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김홍중
출판 : 문학동네
출간 : 2020.11.20
가벼운 마음으로 들었다가 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읽었다.
철학을 접한다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 생각을 다듬는 칼을 얻는 것이며 자신을 마주할 수 있도록 거울을 닦을 천을 얻는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글은 저자가 말한 대로 '쉽게 읽히지 않는 문장'들이다. 한 문장씩 끊어서 눈 앞에 걸어두고 한참을 곱씹어야 했다.
그런데도 좋았다. 특히 현시대에서 역사를 밀어낸 향유자로서의 주체를 설명하며 어째서 이런 현상이 생겼는지를 설명하려 했던 부분과, 모든 선험은 후험적으로만 인식될 수 있다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이는 유행가를 통해 작품이 시간과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를 고찰했던 부분과, 그러므로 작품은 반영론적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는 이상의 예를 연결한다.
인쇄된 글자들은 물리적으로 현존할 뿐이다. 그것은 의식에게 인지되고 해석됨을 통해서만 생명을 얻으며, 읽는다는 행위를 행한 것을 숙주로 삼아 변이되고 퍼져나간다. 글자는 하나의 사인이기도 하다. 인간이 인지하지 못하는 수많은 비-언어적 사인과 심볼이 존재하며, 그에 내재된 비-인간적 힘의 행위는 인간의 생존에 영향을 미친다.
사회학에서 말하는 '사회'란 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 뒤에 세간학이 될 뻔했다며 자조적으로 농을 친다. 저자가 말하는 '생존'과 '파상된 자아' 안에서 글 쓰는 자로서의 저자와 학자로서의 저자를 가만히 더듬어 본다. 저자에 따르면 나는 아직 제대로 자신을 깨고 헐벗어 스스로의 바닥을 마주하지 못하였으며, 그러므로 내가 남기는 이 헛된 문장과 감흥들은 사실 남기지 않는 것이 더 나았을 무용하고도 해로운 것들이다. 날카롭게 정돈된 핵심적 단상 -깊은 소화와 동화를 통해 더이상 나와의 분리가 무의미해지는 어떤 것-, 그러면서도 잘 쓴 문장만이 그나마 나와 그를 이어줄 가능성을 가질 것이다. 그가 옳다. 무리다.
- 인간은 대부분의 시간, 선하다. 그러나 단 한 순간, 단 한 시간, 단 하루, 혹은 단 한 시절, 단 한 상황에서 인간은 악하다. 선은 존재지만, 악은 행위다. 악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다.
- 너는 나를 사랑할 수 없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너를 내 안에서 전개시킬 뿐이다.
- 사물과 사물 사이의 공간은 시간에 의해 연결된 길이다. 시간이 없다면 공간은 지각되지 않는다. 공간은 공유된 시간의 물리적 번역물이다.
- 1917년 10월 20일 카프카의 일기.
"다른 모든 것들보다 더 위중한 인간의 대죄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조급함이고 다른 하나는 게으름이다. 인간은 조급해서 낙원에서 추방당했고, 게을러서 다시 낙원에 입성하지 못한다." (Kafka, 1984).
- 우리는 모든 것을 그냥 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그냥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결국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문장'이 아닌가? 한 권의 책을 읽을 때, 우리는 하나의 장을 펼치는 것이며, 하나의 장을 읽기 위해서는 하나의 페이지를 읽어야 하며, 하나의 페이지를 읽으려면 하나의 단락을, 그리고 결국 하나의 문장을 읽어야 한다. 천 개의 문장이 주어져도, 우리는 단 하나의 문장 앞에 언제나 서게 되는 것이다. 하나의 문장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마주함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이 마주함을 책임져야 한다."
- 루만은 칸트의 가면을 쓴 니체다.
- 헐벗은 자가 아직 헐벗지 않은 자에게 하는 말은 단상처럼 들린다. 헐벗지 않은 자는, 오직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자신도 헐벗은 이후에야 비로소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단상은 메시지를 전달받을 사람을 까다롭게 선별하는, 소통의 한 극단적 형태다. 소통이 아니라 밀통.
- 주관적 진술이란 존재할 수 있는가? '나'를 주어로 하는 문장들은 진실로 '주관'을 드러내는가? 자신에 대하여 쓴다고 해서, 진실이 발설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자신을 파고 내려갈수록 덩이줄기처럼, 세계 전체가 끌려 나온다. 가족과, 친구와, 애인과, 적과, 타자와, 사물과, 관념과, 물질이 끌려 나온다. 우리가 자기 자신이라 생각하는 그것은 사실 이질적인 것들이 만든 아상블라주다. 모든 단상은 반-주관이며, 반-객관이다. 객관이 허구인 것처럼 주관도 허구다. 객관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오만한 만큼이나, 주관을 정의의 원천으로 내세우는 것은 사악하다.
