황제와 그의 아내 테오도라(Theodora)의 협력을 통해 현재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우리는 451년 이후 칼케돈의 기독론적 공식을 거절했던 서방교회와 다른 교회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 영웅적이면서 제국주의적이었던 부부를 이미 만났다. 심지어 유스티니아누스가 527년에 그의 발칸 출신 삼촌이자 군인이었던 유스티노스(Justin)를 계승하기 전, 그들은 칼케돈의 양성론적 원수들과의 신학적 협상, 그리고 동방과 서방에서 군사적 정복이라는 이중적 전략을 통해 옛 제국의 재결합을 꿈꾸고 있었다.
- 그 다채로움은 궁정 역사가였던 프로코피우스(Procopius 혹은 Procopios)의 특이한 세 권의 저서들을 통해 드러난다. 그 황제의 공적인 업적과 건축물들에 대한 유려한 찬미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 포로코피우스는 동일한 사건들에 대한 다소 수다스런 설명인 <숨겨진 역사>(The Secret History)에서 유스티니아누스와 테오도라에게 격렬한 비판을 거침없이 퍼부음으로써 자신의 아첨에 대한 좌절감을 표출했다. 17세기에 교황의 바티칸 사서가 이 책을 재발견함으로써 그 시기에 대한 역사적 관심이 고조되었다.
- 유스티니아누스 이후 극심한 혼란기에 근대까지 서방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위대한 수도원 작가들이 동방 세계의 독특한 영성을 창출했다. 성 캐서린 수도원은 비잔틴 수도원 운동의 가장 중요한 형성자 중 한 사람인 사다리의 요한(John of the Ladder)이 살았던 곳이다. 그는 이 수도원의 원장으로서, 그가 저술한 영성 서적, <거룩한 상승의 사다리>(the Ladder of Divine Ascent) 때문에 그런 명칭을 얻었다. 6세기에 그의 동시대인으로 보이는 클리마쿠스는 성 베네딕트(St. Benedict)만큼 모호한 인물이다. 비슷하게 클리마쿠스도 오직 그의 저서를 통해서만 알려져 있다. 그의 책은 베네딕트의 책처럼 수도원 규칙서가 아니라 수사들을 위한 일종의 지침서로 간주된 어록집이다. 금욕생활의 발전을 사다리 계단에 비유한 것은 동방과 서방에서 기독교 신비주의의 주된 특징 중 하나다. 수 세기 동안 많은 신비가들이 하나의 목적을 향해 움직이는, 즉 내부로 여행하는 충동에 대해 말하며 글을 써왔다. 흔히 세상 사람들의 눈에, 그들은 정적(stillness)과 부동(immobility)에 몰두한 사람들로 보였지만 말이다. 정적이 목적이었지만 그 과정에는 엄청난 수고가 있다.
- 클리마쿠스처럼 막시무스도 독창성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과거의 메시지를 재진술하고 풍요롭게 했다. 하지만 그의 선택은 미래를 위한 지침이 되었다. 그의 원천들 중 하나는 알렉산드리아의 키릴(Cyril of Alexandria)이었다. 그는 키릴을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확고한 방어자로 간주했으며 오리게네스와 에바그리우스를 이전 세대보다 훨씬 신중하게 취급했다. 막시무스는 아레오파고스의 디오니시우스란 이름의 저자를 주목한다. 그는 다소의 바울이 아테네에서 회심시킨 소수의 사람들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이 '위-디오니시우스'의 저서들은 사실 막시무스의 시대보다 약 80년 전에 시리아에서 신플라톤주의에 심취한 한 그리스도인에 의해 편집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는 단성론에 우호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것은 강력한 칼케돈 주의자였던 막시무스의 관점에선 심각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위-디오니시우스의 경력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정교회의 신비서들 배후에 지속적으로 현존하고 있으며, 아일랜드 철학자 존 스코투스 에리게나(John Scotus Erigena)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된 9세기부터 서방 라틴의 신비전통에서도 강력한 목소리가 되었다.
- 막시무스는 이런 단활론(Monenergism)이나 단의론(Monotheletism)을 반대했던 주된 목소리 중 하나였다. 그는 하나님이 인간을 포함한 자신의 모든 피조물을 대단히 존중하시기 때문에 로고스가 정말 창조된 인간의 본성을 완전하게 취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을 허용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성육하신 그리스도는 온전하게 인간적인 활동과 온전하게 인간적인 의지를 가지셨음에 틀림없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극심한 고민 속에 있던 그리스도 예수님이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길 원하나이다"라고 고백하면서 아버지께 복종하셨을 때 그분은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신적 의지에 복종하기 위해 자신의 인간적 의지를 사용하신 것이다. 이것은 매우 용감한 주장이었다. 의지를 자기 결정으로 이해한 매우 새로운 접근이었다. 신학자는 말할 것도 없고 어떤 그리스 철학자도 이전에 이런 주장을 충분하게 표현하지 않았으며 의지를 그리스도 이해의 중심으로 삼지도 않았다. 그의 반대 때문에 막시무스는 황제와 총대주교의 명령으로 끔찍한 고통을 당했다. 더 이상 말하거나 글을 쓰지 못하도록, 그 고백자의 혀와 오른손이 잘렸다고 한다. 비록 그 주장이 새로운 것이었지만 그의 후기 저작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될 뿐 아니라 그의 확신 때문에 그가 비참한 형벌을 당했지만, 그의 주장은 동방교회 내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아랍의 군사적 성공에 직면해서 제국의 정치가들이 단성론자들과의 타협을 통해 정치적 혜택을 얻으려던 절박한 상황 때문에 그들이 잔인한 취급을 받았지만 일차적 원인은 막시무스가 아니라 교황 마르틴을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의론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더 많은 해를 끼쳤다. 막시무스는 680-81년에 제6차 콘스탄티 노플 공의회에서 단의론이 최종적으로 정죄되는 것을 살아서 보지 못했다. 그리스도의 인간적 의지에 대한 주장은 구세주의 고통에 인간적 친화성을 부여하는 주제다. 즉 그의 고통이 인간의 고통보다 훨씬 더 크지만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확신은 후에 정교회 내의 다양한 고통 속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힘이 되었다.
- 이것은 기독교인들에게 또 다른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들은 십계명의 수를 바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그것은 신명기 시대 이후로 유대교의 근본이 된 것이다. 하지만 십계명의 순서를 바꿀 수는 있었다. 순서를 재조정하는 것은 새겨진 형상에 대한 금지를 독립된 두 번째 계명으로 놔두는 대신 첫 번째 계명 안으로 집어넣는 것이었다(이것은 십계명의 수를 유지하기 위해 탐욕을 금하는 마지막 계명을 둘로 나누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내린 결론이었으며, 서방교회 전체가 종교개혁 때까지 이런 전통을 따랐다. 하지만 종교개혁 때에 일부 개신교인들은 그 질문으로 되돌아가서 십계명의 순서를 유대적 방식으로 재조정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그들은 전통적인 교회 미술에 대한 자신들의 깊은 적대감을 정당화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알았던 교회에서는 최소한 콘스탄티누스 이후부터 어쩌면 그전부터 성스러운 조각 미술이 일반적으로 용납되어 왔었기 때문에, 일상의 신앙생활에서 조각된 성상들을 신의 이름으로 금하는 것에 대해 강력히 저항했다. 아마도 사람들은 성상에 대해 특별한 존경심을 갖고 있던 동방교회가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십계명의 순서를 바꾸었을 것이라고 기대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동방교회는 오리게네스의 성경 주석에 충실했다. 오리게네스는 그의 신학 중에서 많은 부분이 정죄를 받았음에도 성경 주석자로서 계속 깊이 (그리고 정당하게) 존경을 받았다. 그는 십계명에 대한 문제들을 제기했고 십계명의 순서에 대해 유대인들의 전통에 확고히 서 있었다. 따라서 새겨진 형상에 대한 금지 조항은 제2계명으로 서 있게 되었다.
- 만약 여제 이레네(Irene)의 간섭이 없었다면 콘스탄티누스 5세가 승리하고 자신의 후계자를 위해 규범을 확립했을지도 모른다. 이레네는 콘스탄티누스 5세의 아들 레오 4세의 미망인이었다. 이레네는 780년에 레오가 사망하자 자신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의 섭정이 되었다. 비잔틴 역사에서 황제 집안의 여성들이 신학적 문제를 다루는 정치적 결정에 간섭해온 오래된 전통이 있었다. 칼케돈 공의회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던 풀케리아(Pulcheria) 이전에도 그런 경우가 있었고 이레네가 마지막 경우도 아니었다. 이제 그녀는 다시 한번 성상을 법적으로 인정하기 위한 공의회 소집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녀가 제국의 정책을 그토록 전면적으로 변경하려고 했던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후에 26세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의 진정한 권력자로서 자신의 힘을 발휘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했을 때 그녀는 자신이 직접 황제를 출산했던 궁전의 방에서 황제를 장님으로 만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그녀는 비잔틴 역사에서 독점적 통치력을 행사했던 최초의 여제가 되었다. 이것은 어떤 사색적 정신을 제시하기보다는 일종의 모성적 본능을 보여줄 뿐이다.
- 마침내 성상 파괴 정책을 뒤집은 것은 테오필로스의 여제 테오도라(Theodora)였다. 그런 정책 변경의 동기는 이례네의 경우처럼 테오도라를 숭배했던 정교회 전기작가들에 의해 영구적으로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일단 테오필로스가 사망하자 섭정인 테오도라는 총대주교 메토디오스(Methodios)에게 교회에서 성상을 복구하라고 명령했다. 843년 3월 11일, 사순절 첫 번째 주일에 이렇게 성상이 복구된 사건은 동방교회의 가장 중요한 축일 중 하나인 동방정교회축일(the Triumph of Orthodoxy)로 기념되고 있다. 그날에는 특별한 의식과 함께 성상들이 정교회 주변을 행진하며 그 결정에 대해 9세기에 작성된 문서가 낭독된다. 이 문서 <시노디콘>(Synodicon)은 성상의 보호자들로 간주될 수 있었던 주요 인물들의 목록을 극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그 사람들의 이름 뒤에는 "영원한 기억!"이란 감탄사가 뒤따른다. 자기 아들의 명성을 걱정했던 여제는 <시노디콘>에서 칭송받는 사람들과 나란히 정죄된 사람들의 목록에 황제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남편인 테오필로스가 포함되지 못하도록 했고 성상 파괴론자들에 대한 어떤 보복도 금지시켰다. 그들은 9세기 내내 자신들의 주장을 되풀이했지만 더 이상 국가적 차원의 후원을 얻지는 못했다.
- 정교회 성상의 특별한 본질은 이런 치열한 논쟁들에 의해 발달된 한 개념으로 더욱 강조되었다. 즉 아케이로포이에타(acheiropoieta)는 특별한 종류의 미술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손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예수님의 성상을 말한다. 그것의 원형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에데사의 왕 아브가르(Abgar of Edessa)에게 직접 주신 신비로운 만딜리온(Mandylion)이다. 만딜리온 전설의 발전된 형태는 성상 파괴 논쟁이 한창일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 물건들은 성상이 교회의 축복을 받지 못했다는 성상 파괴론자들의 주장을 무너뜨렸다. 하나의 특별히 거룩한 창조물이 어떤 트집도 물리쳤던 것이다.
- 테오도르는 성 사바스(St. Sabas) 같은 팔레스타인의 수사-성인을 대단히 존경했으며 스투디오스 수도원은 팔레스타인의 수도원들에서 들여온 예배 및 관련 서적들로 실험했던 실험실이 되었다. 고백자 막시무스 때부터 수사들의 여러 글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수도원 예배들은 곧 하기아 소피아의 예배와 결합하여, 교회 전체를 위한 예배의 모범이 되었다. 팔레스타인의 수도원들이 콘스탄티노플 교회에 제공한 것은 지금까지 비잔틴 예배의 핵심으로 남아있는 음악과 찬송의 전통이었다. 또한 8 선법(8 musical modes)이 발달된 곳도 바로 팔레스타인이었다. 그것들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카롤링 왕조와 서방교회에서도 음악 작곡과 성가를 위해 즉각 채용되었다. 그래서 그것들은 서양음악 전통의 기원이 되었다. 이전에 콘스탄티노플의 교회는 콘타키온(kontakion)으로 알려진 일종의 노래하는 설교가 지배적이었다. 이것은 찬송을 인도하는 사람과 후렴을 따라 부르는 성가대나 회중들 간의 대화다. 지금은 오직 하나의 콘타키온만이 관습적으로 사순절 5번째 토요일에 성모 마리아를 위한 찬송에서 온전하게 불려진다. 이것은 아카티스토스(Akathistos, 앉지 않는)로 알려져 있는데, 그 이유는 그 예배의 한 부분에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어 그 순간에는 모든 사람이 일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예배에 나타나는 다른 콘타키온들은 많이 축소되었다. 콘타키온을 대체한 찬송의 예전적 형태는 9개의 찬송으로 구성된 카논(canon)이었다. 이런 찬송들은 팔레스타인 수도원에서 성경에서 기원한 주제들에 대한 묵상들(이 묵상은 예배 시간에 행해졌다)로 시작된 것이다. 그 9개의 찬송들은 테오토코스(theotokos)에 대한 한 시에서 절정에 달했다.
- 9세기 "동방정교회축일"은 제국과 아르메니아 땅 동쪽에 다른 종류의 기독교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모호하게 만들어선 안 된다. 이런 반대자들은 성상을 사랑했던 수사, 수녀, 그리고 대중들이 성상 파괴적 주교들을 반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과격하게 공적인 교권 구조를 반대했다. 비록 이들이 그 이전의 이원론과 어떤 직접적 연관이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들은 신앙 면에서 영지주의자와 마니교도처럼 이원론자였다. 그들은 마르시온처럼 신약성경과 특히 바울에 대한 자신들만의 독특한 독서를 통해 영과 육 간의 깊은 차이를 강조하는 자신들만의 신학을 형성한 것 같다. 우리가 보았듯이 이 시기에 비잔틴제국 동쪽 멀리에 마르시온파들이 생존해 있었다. 하지만 그 새로운 이원론은 마르시온파와도 상관이 없는 것 같고 7세기 후반에 아르메니아에서 처음으로 발견된다. 그들의 적들은 그들을 "바울파" (Paulicians)라는 경멸적인 이름으로 불렀다. 아마도 이 명칭은 이들의 설립자 이름에서 기원한 것 같다. 하지만 바울에 대한 그들의 존경이 대단해서 마르시온의 예를 따르고 베드로가 저자로 알려진 두 개의 서신을 신약성경의 정경에서 제외시켰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분명히 바울 서신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베드로후서 3:16의 악의적 발언에 분노했기 때문이다.
