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에번 D. G. 프레이저 / 앤드루 리마스 / 유영훈
원제 : Empires of food : feast, famine, and the rise and fall of civilizations
출판 : 알에이치코리아
출간 : 2012.11.23
고급 백화점의 고메를 보는 기분이었다. 각 챕터별로 유명한 책들을 핵심 요약정리한 느낌이었는데, 덕분에 읽었던 책들이 떠오르는 경우는 수월하게 읽었다.
1부 "식품의 가격"은 교역과 그로 인한 집중 생산, 품종의 단일화와 지력의 고갈, 주 섭취 식품에 따른 영양 상태와 거대 농장의 등장에 관한 이야기였다. 포도에 관한 내용들이 개인적으로는 흥미로웠다. 얼마 전 읽은 <중세 유럽의 생활>에서 농경 기술 및 생산량 감소와 농민들의 생활상, 수도원이나 봉건 영주의 축재와 물레방앗간-제분소 등의 공공재 사용료에 관한 내용들이 유사하면서도 조금 다른 시각으로 다루어졌다. <3천년 기독교 역사>, <문화의 수수께끼> 같은 서적들도 떠오른다.
2부 "가격 상승"에서 물-수자원과 흙-비료, 얼음-유통은 제각기 다른 책들이 떠올랐다. 관개 농업은 딱 한 권의 책 제목이 떠올랐던 것은 아니지만 종자들에 관해서는 <몬산토>가 떠올랐고, 질소에 관해서는 얼마 전 읽은 <공기의 연금술>에서 한 권 전체에 걸쳐 상세히 다룬 바가 있다. 함께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상상하기 어려운 존재에 관한 책>도 떠오른다. 얼음과 교통의 발전을 통한 식품 권역의 확장에 관해 상당히 흥미롭게 읽었다.
이후 3부 "빈 주머니"는 향신료와 홍차와 아일랜드 기근에서는 <저급한 술과 상류사회> 및 각종 역사 서적들이 뒤섞여서 떠올랐다. 항해사와 관련된 부분들 역시 아주 흥미로웠다. 마지막 파트 시간에서 유기농과 슬로푸드를 다룬 부분들은 <헝그리 플래닛>이나 <푸드 룰>, <푸드 주식회사>, 그리고 미식 관련 서적들이 떠오른다. 책의 핵심 내용들도 흥미로웠지만 그 곳곳에 곁들여지는 풍부한 지식들이 아주 즐거웠다. 개인적으로는 맥주에 흥미가 조금 있어 수도원 맥주인 트라피스트 Trappiste에 관한 내용들과 미식 관련 부분에서 잠시 샛길로 빠져서 읽었다. 그리고- 사실 아직도 교역으로 발생하는 가치의 실체에 관해서는 조금 모호한 인상을 가지고 있는데, 대항해 시대에 관련해서 가볍게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책의 주제인 "음식의 제국"에 관해 말해보자.
저자는 16세기 베네치아 상인인 프란체스코 카를레티의 기행문을 토대로 그가 여행했던 지역들을 교차하며 크게 3부 - 10개의 소주제를 다뤄나간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것이 저자가 울리고 싶은 경종이다. 한 끼의 편하고 저렴한 식사가 사실은 절대 저렴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 음식들이 어디서 어떻게 생산된 식재료로 어떻게 유통되고 있는지를 알고 있느냐는 날카로운 질문이다. 소비자 물가의 상승으로 장을 볼 때마다 흠칫거리게 되는 일상이지만, 사실 진짜 가격은 숨겨져 있으며 이대로 외면만 하다가는 '아사의 공포'가 닥칠 것이라는 카산드라의 무시무시한 예언이 아주 재미있게 쓰여져 있다.
책을 읽고 있자면 다소 막막하고 혼란스럽기도 하고, 엄두가 나지 않기도 한다. 당장의 풍요롭고 다채로운 수입 식품들을 포기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저자는 '점진적으로' '조금 더 나은 선택'을 염두에 둘 것을 권한다. 이미 굳건하게 세워진 음식의 제국을 한 번에 뒤바꾸는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만, 기후와 자연의 이상 징후는 이미 이 제국의 종말을 암시하고 있으니 이제 대비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공기의 연금술>에 따르면 우리 몸의 질소 중 절반 정도는 석유 화학 비료를 통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부분의 단백질은 아미노산-질소-를 필요로 하므로, 사실상 절반 이상에 가깝다. 곡물들이 석유를 통해 자라난다는 것은 쉽게 떠올리기 어려운 연결 관계다.
"더 직접적으로 하버-보슈 공정의 영향을 가늠하고 싶다면 자기 몸을 보면 된다. 내 몸 안의 질소 중 절반 가량이 하버-보슈 공장에서 생산된 것이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질소는 질소일 뿐이다. 하버-보슈 암모니아에 존재하는 원자들은 최상의 천연비료에 존재하는 원자들과 정확히 똑같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어떻게든 내가 숨 쉬는 공기에서 온 것이다. 하지만 내 피와 피부, 머리칼, 단백질, DNA에 존재하는 질소의 절반은 인간이 합성한 것이다."
미세 플라스틱이 크게 이슈가 되었던 적이 있는데, 그에 비해 이 사실이 더 충격적일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다. 나의 일상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어떤 영향들을 주고받고 있는지에 조금 더 관심을 두고 살아갈 필요성을 제시하는 책이었다.
이 부분은 사실 저자가 전하고 싶었던 메세지는 아니다.
<음식의 제국>을 읽는 동안 들었던 개인적인 단상들인데, 일종의 나비효과에 대한 생각이다.
무엇이 무엇과 연결되는지,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피는 관찰력과 큰 그림을 보는 전체적 시각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했다. 타인의 통찰을 읽고도 상상하기가 쉽지 않은 거대한 흐름에서 시간의 영향까지 고려해 그것을 인지하는 것이 가능한가? 보다 작은 규모에서 자신의 일상만이라도 보다 자신의 가치관에 가까운 선택을 하고, 그를 통해 예상된 결과와 그 흐름을 벗어나지 않는 영향을 얻는 것조차 버거울 듯 하다.
또한 모를 때는 모르는 일이지만, 한 번 인식하고서도 그것을 무시하는 선택을 할 때 발생하는 '채무감'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의식의 기원>에서도 이전 세대에는 존재하지 않았을 '죄책감'이나 '불안'에 대해 다루는데 이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상, 잡생각 끝.
- 하지만 859년 전에 바바리아(독일 바이에른 지역 - 옮긴이) 지방에는 홉을 키우는 밭이 생겨났고, 이것은 금세 보헤미아(체코 서부 지역 -옮긴이)와 중앙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가 맥주가 이른바 '국민 음료'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른다. 보헤미아와 바바리아는 여전히 세계의 4대 '노블 홉'(맥주 양조에 가장 적합한 중부 유럽의 홉 네 종인 할레타우, 스팔트, 테트낭, 사즈의 통칭. 향기가 강하고 씁쓸함은 덜한 특징이 있다-옮긴이)의 고향이다. 그중 하나인 사즈는 필스네르 우르켈 맥주에 그 향기와 쌉쌀한 강조를 주는 데 사용된다.
(리뷰자 주 : 필스너 우르켈.)
- 렘노스 섬과 키클라데스 제도 등의 다른 섬 주민들이 교역 기지를 짓지 않고 주변 지역에 '보따리 장사'를 하며 물품을 교환한 반면, 미노아 인들은 레반트의 도시 우가리트에 상설 교역소를 유지했다. 그들은 파라오에게도 음료를 팔았다. 미노아 궁전 중 하나인 자크로스는 오직 이집트 교역만을 담당하는 허브로 성장했다. 심지어 신화에서도 크레타 인들은 타고난 포도 재배자로 그려지고 있다. 테세우스는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미노아 공주 아리아드네와 사랑의 도피를 떠나지만 총각으로 아테네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낙소스 섬에서 그녀를 버렸다. 아리아드네는 지체 없이 디오니소스의 품에 안겼고, 그렇게 불멸의 존재의 아내가 되었다. 포도주(디오니소스- 옮긴이)와 크레타(아리아드네 -옮긴이)는 시쳇말로 잠자리를 함께 하는 사이였다.
- 토양 문제가 로마 식품 제국을 약화시킨 단 하나의 요소는 아니었다. 로마 문명은 역사에 기록될 만큼 따뜻하고 생산적인 여름 날씨를 자랑했다. 중세에 수도원이 생겨나 번성할 무렵이나 20세기의 온난한 날씨와 다르지 않았다. 따뜻한 날씨 덕분에 곡물 농사는 항상 풍년이었고, 포도밭과 올리브 농장은 과거에 숲과 목초지로만 알려졌던 북쪽 땅까지 올라가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는 제국의 하락이 아예 추락으로 바뀌어 갈 즈음에 로마 온난기도 끝이 났다. 우리는 이것을 호수 바닥에서 채취한 퇴적물과 꽃가루의 분석을 통하여, 또 고대의 나무와 목재에서 고갱이를 채취해 봄으로써, 혹은 석순의 평면 절단면을 관찰하는 방법 등으로 알 수 있다. 나무의 나이테 변화를 측정해 보거나, 다양한 수심의 호수 진흙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종류의 꽃가루를 검사해 봄으로써, 또는 암석을 화학적 성분 단위로까지 끓여 녹이는 등의 방법으로 과학자들은 일테면 서기 300년의 일기예보가 아닌 '일기 후보'를 재구성할 수 있다. 분명히 이 무렵엔 훨씬 더 추웠던 것으로 보인다. 추운 날씨는 단지 작물의 생장 기간만 단축시킨 게 아니었다. 강우량도 줄었고, 나아가 작물 재배 한계선도 문명의 경계에서 다시 축소되어 내려왔는데, 그러면서 기존의 북부 농경지가 황무지로 바뀌게 되었다. 아마도 기후의 영향 하나 때문에 생산성의 막대한 감소가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지력 고갈과 정치-경제적 문제, 그리고 로마의 지나친 수입 의존도와 합쳐져서 대재앙을 초래했다.
- 나아가 경제학자들은 환경 파괴의 '부정적 외부 효과 negative externality'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거대한 단일 작물재배 농장에서는 저렴한 콩을 끝없이 생산하고 있지만 사실은 결코 저렴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콩 가격에 경작지 황폐화로 인한 대가나, 농업용수 공급을 위한 숨겨진 경비나, 유류 비용 등이 일절 반영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21세기적 삶이라는 '고르디우스의 매듭' 전체를 계산에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렴하다는 말은 상대적이다.
- 우리의 필요는 조상들의 필요와 전혀 다르지 않다. 우리는 하나의 특화 작물을 집약적으로 키우는 대형 농장에 의존한다. 굶주리지 않기 위하여 트럭과 배, 비행기에 의지한다. 운송과 저장 기술을 발판 삼아 전 세계에서 식량을 가져온다. 비유하자면, 우물물을 긷기 위하여 두레박을 점점 더 깊은 곳까지 내리고 있는 상황이다(제4장과 제6장 참조). 화학 비료는 토양을 황폐하게 한다(제5장 참조). 우리는 신기술 농약으로 광활한 단일 작물 재배지를 뒤덮는 해충을 죽이고 있다(제8장 참조). 항공 운송과 냉장 운송 시스템 덕분에 뉴질랜드산 양고기를 뉴욕의 저녁 식탁에 올릴 수 있다(제6장 참조). 물론, 역사에서 교훈을 얻었다면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반대의 일을 해야 한다. 다양한 작물을 재배하고, 교역로의 길이를 줄이고, 식량 저장을 늘리고, 사람들에게 대도시에서 멀리 이사 갈 것을 정중하게 요청해야 한다. 지속 가능성을 위해서다.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식품 제국은 사회적 혁명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이러한 혁명은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아마도 다음과 같이 물을 수밖에 없으리라. 피할 수 있는가? 탁월한 첨단 기술이 현대 식품 제국을 구할 것인가, 아니면 중세 농업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 필연적 붕괴가 일어나기 전까지 단지 몇 세대 간만 효과를 내는 미봉책에 불과할까?
