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C. S. 루이스] 책 읽는 삶

일루젼 2021. 12. 9.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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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C. S. 루이스 / 윤종석

원제 : The Reading Life 

출판 : 두란노서원
출간 : 2021.07.14 


좋았다. 짧으면서도 명쾌한 문장들, 공감과 수치를 오가는 감정들. 

 

정신없는 나날들 속에서 긴 호흡의 책에는 손을 대지 못하고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앞으로 내가 살아갈 삶이 '책 읽는 삶'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은 흔들림이 없다. 무언가를 읽고 있는 시간이 가장 평안하고 나 자신이라고 느껴진다. 참으로 다행히도. 

 

세계를 글자로 인식하는 사람과 이미지로 인식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장단을 따질 일은 아니다. 둘은 충분히 서로의 세계를 오갈 수 있다. 보다 선명하고 섬세하고 구체적으로 이미지를 그릴 수 있는 사람과, 세부 디테일은 희뭉하지만 어떤 글자들로서 정의할 수 있는 사람. 그러나 어떤 끝에서 양자는 서로를 오가야만 한다. 눈을 감고 '하늘'을 그린 뒤, 그것이 '어떤' 하늘인지를 덧붙이기 시작하면 문자의 끝은 이미지가 되고 이미지의 끝은 글자가 된다.

 

제대로 그려내기 위해서는 관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열심히 보고, 느끼고, 이해하고, 그리는 삶. 

내게는 그 중심에 글자가 있다.

 

읽을 수 있어서 감사한 시간들.  

 


   

- "문학적 경험은 개성이라는 특권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그 개성이 입은 상처를 치유해 준다. ... 훌륭한 문학을 읽으면 나는 천의 인물이 되면서도 여전히 나로 남아 있다."

 

- 다수의 사람들은 무엇이든 절대 두 번 읽지 않는다. 독서하지 않는 사람의 확실한 징표는 "이미 읽은 책이다"라는 말을 결론 삼아 한 번 읽은 책은 다시 읽지 않겠노라 거부하는 것이다. 

 

- 이런 독자에게는 굳이 환기시킬 필요도 없겠지만, 책을 연령대별로 깔끔하게 구분하는 것은 출판사에서나 중시할 뿐이지 진정한 독서가의 습관과는 크게 관계가 없다. 나이 들어서 유치하게 아이들 책을 읽는다고 비난받는 사람일수록 어렸을 때는 어른들 책을 읽는다고 비난받았다. 명실상부한 독서가 치고 (인생) 시간표에 맞춰 책을 읽는 사람은 없다. 

 

- 문학 수업을 하는 참 목표는 학생에게 모든 "시대와 실존"까지는 몰라도 그중 태반을 "유람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편협한 관점을 벗어 버리게 하는 것이다. 좋은 (당연히 서로 견해가 다른) 교사들에게 배워서, 과거가 여태 살아 있는 유일한 곳(문학)에서 과거를 접한 학생(어린 학생까지도 포함해서)은 자신이 사는 한정된 시대와 계급에서 벗어나 더 공적인 세상으로 들어간다. 헤겔이 말한 "정신현상학"을 제대로 배우면서 다양한 인간상에 눈뜨는 것이다. 

 

- "역사"만으로는 그것이 안 된다. 역사는 과거를 주로 이차 문헌으로 공부하기 때문이다. 몇 년씩 "역사를 공부하고도" 결국 앵글로 색슨족 백작이나 기사, 18세기 지방의 대지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심정이었는지는 모를 수도 있다. 겉모습만 봐서는 알 수 없는 진면목은 거의 문학에서만 볼 수 있다. 