- 심지어 라스티슬라프의 요구가 있기 전 그 형제들이 미래를 위해 대단히 중요한 사업을 시작했다는 증거가 있다. 즉 슬라브어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알파벳을 그들이 고안한 것이다. 그것은 고대 슬라브어로 "소리"나 "동사"를 뜻하는 글라골(Glagolic)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와 메토디오스는 일종의 표기 방법을 개발한 것 이상의 일을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독교 개념을 표현할 수 있는 추상적 용어들을 그리스어로부터 만들어내는 일에 깊이 몰두했기 때문이다. 조금도 과장하지 않고 글라골 문자 체제는 정말 특이하다. 현존하는 다른 어떤 알파벳과도 비슷한 점이 거의 없다. 그래서 불가리아인들이 자신들만의 슬라브어 표기법을 찾고 있었을 때 이 문자 체제는 결코 마음에 들지 않았다.
- 그래서 그 형제들의 시대가 지난 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다른 학자가 좀 더 쉬운 알파벳 체계를 불가리아에서 만들었다. 그것은 그리스 알파벳의 대문자체(uncial form, 4-8세기의 둥근 대문자 필사체-역주)에 훨씬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것은 키릴문자(Cyrilli)라고 불렸으며, 콘스탄티누스를 기념 하되 그가 생의 끝에 택했던 수도원적 이름인 키릴(Cyrl)에서 따온 것이다. 이런 명명은 매우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런 이름이 콘스탄티누스에게 훌륭한 명예를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사용자에게 불편했던 그 개척자의 문자 체계 대신 사람들이 그 새로운 알파벳을 좀 더 쉽게 받아들이도록 했기 때문이다. 글라골 문자는 오랫동안 살아남았으나 주로 슬라브 예전과의 관계 속에서 그랬다. 그것은 키릴 문자와 함께 칸 보리스-미카엘이 불가리아 예전을 위해 채택했다. 아마도 그는 프랑크족과 콘스탄티노플 교회로부터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방법으로 이런 혁신적 알파벳들과 그것들로 표현된 자국어 문학의 가치를 발견한 것 같다. 특히 두 알파벳은 기독교 신앙을 증진시킬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 서기 1000년경 콘스탄티노플은 유럽인이 알고 있던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당시 인구는 600,000만 명에 이르렀다.
(리뷰자 주 : 60만 명이 아닐까 싶다.)
- 사회의 정신이 회복되었다는 사실은 정교회의 승리에 기여했고 비잔틴 종교 형성에 영향을 주었던 제도들에 대한 열정적 긍정 속에 표현되었다. 궁정과 교회에서 사용했던 예식 기록에 큰 관심을 쏟았다. 비잔틴 황실의 공적 생활에 대한 정교한 설명이 학식이 뛰어나고 사색적이던 황제 콘스탄티누스 7세(945-59년 재위)에 의해 그의 후손들을 위한 지침서로 집필되었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신학적으로 논쟁거리가 된 네 번째 결혼을 한 후, 자신의 황실 출생과 신분의 합법성을 강조할 목적으로 "포르피로게네토스"(Porphyrogennetos, 왕가에 태어났다)라고 알려졌다. 아마도 그가 공식적 예식들의 적절한 순서에 그렇게 관심을 집중했던 것도 그의 출생의 비밀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이제 황실의 예식은 교회의 예식과 분리될 수 없게 되었다. 모든 중요한 교회 축제들에는 황실이 참석했고 예배 후에 총대주교와 함께 귀빈으로 행진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비잔틴 예배서들은(비록 그 이전의 것들을 복사한 것이지만) 10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은 모든 새로운 문헌의 규범을 확립하려는 강력한 욕구를 보여준다. 10세기 말에 황제 바실리우스 2세는 시메온 메타프라스테스(Symeon Metaphrastes, 번역자)를 후원하여 일군의 학자들이 매월 성인들의 삶에 대한 카탈로그나 메놀로기온(Menologion, 7월 1일로 시작한 축제일, 성자들의 날 등에 읽을 성경 교훈의 예배 책-역주)을 편집하도록 했다. 이것은 후에 성인전 모음집들 사이에서 특별한 권위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콘스탄티노플의 과거에 대해 열정적으로 연구한 사람이 다른 온갖 종류의 자료들을 수집해서 그 도시의 기념비와 보물들에 대한 문화재 안내서를 제작했다.
- 만약 팔레스타인에서 군사 작전이 없다면 그 협정은 다마스커스의 아이유브 왕조(Ayyubid ruler)와 맺은 1198년의 휴전을 존중할 것이다. 하지만 관련된 사람들이 치명적인 계산상의 실수를 저질렀다. 즉 그들은 동료 십자군들이 그 선단의 협정을 지키도록 만들지 못한 것이다. 또한 그처럼 엄청난 비용을 들여 만든 배들이 사람 수의 부족으로 텅 비게 된 것이다. 베네치아 인들은 자신들의 투자에 손해를 감수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이로운 방식으로 거래를 충족시키기 위해 십자군들이 리도 섬(the Lido)에서 야영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이로써 십자군원정은 이슬람의 카이로가 아니라 위대한 기독교 제국 비잔틴과 얽히게 되었다. 그 십자군은 비잔틴의 권좌를 요구하는 젊은 귀족, 알렉시오스 앙겔로스(Alexios Angelos)를 데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 새로운 계획은 충분한 가능성이 있었다. 그 원정의 열정적 후원자였던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점점 사건이 자신의 손을 벗어나서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그의 대행자였던 추기경 피터 카푸아노(Peter Capuano)가 십자군과 함께 독자적으로 행동함으로써 더욱 그랬다. 인노켄티우스는 1202년에 십자군들이 아드리아 해의 도시 자라(Zara)를 약탈했을 때 경악했다. 당시에 그 도시는 동료 십자군이었던 헝가리 왕의 통치하에 있었지만 베네치아 인들을 귀찮게 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더 심각한 일이 계속 벌어졌다. 1203년과 1204년에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고 이어서 비잔틴 제국의 황제를 계승하기 위한 죽음의 사슬이 이어졌다. 그중에 알렉시오스도 포함되었다. 그 결과 기독교 세계의 가장 부유하고 고상한 도시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요컨대, 정교회 신자들이 가톨릭 신자들을 증오하게 된 수많은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 그들이 정교회로 전환하는데 아토스 산이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세르비아에선 그 공국의 카리스마적인 아토스파 회원, 즉 스테판 플보벤카니의 형제 사바(Sava)에 대한 기억이 대단히 중요했다. 사바는 청년기에 아토스 산의 수사가 되기 위해 왕자의 삶을 포기했다. 후에 그의 아버지 스테판 네만자(Stefan Nemanja)도 그에게 합류했다. 그들은 함께 그 산에서 버려졌던 칠란다르(Chiladar, Hilander) 수도원을 재건했다. 그 후에는 사바가 세르비아에서 비잔틴식으로 신앙생활을 조직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자치권을 획득한 세르비아 교회에서 1219년에 최초의 대주교가 되었다. 비록 사바와 그의 부친이 수도원 생활로 돌아가기 위해 세속의 야망을 버린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성직자로서 그들의 신분이 그 나라에서 정치적으로 큰 영향을 끼쳤다. 칠란다르 수도원은 세르비아의 국가적 일치를 위한 외적 초점이자 동방정교회와의 일치의 상징이 되었다. 그 왕가는 자신의 권력에 비잔틴적 외양을 부여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토 내에서 보고밀파 이단들을 척결했다. 동시에 1200년경에 비잔틴 양식의 교회 회화들에 처음으로 글을 써넣을 때 세르비아어를 사용하도록 권장했다. 칠란다르는 그리스어로 된 신학 및 영적 저서들을 자국어로 번역하는 사업의 중심이 되었다. 이로써 슬라브어를 사용하던 다양한 민족들이 그 작품들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사바의 뛰어난 영적 명성 덕택에 세르비아의 권력투쟁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도 세르비아 왕조는 계속해서 성스러움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에 대한 기억이 세르비아의 민족적 정체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기 때문에 1595년에 오스만 터키가 세르비아 인들을 욕보이고 위협하려 했을 때 베오그라드에 있는 사바의 뼈를 파내어 공개적으로 불태웠다.
- 이처럼 1204년 이후의 복잡한 이야기들 때문에 정교회 구조가 바뀌었다. 1261년에 비잔티움으로 돌아간 황제들은 권력이 점차 약해지다 15세기에 종말을 고하게 되지만 명성을 유지할 수는 있었다. 역설적으로 이것은 이슬람의 통치 아래 살면서 콘스탄티노플의 통제를 벗어났던 멜키트파(the Melchites)의 경우에 특히 더했다. 그들에게 황제는 시간을 초월한 권위의 상징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현재의 상황에서 자신의 피조물을 위한 더 큰 계획을 갖고 계신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랬다. 그럼에도 정교회의 정체성은 제국의 생존과 밀접히 연결되지 않았고 교회의 생존이 더 중요한 문제였다. 총대주교는 니케아 출신의 왕족에게 제국의 권좌를 요구할 수 있는 합법적 권리를 부여했다. 동일한 총대주교가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교회의 독립에 영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또한 그는 새로운 교구들이 볼가 강, 흑해, 카프카스 산맥 주변의 제국 국경까지 확장되는 것도 승인했다. 14세기 말엽, 총대주교 필로테오스(Philotheos)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를 경악시킬 수 있었던 말로 러시아 왕실에 편지를 썼다. 물론 그의 말이 로마에 있는 누군가의 귀에 들릴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만 말이다. "하나님이 저를 이 땅의 모든 기독교인의 지도자로, 그들 영혼의 위로자 및 보호자로 임명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아버지요 교사인 저를 의지합니다."
- 1204년 이후 라틴기독교와 그리스 기독교의 관계가 엉망이 된 후에도 라틴문화와 정교회 문화가 지난 5백 년보다 더 가까워지고 보다 정기적으로 접촉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 시대의 역설이었다. 서로가 베네치아와 새로 획득된 식민지들을 통해 영향을 주고받았다. 베네치아의 경우 콘스탄티노플을 노략하는 동안 그곳에서 탈취한 고대의 청동 말 조각상 네 점뿐만 아니라 성 마가 성당의 외장과 내부를 개조할 목적으로 그리스 해안을 돌아 아드리아 해까지 운반해온 엄청난 수의 대리석 덩어리와 조각들을 포함한 수많은 예술작품들의 경우가 특히 그랬다. 놀랍게도 성 요한 크리소스톰, 성 바실리우스, 그리고 성 야고보의 영향을 받은 정교회 예배의 독특함이란 관점에서 볼 때 양 교회가 사용한 예배 찬송 속에 대단히 유사한 점이 남아있었다. 12세기 후반이나 13세기 초반의 고양된 분위기에서 그리스의 교회법학자이자 키트로스(Kytros)의 주교인 요한은 동방과 서방에서 찬송의 내용과 곡조가 동일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2세기 후에는 다성음악 같은 서양음악의 혁신들을 그리스 교회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진정, 그리스 예배 찬송과 서방의 평성가(plainsong)는 중세 기간 동안 별로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진정한 분리는 1453년에 오스만의 정복이 완성된 후 발생했고 그때 양자의 음악 간에 뚜렷한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동방교회는 파이프 오르간에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았다. 반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던 시절에 파이프 오르간은 서방 기독교인들의 음악적 상상력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사상의 영역에서 두 세계는 늘 조화로웠던 것은 아니지만 서로 간에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으로 그리스인들이 라틴어 문헌을 읽기 시작했다.
- 콘스탄티노플의 정치적 상황이 악화일로에 있던 시절, 교회는 헤시카즘(Hesychasm)으로 알려진 신비적 기도 방식에 대한 논쟁으로 혼란에 빠졌다. 주된 경쟁자들은 아토스 산 공동체 소속의 수사이자 헤시카즘 영성의 지지자였던 그레고리우스 팔라마스(Gregory Palamas)와 이탈리아의 종교적 변경으로서 라틴 및 비잔틴 수도원들이 공존하고 있었던 칼라브리아(Calabria) 출신의 수사 발람(Barlam)이었다. 헤시카즘은 그들을 싸움으로 몰아넣은 여러 문제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그것의 결과는 가장 치명적이었다. 헤시카즘이란 단어는 그 단어를 처음 접한 사람들에게는 가장 위협적인 신학용어의 하나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단어는 단지 "침묵한다"(혹은 침묵)란 뜻의 그리스어 단어 헤시카조(héychazo)에서 유래한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운반 도구로서 혹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은유로서 빛에 대한 신비주의의 특징적 사고는 고요(stillness)의 관념과 연결된다. 그레고리우스 팔라마스는 그런 기도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되지 않은 에너지, 즉 성령을 계시하는 신적 빛의 환상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공관복음에 묘사된 변화산 사건을 가리킨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다볼 산에서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있었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얼굴이 "해 같이 빛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따라서 라틴서방보다는 정교회에서 이미 대단히 정교하게 기념되고 있던 변화산 사건을 헤시카스트들이 성상의 주제로 가장 선호하게 되었다.
- 17세기 영국에서 내전 기간 동안 출현한 퀘이커 주의 말이다. 퀘이커 교도와의 가장 분명한 차이점은 헤시카즘의 독특한 경건 훈련 방식이다. 성상에 대한 묵상 외에 고요한 혹은 침묵의 기도를 구성하는 실천적 방식들이 있다. 적절한 몸의 자세와 정확한 호흡이 중요하며 한 가지 특징적인 방법은 경건한 문장 하나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것들 중 가장 일반적인 것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이다. 이 구절이나 그것의 변형들이 "예수 기도"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 일군의 기법들은 불교부터 이슬람의 수피들(이들도 인도의 영성을 수용한 것처럼 보인다)까지 기도에 대한 동양의 체계적 접근을 떠올리게 한다. 헤시카즘의 접근과 수피즘 간에는 직접적인 관련이 있어 보인다. 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지만 말이다. 헤시카스트들과 그들의 적대자들 모두 정교회의 과거에 호소했다. 사실 그들 모두 고백자 막시무스에게, 그리고 그를 넘어 자신의 사상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아레오파고스의 디오니시우스(Dionysius the Areopagite)란 이름을 빌려다 쓴 그 무명의 작가에게 눈길을 돌렸다.