- 제3차 체제의 밑바탕에 깔린 전제는, 사람들이 빵 한 덩어리를 2.99달러에 살 때 여기에는 수질 오염, 삼림 벌채, 지구온난화, 사회의 파멸 같은 추가 비용이 전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연히 대부분의 소비자는 쇼핑 영수증에서 이러한 '유령 달러'를 보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식품이 싸다고 착각한다. 만약 시장이 정상적으로 돌아간다면 이러한 비용은 모두 소비자에게 전가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식품은 싸지 않다. 우리는 이것이 단지 '공짜 점심'(미국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의 유명한 격언 "공짜 점심은 없다"에서 차용한 말로, 무엇을 얻고자 하면 그 대가로 다른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는 뜻-옮긴이)이라고 생각한다. 애덤 스미스에 따르면 기계 장치의 가격에는 그것을 만든 기술자의 노고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생산 비용과 판매 가격은 많이 다르기 일쑤다. 식품의 경우도 그렇다. 생산 비용과 판매 가격의 차이가 교역의 본질이다. 상인은 이것을 수익으로 남기고 물건을 유통한다. 하지만 그 차이가 숨겨질 때 그 방법은 단순한 가격 인상보다는 훨씬 불분명하다. 가끔은 진짜 비용이 수십 년 동안 보여지지 않기도 한다. 천천히 지력이 고갈되는 땅에서 생산되는 곡물의 경우가 그렇다. 우리는 그저 관습적으로 이 비용을 무시하기도 할 것이다. 수메르인들도 너무 늦을 때까지 소금기가 진해지는 들판을 방치했다. 정부는 농부에게 보조금을 지급함으로써 식품의 최종 판매 가격을 낮춘다. 그러나 그 비용은 세금으로 메워진다(미국 옥수수 농부들이 받는 보조금은 기가 막힐 정도로 많다). 우리가 구입하는 대부분의 식품은 그 판매 가격과 실제 생산비용이 거의 상관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 가격은 개당 10위안(미화로 1불 50센트 정도)이다. 하지만 조금만 흥정을 하면 금방 10위안에 3개로 값이 떨어진다. 그래도 보기만큼 싼 가격은 아니다(보이지 않는 비용이 있기 때문이다-옮긴이). 돼지 장난감을 만드는 공장은 농경지를 밀어버린 부지에 들어섰을까?(십중팔구 그랬을 것이다) 돼지 장난감을 만드는 노동자는 정당한 임금을 받고 있을까?(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돼지 장난감을 만드는 데 사용한 화학 약품이 하수구에 무단 방류되지 않았을까?(올바로 처리되었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이러한 것을 모두 알기란 불가능하다. 게다가 작고 물렁이는 돼지는 아주 싸기에 사람들은 몇 번 가지고 놀다가 재미가 없어지면 아무 생각 없이 버릴 것이다. 물자 낭비다.
- 만약 인류가 너무 지쳤거나, 혹은 풍족한 삶의 꿈에 빠져서 물 호스를 끌지 않는다면 세계의 식량은 기나긴 21세기의 마른 여름을 견디지 못하고 말라 죽을 것이다. 새로운 탐식가의 역할은 이처럼 막중하다. 당신이 먹는 것이 곧 당신이다. 이런 의미에서 식품에 관한 연구는 어쩌면 인문학이다.
- 식량은 상품인가 아니면 도덕적 잣대의 대상인가? 곡물 가격이 오르는데 곡물을 수출해도 되는 것일까? 편지를 쓴 신사는 식량 문제에 경제 논리를 대입하는데 본능적인 불편함을 느낀다. 이러한 18세기의 다툼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18세기의 또 다른 혁신은 고급 쇼핑객의 탄생이었다. 이것 역시 익숙하다. 자유시장은 가격 상승을 불러왔다. 그러나 이것은 제분업자와 상인들 중에서도 부자를 만들어 냈다. 많은 제빵사가 부유층의 입맛을 사로잡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더 비싸고 새로운 빵을 개발했다. 과거에는 법으로 통제받는 몇 종류의 빵만 구웠지만 이제는 최고의 재료와 기술을 사용하여 부자들을 위한 빵을 만드는 일에 헌신했다. 빵 가격도 따라서 올라갔다. 서민들의 빵은 반대로 형편없어졌다. 고약한 첨가물이 들어가기도 했다. 오늘날의 서민도 여전히 형편없는 빵으로 연명한다. 학자들은 이제 '식품 사막'을 이야기한다. 신선한 시금치는 사라지고 온통 가공 식품만 남은 도시의 가난한 동네를 일컫는 말이다. 산업국가에서 가공되지 않은 신선한 식품은 사치품이다.
- 굶주린 군중은 비협조적인 하늘에 앙갚음을 할 수 없다. 하지만 소매상인은 두들겨 팰 수 있다. 2008년 식량 폭동 때 서방의 잘 사는 나라는 겁을 먹지 않았다. 경제가 발전한 이들 국가에서는 가게 지출에서 식료품 비의 비중이 그렇게 크지 않다. 일반 가정은 소득의 약 10퍼센트에 그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령 식료품 가격이 50퍼센트 오른다고 해도 생활비에서 끼니를 해결하는데 15퍼센트를 쓰면 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가난한 나라의 실정은 다르다. 그곳의 가족은 간신히 연명하는데 수입의 절반을 쓴다. 여기서 50퍼센트 상승이라는 건 가진 돈의 75퍼센트를 내놓는다는 얘기다. 또 서방은 가공식품 소비가 많다. 가공식품의 최종 판매 가격은 생산 원료인 옥수수나 석유의 실제 투입 비용과는 크게 상관없다. 소비자는 원가 변동에 덜 민감하다. 예를 들어, 감자칩 한 봉지 가격 중 포장지, 마케팅, 운송비용으로 1달러가 쓰인다고 했을 때 감자 가격이 5센트 오른다고 해도 그 충격은 크지 않다. 2008년에 진짜 고통을 겪은 건 아르헨티나, 파키스탄, 베트남 같은 나라들이다. 이들은 '식량 주권'을 지키기 위하여 긴급하게 곡물 수출 제한 조치를 발표했다. 반면에 에콰도르, 니제르,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는 다른 방향을 택했다. 자국의 식품 시장을 즉각 외국인에게 열어젖혔다. 수입 곡물이 그들의 빈 곡간으로 흘러들기를 기대한 조치였다.
- 이것은 18세기에 벌어졌던 일과 매우 흡사하다. 그때는 프랑스만의 위기였지만, 2008년의 경우는 전 세계를 쉽게 뒤흔들 수있는 문제였다는 점만은 다르다. 2008년에 IMF와 세계은행은 '자유시장은 능력 있고 이롭다'는 그들의 니케아 신조(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된 것으로 기독교의 원칙을 정립했다-옮긴이)를 반복했다. 위기의 규모가 다른 것 말고 18세기 위기와 21세기의 위기가 다른 점은, 오늘날은 전 세계가 거의 애덤 스미스의 이론을 맹신한다는 데 있다. 우리는 빵 관리법의 보장을 오래 전에 버렸다. 호밀 흑빵의 가격을 묶어놓는 봉건적 제도로 되돌아갈 길은 없다. 2008년 위기에서 가장 문젯거리가 되는 사실은, 그 해의 농업 수확량이 농업 혁명 이후 최고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미국 옥수수, 아시아의 쌀, 아프리카 카사바 농사가 모두 기록적 풍작이었다. 공급은 충분했다. 2008년 말을 향하며 국제 유가가 진정되고 경기 후퇴로 시장이 냉각되자 식품 가격도 덜 고통스러운 수준으로 가라앉았고, 폭동은 멈추었다. 이쯤 되면 질문이 생긴다. 만약 2008년 농사가 흉작이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가격은 고공 행진을 유지하고, 시위대의 분노도 식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미국 중서부나 중국 북부에 연이어 가뭄이 덮친다든가, 지구 기온 상승 때문에 흉작이 여러 해 이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2008년에 우리는 운이 좋았다. 태양은 빛났다. 비는 적절한 때에 적절한 양만 내렸다. 하지만 지구가 비정하게 나온다면 어떻게 될까? 여름 가뭄 때문에 잉여 식량이 생산되지 못했다면? 그래서 67억 명의 인구가 빈 빵 바구니를 보고 공포에 질린다면? 과거 의식량 폭동은 새 발의 피로 여겨질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이다.
- 모든 시민이 영양가 있는 식사를 할 자격이 있다는 데 정부가 동의하면 일이 한결 수월해진다. 올바른 식품을 생산하는 농부는 적어도 최저 생활비는 벌어야 한다. 그들의 농장은 다양성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면 기후 변화에 대한 저항력은 자연히 따라온다. 특화 경작을 하더라도 과도한 영양물 축적으로 토양을 오염시키거나(가축을 집약 사육하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나타나는 엉망진창의 현상) 혹은 영양물이 물에 너무 많이 씻겨 내려가서 환경을 파괴하는(작물을 집약 재배하는 곳에서는 흔한) 정도까지 나아가서는 안 된다. 그리고 들판에 석유를 퍼부어 농사를 짓는 방법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동의해야만 한다. 농업 투입 원료, 운송, 에너지 등에 세금을 매기는 것도 훌륭한 방법이다. 비록 정치인에게는 정치적 자살 행위나 다름 없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세금으로는 재난에 직접 대비할 수 없다. 식량 안보가 중요한 문제라면 세 차례의 흉년 정도는 버틸 수 있는 충분한 식량을 저장할 하부 구조 구축에 투자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대비를 하든 못하든 대가뭄은 언제든 닥칠 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국민의 지지가 없다면 이러한 정책을 입법할 수가 없다. 슬로푸드 운동은 일종의 특산종 고구마 애호가 클럽이 아니다. 장려하여 마땅한 그 이상의 철학적 모델이다.
- 기술은 아마도 우리의 식품 체계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장화 한 켤레와 하려는 마음만 있다면 어떻게든 해볼 수 있지 않을까? 농업의 역사는 요리의 역사나 정치의 역사와는 다르다. 엉망진창의 상황에서 누군가가 솔루션을 도출해 낼 때까지 이런저런 사건들 사이를 갈팡질팡했던 게 아니다. 치즈나 술의 우연한 발명같은 건 없었다. 불만과 사건이 연쇄반응을 일으켜 전쟁이 터진, 그런 것도 아니다. 농업은 언제나 세심한 관찰과 시행착오, 그리고 고통스러운 노동의 역사였다. 신석기 시대의 농업 혁명부터 캘리포니아 토마토의 발명까지, 매번의 도약은 절대로 거저 얻어진 게 아니었다. 우리는 이러한 일을 또 한 번 해내야만 한다. 우리가 가진 도구는 '교육'과 '계획', 그리고 (신이여 우리를 굽어 살피소서) 책임 있는 '관리 governance'이다. 규제와 단속은 대중의 흥미를 끌만한 거리가 아니다. 이 점은 분명하다. 화학비료 사용 제한을 위해 열심히 투표하도록 만들기는 힘들다는 이야기다. 슈퍼마켓에서 농축 오렌지 주스를 사지 말라고 확신시키는 것도 힘들다. 하지만 그걸 못한다면 인류는 굶주려야 한다.
