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제프리 버튼 러셀 / 김영범
출판 : 르네상스
출간 : 2006.03.22
책을 덮으면서 드는 의문은, "천사는 자유의지로 타락할 수 있는가?"이다.
2권 격인 이 책에서 러셀은 이원적인 선악의 구분을 '존재론'적인 측면과 '도덕론'적인 측면으로 나누어 구분한다. 또한 실재하는 악에 관해서도 자연재해 같은 자연 발생적 악과 인간의 언행으로 발생하는 악으로 나누어 접근하는데, 이와 같은 관점에서 5세기경 다양한 교부들과 주교들의 악마론을 분석한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혼동해서 썼던 개념과 그로 인해 발생한 오류를 짚어나가는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각 이론과 교리들의 차이점들 -그들이 주장하는 악의 기원과 그리스도의 의미, 악마의 정의와 타락 시기 등- 을 비교하여 살펴볼 수 있다.
이하는 개인적인 단상들이다.
먼저 도덕론적인 접근에서, 마니교적인 설명이 가장 와닿았는데, 인간이 악을 완전히 이해하여 그럼에도 스스로 선을 선택하게 하기 위해서- 완전한 자유의지를 주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선택지 중 하나로서 선이 존재한다면 선이 아닌 것도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저자는 비신정론자들의 입을 빌어 그렇다면 어째서 불필요한 -과다한- 고통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개인적으로는 그것을 줄이기 위한 노력이 종교적 가르침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여기서 윤회의 개념을 빼놓고는 접근이 어렵다는 맨리 P. 홀의 의견에 동의하는데, 개개인이 고통을 가하는 자와 당하는 자의 양면성을 경험하고 스스로 그것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그런 '개념' 또는 '존재'가 사라지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존재했었으나 사라진 것으로 만드는 것이 목적이 아닐까.
그렇다면 신이 어째서 인간의 행동의 결과로써 나타날 상황들을 미리 알면서도 막거나 다른 방향으로 유도하지 않는가에 관해서는, '안다'는 부분을 다르게 정의하고 싶다. 사실 일반론적인 반론은 우리 역시 그것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으나 (예감) 충분한 관찰과 노력을 기울이고 신중하게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이 첫째, 그럼에도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영향력에 관해서는 육적 존재의 한계임을 받아들이고 수용해야 함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둘째일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고정되어 있는 선형이라는 가정을 벗어나면, 신이 알고 있는 미래는 하나가 아니게 된다. 즉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다는 말은 모든 선택지에 따른 미래가 존재한다고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일종의 평행우주론과도 유사하다. 다양한 선택에 따른 영향과 결과들 역시 다양하게 존재하고, 수없이 중첩되어 존재하는 세계를 오가는 것은 '나'라는 의식뿐이다-라고 가정하는 쪽이 더 말이 되지 않나 싶다. 전지전능의 신이 '모든 것을 안다'는 말은 모든 미래의 가능성들을 알고 있다는 말로 치환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말장난을 조금 더 진행해서, 보다 많은 존재들이 선택하고 믿는, 가장 density 한 결론이 가장 현실에 가깝게 구체화된다고 상상해보자.
사랑이 본질인 신은 모든 존재들이 이를 깨닫고 결과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선택을 하기까지 모든 선택들을 절대적 사랑으로 지켜보는 것이다. 모르기 때문에, 혹은 금지되었기 때문에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선택하지 않을 수 있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즉 모든 선택에는 그 영향이 발생하고, 그것을 겪고 깨닫는 과정 중에서 고통이 발생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고통들이 악이 되는 것이며, 그것까지도 사랑하기 때문에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이라고 본다면 오리게네스의 이론과 유사해질지도 모르겠다.
자연적 악에 관해서는 그 자체를 악으로 볼 것인가, 그로 인해 생기는 고통을 악으로 볼 것인가 하는 지점에서 갈리는데, 후자의 경우 자연에 가하고 있는 고통을 살펴보고 전조 증상을 제대로 이해하면 피할 수 있는 - 더 이상 악이 아니게 되는- 지점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유 없이 행해지는 악에 관해서는, 조심스럽지만 행하는 자가 그것이 악이라는 것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라 가정하면 그것을 이해하고 희생을 선택하는 자세는 순교가 되는 것일까? ('저들은 스스로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있다.')
보다 큰 그림을 볼 수 있는가- 그것을 위한 학습법이 역사적 접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보다 긴 호흡으로 인과를 보기 위해서 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정석적인 방법이 아닐까.
그에 이어서 시점에 따라 바뀌는 선악으로 접근해보자. 본능이 이성적 선택을 압도하는 -혹은 선택권이 존재하지 않는- 동물들의 경우, 약육강식을 악으로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인간에게는 상황에 따라 악이 되기도 한다. 복잡한 상황 속에서 그나마 가장 손쉬운 분별법은 '나'와 '남'을 구분하여 선택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방법일 듯하다. 사탄이나 타천들의 타락의 이유가 -그랬다고 가정하면- '자신'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본다면, 즉 나를 위해 타인에게 고통이 될 수 있는 행위를 선택하는 것이 악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고 본다.
나의 고통을 피하기 위한 선택보다 보다 많은 이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선택을 거듭해나가면 이상 사회에 조금은 가까워지지 않겠는가, 그것이 예수가 보여준 '공략법'이 아니겠는가 생각해본다. 결국 그것을 배우기 위한 과정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하기 위해 부딪치게 되는 것은 아닐지. 제대로 바라보지 않고 분리-제거하려고만 해서는 '누가 더 힘을 가지고 있는가'의 다툼으로 변질되고 만다.
다만,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서, 그 자유의지가 인간이 '신을 닮은' 부분이라면, 천사들은 그것을 가지고 있는가? 만약 애초에 지어짐대로 존재하는 존재라면, 애초에 그들에게는 '선택'이라는 개념이 없다면 - 과연 타락이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그런 역할'을 맡았다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
읽을수록 정돈되기보다는 혼란스러워지고 있는데 나름대로는 즐겁다.
재미있게 읽었다.
- 지금까지 알려진 것 중 가장 초기에 해당하는 악마에 대한 기독교의 묘사는 586년 <라불라 복음서(Rabbula Gospels)>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므로 <라불라 복음서>에 등장하는 그림들은, 4세기에 그린(사탄 자체가 아닌) 뱀을 묘사한 아담과 이브의 프레스코화를 제외하고는, 그 책이 씌어진 당시가 아니라 그 이후 시기에 그려진 것들이다. 대략 6~9세기 그림들은 초기의 악마에 대한 개념을 좀 더 가깝게 드러내고 있으며, 좀 더 최근에 속하는 네 개의 그림은 일반적 관점을 보여준다. 그런데 6세기 이전의 기독교 미술이 왜 악마를 그리지 않았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 악의 원인에 대한 최근의 설명들 -유전적 요소, 사회 환경, 계층, 무지, 정신질환 등- 은 개인적인 문제를 해소하는데, 그리고 우리의 일반적인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한 가지 제거할 수 없는 것, 즉 그 정글(검은 충동의 잠복처)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 정글은 자연의 정글보다 더 복잡한 미로가 아닐까? 정글은 자연이다. 우리 내면에 악의 본질이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존 힉크가 <악 그리고 사랑의 신(Evil and the God of Love)>에서 그랬듯이, 우리는 악을 분석하고 악에 대해 고뇌해야 한다.