- 비잔틴 대의원들은 교황의 지지기반이 적대자들의 것보다 훨씬 더 넓다는 것을 감지하고 교황의 초대에 응하여 처음에는 페라라(Ferara)에서 다음에는 피렌체에서 소집된 교황의 공의회에 참석했다. 비잔틴 측 인사들은 매우 진지한 자세로 회의에 참석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온 사람들의 수가 7백 명이 넘었고 총대주교 요셉과 황제 요한 8세가 그 속에 포함되었다. 사실 그렇게 많은 수의 기독교 대표자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은 451년 칼케돈 공의회 이후 처음이었고 20세기 에큐메니칼 회합 때까지 다시 볼 수 없었다. 1445년에 그 공의회가 막을 내리기 전까지 자주 그 모임에 모습을 나타냈던 동방 손님들(그들은 어려움에 처하여 도움을 구하러 온 것이다) 중에는 그루지야 정교회(Georgian Church), 동방의 칼케돈파와 비-칼케돈파, 단성론자인 이집트의 콥트교회, 심지어는 모두를 놀라게 했던 두 명의 에티오피아인들도 있었다. 결국 그 공의회 결과들은 비잔티움에게 헛된 것뿐이었다. 공의회 내내 토론 주제는 새로운 것이 없었다. 라틴인들은 필리오케(Filioque) 문구(이 간단한 라틴어나 그리스어 단어 세 개가 6주 동안 토론을 장악했다), 연옥, 누룩 없는 빵의 사용, 성찬식 기도문에 사용되는 단어들, 그리고 교황의 권위 같은 제한된 범위의 토론 주제들에 대해 어떤 실질적인 합의를 이끌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 Stringer, 124-5. 러시아 정교회에서, "cathedral"(대성당)의 함의는 서방의 용법과 다르다. 서방에서는 한 교구의 한 교회가 일반적으로 주교의 대성당이라고 불린다. 러시아에서는 한 거룩한 지역에는 주교와의 관계 때문에 대성당이라고 불리는 여러 교회들이 있다. 그것들 중에는 건축학적 열망은 그렇지 않지만 건물의 규모가 작은 경우가 많다.
- 이처럼 키예프의 영적 전통은 비잔틴 성인들의 유산을 창조적으로 확장했다. 그렇게 새로 형성된 교회에서 찬사를 받아야 할 첫 성인들은 블라디미르 공의 두 아들인 보리스와 글레브(Boris and Gleb)다. 왕족 중에서 창설자-성인을 선택하는 것은 충분히 예측할만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보리스와 글레브는 초기에 성인 후보들로 거론된 적이 없었다. 그들의 신성함은 그들의 죽음과 관련이 있었다. 그들은 신앙적 이유 때문에 순교한 것이 아니라 1015년에 블라디미르가 세상을 떠난 후 자신의 정치권력을 확고히 하려던 그들의 이복형제 스비아토폴크(Sviatopolk)에 의해 정치적으로 살해되었다. 그 혼탁한 정치판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분명치 않으며 살해당한 왕자들이 기념되는 이유와도 상관이 없다. 실제로 그들이 존경을 받는 이유는 그들이 유혈사태가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고 (동정과 비폭력 때문에 발생한) 그들의 고통이 순결했기 때문이다. 보리스와 글레브는 정교회뿐만 아니라 라틴교회를 포함하여 중세 북유럽의 대중 종교에서 유행했던 일반적 현상의 한 예로 간주될 수 있다. 즉 폭력 앞에서 부당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성인으로 간주될 자격이 있다는 정서 말이다. 서유럽에서 로마의 권세자들은 (기독교 전통의 입장에서) 이런 생각에 강력히 반대했고 비록 소용은 없었지만 그런 지방의 인물 숭배 행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키예프의 공식 반응은 훨씬 덜 적대적이었다. 그것은 후세에도 강하게 남아있던 러시아 영성의 한 흐름을 반영했다. 이 영성은 예수님이 자기 비움, 자기부정 그리고 타자에 대한 사랑으로 보여주신 모범을 강조한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그 단어의 현대적 의미에서든 혹은 (원래의 라틴어 동사인 'patior 고통당하다'에 더 가까운 의미에서) 자신의 고통을 용납함에 있어서 수동적이셨다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도 그분의 자기 비움을 모방해야 할 것이다.
- 비록 키예프가 콘스탄티노플로부터 자신의 문화와 종교적 표현의 상당 부분을 가져왔지만, 양자 간의 공식적 관계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발칸반도의 다른 정교회들의 경우처럼 지방 지도자들은 자주 총대주교와 대립했다. 1039년에 총대주교가 키예프에 주교좌 설립을 승인했는데 이 주교가 새로 개종한 지역에 설립되는 모든 주교좌에 대해 '수좌 대주교' (metropolitan)로 행세하려 했기 때문이다. 키예프 군주들은 올가 공주가 개척했던 라틴군주들과의 접촉을 계속 유지했다. 블라디미르 공의 아들 야로슬라브(Jaroslav, 1019-54년 재위)는 자신의 자녀 6명을 서방 왕실들과 결혼시켰다. 1020년대에 프랑스 앙리 1세와 그런 식으로 결혼한 결과 필립(Philip)이란 동방 이름이 카페 왕조 안으로 들어갔고, 그 후에 이어진 프랑스 왕조들도 19세기까지 자기들의 세례명으로 그 이름을 자주 사용했다. 오늘날에는 그 이름이 프랑스 권좌를 요구하는 오를레앙가의 두 번째 이름이다.
- 노브고로드도 새로운 정치적 상황을 무시할 수 없어 타타르 인들에게 공물을 바쳤다. 하지만 노브고로드는 타타르 인들이 내부 사정으로 북쪽 지역 공격을 포기했기 때문에 1240년대 동안 무사히 지낼 수 있었다. 이 나라는 무역으로 특히 모피 거래를 통제함으로써 크게 번성했고 발트해부터 우랄산맥에 이르는 자신만의 북부 제국을 건설했다. 12세기에 이 나라는 키예프 왕족을 추방했다. 당시 헌법에 따르면 그 나라는 상인 집안의 공화국이었으며, 여기서는 주교들이 명목상의 왕족보다 발언권이 강했고 평민들도 공적 회합에서 정책에 대해 발언할 수 있었다. 이런 광범위한 책임 분산 때문에 노브고로드 시민들은 그지역의 어느 곳보다 문자해독력을 중시했다. 4세기 이상의 역사를 지닌 자작나무로 된 수많은 문헌들이 재발견됨으로써 그 도시 사회에 문자해독력이 얼마나 광범위했는지를 입증해주고 있다. 이런 놀라운 도시조직은 루시에서 독특한 것이었다. 그 도시는 한자동맹으로 알려진, 독일 도시 및 마을들의 상업적 연합체와 긴밀히 접촉하고 있었다. 이 동맹의 법도 비슷한 방식으로 발전했는데 그들의 지배자인 신성로마 황제의 권력은 점점 더 멀어져 갔다.
- 빌니우스의 순교자들은 잊히지 않았다. 15세기 초반까지 그들은 콘스탄티노플과 모스크바 대공국의 기독교적 일치의 한 징표가 되었다. 1411년에 황제 요한 3세 팔레오로고스가 모스크바 대공국 대공 바실리 3세의 딸과 결혼했을 때, 그는 모스크바에 사코스(sakkos)로 알려진 멋진 예복을 수좌 대주교 포티오스를 위한 선물로 보냈다. 그것은 지금까지 남아있으며 황제와 대공의 모습뿐만 아니라 그 리투아니아 순교자들의 모습도 담고 있다. 그때까지 그 문양은 모스크바 대공국과 리투아니아의 갈등이 마침내 해결된 방식의 한 상징이 되었다.
- 부적격한 성직자들에게 불만이 많았고 외국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는 종교적 혁신에 혐오감을 느낀 평신도들은 당시의 반체제 그룹인 구교도들(Old Believers) 안에서 대안을 발견했다. 실제로 구교도들의 수는 18세기 동안 급증했다. 그들은 지배자들이 철폐했던 보다 오래된 예배 및 경건 생활 전통을 보존했다. 그들이 새로운 것을 거부했던 것은 그들의 관점에서 비-러시아적인 모든 것을 거부한 것이다. 일부 구교도들은 차르가 새로운 음식으로 추천한 감자도 먹기를 거부했다. 왜냐하면 감자는 믿음 없는 서방에서 수입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감자가 처음으로 러시아에 들어왔을 때 러시아 농민들을 그것을 대체로 혐오했다. 물론 감자가 보드카를 만들 때 유용하다는 사실이 밝혀진 후에는 사정이 달라졌지만. "차, 커피, 감자, 담배가 일곱 차례의 세계 공의회에서 정죄받았다"는 것이 구교도들의 구호 중 하나였다. 그리고 다른 때에는 식사용 포크, 전화기, 철도도 동일한 저주를 받았다. 이따금 러시아의 반체제 세력들은 그때까지 신성에 대한 명상을 통해 출현했던 기독교 그룹 중 가장 기피한 것들로 변질되었다. 특히 그들은 공식적 교회의 핵심적 교리인, 세상의 임박한 종말과 최후의 심판 교리에 큰 자극을 받았다. 18세기 말엽에 독학한 농부 지도자, 콘드라티 셀리바노프(Kondratii Selivanov)가 인간의 성적 탐욕을 제거하는 일에 헌신한 분파를 창설했다. 그는 자신이 갖고 있던 러시아어 성경에서 특정한 구절들, 즉 신약에서 예수님에 대해 말할 때 구주(Iskupitel)라는 단어를 고자(Oskopitcel)라고 잘못 이해했으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명령이 열매를 맺으라(be fruitful)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고자가 되라(Castrale yourselves)는 것이었다고 해석했다. 그 결과 그의 주종자들인 "스콥시" (the Skoptsy, 거세된 자들)는 자신들의 정결을 성취하기 위해 성기를, 여자들의 경우엔 유방을 절단했다.
- 공식 교회 내에서 대중적 정교회의 견고한 전통이 제도적 오점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다. 그래서 거룩한 남녀들은 계속 헤시카즘의 정적을 추구했고 자신들 주위의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정교회 전통에서 가장 사랑받는 성자들이 바로 이 시기에 출현했다. 가장 존경받는 인물은 사로프의 세라핌 (Serafim of Sarov,1759-183)이다. 그는 안토니우스의 전통적 방식을 따르며 그보다 먼저 살았던 라도네즈의 세르게이(Sergei of Radonezh)처럼 살았다. 강도들의 무자비한 공격으로 다리가 불구가 된 후 그는 바위 위에 무릎을 꿇거나 서서 홀로 1000일 동안 기도했다. 생애 말기에 그는 매일 자신을 찾아오는 탄원자 무리에게 상담과 영적 지침을 제공해주기 위해 은자의 삶을 포기했다. 옛날 시리아의 주상 고행자들처럼 말이다. 그는 말했다. "정적(stillness)을 성취하라. 그러면 너희들 주위의 수천 명이 구원을 얻으리라." 14-15세기의 고전적 경건 서적의 새로운 그리스어판이 헤시카즘 전통의 기도 양식에 확실한 지침을 제공하게 된 것도 바로 그의 시대에 있었던 일이다. 그 책은 <필로칼리아>(Philokalia,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로서 아토스 산의 수사들이 편집한 것이며 최초로 베네치아에서 1782년에 출판되었던 것이다. 겨우 11년 후 우크라이나의 수사 파이시 벨리치 코프스키 (Paisii Velichkovskii)가 이 책을 최초로 슬라브어로 번역하여 정교회 세계의 표준이 되었고 17-18세기의 스트레스와 분열 이후 정교회 영성을 재결합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세 가지 생각이 갱신되고 훨씬 암울한 형태의 채찍 고행 운동(flagellant movement) 속에서 결합되었다. 원래 이 운동은 이탈리아에서 1260년에 시작된 것인데, 이제 북유럽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났다. 옛날의 채찍 고행자들이 평화정착을 강조하던 모습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채찍 고행자들의 출현은 대단히 예외적인 반유대적 폭력과 연루되었다. 집단적으로 유대인들을 고문하거나 산 채로 불태워 죽인 것이다. 이런 행위는 유대인들이 우물과 음식물에 독을 풀었다는 비난들로 정당화되었다. 고문을 통해 필요한 자백을 받아냈다. 라인란트와 다른 중앙유럽 지역에서 유대인 공동체들이 효과적으로 제거되었다. 아무튼 이것은 "20세기 이전에 벌어진, 유대인들에 대한 가장 혹독한 박해였다." 놀란 군주들, 주교들, 그리고 시의 정치가들이 압력을 행사하여 1349년 가을에 교황 클레멘트 6세가 칙령, "인테르 솔리키투디네스" (Inter sollicitudines)를 발표했다. 이 칙령은 채찍 고행렬을 반유대적 폭력과 연관 지으면서 금지했다. 교황은 종교적 채찍 고행을 개인주택이나 성직자들의 감독 하에 교회 내의 행사로 한정 지으려 했다. 확실히 교회는 상당수의 채찍 고행 행위를 통제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이탈리아에서는 중요한 길드 중 하나인 신도회(confraternity)가 참회의 표시로 채찍 고행을 실천했다는 이유로 바투티(battuti)란 이름을 택했다. 산 세폴크로(San Sepolcro)라는 북이탈리아의 한 작은 마을에서 1400년경에 실제로 모든 성인 남성이 여러 개의 채찍 고행 길드 중 하나에 소속되었고, 이런 모습은 다른 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시 출몰한 흑사병은 반복해서 교회의 감시망을 무너뜨렸다. 새로운 공포감 속에서 채찍 고행자들의 공적 행진을 금지시켰던 교황 클레멘트의 명령을 또다시 어겼고 유대인들은 또다시 고통을 당해야 했다.
- 그들 사이의 20여 년간 성 베드로의 권좌를 차지했던 두 교황은 무엇이 교황제를 영화롭게 할 것인가에 대해 매우 선택적인 이해를 갖고 있었다. 보르자의 발렌시아 가문 출신 알렉산더 6세는 이탈리아의 많은 정적들에 대항해 외부자인 자신의 약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자신의 정부들을 통해 얻은 자식들을 포함하여 친척들을 교회 고위직에 등용하였다. 그 교황의 가장 악명 높은 두 자식, 루크레치아 Lucrezia)와 체사레(Cesare)가 귀족적 방종의 극단적 예를 제공하지 않았더라도 그것은 12세기의 종교개혁을 통해 부여된 성직자 독신 제도를 거침없이 위반한 사례였다. 율리우스 2세는 프랑스의 침입 이후 빈번해진 이탈리아 전쟁들에 끼어듦으로써 자기 스스로 장군이 되었다. 또한 로마 다음의 교황령 도시로서 70년 전에 교황이 잃어버렸던 볼로냐를 되찾았을 때 그는 특히 자부심을 느꼈다.
- 그들은 15세기 초반 잉글랜드의 정치판에서 패배한 측과 연합되었다. 이제 교회와 왕실은 대학과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람들 속에서 롤라드의 영향을 제거하기 위해 협력했다. 단 한 명의 강력한 정치적 후원자만 있었어도 롤라드 이야기는 매우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또 다른 대학 강사 마틴 루터에 의해 1세기 후에 시작된 운동처럼 말이다. 대신 롤라드의 억압은 잉글랜드에 독특한 한 가지 특징을 담고 있었다. 위클리프를 존경했던 옥스퍼드 사람들은 모든 사람이 스스로 성경을 읽고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불가타 성경의 영어 번역 작업을 최초로 끝마침으로써 도전할 수 없는 성경의 권위에 관한 그의 가르침을 따랐다. 1407년 당시 존재하던 모든 영어성경은 잉글랜드국교회 교권에 의해 사용이 공식적으로 금지되었고 1530년대 헨리 8세의 종교개혁 때까지 어떤 번역도 허용되지 않았다. 오직 최고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만 공개적으로 자국어 성경을 소유해도 처벌받지 않았다. 정녕 그들의 권세가 그들이 소유한 성경 번역본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 같았다.