- 미국 농무부는 열대 지방의 작물 생산량에 전전긍긍한다. <미국 국립과학원 회보>는 2080년까지 지구의 또 다른 1억 7,000만명이 산 입에 거미줄 치게 될 거라고 예상한다. 예언자들은 '그날'의 두려움을 설파한다. 마지막 석유 탱크가 바닥나고 전력이 끊기면 도시는 석기시대로 되돌아간다. 하지만 석유 고갈 사태를 열정적으로 경고하는 사람들도 우리의 식량을 화석 연료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원유 생산 중단으로 화학 비료 공급이 끊기면 작물 생산량은 절반으로 떨어지게 되고 30억 명이 밥을 먹을 수 없게 된다. 지구 온난화는 결국 식품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다. 식품 가격은 처음에는 긴 줄에 매달린 풍선처럼 안정적으로 떠다닐 것이다. 그러다가 2050년경에 줄이 손을 떠나 공중으로 쑥 솟구칠 것이다. 부자들은 식품 가격이 실질 인상분 기준으로 현재보다 80퍼센트까지 올라도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한다. 우리 모두는 기후 변화가 재앙을 불러올 거라는 말에 익숙하다. 하지만 그 재앙을 쌀 한 바가지 같은 구체적 형태로 생각하지 않는다.
- 영국의 대수도원장 아인셈의 엘프릭 AElfic of Eynsham은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기 몇 세대 전에 쓴 글에서 수도사가 그 사회에서 차지하는 중심적 위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왕좌는 세 개 다리로 지탱하니, 농부 Laboratores와 전사 Bellatores와 승려 Oratores로다.
농부는 밭을 갈고 소를 쳐서 생계를 꾸리고... 승려는 하느님과 우리를 중재하고... 전사는 우리가 사는 마을을 지킨다."
- 식량의 자급자족을 위해 중국은 유전자 변형 곡물이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deus ex machina (기계장치를 타고 나타난 신이라는 뜻, 고대 그리스에서 비극 작가들이 곤경에 처한 주인공을 어떻게 구출할지 모를 때 주로 사용한 방법으로, 기계장치를 타고 무대에 내려온 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옮긴이)에 도움을 청하고 있다. 바로, 자연 상태의 벼보다 생산성이 두 배나 좋은 '슈퍼 벼' 품종들이다. 그런데 생명공학이 베푼 은혜는 괴상한 돌연변이 해충이 나타나 거두어가기 마련이다. 슈퍼 벼에는 슈퍼 농약이 필요하다. 막대한 양의 물과 화학비료도 필요하다. 중국인들은 '실험실의 경이'인 이 첫 슈퍼 벼 품종들을 심으며 아예 비료물에 목욕시키다시피 했다. 그런데 화학비료는 석유로 만든다. 그것도 많은 양의 석유가 필요하기에 중국의 농업은 서방의 오랜 예를 따라서 에너지 시장과 결부되었다. 이것은 최선의 경우라도 악마의 거래이다. 최악은? 아마도 언젠가 미래에 닥쳐올 숙명의 해에 기름 값과 함께 연간 기온이 전대미문으로 치솟아 고공행진을 하면 보게 될 지옥이다.
- 이러한 시류를 반영하듯, 유럽의 인구는 서기 200년에서 600년 사이에 약 절반으로 줄었다. 도시 로마의 인구도 서기 300년에 100만 명으로 정점을 찍은 후 거의 한 세기 만에 40만 명으로 주저앉았다. 도시의 삶은 서기 4세기에 이르러 한마디로 결딴이 났다. 농업과 교역이 로마 군대와 마찬가지로 모두 쇠락의 전철을 밟았기 때문이었다. 굶주림과 강탈, 약탈, 비관주의의 만연 속에서 어떤 이들은 낙오를 선택했다. 민중을 포기한 사회를 자신도 포기하겠다는 것이었다. 세상을 등진 이러한 초기 은둔자들 가운데는 독실한 신앙을 지닌 이집트 기독교도들이 있었다. 그들은 훗날 '사막의 교부'로 불리게 된다. 대표적 인물은 4세기의 은자 성 안토니우스 St. Antonius였다. 그는 사회에서 퇴폐와 전쟁을 몰아내기 위하여 애쓰며, 자신의 모든 세속적 물품을 포기하고, 후에는 유기농 농장을 열었다. 이것은 실로 20세기 후반의 히피 운동과 놀랄 만큼 닮아 있다.
- 파종할 씨앗을 지키는 문제 역시 중세의 상황과 유사하다. 전통적 농업에서는 한 해에 수확한 일부를 떼어서 이듬해 심기 위하여 보관했다. 그렇게 시간을 거듭함으로써 작물은 그 지역에 적합한 품종으로 진화했고, 이것은 생물 다양성의 융성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현대는 식물 육종(농작물의 인위적 품종 개량-옮긴이)의 시대이다. 특히 유전자 조작 씨앗이 개발되면서 과거의 방식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현대의 식물 육종은 특정한 종자의 '부모' 둘을 교배하여 다수확 '자손'을 만든다. 그 결과로 탄생한 생산성 높은 종자를 '교잡종'(하이브리드)이라고 한다. 이들은 중대한 한계를 갖는다. 그 자신의 자손 즉, 두 개의 다수확 교잡종이 짝을 이루어 생산한 씨앗은 빈약하고 생산성이 낮은 '불발탄'이기 때문이다. 아주 가치 있는 교잡종을 만들어낸 유전자의 뛰어난 조합은 유전될 수 없다. 그러니 이 씨앗을 다음 철 파종을 위하여 저장해둘 이유가 없다. 농부들은 반드시 매년 종자 회사에서 새로운 씨앗을 사야만 한다. 오늘날의 농부는, 맷돌로 밀가루를 가는 대신 수도원 방앗간 사용료를 내야만 했던 중세 농민들과 마찬가지로, 한때 자연에서 무상으로 취했던 것에 돈을 지불한다.
- 현대 학자들은 이러한 통계에 근거하여 기업식 농업을 모래시계에 비유한다. 수천 명의 농부가 재배한 농작물을 십여 개 회사가 가공하여 다시 수백만 명의 소비자에게 판매한다. 이것은 수도원장들이 사용한 것과 같은 모델이다. 그들도 한때 승려 회당 창문 밖을 내다보면 밀밭과 일꾼, 풍차 말고는 다른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수도원들은 과학 기술을 사용하여 규모의 경제를 창조했는데, 오늘날 우리가 산업 공정으로 대량 생산의 이득을 취하는 것과 많이 닮아있다. 그들은 땅과 씨앗과 물의 사용을 억지로 강요하는 것이, 독점권을 지닌 방앗간과 시장에서 수익을 짜내는 것이 얼마나 좋은 돈벌이인지를 알았다. 오늘날 기업들의 생각도 이와 똑같다. 산업 식품 체계의 보편적 법칙 하나는, 오로지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앞선 기술을 가진 농장만이 주변의 작은 이웃들을 게걸스레 집어삼키며 번성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기업식 농업은 힘없는 농부들이 땅을 포기하고 도시로 옮겨 가도록 유도한다. 중세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 오늘날 제왕처럼 군림하는 농공산업 기업들은 과거의 수도원과 상당히 흡사한 역할을 수행한다. 기도만 빼고 말이다. 그들은 농부가 사용하는 투입물과 경작 방법, 생산물이 갈 곳 등을 통제한다. 이것은 아주 오래된 착상이다. 수도원처럼 기업들도 식품 가공에서 많은 돈을 벌었다. 그들은 현대인의 식습관도 결정한다. 유럽과 미국 가정의 식탁에 올라가는 식품은 소수의 회사에서 생산한 것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대표적인 예로 단 네 개의 회사가 미국 소고기의 80퍼센트 이상을 도축하며, 미국 최종 곡물 처리 시설의 60퍼센트를 소유한다. 그리고 세 회사가 미국 옥수수 수출의 81퍼센트와 대두 수출의 61퍼센트를 담당한다. 나아가 농업 기업들의 문제 상황은 악화되고 있다. 1989년부터 2002년 사이에 미국의 상위 네 개 돼지고기 회사는 미국 국내 시장의 점유율을 34퍼센트에서 59퍼센트로 높였다. 종자 회사는 보통 비료를 조합하는 연구소와 한 지붕 아래 있다. 이제 단일 회사가 가축을 먹이고 그것을 도축하여 소시지로 가공하는 일까지 도맡아 한다.
- 12세기에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두스 Bernardus Claravalensis는 '올바른 분노'에 기초하여 새로운 수도회를 설립했다. 극히 개인적으로 그는 클뤼니의 화려한 승려 회당을 중심으로 한 부유한 베네딕트회 수도원의 연합을 몹시 싫어했다. 그는 특히 식사 모습을 통하여 그들을 고발했다.
- 베네딕투스는 성공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 냈다. '수도승의 생활이 끔찍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세우고 지켰다. 예를 들어 베네딕투스는 일주일에 두세 차례만 식사를 하라는 카시아누스의 조언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휘하의 수사들에게 힘든 농사일을 버텨내려면 일단 기운이 있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매일 저녁 식사를 하라는 말이었다(여름에는 하루 두 끼를 먹었다). 카시아누스의 생각에 '호화로운 식사'란 "소금과 기름에 볶은 야생 완두, 올리브 세 알, 마른 자두 두 알, 무화과 한 개"였다. 베네딕트는 맛에 더 관심을 두었다. 평범한 점심으로 그는 약 450그램의 빵과 두 접시의 요리를 제안했다. 당시로서는 꽤 괜찮은 식단이었다. 더 나아가 베네딕트회의 수도승들은 바람이 윙윙 부는 황무지에서 악마와의 형이상학적 전투로 밤을 지새우는 대신 매트리스 위에서 이불을 덮고 베개를 베고 여섯 시간에서 여덟 시간의 수면을 즐겼다. 만약 그들이 진정으로 금욕적인 규율을 따라야 했다면 너무 허약해져서 유용한 농사일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베네딕투스에게 있어 농사는 기도만큼이나 중요한 일이었다. 카시아누스의 엄격함을 누그러뜨린 베네딕트회의 수도 생활은 수도원 밖에까지 전해졌다. 귀족이든 농노든 자신의 위치에서 살 수 없거나 혹은 그러지 않으려는 자들이 수도원 문을 두드렸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혹은 계속되는 굶주림으로 갈 곳을 잃은 이들도 수도원을 찾았다. 수도원들, 특히 베네딕트회 규율을 받아들인 수도원에서는 안전이 보장되었고 심지어 출세의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 중세 역사는 깡패 같은 종교인으로 빼곡하다. 예를 들어, 1234년 영국 글래스턴베리의 수도승들은 에임즈베리의 마이클 Michaelde Amesbury이라는 인물을 수도원장으로 추대했다. 그는 부역의 의무 없이 살던 '준자유민' (서류상으로는 봉건제도에 매여 있을지라도 사실상 자유민으로 살던 주민-옮긴이) 서른두 명쯤은 우습게 여겨서 강제로 그들이 수도원을 위해 일하도록 강제했다. 권력의 맛을 본 수도원장 마이클은 수십 년 동안 실행되지 않은 독점권을 언급하며 농부들에게서 지대가 미지불된 땅을 돌려받고 열 개의 물레방아를 회수하기까지 했다. 땅만 바라보고 살던 힘없는 농민들은 도시로 가서 빈곤하게 연명하거나 혹은 기도하는 수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수사들 또한 자신이 먹을 수 있는 것보다 많은 양의 식량을 생산해 봤자 만약 곡식에 곰팡이가 핀다면 결국 헛수고가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양피지 한 다발이나 석공의 하루 작업처럼 무언가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식량을 교역하려면 그것을 운송할 수 있을 때까지 안전하게 저장할 필요가 있었다. 중세의 운송 수단은 보통 느린 우마차나 짐배였기 때문에 식품이 오랜 여행을 견디도록 보관해야 했다. 그래서 수도승들은 맥주를 양조했다. 하지만 맥주는 쉽게 상하는 식품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지만 이것은 수익 감소를 야기했다. 곤란해진 수사들은 양조법을 새롭게 손보기 시작했다. 보존 방법 중 하나는 알코올 함량을 높여서 박테리아를 죽이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발효 온도와 효모 종류에 관한 다양한 경험이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수사들은 숙취 때문에 많은 고생을 했을 것이다. 알코올을 높이려면 당도를 올려야 했는데, 이것은 더 많은 보리를 넣음으로써 가능했다. 맥주의 알코올 도수를 높이는 것은 비싼 양조법이었다. 더 저렴하게는 단순히 살균제를 첨가하는 손쉬운 방법이 있었다. 수사들은 이것을 유럽 전역의 움푹 꺼진 습지에서 자라는 덩굴식물인 후무루스 루푸루스 Humulus lupulus의 꽃에서 발견했다. 바로 홉이다. 발효 과정에서 단순히 홉을 한 움큼 넣음으로써 수사들은 드디어 저장 기간이 긴 맥주를 만들어냈다. 보관을 적절히 한다면 여러 달도 문제없을 터였다. 다른 승려 회당과 좋은 관계를 맺어둔 영리한 수도원장이 수도원 지하 저장고에 넘쳐나는 내용물을 팔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리뷰자 주 : <저급한 술과 상류사회>는 당시에는 음용가능한 식수가 귀했기 때문에 맥주가 일상적 대용 음료였다고 주장한다.)