- 이 책에서는 '악'에 대해 논의하지만 그것을 해명하지는 않는다. 어슐러 르권이 설파했듯이 "마치 쉬운 산수 문제처럼 어떤 문제는 해결 가능하고 답을 내놓을 수 있다. 만일 당신이 답을 원한다면, 단지 책의 뒷장을 보면 된다." 그러나 그것은 본질에서 비껴가는 행위요, 일종의 도피다. 악을 있는 그 자체로 본질적으로 보려 하지 않고, 단지 우리 인생에서 제거해야 할 '문제아'로 파악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악은 우리가 긴 인생의 여로에서 일상적으로 접하는 모든 고통, 고뇌, 허탈, 상실, 부정의 등에서 만날 수 있다. 우리가 삶을 이끌어나가려면 이런 문제를 매일 대면하고 계속 해결해야 하고, 그리고 그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 나는 개념을 역사적으로 정의한다. 어느 때 개개인은 실재(악마 또는 의회와 같은)에 대한 관념을 가질 수 있다. 이런 관념 또는 견해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담론을 거쳐 새로운 개념으로 발전해 나아간다. 이와 같은 다양한 개념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한다. 어떤 것은 세월과 함께 사라지고 어떤 것은 받아들여진다. 이로부터 점차 전통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역사를 통해 이루어진 하나의 실재(악마 또는 의회)에 대한 인간의 지각 인식의 전통, 이것이 개념을 형성한다. 하나의 개념은 상대적으로 간단해 보일 수도 있으나, 실제로는 종종 여러 개의 의미가 중첩되어 복잡성을 띠고 있다. 그러나 개념은 역사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시간을 따라 추적해 올라가면 개념의 범위를 경계 지을 수 있다. 그러나 개념은 '기원이 무엇이었고, 또는 무엇이 될 것이고, 또는 어떤 때는 무엇이 되고'와 같은 식으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개념은 정합적이고 전체적이며, 초월적인 시간 속에 존재한다. 개념은 객관적 실재에 상응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무엇이 객관적 실재인지 알 수 없다. 가장 확실한 신학적 진술은 개념에 대한 역사적 진술이다. 형이상학적 실재에 대한 진술은 그 실재에 대한 증거의 채택 여부에 따라야 하므로 그 의미가 불충분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개념에 대한 진술은 역사적으로 검증할 수 있기 때문에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개념을 연구하는 역사학자는 역사신학자에게 가장 확실한 진술을 제공할 수 있다.
- 그리스도 출생 이후 1세기 동안 그리스 철학 사상은 지속적으로 발전했는데, 이 사상들은 기독교와 그노시스 작가들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다. 플라톤주의자들은 데몬들(demons)을 신들과 인간 사이를 매개시켜주는 존재로 정의했다. 이런 데몬들은 유대-기독교 천사들과 매우 유사했다. 플라톤주의자들에게 데몬은 선과 악이 혼합된 존재이고, 혼합의 정도는 얼마나 비이성적인 면이 그들의 영혼을 지배하느냐에 달렸다. 호메로스의 사상과 초기 그리스 사상에서 다이몬(daimon)과 테오스(theos)의 구별은 분명하지 않았다. '신들'처럼 '데몬' 도 신성한 섭리의 발현체로서, 그리고 그런 신성한 원리와 같이 선과 악의 혼합적 존재들이었다.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다이몬'은 분명히 선을 위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호천사였다. 기독교 시대가 도래하자 '데몬'이라는 용어는 자주 더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한 '다이모니온(daimonion)'으로 대체되었고, 기독교도들은 다이모니아(damonia)를 악의 천사와 연결시켰다.
- 당시 교부들이 공통적으로 가장 극렬하게 반대한 세력은 그노시스주의이다. 그노시스주의는 서구 종교의 역사에서 중요한 종교 운동의 하나다. 현대 학자들은 '그노시스주의' 란 용어를 다양한 의미로 사용한다. 간단히 말하면, 그노시스주의는 기독교의 급진적인 헬레니즘화로부터 나온 기독교 이단으로 간주되곤 했다. 그러나 쿰란과 나그함마디 유적들이 발견된 이후에 학자들은 후기 그노시스파의 거의 모든 사상적 요소들은 이미 쿰란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현재 그노시스파는 일련의 사상들, 즉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그리스 철학(특히 중기 플라톤주의), 히브리 전통, 에세네파, 그리고 기독교에서 일반적 성향을 뽑아낸 사상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일반적 성향은 사상 논쟁 운동 속에서, 즉 처음에는 유대-기독 공동체에서, 그다음은 그리스-기독 공동체에서 자기 목소리를 찾았다. 그리고 유대-기독교 환경에서 그노시스 사상은 그노시스교도보다 더 이원론적인 사도 작가들의 사상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약 150년 이후부터 그노시스주의는 더욱더 이원론적이고 신비적이고 한층 더 헬레니즘화 했다. 이미 120년 또는 130년경에 기독교 작가들 중에는 벌써 그노시스파를 위험시하여 이를 이단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다.
- 그노시스주의는 다양한 형태들을 띠기 때문에 이 용어를 정의 내리기는 여전히 어렵다.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노시스(Gnosis)' 와그노시스주의(Gnosticism)'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① 폭넓고 모호한 운동이라 불리는 '그노시스'는 유대교, 그리스 사상, 그리고 기독교 사상에서 그 성향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② 2세기 기독-그노시스 주의자에 의해 제창된 복합 체계인 '그노시스주의' 와는 다르다. '그노시스'가 기독교를 대신하는 신앙이라 할 수 있다면, 그노시스주의는 분명한 기독교다. 비록 기독교 전통의 정의에 의하면 전통과 그 너머 사이의 경계에 존재했지만 말이다. 기독 공동체는 여전히 초기 상태에 있었고, 그 경계선도 여전히 모호한 미완성의 단계였는데, 그노시스파와 교부들의 사상 충돌은 이런 모호한 경계를 정의 내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교부들 사이에 점차적으로 그노시스주의를 배제하자는 여론이 일어났다.
- 그노시스교의 악에 대한 관심은 경험,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우리에게 낯선 곳이고, 때문에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인간의 감정'에서 비롯되었다. 이 세계는 악 때문에 너무나 결함이 많으며, 따라서 이 세계는 단지 열등한 세계, 즉 더 고매하고 초월적인 어떤 세계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노시스 교리는, 선과 악 두 영적 권능 간에 우주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마즈다이즘의 교리와, 선으로 정의되는 정신과 악으로 정의되는 물질 간에 투쟁을 하고 있다는 오르페우스교의 교리를 결합했다. 물질로 이루어진 우리의 육체는 사악하고 더러운 감옥이고, 이 감옥에서 우리의 영혼은 괴로워하고 있다. 천하고 어두운 이 물질의 세계는 마왕에 의해 다스려지는데, 이는 자비의 신에 의해 다스려지는 영적인 밝은 빛의 세계와 대립된다. 이 선의 신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런 저열한 세계를 창조했을 리 없다. 그는 이 세계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이 세계가 보이지 않으므로 이 세계는 사악하거나 분별없는, 또는 이 두 가지 특성을 다 가진 한 명 또는 그 이상의 열등한 악령들의 생성물이다. 이러한 악령들을 그노시스파는 아르콘 또는 에온(eons)이라 불렀는데, 이는 악의 집정관(evil archon) -아이온(aion) 또는 코스모스(kosmos)- 이라는 사도 시대 교리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사도들은 우주가 하나님 또는 하나님 그 자체인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가 아닌 어떤 영적 존재에 의해 창조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전혀 언급한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그노시스파는 일반적으로 보통 7명의 아르콘들을 천사들과 구분했다. 아르콘들은 천사들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는데, 아마도 그들의 선조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개념상 이들은 서로 별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창조된 영적 존재들로 모두 하나님보다 열등하기 때문이다.