 

- 어떤 주제든 고서는 전문가만 읽고 아마추어는 현대 서적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이상한 생각이 널리 퍼져 있다. 영문학 교수로 일하면서 늘 보면 플라톤 철학을 배우겠다는 학생도 정작 도서관 서가에서 번역판으로라도 플라톤의 <향연 Symposium>을 뽑아 읽을 생각은 하지 않는다. 대신 그보다 열 배나 더 두껍고 따분한 현대 서적을 읽는데, 온통 무슨 무슨 "주의 ism"와 그 사조가 끼친 영향을 기술한 내용일 뿐 실제로 플라톤이 한 말은 가뭄에 콩 나듯이 나온다. 겸손에서 비롯된 과오라 그나마 정감이 간다. 학생은 위대한 철학자를 직접 대면하기가 내심 두렵다. 자신이 부족해서 플라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알고 보면 현대 해설자보다 이 위인을 이해하기 훨씬 더 쉽다. 괜히 위대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무지한 학생도 플라톤의 말을 다는 몰라도 거의 대부분 알아들을 수 있지만, 플라톤 철학을 다룬 일부 현대 서적은 누구도 이해하기 힘들다. 그래서 내가 늘 교수로서 각별히 후학에게 신신당부하는 말이 있다. 직접 지식이 간접 지식보다 습득 가치가 높을뿐더러 대개 습득하기도 훨씬 쉽고 즐겁다는 것이다. 

 

- 내 생각에 이는 어리석은 관행이다. 쉰 살 때도 똑같이 (종종 훨씬 더)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 아니라면 열 살 때도 아예 읽을 가치가 없다. 물론 정보 도서는 예외다. 허구의 작품 가운데 나이가 들었다고 그만 읽어야 할 책이라면 애초에 읽지 않는 편이 낫다. 성인이 되었어도 크렘 드 망트(민트 향의 독한 술)에는 심드렁할지 모르나, 아무리 성인이라 해도 빵과 버터와 꿀은 여전히 즐기게 마련이다. 

 

- 먹는 즐거움과 책 읽는 즐거움은 훌륭하게 잘 섞인다. 물론 모든 책이 다 먹으면서 읽기에 적합하지는 않다. 밥상머리에서 시를 읽는다면 시에 대한 모독일 수도 있다. 이럴 때는 아무 데나 펴서 읽어도 되는 두서없고 수다스러운 책이 좋다. 

 

- 나도 늘 책을 아끼기는 했다. 형과 나는 사다리를 결딴 내고도 태연할 수 있었지만, 책에 손때를 묻히거나 귀퉁이를 접는 것만은 못내 부끄럽게 여겼다. 그런데 아서는 책을 아끼는 정도가 아니라 책이라면 사족을 못 썼다. 머잖아 나도 그렇게 되었다. 지면의 구성, 종이의 감촉과 냄새, 지질에 따라 다르던 책장 넘기는 소리 등이 감각적 즐거움이 되었다. 그 바람에 커크 패트릭 선생님의 결점이 들통났다. 선생님은 새로 산 내 고전 책을 정원 일을 하느라 지저분해진 손에 쥐고는, 단단한 책 표지를 갈라지는 소리가 날 때까지 뒤로 꺾고 페이지마다 흔적을 남겼다. 그때마다 나는 몸서리를 쳐야 했다. 

 

- 하지만 책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대번 알 수 있다. 자신이 이전과는 달라져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 조금씩 몇 번이고 거듭 읽어야겠지만, 이 책이 머잖아 필독서 반열에 들리라는 것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톨킨의 《반지의 제왕>

 

- 아름다움이 책이나 음악 속에 있는 줄 알고 거기에 의지하면 돌아오는 것은 배반이다. 아름다움은 그 속에 있지 않고 이를 통해 올뿐이다. 결국 책이나 음악을 통해 오는 것은 그리움이다. 

 

- 문학의 (전부는 아니고) 대부분은 즐거움을 위해 가볍게 읽도록 되어 있다. 느긋하게 앉아서 어떤 의미에서 "재미로" 읽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문학을 본래 용도대로 쓰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우리의 모든 비평도 순전히 허사가 되고 만다. 어떤 물건이든 본래 용도대로 쓰지 않고는 평가할 수 없는 법이다. 버터 바르는 칼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그것으로 통나무를 톱질할 수 있는지를 보아서는 안 된다. 순전히 즐거움을 주기 위한 작품에서 비평가들이 업무 시간에서 얻는 것과 같은 성과를 얻으려는 바람에, 실제로 형편없는 비평들이 양산된다. 