- 타연의 시민들은 역사에 대한 감각을 상실한다. 그들은 지금이 과거로부터 얼마나 달라진 세계인지를 깨닫지 못한다. 역사에 대한 무지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라이프스타일이 된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테크놀로지가 역사를 현재화하기 때문이다. 테크놀로지는 과거와 미래를 공격적으로 현재화한다. 과거의 과거, 그리고 미래의 미래가 시야 밖으로 밀려난다. 이 착시 속에서 현재의 지평선은 끝없이 확장된다. 둘째, 그것은 현재에 펼쳐지는 '향유-가능성 enjoy-abiliry'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권리의식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과거에 대한 심오한 이해는 현재 누리는 것들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인식을 유도한다. 그것은 향유의 순도를 떨어뜨린다. 역사적 인식은 디테일을 향해가는데, 모든 디테일의 끝에는 고통받는 누군가의 얼굴이 있기 때문이다. 죄책감 없는 향유를 위해서는 이 얼굴은 망각되어야 한다. 타연을 살아가는 인간은 사고의 주체, 욕망의 주체, 생산의 주체, 언어의 주체, 창조의 주체가 아니라, 향유의 주체다. 향유는 존재 being가 아니며 소유 possession 도 아니다.
- 희극은 비극보다 언제나 성숙하다. 비장한 어조로, 모든 것에 막중한 의미를 부여하며, 세상의 부조리를 홀로 짊어진 듯 괴로워하는 사람보다 더 우스꽝스러운 존재는 없다. 그런 과잉된 진지함은 대개 체험의 부족과 과열된 자의식에서 온다.
- 여행을 통해 새로운 사람들과 장소들을 만나는 경험은 우리에게 '가능한 삶'을 상상하게 한다. 내가 지금의 나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 삶은 어떠했을까? 나는 저 어부였을 수도 있고, 저 어부의 아들이었을 수도 있다. 일본인이었거나, 인도네시아인, 혹은 프랑스인이었을 수도 있다. 이 고장에 이주했다면, 저 직업을 선택했더라면, 저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졌더라면, 저런 집에서 살았더라면, 여기에서 죽었더라면. 여행은 현실의 자아를 가능세계의 자아들과 연결시킨다. 여행이 끝날 때 상실된 것으로 느껴지는 것은, 여행지 그 자체의 사실적 상태가 아니라, 우리가 여행지와 만나면서 촉발된 가능세계들이다.
- 무언가가 이전에 있었다는 생각, 말, 인식, 판단은 오직 이후에만 가능하다. 선험은, 후험적으로만 선험이다. 오직 나중에 선험이라고 말해지고, 인정되고, 느껴지는 무언가 이다. 선험의 후험성을 명확히 인지하지 못할 때, 우리는 공허한 표상 게임의 한계에 쉽게 갇혀버린다. 가령, 정신분석학.
- 선배의 이론이나 학문, 혹은 예술적 성취를 '계승하는' 후배란 있을 수 없다. 후배는 언제나 선배의 왜곡자이며, 비판자이며, 폄하자이며, 공격자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후배는 선배를 이어가지 못한다.
- 야구는 정교하게 디자인된, 체계적으로 반복되는 죽음의 연습이다. 야구는 죽음을 생산하고 죽음을 사실화한다. 야구처럼 노골적이고 흥미진진한 죽음의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야구의 모든 기록은 어떻게 세 명의 타자들이 죽어갔는가에 대한 기억이며, 죽어간 타자들에 대한 방대한 통계다.
- 이탈리아의 인류학자 코라도 지니는 4세기경 게르만족 이주자가 북아프리카로 전파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한 놀이를 소개하고 있다. 그는 베르베르인들이 즐겨하는 '순례자 어머니의 공 Ta Kurt om dl mahag'이라는 게임을 연구했는데, 이 게임은 홈, 베이스, 투수 등이 있는, 현재의 야구와 거의 흡사한 게임이었다. 지니의 주장에 의하면, 이 게임은 봄의 도래를 찬미하는 종족의 집합 의례, 즉 봄의 제전 Frühlingsritual에 기원을 두고 있다(Gini, 1939. 거트만, 2008: 172에서 재인용). 내가 야구를 좋아하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삶의 방식이 고정된 이후인 듯하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이 그어진 이후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 지금 내게 현실적으로 주어진 것들이, 지금은 주어지지 않았지만 다른 상황이었다면 주어질 수 있었을 것들과 필연적으로 상호 배제적 관계를 이룬다는 사실. 무언가를 할 수 있기 위해서 다른 무언가를 하지 않았어야 한다는 것. 삶의 바탕에 존재하는 것은 전진이나 확장이나 강화가 아니라, 포기다. 코나투스 혹은 힘에의 의지가 아니라 자기-비움이다.
