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틱낫한] 좋은 사람으로 사는 법 - 나에게서 시작하는 지금 이 순간의 기적

일루젼 2021. 12. 7.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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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틱낫한 / 유향란
출판 : 김영사
출간 : 2015.04.30 


 

어쩌다 보니 연이어 틱낫한 스님의 책을 읽고 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들이지만 그가 말하는 '삶'은 큰 것이 아니다. 당장의 일상 속에서 내가 행할 수 있고 인식할 수 있는 것들을 다루기에 오히려 더 어렵게 느껴진다.

 

감정의 뿌리를 더듬어 무엇이 진정으로 고통과 괴로움을 야기하는지를 살피되, 고통과 괴로움이 같지 않음을 알아차릴 것. 

매 순간 먹고 숨쉬고 앉고 걷고 잘 수 있음을 제대로 느껴볼 것. 

그리고 익숙함이나 안락함과 쾌감을 기준으로 선택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 선택이 미치는 영향이 어떤 결과로 돌아오는지를 깊게 들여다 볼 것.

 

나 자신의 고요함과 평화로움이 단단해야 더 넓은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근면하되 잘못된 것에 근면하지 말며, 바르게 보고 알되 잘못 된 것에 사로잡히지 말며, 그러하여 결국 '바르게 볼 수 있는' 정견이 가장 우선이다.

 

 


- 깨어 있는 마음은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어떤 음식을 먹기 전에 그것을 먹는 것이 자비심을 키우는데 해로울지 이로울지 알기 위해 반드시 그 음식을 보아야 합니다. 아래의 식사 명상은 아주 유용합니다.  


"우리는 자비심을 적극적으로 지켜나가고 다른 생명들의 고통을 줄이고 지구를 보존하고 지구의 기후변화를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을 통해 음식을 먹겠습니다."     

 

- 정견은 아무런 견해도 없는 상태입니다. 알다시피 모든 견해는 모조리 제거되어야 하는데 '모든 견해'에는 이 책에 담긴 가르침도 포함됩니다. 어떤 가르침이든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도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무상, 무아, 연기 대한 가르침까지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는 특별한 견해가 아니라 반드시 통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부처님은 성냥의 불꽃을 예로 드셨습니다. 성냥에 불을 붙이려면 능숙하게 그어야 합니다. 불꽃이 일면 그것이 성냥을 태워버릴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통찰이 생기면 그것이 견해를 없애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어떤 견해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당신은 자유롭습니다. 

 

- 불꽃을 하나 더 일으키기 위해, 불이 켜진 초로 불이 켜지지 않은 초에 불을 붙인다고 가정해보십시오. 두 번째 불꽃은 첫 번째 불꽃과 같은 불꽃일까요, 아니면 완전히 다른 불꽃일까요? 그것은 명상할 문제입니다.  

 

- 당신이 어떤 생각을 할 때 거기에는 당신 서명이 들어 있습니다. 그 생각을 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므로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 생각이 자비와 용서, 차별하지 않기라면 당신은 아름답게 미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생각 속에 당신 서명이 들어 있기 때문이지요. 당신은 당신 행동의 장본인입니다. 이는 당신이 한 말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당신이 한 말이 용서, 자비, 차별하지 않기에 대한 것이라면 거기에 당신 서명이 들어 있습니다. 당신은 "아니요,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라고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 안에 당신 서명이 들어 있으므로 아니라고 잡아뗄 수 없습니다. 행동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무슨 행동을 했든 그 안에 당신 서명이 들어 있습니다. 설령 당신 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당신 생각은 계속 남아 있습니다. 

 

- 삼업은 몸으로 짓는 신업, 입으로 짓는 구업, 뜻이나 생각으로 짓는 의업을 가리킵니다. 