- 그노시스파의 불필요한 복잡성은, 발렌티누스 주의자의 체계에서 더욱 증가했다. 발렌티누스는 이집트인으로 마르키온과 거의 같은 시기에 로마에 왔다. 그는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를 복원하고 있다는 믿음으로, 점차적으로 그의 제자 프톨레마이오스의 도움을 받아 주로 악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 복잡하고 혼란스런 유출론(emanationist) 신화를 만들었다. 그의 혼란스런 신화에 대해 몇 가지 언급하자면, 신(Being)은 오그도아드(Ogdoad)라고 불리는 8명의 '고등 에온들(eons)'과, 그리고 적어도 22명의 하등 에온들을 방출한다. 이 에온들은 신성이 가득한 신성한 '플레로마(pleroma:충만)'를 형성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모든 유출자들(emanations)은 모든 부분이 신성하나, 연속된 유출을 통해 근원에서 멀어질수록 그만큼 불완전하게 된다. 플로티누스 사상에서처럼, 이런 불완전성이 무지를 낳고 결과적으로 실수와 두려움을 만든다. 근원자인 아버지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그래서 가장 낮은 단계의 방출자인 소피아(Sophia)는 가장 모자라고, 그래서 그 모자람의 공백은 자만으로 채워지게 됨으로 인해 그녀는 불법적으로 아버지의 영적인 실재를 알려고 덤빈다. 그녀의 노력은 좌절되지만, 이런 행위는 플레로마의 평온을 침해한다. 결국 플레로마는 그녀의 오만함을 깨고 허공에다 던져버리는데, 그곳에서 이 오만함은 하등의 소피아 또는 아카모트(Achamoth)로 실체화되어 허공을 비참하게 헤매고 다닌다. 소피아의 부질없는 소망은 정신을, 그녀의 고통은 물질을, 그리고 그리스도의 그녀에 대한 연민은 영혼을 낳는다. 이제 그녀는 구약의 하나님을 낳고, 그는 위의 세 요소, 즉 물질, 정신, 영혼으로부터 물질세계를 창조한다. 그래서 이 세계에 거주하는 모든 존재들 -인간을 포함하여- 은 선과 악의 혼합물이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이 요소들 중 하나가 더 지배적 요소가 된다. 그래서 세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첫 번째 부류는 육신과 물질에 갇힌 사르키코이(Sarkikoi)로, 이들은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 두 번째는 프시키코이(Psychikoi)로, 이들은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후에야 구원받을 수 있다. 마지막 부류는 프네우마티코이(Pneumatikoi)로, 이들은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준영적 지식을 흡수하여 구원을 얻는다.
- 발렌티누스와 같은 견해는 기독교 신학의 여러 부분, 특히 원죄와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창조신은 결코 진정한 신이 아닌 부차적이고 타락한 존재이므로, 야훼 하나님에 대한 아담과 이브의 반란은 지금까지와는 상반된 도덕적 의미를 가진다. 창조자에 대한 반역은 미덕이 되고, 그가 우리에게 숨기려 했던 선과 악의 원리를 가르쳐준 뱀은 인간의 은인이 된다. 그노시스 일파인 세티안파(이집트에 근거지를 두었던 그노시스파), 나세니안파, 오피테스 등은 뱀이 인간을 악의 아르콘으로부터 해방시켰고, 최초의 구원의 영적 지식을 나누어주었다고 해서 존중했다. 이러한 생각은 '행복한 잘못'이라는 초기 기독교 전통과 유사한데, 즉 원죄가 인간으로 하여금 어린애 같은 순진성을 넘어서 지혜로움을 키울 수 있게 했고, 이는 또한 하나님을 대신한 예수 그리스도의 체현을 성사시킨 우주의 중심적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노시스파의 체계 속에서 에덴의 뱀은 부정적으로 남아 있고, 용, 악마, 그리고 악과 동일시된다. '왜 최고의 신은 열등한 신이 나쁜 짓을 하도록 방치하곤 하는가?'라고 묻는 테르툴리아누스는, 악에 대한 비난을 최고의 신으로부터 보조적인 창조의 신에게 돌리려는 그노시스파의 어려움을 목격했다.
- 예를 들면, 외경인 <이사야의 승천>은 중세에 전설로 편입된 벨리알/벨리아르(Belial/Beliar)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1세기 유대 사회를 배경으로 씌어진 이 책은 도입부에 야훼 하나님을 버리고 사탄을 섬긴 마나세(Mannasseh) 왕을 벨리아르라고도 부른다. 마나세는 "벨리아르의 시종, 즉 지상의 세계를 다스리는 불의의 군주인 벨리아르를 위한" 종이 된다. 벨리아르는 마나세로 하여금 마법, 마술, 점술, 간통, 그리고 정의로운 자들을 박해하는 짓뿐만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을 저버리는 가장 큰 죄도 범하도록 재촉하고 부추겼다. 벨리아르는 이사야에 대해 분노한다. 왜냐하면 이사야가 메시아의 도래를 예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벨리아르/사탄은 하나님의 승리를 막을 수 없다. 하나님은 "그의 천사들과 함께 이 땅에 오시어, ... 벨리아르와 그의 무리들을 끌어다 게헤나에 던져버릴 것이다. 그리고 신앙심이 깊은 경건한 이들에게 평안을 가져다줄 것이다." <이사야의 승천> 후반부는 2세기경에 기독교 내용이 첨가되면서 메시아와 그리스도를 동일시하게 된다. '사탄 사마엘(Sammael)'과 그 무리들은 서로를 시기하고 증오하여 혼란스런 싸움에 빠져 있는데, 곧 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사탄으로 하여금 그를 숭배하게 하여 악마의 권능을 영원히 없애버릴 것이다. 약 180년경 준그노시스 저작인 <베드로 행전>에서, 베드로는 사탄을 세계의 재앙이라고 비난한다. 영생의 파괴자요, 파멸자인 사탄은 아담을 욕망의 덫에 걸려들게 하고는 "그를 옛날의 사악함으로 육신의 사슬로 묶어놓았다". 악마는 "순결한 영혼을 독 묻은 화살"로 쏜다. 그러나 마침내 '탐욕스런 늑대'는 그리스도에 의해 불 속에 내던져지고 '까맣게' 탈 것이다.
- 테오필루스는 아테나고라스보다 더 적극적으로 악마를 천사로 간주했는데, 이로부터 이런 견해는 하나의 전통으로 굳어졌다. 악행을 저지르는 악령 또는 사탄은 뱀을 이용하여 이브를 유혹했는데, 최초 커플의 행복을 시기했기 때문이었다. 악마는 아담과 이브의 낙원 추방 이후에도 그들이 완전히 비참한 지경에 빠지지 않은 것을 보자, 그의 시기심은 정도를 더하여 카인을 충동해 아벨을 공격하게 함으로써 인간 세상에 죽음이라는 것을 생기게 했다. 테오필루스는 시기심이 사탄의 추방 동기라고 강조하는 <솔로몬 지혜서>를 따른 최초의 신학자였다. 이레나이우스와 키프리아누스는 이후 이 설을 따랐지만, 오리게네스는 시기심보다는 자만심이 더 적절하다고 보았고, 결국 이 설이 지배적인 설이 되었다.
- 2세기 말엽, 도덕· 죄 · 속죄에 깊은 관심을 가진 두 신학자가 등장하여 이러한 개념을 악에 대한 논의의 최전방에 배치시켰다. 이레나이우스는 140년경 소아시아에서 태어나 리옹의 주교가 되었고, 그곳에서 갈리아 교회의 초석을 다졌다. 그는 202년쯤에 죽었는데, 순교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그는 내부적으로 분열된 교회의 단합을 이루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이런 이유로 그는 <반이단론(Against the Heretics)>이라는 책을 저술했는데, 그노시스파, 특히 발렌티누스와 그의 제자 프톨레마이오스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다. 비록 이레나이우스는 다른 교부들처럼 그노시스파의 이원론적 성향은 지니고 있었지만 정통과 그노시스파 간의 차이를 분명하게 구분했고, 이때부터 기독공동체는 그노시스파를 이단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 사탄이 하나님의 세계에 저지르는 악행 중에서 가장 큰 해악은 하나님이 자신의 이미지와 형상을 본떠 만든 존재들을 타락시키는 것이었다. 이레나이우스와 달리 테르툴리아누스는, 만일 아담과 이브가 진실로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려는 의지가 있었다면 충분히 성공적으로 악마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들은 스스로 악마를 따랐다고 믿었다. 먼저 인간을 타락시켜놓고 사탄은 동료 천사들에게 관심을 돌렸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이미지로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보다 열등하다.