(리뷰자 주 : <우연 제작자들>의 문장이 떠오른다. 가능성-선택으로 보는 사람과 장애물-포기로 보는 사람,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 자아의 일부를 잘라버리지 않았다면, 그것을 아직도 나의 것이라 고집하며 붙들고 있었다면 지금 주어진 삶은 존재할 수 없다. 힘의 제한, 힘의 자발적 파괴가 삶의 조건이다. 이 인식에는 비애가 스며 있다. 풍요롭지는 않지만 단정하고 신뢰할 수 있는 지금 주어진 삶의 '의미'를 즐길 수 있으려면, 가능과 불가능을 가르는 선분에 대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승복이 있어야 한다. 이 구별, 선택, 배제의 불가피성에 대한 승인은 오랜 시간을 요구한다. 포기를 통해 자아를 축소시키는 것이 존재의 묘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자질구레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삶의 문제들과 싸우는 과정 속에서 깨달아진다.
- 야구를 좋아하는 자에게 세계는 낭만적 우주가 아니다. 그것은 건조하고, 산문적이며, 고독한 세계다. 그것은 은둔지다.
- 축구가 우리에게 선물하는 것은, 황금빛 테두리에 갇혀 있는 결정적 순간의 아름다운 영상이다. 축구는 미적이다. 이것은 야구에서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진화론적 아름다움이다.
- 축구경기에는 '신기록'이라는 것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기록으로 표상되는 사실적인 것 the factual이 중요하지 않다. 굴리트 축구가 나에게 불러일으키는 열광은 그의 신체의 우아함, 그 신체를 품고 있는 공간의 구조적 짜임과 분할에 대한 시각적 체험과 분리할 수 없다(남미와 아프리카 출신 선수들의 개인기는, 인간의 몸이 자신을 둘러싼 공간과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움직여나갈 때 그것이 얼마나 보는 이의 가슴을 깊이 울렁이게 하는 강한 미학적 체험을 안겨주는지를 실감하게 한다). 그가 큰 신장으로 휘청거리며 공을 받아, 레게머리를 치렁거리며, 경주마를 연상시키는 근육의 순간적 힘을 발휘하여 수비진을 제쳐가며 호방하게 문전으로 쇄도해 들어가는 장면이 주는 쾌감은 순수한 시각적 운동성의 영역으로부터 솟아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굴리트의 왼발이 시속 몇 킬로미터로 공을 차는지 그 공이 몇 초 후에 골문까지 도달했는지 등에 대해 관심이 없다. 굴리트의 발과 공과 공간이 결합하여 만들어내는 하나의 장면은, 게임의 승패를 떠나서, 그 장면 하나만으로 구성된 순수한 모나드다. 그것은 모방될 수는 있지만 재연될 수는 없다.
- 사실이란 가장 먼저 만들어졌고, 가장 나중에 사라지는 인식의 형식이다. 가령, 불어로 사실을 의미하는 단어인 'fait'는 '만들다'를 의미하는 동사 'faire'의 과거분사이다. 즉 불어로(라틴어도 마찬가지이지만) 사실이란 '사실로서 만들어진 것'이다. 예를 들어서, 푸코의 계보학은 이런 사실의 '생산' 과정을 들여다봄으로써 사실의 사실성을 상대화시키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푸코보다 더 급진적으로 사실의 생산을 탐구한 것이 브뤼노 라투르이다. 라투르에게 사실은 언제나 생성 속에 있는 무언가 이다. 사실은 사태와 명제의 대응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실로 만드는 특정 연결망 속에서만 사실로 형성되는 것이다. 사실과 거짓이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사실적인 사실들과, 덜 사실적인 사실들이 있다. 우리는 이를 종종 망각한다. 사실은 불변의 실체가 아니다. 사실이야말로, 사실을 사실로 성립시키는 역사적, 사회적, 심리적 과정에 묶여 있다. 사실은 가소적이다. 그런데, 나는 이보다 중요한 것이 사실의 최후성이라고 생각한다. 즉, 사실은 인간적 지각/감각/인식의 최후의 거점이다.
- 감염의 상상계, 잠복기까지의 기다림. 감염되었는지 감염되지 않았는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의 불안. 혹은 건강검진을 받고 난 후 결과를 기다리기까지의 시간. 이들은 모두 의학적 패러다임의 연옥이다. 불안 속에 지내다가 결국 '아무 이상 없습니다'라는 의사의 복음과 더불어 회생하는 삶. 반복되는 부활.
- "왜 메시아가 오지 않는 겁니까? 왜 도대체 그가 오지 않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괴로워하면서, 랍비 멘델 드 코소프가 이렇게 대답했다. "기록된 바에 의하면, 다윗 왕이 어제의 만찬에도 오늘의 만찬에도 오지 않은 이유는, 어제의 우리와 오늘의 우리가 똑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Buber, 1963: 483).