- 후스파 운동도 이 잉글랜드국교회의 반대운동과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중앙유럽의 보헤미아 왕국에서 그 운동은 매우 다른 방식으로 발전했다. 자연적 관계가 전혀 없는 유럽의 두 나라 잉글랜드와 멀리 떨어진 프라하 간의 예기치 못한 연결이 1382년에 신성로마 황제 찰스 4세의 딸 보헤미아의 앤(Anne of Bohemia)과 잉글랜드 왕 리처드 2세(Richard II) 간의 결혼으로 실현되었다. 또한 보헤미아 왕이었던 찰스 황제는 프라하를 자신의 수도로 만들었다. 그는 중앙유럽에서 가장 웅장한 공공건물 중 하나를 건설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었다. 프라하에 거대한 성당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새로운 대학도 설립되었다. 자신의 수도를 세상의 종말을 위한 새 예루살렘으로 만들려던 찰스의 결심 때문에 아름답게 된 이 활기찬 도시는 그 대학의 철학부 학장이자 사제였던 얀 후스(Jan Hus)가 위클리프의 개혁사상에 크게 감동받기 훨씬 전부터 절박하게 교회 개혁을 부르짖던 곳이었다. 후스는 프라하에서 일련의 거침없는 설교를 행했고, 교회에 대한 그의 공격은 위클리프의 것과 닮았으며, 당대의 정치와 연결되어 있었다. 체코 귀족들은 교회 권력자들이 자신들 일에 개입하는 것을 몹시 싫어했던 것이다. 후스파 운동은 보헤미아 교회 및 연방 내에서 독일인에 대항하여 체코의 정체성을 옹호하는 것과 맥을 같이했다. 또한 롤라드파와 달리 이 운동은 대학부터 마을까지 사회 전 영역으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 1412년 당시 그 대학 총장이었던 후스가 교황 자리를 노리던 세 사람 중 한 명에게 파문당하자 곧 열릴 공의회에 선처를 호소했다. 이렇게 위기가 고조되던 상황에서, 후스와 추종자들이 특별하게 자극적인 행동을 했다. 1414년 그들은 자신들이 집전한 성찬식에서 그 세기 최초로 떡뿐만 아니라 포도주까지 평신도에게 배분하기 시작했다. 이런 이종성찬의 회복은 당시 보헤미아에서 발달하고 있던 그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포도주를 담고 있는 성배 (the eucharistic chalice)는 후스파 운동의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 이 운동은 당시의 일반적 관행에 반하여 장 제르송과 다른 신학자들의 요구와 조화를 이루면서도 평신도, 심지어 유아를 위해 성찬을 자주 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단히 많은 수의 위클리프 영어 사본들이 근대 체코 공화국 때까지 남아있던 것을 고려할 때, 두 운동 간의 관계가 깊었던 것을 확신할 수 있으나 후스파의 성찬 신앙은 위클리프뿐만 아니라 후대 롤라드파의 문헌 중심 집회와도 큰 대조를 보였다. 하지만 1415년에 후스는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배반당하고 목숨을 잃었다. 그 공의회에 참석했던 성직자들이 신성로마 황제 지기스문트를 설득하여 그 프라하 개혁자의 신변을 보호하겠다던 제국의 약속을 철회시켰다. 끔찍한 환경에서 수감생활을 한 후 후스는 화형을 당했다. 이것은 제도교회가 일개의 개혁운동조차 건설적으로 처리할 능력이 없다는 강력한 상징이었다.
- 고대 세계에서 흘러들어온 새롭고 낯선 재료의 홍수 속에는 고대 이집트 출신의 신비로운 인물 헤르메스 트리메기스토스(Hermes Trismegitus)가 쓴 것으로 추정되는 종교와 철학에 관한 일군의 문헌도 있었다. 사실 그것은 초기 기독교의 출현 시기와 거의 일치하는, 1세기부터 3세기 동안 편집된 것이다. 그 후 일부는 현재 <헤르메스 주의 전집>(Corpus Hemeticum)으로 알려진 그리스어 작품으로 묶였고, 다른 것은 후에 라틴어와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일부는 일상생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술, 의약, 혹은 점성술 등을 다루었다. 어떤 부분은 영지주의적 기독교와 후에 마니교를 탄생시킨 우주와 지식의 본질에 대한 숨겨진 지혜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이런 '헤르메스적' 문헌은 전통적 기독교의 관심사와 조화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것은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 마르실리오 피치노에게 <헤르메스 주의 전집>의 이용 가능한 부분을 라틴어로 번역해달라고 주문한 1480년대 이후 새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인문주의자들은 좀 더 연구하고 열심히 노력하면, 그리고 거기에 초자연적 도움이 더해지면, 더 많은 고대 지혜들이 보다 충분히 복원될 수 있으리라는 행복한 전망에 취해 있었다. 유대교 신비주의 카발라(the Cabbala)에 대한 기독교 학자들의 점증하는 관심 덕택에 동일하게 흥미로운 가능성이 발생했다. 카발라의 주요 문헌은 모세오경에 대한 주석으로 시작되었으나, 중세에 이르러 영지주의와 헤르메스 주의 같은 플라톤적 신비주의의 도움 속에 자신만의 정교한 신학적 사색을 발전시켰다. 많은 인문주의자들이 인간 안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자신들의 인식을 강화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고 매우 기뻐했다. 카발라는 인간을 신적 잠재력을 지니고 하나님의 영이 내주하는 존재로 이해했다. 카발라 사상과 헤르메스 주의 사상이 기독교 메시지를 확장하고 심화시킴으로써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목적을 완성하는 데 함께 기여할 것이라고 피치노, 혹은 카발라의 귀족적 번역가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Giovanni Pico della Mirandola)는 믿었다. 이런 주제는 16세기와 17세기 내내 지적 생활과 토론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물론 가톨릭과 개신교 진영의 많은 신학자로부터 조롱과 적대감을 불러오기도 했지만. 하지만 우리는 결국 그것이 종교개혁시대를 끝내는 데 기여했음을 알게 것이다.
- 이렇게 자극적이지만 정돈되지 않은 정보의 홍수 속에 어떻게 사람들이 진위를 분별할 수 있을까? 한 가지 기준은 특정한 문헌을 모든 면에서 평가해보는 것이다. 그것의 내용, 날짜. 기원, 동기, 심지어 겉모습까지. 문헌의 정확성 여부에 너무 많은 것이 달려 있었다. 이것은 문헌의 진위여부를 가리는 방법이 발전했다는 뜻이다. 즉 그 문헌이 작성된 방법과 연대 확인이 가능한 동시대 다른 문헌들과 비슷한지 등을 조사한 것이다. 역사적 진정성 (authenticity)이 대단히 중요해졌다. 이제 그것이 권위의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 한때 성직자들이 역사적 문서를 대규모로 위조하던 모습은 사라졌다. 권위를 위해서는 '폰스'(fons, 원천)가 과거로부터 내려온 권위의 소리인 '아욱토리타스'(auctoritas, 권위)의 지엄한 명성보다 더 중요해졌다. '아드 폰테스'(Ad fontes), 즉 "원천으로 돌아가자"란 표현은 인문주의자들의 구호였고 개신교인도 그 구호를 물려받았다. 올바른 지적 능력을 구비한 개인이 중세 유럽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권위인 교회에 도전할 수 있었다.
- 인문주의는 결코 '신학문'(New Learning)이 아니라 구학문에 다시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것은 중세 대학에서 전통적 학문에 밀려 주변에 있던 분야들, 특히 시, 웅변, 수사학 같은 비신학분야의 교과과목에 새로운 관심과 존경을 갖게 해 주었다. 인문주의자는 단어의 연인이자 감정가였다. 그들은 언어가 제대로 사용된다면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단어의 '참된' 혹은 본래의 의미를 찾는데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런 흥분을 자아냈던 단어들은 시, 웅변, 수사학의 변혁 능력에 동일한 믿음을 갖고 있었으나 오랫동안 사라졌던 사회(즉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 문헌들 속에서 발견되었다. 세상을 변혁하는 프로젝트의 일부는 이런 고대 사회의 모습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복원하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 그 사회가 어떻게 생각하고 작동했는지에 대한 최고 문헌들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인문주의자에 대한 또 다른 정의가 생겼다. 즉 그들은 문헌 편집자들이었다. 혹은 훨씬 더 조잡하지만 유용한 정의는, 인문주의자란 중세보다 삶에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깨달은 사람들이란 것이다. 또한 기독교의 미래를 위해 중요한 것은 인문주의자는 서방 라틴문화에 문화적 뿌리를 둔 사람이며 동방 기독교에 대해서는 무지했던 사람이었다.
- 중세 서양 기독교는 4세기 히에로니무스의 라틴어 번역인 불가타(the Valgate)만을 통해 성경을 알았다. 이제 인문주의자들의 발굴을 통해 불가타를 너머 타나크(the Tanakh)와 그것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 역(the Septuagint)까지 알게 되었다. 히에로니무스는 칠십 인 역 배후의 히브리어 본문을 최선을 다해 재검토했다. 그럼에도 오류는 있었다. 구약성경 번역에서 그가 저지른 몇 가지 실수는 우스꽝스럽다. 가장 흥미로운 것 중 하나는 출애굽기 34장에 있었다. 여기서 히브리어 본문은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올 때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고 묘사한다. 히에로니무스는 히브리어 단어를 잘못 이해하여 모세가 머리에 두 개의 뿔을 달고 내려왔다고 묘사했다. 그래서 인문주의자들이 출애굽기 본문에서 뿔을 제거한 후에도 오랫동안 기독교 미술에서 모세는 자주 그런 식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것은 현재 로마의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San Pietro in Vincoli, 사슬에 묶인 성 베드로) 교회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위대한 모세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것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주문해서 제작한 작품이다. 잉글랜드 교구 교회를 방문하면 십계명 돌판 옆에 서 있는 모세와 아론의 그림 속에서 그런 모습을 자주 발견한다. 그것들 중에는 19세기에 제작된 것도 있다. 신약성경의 경우는 훨씬 더 심각했다. 그리스어를 번역할 때 히에로니무스가 선택했던 몇 가지 라틴어 단어들은 인문주의자들의 제왕이었던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가 후에 보여주었듯이 후대 서방교회의 중요한 신학 작업(예를 들어, 연옥 교리)에 부실한 토대를 제공했다. 그것은 히에로니무스가 그리스어 본문에 오해의 소지를 남겼다는 정도의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예수님의 부활 이후 회심했던 사도 바울이 어떻게 예수님이 하나님을 대표했는지의 문제와 씨름하며 쏟아낸 거친 그리스어를 학자들이 처음으로 접했을 때 천년 동안 라틴교회가 자신의 권위를 하나의 번역본에 의지해 왔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낯선 행태로 경험된 낯익은 것의 충격은 라틴기독교의 가상 민감한 지성인들에게 서방교회가 (자신의 주장처럼) 성경의 권위 있는 해석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왜 라틴서방은 종교개혁을 경험한 반면,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지역에서는 그렇지 않았는지에 대애 한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이렇게 신약성경의 새로운 소리를 들었던 경험의 유무일 것이다.
- 많은 인문주의자들은 전통적인 대학 시스템 속으로 들어가길 거부했다. 그들은 인쇄업자들과 밀접한 협조 속에 자신들의 학문적 업적을 발표했다. 인쇄업자들은 대학 도시가 아니라 거대한 상업 지역에 작업장을 갖고 있었다. 많은 인문주의자들은 문장가로서 자신들의 재능을 후원해 줄 권세 있고 부유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가치 있게 생각했다. 권세가들은 품위를 유지할 목적으로 복잡한 키케로식 라틴어로 공문서를 작성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인문주의 학자들은 바늘 끝에서 얼마나 많은 천사들이 춤을 출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스콜라주의에 대한 이 유명한 조롱 섞인 비유는 인문주의자들이 만든 것이다)하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상아탑 학자들과 달리 자신들이 일상생활 및 정부활동에 깊이 관여하는 실천적 사고의 지성인들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교착상태를 바라보는 덜 냉소적인 방법은 그런 갈등을 진리 발견의 최고 방법에 대한 논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인문주의자들이 중시했던 수사학의 설득 기술을 통해 최고로 가능했는가? 아니면 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이 완성했던 정교한 변증법을 통해 가능했던가?
- 그런 긴장은 카스티야에서 특히 강렬했는데, 이 지역은 여전히 이슬람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카스티야 권좌에 대한 이사벨의 지배력이 처음에는 불안했었다. 그녀는 집권 초기의 정치적 계산을 통해 전략을 세웠고 오랜 통치 기간 동안 확실하게 실천했다. 처음에는 유대교를 공격했고 1492년에 그라나다가 함락된 후에는 이슬람을 향해 동일한 공격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녀의 계획을 실행한 기구는 새로 구성된 종교재판소였다. 이것은 이전에 카스티야에 없던 것이다. 그것은 13세기 이후 유럽에서 이단을 조사했던 여러 지방의 종교재판소를 모방한 것이지만, 이번의 것은 군주의 주도하에 조직되었고 1478년과 1480년 사이에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IV)와 왕실 간의 복잡한 협상 후 카스티유 왕국 내에서 '유대주의자'를 처단하기 위한 법적 권한을 획득했다. 그 결과 1481년과 1488년 사이에 약 700명을 산채로 화형 시켰다. 이 와중에 또 다른 중요한 발전이 있었다. 1483년에 교황 식스투스가 왕실의 압력에 굴복하여 도미니크파 수사 토마 드토르케마다(Tomás de Torquemada)를 페르난도와 이사벨이 지배하는 반도 지역의 종교재판소장(Inquisitor-General)으로 임명한 것이다.