 

- 좋은 신발은 신고 있어도 느껴지지 않는 신발이다. 마찬가지로 좋은 독서는 시력이나 조명이나 인쇄 상태나 맞춤법 따위를 의식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을 때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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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가운데 평생 진정한 독서가로 살아온 이들은 여간해서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의 존재가 엄청나게 확장된 것은 작가들 덕분이다. 좀체 책을 읽지 않는 친구와 대화해 보면 이 점이 제대로 와닿는다. 그는 아주 선량하고 사리 분별력도 꽤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사는 세계는 너무 작다. 우리라면 아마 그 속에서 숨이 막힐 것이다. 자기 자신으로만 만족하다가 결국 자아 이하가 된 사람은 감옥에 갇혀 있는 것과 같다. 

 

- "당신네도 똑같다"라는 것이 나의 대응이다. "성인"을 단순 명사 대신 칭송의 말로 취급하는 비평가들은 자신도 성인일 수 없다. 어서 어른이 되고 싶고, 성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성인을 우러러보며, 유치해 보일까 봐 부끄러워하는 것, 이것은 다 유년기와 사춘기의 특징이다. 정도만 적당하다면 유년기와 사춘기 때는 그것이 건강한 증상이다. 아이들은 어서 커서 어른이 되고 싶게 마련이다. 그러나 성인이 되려는 집착이 중년이나 하다못해 성년을 막 지나고 나서도 지속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미성숙하다는 증거다. 나는 열 살 때는 동화를 몰래 읽었고, 만일 그러다 들켰다면 창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50세가 된 지금은 동화를 드러내 놓고 읽는다. 나는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는데, 유치함에 대한 두려움과 훌쩍 어른이 되고 싶던 마음도 함께 버렸다. 

 

- 아이든 어른이든 동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마 이유가 똑같을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무도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내가 가장 자주 생각하는 두 가지 이론은 각각 톨킨과 카를 융의 이론이다. 톨킨에 따르면 우리가 동화에 마음이 끌리는 이유는, 인간이란 "창조할" 때(시쳇말로 '삶에 관해 논평할' 때가 아니라 가능한 한 자신만의 작은 세계를 지어낼 때) 본연의 역할을 최대한 다하기 때문이다. 톨킨이 보기에 그것이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구실 가운데 하나다 보니, 이를 성공리에 수행할 때마다 우리는 자연히 즐거워진다. 융은 동화가 집단 무의식 속에 살고 있는 각종 "원형"을 해방시킨다고 보았다. 좋은 동화를 읽을 때 우리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옛 격언에 순종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감히 내 이론을 보태 보자면(사실 앞의 둘처럼 전체는 아니고 그중 한 요소지만) 동화 속에는 인간은 아닌데 어느 정도 인간처럼 행동하는 존재가 등장한다. 바로 거인과 난쟁이와 말하는 동물이다. 이들은 적어도 하나의 훌륭한 상징으로써 (힘과 아름다움의 출처가 그 밖에도 많을 수 있으니), 소설의 서사로는 아직 가닿을 수 없는 독자들에게 등장인물의 심리와 성격을 소설의 서사보다 더 간단하면서도 정확하게 전달해 준다. 

 

- 하지만 결국 지독히도 불만스러운 현실 세계로 돌아와야 한다. 이 모두가 자존심을 부추기는 아첨이기 때문이다. 쾌감은 자신을 선망의 대상으로 상상하는 데서 온다. 반면에 전자인 동화 나라를 꿈꾸는 동경은 사뭇 다르다. 동화 나라를 동경하는 것과 열한 명의 영웅(교내 최고의 축구나 크리켓 팀)에 뽑히기를 동경하는 것은 의미가 다르다. 

 

- 그래서 앞서 말했듯이 동경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정신을 단련하는 수양이고, 또 하나는 병이다. 

 

- 현대 서적을 선호하고 고서를 꺼리는 오류가 가장 성행하는 분야는 신학이다. 기독교 평신도들이 모여 공부하는 소그룹을 들여다보면, 거의 단언컨대 누가나 바울이나 어거스틴이나 토마스 아퀴나스나 리처드 후커나 조셉 버틀러가 아니라 니콜라이 베르댜예프나 자크 마리탱이나 라인홀드 니버나 도로시 세이어즈나 심지어 C. S. 루이스를 공부한다. 