- 과거가 간혹 더할 나위 없이 애틋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과거를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는 사실, 즉 소통-불가능성의 대가다. 누구에게도 연결되지 못하고, 다른 누구의 의식 속에서 재생되지 못하고, 어떤 형식으로도 부활하지 못할 절대적 유일성이 지배하는 안타까운 삶의 체험들에 사후적으로 주어지는 미학적 보상이 애틋함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향수의 아우라를 두른 채 되돌아오지 않는다면, 지금 눈앞에 전개되어가는 이 리얼리티의 본질적 덧없음을 누가 견뎌낼 수 있을 것인가?
- 어릴 적 자주 했던 상상. 내리는 비의 어딘가에 있을, 비의 끝을 보고 싶다. 그 비의 경계에 서보고 싶다. 왼팔에는 비가 내리고, 오른팔부터는 비가 내리지 않는 비의 끝에서 몸을 양분해서 오직 반쪽만 비를 맞고 싶다. 하지만 한 번도 그 경계를 실제로 본 적은 없다. 언제나 비의 권역 속에서 비를 맞고 있었을 뿐. 사실 비의 경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구름은 빠르게 이동하니까 경계는 칼로 자른 것 같을 리 없다. 들쭉날쭉 부딪치며 빠르게 이동하는 물방울들의 혼란한 비산, 역동적 상태 하나가 지나가고 있을 뿐이다. 그것을 바라본다 해도, 그 아래에 있다 해도, 결코 그것이 경계나 끝으로 인지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비의 안 혹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가 우리를 지나가는 것이다.
(리뷰자 주 : 경험해본 적이 있다. 스콜 형태의 비가 올 때는 깔끔한 회색의 선이 생긴다. 반반의 상태로 경계선에서 함께 달려갈 수 있다.)
- 아름다운 기억을 남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 이를 엄격히 실행할 때, 아름다운 기억은 파괴되지 않고 보존될 '수'도 있다. 계시는 은폐와 부재를 전제할 '수'도 있다.
- "카발라에 의하면, 매 순간 신은 수많은 새로운 천사들을 창조한다. 이들 모두는 신의 옥좌 앞에서 단 한순간 신의 찬가를 노래하고는 무 속으로 녹아 사라지도록 운명 지어져 있다." (Benjamin, 1990: 336).
- 문체는 개성이나 사고 스타일이 아니라 작가가 활용하는 독자 선별 장치다. 작가의 대중성과 비대중성은 글의 내용이 아니라 문체에서 결정된다. 문체는 장벽이기도 하고, 필터이기도 하고, 해자이기도 하다. 우리가 어떤 작가를 좋아하기 시작할 때는 이미 그의 문체 속으로 들어간 이후이며, 그때 우리는 의식하지도 못한 채, 그를 모방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 지나친 건강이 건강에 해롭듯, 지나친 인정은 인정에 해롭다.
모든 글쓰기는 존재의 거짓 증언이다.
- 사냥꾼이 맞이하는 진정한 위험은 사냥의 과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냥에 성공하여 먹잇감을 먹을 때 온다. 먹잇감의 체내에 기생하는 미생물들은 피와 살을 통해 사냥꾼의 몸으로 이동한다. 감염과 죽음의 위험이 있다(울프, 2015: 53-74). 사냥하되 먹지 않을 것. 이는 글쓰기에도 엄격하게 적용된다. 타인의 생각을 함부로 흡수하여 자기화하는 자들의 최후.
- 어떤 시대가 오면 아마추어리즘은 소멸한다. 아마추어들은 단순히 살아남는 것에 실패할 뿐 아니라, 살아남아 있음이 미학적으로 불쾌감을 주는 방식으로 생존한다. 애호의 실체 가사심 없는 완상인지, 문화자본의 은밀한 추구였는지, 과시적 소비였는지, 아니면 자기기만이었는지에 대해 준엄한 평가가 내려지는 순간을 맞이한다.
- 푸에블로 인디언들에게는 카치나 katcina라는 입사 의례가 있다. 살아 있는 구렁이를 입에 문 채 춤추며 의례에 등장하는 존재들, 혹은 그들이 착용하는 가면의 이름이 카치나다. 그런데, 신참자들이 전수받는 비밀은 "전수받을 비밀이 없다"는 사실이다. 일단 이 비밀을 알게 된 자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다음 의례에서 스스로 카치나가 되어 또 다른 신참자들에게 비밀의 부재를 전수한다. 카치나라는 장치가 미래로 전달하는 것은 '무다. 그들은 아무것도 아닌 어떤 것이 차지하는 빈자리를 세대를 이어 전승해간다. 문학 또한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무를 창조하고, 유지하고, 재창조하는 기술.