- 따라서 스페인식 가톨릭 교회는 대단히 복잡한 특징을 보여준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에 대한 깊은 개인적 열망을 촉진했다. 그것은 유대교와 이슬람의 신비적 영성과 관련이 있으며, 후에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와 십자가의 요한(John of the Cross)의 신비경험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교회 제도 속에서 부패를 제거하려는 공식적, 혹은 비공식적 조치와 별도로, 성직자들은 세속 권력의 후원을 점점 더 많이 얻고 있던 일체의 경쟁 문화에 대해 과대망상적인 의심을 보였다. 스페인이 공식적으로 이베리아 반도의 다문화적 과거를 단호하게 거부한 후, 그 이후의 스페인 기독교를 민족 청소의 주요 해설자 및 실행자로 간주하는 것은 그렇게 부당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스페인에서 수도원적 삶의 갱신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매우 복잡한 문제들을 야기했다. 프란체스코회 엄수파인 히메네스가 열정적으로 개혁을 추진했지만 개혁에 가장 열정을 보인 일부 수사들은 콘베르소 출신이었고, 그들이 자신들의 영적 힘을 그 반도에서 패배한 종교문화로부터 가져오는 경향 때문에 종교재판소의 히메네스는 그들에 대해 강한 의심을 품게 되었다. 스페인 기독교의 독립된 세력들이 신비적, 영적 열정을 지닌 운동을 탄생시켰다. 그 운동에 속한 탁발 수사들, 콘베르소들, 그리고 경건한 여인들(beatas, 복녀들)은 그들을 존경했던 사람들에 의해 알룸브라도파(alumbrados, 계몽된 자들)라고 불리게 되었다. 알룸브라도파는 완벽한 자유 속에 자신들을 공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결코 얻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 중 일부가 마틴 루터의 저작들을 포함한 북유럽의 영성을 새로 수입하는 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운명도 결정되었기 때문에 이제 와서 그 운동이 무엇을 믿었는지 정확히 복원하기는 어렵다. 정말 그것을 편집증적인 종교재판소가 붙인 명징이 아니라 운동으로 간주해야 한다면 말이다. 알룸브라도파는 1525년에 공식적으로 정죄되었고 흩어졌으며 위험을 받거나 처형되었다. 16세기 후반의 스페인 신비주의에 남긴 그들의 유산과 별도로 그들은 처음에는 이탈리아의 영성파(Spirituali)를 통해 그다음에는 우리가 후에 살펴보겠지만 유럽 전체로 훨씬 더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다.
- 사보나롤라가 살던 곳에서 그의 유산은 권력자들에게 위협이 되었다. 읍도파(Piagnoni, 울면서 기도한다는 뜻-역주)로 알려진 그룹이 그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피렌체에서 생겨났다. 이것은 이탈리아 종교적 길드의 한 대표적 예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조직은 신비적 관상과 선교사역, 그리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같은 근대적 경건의 증진을 강조했다. 이탈리아 전역에서 도미니크회는 사보나놀라의 몰락 이후 규칙 위반을 무척 경계했지만 탁발 수사들이 계속 읍도파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수년 후에는 이 그룹에 속한 일군의 뛰어난 학자들이 교회 개혁을 계속 주장하면서도 루터에 강력히 반대했다. 읍도파는 사보나롤라 시대를 형성했던 정치적 공화주의와 신학적 공화주의의 결합을 지지했다. 하지만 그들이 1527-30년에 메디치가를 전복시키는 데 성공한 후 그들의 통치는 가학적 독재로 돌변했다. 이 독재정치가 피렌체 공화주의를 끝장내고 메디치가에게 미래의 권력을 보장해주었다. 심지어 그 이후에도 새로운 가톨릭 갱신운동인 예수회가 1540년대에 발전하는 동안 그 설립자인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는 예수회 회원들이 사보나롤라의 작품을 읽지 못하도록 금지시킬 필요를 느꼈다. 비록 그 작품들 속에 좋은 것도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수사에 대한 평가가 지지자와 반대자들 사이에서 극단적으로 달랐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1585년에 메디치 대공은 피렌체의 수사와 수녀들이 그의 이름을 입에도 올리지 못하게 했다.
- 잉글랜드 인문주의자 토마스 모어(Thomas More)가 그런 장소에 대해 수수께끼 같고 무표정하게 묘사했던 책 제목에서 그것을 기술할 수 있는 단어를 고안했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은 세상을 뜻하는 유토피아(Utopia) 말이다.
-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그의 생애와 업적은 유럽적 갱신의 수많은 주제들을 결합한다. 그 최고의 인문학자는 근대적 경건의 고향인 네덜란드 출신이었다. 그는 군주와 주교뿐만 아니라 사상에 대한 그의 열정에 공감한 영리하고 부유하며 매력적이고 좋은 교육을 받은 모든 유럽인의 벗이 되었다. 모든 유럽이 그를 소유하고 싶어 했다. 히메네스 추기경은 그를 스페인으로 데려오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교양 있는 인문주의자이자 크라코우 주교(the Bishop of Cracow)였던 피트르토미키(Pietr Tomicki)를 폴란드에 초청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이상한 미신 속에 에라스무스는 라인 강 동쪽으로 멀리까지 여행하려 하지않았다. 영국 해협을 건널 준비는 자주 했으면서도 말이다. 대신 그를 숭배했던 자들이 그를 찾아 왔다. 수백 명의 사람들(그들 중에는 한 번도 얼굴을 본적이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과의 끊임없는 편지 왕래 속에 유럽 전체를 끌어안으며 그는 상상의 살롱을 만들었다. 에라스무스는 프리랜서 작가뿐만 아니라 넓은 인맥을 가진 사람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어야 한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에라스무스를 "로테르담의"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흥미롭다. 실제로 그는 따뜻한 불, 훌륭한 저녁식사, 즐거운 편지들, 그리고 넉넉한 연구 기금만 있다면 어디서 살든지 상관하지 않았다. 에라스무스 자신이 장소 이름을 잘못 사용하기도 했고 에라스무스와 비슷한 그리스어로 "데시 데리우스"를 첨가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이름을 만든 것은 그 위대한 인문주의자가 자신의 이미지를 형성했던 한 측면에 불과했다. 그는 자기 상상의 자원들로 자기 자신을 발명했기 때문에 새로운 가능성을 도출한다는 인문주의의 주제를 몸소 보여주었다. 그가 화란의 한 작은 마을(로테르담이나 구다(Gouda))에서 헤라스뮈스 헤리츠존(Herasmus Gerritszoon)으로 태어났을 때 그는 중세 가톨릭 유럽에서 완벽한 비존재인 사제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 그는 수도원생활을 혐오했고 동료 수사 세르바티우스 로게루스(Servatius Rogerus)와 사랑에 빠졌을 때 더욱 비참해졌다. 하지만 후에 그는 인문주의 연구에 대한 열정과 재능이라는 탈출구를 찾았다.
[에라스무스와 로게루스에 대해서는 근대에 많은 혼란과 당혹스러움이 있어 왔다. 하지만 J.Huizinga, Erasmus of Rotterdam (London, 1952), 11-12, J2ļ Geoffrey Nuttall, JEH, 26(1975), 403에서 현명한 언급을 참조하라.]
- 다른 말로 하면 에라스무스는 어떤 문제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가 진리라고 말했기 때문에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고대의 주장을 인정한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종교개혁의 중요한 쟁점 중 하나가 될, 그리고 기독교가 "원천으로"(ad fontes) 돌아가길 요구했던 모든 사람이 직면했던 문제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성경은 모든 거룩한 진리를 담고 있는가? 아니면 그것과 별도로 교회가지켜온 전통이 있었는가? 성경 대 전통의 문제가 종교개혁의 핵심적 쟁점이 되었으며 양측에서 무엇이라고 주장하든 양측의 누구에게도 속 시원한 결과는 없었다. 개신교인들은 보편적 유아세례의 정당화같은 근본적 문제들이 성경의 어떤 권위보다 전통에 호소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 그래서 에라스무스는 아우구스티누스적 염세주의를 받아들일 수없었다. 대신 그는 시대 차이를 넘어 초대교회 신학의 또 다른 거인이자 아우구스티누스의 위대한 라이벌인 오리게네스를 더 좋아했다. 오리게네스의 저작은 1512년에 처음으로 라틴어권 독자들이 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오리게네스에 대한 에라스무스의 존경은 이미 <엔키리디온>에서도 명백히 드러났다. 그가 존경했던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인간에 대한 오리게네스의 독특한 견해(인간학)였다. 그것은 그 알렉산드리아 학자가 베드로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간략히 언급했던 것을 토대로 발전시킨 것이었다. 즉 인간은 세 가지 요소(몸, 영, 혼)로 구성되었다. 영과 혼을 설명하는 데 있어 바울이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리게네스와 이제는 에라스무스가 그 구절로부터 자신들의 생각을 빌려왔다. 인간의 세 가지 구성요소 중, 오직 몸만 완전히 부패했고 가장 고귀한 부분인 영은 여전히 흠이 없다고 오리게네스는 말했다. 에라스무스가 자신의 신학에서 성령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바로 여기에 아우구스티누스에 맞서 인문주주의적 낙관주의의 위대한 토대가 있었다.
- 1611년의 흠정역 성경에서 그 본문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있다. "하늘, 성부, 말씀, 그리고 정신 속에 증거를 지닌 셋이 있고, 이 셋은 하나다. [그리고 이 땅] 성령, 물, 그리고 보혈 속에 [증거를 지닌 셋이 있고] 이들은 하나로 일치한다." 이 사각 괄호들은 현재 본문 속에 포함되어있으나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거부하는 내용이다.
- 그는 학생들을 위해 한 묶음의 시편을 인쇄하여 나누어 주었다. 그 인쇄물에는 본문 주위에 여백을 많이 남겨 두어 그의 강의를 학생들이 받아 적게 했다. 학생들의 성경해석 렌즈로 기능했던 중세의 모든 주석을 전혀 제공하지 않고 학생들이 본문 자체를 신선한 시각으로 유도했다.
- 1515년에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구원론을 위한 핵심적 본문인 로마서 강의를 시작했다. 이것은 에라스무스가 자신의 헬라어 신약성경을 편집, 출판하기 전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그 강의가 인문학의 기념비인 에라스무스의 신약성경에 아무런 빚도 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처럼 루터는 자기 스스로 복음을 발견했다. 그 기쁜 소식(evangelium) 안에서 스스로 "복음적" 메시지를 본 것이다. 그 두 강의 원고가 지금도 남아있고, 후에 그가 이신칭의(Justification by faith)를 선포할 때 그 주제들이 배후에서 서로 융합되었다. 그 메시지에 대한 묵상으로 시편을 제시한 것, 모든 의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주장, 인간 이성이 제공한 일체의 진리를 초라하게 만드는 계시를 성경 말씀에서 지적한 것 등. 루터가 로마서를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그가 제시한 구원 메시지의 심장부에 예정론이 놓여 있었다. "죄를 미워하는 자는 이미 죄 밖에 있고 선택된 자들에 속한다." 우리 밖의 도움 없이 우리가 어떻게 이런 상태에 이르겠는가? 그의 공책에 있는 한 가지 끔찍한 이미지는 타락 후 인류의 곤경을 여실히 보여준다. 너무 강하게 죄에 붙들려서 몸과 영혼이 고통을 벗어나지 못하고, 밀실 공포증에 걸린 것처럼 뒤틀려 있다. "인쿠르바티우스 인 세(incurvatius in se, 자기 문제에 몰입하다)."
- 시간적 제약으로 신약성경만 완성했고 구약성경 완역은 후에 이루어졌지만 그의 독일어 성경은 독일어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동시대 영국인 토마스 크랜머(Thomas Cranmer)처럼 자국어의 전문가였다. 크랜머의 글은 현재까지 공식 영어에 흔적을 남겼는데, 루터에게는 다른 재능이 있었다. 크랜머의 세심하게 계산된 예전용 산문은 절제된 위엄으로 종교개혁의 공식적 측면을 보여준 반면, 루터의 재능은 갑작스럽고 긴박한 문구로 감정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 멜랑히톤의 성은 성직자와 학자들이 자신들의 출생지를 라틴어나 그리스어 식으로 바꾸어 성으로 빈번히 사용했던 르네상스 전통의 한 예다. Johann Bugenhagen을 Johannes Pomeranus("the Pomeranian"), Johann Hussgen을 Johannes Oecolampadiuse라고 고친 것처럼, 멜랑히톤의 독일 성은 "Schwarzerd"(검은 대지)라고 번역된다.
- 지적했던 것은 츠빙글리의 친구 레오 주드(Leo Jud)였다. 그는 그로스뮌스터에서 강 건너편에 위치한 성 피터의 목회자였다. 주드(그의 별명 주(Jew, 유대인)가 암시하듯이)는 탁월한 히브리어 학자였다. 그는 대부분의 서방교회가 잊어버린 중요한 사실 즉 십계명 순서를 정하는 두 가지 대립적 방식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오래전에 권위를 부여했던 체계가 성상 금지 명령을 쉽게 폄하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래서 주드는 8세기와 9세기에 비잔틴 제국을 거의 파멸의 위기로 몰아갔던, 그리고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의 보복자들에 의해 잠시 재개되었던 성상 문제를 다시 끄집어냈다. 위클리프도 십계명 순서의 변칙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이제 취리히 인들이 성상들을 교회와 길가에서 뜯어내기 시작했다. 이것은 자주 무질서를 초래했는데, 이 무질서는 결코 스위스 사회를 감동시키지 못했다. 시의회가 행동에 나섰셨다. 1523년 10월 시의회는 토론회를 개최했고 이 토론회에서 종교개혁 최초의 공식적 교리 선언문이 채택되었다. 먼저 성상은 1524년 6월에 체계적으로 제거되었고 1525년 4월에는 전통적 형태의 미사가 그 도시에서 금지되었다. 미사가 금지될 때까지 놀랍게도 취리히는 자신의 전통적 동맹자인 교황과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교황은 정치적 영향 때문에 그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으며, 그 도시의 사태를 배후에서 조정하던 인물을 공적으로 정죄하지도 않았다.
- 틴데일이 앤트워프에 망명 중일 때, 헨리의 부하들이 그를 납치했다. 그 후에 틴데일은 화형대에서 교살되었고 후에 브뤼셀 근처에서 시체가 불태워졌다. 그가 영국인들에게 남겨준 유산은 그들의 언어로 된 신약성경과 모세오경의 최초 번역본이었다. 이것은 150년 전에 롤라드들에 의해 고전 영어로 번역된 이후 최초의 일이었다. 글로스터셔(Gloucestershire) 출신의 옥스퍼드 학자였던 틴데일은 그 영어 성경을 자신의 필생의 작품으로 삼았으며 그 작업을 지속하기 위해 고국을 떠났고 결국 그것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그는 복음주의적 열정과 탁월한 그리스어 및 히브리어 실력, 그리고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잉글랜드 서부 변경지대(그곳에서는 영어와 함께 웨일스어도 자주 들을 수 있었다)의 경험을 통해 습득한 언어에 대한 탁월한 감각까지 그 작업에 쏟아 넣었다. 그는 영어가 리듬과 서술 능력에 있어서 라틴어보다 히브리어에 더 가깝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 결과는 생명과 에너지로 빛난다.