- 그런데 질병을 모든 불운한 골짜기와 촌락으로 흐르게 한 진짜 원인은 실제의 길, 수도승들이 식료품 교역에 사용했던 바로 그 길이었다. 예르시니아 페스티스 박테리아, 즉 페스트균이 처음 벼룩에 나타나고, 이 벼룩이 쥐에 나타나고, 이 쥐가 사람 사는 마을에 나타났을 때, 마을과 마을이 소통 없이 고립되어 살던 과거에는 그 마을만 절멸하고 말았다. 하지만 14세기 유럽의 사정은 달라져 있었다. 수사들이 헌신을 다하여 만들어 놓은 실핏줄 같은 교역로로 마을들은 연결되었다. 역병 보균자가 시칠리아에서 스코틀랜드까지 수도원과 마을들에 병을 옮겼다. 아마도 맥주를 시장에 싣고 다니던 수사들 자신이 보균자였을 것이다. 식품 교역이 맥주와 치즈와 함께 전염병을 퍼트렸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탈리아 본토로 병균이 들어온 것과 이로 인하여 유럽 인구의 20~45퍼센트가 몰살당한 원인이 실은 올바르지 않은 세관 검역에 있었다는 것이다. 악명 높은 제노바 배가 시칠리아에 처음 역병을 전할 당시 출항지는 크림 반도였다. 그들은 그곳에서 동유럽의 노예와 실크로드의 향신료를 교역해왔다. 결국 식품 교역이 동방 향신료에 매료된 유럽인의 입맛을 따라 후추 열매와 함께 혹사병(페스트)을 들여왔다는 얘기다.
- 어떤 폐해는 희미하게 드러났는데, 지표에서 멀리 떨어진 하늘에서 강우 패턴이 바뀐 것이 그중 하나였다. 전에 숲은 안개비의 형태로 구름을 드리웠다. 촉촉한 안개가 섬을 노상 감싸고 있음으로 인해서 습기가 머물게 만드는 특이한 강우의 형태였다. 예를 들어, 카나리아 제도의 한 섬에는 한 그루의 '비 나무'가 있었는데, 여기에 모여 응축한 물이 그 아래에서 흘러 물웅덩이 두 개를 사시사철 채울 만큼 넉넉했다고 한다. 16세기 영국의 항해 모험가 리처드 호킨스 경 Sir Richard Hawkins은 이러한 나무의 효과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계곡에서는 노상 막대한 양의 수분 발산과 증발이 일어난다. 남동향 산의 고도로 인하여 태양이 직접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습기로 바뀌어 계곡의 모든 나무를 이슬로 적신다. 그 나무의 꼭대기부터 홀러내린 물방울은 잎사귀 위에 이슬로 맺히고, 다시 이 땅의 자연이 물을 담기 위하여 만든 둥그런 돌우물로 떨어진다."
- 루쿨루스 Lucius Licinius Lucullus (기원건 1세기의 로마 강군으로 유능했으나 아주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다-옮긴이)의 취향을 가진 로마인들에게 있어 세계 지배의 진정한 특권은 댐슨 자두(유럽 남동부와 서아시아 원산의 자두-옮긴이)와 단지에 담은 겨울잠쥐였을 것이다. 페트로니우스 Gaius Petronius Arbiter의 <사티리콘 Satyricon>(서기 1세기 로마 사회를 문학적으로 묘사한 작품-옮긴이)에 나오는 저녁 연회 장면은 고대의 테카당스와 과식 습관을 드러낸 예로 종종 인용된다. 일단, 작은 철제 틀에 달려 있는 "꿀에 절인 양귀비 씨를 뿌린" 겨울잠쥐와 자두와 석류 씨를 곁들인 뜨거운 소시지 요리부터 시작한다. 다음 순서는 공작새 알처럼 생긴 빵 과자와 거위와 숭어, 뜨거운 빵이 나오고, 그리고는 "오동통한 가금류와 암퇘지 젖통, 또 페가수스처럼 몸통에 날개를 붙인 산토끼"를 담은 커다란 접시가 나온다. 연회를 주최한 트리말키오는 잔치 음식의 식재료를 자신의 땅에서 키웠다는 사실을 자랑한다. 모두가 '지역 재배 식품'인 것이다. 하지만 그의 양은 그리스 타렌툼(현재는 이탈리아 남동부의 도시 타란토로 기원전 272년 로마에 항복하기 전까지 그리스의 식민 영토였다- 옮긴이)에서 수입한 숫양들과 교배해 낳은 것이며, 꿀은 아티카(아테네-옮긴이) 꿀벌이 모은 것이며, 버섯은 그가 인도에서 특별히 주문한 종균으로 재배한 것이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국제적 출처의 로마 식사이다.
(리뷰자 주 : 현대 대도시의 식생활과 놀라울 만큼 닮아있다.)
- 페트로니우스는 황궁의 고위 관료(네로 황제의 측근-옮긴이)로, 위 글은 사실 그가 자신의 지인들과 즐거움을 나누기 위해 쓴 소설이었다. 그의 묘사는 물론 허구이다. 그것도 기분 나쁜 허구이다. 하지만 트리말키오의 연회가 절대로 열리지 않았을 지언정, 현실에서도 그만큼 사치스럽고 깜짝 놀랄 만한(그리고 깜짝 놀라도록 의도된) 요리들이 내어졌을 것이다. 현실의 삶을 보자. 고전 시대 내내 대부분의 로마인의 일용한 양식은 구운 빵 같은 심심한 것이었다. 구운 빵, 그들은 정확히 이것을 먹었다.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지중해식 식단'은 파슬리나 로즈마리 같은 허브를 넣어 요리한 신선한 고기와 생선, 파스타, 야채와 마늘, 와인과 올리브 오일이다. 지중해성 기후는 축축한 겨울과 마르고 뜨거운 여름이 특징으로, 곡물과 포도, 올리브 등의 재배에 아주 적합하다. 그러나 초록 풀이 자라는 기후는 아니어서 목축업은 양과 염소 같이 생명력이 강한 가축에 집중된다. 특히 젖소를 키우기란 매우 어렵다. 일반 농작물 중에서는 곡물이 분명 주요 산물이다.
- 이곳을 정도 이상으로 수탈하려한 콘스탄티노플의 황제들은 이집트 농부에게 터무니없는 세금을 부과했다. 그 돈은 궁중과 관청의 돈궤로 들어갔다. 제국의 부와 식량의 약 3분의 1이요, 이집트 생산의 거의 전부를 집어삼킨 것이다. 서기 5세기 무렵이 되자 비잔티움의 세금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된 농부들은 농지를 사막이 되도록 버려두고 도시로 가서 도시 빈민 무리에 합류하거나, (앞서 제1장에 본 기독교 은둔자의 원형 성 안토니우스처럼) 거친 황야로 들어가 굶주리고 방랑하며 하느님을 찾았다.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서기 438년에 농부를 땅에 잡아두려는 노력으로 법률을 포고했다. 이것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식량 폭동을 막기 위한 다급한 조치였고, 중세 농노제의 이른 조짐이었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나기도 전에 두 황제, 아나스타시우스와 유스티니아누스는 급작스러운 홍수로부터 아나톨리아의 마을을 지키기 위한 대형 토목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산은 헐벗고 저지대의 들판은 늪이 되었다는 분명한 신호였다. 식품 교역을 돕기 위하여 과로한 땅이 다시금 필연적인 손상을 입은 것이다.
(리뷰자 주 : 왜 동화에 그토록 자주 늪이 등장하는가에 관한 의문에 다소 답이 되었다.)
-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는 고개를 뒤로 돌려 낙원이 있는 서쪽 방향을 보았다. 서쪽 섬은 저문 해가 쉬는 곳으로, 아일랜드 사람들이 동경하는 티르나노그(켈트 신화 속 영원한 젊음의 땅-옮긴이)였고, 그곳에서 그리스인들은 헤스페리데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맑은 음성을 가진 처녀들-옮긴이)를 찾았다. 낭만주의 영시 중에서도 가장 낭만적이라 꼽는 테니슨의 <율리시스>를 보자. 율리시스(오디세우스-옮긴이)는 구시대의 황혼이 드리우기 전에 엘리시움(영원한 생명을 부여받은 영웅들이 가는 그리스 신화 속 낙원-옮긴이)을 찾아 마지막 필사적인 서쪽 항해를 하기 위하여 오랜 동료들의 "열린 마음과 열린 머리"를 일깨운다.