"문학이 정당성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문학은 아무것도 아니다 nulle. 그리고 이 아무것도 아닌 문학의 속성이 순수한 상태로 분리된다면, 그것은 문학의 특이하고 경이로운 힘의 근원이 된다." (Blanchot, 1981:294).
- 작가의 삶은 작품의 의미론적 질감을 변화시킨다. '어떻게 사느냐'가 '무엇을 썼느냐'를 규정한다. 이것이 자율성을 획득한 근대 예술에 부가된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제한이다. 시인의 '삶'은 시의 외부가 아니라 그 구성적 내부를 이룬다. 시인은 시를 쓰지 않을 때조차 사실은 시를 쓰고 있는 셈이다.
- 철 지난 유행가를 후일 우연히 듣다가, 그 노래에 감전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심야 라디오, 유튜브, 혹은 술집에서 간혹 그럴 때가 있다.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고, 지난날이 생생하게 육박해온다. 회한이 엄습하기도 하고, 그리움이 밀려오기도 한다. 유행 당시에 별로 주목하지 않았던 노래가 20년이 흐른 뒤 아우라를 두른 채 새롭게 지각되는 것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원곡과 가창은 물리적으로 변한 것이 없다. 새로 부른 것도 아니고, 편곡된 것도 아니다. 다만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감각이 변한 것이다. 평범하던 유행가에 그것을 초과하는 무언가가 스며들어 있다. 20년의 세월이, 마치 술을 발효시키듯이 한 노래에 형질변환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 그 노래에 발생한 것인가? 혹은, 작품은 시간과 어떻게 관계 맺는가?
- 사실 노래가 유행하던 시기에 우리는 그 노래와 '동시대적'이지 못했다. 라디오에서, 텔레비전에서, 거리에서 노래는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우리는 사실 거기 있지 않았다.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이 노래를 빨아들인 것은 의식이 아니라 신체였다. 기억하지 못하는 미세 지각을 통해 우리의 존재는 노래를 흡수했다. 의식으로는 '아직' 인식하지 못한 것을 몸이 '이미' 체화한 것이다.
- 이미 거기에 있었지만 느끼지 못한 무언가의 돌연한 회귀는 우리를 뒤흔든다. 우리는 오직 사후적으로 유행가의 시간과 '동시대적'이 된다. 동 시대성은 같은 시간을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분열된 시간의 조각들이 사후적으로 조립될 때 가능한 현상이다. 유행가의 시간은 노래가 유행하는 시간이 아니라, 유행가의 어떤 것이 미래의 어떤 상황과 (우주선과 우주선이 도킹하듯이) 결합할 때 완성된다.
- 어떤 학문은 시범용 무술들과 흡사하다. 화려하고 경탄을 불러일으키는 동작들과 묘기들을 보여주지만, 실전에 사용하면 무참하게 무력하다. (넓은 의미의) 문학은 고단수 호신술에 속한다. 연구에 사용되는 문학의 역량은 명명의 힘이다. 대상의 고유명을 발견해내는 힘. 제대로 호명되면 대상은 이름 부른 자를 돌아보고 스스로 말하기 시작한다. 연구는 그 자백의 기록이다.
- 사회학의 시간은 정오부터 석양까지다. 그 시간 사회학은 밝게 빛난다. 사회학은 빛의 학문, 계몽의 학문이다. 어둠이 오면, 사회학자들은 특별히 할 말이 없다. 어둠 속에서 사물과 현상은 숨겨온 다른 면모를 드러낸다. 어둠 속에서 현실은 무시 무시해진다. 독립변수와 종속변수 사이의 앙상한 상관관계를 벗어난다. 인터뷰에서 이야기되는 말과 완전히 다른 말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징그럽고, 생동감 있고, 혼란스럽고, 지저분하고, 야비한 실재가 슬그머니 얼굴을 드러낸다. 이것은 낮의 질서와는 다른 밤의 질서, 밤의 냄새, 밤의 진실이다. 태양이 작열하는 한낮에는, 밤의 사회학은 그림자로 은둔한다.
- 벤의 결핍은 결핍 그 자체이다. 즉, 벤에게는 결핍이 없다는 사실이 결핍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결핍인 해미를 만난다. 벤은 결핍의 부재, 부재의 부재라는 공백을 채우기 위해 강박적으로, 넘쳐나는 해미의 결핍을 수집한다. 벤은 결여를 욕망하면서 아래로 내려온다. 그가 욕망하는 아래는 존재의 충만을 위해 요구되는 부정성의 장소인데, 그의 아비투스가 이 결여를 견뎌내지 못할 때 그는 '하품'을 한다.