- 부처는 신약성경이 목회의 네 가지 기능(목사, 교사, 장로, 집사)을 서술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목사는 평신도를 돌보는 일반적 목회를 수행했다. 그것은 중세의 교구 사제와 주교들이 수행하던 일이다. 교사(doctors)는 성경에 대한 최고의 학문적 탐구를 포함하여, 모든 수준의 교육을 책임졌다. 목회에서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던(칼빈 자신이 대표적이었다) 목사와 숙련된 교사들이 목사회(a Company of Pastors)를 구성했다. 장로들은 교회의 치리 사역을 담당했는데, 콘시스토리(consistory)라고 불린 교회 법정에서 목사와 함께 그 일을 주도했다. 그것은 위원회에 의한 관리체계였는데, 다른 맥락에서는 그 위원회가 장로회(presbyteries)라고 불리웠다. 그래서 보통 그 체제에 장로교회라는 이름이 붙었다. 칼빈은 이 사중제도가 각자의 기능을 적절히 수행하는 한, 그것이 취할 형식에 대해선 특별히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세대의 "칼빈주의자들"은 형식에 대해 칼빈보다 훨씬 더교조적인 경향을 보였고, 제네바에서 행해진 일을 그대로 흉내 내려 했다. 예를 들어, 주교의 직분에 대해 적대감을 발전시켰는데 칼빈 자신은 결코 그런 태도를 보인 적이 없으며, 취리히, 헝가리/트란실바니아와 잉글랜드/아일랜드의 개혁교회들도 동조하지 않았다(그림 14), 칼빈이 자신의 종교개혁을 정상적 궤도에 올려놓는데 여러 해가 걸렸다. 하지만 제네바인들은 칼빈을 두 번씩이나 추방함으로써 자신들의 체면을 손상시키지 않았다. 그들은 칼빈이 자신의 역할을 탁월하게 수행하고 있음을 제대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는 해외의 재능 있는 망명객들을 자기 주위로 끌어 모았다(그리고 가난한 망명객들이 시의 재정에 부담이 아니라고 확신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 역사가들은 이런 과정에 사랑스럽지 않으나 필요한 명칭을 부여했다. 신앙의 정치화(confessionalization). 이것은 이전에는 자신에 대해 보다 유동적인 이해를 갖고 있었으며 자신에 대해 분리된 정체성을 추구하지 않았던 교회들에게 고정된 정체성과 체제를 제공해주는 작업을 말한다.
- 유럽의 중심지에서 벌어진 이런 분쟁 외에 1638년부터 20년 이상 동안 대서양 제도(the Atlantic lsles)에서, 즉 스튜어트 왕조가 지배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잉글랜드라는 세 왕국에서 갈등이 발생했다. 한 번 더 주요 쟁점은 종교였다. 왕실 내의 뜻밖의 사태로 인해 1608년에 엘리자베스가 미혼인 상태로 죽음으로써 스코틀랜드 제임스 6세의 성급한 손에 아일랜드와 잉글랜드가 쥐어졌을 때 그는 자신의 두 왕국 내에 약간 혼란스런 상태로 있던 국가 교회들을 관장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교회들이 개혁주의 세계의 일부였던가? 제임스 자신은 헌신된 개혁주의 개신교인이었으나, 왕에게 발언할 권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확신한 스코틀랜드 교회에 대처하기 위해 그리고 제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 스스로 국제적인 개혁주의 개신교 정치가로 자부심을 갖고 있던 그가 정치가로서 가장 탁월한 능력을 보인 것은 새로운 성경번역 작업에 협력하도록 양측을 설득한 것이다. 그 결과 1611년에 흠정역(Authorized Version) 성경이 출판되었고 지금까지 그의 가장 행복하며 오래 지속되는 업적으로 남아있다. 90년 전 윌리엄 틴데일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번역의 역사에 기초하여, 심지어 이전의 개신교 영어 번역본에 반대하는 입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로마 가톨릭의 두에(Douai) 성경까지 참조하여 이 성경을 만들었는데 전 세계 영어문화권에서 대단히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있다. "킹 제임스"성경은 본래 제임스 왕이 반대했던 교회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보수적 기독교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 진정 그들에게 적합한 또 다른 이름은 "성례전주의자” (Sacramentalist)일 것이다. 성례전에 대한 강조는 성례전을 집전하는 성직자의 특별한 자질과 역할에 중요성을 부여했다. 따라서 성례전주의자들은 잉글랜드 개신교인들 중에서 평균보다 훨씬 더 성직자 중심적 성향을 보였다. 그들은 대체로 예정을 강조했던 개혁주의 구원 체계를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란 개혁교회에서 예정론에 도전하고 있었던 화란 신학자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Jacobus Arminius)의 추종자들을 염두에 두면서 1610년대에 적들이 그들을 "아르미니우스파" (Arminians)라고 불렀다. 그들 중 일부가 처음에는 사적으로, 그 후에는 공적으로 담대하게 종교개혁의 많은 측면들이 유감스럽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종교개혁의 많은 것이 되돌려져야 한다는, 보다 급진적인 결론을 내포하고 있었다. 아르미니우스파는 자신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심지어 감독과 귀족까지 "청교도"라고 정의했다. 그런 사람들은 잉글랜드국교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 교회는 성례전주의자들 상상 속의 대성당을 넘어선 것이었다. 특별히 제임스가 보기에 아르미니우스파들이 스코틀랜드 교회의 성직자들보다 군주를 더 존경하는 것처럼 보였다. 왕은 이 그룹의 지도적 대변인들을 좋아했으나 그들과 보다 전통적인 개혁주의 성직자들 사이에서 신중하게 균형을 유지했다. 스스로 국제적인 개혁주의 개신교 정치가로 자부심을 갖고 있던 그가 정치가로서 가장 탁월한 능력을 보인 것은 새로운 성경번역 작업에 협력하도록 양측을 설득한 것이다. 그 결과 1611년에 흠정역(Authorized Version) 성경이 출판되었고 지금까지 그의 가장 행복하며 오래 지속되는 업적으로 남아있다.
- 그 이후, 청교도 정권들은 잉글랜드 백성들에게 지나치게 엄격했고 군주제를 대체할 만한 인기 있는 정치적 대안도 찾지 못했다. 1650년대 동안 정치적 실세로서 전직 군사령관에서 (경건한 종교개혁의 이름으로) 독재자로 변모한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 그는 헨리 8세의 목회자였던 토마스 크롬웰의 먼 친척이었다)은 마침내 성탄절을 폐지했고 잉글랜드인들이 봄의 축제일에 그 주변에서 춤을 추었던 5월의 기둥들을 제거했다. 백성들에게 더 심각한 일은 그 정권이 결코 깔끔한 성격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즉 그 정권은 모든 전통에 명백히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다양한 종류의 급진주의적 분파들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용납했던 것이다.
- 그들의 아버지 집안은 상류층 가톨릭이었으나 그들의 외삼촌은 비밀리에 유대교 의례를 행했다는 이유로 1491년에 종교재판을 받고 화형 당했다. 그들이 알룸브라도(alumbrado, 15-6세기 동안 스페인에서 활동했던 신비주의적 형태의 기독교, 이단으로 정죄됨-역주)에 대한 동조와 세련된 에라스무스적 문화를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세대의 종교재판관들이 편집증에 사로잡혔다. 알폰소가 아욱스부르크에서 멜랑히톤을 만나기 일 년 전 후안은 끔찍한 죽음을 피해 이탈리아로 떠났고, 다시는 스페인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그 너머의 서방 기독교에 분산되기는 했지만 주목할만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이야기는 가톨릭 종교개혁에 예기치 않은 빛을 비추었다.
- 카라파는 폴과 콘타리니와 함께 그 임무를 수행하게 되어 기뻤다. 하지만 그들의 친밀한 관계는 그들의 종교적 논점에 대한 카라파의 불신, 그리고 개신교인들에 대한 일체의 양보가 교회에 대한 신성모독적 배반이라는 그의 확신 때문에 점차 긴장이 고조되었다. 카타리의 냉혹할 정도로 엄격하고 권위주의적인 방식의 교회 개혁에 동조했던 성직자들은 흔히 "열성파"(Zelanti)로 묘사되어 왔다. 상황이 더욱 혼란스럽고 복잡해질 때 그 관계들이 단지 영성파와 열성파로 단순하게 양분될 수 없었지만, 그런 묘사들은 성직자와 신학자들이 교회를 구하는 최고의 방법에 대해 논쟁할 때 두 축을 구별하는데 여전히 유용한 면이 있다. 제시되는 답들을 검토하면서 로마 교회의 부흥을 위한 최고의 세력 중 하나인 예수회(the Society of Jesus)의 발전과정에서 몇 가지 상충되는 흥미로운 흐름들이 드러날 것이다. 발데스파처럼 그것도 이베리아 반도에서 출현한 운동이었다. 그것은 찰스 5세의 신하였으며 발데스처럼 스페인 종교재판으로부터 도피해야 했던 바스크 지방 출신 남성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니고 로페즈 데 로올라(Inigo Lopez de Loyola, 그림 15)는 파리대학교에 등록할 때 그의 기독교 이름을 잘못 적어 역사에는 이그나티우스(Ignatius)로 알려졌다.
- 그들의 프레스코화는 가톨릭 교회 내에서 복음주의 개혁을 지원한다는 일종의 공개 선언이 있다. 화가 자코포 다 폰토르모(Jacopo da Pontormo) 자신이 이렇게 민감한 작업을 혼자 생각해 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 작업에 연옥, 성례전, 제도교회, 혹은 삼위일체의 상징을 일체 담지 않았다. 그의 그림 속에 담긴 것은 발테스의 <교리문답서>에 나온 주제들이었는데, 그것들은 이미 1549년에 베네치아 당국이 금지한 것이며 후에 로마 종교재판소도 금지한 것이다. 즉 그 성상들은 이신칭의 교리에 주목하는 사람들을 묘사했다. 발데스의 소책자들처럼 본토르모의 작품들은 방주를 짓는 노아나 자신의 아들인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아브라함처럼 구약성경의 잘 알려진 이야기들을 통해, 이렇게 위험한 주제들에 접근했다. 1556년에 폰토르모가, 그리고 1559년에 바오로 4세가 죽음으로써 메디치가에 좀 더 우호적인 교황이 세워졌는데, 그는 폰토르모가 왜 그런 그림을 그렸는지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미술사가 조르조 바사리(Glogio Vasari)가 주도했던 메디치가 출판협자들은 그 프레스코화의 디자인을 폰토르모의 정신이상 탓으로 돌렸다. 그리고 메디치가가 반종교개혁의 현신된 후원자가 되는 동안(그 결과 교황 피우스 5세로부터 대공(Grand Duke)의 칭호를 얻기도 했다), 불행한 폰토르모는 미술사에서 정신병자로 후세에 알려지게 되었다. 비록 그의 프레스코화들이 1738년까지 많은 비판과 혼란 속에도 살아남았지만, 지금 우리에게 남은 것은 몇 개의 원작 밑그림과 거친 스케치들뿐이다. 이런 에피소드는 예수회 초기 발전의 모호한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집중해 볼 필요가 있다.
- 제수이트의 교육은 수업료를 받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지만(예수회는 이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기금 마련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점점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되었다), 그들의 제한된 인력 때문에 고등교육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가난한 아이들은 고등교육을 받기 위해 필요한 기본교육의 기회조차 얻기 어려웠다. 결국 제수이트 교육선교는 다음 세대의 상인, 젠트리, 그리고 귀족들, 다른 말로 하면 유럽을 다시 가톨릭 신앙으로 복귀시키기 위해 필요한 사람들을 확보하는 데 탁월한 역할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수이트들은 또 다른 비전통적 종교 조직인 우르술라회와 협력하여 우르술라회의 에너지를 (남성들이 실행하기 어려운) 여성교육에 쏟도록 유도했다. 그 협력은 결과가 매우 좋았다. 우르술라회는 자선사업과 교육사업 모두에서 발군의 능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 엘리자베스의 아일랜드에서 프란체스코회 수사들이 비슷한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그곳에서 개신교 종교개혁은 그 섬에 대한 웨스트민스터의 착취와 동일시되었고, 인구의 절대다수가 사용했던 게일어로 소통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프란체스코회 수사들은 훨씬 더 광범위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아일랜드는 종교개혁 유럽에서 일관된 종교적 주장을 갖고 있던 군주가 1세기 이상 자신의 백성에게 강요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던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튜더와 스튜어트 왕가의 입장에선 예외적인 실패였다. 하지만 그 예외적인 이야기에 하나의 역설이 있다. 라오이기스(Leix)와 오펄리 (Offaly)에 잉글랜드 이민자들의 정착 정책을 실행한 사람은 다름 아닌 가톨릭 여왕 메리였다. 그 지역은 1918-22년까지 메리와 그녀의 남편인 스페인 사람 필립(당시에 그는 이미 중앙 및 남아메리카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둔 스페인 식민지들의 영주였다)을 기념하여 왕과 여왕의 나라로 알려진 곳이다. 잉글랜드 왕실이 가톨릭으로 남았다면 아일랜드는 이런 외국인의 식민지 점령에 대한 반작용으로 네덜란드처럼 개신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메리의 이른 죽음과 개신교인 엘리자베스의 등극으로 게일어와 영어를 말하는 아일랜드인들이 가톨릭 주의를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간 차이의 상징으로 삼게 되었다.
- 일부 뜻밖의 인물들이 그런 종교재판소 정책의 희생자가 되었다. 예수회는 젊은 이니고 데 로욜라만큼 의심의 대상이었다. 간디아(Gandia) 공작 프란시스코 데 보르자(Francisco de Borja)는 예전에 카탈로니아의 부왕이었다 이제는 제수이트가 된 사람으로 제수이트의 일반교육 프로젝트를 개척했던 귀족이었다. 그는 예수회의 뛰어난 총장이 되기 전에 그 나라에서 쫓겨났다. 종교재판소는 스페인 제1의 교구인 톨레도의 대주교이자 탁월한 도미니크회 신학자인 바르톨로메 카란자(Bartolomé Carranza)의 경력도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잉글랜드에서 메리의 실험이 진행 중일 때 추기경 폴의 중요한 협력자였다. 하지만 그는 개신교 이단을 거부하기 위해 양심적으로 노력하는 동안 그것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그 결과 카란자는 거의 17년을 미사에도 참석하지 못한 채 감옥에서 보냈고 잠시 복권이 되었지만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는 스페인 반종교개혁의 이상적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인물이다. 그가 체포된 이유는 메리의 잉글랜드에서 사용되도록 그가 작성한 교리문답서 내용에 종교재판소가 놀랐기 때문이다. 결국 그 교리문답서는 로마와 스페인 종교재판소가 발행한 도서목록에서 금서로 지정되었다. 그럼에도 카란자의 교리문답서는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교황이 인정한 트리엔트 교리문답서의 기초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이 우울한 블랙 코미디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 별 관심도 없었고 심지어 당혹스러웠던 메리와의 결혼에서 자유로워진 스페인 왕 필립 2세는 점증하던 소란과 재정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1559년에 스페인으로 돌아갔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그는 스페인 종교재판소를 주된 동맹자로 삼았다. 거대하지만 황량한 새 수도원-궁전 에스코리알(Escorial, 여기에는 장차 그가 묻힐 묘지도 함께 있었다)에서 통치하던 필립은 자기 아버지처럼 자신도 하나님의 계획에서 중요한 세계적 군주가 되기 위해 일중독에 빠졌다. 하지만 그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그것이 그 궁전의 수호성인 로렌스(Lawrence)의 고문과 죽음의 도구로 알려진 석쇠에 기초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에스코리알의 격자 문양 설계도가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에 기초한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필립과 그의 정부는 스페인인이 되는 길은 오직 한 가지뿐이라는 생각에 몰두했다. 즉 이슬람이나 유대적인 것뿐만 아니라 이제는 개신교적인 이방 사상과의 생각 없는 접촉으로 오염되지 않은 전통적 가톨릭이 되는 것. 왕은 이런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스페인 종교재판소를 후원하도록 쉽게 설득되었다.