- 1291년에 제노바 출신의 두 탐험가인 비발디 Vivaldi 형제가 대서양을 도는 마치 거대한 회오리바람을 발견했다. 이것은 적도를 기준으로 그 위에서는 시계방향으로 회전하고 아래에서는 반시계 방향으로 돈다. 그 바람의 정체가 바로 무역풍이다. 바람은 북대서양을 쓸고 내려온 다음에 아프리카 서해안 바다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그렇기에, 유럽에서 미지의 바다로 항해한 비발디 형제는 먼저 남쪽으로 쓸려가 세네갈을 지난 다음에 바깥 바다로 밀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 마데이라 와인의 독특한 풍미는 고약한 세관 검사 때문에 생겨났다고 전해진다. 한 포르투갈 배가 이 섬의 포도주를 가득 싣고 가다가 홍콩만 입구에서 까다로운 세관원과 만났다. 포도주를 바다로 버리라는 명령에 한 선원이 차마 아까웠는지 술을 그냥 마시기 시작했다. 이때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파도에 여러 달 흔들리고 적도의 태양에 구워진 그 포도주의 향이 기대와는 달리 실제로 더 좋아져 있었다. 수출된 마데이라 와인에 특유의 강한 풍미를 준 것은 바로 이 '사우나 처리'였다. 1794년에 판타레앙 페르난데스 Pantaleao Fernandes라는 사람이 포도주의 품질을 더 일관되게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는 적포도주에 주정(알코올)을 첨가한 후 그 혼합물을 커다란 통에 넣어 하루에 섭씨 약 5도씩만 천천히 높이며 가열하여 최종적으로 55도에 도달하게 했다. 이 온도로 석 달을 덥히고 난 후에는 다시 천천히 식혔고, 마지막으로 장기 숙성을 위하여 술을 오크통에 넣어 봉했다. 그 결과 만들어진 이 달달하고 장기 숙성이 가능하며 극단적 온도에서도 사실상 손상을 입지 않는 와인은 큰 인기를 얻어서 유럽의 해양국들 사이에서 '마데이라'라는 말이 '와인'이라는 일반명사와 크게 다르지 않게 되었다. 특히 미국인들이 마데이라를 좋아했다. 왜냐하면 다른 와인처럼 까다롭게 보관할 필요가 없으며, 미국 동부 해안의 습한 여름을 오래 견뎌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 크레타 섬의 미노아 문명 유적인 파이스토스 궁전에서 유럽 최초의 와인 잔 중 하나가 발견되었다. 제작 시기가 기원전 2000년 무렵까지 소급하여 올라가는 이것은 아름답게 채색된 기다란 밑동 받침과 나팔 모양으로 핀 백합의 화려한 장식이 거의 로코코 시대의 솜씨에 버금가는 놀라운 도기 작품이다. 18세기 오스트리아 빈의 어느 선반에 올라가 있었어도 자연스레 어울렸으리라. 이 커다란 포도주 잔을 만든 미노아 인이 아마도 포도주 교역을 행한 최초의 유럽인이었을 것이다.
(리뷰자 주 : 사진을 찾고 싶은데 정확히 나오지 않는다. 일단 킵.)
- 미노아 배가 지중해 동부 바다를 다니며 열심히 실어 나른 상품을 지금도 여전히 마실 수 있다. 크레타 남부의 미르토스 피르고스 유적은 오늘날 이에라페트라 마을의 호텔과 간이 식당들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곳에서 고고학자들은 미노아 포도주 4,000리터 분량(현재의 와인 단위로 12병들이 450 상자)을 저장 가능한 창고를 발굴했다. 실험실에서 분석해 보니 술에는 나무 수지의 흔적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고대인들이 무더운 날씨에 장기간 노출되는 교역 과정에서 포도주가 덜 상하게 하려고 암포라에 수지를 채워 밀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미노아 와인의 맛은 현대의 레치나 와인과 흡사했음이 틀림없다. 레치나 와인은 그리스 레스토랑에서 볼 수 있는 드라이하고 약간 씁쓸한 맛의 와인으로, 최종 발효 단계에서 송진을 첨가하여 특유의 향을 낸다(샴페인이나 셰리와 마찬가지로 레치나 역시 해당 지역만의 고유 특산물로, 유럽 연합 규정에 따라 다른 지역의 와인에는 이 이름을 붙여서 팔 수 없다).
- 미케네 인은 베일에 싸인 자들이다. 그들은 기원전 약 1800년에서 기원전 1100년 사이에 번성했다. 그들이 치른 트로이 전쟁의 전설은 훗날 호메로스의 손에 기록되어 서양 문학의 초석이 되었다. 그들은 또 아르골리드(현재 그리스의 아르골리스 지방-옮긴이) 해안 인근의 도시 티린스와 미케네에 돌덩어리를 쌓아 만든 강건한 건축물을 남겼다. 그 웅대한 모습은 지금도 볼 수 있다. 그리고 돌연 미케네 인들은 사라졌다. 아무도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 미노아 인들이 그 힘과 생동의 정점에서 무너졌던 것과는 달리 미케네 사람들은 더 복잡하지만 전체적으로 다소 밋밋한 종말을 맞이했다. 아이러니하게 보이지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한에서 정리해보자. 미노아 인들의 문화는 조용하고 평온했다. 그들은 곱슬머리 예쁜 젊은이의 나신을 즐겨 그렸으나 전사의 무덤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반대로 미케네 인들은 사자 문장과 전투 마차와 장례 예술을 좋아하는 우락부락한 근육질 문명이었다. 그들은 용맹스런 망자를 묻으며 기꺼이 황금과 무기를 함께 넣어주었다. 미케네 문명은 더 큰 조명을 받으며 역사에서 사라질 자격이 충분했다. 하지만 그들은 정말로 조용히 떠났다. 용의자 중 하나는 도리아 인들이다. 북쪽에서 온 침입자나 이주자였을 그들은 미케네 궁전들이 버려졌을 즈음에 그 주변에서 많은 도자기를 깨뜨렸다(그리고 오래된 궁전의 그림자 아래 정착하여 미래의 스파르타 인과 코린트 인을 낳았을 가능성이 크다). 다른 용의자는 이른바 '바닷사람들'이라는 해적단이다. 무명의 범법자 집단인 그들은 그 무렵 레반트와 키프로스의 상업 마을들을 유린한 후 역사의 기록에 얼룩을 남기고 사라졌다. 마찬가지로 그럴 법한 또 다른 추측은 기후 변화로 장기간 나쁜 날씨가 계속된 나머지 미케네의 농업이 쇠락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요소가 빠짐없이 작용하여 한 사회를 좀먹었다. 문제의 씨앗은 이미 수세기 전부터 심어져 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여전히 생존이 목적인 농부였을 때, 다시 말해서 궁전과 화려한 장식의 포도주 그릇 혹은 교역로의 시대가 오기 한참 전에, 그들은 작은 농장에서 다양한 생명을 키웠다. 어느 가족이나 빵을 만들 밀과 맥주를 담글 보리를 키우려고 애썼다. 젖을 얻기 위하여 염소와 양도 몇 마리 쳤다. 물줄기를 따라 농장들이 들어섰던 한편, 나머지 풍광은 빽빽한 원시의 숲으로 남아 있었다. 청동기 시대 그리스는 어두운 지중해 소나무 숲 사이로 곡물 밭들이 조각 누비처럼 드러난 모습이었다.
- 여러 세기가 지나 섬들과 반도가 붐비게 되자 농부들은 언덕으로 진출했다. 그곳은 한때 도끼와 쟁기를 들이밀기에 곤란할 정도로 척박한 곳이라 잊힌 땅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야금학 분야의 혁신과 가축 노동력을 이용함으로써 숲을 열고 새 땅을 일구고 토양에 비료를 줄 수 있었다. 구릉지에서 물은 물론 귀했다. 그리고 개척민들은 태고의 삼림을 깨끗이 벌목하여 그 땅을 가뭄이나 폭풍에 취약하게 만듦으로써 의도치 않게 생태계를 파괴했다. 귀족들은 (벌채의 보너스로 통나무와 숯의 노다지를 거두며) 언덕의 공유지에 포도주 교역을 위한 포도밭을 만들었고, 토양은 결코 회복되지 못했다.
- 농업이 발명되기 전에 인류는 신선한 고기와 채소를 먹었다. 하지만 농경문화가 자리를 잡으면서 풀의 씨앗, 즉 곡식으로 만든 죽이 주식이 되었다. 고고학자들은 이 과정에서 음식물의 질이 낮아졌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미각의 즐거움은 반감되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새로운 음식이 충치를 유발한다는 것이었다. 치과의사가 없던 시대에 결코 작은 불행이 아니다. 또한, 대부분의 곡물에는 일부 미량 영양소나 다양한 영양소가 부족했다. 예를 들어, 옥수수에는 필수 아미노산이 없다. 기장이나 밀처럼 가루로 빻는 곡물에는 철분이 없다. 쌀은 단백질 공급원으로서는 무용지물이다. 단백질 결핍은 인체의 비타민A 사용 능력을 저해하는데, 이 때문에 많은 아시아 농부들이 시력을 잃었다. 나아가 농업 혁명은 아이들의 발육도 저해했다. 신석기 유적의 미성년 장골을 분석해 보면 농업이 뿌리를 내리던 기간에 그 길이와 골밀도가 감소했음을 알 수 있다. 수렵·채집인의 골격이 정착한 농사꾼의 그것보다 훨씬 더 건장하다. 인류는 산업혁명 시대에 와서야 1만 년 전 조상의 키를 회복했다. 농장 생활의 하소연은 이어진다. 이들은 비좁은 방에서 쾌쾌한 공기를 맡고 살았다. 결핵과 골염 같은 질병은 삶의 일부가 되었다. 농민들은 보통 가축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전염병이 쉽게 퍼졌다. 설상가상으로 고된 농사일은 그들의 관절을 으깨고 허리를 꺾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나쁜 것은 따로 있었다. 수렵·채집인이 한 주 평균 20시간을 일했던 것에 비해, 농부들은 40~60시간이라는 비인간적인 노동을 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농업이 성차별주의를 창안하지는 않았겠지만 이를 제도화한 것은 분명하다. 역사가인 엘리스 볼딩 Elise Boulding은 대부분의 수렵·채집 사회에서 먹을 거리는 사냥보다는 채집을 통해 얻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여자들이 식량을 모아왔다는 뜻이다. 여성은 밥벌이(과일 벌이?)를 함으로써 위상을 높였다. 그리고 가죽 몇 줄이나 부싯돌보다 훨씬 많은 재산을 소유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남의 재물을 빼앗는 싸움을 하기 위한 힘센 남자는 별 소용이 없었다. 싸우는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라 수렵·채집 사회는 유아 살해와 수년에 걸친 모유수유를 통하여 인구를 적절히 줄였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세부 사항을 놓고 논쟁한다. 어쨌든, 농사꾼이 되기 이전의 사람들은 아마도 서로를 죽이거나 억압할 유혹을 거의 느끼지 않는 평등주의적 소집단의 형태로 살았을 것이다.
- 처음 먹은 감자를 기억하는가? 보통은 기억 못 할 것이다. 개구리 뒷다리라면 아마도 기억할 수 있다. 캐비아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감자는 우리가 항상 먹어온, 소금이나 설탕을 찍어 먹는 심심한 음식이다. 지금이야 그렇지만 16세기 유럽인들에게 감자는 매우 이국적인 식재료였다. 프란체스코 카를레티도 감자를 특별히 언급한다. 리마로 가는 길에 그는 "파타타라고 부르는 하얀색 뿌리"를 발견했다. "이것은 잉걸불에 삶거나 구우면 더 맛이 좋다. 그러면 보슬보슬 부서지고 밤보다 기분 좋은 냄새가 난다. 빵 대신 식사로 먹을 수도 있다."
- 구아노는 세상에서 가장 유용한 자연 자원 가운데 하나이며 최고의 비료이다. 식품 교역에서 직접적인 역할은 하지 않지만 식량 생산에 줄곧 조력해 왔다. 19세기에는 구아노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도 벌어졌다(남아메리카 서부 연안의 광물 영유권을 놓고 볼리비아-페루 동맹군과 유럽의 지원을 받은 칠레가 1879년부터 1884년까지 벌인 남미 태평양전쟁을 말함-옮긴이). 농부들은 작물 생산과 토양 고갈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한다. 비료가 균형추의 역할을 한다.
- 물론 우리 몸은 다른 원소들 역시 필요로 한다. 탄소는 탄수화물의 형태로 섭취한다. 사탕수수 밭은 막대한 양의 탄수화물 열량을 생산한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할 수 없다. 사탕수수만 먹고는 건강한 삶을 살 수 없다는 얘기다. 어떤 땅의 수용능력, 그 땅에서 자랄 수 있는 작물의 한계량, 즉 그 땅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그 안에 있는 질소의 양이다. 질소는 잉여 식량과 교역과 인구 성장을 제한하는 병목인 셈이다. 고대 로마 사회는 계속해서 새로운 경작지를 확보함으로써 질소 부족 문제를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은 결국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원래 있던 땅의 기운을 보충하는 대신에 새로운 땅을 계속 소모하는 방식은 마침내 로마 농업의 붕괴를 초래했다. 1920년에 프리츠 하버 Friz Haber라는 독일 화학자도 노벨화학상 수락 연설에서 이 문제를 언급했다.