- 단상에는 시종이 없다. 어디서 끊어 읽어도 상관이 없다. 일반성은 단상을 파괴한다. 일반성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단상은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단상은 그것을 쓴 사람에 의해 소유된다. 단상을 쓰는 이유는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서다. 마치, 위급한 상황에서 호주머니에 챙겨 달아날 수 있는 보석들처럼. 이상적인 단상은 자신을 책임진다. 의미와 진실을 입증하기 위해 다른 문장을 요구하지 않는다. 자기 충족적이고 자기 완결적이다. 이는 단상의 순수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단상에는 최대치의 다양체가 응축된다. 더 짧을수록, 더 많은 것이 집약된다. 최고의 단상은 오직 한 문장으로 구성된다.
- 실패한 단상은 꼰대의 훈계이거나 애송이의 트윗이다. 헐벗지 않은 자가 쓰는 단상은 실패한 단상이다. '무엇'을 쓰느냐보다 '누가' 쓰느냐가 더 중요한 이유가 이것이다. 단상은 충만하고 풍요로운 정신으로는 쓸 수 없다. 오만하거나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단상에 실패한다. 꼰대도 애송이도 단상을 쓸 수 없다. 양자 모두 자신은 헐벗지 않은 채 타인을 헐벗기려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헐벗을 때, 주관이 헐벗을 때, 자아가 헐벗을 때, 문장이, 표현력이, 욕망이 헐벗을 때 단상이 가능하다.
- 숲에서, 모든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들이 발산하는 기호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다. 인간만이 언어를 갖고, 비인간 세계는 언어가 없는 죽은 물질의 세계라는 착각을 하는 자는 아마존 숲에서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물, 공기, 바람, 흙, 곤충, 식물, 작은 동물, 큰 동물, 날씨, 습도, 정령 spirit, 사자 dead는 모두 자기 self다. 이들은 각자의 시선과 권능과 생명과 영혼을 갖는다. 이들은 서로가 발산하는 기호를 읽고 탐구하는 해석학자들이다. 아마존 숲에서 먹이를 찾아 산책하는 재규어와 마주친 인간은 (인간의 관점에서는) 주체이지만 (재규어의 관점에서는) 잠재적 먹이, 즉 대상이다. 자신이 재규어의 먹잇감이 아니라 그와 동등한 또 다른 자기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는 재규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 재규어에게 아우라를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즉, "재규어의 시선을 돌려주어야 한다." (콘, 2018:12)
- "수마코 화산 기슭에 있는 사냥 캠프의 초가지붕 아래서 엎드려 누워 있는데, 후아니쿠가 내게 다가와 경고했다. '반듯이 누워 자! 그래야 재규어가 왔을 때 그 녀석을 마주 볼 수 있어. 재규어는 그걸 알아보고 너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엎드려 자면 재규어는 너를 아이차aicha (먹잇감)로 여기고 공격한다고.' 후아니쿠의 이 말은 재규어가 우리를 마주 응시할 능력이 있는 존재로 본다면, 우리를 가만히 놓아둔다는 뜻이다. 그러나 재규어가 우리를 먹잇감-'그것'으로 보게 된다면, 우리는 죽은 고기나 다름없다. 다른 부류의 존재들은 우리를 어떻게 볼까? 이 문제는 중요하다."(콘, 2018:11).
- 이것은 토테미즘이 아닌 애니미즘의 세계다. 개구리 토템은 개구리의 축축한 피부나 끈적거리는 점액, 빠른 헛바닥, 그리고 짹짹거리는 소리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다. 개구리 토템은 물질성이 지양되고 승화되어 만들어진 개구리라는 '기호 sign' 혹은 상징에 대한 숭앙이다. 상용의 숲은 토템으로 정신화되기 이전의 생명들이 발휘하는 소통의 힘으로 넘실거리는 세계이다. 그것은 아이들의 세계, 동화의 세계, 만화의 세계와 같다. 이 환상적 서사 환경에서 사물과 생물은 영혼이 있고, 살아 있고, 말을 하는 행위자다. 기표의 남근적 헤게모니에 의해 중화되고 증류되지 않은 수많은 '눈'과 '관점'의 세계, 아우라의 숲이다. 따라서 '나'의 시선으로 세계를 통일할 수 없다. '나'는 수많은 관점 중의 하나일 뿐이다. 조화란 내 시선이 응답을 받고 다른 시선에 내가 응답하는 관계, 모든 비인간 존재자들의 '힘'이 존중되는 순간인 것이다.
- 여우가 토끼를 잡아 내장을 파먹고, 그 나머지 사체를 파리와 구더기가 파먹고, 뱀이 쥐를, 쥐가 벌레를, 벌레가 식물을 먹는 저 무수한, 먹고 먹히는 스펙터클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자연은 왜 우리에게 끔찍한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으로 나타나는가? 인간의 악을 직시할 것. 인간의 악을 용서할 것. 자신의 악을 직시할 것. 자신의 악을 용서하지 말 것.