- 장차 기독교 신비주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될 두 사람, 즉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와 후안 데 예페스(Juan de Yepes, 십자가의 요한)도 스페인 관료주의에 곤욕을 치렀다. 종교재판소의 관점에서 이 두 사람 모두 집안이 콘베르소였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의심을 받았다. 그들은 1490년대 스페인의 종교적 재편 과정에서 분출된 종교적 에너지의 대혼란 속에 출현했다. 두 사람 모두 카르멜 수도회에 가입했다(두 사람의 친밀한 관계가 공적인 걱정거리가 되기도 했다). 테레사는 종단의 재창설을 통해 그 종단이 이 광야에서 기원했다는 의미를 회원들이 깨닫도록 힘썼다. 이제 그 개혁교단에 속한 남녀들은 맨발로 걸어 다녔다. 그녀는 교회 권력자들에게 상상력을 발휘하여 자신에게 합류한 여인들이 카르멜회의 이상(관상과 행동주의의 균형을 유지)에 동참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설득했다. 모든 세기 신비주의자들의 특징인 영혼의 여행은 필요한 때에 이 세상의 여행과 병행되어야 한다. 많은 고난과 실패를 경험한 후 그녀는 자신을 존경하던 어떤 사람이 "그녀가 복종하고 싶은 명령을 남자들이 그녀에게 내리도록 만드는 재능"이라고 불렀던 것을 발전시켰다. 테레사는 흔히 지안로렌초 베르니니(Gianlorenzo Bernini)가 로마에 있는 승리의 성모 성당(the Church of Our Lady of Victory)을 위해 조각한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다.
- 1593년에 중도파와 협상할 때 나바르(이제는 프랑스의 앙리 4세)는 생각에 잠겨 "파리에선 미사를 드릴만 하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비록 이 유명한 인용문이 "나는 여기 있다. 나는 다른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라는 마틴 루터의 정확히 반대되는 정서보다 훨씬 더 근거는 약하다. 그렇다고 이것을 역사 속에서 제거해선 안 된다. 이것도 종교개혁의 한 결정적 순간을 요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엄격한 종교적 원칙들을 피곤에 지쳐 거부하면서 그 문구는 유럽 전역에서 70년간 '전쟁을 치른 후 유럽의 많은 정치가들과 군주들이 느꼈던 바'를 반영하고 있다. 프랑스의 전쟁 혐오감을 이용하여 앙리는 1598년에 낭트칙령 (The Edict of Nantes)을 중재했다. 그것은 앙리 3세가 중도파의 극심한 반대에 직면하여 결코 강요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위그노들은 보편적 관용은 아니지만 국가 내에서 자신들만의 교회와 요새를 확보하고 보장된 특권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앙리 4세의 훨씬 더 철저한 가톨릭 후계자들이 그 후 90년 동안 이런 특권을 축소하려 애를 썼으나 그 기간 동안 프랑스는 프랑스의 가톨릭 갱신과 재건의 물결이 거세게 일어났음에도 서유럽 최대의 종교다원주의를 대표했다. 결국 그들은 유럽의 가장 인상적인 반종교개혁을 이끈 것이다.
- 새로 발견된 순교자들과 자신의 고대 성지로 순례자들이 몰려오는 것에 한껏 고무된 로마는 모든 가톨릭 극장들 중에서 최고였다. 이제이 도시는 수 세기의 부패 후 건물에 대한 엄청난 투자를 통해 훨씬 더 장엄하게 변했다. 이런 건축의 붐은 교황이 주도했으며 그 도시에 거주하는 추기경들의 재산이 도움을 주었다. 추기경들은 이론적으로 자기들이 교구 사제로 있었던 다양한 교구 교회와 자신들의 화려한 삶에 안정적 배경을 제공해 줄 궁전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로마의 중심은 성 존 라테란 대성당이 아니라 새로 완성된 장엄한 성 베드로 대성당이었다. 1602년부터 1615년 사이에 이 성당은 카를로 마데르노(Carlo Maderno)에 의해 대대적으로 확장되었다.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와 미켈란젤로가 설계했고 그 후 100년 동안 서서히 완성된 돔 건물 서쪽으로 공사가 진행된 것이다. 마데르노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부분은 성당 서쪽 외관이었다. 그것은 (공사기간 동안 분명하게 드러났던) 그 건물의 토대 문제 때문에 충분히 위로 뻗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 건물의 평범함은 반세기 내에 단지 반종교개혁뿐만 아니라, 모든 기독교 건축 중에서 가장 뛰어난 공적 공간 중 하나가 정면에 마련됨으로써 구제되었다. 타원형 기둥들로 둘러싸인 이 광장은 영감 어린 조각가이자 바로크의 천재 건축가였던 지안로렌초 베르니니(Gianlorenzo Bernini)가 설계한 것이다. 베르니니는 이미 성당 내부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장식인 중앙 제단과 성 베드로의 무덤 위의 뛰어난 청동 닫집(baldachino)을 만들었다. 그의 광장은 보다 작은 사다리꼴 모양의 광장 때문에 멋지게 확장되었으며 그 작은 광장을 통과해 대성당에 이를 수 있고 허물 수 없는 주변의 오래된 건물들과도 적절한 조화를 이루면서 두 가지 기능을 탁월하게 수행한다. 즉 그것은 테베레 강부터 대성당까지 기막히게 멋진 길을 제공하며 (그런 효과는 무솔리니가 주변 건물들을 해체함으로써 얻은 결과다), 또한 교황이 남쪽 기둥 위에 다소 어수선하게 솟아 있는 바티칸 궁전의 창문으로 모습을 드러낼 때 그를 보려고 기다리는 수천 명의 순례자들을 수용할 수 있다. 지난 세기 동안 음향기술은 교황이 자신의 궁전에서 전 세계에서 온 새로운 신자들과 대화할 때 이 광장을 그를 위해 대단히 효과적이고 극적인 배경으로 만들어주었다. 신자들은 교황과 함께 기도하거나 그의 인사 혹은 신앙적 윤리적 선언에 환호하기 위해 매주 이곳에 모이고 있다. 근대의 어떤 기독교 지도자도 자신의 무리를 지배하기 위해 그렇게 준비된 무대를 갖지 못했다. 오늘날 몇몇 오순절파들과 텔레비전 설교자들이 최선을 다했지만 역부족이다. 만약 미래의 어떤 교황이 (로마의 주교들에게 그토록 익숙한) 군주적 스타일을 벗고 싶어 한다면 마이크와 장엄한 바로크 건축의 결합은 극복하기 어려운 강력한 방해물이 될 것이다.
- 시간 자체도 종교개혁에 의해 나뉘어졌다. 열정적이고 지적인 호기심이 많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 (Gregory XIII)는 반종교개혁에 대한 새로운 확신 속에 당시에 사용하던 율리우스력의 결함을 1582년 10월 15일부터 개혁했다. 그는 동방교회와의 일치에 관심이 무척 많았는데 자신의 후계자 중 한 사람의 주도하에 14년 후에 '브레스트 연합'을 이루어냈다. 그래서 세계 연합을 위한 중심으로서 교황의 교회적 역할뿐만 아니라 세속적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 그레고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자신의 모델로 삼았다.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는 율리우스력의 부정확성에 직면하여 보편적으로 신뢰할만한 부활절의 날짜를 확정하기 위해 하나님의 명령으로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했다고 한다. 놀랄 것도 없이, 개신교인들은 교황의 과도한 과학적 수정 작업을 사악한 음모로 간주했다.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유럽의 지역마다 받아들인 때도 달랐다. 후대 역사가들이 자료들에서 관련된 날짜들을 규명하려 할 때 거의 절망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말이다. 잉글랜드에서는 1752년에서야 그것을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보다 개신교적이고 논리적인 스코틀랜드인들이 그 교황이 옳았음을 인정했던 것(물론 공적으로 감사를 표한 적은 없다)보다 150년 이상 늦은 것이다. 달력에 대한 정확한 과학적 결정을 내린 후 로마는 위대한 이탈리아 천문학자이자 수학자인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를 다룸에 있어 치명적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갈릴레오는 1633년에 로마 종교재판소에 의해 유죄판결을 받았다. 오래전에 죽은 폴란드 성직자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의 급진적 우주론에 경험적 증거를 제공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1616년에 교회는 코페르니쿠스가 틀렸다고 선언했었다. 이제 로마 당국은 갈릴레이에게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주장을 철회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그의 관찰이 진리의 원천으로서 교회의 권위에 도전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태양중심설을 거부해야만 했던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즉 성경은 창조를 도덕적 언어로 제시하며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중심을 둔 죄와 구속의 우주적 드라마를 묘사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에서 도덕적으로 중립인 동그란 불덩어리보다 행성 지구를 그런 드라마의 무대, 우주의 중심으로 만드셨다고 가정하는 것이 그렇게 불합리한 것은 아니었다.
- 가톨릭과 개신교가 가장 당혹스런 관계를 맺고 있는 종교개혁의 측면 중 하나는 마녀들을 처리하는 문제 속에 있다. 마틴 루터와 스페인 종교재판소 같은 영예로운 예외가 있지만(하나의 예기치 못한 조합), 양측 모두 마녀에 대한 중세의 일반적 신앙으로부터 마녀로 간주되는 사람들에 대한 추적, 박해, 처형으로 이동했다. 1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중세의 학문적 분석에 힘을 얻어, 그들은 이런 불행한 사람들을 악마의 하수인들로 간주했다. 마법을 두려워했던 개신교인들은 종교개혁 이전의 두 도미니크회 수사들이 쓴 마법에 대한 여성 차별적이고 산만한 책을 대단히 중요하게 취급했다. 그 저자 중 한 명인 야코부스 슈프렝거(Jacobus Sprenger)는 마리아 숭배의 일환인 묵주 운동(Rosary)을 증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이 <말레우스 말레피카룸>(Malleus Maleficarum, 마녀의 망치)라는 터무니없는 책을 썼는데 1487년에 스트라스부르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1400년부터 1800년 사이에 유럽과 식민지 북아메리카에서 약 4-5만 명의 사람들이 마녀로 몰려 죽었다. 가장 주목할만한 사실은 대규모 이단 처형이 거의 끝났던 1560년경부터 이런 현상이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유럽의 각 지역에 따라 그 활동은 대단히 다양한 굴곡을 보이며 전개되었고 늙고 쭈글쭈글하며 사악한 여자라는 일반적인 마녀의 모습은 대체로 마을에서 부자거나 중요한 인물이었던 잉글랜드의 경우와는 많이 달랐다. 그들이 늙은 여인이었던 경우는 그들에게 대한 고소의 기간이 매우 오래되고 남편의 사망으로 그들을 보호해 줄 남자들이 갑자기 사라진 경우가 많았다.
- 개신교인들 중에서 한 독립적 성향의 화란 개혁주의 목사 발타자르 베커(Balthazar Bekker)가 한 영향력 있는 저서, <마법에 걸린 세계>(Beuitched World, 1691)에서 마녀사냥을 통렬히 비판했다. 이 책 때문에 독일의 많은 개신교 군주들이 수치심을 느끼고 마침내 마녀재판을 포기했다. 하지만 화란 개혁주의 교회는 그에게 감사하지 않았다. 17세기 중반 스코틀랜드교회 목사들은 통계적으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박해를 실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것은 자신들의 왕국에서 세속의 권세에 대항하여 자신의 권세를 주장하려는 스코틀랜드 성직자들의 오랜 투쟁과 무관하지 않았다. 스코틀랜드 교회는 현재에도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널리 쓰이는 고문 방법 '잠 안 재우기'를 개발했다. 동유럽의 양상은 달랐다. 편집증은 조금 더 늦게 나타났고 더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며 18세기에 절정에 달했다. 그때까지 지금은 강력한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에서 마녀로 판명된 사람들의 절반이 화형으로 인생을 마쳤는데, 16세기에는 그 비율이 4퍼센트 정도였다. "화형대 없는 국가"(States without Stakes)란 명성에 반해 종교적 다양성에 대한 관용도 점점 줄었다. 1776년에 폴란드 왕실의 법령으로 그런 처형이 겨우 멈추었고, 그때까지 약 천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 아메리카는 선교사들이 조심스럽게 길을 개척해야 할 매우 복잡하게 뒤엉킨 권력과 위계질서를 제공했다. 스페인인들은 부족사회와 자신들처럼 귀족 제도를 갖춘 복잡한 도시문화를 구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 도시환경에서 그들은 적극적으로 지방 엘리트들과 정략결혼을 시도했다. 이것은 북아메리카의 개신교 영국인들과 극명한 대조를 보이는 대목이다. 아마도 스페인인들이 튜더와 스튜어트 영국인들보다 자신들의 문화에 훨씬 더 안전하게 뿌리를 내린 것 같다. 그들은 유럽에서 보다 주변적이고 이류 왕실 출신이었으며 자신들 이웃에 있는 섬, 아일랜드에서 시도했던 문화적 동화 노력이 철저히 실패했음을 알고 있었다.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의 조카인 마르틴 가르시아 데 로욜라(Martin Garcia de Loyola)는 스페인계 아메리카의 복잡성을 상징한다. 그는 페루에 있는 최후의 독립된 잉카 지배자 투파크 아마루(Tupac Amaru)를 1572년에 체포하여 잉카의 수도 쿠즈코(Cuzco)에서 처형했던 원정을 지휘했다. 하지만 그는 투파크의 조카딸 비어트리스(Beatriz)와 결혼했다. 그들의 정략결혼은 쿠즈코 예수회 교회의 가장 주목할만한 작품 속에서 자랑스럽게 기념되고 혼탁한 현실에서 벗어나 이상화되고 있다(그림 59), 그 속에서 새로운 스페인 이주자 곁에 잉카 귀족이 화려한 전통복장을 하고 유럽의 방패 모양 문장과 함께서 있다.
- 다른 영성의 기억들과 혼합주의적 방식으로 결합하여 가톨릭 하부 구조로부터 다양한 신흥종교들이 출현했다. 서로 중첩되는 많은 것들 중에서 프랑스계 아이티의 부두(the Voudou/voodoo), 포르투갈계 브라질의 칸돔블레(Candomble), 스페인계 쿠바의 산테리아(Santeria)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역으로 아메리카에서 그런 혼합은 아프리카에서 아프리카 종교를 활성화시켰다. 이것은 대서양을 횡단하는 무역의 한 산물이었다.