 

- 2000년은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 우리 모두 함께 힘을 모으면 전쟁과 폭력의 문화를 평화와 비폭력의 문화로 바꿀 수 있다. 이를 위해 모든 사람들의 동참이 필요하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존엄과 화합의 세계, 정의와 연대의 세계, 자유와 번영의 세계를 만들 수 있는 가치를 보여주게 될 것이다. 평화의 문화는 지속 가능한 발전과 환경 보호 그리고 인간의 자아실현을 가능케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미래를 위한 나의 책임을 인정하며, 내 일상생활과 가정과 직장과 지역 사회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 국가와 국제 사회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서약한다.

 

첫째, 차별이나 편견 없이 모든 사람의 삶과 촌엄성을 존중한다.

둘째, 육제적 · 성적· 심리적 · 경제적 ·사회적인 모든 형태의 폭력을 거부하며, 특히 약자에게, 적극적으로 비폭력을 실천한다.

셋째, 배타와 불의, 그리고 정치적 · 경제적 억압을 종식하기 위해 너그러운 마음으로 내 시간과 물질적 자산을 이웃과 나눈다.

넷째, 광신과 비방, 그리고 타인에 대한 거부보다는 대화와 경청을 항상 먼저 취하며 표현의 자유와 문화적 다양성을 옹호한다.

다섯째, 모든 생명을 존중하고, 지구 자연의 균형을 보전하는 발전 방안과 책임지는 소비자의 행동으로써 지구를 보전한다.

여섯째, 새로운 형태의 연대를 함께 만들기 위하여 여성의 참여와 민주주의 원칙을 존중하는 공동체를 건설하는 데 기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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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님께서는 다섯 제자에게 베푼 첫 설법에서 윤리의 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통찰과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팔정도라고 합니다. 팔정도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사성제의 네 번째 진리인 도성제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사성제를 이해하고 일상생활에 그 통찰을 적용한다면, 우리는 이미 행복과 평화로 가는 길 위에 있는 셈입니다.  

 

- 사성제를 단순히 지식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는 오로지 수행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비이원성, 공, 무아, 연기, 무상 등과 같은 불교의 핵심 사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이 행하신 기본 수행은 깨어 있는 마음으로 호흡하기입니다. 우리는 모든 윤리적 행동을 취하거나 수행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호흡부터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호흡을 아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먼저 취할 수 있는 실제적이고 윤리적인 행동입니다. 아울러 인간의 근본적 괴로움과 그것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 진실로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 가난, 폭력, 기후변화와 같이 우리 주변의 온갖 고통을 보면 이런 문제들을 당장 해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인가 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어떤 일을 효과적이고 윤리적으로 하자면 문제를 잘 다룰 수 있기 위해 먼저 자신이 최선의 상태여야 합니다. 깨어 있는 마음으로 멈추고, 호흡하고, 걷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수행의 관건입니다. 이런 일들은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 부처님께서 맨 처음 행하신 설법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즉 사성제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성제야말로 세계 윤리를 수립하는 데 불교가 이바지할 토대입니다. 사성제란 첫째 '깨우치지 못한 세상은 괴로움'이라는 고성제, 둘째 '괴로움의 원인은 번뇌와 집착'이라는 집성제, 셋째 '괴로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멸성제, 넷째 '팔정도를 닦는 것이 멸성제의 길'이라는 도성제입니다. 

 

- 일단 자신의 괴로움을 제 이름으로 불렀다면 이제 이 괴로움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괴로움이라는 첫 번째 진리를 인정한다면 이 괴로움에 원인이 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합니다. 모든 것에는 다 뿌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뿌리를 깊이 들여다보고 조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괴로움을 변화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괴로움은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우리는 부처님이나 하느님께서 불가사의한 이유로 괴로움을 만들었다고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명료한 정신과 고요한 마음으로 그 원인을 깊이 들여다보고 파악하면 됩니다. 그러면 괴로움을 야기하는 인식의 방식과 생활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인 집성제입니다. 