"식량 작물 재배를 위한 기초가 질소 공급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왔습니다. 하지만 식물이 공기 중에 흔한 질소 원소를 직접 흡수할 수 없음도 알게 되었습니다."
- 대니얼 웹스터가 주위트에게 쓴 허락과 격려의 답장은 페루뿐만이 아니라 영국에게도 보내는 도발의 메시지가 되었다. 대서양 양쪽의 언론이 공격의 불을 뿜었다. 해군 군사 작전이 분명히 뒤따를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사태는 흐지부지되었는데, 리마 주재 각국 외교관들의 공이 컸다. 의회는 뒤로 물러섰다. 웹스터도 그러했다. 불굴의 언변을 지닌 웹스터로서는 드문 패배였다. 그는 훗날 <악마와 대니얼 웹스터 The Devil and Daniel Webster>라는 1930년대 유명한 단편 소설의 모델이 된다. 농부가 악마에게 판 영혼을 되찾아 오는 이 이야기에서 국무장관은 루시퍼와 법정 논쟁을 벌여서 이기는 것으로 묘사된다.
- 프란체스코 카를레티는 필리핀 제도를 좋아했다. 특히 이 지역의 닭을 칭찬했다. 목을 비틀어 죽이고 바로 조리해도 "아주 부드러워서 마치 열흘이나 그전에 잡은 것으로 생각될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바나나와 빵나무 열매(말레이시아 원산의 열대 과일로 말 그대로 과육이 빵 맛이다-옮긴이)에도 역시 감탄했다. 무엇보다 그는 생식기에 피어싱을 하는 필리핀 남자들에게서 가장 큰 인상을 받았다. "이 이야기를 감히 말할 엄두가 안 난다. ... 나도 내 눈으로 직접 본 게 아니라면 거짓말이라고 했을 거다." 카를레티는 그들을 보고 깔깔 웃지 않았다. 혹은 자신의 도덕관을 들먹이지도 않았다. 세상 물정에 밝은 그는 이렇게 말한다. "호기심에서, 그리고 확실히 하기 위해서, 또 내가 말한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약간의 돈을 썼다." 그리고는 필리핀 남자들이 납으로 만든 못 장식으로 '무장'하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한다. 이것은 '앨버트 공'(남성 성기에 하는 피어싱을 일컫는 속칭-옮긴이)에 관한 역사상 최초의 기록이다.
- 그는 나름의 기준과 판단력을 갖춘 사람이었지만 타국의 음식과 문물을 그대로 몰두하여 즐겼다. 새로운 것에 깊은 인상을 받고 감탄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의 판단 기준은 나라마다 다른 것이 분명하다"고 그는 중국에 관해서 쓴다. "우리의 기준이나, 그리스의 기준,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준 다른 나라의 기준이 아니라 그 나라의 기준에 따라야 한다."
- 17세기 향신료 군도의 원주민이나 사파티스타 반도들은 식품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무기를 들었다. 그러나 실패는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이들이 공격한 식품 제국이란 (사회적 환경적 착취를 일삼는 동시에) 유럽 중산층의 주방에 후추를 놓아주고 미국 중산층의 장바구니에 신선한 야채를 넣어주는 체계였다. 향신료 열매를 따는 원주민이나 멕시코의 토착 농민은 도시의 쇼핑객을 흔들 수 없었다. 꼼짝 않는 무거운 그들이 움직여야만 식품 제국은 구렁텅이로 떨어진다. 오직 도시의 대중이 굶주리게 되어야만 단두대는 노래를 부른다. 정치적으로 보자면 문명화된 수많은 도시민이 고대인들처럼 분노를 직접적인 방식으로 폭발시키는 것만큼 무서운 건 없다. 그 일이 1789년 프랑스에서 일어났고(프랑스 대혁명을 뜻함-옮긴이), 1917년 미국에서도 일어났다.
- 1773년 영국에서 가격을 올리려는 밀 상인의 창고를 습격한 일도 같은 맥락이다.
"주석 광부 칠팔백 명이 몰려갔다. 그들은 처음에 곡물 중개인에게 밀 24갤런에 17실링을 불렀으나 팔 수 없다는 말만 들었다. 그들은 즉각 창고를 부수어 열고 그곳에 있던 모든 것을 돈을 지불하지 않고 가져가 버렸다."
- 오늘날의 서민도 여전히 형편없는 빵으로 연명한다. 학자들은 이제 '식품 사막'을 이야기한다. 신선한 시금치는 사라지고 온통 가공 식품만 남은 도시의 가난한 동네를 일컫는 말이다. 산업국가에서 가공되지 않은 신선한 식품은 사치품이다. 고소득 가구는 신선한 고기와 청과물을 사는 데 전체 식료품비의 약 12퍼센트를 쓴다. 신선 식품 취식량은 저소득 가구보다 두 배 많다. 저소득 가구는 식료품비의 오직 7퍼센트 만을 생 닭고기나 순무 같은 건강한 식재료를 사는 데 쓴다. 가난한 동네에서 신선 식품은 더 비싸다(절대 가격과 비례 가격이 모두 다 비싸다). 가게 선반에서 신선 식품을 찾기도 더 어렵다. 상업용지 규제정책(주택지의 교통 혼잡, 소음, 주차문제 등을 예방하기 위하여 상업 시설을 규제하는 도시 정책-옮긴이)과 자가용 차량의 대중화에 가끔 책임이 돌려지기도 한다. 그러나 식용색소 황색 5호와 인산나트륨, 공장 과자가 승리한 대에는 지역의 교육 수준 역시 일조를 했다. 가난한 이들이 거칠고 나쁜 음식을 먹는 게 역사적으로 특이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가난한 그들 자녀의 건강보다 장사꾼의 이윤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면 역사적으로 어김없이 <마르세예즈>(프랑스 대혁명 때의 혁명 진군가. 현재 프랑스의 국가-옮긴이)가 터져 나왔다. 1795년 영국 리즈의 옥수수 시장을 고발하는 탄원서는 "장바닥에서 강냉이가 사라졌지만 돈푼만을 염려하고... 그리하여 빈자들을 매우 성마르게 하는" 농부들을 비난하고 있다.
- 애나 러셀 Anna Russell은 베드퍼드 Bedford 공작 부인이자 빅토리아 여왕의 평생의 친구였다. 그녀는 오후 시간에 잠시 짬을 내서자신의 방에서 작은 케이크나 샌드위치와 함께 홍차를 마시는 고상한 전통을 만들기 시작했다. 막 생겨나고 있던 많은 중산층이 그녀를 따라 했다. 여왕의 수행원이라는 지위도 영향을 미쳤다. 1882년에 이르자 이제 공작부인의 간식은 하나의 의식이 되었다. 오후의 홍차는 인기몰이를 이어갔다. 19세기 예절에 관해 쓴 미국 작가 존 셔우드 부인 Mrs. John Sherwood은 이렇게 설명한다.
- 하지만 그들은 결정을 후회하게 된다. '영광의 회사'는 엄청난 상업적 군사적 힘을 갖고 있는 조직이었다. 거래 교섭이 한 번 실패했다고 해서 중국 부자들에게 흔쾌히 항복할 생각은 없었다. 중국인들이 양모를 거절했기 때문에 회사는 대신에 마약을 주기로 결정했다.
- 1860년에 이르자 교역의 경제 논리는 사라지기 시작했다. 중국이 아편 전쟁에서 패배하자 혼란스러운 국경에 미국과 프랑스의 모험 사업가들이 파고들었다. 미국은 영국이 홍차에 물린 과도한 세금이 발단이 되어 독립까지 한 나라였다. 미국 상인들은 현대적 선박으로 영국 동인도 회사의 배보다 빠르게 항해하여 서방 시장에 홍차를 싼 가격에 공급했다. 동인도 회사는 심지어 승리의 순간에도 남 좋은 일만 시켰던 셈이다. 그들은 마약 사업의 최종 목표, 즉 영국 홍차 시장을 놓치고 있었다. 하지만 얄미운 양키 상인보다 더 고민되는 건 지리학적 문제였다. 차나무는 오직 중국에서만 자랐다. 만약 중국의 구릉 대신 영국 영토의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차를 재배할 수만 있다면, 다시말해 차 생산을 마음대로 통제하게 된다면 골치 아픈 외국인을 걱정할 일도 없을 터였다. 영국 동인도 회사는 아편 전쟁 전에도, 인도 내에서 자국민의 노동력으로 차나무를 재배할 방법을 연구했다. 차 교역에서 중국을 완전히 들어내 버리려는 의도였다.
- 중국 차나무를 실론에 심고 런던 피커딜리 광장에서 홍차를 판매한 세계 교역 체계는 대혼란을 초래했다. 환경 파괴와 사회 붕괴와 그리고 수천만 명의 죽음을 남겼다. 윌리엄 딕비 Willim Digby는 1876년 마드라스 기근을 직접 목도한 동시대인으로 다음과 같이 썼다. "19세기 대영제국이 벌인 이 일을 50년 후 역사학자는 어떻게 평가할까? 인도인 수백만 명의 죽음은 결국 인재였다고 말하지 않을까? 아마도 역사의 커다란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인류 역사의 이러한 대참사가 빅토리아 황금기에 일어났음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시대를 생각하며 윌리엄 제임스 Willam James (미국의 철학자로 '프래그머티즘'이라는 실용주의를 추구했다-옮긴이)의 실용주의를 떠올릴 뿐 거대한 무덤은 잊고 있다. 경제 '발전'이 기후의 변덕과 만나 세상에 치명적 타격을 입혔다. 이 모든 것은 아마도 다시 일어날 일일 것이다.
- 아일랜드에서는 부모의 땅을 모든 아들에게 똑같이 나누어 공평한 방식으로 상속한다. 이것이 아일랜드 문화이며, 그들은 끈끈한 결속력을 갖는다. 아일랜드는 국토가 작은 나라이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일찍 결혼하여 대가족을 이루었고, 토지는 여러 세대를 대물림하는 동안 잘게 쪼개졌다. 한 가족을 먹이기도 힘들 만큼 땅이 줄어든 마당에도 상황은 여전했다. 인구는 17세기 약 200만 명에서 1840년 800만 명으로 급증했다. 새로운 세대는 계속 태어났다. 감자 밭은 곡물 밭에 비해서 두배 많은 입을 먹일 수 있었다. 기근 직전에는 300만 명이 오로지 감자만 먹고 연명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한 가지 작물만을 기르는 것은 결코 현명하지 않다. 나아가 한 가지 품종에만 기댄다면 필히 재앙이 따르는 법이다. 가난한 자들은 십중팔구 룸퍼스 품종의 감자를 먹었다. 비료를 적게 주어도 알이 많이 달리는 수분 많은 감자이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맛이 없고 영양도 빈약했다. 이 감자가 처음 아일랜드에 소개되었을 때에는 "돼지에게나 주어야 할 음식도아닌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물론 다른 감자도 있었다. '블랙'과 '애플' 품종은 맛이 아주 뛰어났다. '컵' 품종은 평범했다.