- 결핍 신정론은 근본적으로는 속죄 신학과 일치하지 않는다. 이 불일치는 명백하다. 프랜시스 영이 언급했듯이 "하나님은 사랑이고, 하나님은 분노이다.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모든 것에 책임이 있고, 악마는 악에 대해 책임이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악을 물리치기 위해 지상으로 보냈고, 하나님은 아들의 희생으로 감정을 풀었다". 클레멘스의 신정론은 악의 무존재성을 강조하면서, 한편으로는 그의 속죄 이론은 악의 존재가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소외시켰다고 주장했다. 이런 이중적 논제의 연결점이 없다. 결여 이론은 일관성이 없다. 이것은 자연적이고 물리적인 악들을 설명하는 데는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도덕적 선택 문제와는 상관성이 없다. "만일 악이 단지 선의 결여된 존재라면, 왜 도덕적으로 자유로운 개체들이 선을 택하지 않고 악을 선택해야만 하는가? 악이 선의 부재라면, 악의 계획적 반역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혼란은 더 심해진다.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소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 그렇다면 '누가' 더 나은가?' 건강하고 생산적인 소인가 아니면 타락한 인간 사디스트인가? 천재는 존재론적으로 지능이 뒤떨어진 사람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 그러면 누가 '더 나은가?' 지능은 처지지만 친절한 사람인가 아니면 잔혹하고 악의적인 천재인가? 이러한 질문은 부조리하게 들린다.
- 그리스도가 하강했던 지옥은 어디였는가? 히브리어로 지옥이란 단어는 스올(Sheol)과 게헤나(Gehenna)였는데, <70인역 성서>는 각각 하데스(Haidés)와 게헤나(Geenna)로 번역했다. 신약성서에는 하데스와 게헤나에 대해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았고, 클레멘스도 또한 이 둘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교부들은 모호하나마 이 둘을 구분했는데, 게헤나는 영원한 고통의 장소로, 하데스는 죄를 정제하는 장소로 구분했다. 그리스도의 구원의 실천이 이루어진 이후 정의로운 사람들은 곧바로 천국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지만, 그리스도 강림 이전의 사람들은 그 길이 막혀 있었으므로 정의로운 사람들은 하데스로 보내져야만 했고, 거기에서 그들은 구세주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게헤나에 있는 사람들은 악독한 죄인들로 구제될 수 없는 자들이며, 그리스도의 수난 이후에도 그전처럼 그곳에 남아 있었다. 하데스나 게헤나 모두 지하세계에 있고, 두 곳 모두 고통의 장소라고 여 겨졌다. 그러나 그리스-로마의 영향 아래 하데스는 그늘진 정죄의 장소로, 게헤나는 대비적으로 불구덩이에서 영원한 고통을 맛보는 장소로 여겨졌다. 이 두 지옥의 차별에 의미를 두지 않는 신학자는 보편구제설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지옥으로의 하강은 그리스도 이전의 모든 사람들을 지옥으로부터 구제하고자 한 행위였다고 믿었다. 반면에 이 두 지옥의 차별을 보다 분명히 하는 신학자는 그리스도가 게헤나로 내려간 것이 아니고 하데스로 갔고, 그는 오직 정의로운 사람들만을 구원했고 나머지 죄인들은 모두 지옥에 놔두었다고 믿었다. 두 단어를 라틴어 inferus, inferi, infernus, inferni(프랑스어 enfer, 이탈이아어 inferno, 영어 infernal 참조) 등으로 번역하면서 이 구분 -한 번도 명확히 구분된 적이 없지만- 은 더더욱 없어졌고, 지하세계에 사는 튜턴 여신의 이름에서 따온 '헬(hell)'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영어에서 다시 구분이 흐려졌다. 게헤나는 현대적 개념으로 하데스 보다 지옥에 더 가깝고, 하데스는 가톨릭에서 말하는 연옥과 어느 정도 유사한 개념이다. 현대의 보편구제설주의자 중에는 지옥을 온건하게 하데스로 해석하려는 추세도 있었다.
- 이 이론에는 많은 어려움이 존재한다. 그래서 그러한 오해가 생기는 것도 이상할 게 없다. 오리게네스는 존재의 다양성에다 진정으로도 덕적 타락을 보강해야만 했다. '천사가 된 지성적 존재'들은 이후 죄를 지어 존재론적으로 강등되어 일부는 인간의 지위로 나머지는 악마의 지위로 떨어졌다. 그러나 인간이 된 모든 천사들이 죄인은 아니었다. 엘리야, 세례 요한, 그리고 그리스도, 이들 모두는 죄 때문이 아닌 선을 전달할 목적으로 인간의 육체를 가졌다. 인간이 된 지성적 존재들 또한 죄를 지음으로써 그들은 세속적인 비천함 속에 빠졌거나 아니면 악마의 세계에까지 더 내려가게 되었다. 모든 지성적 존재들은 태초에는 모두 평등했기 때문에 그들은 잠재적으로 상승 또는 하강할 수 있다. 우주에서 그들의 위치는 자신들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 오리게네스에게 있어서 하강은 천사가 인간 또는 악마의 상태로 추락했다는 것이 아니고, 천사와 같은 이전의 지적 존재들이 천국에서 하강해 내려왔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의 생각은 잘못 이해되고 있었는데, 그와 의견을 같이했던 폰티쿠스의 에바그리우스(Evagrius, 신플라톤 철학의 영향 아래 사변적 신비 사상을 전개한 기독교 신비 사상가) 조차도 이를 잘못 알고 있었다. 여기서 원래의 지적 존재들은 두 가지(또는 세 가지) 범주로 나뉘어 떨어져 나오는데, 즉 천사, 인간, 그리고 악마다. 이 하강은 존재의 다양성을 의미하는 것이지 도덕적 타락으로서가 아니었다.
- 악마와 그를 따른 천사들의 죄는 물질세계를 창조하기 이전에 생겼다. 사실 하나님은 그들의 죄 때문에 생긴 선의 상실을 벌충하기 위해 물질적 우주를 창조했다. 천사들의 타락은 아담과 이브의 창조에 선행하므로 그들이 인간에 대한 갈망이나 시기 때문에 타락했을 리는 없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의지 대신 자신의 의지를 내세우려는 그들의 오만함에 타락의 이유가 있었다. 후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악마의 시기심은 자만심에서 나왔다고 주장하곤 했지만, 악마는 하나님을 시기했지 인간은 아니었다고 믿었다.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었고, 그리하여 이때부터 악마는 오만함 때문에 죄를 얻었으며, 그의 타락은 아담과 이브의 창조 이전에 일어났다고 믿게 되었다. 이러한 사건의 순서를 바탕으로 오리게네스는 사탄과 루시퍼(Lucifer) 사이에 새로운 연결점을 만들었다. <욥기>, <에제키엘서>, <이사야서> 등 일련의 다양한 구약성서의 전통들을 모아서 그는 루시퍼, 티레(Tyre, 옛 페니키아의 항구 도시)의 왕, 용이 모두 악마와 동일하다고 주장했다.
- 오리게네스의 악마론의 두드러진 특징은 사탄의 잠재적 구원에 있다. 클레멘스와 악마의 무존재성에 대한 그의 이론적 논리를 뒷받침하는 신플라톤주의의 영향 아래, 특히 자비로운 하나님은 그가 창조한 모든 것이 행복하기를 바란다는 그의 확신에 따라 오리게네스는 모든 것은 결국 그들을 창조한 신에게로 돌아갈 것이라는 환원론을 주장했다.