 

- 행복으로 가는 길은 정견과 함께 시작해야 합니다. 정견은 깨어 있는 마음과 집중을 수행해서 얻은 열매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팔정도의 시작을 정견 대신 정념으로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정념, 즉 바르게 깨어 있는 마음은 집중으로 이어지고 집중은 통찰이나 정견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윤리적 행동의 기초는 정견입니다. 정견을 가졌을 때 우리의 사고는 정사유가 되고 우리가 하는 말은 정어가 되며 우리의 행동은 정업이 됩니다. 정견은 모든 견해를 초월하는 견해입니다. 또 차별이나 이분법적 사고와도 거리가 멉니다. 한 가지 견해에 사로잡혀있는 한 정견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온갖 견해를 고려하면서 그중 어느 하나에도 사로잡히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 불교에서는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을 말합니다. 눈, 귀, 코, 혀, 몸, 마음이 그것들입니다. 앞의 다섯 가지는 생리적인 것이고 마지막은 정신적인 것입니다. 마음 역시 감각기관으로 정신적인 의식입니다. 눈이 지각하는 대상은 형태입니다. 귀는 소리이고요. 코는 냄새, 혀는 맛 그리고 몸은 접촉을 지각합니다. 마음이 지각하는 대상은 다르마 dharma입니다. 다르마는 마음의 대상으로 객관적 실체는 아닙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지각할 경우 그것은 우리 의식의 대상입니다. 세상도 우리 마음의 대상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주체와 객체는 동시에 나타나며 서로 의존합니다. 당신이 산을 본다면, 그 산은 당신 지각의 대상이자 당신 마음의 대상입니다. 그것은 당신 의식에서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본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무언가를 본다는 뜻입니다. 듣는다는 것도 물론 무언가를 듣는다는 말이며 다른 경우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 깨어 있는 마음이 아닐 경우, 우리는 자신의 일부만 지각할 뿐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경험에 의거해 몇몇 특성을 고른 다음 스스로 이런 사람 또는 저런 사람이라고 판단합니다. 명상수행은 자신 전체를 인지하는 것입니다. 조상에게 받은 모든 요소들, 그들의 장점과 단점까지도 모두 아우른 자신의 총체를 인지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지적인 일처럼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깨어 있는 마음으로 의식하고 명상하는 수행을 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인지하게 될 것입니다. 명상 수행은 정견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자녀이고 형제자매이고 부모라는 사실을 깊이 보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미워하는 사람이면서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믿기 위해 당신은 이것을 경험해야 합니다. 

 

- 우리의 괴로움은 주로 우리 마음과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에서 비롯됩니다. 불교 전통에는 우리를 구속하고 우리의 자유를 빼앗는 열 가지 족쇄, 즉 삼요자나 samyojana가 있습니다. 산스크리트어인 삼요자나는 '매듭'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이 열 가지 족쇄는 우리 내면에 있는 단단한 매듭과 같습니다. 이 족쇄들은 우리가 하고 싶지 않은 일과 말을 하라고 등을 떠미는데 그 힘이 아주 막강합니다. 이 매듭을 풀려면 깨어 있는 마음과 집중력, 통찰 또한 막강해야 합니다.   

 

- 응용 윤리학은 구체적 상황에서 어떻게 도덕적인 결과를 얻어낼 수 있는가를 연구하는 학문 분야입니다. 단순히 어떤 일이 옳은지 그른지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행동이 정말로 윤리적인지 알기 위해서는 기존의 규범에 의문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 이 윤리적 기준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모든 기준과 규범을 넘어서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 가족 앨범을 펴고 당신이 다섯 살일 때 사진을 보면 사진 속의 꼬마는 지금의 당신과는 한참이나 다릅니다. 당신은 그 꼬마와 같은 사람일까요, 다른 사람일까요? 외모에 관한 한 당신은 어렸을 때와는 완전히 딴판입니다. 또 그때와는 상당히 다른 감정, 인식, 정신 구조, 의식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금의 당신은 그 꼬마와 완전히 다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같은 사람일까요. 아니면 완전히 다른 사람일까요? 이것은 같음과 다름이라고 불리는 서로 반대되는 개념의 또 다른 예입니다. 당신은 완전히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다르지도 않습니다. 