- 우리가 자연이라 부르는 대상의 아름다움, 선함, 신비스러움, 편안함, 쾌적함은 인간적 관념에 불과하다. 푸른 숲, 맑은 물이 흐르는 시냇물, 물안개가 피어나는 바닷가, 갈대밭이 우거진 강변, 갯벌과 호수, 풍요로운 산과 평원. 이런 모습들은 인간이 자연에 투사해놓은 하나의 이미지일 뿐이다. 지구가 이런 '인간적' 모습을 띠기 시작한 것은 사실 최근 1만 년 동안 기후가 안정화된 충적세 이후의 일이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문자 그대로의 '자연'의 모습은 다음과 같았다.
"지구의 탄생은 하데스대 Hadean라 불리는, 지금으로부터 약 45억~39억 년 전에 이루어졌다. 그즈음은 지각 폭발과 고열의 시대로 대양이나 호수는 물론 존재하지 않았고 눈이나 진눈깨비 같은 기상 현상도 없었다. 행성 지구는 마치 용암의 불덩어리 같았고 내부에서는 방사능 물질인 우라늄, 토륨, 칼륨 등이 분해되면서 고열을 방출했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물은 지구 내부에서 지표로 마치 간헐천의 수증기처럼 방출되었다. 온도가 너무 높아서 비의 형태로 지표에 떨어지지 못하고 대기 중에 수증기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기는 유독성의 시안화물과 포름알데히드를 다량 포함했다. 물론 산소는 전혀 없었고 어떤 생물체도 호흡할 수 없었다." (마굴리스· 세이건, 2011:51-2).
- 심지어 바위와 같은 무기물도 광대한 시간 속에서 보면, 미세하게 변화해가는 생성물이다. 세상에 그냥 '실존'하는 것은 없다. '무언가가 있다'라는 명제가 의미하는 것은 많은 경우 '무언가가 없지 않다' 정도에 그친다. '있다'는 그 주어에 대해서 별다른 사실들을 알려주지 않는다. '실존'하는 것들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있을 수 있기' 위해 고투하고 있다. 그저 있는 듯이 보이는 나무는 광합성하고 있고, 성장하고 있고, 분열하고 있다. 바람에 버티고 있으며, 흙을 뚫고 내려가고 있다. 그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자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부단히 운동하고 있다. 흐르고 있고, 불타고 있고, 대립하고 있고, 버티고 있다. 가까이에 다가가서 보면, 모든 존재는 무수한 작용과 겪음의 지속적 '과정'이다. 존재가 아니라 생성, 혹은 생존이다.
- 계시되는 기호는 생사를 묻는 질문이다. 하나의 질문은 기호 앞에 선 생명의 총체적 능력을 시험대에 올린다. 가령, 끈끈이풀 앞을 날아가는 파리, 가젤을 발견한 사자, 설탕가루를 발견한 개미, 숲에서 만난 미지의 타인의 눈빛을 살피는 여행자, 수학 문제를 풀고 있는 학생, 실험실에서 발견한 어떤 물질을 응시하는 과학자에게, 기호는 유희가 아닌 시험이다. 스핑크스와 오이디푸스의 대면은 기호 해독자가 처해 있는 생사의 갈림길에 대한 원초적 그림을 제공한다. 답을 찾지 못하면 죽는다. 기호를 잘 못 읽는 것들은 생존하지 못한다.
- "다양한 먹이가 주어지면 헤엄치는 세균, 섬모충류, 편모충류 등 운동성이 있는 미생물은 하나를 택한다. 선택하는 것이다. 위족을 써서 움츠렸다 폈다 하며 나아가는 아메바는 테트라히메나(섬모충)를 발견하면 반기지만 코프로모나스는 피한다. 짚신벌레는 작은 섬모충류를 게걸스럽게 먹는데, 만일 섬모충류나 다른 원생생물이 부족하면 마지못해 에어로모나드 같은 세균을 먹는다." (마굴리스· 세이건, 2016: 299).
- 생각, 의지, 욕망, 언어, 소통은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가장 원초적인 단계에서 이미 발견되는 생기론적 능력들이다. 생명체는 감각하고, 사고하고, 소통한다.
- 도서관에 꽂혀 있는 수많은 책들에 인쇄된 글자들은 비리온 virion 상태의 바이러스와 유사하다. 인지되고 이해되기 이전의 글자들은 물리적으로 현존할 뿐이다. 그것은 작용하지도 감용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페이지가 펼쳐지고 어떤 의식이 그것을 읽는 순간, 글자와 뇌가 연결되는 순간, 글자는 인쇄된 특정 모양을 지닌 단순한 잉크 자국에서 의미의 활발한 파동으로 변신한다. 글자는 살아나고, 이미지와 생각과 느낌이 되어 읽는 자의 신체와 그 외부로 퍼져나간다. 글자, 그림, 부호, 풍경, 말, 상징, 아이콘, 인덱스는 바이러스적으로 존재하고 바이러스적으로 작동한다.