 

- 내가 보기에 본말이 전도되었다. 물론 나도 작가인지라 일반 독자들이 요즘 책들도 읽기를 바란다. 하지만 신서나 고서 가운데 하나만 읽어야 한다면 고서를 권하고 싶다. 이렇게 조언하는 이유는 바로 그가 아마추어라서 요즘 시대 책들만 읽을 때의 위험을 막아 내기가 전문가보다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신서는 아직 시험 단계며, 이는 아마추어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고금의 기독교 사상 전체를 기준으로 검증 과정이 필요하며, (대개 저자조차 생각하지 못한) 이면에 숨은 의미까지 모두 밝혀져야 한다. 대개 신서는 상당수의 다른 현대 서적들의 내용을 모르고는 다 이해할 수 없다. 

 

- 게다가 좋은 이야기에 나오는 기현상은 비록 허구이긴 하지만, 내러티브에 감동을 더하려고 그저 아무렇게나 갖다 붙인 것은 아니다. 얼마 전 어느 저녁 식사 자리에서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무심코 이런 말을 했다. 밤에 독일어로 그림 형제가 쓴 동화를 읽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왔는데, 굳이 사전을 찾아보지 않았다고 말이다. 이어 내가 "그러면 대개 아주 재미있거든요. 왕자가 노파한테 받아서 나중에 숲 속에서 잃어버린 그것이 무엇인지를 추측해 보는 것이 말입니다."라고 덧붙이자, 그에게서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동화라서 더 어렵겠어요. 동화는 모든 것이 자의적이니까 그 물건도 아무거나 될 수 있잖아요." 아! 그의 생각은 심각하게 틀렸다. 동화의 논리도 사실주의 소설만큼이나 엄중하다. 다만 서로 다를 뿐이다. 

 

- 그것은 늘 나와 함께 있었던 것 같았고, 고개를 재빨리 돌리면 손에 잡힐 듯도 싶었다. 처음으로 느꼈지만, 그것이 손에 닿지 않는 이유는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무언가를 그만 두지 못해서였다. 내가 그만두고 내려놓고 물러날 수만 있다면, 그것이 내게로 올 것이었다. 

 

- 출판계에서는 <호빗>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는 사뭇 다르지만 교수의 작품 활동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둘 다 몇 손가락 안에 들 만한 부류의 책이라는 것인데, 그 부류에 속하는 책들은 우리를 각각의 세계로 불러들인다는 점 외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 그 세계는 우리가 어쩌다 거기로 들어서기 전에도 쭉 있었던 것 같으나, 일단 적합한 독자가 발견하고 나면 없어서는 안 될 곳이 된다. 루이스 캐럴의 작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에드윈 애벗의 <플랫랜드 Flatland>, 조지 맥도널드의 <판타스테스 Phantastes>, 케네스 그레이엄의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등에 그런 세계가 나온다. 

 

- 책 전체가 그토록 원숙하고 따뜻하면서 그 나름의 현실인 것은, 바로 뛰어난 학식과 깊은 성찰에서 나온 산물이어서라는 것이다. 예측이란 위험한 일이지만 <호빗>은 고전의 반열에 들 것이다. 

- <반지의 제왕 The Lord of the Rings> 시리즈 서평  중
이 책은 마른하늘에 번쩍이는 번개와도 같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순수의 노래 Songs of Innocence>가 그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 시대에서 단연 독보적이고 예측을 불허하는 책이다. 

 

- 이런 작품은 일찍이 없었다. 나오미 미치슨은 "맬러리의 작품만큼이나 진지하게 대해야 할 책이다."라고 썼다. 그런데 토머스 맬러리의 <아서왕의 죽음 Morte d'Arthur>에서 느껴지는 불가항력의 현실감은 여러 세기를 거치는 동안 여러 사람이 수고하며 점점 더 불어넣은 것이고, 그것이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하지만 톨킨 교수의 전혀 새로운 위업은 이에 필적할 만한 현실감을 아무런 도움도 없이 창출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세상에 나온 책 가운데 저자가 말했던 "준-창조 sub-creation"라는 것을 이토록 극명히 보여 주는 사례는 아마 없을 것이다.