- 하지만 누가 정말로 생태학적 미묘함을 고려하고 있을까? 볼로그가 노벨상을 받고 10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한 무리의 생태학자들이 연구를 시작했다. 병충해로 인해 생태계 혼란이 일어났을 때 왜 어떤 때에는 지속적 피해를 입지 않는가하면, 다른 때에는 붕괴하고 마는지 그 이유를 알아내기 위한 연구였다. 그들은 그 원인을 캐기 위해 플로리다의 에버글레이즈 습지부터 캐나다 온타리오 북부의 북방침엽수림에 이르는 다양한 장소를 연구했다. 그리고는 생태 붕괴의 재앙이 임박했을 때 나타나는 세 가지 경고 신호를 파악했다. 환경적 죽음을 알아보는 일종의 진단 키트인 것이다. 그것은 명쾌하고 아주 단순한 신호이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첫째, 생태계의 생물량이 너무 많은 상태이다. 풀과 나무로 가득한 장소는 불이 나거나 아니면 사악한 벌레의 관심을 받기 쉽다. 생산성이 덜한 땅은 불에 탈 땔감이 부족하고 벌레도 지루해한다. 푸르른 땅이 거친 땅보다 더 취약하다. 둘째, '연결성'과 관련이 있다. 만약 식물이 마구잡이 덤불 숲에서 엉망진창으로 섞인다면 화재와 벌레는 더 빨리 퍼질 수 있다. 셋째, '단일성'이다. 만약 덤불숲이 양치식물의 단일 품종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이 양치식물을 먹는 벌레는 단지 운이 없는 몇 개 개체가 아니라 숲 전체를 먹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생물다양성이 낮을수록 취약성은 높아진다. 플로리다 대학교의 생태학자인 버즈 홀링 Buzz Holling이 이 세 가지 경고 신호를 명확히 정리했다(그는 뛰어난 학자거니와 기골이 장대한 남자이다. 하지만 목소리는 깜짝 놀랄 만큼 온화하다). 홀링의 생태계 이론에 따르면, "생물량과 연결성이 둘 다 높아져 있지만 다양성은 떨어진 상태에서 생태계는 필연적인 붕괴를 맞는다고 한다." 불씨 한 톨이나 배고픈 귀뚜라미의 울음소리에 무너진다는 것이다.
- 이들 네덜란드인은 남부 독일의 '저지대'(현재의 베네룩스 3국을 일컬음-옮긴이)의 연합주(현재의 네덜란드-옮긴이)의 해군 총독과 나사 우의 마우리츠 백작 Prins Maurits van Nassau (네덜란드의 육해군 총사령관, BBC가 선정한 세계 100대 전략가 중 한 명-옮긴이)의 깃발 아래 항해하는 제일란트(네덜란드 서남부의 주-옮긴이) 사람들로 밝혀졌다. 그들은 무국적의 해적이 아니라 사략선의 선원(전시에 적선을 나포하는 면허를 가진 민간 무장선-옮긴이)이 었다. 사략 허가증을 가진 그들은 포르투갈 배를 공격할 수 있었다.
- <막스 하벨라르>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네덜란드인은 과거 해적질로 해외 제국을 건설했지만 이후 여러 세기가 흐르는 동안 세심한 사회적 양심을 발달시켜 왔다. 그들은 자신의 조국이 누군가를 노예로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했다. 자유의 물결이 암스테르담의 커피숍에 일렁였다. 유럽인들은 커피 잔에 담긴 진정한 쓴맛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대중의 의지는 진심이었다. 그들은 20세기 시작 무렵에 정부가 '윤리 정책'을 제정토록 했다. 그 결과, 적어도 식민지 주민이 제국의 빵 바구니에서 씹을 것 몇 조각은 더 챙기게 되었다. 교육, 은행, 관개수로 같은 하부 구조 투자도 이루어졌다. 경제 개발 계획이 탄생했다. 결과가 어떻든 말이다. 하지만 윤리적 교역을 바라는 처음의 목소리는 용두사미로 끝났다. 식민지 교역 체계 전반이 20세기 초반의 왁자지껄한 혼란 속에서 힘을 잃었다. 국제 식품 제국은 경제 대공황과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버텨낼 수 없었다. '승리의 정원'(제2차 세계대전 중에 정원 등을 일구어 만든, 뜰 안의 야채밭-옮긴이)은 지역 소비 운동의 본보기이다. 사람들은 기습 공격의 긴박한 상황에서 자바 섬 커피 노동자에 대한 죄책감을 잊었다. 식품 교역을 회복시킨 건 1944년 브레턴우즈 교역 협정(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국제금융 질서를 만든 협정. 금 본위제를 폐지하고 미국 달러를 주거래 통화로 삼게 된다)이었다. 이로써 탄생한 새로운 경제 질서는 시장을 향해 마치 맹수처럼 돌진했다. 20세기 후반에는 식품의 국제 거래가 상당히 자유로워졌다. 이것은 다시 세계 경제의 당연한 상식이 되었다. GATT라는 조약이 그 버팀목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국은 브레턴우즈 협정을 근거로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IMF을 만들어낸 데 이어 GATT를 탄생시켰다.
- 세계화 비판자들은 노동력 착취나 환경 파괴 같은 통상적 캐치프레이즈를 부르짖었다. 지구 전체가 플랜테이션화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서양인의 배를 채우는 대가로 땅은 농약과 화학 비료에 절어 불모지로 변한다고 경고했다. 반면에 자유교역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상호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그들의 오래된 주장으로 응수했다. 이 뒤죽박죽 속으로 멕시코 커피 농민과 네덜란드 마케팅 전문가가 새로운 '막스 하벨라르' 상표를 들고 들어왔다. 세계 시장의 문을 두드린 그들은 국가간 열린 식품 교역이라는 우루과이 라운드의 취지에는 동의한 셈이었다. 그러나 우루과이 라운드의 규칙은 좋아하지 않았다. '막스 하벨라르' 커피 동맹은 식품 제국의 오래된 불공정 관행에 대한 대안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로스팅한 커피 원두를 깡통에 넣어 파는 커피 대기업과 경쟁하지 않았다. 대신 어떤 커피 생산자나 제조자도 일정한 사회적 환경적 기준을 맞추기만한다면 사용 가능한 상표를 설립하기로 했다. 이것은 단순한 하나의 상표 그 이상이었다. 커피 맛의 차원을 떠나서 구매자에게 자신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약속해주는 증표일 터였다. 가격은 다소 비싸지만 소비자는 뿌듯한 기분으로 보상받는다. 커피 농부는 세계 시장보다 높은 가격의 판매 대금을 받았다. 수익의 일부는 학교와 병원을 짓고, 또 가난한 농부의 마을에 필요한 여러 가지 시설을 놓는 데 쓰였다. 더구나 공정무역 농부는 현금 선불을 받기 때문에 농사를 지으려면 먼저 농자재를 사기 위해 빚부터 져야 하는 악순환을 해결할 수 있었다. 공정무역 농장은 욕심 많은 도시의 지주나 회계사가 소유한 플랜테이션이 아니라 소규모 가족농원을 의미했다. 간단히 말해서, 공정무역 커피는 생산 농부를 착취하지 않고 그들의 인격을 존중한다는 의미였다. 말 그대로, 무엇보다 '공정'한 상품이었다.
- 지난 20년간 공정무역은 많은 사람을 비참한 가난의 대물림과 임금 노예 상태, 착취에서 자유롭게 해주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식품 제국을 재창조하지는 못했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여전히 경제의 언덕을 올라가고 있다. 정상에 선 다음에는 반대편 비탈을 미끄러져 내려가 사회적-환경적 파멸과 충돌한다. 그 성공의 정점에서 공정무역은 도저히 용인이 안 되는 지경의 여러 삶을 구제해주었다. 하지만 그것의 반복을 막지는 못했다. 결국 공정무역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공정무역은 적어도 많은 사람들에게 식품을 단순히 가격이나 식욕의 관점이 아닌 다른 프리즘을 통해 보도록 해주었다. 이것은 그 자체로 혁명적이다.
- 카슨의 책과 오일쇼크 때문에 초창기 유기농 농부는 주로 화학 약물을 쓰지 않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하지만 유기농법이란 공장에서 만든 질소 비료를 쓰느냐 아니면 소똥 거름을 뿌리느냐의 문제, 항상 그 이상이다. 대중은 유기농을 '지속 가능성', '자연 존중', '다양성', '균형감' 등의 단어로 이해한다. 이것을 다 포괄하는 말은 아마도 '자연적 온전함 Holistic'일 것이다. 유기농은 새로운 융합이 아니다. 1920년대 독일의 급진적 교육 개혁가인 루돌프 슈타이너 Rudolf Steiner는 '생명 농업'의 원칙을 세웠다. 그는 농장이 반드시 "그 자체로 하나의 온전한 유기체여야만 하는데 이것은, ... 자연을 모방하며, 자연 환경과 조화를 이루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 우리는 이 논쟁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산타크루즈 캠퍼스의 사회학자인 E. 멜러니 뒤퓌 E. Melanie Duuis는 미국 농무부가 젖소에 성장 호르몬 투약을 승인하면서부터 유기농 유제품이 시장에 대규모로 풀리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재조합 소 성장 호르몬 recombinant bovine growth hormone', 즉 RBGH는 합성 호르몬이다(원래는 뇌하수체 추출물에서 얻는다). 이것을 젖이 나오는 포유동물에 접종하면 산유 촉진 효과가 있다. RBGH를 쓰는 목적은 젖소의 병이나 충치를 치료하기 위함이 아니다. 전적으로 상업적인 이유 때문이다. 그 우유를 마시는 사람에게도 전혀 이로울 게 없다는 얘기다. 따라서 생화학 농업 대기업인 몬산토가 이 호르몬을 미국의 낙농업계에 공급했을 때 의식 있는 소비자는 거부감을 나타냈다. 이 논쟁을 더 잘 이해해 보자. 유기농 식품을 찾는 소비자는 사실 두 부류이다. 한 그룹은 오늘날 만연한 온갖 농약과 가축 항생제, 화학 첨가물 등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키고 싶어 한다. 다른 한 그룹은 산업적 농업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여기서 나온 먹을거리도 원칙적으로 나쁜 것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유기농 식품을 구매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아마도 이 두 부류 사이의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침내 유기농 식품의 정의를 내린 미국 농무부는지속 가능성을 전체적으로 고려하기보다는 단순히 생산에 투입된 재료의 성격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결과 유기농은 농부가 비료로 무엇을 쓰며, 가축에게 무엇을 먹이며, 해충을 무엇으로 죽이는지의 문제가 되었다. RBGH와 같이 명백하게 비자연적인 성분은 금지되었다(합성 호르몬은 사실상 화학 첨가물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젖소가 사는 곳에 관해서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아서 오로라 유업도 유기농으로 인정되었던 것이다. 미국 정부가 내린 '유기농'의 정의는 결코 '지속 가능성'과같은 것이 아니다. 하지만 루돌프 슈타이너의 정신을 계승한 많은 농부는 유기농과 지속 가능성을 따로 떼어 생각하지 않는다. 슈타이너 주의자들은 오로라 목장과 같은 사육 시설에 반대한다. 갇혀서 곡물 사료를 먹는 가축은 '유기농'이건 뭐건 간에 기존의 것과 같다고 주장한다. 미국 유기농 인증 제도의 문제점은 우리의 건강과 지속가능성, 동물 보호, 기후 변화 등과 관련한 많은 문제에 여전히 의문점을 남기고 있으며, 그 모든 것을 '생산 투입 재료'라는 잘 맞지 않는 잣대로 잰다는 데 있다.