- 그들의 아프리카 최고 창조신은 올루룬(Olurun)이었다. 하지만 그는 너무 지고하여 하찮은 인간사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그 창조신 밑에는 오리샤들(orishas)이 있었다. 이들은 아프리카 종교에서 하위 신들이었으며 인간생활의 전 영역과 관계가 있었다. 태어난 모든 인간은 한 오리샤와 관계가 있으며 이것은 모든 사람이 개별적 수호성인을 선택하는 가톨릭의 관행에서 완벽하게 용납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두 세계의 성스러운 인물들 사이에서 양립할 수 있는 속성을 찾으려는 노력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동정녀 마리아는 가톨릭 교회와 교회 내부 장식에서도 결코 무시할 수 없으며 그녀의 편재적 이미지와 타이노족(the Taino) 여신 아타비(Atabey)나 요루바족(the Yoruba)의 오리샤 오순(Oshun)과 예마야(Yemaya)를 동일시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그런 식의 겹치기가 없었다면 쿠바 교회의 제단과 그림에서 성 바바라(St. Barbara)의 인기를 설명하기 어렵다.
- 동일하게 놀라운 것은 성 패트릭이 많은 부두 제단에서 압도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그림 61). 그도 역시 한때 노예 신분으로 바다를 두 번이나, 특히 두 번째는 자유를 위해 건넜으며 로아(loa, 오리샤에 해당하는 아이티어) 담발라 웨도(Dambala Wedo)처럼 뱀을 지배하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음을 사람들이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잉글랜드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고 왜곡된 아일랜드의 전도자요 수호성인 성 패트릭은 식민 정권에 의해 삶이 강탈당한 사람들 사이에서 새로운 환대를 발견했다. 그렇게 풍성하고 복잡한 상징의 혼합 후 강력한 정의감을 지닌 전사, 폰/요루바족신 오구(Ogou)가 전사인 콤포스텔라의 성 야고보와 동일한 정체성을 갖게 되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아이티에서는 이들이 장-자끄 데 살린느(Jean-Jacques Dessalines),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 혹은 앙리 크리스토프(Henri Christophe) 같은 이 섬의 해방 영웅들의 정체성을 흡수했다. 19세기 아이티에서 데살린느에 대해 말하는 것이 금지되었을 때 성 야고보 성상을 들고 마을 주변을 행진하는 것은 언제나 가능했다.
-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모로코의 무슬림 군주 아흐마드-알-만수르(Ahmad-al-Mansur)가 자신의 동맹인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1596년 잉글랜드-모로코 연합군의 성공적인 카디스(Cadiz) 공격을 끝내자고 1603년에 제안한 것이다. 그들은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스페인인들을 함께 공격하고 자신들만의 식민지를 건설하려 했다. 그곳의 무더운 날씨를 고려할 때 모로코인들이 잉글랜드인들보다 더 적합한 정착민들이 될 수 있었다. 그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이것은 개신교인들이 성상을 혐오했던 무슬림보다 우상숭배적인 스페인 가톨릭들을 훨씬 더 싫어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또한 그것은 미합중국의 역사가 바뀔 수도 있었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보여준다.
- 그 연방의 역사는 아직 사반세기도 되지 않았고 계약에 의해 종교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함께 묶여 있었다. 퀘이커들은 공개적으로 채찍을 맞았고 그들의 귀가 잘렸다. 그 후에 1659년과 1661년 사이에, 네 명의 퀘이커들이 선교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 희생자 중 한 명이 메리 다이어(Mary Dyer)라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이미 추방을 당했지만 기어코 다시 돌아와서 처형되었다. 이것은 본국과 뉴잉글랜드에서 강력한 저항을 불러왔다. 찰스 2세는 자신의 정부가 퀘이커들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고 심지어 그들을 감옥에 집어넣기도 했지만 뉴잉글랜드의 처형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청교도 정착민들이 박해를 피해 떠나왔던 왕실이 이제는 청교도들의 처형을 억제하려 했다는 것은 대단한 역설이었다. 그 처형은 많은 뉴잉글랜드 주민들에게 종교적으로 혐오스런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처리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도록 만들었다. 흥미롭게도 로드아일랜드는 퀘이커들의 평화주의를 존중하여 그들에게 군 복무를 면제시켜주었다. 이처럼 선례가 없는 특혜는 1676년의 전면전을 치르면서도 지속되었다. 퀘이커들에게 전쟁 결정 문제를 포함하여 식민지 정부 내에 발언권을 허용하면서 말이다.
- 하지만 이 대회는 스코틀랜드 왕국이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고 가톨릭인 아일랜드인들 대부분이 제임스 왕 뒤에 정렬해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아일랜드의 경우 그들의 생각을 바꾸기 전에 3년간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치러야 했다. 국가적 "혁명"의 삼중주는 종교적 해법의 삼중주를 탄생시켰다. 잉글랜드인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국교회(잉글랜드국교회)는 개신교 비국교도들을 마지못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임스가 제공했던 것보다 훨씬 덜 관용적인 조건 하에 말이다. 1690년에 장로교 활동가들이 많은 스코틀랜드인들의 소망과 달리 스코틀랜드국교회에서 감독제를 완전히 제거하는 동안 잉글랜드 감독들은 불편한 심정으로 물러서 있었다. 물론 바다 같은 아일랜드의 가톨릭들 사이에서 잉글랜드국교회의 수는 우스울 정도로 작고 보잘것없었지만 아일랜드에서 잉글랜드국교회가 확고하게 권력을 장악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잉글랜드 감독들은 마음의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각 왕국에서 결정적 요소는 "빈약한 새 왕실을 누가 최고로 지원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 18세기에 유럽 정치가들과 장군들은 16세기와 17세기에 유럽의 가톨릭 세력에게 너무 강력해 보였던 인도 무굴제국이 몰락하기 시작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역으로 그들 자신의 정부 및 군사조직은 1618년부터 지속된 유럽의 종교전쟁을 통해 훨씬 더 효과적이고 재정적으로도 튼튼한 것으로 검증되면서 계속 발전했다. 인도가 유일한 중심이었다. 도처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힘이 훨씬 더 약해 보였다. 18세기 중반에 대영제국과 프랑스가 우위권을 놓고 싸웠다. "7년 전쟁"이 유럽의 모든 세력을 끌어들였다. 이것은 전 세계에서 싸움을 벌였던 최초의 전쟁이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도 뉴프랑스와 잉글랜드의 13개 아메리카 식민지들 국경에서 징병되었다. 아프리카인들도 휩쓸려 들어갔다. 인도 아대륙(subcontinent) 군대에서는 무슬림과 힌두교인들이 유럽인들의 전쟁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것은 앞으로 2세기 동안 지속되는 세계적 권력투쟁에서 기독교 서방이 지배세력으로 부상하던 서막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이 답보 상태에 접어들면서 평화조약을 체결했을 때(1763년), 그들은 한 섬나라 제국이 전 세계에 걸쳐 방어망을 구축하고 거의 전 세계를 포괄하는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영국이 자신에게 도전할 수 있었던 최후의 인도 통치자 티푸 술탄(Tipu Sultan)을 패배시켰던 1799년에 영국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티푸의 패배로 영국인들은 티푸의 프랑스 동맹군의 희망을 산산이 부숴버렸다. 당시에 혁명을 일으켰던 공화파들은 1763년에 당한 프랑스 왕실의 치욕을 되갚아 주고 싶어 했었다. 영국이 인도에서 얻은 막대한 소득과 비슷한 결실을 1763년에 영국이 자신의 13개 식민지 북서쪽에 위치한 프랑스의 북아메리카 영토를 획득함으로써 거두었다. 개신교를 미래의 기독교로 간주하는 것이 당시로서 터무니없는 짓은 아니었다.
- 바흐는 자신의 칸타타에 합창의 창조성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당대에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은 유일한 대가였다. 후에 그는 자신의 공적 교회 업무와 상관없는 건반과 다른 악기들을 위한 독주곡에 재능을 더욱 집중시켰다. 부분적으로는 그가 연루되었던 성 토마스 교회의 내적 갈등에 점차 싫증이 났기 때문인 것 같다. 그의 기념비적 후기 작품인 <B단조 라틴 미사>는 루터교회 예배의 요구사항을 넘어섰다. 작센의 선제후를 위해 1733년에 작곡한 처음 부분은 당시에도 매우 독특했다. 그 <라틴 미사>는 종교개혁의 심장부에서 그 선제후가 신하들을 무시하고 가톨릭 교회로 개종한 것에서 단서를 얻어 작곡한 것이다. 지난 200년의 전쟁을 초월하여 분열된 서방 라틴교회를 음악 안에서 재통합했다. 이전에 어떤 개신교인도 그런 작품을 쓴 적은 없었다.
- 루터교회가 대체로 경건주의 운동을 포용할 수 있었던 기간 동안 경건주의자들은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전 세계적으로 개신교에 빠르고 중요한 영향을 미친 독특한 분파를 하나 탄생시켰다. 이것이 바로 모라비아 교회(Moravian Church)였다.
-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과 병행하여, 동시에 그것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장차 "복음주의 부흥"으로 서술되는 영어권 개신교의 부흥이 있었다. 배경에는 경건주의자들을 자극했던 비슷한 관심이 있었다. 즉 경건한 잉글랜드 개신교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던 사회의 변화에 당황하지 않았다. 잉글랜드의 번영과 세속적 집착은 잉글랜드국교회 법정, 즉 잉글랜드국교회가 선-종교개혁 교회로부터 물려받은 징계 구조의 실패와 관련이 있었다. 잉글랜드국교회 법정은 1642년에 최초의 잉글랜드 내전이 발발할 때까지는 충분히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1662년에 복구된 잉글랜드국교회가 모든 잉글랜드 개신교인들을 포괄하지 못했을 때 자신의 옛 권위를 회복하지 못했다. 1688년 이후 법정의 부패가 더욱 폭로되었다. 이런 교회 징계의 붕괴가 루터교 국가들의 경우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루터교 국가들에는 사회의 다양한 분열을 배경으로 경건주의가 더욱 성장하고 있었지만, 모두 비슷한 걱정을 하게 되었다. 잉글랜드 의회는 1687-8년에 "신성모독과 세속성의 효과적 억제를 위한 법령"을 통과시켰다. 이것은 조직적인 반삼위일체 신앙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이 법령을 통해 입법자들은 소키누스 주의(Socinianism)를 교회의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할 수 있고 교회는 그 위협에 적절히 대처할 수 없다고 승인한 것이다.
- 경건주의자와 모라비아교도처럼 잉글랜드 복음주의자들은 십자가상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인간의 죄를 위해 성부께 죄 값을 치르는 행위)을 충분히 인식하면서 마음의 종교,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적, 개인적 관계를 맺는 종교를 만들고 싶어 했다. 한 번 더 이것은 루터를 통해 여과된 아우구스티누스의 메시지였다. 그런 충동은 부분적으로 잉글랜드국교회 내에서 호응을 얻었다. 또한 그것은 17세기 중반부터 존재해 온 잉글랜드의 비국교도 그룹들에도 자극을 주었고 (의도적이라기보다는 우연히) 잉글랜드국교회 밖에 위치하게 된 새로운 종교단체, 즉 감리교회를 탄생시켰다. 세계적 운동이 된 이 단체의 지도자는 존 웨슬리(John Wesley)였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에 사람들이 경청할 것을 확신하면서 자신의 사역이 경건주의운동의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잉글랜드국교회 목사였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찰스 2세의 복귀 후 잉글랜드국교회에서 축출된 비국교도 성직자였다. 하지만 존의 부모님 모두 열렬한 왕당파였다. 정말 그의 어머니는 한동안 선서거부자(Non-Juror, 윌리엄 3세와 메리에 대한 신하로서 선서를 거부한 자들-역주)였다. 사무엘 웨슬리(존 웨슬리의 아버지)와 수잔나 웨슬리는 왕위 계승에 대한 의견 차이로 각방을 쓰기도 했었다. 사실 존을 임신한 것은 두 사람이 이념적으로 재결합했다는 징표였다. 제임스의 도주 이후 새로운 정권들이 고교회 성직자들의 충성심을 의심하면서 그들이 권력에서 점차로 배제되었다. 청년 시절에 웨슬리가 알고 있었던 교회는 "광교회주의자" 라는 매우 상이한 스타일의 성직자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 여기서 웨슬리의 풍부한 상상력이 왕성한 상업사회의 언어로 자신의 핵심적 비유를 시도했다.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보혈에서 "이익을 얻는다." 그들이 작은 상점, 분주한 작업장에서, 심지어 그들의 능력이 뛰어나면 공장이나 은행에서 "이익", 상업적 소득을 얻듯이 말이다. 그것은 웨슬리의 찬송을 부르는 경제적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들의 열망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구원 순간에 경험한 기쁨과 안도감을 자신과 가족의 더 품위 있는 삶을 위해 사용했다. 근면과 엄격한 도덕성이 짝을 이루었다. "개신교 노동윤리"와 닮은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16세기 종교개혁보다 감리교와 복음주의 부흥에서 기원했다. 전국과 자신의 고향인 서부 지방에서 교육과 자선사업을 전개했던 가장 주목할만한 잉글랜드 복음주의 활동가 중 한 사람인 해나 모어(Hannah More)는 최근에 그녀의 전기 작가에 의해 "최초의 빅토리아인" (the First Victorian)으로 적절하게 묘사되었다. 비록 그녀가 미래의 빅토리아 여왕이 겨우 14살이었을 때 세상을 떠났지만 19세기 영국인들의 대표적인 공적 자아상인 '도덕적 진지함'을 예견하고 틀을 놓았다. 그 영향은 1960년대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1세기 동안의 전쟁과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형성된 두 개의 거대한 국제기관, 즉 영국 육군과 해군의 행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존 웨슬리의 많은 순회 설교자들은 전직 군인들이었다. 이런 경력은 웨슬리가 그들에게 요구했던 엄격한 삶에 이상적으로 잘 맞았다. 전통적으로 보존되어 온 군사적 행동 때문에 영국군대가 복음주의 부흥의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는 사실이 흔히 간과되어 왔다. 우리는 군대도 18세기와 19세기에 변화의 물결 속에 있었던 또 다른 기관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당시의 군대는 근거를 상실한 개인들이 혼란과 위험의 한 복판에서 자신들의 삶의 정체성과 틀을 찾았던 곳이다. 복음주의적 원칙들은 다른 사람들 만큼 군인들에게 호소력을 지녔다. 특히 그들이 폭력과 죽음에 직면한다는 면에서 그러했다. 더욱이 영국 육군과 해군이 비-당파적 애국심을 꾸준히 유지했던 것은 (비록 애국적 보수주의의 경향을 보이긴 했지만)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정치로부터 거리를 유지하는 영국 복음주의의 일반적 경향과 조화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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