-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다시 하나님과 하나가 될 것이다. 악마는 그를 지배하고 있는 악령이 파괴된다는 의미에서 세상의 종말에 분쇄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더 이상 악마로서는 살지 못하지만 천사적 본성은 구제되어 용서 받음으로써 주 하나님과 다시 합쳐지게 될 것이다. 이것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오리게네스는 하나님의 섭리로 악마는 필연적으로 구제받을 것이라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단지 악마는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전자는 하나님의 자비는 무한하다는 오리게네스의 견해에 기인한 것이고, 후자는 악의 본질적 무존재성에 대립되는, 존재하는 모든 본질적 존재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그의 견해에서 나왔다.
- 그노시스파와 처음 2세기 반 동안에 있었던 비교적 이원론적 색채가 옅은 기독교의 분파들 사이의 투쟁에서는 정통이 무엇인지 아직 정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을 역사적으로 정통과 이단의 싸움으로 볼 수 없다. 그 당시 교회와 안티 교회의 투쟁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은 이후의 신학적 관념을 이 시기에 강요함으로써 생긴 오류다. 그리고 일부 초기 학자들의 신학상의 논증법을 지나칠 정도로 심각하게 취급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두 파 -또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양한 분파들- 는 모두 스스로를 기독교도로 여겼다. 오직 점진적으로 일군의 의견들이 다른 의견을 압도하고 그리하여 공인된 정통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초기 기독교는 강한 이원론적 관점을 내포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되며, 그노시스파가 아닌 초기 많은 기독교도들도 이원론적 경향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므로 기독교 역 사를 통해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이원론적 시각과 이원론적 '이단'은 이상하고 낯선 외부적 사상의 침입이 아니라, 기독교 초기부터 본질적으로 내재하는 이원론적 경향이 위로 부상한 것일 뿐이다.
- 마니교는 이원론에서는 도나투스파보다 훨씬 더 이원론적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정통 기독교에 비하면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학자들은 마니교를 독립된 종교로 볼 것인가, 아니면 기독교의 이단으로 볼 것인가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은 부분적으로 의미론의 문제다. 마니교에 대해 악마론과 연결 지어 몇 가지 요점을 정리해보면, 위치상 마니교는 기독-그노시스파에 가까웠으며, 이후 많은 기독교 이단들의 원천이 되었고 정통 사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마니교의 창시자는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출신으로 이름은 마니라고 했다. 그는 바빌론 근처에 있는 왕손가의 출신으로 216년 4월 14일 태어났다. 그는 아마도 그노시스의 한 분파인 만다교도로 성장했을 것이다. 지리적으로 메소포타미아는 페르시아의 한 지방으로, 로마 국경과 근접해 있는 무역의 중심지였으며, 온갖 종교 -유대교, 기독교, 조로아스터교, 심지 어는 불교- 의 영향을 받았다. 마니는 열두 살에 성령과 짝을 이뤘으며, 아담, 셋(아담과 하와의 셋째 아들로서 아벨이 카인에게 살해된 후에 태어났다. 이른바 셋 족의 조상이다), 에녹, 노아, 부처, 조로아스터, 그리고 예수 등과 같은 일련의 선지자들 중에서 마지막 선지자라는 계시를 받았다. 폭넓은 여행과 설교를 통해 그는 많은 추종자들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극단적 정통 조로아스터교의 고위 성직자인 카르테르와 충돌을 하게 되고, 그의 가족들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체포되어 처형되고 피부가 벗겨졌다. 그는 277년 2월 26일에 죽었다. 그의 사상은 천년 동안 중세 프랑스로부터 중국 명나라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 마니교의 교리는 절충적인데, 그래도 그중에서 그노시스주의와 가장 가깝다. 마니는 우주에는 두 개의 창조되지 않는 영원의 요소가 존재한다고 가르쳤는데, 그 하나는 빛과 진리의 원리이고, 다른 하나는 물질, 어둠, 거짓의 원리다. 이 두 요소는 신으로 어둠의 군주로 현신하며, 이들은 모두 영원하지만 오직 빛의 원리인 신만이 신성하다. 신의 왕국은 평화스런 조화 속에 존재하는 세 가지, 즉 빛, 힘, 지혜로 이루어졌는 데 반해 어둠의 왕국은 질서가 없고 시끄러우며 혼란스럽다. 마니의 교리는 일련의 그노시스의 복잡성을 띤다. 신은 생명의 어머니를 창조했고, 이제 그녀가 최초의 남자를 창조한다. 이로써 아버지/어머니/아들이라는 삼위일체로 존재한다. 어둠의 군주가 최초의 남자를 공격하자, 그는 두려움에 떨며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기도한다. 그의 기도가 너무도 절절하여 기도 자체가 하나의 성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그 부모의 반응이 너무 강렬하여 이 또한 성스러움이 되었다. 아버지는 구세주인 빛의 정령을 보내어 최초의 남자를 구했다. 그러나 구원 이후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혼은 여전히 어둠의 소용돌이에 갇혀 있었고, 그래서 새로운 구세주인 생명의 정령이 아르곤들 또는 어둠의 악령들을 무찌르기 위해 파견됐다. 악령들을 쳐부수고 그는 최초 남자의 영혼을 구하고, 태양과 달을 만든 빛을 깨끗하고 순결하게 정화시켰다. 빛의 일부분이 여전히 어둠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세 번째 사자를 보냈다. 세 번째 사자가 아름다운 처녀로 변신하여 남아르콘들 앞에 나타나자, 이에 그들은 강한 성적 충동과 욕망으로 마침내 그들 안에 정액으로 갇혀 있던 빛을 사출 한다. 이 빛이 땅에 떨어지자 이로 인해 식물이 자라게 되었다. 따라서 식물은 매우 많은 빛을 자신 안에 함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육식이 더 낫다고 믿는 자들이 식물인 채소를 먹는데, 이는 완전한 살덩이인 그들의 육신은 어둠의 산물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한편 여악령은 세 번째 사자를 잘생긴 청년으로 인식한다.(리뷰자 주 : 육식자들이 채소를 먹는다는 부분의 표현이 조금 이상한데, 채식자들보다 육식이 나쁘다는 말인 듯하다.)
- 어떤 영이 접근해올 때 우리는 대담하게 이에 맞서야 하며 정체가 무엇이냐고 물어야 한다. 만일 이것이 천사라면 자신의 정체를 밝힐 것이요, 만일 악령이라면 이런 용기에 화들짝 놀라 도망칠 것이다.
- 모든 악령에 대한 방어 중에서 영적 분별력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이 분별력을 선물로 받았다. 이를 현명하게 잘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위대한 수도자가 될 수 있다. 이 분별력에 관한 이론은 고도의 심리학 도구가 되었다. 우리는 충동이나 변덕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오늘 옮게 보이는 것이 다음 날에는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순간적인 충동에 이끌려 잘못된 길로 접어들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언제든지 심각한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다. 따라서 수도사들은 분별력 훈련을 통해 내면의 충동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왔는지 아니면 악마로부터 인지, 그리고 도움이 될 것인지 아니면 해가 될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이 훈련법을 자신을 위해 또한 다른 이들을 위해 배우고 연마했으며, 일반 사람들도 그들로부터 조언을 얻기 위해 자주 방문했다. 영들을 분별하다 보니 수도사들은 꿈을 해석하는 기술도 갖게 되었는데, 수세기 후의 프로이트는 이를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이라고 명명했다.