- 커뮤니케이션은 '전염'이다. 기호는 의식과의 만남을 기다리는 바이러스다. 읽는다는 것은 숙주가 되는 과정이다. 저자가 생산한 바이러스가 읽는 의식에 기생체로 밀려들어온다. 의식 내부에서, 바이러스의 영토화가 발생하고, 새로운 기호의 배치가 생산된다. 쓴다는 것은 의식에 침투한 바이러스의 변이다. '나'는 하나의 바이러스 아상블라주가 또 다른 바이러스 아상블라주로 변화해갈 때 거쳐야만 하는 이행점이다. 바이러스적으로 작용하는 대부분의 기호는 면역계에 의해 차단되고, 파괴되고, 무력화되어 자아의 내부에 침투하지 못한다. 반지성주의, 편견, 우상, 혐오, 독단, 신앙과 같은 강력한 면역 시스템. 기호는 실재를 살해하고 나타나는 상징계가 아니다. 기호는 실재와 구분되지 않는다. 기호도 실재의 한 부분이다.
- 중세 유럽의 한 유대인 마을. 폭설이 쏟아지는 날, 한 남자가 눈을 맞은 채 집에 들어서면서 아내에게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거위를 팔고 돌아오는 길에 마차가 고장 나 곤경에 처했을 때 누군가 그를 구해 눈보라를 벗어날 수 있었다고, 경이로운 일이라고. 그가 누구인가?
남편: 트라이틀 그로시퀘베르, 크라쿠프의 조하르 랍비 아래에서 공부한 저명한 학자, 미슈나의 모든 구절을 암송한다는 그분이 나를 구해주었다고.
아내: 그분은 죽었단 말이에요, 3년 전에. 신이 우리를 저주했네요.
남편: 무슨 소리야, 나하고 이야기도 나눴는데.
아내: 악령이에요. 그 양반은 발진티푸스로 죽었다고.
- 코언 형제의 <시리어스 맨>의 프롤로그, 영화는 중세 랍비 라시 Rashi의 잠언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너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단순히 받아들여라."
- 욕망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해방을 욕망하게 하는 '억압'을 동시에 욕망한다. 무언가를 창조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자기를 창조해야 한다. 대다수 오류와 죄악은 이 과정에서 발생한다. 자기를 아직 정립하지 못한 자가 그 괴로움을 벗어나 주체가 되기 위해 몸부림칠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다.
- 자신을 유쾌하게 비웃지 못하는 자들을 조심하라. 만일 당신이 스스로를 유쾌하게 비웃지 못한다면, 당신은 스스로를 가장 조심해야 한다. 명증한 자는 자아를 분산시킨다. 자아를 쪼개 흩어놓고, 그 일부가 파괴되어도 타격을 입지 않을 다른 자아들을 숨겨놓는다. 명증한 자는 분열된 자다. 오직 분열 속에서만 말, 사물, 생각, 감정, 현상, 판단, 열정, 정동, 존재에 속지 않는다.
- 운명은 한 생애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의 성좌다. 문제가 엄습하기 전에 우리는 한 인간(사물)이 누구인지(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한다. 문제는 인격(물성)의 인화액이다. 문제의 작용하에 비로소 품성이 나타난다. 누군가는 비열하고, 누군가는 무능하고, 누군가는 이기적이고, 누군가는 좋은 사람이며, 무언가는 강력하고, 무언가는 아름답고, 무언가는 위험하다. 누군가(무언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생각이나 의향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가(그것이) 극단적 상황에서 드러내는 힘을 파악해내는 것이다.
- 우리가 욕망하는 것들은 문제의 형상을 띠고, 문제를 통해서, 문제와 뒤섞인 채 나타난다. 우주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문제에 대한 한 해답이다.
- 아하스베루스 Ahasverus 혹은 '영원한 유대인'은 중세 이후부터 근대 유럽의 도상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누더기를 걸치고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으로서, 막대를 쥐고, 피곤한 기색을 하고 있으며, 대개 맨발로 보행 중인 상태로 그려져 있다.
- 유대인들에게는 전승을 의미하는 두 단어가 있다. 마소레와 카발라. "마소레 Massoret는 문자 그대로의 전승을 가리킨다. 그것은 동사 'limessor'에서 왔다. (...) 마소레는 언어의 철자와 문장들의 정확한 구조들을 명확하게 한다. (...) 마소레는 권위를 만들고, 권위로서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정당한 지식이다. 그것은 선생들의 편에 있다. 카발라 Cabbale는 '수용'의 의미로서, 제자들의 편에 있다. 그것은 각자가 청취에 의해서 굴절되도록 허용하는 전통이다. 마소레는 의미의 기억이다. 카발라는 의미의 재창조다." (Ouaknin, 199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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