 

- 현실의 풍경이 식상하거든 거울에 비추어 보라. 빵이나 금이나 말이나 사과나 길을 신화에 담글 때, 우리는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재발견한다. 이 이야기가 우리 마음속에 머물러 있는 한 현실은 더 현실다워진다. 이 책은 빵이나 사과만 아니라 선과 악, 우리의 끝없는 위험과 고뇌와 기쁨까지도 그렇게 다시 보게 해 준다. 신화에 담그면 더 똑똑히 보인다. 이 방법이 아니라면 그는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이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 하지만 다른 여행법과 다른 독서법도 있다. 현지 음식을 먹고 그 지방에서 생산한 포도주를 마실 수 있다. 외국생활을 체험할 수 있다. 그곳을 관광객 눈에 비치는 타국이 아니라 현지 주민의 나라로 볼 수 있다. 돌아올 때는 생각과 느낌이 이전과 달라져 있을 수 있다. 과거의 문학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특정한 시가 당신의 현대적인 감성에 남기는 첫인상을 뛰어넘을 수 있다. 시 외적인 요소를 공부하고, 다른 시들과 비교하고, 지나간 그 시대에 몰입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 시 속에 다시 들어가 좀 더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의 시선으로 볼 수 있다. 알고 보면 당신이 고어에서 연상한 의미는 잘못되었고, 실제 함의는 당신의 짐작과 달랐을 수 있다. 당신에게 이상해 보이는 부분이 그때는 평범했고, 평범해 보이는 부분이 그때는 이상했을 수 있다. ... 내가 글을 쓰는 목적은 최대한 이러한 독서를 돕기 위해서다. 물론 역사를 알려는 동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시를 좋아하기 이전에 인간이며, 인간이다 보니 자연히 호기심이 있다. 즐기는 것 못지않게 알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설령 즐거움만이 나의 목적이라 해도, 여전히 이 방법을 고수해야 한다. 이를 통해 더 새롭고 참신한 즐거움(내 시대에는 결코 만나지 못할 것들, 다양한 감정 상태와 정취, 진짜 과거로 가는 여행)에 이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6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나는 더 넓은 세계를 보고픈 갈망조차 없을 만큼 나 자신이나 이 시대에 매료되지는 않았다. 해외로 떠나는 휴가를 관광객으로서만 보내는 일은 내게는 유럽을 낭비하는 것으로 보인다. 얻을 것이 그보다 많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지난 시대의 문학에 우리 자신의 얼굴만 비추어보고 만다면 그것은 과거를 낭비하는 것 아닐까?

 

- 여기 충격적 사실이 있다. 진실하지 않고는 글을 잘 쓰기가 치명적으로 어려울 수 있지만, 진실성 자체는 누구에게도 좋은 작법을 가르친 적이 없다. 진실성은 문학적 재능이 아니라 도덕적 덕목이다. 진실성에 대한 보상을 바랄 곳은 내세이지 문단이 아니다. 

 

- 어떤 생각이든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며, 문체는 주어진 생각을 가장 아름다운 단어와 운율로 표현하는 예술이지.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그때에 이른 아침에 나타나는 별자리들이 음악 활동에 동참하며 천사의 영들이 큰 소리로 만족감을 중언했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 그런데 킹 제임스 IV 성경에는 이 똑같은 생각을 이렇게 표현해 놓았네. "그때에 새벽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말도 안 되는 표현을 이렇듯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워지게 하는 것이 바로 문체의 위력이라네. 

 

- 문학의 (전부는 아니고) 대부분은 즐거움을 위해 가볍게 읽도록 되어 있다. 느긋하게 앉아서 어떤 의미에서 "재미로" 읽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문학을 본래 용도대로 쓰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우리의 모든 비평도 순전히 허사가 되고 만다. 어떤 물건이든 본래 용도대로 쓰지 않고는 평가할 수 없는 법이다. 버터 바르는 칼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그것으로 통나무를 톱질할 수 있는지를 보아서는 안 된다. 순전히 즐거움을 주기 위한 작품에서 비평가들이 업무 시간에서 얻는 것과 같은 성과를 얻으려는 바람에, 실제로 형편없는 비평들이 양산된다. 

 

- 좋은 신발은 신고 있어도 느껴지지 않는 신발이다. 마찬가지로 좋은 독서는 시력이나 조명이나 인쇄 상태나 맞춤법 따위를 의식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을 때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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