- 그의 저작들은, 553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세 번째 전 기독교 회의가 이 저작들을 오리게네스의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하여 금서 판결을 내릴 때까지 그의 극적인 인생경로, 즉 콘스탄티노플의 최상류층 생활과 리트리안 사막의 소박한 콥트(Coptic. 이집트 재래의 기독교파)의 수도사 생활을 바탕으로 전 사회계층을 섭렵하여 얻은 지식과 수도사 생활 체험에서 얻은 심리학적 통찰을 결합하여 보여줌으로써 사람들 사이에 널리 읽혔다. 그러나 553년 이후 에바그리우스는 점차적으로 잊혀갔다. 그의 저작들 중의 일부는 그의 이름 없이 계속하여 읽혔다. 이 저작들에 대한 존경을 나타내기 위한 일환으로 필기사들은 이 저작들에게 정통 수도사인 성 닐루스의 이름을 붙였다. 20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의 사상과 영향력을 재조명하게 되었다. 그는 비잔틴과 시리안 영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팔라디우스, 막시무스, 카시안 등을 통해 서방의 수도원에도 꽤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들은 다시 갈리아와 아일랜드의 수도원에 영향을 미쳤다. 에바그리우스의 이론은 오리게네스 이론의 변종으로 신플라톤주의적 성향을 더 가미한 것이다. '본원적 헤나드(Primitive Henad)'인 하나님은 순수 지성인 헤나드를 창조한다. 이 순수 지성은 일군의 똑같은 지성들을 산출한다. 그러나 일부 지성들은 '타락'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간다.' 타락하지 않은 유일한 순수 지성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우리의 주님으로, 그는 두 번째로 물질세계를 창조하고 있었다. 영들이 얼마나 추락하는가는 그들의 죄의 정도에 달렸다. 불로 이루어진 선의 천사들은 천상에 남는다. 일부 타락한 영들은 흙으로 만든 인간이 된다. 가장 죄질이 무거운 자는 악령들로, 그들은 공기로 이루어져 있다. 단계적으로 내려갈수록 더 어둡고, 두껍고, 비천하며, 더 물질적이다. 악마들은 무겁고 얼음처럼 차며, 빛이 전혀 없는 공기로 이루어져 있다. 추락한 지성이 정신이 되었다. 정신은 열정의 터전이다. 인간에게 지배적인 열정은 관능성이고, 악령들에게는 분노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금욕과 기도를 통해 다시 하나님과 해후할 때까지 우리는 존재론적 등급을 올릴 수 있다. 이 일은 모든 지성 존재들에게 점진적으로 일어날 것이다. '제7의 날'에 지성들은 천국으로 오를 것인지 아니면 지옥으로 떨어질 것인지 판가름하는 마지막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제8의 날'에 모든 지성들은 하나님에게로 다시 돌아갈 것이고, 악령은 종말을 고할 것이다.
- 에바그리우스의 사상은 오리게네스와 아타나시우스처럼 순교자, 수도사, 그리고 깨달은 자는 사람들 가운데서 영적 엘리트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이 엘리트들은 마치 피뢰침처럼 악마의 적대적인 관심과 공격의 목표가 되지만, 이러한 야만스런 공격을 물리치기 위해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과 성벽으로 무장하고 있다. 에바그리우스가 깨달은 자들에게 특수한 등급을 부여한 것은 그노시스파의 영적 존재와 유사하다. 다만 그노시스파는 사람이 영적 범주에 속한다고 믿는 반면, 에바그리우스는 개인은 자유롭게 하나님의 은총과 협력을 통해 영적 계획에 동류할 수 있다는 것이 다르다.
- 기독교 전통은 4~5세기에 그리스와 라틴을 기준으로 동과 서로 분화되기 시작한다. 이런 분리는 8세기까지 또는 공식적으로는 11세기까지도 공포되지 않았고,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결정한 삼위일체설과 그리스도의 본성, 즉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의 결합적 존재라는 것에 대한 인정은 동방과 서방을 굳게 연결하는 정통의 근간으로 계속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적 전통은 이미 분화되고 있었다. 성 바실리우스와 요한 크리소스톰은 그리스에는 많은 영향을 미쳤으나 라틴세계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가장 위대한 라틴교부인 히에로니무스(Jerome. 암브로시우스, 그레고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라틴 4대 교부로 일컬어진다)와 아우구스티누스는 동방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는데, 사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어를 몰랐다.
- 성 바실리우스는 하나님이 내린 자연 악과 도덕적 악은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은 우리를 훈육시키기 위해서 모든 악을 허용했지만, 도덕적 악은 하나님이 내린 자연 악과는 달리 우리 자신의 잘못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4~5세기의 신학자들은 구원에 대한 희생 이론과 속죄 이론을 혼재하여 사용했다. 이러한 비일관성으로 인해 해결점을 놓고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날카로운 논쟁의 포문을 열었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속죄 이론을 지지했는데, 원죄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사탄의 권세에 눌려 지내는 것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복음서들이 전하듯이,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많은 이들을 위한 속죄양이라고 했다. 따라서 니사의 그레고리우스는 신약성서의 견해, 즉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지은 이후 사탄은 이 세상에서 거대한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손으로 직접 사탄을 패퇴시켜야겠다"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견해를 취했다. 그러나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하나님이 악마에게 속죄의 대가를 치른다는 관념은 어불성설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도 어긋나는 것이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나지안주스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바치는 희생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그런 희생을 요구하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았지만, 그는 이를 인간의 본성을 깨끗이 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받아들였고, 따라서 우리는 그와 다시 화해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나지안주스는 악마는 강도이므로 속죄를 요구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선언했다. 니사의 그레고리우스의 형인 바실리우스는 정의(justice)는 속죄를 요구하고, 그리고 일반 사람은 누구도 이에 맞는 적절한 속죄가 될 수 없고, 필요한 사람은 오직 인간의 본성을 초월한 인간이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 어쨌든 그레고리우스의 견해는 오리게네스보다는 덜 급진적이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오리게네스 이론의 가장 근본적인 약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만일 실제로 모든 지적 존재들이 궁극적으로 태초의 그들처럼 원래의 순결한 상태로 돌아가 하나님과 다시 화해하게 된다면, 그때 우리는 우리가 다시 죄를 지을 수 있는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런 진행 과정은 순환적이고 따라서 모든 것은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 구원의 사명은 오직 한 번의 일시적인 효과로서 작용할 뿐이고, 필요하면 다시 반복되어야만 한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이런 문제점을 피하기 위해서 그레고리우스는, 그 진행은 오직 한 번만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시간은 순환하지 않는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천국에서 추방되기 이전의 원래 순결한 상태보다 더 나은, 그리스도가 이루고자 하는 그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이전처럼 복원할 것이고, 이 세계는 다시 새롭게 태어날 것이지만 이전보다 더 나은 상태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시간을 세상을 더 향상시키는 데 사용하고 있다. 모든 지적 존재들이 하나님과 함께한 그 과거의 시점은 우리가 되돌아가야 할 하나의 모델이 되지만, 우리가 나아가고 있는 미래의 그 시점이 훨씬 더 훌륭하다. 오메가는 알파보다 더 낫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덕적 악과 존재론적 결핍을 혼합한 이전 기독교 이론 전통을 계승했다. 그는 결핍 이론을 이원론에 대립되는 것으로써 사용했다. 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한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다. 그 밖의 어떤 것은 어떤 존재가 아닌 단지 선이 결핍된 무일뿐이다. 오직 하나의 원리, 즉 하나님만이 존재하고 모든 실체들은 그로부터 나왔다. 왜 하나님은 구멍 난 결함 있는 우주를 만들었는가에 대한 질문에 하나의 해답이 있다면 그것은 도덕적인 답이다. 즉, 의지의 자유는 악행을 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수반한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대답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오리게네스가 한 것처럼 등급을 이용하여 존재론적으로 문제제기를 했다. 하나님은 등급의 제일 위에 있는 절대적 존재이고, 절대적 선이며 성령이다. 그 아래로는 천사, 인간, 동물, 식물, 무생물, 그리고 맨 마지막에 무형의 물질이 차례로 자리한다. 단계를 내려갈 때마다 점점 영적이고 선한 실재성이 감소한다. 우리는 여기서 도덕과 존재론적 '선'의 근본적인 혼동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더 복잡한 문제들을 야기한다. 존재론적으로 왜 하나님이 악을 허용했는가에 대한 물음은, 왜 하나님은 만물을 그와 유사하게 똑같이 창조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에 대한 답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에서 끌어온다. 플로티누스는 신으로부터 비롯되고 생성된 유출물들이 모든 가능한 형상의 세계와 더 나아가 무형의 물질까지 채웠다고 생각했다. 신은 완성된 완전한 책을 쓰고 싶어 하므로, 그는 우주가 형상으로 가득 차길 바랐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에 동의했다. "서로 비교할 수 있는, 즉 더 위대한 것들의 존재로 인해 이보다 덜 위대한 것들이 존재하는 위계 속에서만 완벽한 우주가 존재한다."