 

- 깨어 있는 마음 수행을 너무 강도 높게 하지는 마십시오. 그냥 규칙적으로 부지런히 하면 됩니다. 간혹 몇 주일 동안 매우 강도 높게 수행한 다음 수행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 별로 강도는 높지 않지만 지속적이고 규칙적으로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군가 당신에게 왜 명상 수행을 하고 깨어 있는 의식 수행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게 좋아서요"나 "그렇게 하는 게 즐거워서요"가 바람직한 대답일 것입니다. 만일 수행이 즐겁지 않다면 당신은 억지로라도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진하는 도중에 지쳐버리면 결국 당신은 수행을 포기하고 맙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는 제일 큰 이유는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왜 걷기 명상을 하나요?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왜 채식을 하나요? 그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좋아하면 그것을 계속할 것입니다. 정근은 행복을 가져옵니다. 깨어 있는 마음으로 걷고 움직이는 수행, 깨어 있는 마음으로 호흡하고 미소 짓는 수행은 행복과 평화를 가져옵니다. 

 

- 깨어 있는 마음을 수련할 때, 우리는 자신과 남에게 해로운 행동을 자제하겠노라고 맹세합니다. 살인, 도둑질, 부적절한 성적 행동을 저지르지 않고 경솔하게 함부로 말하지 않고 술을 끊겠다고 다짐합니다.

 

첫 번째 수련은 생명을 보호하고 자신과 가정과 사회에서 폭력을 줄이는 것입니다.

두 번째 수련은 사회 정의와 관용, 도둑질하지 않기, 다른 생명을 이기적으로 이용하지 않기입니다.

세 번째 수련은 개인, 부부, 가정, 자녀들을 지키기 위해 책임 있는 성적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수련은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고 화해를 가져오기 위해 경청하기와 사랑이 담긴 말하기입니다.

다섯 번째 수련은 깨어있는 마음으로 소비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과 마음에 독소를 끌어들이지 않기, 폭력, 갈망, 미움 같은 독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잡지, 영화 등을 보지 않기입니다.

 

깨어 있는 마음으로 하는 수행은 우리 자신과 가정, 우리 사회와 공동체를 지키는 수행입니다. 이들 수련은 팔정도의 이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괴로움의 뿌리는 사람들이 살생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살생 행위는 우리가 잘못된 인식과 잘못된 견해를 지녔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만일 우리가 잘못된 견해를 지녔다면 이는 살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이나 같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 당신이 다섯 번째 수련을 하면서 술과 마약을 끊었다고 가정해보십시오. 하지만 당신은 아직 술과 마약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괴롭습니다. 당신은 지침과 가르침을 따르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가치를 잘 모릅니다. 그것이 통찰에서 비롯되고 영적 차원의 일이라는 것도 모릅니다. 술과 마약을 자제하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것을 알기에 그렇게 하지만 사실 당신은 괴롭습니다. 하지만 만일 당신이 수련의 심오한 의미와 그것이 가져올 이로움을 이해한다면 당신은 술과 마약을 끊은 것을 몹시 기뻐할 것입니다. 그것은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동물이나 환경에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경험하고 나면 당신은 채식을 하는 것이 행복합니다. 그러면 육식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고통스럽지도 않습니다. 대신 당신이 다른 생명체에게 고통을 야기하지 않는 방식으로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행운으로 여깁니다. 당신이 먹는 방식에는 기쁨이 있고 통찰이 있으며, 자비와 영성이 있습니다. 음식을 먹는 행위가 매우 영적인 일이 됩니다. 윤리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나누는 경계는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 윤리의 핵심 요소로 행복과 기쁨을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다섯 가지 깨어 있는 마음 수련이 우리의 행복을 증진시킨다는 것을 알기에 그것을 수행합니다. 사성제에 대한 통찰이 우리의 괴로움을 덜어줍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괴로움과 세상의 괴로움 사이에는 아무 차이도 없습니다. 우리는 함께 존재함과 차별하지 않기에 대한 통찰을 따르기 때문에 윤리적으로 행동합니다. 이 통찰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과 세상에 행복을 가져오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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