- 또 다른 모순은, 페트로니와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이들이 슬로푸드의 정신이 지속성, 동료애, 민주주의 등에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대중이 통감하는 페트로니 일단의 모습은 송로 버섯에 코를 쿵쿵대는 생태 미식가라는 것이다. 페트리니가 있는 호텔 길 건너에 페리 빌딩이 있다. 고급 식료품 상점과 식당이 가득 들어찬 건물이다. 지갑이 두둑한 캘리포니아 선남선녀는 이곳에서 포포나무 열매, 브롱크스 포도, 고급 소량생산 치즈를 구입한다. '자연' 정육점은 유기농 살라미 소시지를 소리쳐 판다. 풀만 먹여 키운 소고기에서는 실제로 엽록소가 흐른다. 돼지 갈비살은 카네이션 핑크 색깔이다. 유기농 야채 가판대 옆의 칠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슬로푸드 버섯이 한 바구니 30달러!"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오일, 게 튀김, 그리고 현금 인출기의 냄새. 냄새조차 비싸다. 하지만 대부분의 미국인과 저임금을 받는 세계의 나머지 인류에게 있어 '분홍 나무 굴 버섯' 한 근은 꿈같은 얘기다. 이러한 비교에 페트리니는 웃으며 답한다. "슬로푸드 운동이 사회 엘리트만을 위한 것이라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슬로푸드 운동은 에티오피아에도 존재합니다. 리우데자네이루의 빈민촌에도 있지요. 사람들은 우리를 비난하는데, 왜냐하면 모두가 즐거울 권리를 옹호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가난하면 원래 고통스런 삶을 살기 마련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그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슬로푸드 행사에 단 5분 만 있어도 식품이 주는 즐거움의 가치는 분명해진다(바초네 프로슈토 햄 한 조각을 맛보라. 알싸한 밤 향이 일품이다). 이것은 생존을 위한 식량으로서의 중요성을 넘어선다(햄을 먹으면 배고프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마케팅의 힘이다. 슬로푸드는 여기에 능숙하다. 하지만 많은 경제학자(와 영양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음식을 먹는 건 소비의 가장 순수한 형태라고. 우리가 무얼 구입하느냐가 우리의 사회 계급, 우리의 친구, 우리의 신념을 말해준다. 식품처럼 지속적으로 필요한 무언가를 사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를 인식하는 행위이다. 우리가 구입하는 것은 비타민이나 칼로리가 아니다. 아일랜드산 수입 버터 한덩이를 쇼핑카트에 던져 넣음으로써 우리는 특별함을 얻는다. 물론, 슬로푸드는 단순히 값비싼 치즈를 팔기 위한 국제적 음모가 아니다. 이것의 모토는 '맛있음, 깨끗함, 공정함'이다. 슬로푸드는 진지한 운동이다. 산업적 식품 체계와는 달리 지구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깨끗함'이다. '공정함'에 관해서는 슬로푸드 대회의 커피나 초콜릿 부스를 방문하여 포스터에 있는 익숙한 로고(공정무역 인증을 말함-옮긴이)를 참고한다.
- 페트리니의 방법은 실효성이 의심되지만 그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는 세상을 더 낫게 만들 필요가 있다.
- 하지만 새로운 탐식가는 요점을 놓치고 있다. 음식은 패션이 아니다. 음식은 생존이다. 개인이든 문명이든 마찬가지다. 식품을 패션으로 여기는 새로운 습관은 우리가 직면한 절체절명의 위기를 파국으로 치닫게 한다. 식품 체계가 불안하다는 공포는 일축하기 쉽다. 현대인의 마음에는 이미 너무 많은 시한폭탄이 들어차 있기 때문이다. 가령 핵무기, 빙하, 혹은 은행 등의 공포가 우리의 마음을 이미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왜 식료품 비로 5달러를 더 쓰면서 망설여야 하나? 휴대폰 벨소리에도 그만한 돈을 지불하는데 말이다. 슈퍼마켓 선반에 마지막으로 달랑 하나 남은 우유병을 보고 존재론적 공포에 떨기도 전, 우리는 모두 악성 바이러스나 나노 기술 때문에 죽을 운명이다. 진정하자. <데 레코퀴나리아 De re coquinaria>라는 서기 5세기 초 등장한 로마 요리법 책이 있다. 로마 시대 대단한 미식가로 알려진 아피키우스 Marcus Gavius Apicius의 이름을 기념한 책이다(아피키우스는서기 1세기 사람으로 실존 여부가 불확실하다. <데 레코퀴나리아>는 아피키우스가 쓴 책이 아니지만 후대에 이 책의 제목이 아예 <아피키우스>로 바뀌었다-옮긴이). <데 레코퀴나리아>는 미식가의 식생활을 속속들이 들춰낸다. 오늘날 새로운 탐식가의 부엌 선반에 영광되게 꽂혀 있을 법한 일종의 '음식 포르노'인 것이다. 이 책은 서로마 제국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때에 쓰였다. 곧 그 세계는 종말을 고했다.
(리뷰자 주 : epicure의 어원이 아닐까 싶다.)
- 역사의 추는 흔들린다. 식품 문화도, 생산 방법과 유통 과정도, 식품 제국도 변모하고 있다. '로커보어 locavore'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지역에서 생산한 먹을 거리만을 먹는 사람을 뜻한다. 그는 신토불이 미식가다. 로커보어는 원래 기계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이제는 공장에서 사무실을 운영한다. 그들은 앨리스 워터스 Alice Waters 셰프의 본거지인 셰 파니스(샌프란시스코를 대표하는 친환경 식당, 이곳을 중심으로 주변에 수십 개의 친환경 식당이 밀집해 있다-옮긴이) 레스토랑 밖으로 행진해 나가 캘리포니아는 물론, 미국의 모든 고급 레스토랑 메뉴판에 흔적을 남겼다. 이제는 <자가트 서베이>(레스토랑 안내서-옮긴이)에 실릴 만한 레스토랑치고 감히 원산지도 모르는 연어를 내는 곳은 없다. 피자헛에서는 '자연산' 페퍼로니 피자를 판다. 심지어 오바마 대통령의 전속 요리사도 푸드마일과 지속 가능성 문제로 홍역을 치렀다. 미국 행정부 웹 사이트에는 백악관 유기농 텃밭의 지도가 있다(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미국의 친환경주의자와 미식가들은 크게 기뻐했다. 마침내 올바른 음식을 즐길 줄 아는 대통령이 나왔다고 말이다. 앨리스 워터스가 오바마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대통령이 몸소 친환경 식습관의 모범을 보여 달라고 했다. 푸드마일을 줄이고 백악관 텃밭에서 재배한 유기농 채소만을 사용할 것을 요청했다. 오바마는 그녀의 의견에 공감을 표했다. 하지만 부시 대통령의 전속 요리사를 계속 고용하기로 했다. 부시는 햄버거와 핫도그를 좋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미식가들은 크게 실망했다. 하지만 오바마는 부시 대통령의 요리사가 실력이 없어서 핫도그만 만든 건 아니라며 일축했다-옮긴이) 영국에서는 폴 매카트니가 '고기 안 먹는 월요일' 캠페인을 시작했다.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는 G20 정상회담 당시 스타 셰프 제이미 올리버를 고용하여 '친환경 만찬'을 준비했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친환경 실천만으로는 굶주림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우리의 식품 체계는 하나로 묶여 있다. 역사상 유례가 없다. 현대 농업 업계는 브라질의 가뭄을 중국의 손해로, 이를 다시 뉴저지의 빈 쇼핑카트로 바꿔놓을 잠재력이 있다. 완충 장치는 없다.어떤 파라오의 옥수수 창고도 연이은 흉년을 이겨내지는 못한다. 지구의 토착 작물은 기업의 이윤에 밀려 사라지고 있다. 토양을 지지해준 고대의 그물망이 엷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식품 체계는 '담수'와 '냉장'에 중독되어 갈짓자 걸음을 걷는다. 만약 통통한 실험실 작물이 구름 같은 해충 떼에 먹힌다면, 그걸로 끝이다.
(리뷰자 주 : 자가트도 블루리본이나 미슐랭만큼이나 인지도가 있는데, 예전에 현대카드와의 협업이 크게 성공적이진 않았던지 국내에서는 묻혀버린 경향이 있다.)
- 우리의 식품 제국도 어느 정도는 이러한 이상을 받아들였다. 관련 법률에 반영하는 방식으로 활용하고도 있다. 하지만 변화의 진폭은 미약하다. '유기농'과 '자연산'의 법적 기준은 만족스럽지 않다. 슬로푸드가 그 대안이 된다. 식품을 생산하고 구입하고 먹는 것은 정치적 행위이다. 사람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이해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이 전통 돼지고기 요리(슬로푸드 음식인-옮긴이)를 아주 좋아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만약 충분한 숫자의 인구가 슬로푸드의 개념을 받아들여서 본인의 소비 생활에 반영한다면 현대 식품 제국도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속가능한 식품 제국이 존속하기 위한 조건은 첫째, 작고 다양성 있는 농장이 그 대부분을 차지해야 하며 둘째, 식품을 공급받는 소비자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생물지역주의'라고 한다. 하지만 생물지역주의 모델이 60억 명의 인구를 안전하게 먹이기 위해서는, 즉 리스크를 분산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국제 교역망 안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 세계 식품과 지역 식품은 서로의 약점을 상쇄한다. 지역 식품은 에너지를 절약하며 먼 곳에서 일어난 재난에 직접적인 영향을 덜 받게 한다. 세계 식품은 경제적으로 효율적이며 우리의 식탁에 망고와 연어를 올릴 수 있게 한다. 각 지역을 어느 정도 전문화하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국제적 식품 체계는 필요하다. 이를 통해 국제 교역은 토지의 비효율적 사용을 막는다. 왜냐하면 지역에서 효율적으로 기를 수 없는 작물은 멀리서 싸게 구입해 오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세계'와 '지역'의 이러한 조합은 생물지역주의 체계가 제한적으로 안착된 형태라고 하겠다. 이것은 현대 식품 제국을 유지할 수 있는 최선의 희망이다. 하지만 실천이 말보다 어려운 법이다. 생물지역주의가 자리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법제화이다. 시장의 힘은 막강하다. 너무 늦기 전에 단일 경작을 알아서 그만둘 일은 사실상 없다. 생물지역주의가 자리잡기 위해서는 이를 뒷받침해줄 열성적 소비자 계층이 필요하다.
(리뷰자 주 : 이 부분은 다소 모순적이지 않은가 싶다. 현지 식품의 다양성 추구와 효율적인 작물의 선택의 균형점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주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 안토니우스의 이야기에는 영적인 측면 말고도 물질적인 측면이 있다. 젊은 나이에 그는 가족의 대농장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달가운 선물은 아니었을 것이다. 제국 전역에 걸친 토양 고갈은 이집트에서 특히 심했다. 농작물 생산량은 크게 줄었다. 세금은 폭발적으로 늘고, 날씨는 서늘해졌다. 서기 4세기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를 지낸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의 설명에 따르면, 경제적 고통 때문에 종교에 귀의하여 사막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사막에서는 "... 부정부패 ... 혹은 세금징수인"의 희생자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이 주제는 뿌리 깊다. 이집트에는 가혹한 정부를 피해서 도망치는 오랜 전통이 있어온 것 같다. 이집트 콥트 말로 도망을 'anacboresan'이라고 한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사막의 나일 계곡으로 간다는 뜻이다. 고대 이집트 인은 병사나 세금징수인이 달려들면 이렇게 숨어들었다
- 예를 들어, 농업의 '중심'과 '비중심'에 관한 Harlan의 연구는 안데스 문화가 주식으로 볏과식물보다 덩이줄기에 더 의존하기 때문에 독특하다고 설명한다. 비옥한 땅이 부족한 안데스의 산간 도시를 지탱하는 데 오직 감자만이 필요한 열량과 단백질을 공급할 수 있다는 연구가 이러한 사실을 검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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