- 자유와 결정론에 관한 가장 중요한 선택지들은 다음과 같다. ① 우주는 무의미하고 임의적이며 어떤 계획이나 예측 가능한 방향성이 없이 움직이고 있다. 이 입장은 현대 양자역학적 관점이다. ② 우주는 결정적이다. 우주는 확정된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즉, 자연법칙은 일관적이고 설명 가능한 -비록 대단히 복잡하지만- 물질의 역학 운동의 산물이다. 이 입장은 아인슈타인이 지지한다. ③ 우주는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힘들에 의해 결정된다. 예를 들면 그리스와 로마의 역사서에 나타나는 '운명'이라든지 또는 마르크시즘에 등장하는 '역사' 등이다. ④ 우주는 하나님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완전한 지도가 그려져 있다. ⑤ 지성적 존재들은 그들의 자유의지에 따라 얼마간 우주를 의지대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④와 ⑤의 선택 사항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열려 있었다.
- 이 두 선택 사항의 구조 안에서도 자신의 시간관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가능하다. 첫 번째, 시간은 4차원이다. 비록 우리가 이곳 지상에서 오직 시간의 한 면만 볼 수 있다 하더라도, 시간과 공간은 영원 속에서 '변치 않는 4차원의 전체'로서 존재한다. 이런 전문적 설명은 아인슈타인이 했지만, 아래 깔린 관념은 아우구스티누스와 일치한다. 두 번째,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지만 "우주의 각 단계는 이미 확고히 결정돼 있어서, 만일 누군가 어떤 한 시점에서 일어나고 있는 원인들을 모두 알고 있다면, 그는 그다음에 그 결과가 무엇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관점은 단지 첫 번째 것을 약간 변형한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시간적으로 구조화된 결정론적 우주"에서 "그 우주는 원인들을 모두 내보이므로" 신은 "어떠한 결과가 올 것인지를 정확히" 알 것이다. 세 번째, 하나님의 전지(소체)는 조건부적일 수 있다. 그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미래를 제외하고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 견해는 지성적 존재들의 자유와 양자역학 이론의 불확정성 모두를 허용한다. 비록 하나님은 "모든 가능성과 각 사태에 대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것을 "순전히 열린 구조의 세계"에 남겨두었다.
- 아우구스티누스가 내세운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천사들은 자유롭지만 또한 한계가 있고 오류를 범할 수 있으므로, 만일 그들의 욕망대로 내버려 둔다면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타락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그들의 선함을 강화시키고 확고하게 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일군의 천사들에게 '선이 충만' 하도록, 이 축복이 영원하도록 했다. 이러한 확정된 축복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우주, 그리고 그들 자신의 상태에 대한 깊은 이해를 동반하도록 했다. 하나님의 은총에 힘입은 이런 계발로 인해 그들은 죄를 짓거나 타락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들은 죄지을 자유를 상실함으로써, 하나님을 위한 봉사에 기꺼이 복종함으로써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으며, 이러한 자유로운 선택은 바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당연한 결과였다. 하나님은 이 천사들 외에 또 다른 한 부류의 천사들을 창조했다. 이 두 부류는 모두 똑같이 본질적으로 선하며 선택의 자유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 부류에게 하나님은 기꺼이 은총의 선물을 주었으나, 다른 부류에게는 이를 베풀지 않았다. 이 둘째 부류의 천사들에게는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 그래서 그들은 죄를 지었고, 악령들이 되었다.
- 그래서 엄정한 심판으로 하나님은 우리가 선택한 잘못된 파멸의 길로 들어서도록 내버려 둘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자비로움으로 우리 중 일부를 구원했고, 나머지는 우리 자신의 욕망대로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우리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에 오직 한 사람을 구원하는 것도 정의의 하나님으로선 자비를 베푼 것인데, 하물며 그렇게 많은 사람을 구원한 것은 대단히 경이로운 큰 자비심이다. 하나님이 우리 대부분을 고난 속에서 파멸되도록 놔둔 것은 당연하고도 적절하다. 이는 우리 스스로가 이를 택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나리오는 인간에게는 적용 가능하겠지만, 천사들에게 적용한다면 전혀 설득력이 없다. 왜냐하면 태초에 천사들은 타락하지도 않았고 죄에 대한 성향도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어떤 천사들은 구제하고 어떤 천사들은 구제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분명 정의로운 심판이 아니라 납득이 안 가는 행위로 여겨질 수 있다. 또 다른 문제점은, 이 분석은 악의 책임을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의도와는 달리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은 두 종류의 천사들을 창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창조하자마자 그들을 둘로 갈라놓고 차별할 타당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으나, 그것은 그의 논증을 뒷받침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가능한 가장 간명한 설명, 즉 일부의 천사들은 하나님을, 그 외의 다른 천사들은 죄를 선택했고, 이러한 결정은 완전한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지 어떤 원인이 있어서가 아니라고 간단히 설명했다면 그의 논지가 갖는 결함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 이 개념은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 나는 <데블>에서, 이것은 신 안에서 선과 악을 융합해나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모호하게 별다른 구별도 없이 신 안에서 선악은 함께 뭉뚱그려져 있다는 그런 믿음을 넘어서, 선과 악의 완전한 분리인 이원론적 관념을 넘어서, 이제 우리는 신이 악을 실체화시키지 않고 대신 그 악을 자신의 본성이 가지고 있는 어두운 면에 통합시켜버렸다는 쪽으로 악을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이것은 이 개념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에 대한 하나의 선택이다. 이 개념은 극단적으로 일원론 또는 이원론 중 어느 한 방향으로는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다음의 세 가지 방향 중 어느 한 방향을 택할 것이다. ① 악마에 대한 개념은 사라질 것이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악을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② 이 개념은 선악의 통합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③ 이 개념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시대에 내린 기본적 정의 안에서 계속하여 다시 다듬어질 것이다. 이 세 개의 가능성중에서 아마도 세 번째 가능성이 가장 크다. 전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인간 경험에 비추어볼 때 아마도 첫 번째 것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것은 이 개념의 발달 과정을 볼 때 극단적인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해야 하므로 이 또한 실현 가능성이 없을 것 같다. 그러나 통합에 대한 선택 가능성을 너무 성급히 배제해서도 안 된다. 이 개념이 신 안에서 선과 악을 하나로 통합할 수도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실제로 선과 악을 융합시킨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이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의미다. 그리고 하나님이 악을 통합한다는 관념은 하나님이 악에 굴복하거나, 또는 어떤 식으로든 악하게 된다거나, 또는 악을 실현하거나 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하나님이 악을 더 높은 선으로 변형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악을 받아들이고 통합한다는 의미다. 순수함은 하나님의 유일한 속성이 아니다. 하나님은 예수가 인간 구원을 위해 죄도 없이 자신을 속죄의 제단에 바친 그런 의미에서는 순수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순수함은 무지가 아니다. 인간이 어른이 될 때까지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채로 남아 있다면 이때의 순수함은 무지이고, 만일 이 무지가 의도적으로 방치되어 지속된다면 이 순수함은 비난의 대상이 된다. 순수함의 높은 단계는 지혜다.
- 개념의 역사 신학에 따르면, 악마에 대해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는 악의 문제에 대해 교묘하게 지적으로 피하려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정면으로 이 문제에 부딪쳐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을 초월하는 영, 또는 악령의 존재 가능성을 열어놓아야 한다. 현시대의 형이상학적 가정들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악마적인 것들을 인간의 심층 심리학으로, 즉 악마라는 것은 우리 마음 안에 또는 아마도 집합적으로 인간의 마음들 사이에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그런 내면의식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일종의 심리학으로 해석하도록 유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악마의 개념을 부적절하게 처리해서는 안 된다.
- 우리 모두가 신의 선함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면, 이는 어떤 한 인간이 이유 없이 고통받고 있기 때문이고, 현실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고통 속에 있음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 신과 악을 이해하는 데에는 두 단계가 있다. 첫째 단계의 이해는 이렇다. 신은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그런 절대선은 아니다. 그가 우주를 창조했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그런 악이 존재하게 되었다. 궁극적으로 신은 이 악에 대한 책임이 있다. 둘째 단계는, 신은 악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에 대항하여 싸우기를 바란다. 그가 우주를 창조했기 때문에 선 또한 존재한다. 그가 선을 창조했기 때문에 우리는 악에 저항할 힘도 가지고 있다. 신이 이 힘을 창조했기 때문에 그는 우리가 악에 저항하기를 바라고 그렇게 하는 것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예수가 우리에게 행한 선은 완벽한 선으로서 인간의 선의 기준으로는 그 자체로 최상의 모범이 된다. 이것은 신의 선과 모순되지 않고 보완해준다. 이는 신의 선과 유사하다. 말하자면 신은 빛나는 다면체로서가 아니라 우리와 연관지을 수 있는 우리와 같은 한 인간으로서 인간 세계에 자신을 드러낸 것처럼, 그렇게 신은 우리가 이해하지도 또는 실행하지도 못할 그런 형태의 선이 아닌, 이해하고 실행할 수 있는 그런 형태의 선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 비록 클레멘스는 세계는 플라톤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어떤 것에서 유출되어 나온 것이 아니라 창조되었다고 주장했으나, 그의 존재 사슬은 사실 유출론을 기독교 창조 사상에 접목시킨 것이다. 이 두 사상은 서로 매끄럽게 잘 맞지 않는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그리고 여러 신학자들이 이 체계를 이용했지만 결코 성공한 적이 없었다. 플로티노스에게 우주의 궁극 원리는 존재(Being) 보다 앞선 일자(The One)이다. 존재는 일자의 부속물로써 일자에 의해 생성되는 것이다. 반면 기독교에선 일자와 존재는 본질적으로 같다.
- 뮐러(Muller)는 오리게네스의 아이디어와 가장 근접한 것으로 그노시스 적대자들의 이원론과 닮은 마즈다이즘의 프라쉬카르트(Frashkart of Mazdaism)의 이원론을 꼽았다(p.176). 또한 뭘러는 피타고라스학파, 스토이즘, 유다이즘에서도 유사성들이 있음을 알아냈다. 그는 오리게네스가 이단시된 것은 그의 환원론 때문이 아니라 바로 윤회설과 같이 반복되는 창조, 추락, 회복되는 구조(마치 엠페도클레스의 체계처럼) 때문이라고 주장했다(p.188-190). 환원이 문제 된 것이 아니라 동양 종교에 뿌리를 둔 '영원회귀 신화' 때문에 기독 공동체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같다. 니사의 그레고라우스는 영원회귀에 대한 말은 빼고 단지 환원론만을 가르쳤기 때문에 문제 되지 않았다.
- 카글리아리(Cagliari)의 루시퍼(Lucifer) 추종자들을 '루시퍼주의자들'이라 불렀는데, 이 명칭은 주교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지 악마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 '루시퍼'는 '빛을 품은 자'란 뜻이다. 루시퍼주의자들은 철저한, 심지어 폭력도 불사하는 안티 악마의 기독교도들로 이후 중세에 사탄을 숭배한 '루시퍼주의자들'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 미카엘은 히브리인에게는 자주 특별한 수호천사로서 등장했고, 이 기능은 이스라엘을 거쳐 기독 공동체에까지 전승되었다. 신약성서 유다서(9장)와 계시록(12:27-9)은 미카엘과 사탄의 전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아이디어는 점차적으로 발달하여 미카엘은 악마를 파멸시키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었다. 미카엘에 대한 봉헌은 초기 교회 때부터 존재했다. 이는 5세기에 들어서면서 급속히 확장됐고, 특히 콘스탄티노플과 동방에서, 그리고 이탈리아로 들어가서는 교황 성 그레고리우스 재위 시절(590~604)에 중요하게 취급되어 가르간 산(Mount Gargan)을 미카엘 봉헌의 중심지로 삼았다. 8세기 프랑스에서는 미카엘 열풍이 프랑스어 가르강(Gargan)처럼 성 미카엘산(Mont Saint-Michacl)은 미카엘 컬트의 중심지가 되었다. 미카엘이 사탄과 일대 결투를 벌여 마침내 그를 물리쳤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언제 이 전투가 벌여졌느냐는 것에는 의견이 분분했다. 히에로니무스는 논리적인 면과 계시록을 바탕으로 사탄이 천국에서 추방되는 바로 그 시점이라고 주장했다. 성 그레고리우스는 그 시점을 세계의 종말로 잡았다. 12세기까지는 그레고리우스의 관점이 풍미했으나, 페테르 롬바르드(Peter Lombard)가 히에로니무스의 견해를 받아들이고 난 이후로, 그리고 아퀴나스가 이를 따름으로써 관점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 때때로 천사들은 순수한 영적 몸을 가졌기 때문에 참회할 수가 없고 인간은 육신을 가졌기 때문에 살아서는 참회를 할 수 있으나 죽어서는 육신과 분리되기 때문에 참회할 수 없다고 여겨왔다. 그러나 만일 순수 영적 몸을 지닌 타락 천사들이 본래의 자유의지로 죄를 지었다면, 다시 새롭게 선을 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전통적으로 4가지 은총이 존재한다. ① 선행 은총(prevenient grace): 신이 우리의 모든 선적 의지를 발기시키고 지원하는 은총, ② 협동 은총(cooperating grace): 그가 우리의 의지를 북돋아 주는 은총 ③ 충분 은총(sufficient grace): 그의 도움 없이는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없는 은총, ④ 유효 은총(efficient grace): 그의 도움으로 우리가 선을 행하는 은총.
- 아우구스티누스는 will(voluntas)과 free will(liberum arbitrium)을 구분했다. 이 구분은 프랑스어 volonte와 libre arbitre로는 구분 가능하나, 영어는 구분이 되지 않는다. 즉, 'will'은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가진다. voluntas는 결정을 내리는 결정력이 아니라 "한 개인에게 부여된 근원적인 도덕 성품으로, 특별한 이유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천성으로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할 때 나오는 근본적인 성격인 것이다." 반면 artbitrium은 “여러 대안 중에서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선택 의지"다. 우리는 우리의 arbitrium을 특히 도덕적 선택을 향하도록 할 수 있다. “그러나 voluntas가 있는 사람은 근원적 사랑이 그/그녀를 이런저런 방법으로 인도하게끔 되어 있다.” 아담과 이브의 원죄는 완전히 자유로운 voluntas를 신으로부터 돌려놓아 버렸다. 원죄 이후 이 voluntas는 이미 뒤틀어져 있었다(R. R Brown, p.318 참조).
- City 8.14-7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악귀들을 별종으로 취급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이교도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세 종을 세 부류 -신들, 다이몬들(선의 정령과 악의 정령), 인간- 로 나눌 것을 제안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변형시켜 천사, 인간, 악귀의 세 부류로 나눌 것을 생각했다. 기독교가 악귀를 악으로 정의했기 때문에 그는 악귀를 별종이라는 아이디어를 제대로 밀고 나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아이디어는 신은 모든 종을 악으로 창조했거나 아니면 모든 종이 타락하도록 방임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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