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이탈로 칼비노] 존재하지 않는 기사

일루젼 2022. 1. 6.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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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탈로 칼비노 / 이현경

원제 : Il cavaliere inesistente
출판 : 민음사 
출간 : 2010.11.26 


<반쪼가리 자작>, <나무 위의 남작>, <존재하지 않는 기사>는 '우리들의 선조' 3부작이다. 발표 순서대로라면 가장 마지막인 작품이지만, 작품 내 시간으로 본다면 제일 앞에 위치하게 될 <존재하지 않는 기사>. 

 

더렵혀지지 않는 순수이성 '아질울포'와 

자신이 누구인지 인식하기도 어려운 본능과 감각의 '구르둘루', 

그리고 아직은 젊고 어설프지만 그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나가는 '랭보'가 있다.

 

'아질울포'를 동경하지만 '랭보'를 선택하게 되는 이상 '브라다만테',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함으로써 존재를 정의하려 하였으나 그것이 실존을 넘어설 수는 없음을 깨닫게 되는 '토리스먼드'.

 

토리스먼드가 상징하는 인습과 규범, 윤리의 세계는 현실 속에 순수한 이상으로 존재하기 어렵다. 그가 그것의 너울을 쫓으면 쫓을 수록 아질울포의 존재가 위기를 맞게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세계가 물질의 한계 속에 유지되고 있음을 받아들이는 순간 아질울포는 그 존재를 허락받는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저자는 소설 속에 이 소설을 저술하고 있는 또다른 화자를 내세워 자유를 추구한다. 그리고 그 인물은 일종의 복선이자 반전이 되는데, 그가 다시 극중 인물이 되어 이야기 속으로 뛰어듬으로써 소설은 일종의 융합을 보여준다. 이런 지점은 랭보가 아질울포의 갑주를 자신의 것으로 체화시키는 장면에서도, 브라다만테와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하나로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는 서사와 은유, 알레고리는 이 환상소설의 맛을 더욱 깊어지게 만든다. 

투구 가리개를 들어올리면 안이 텅 비어있는 기사라니. 모 만화 속 주인공이 떠오른다. 존재하지 않는 것의 존재함.

 


 

- "이봐, 자네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용장! 왜 자네의 얼굴을 짐에게 보여 주지 않는 건가?"
카롤루스 대제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폐하."
투구 턱받이에서 분명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 이런! 우리 군대에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 기사까지 있군 어디 좀 보세."
황제가 소리쳤다.
아질울포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다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손을 움직여 얼굴 보호대를 들어 올렸다. 무지갯빛 깃털이 달린 투구와 이어진 백색 갑옷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런, 이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군. 그런데 자네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군대 생활을 할 수 있나?"
카롤루스 대제가 말했다.
"의지의 힘으로 했습니다." 아질울포가 말했다.
"그리고 이 전쟁의 성스러운 동기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 그래! 말 잘했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런 자세라면 자신의 의무를 다할 수 있겠지.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존재하니까 자네에겐 빈틈이 없군!"

 

- 그러고는 신중히, 그러나 정확하게 그들의 과실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어떤 장교는 어쩔 수 없이 당직을 서야 했고 다른 장교는 보초를 섰고 또 나머지는 순찰을 돌러 가야 했다. 아질울포의 말은 언제나 옳았기 때문에 용장들은 아질울포가 지적한 일을 피할 수 없었지만 불쾌감을 숨기지는 않았다. 셀림피아 치테리오레와 페츠의 기사이자 코르벤트라즈와 수라의 구일디베르니 가문과 기타 가문 출신인 아질울포 에모 베르트란디노는 분명, 모범적인 군인이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그의 존재를 불쾌히 여겼다. 

 

- 단 한 사람, 아질울포만은 이런 휴식을 즐길 수 없었다. 정확하게 연결된 흰 갑옷 속에서 그는 기독교 진영에서 가장 잘 정리되고 안락한 천막으로 손꼽히는 자기 천막에 몸을 눕혀 보며 계속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막 잠에 빠져들어 가는 사람의 생각처럼 느긋하고 별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분명하고 정확했다. 그는 한쪽 팔꿈치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이미 윤이 나게 잘 닦아 놓은 검을 다시 닦는다든지 갑옷 연결 부분에 기름을 바른다든지, 무슨 일이든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오래 계속하지는 못했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창과 방패를 들고 천막 밖으로 나와 버렸다. 하얗게 드리운 그의 그림자가 야영장을 지나갔다. 둥근 천막에서는 잠든 사람들의 무거운 숨소리로 작은 음악회라도 열린 것 같았다. 존재하는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힘에 의해 눈을 감고 스스로의 의식을 놓아 버리고 시간의 진공 속으로 잠겨 들었다가 얼마 후 잠들기 전과 똑같이 깨어나서 삶의 끈들을 다시 엮어 나가는 건지 아질울포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존재하는 사람들이 지닌 잠잘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아질울포의 질투는 마치 상상도 할 수 없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투처럼 막연했다. 천막 가장자리 여기저기 삐죽삐죽 튀어나온 맨발들과 하늘을 향해 쳐든 엄지발가락을 보고 그는 충격을 받았고 몹시 동요했다. 잠에 빠진 군대는 육체의 왕국이었다. 포도주 냄새와 전투에서 흘린 땀 냄새를 발산하며 아담의 노쇠한 육체들이 누워 있는 곳이었다. 한편 천막 입구에는 분해된 갑옷들이 놓여 있었는데 아침이면 하인과 노예들이 그 갑옷을 윤내고 제 모양대로 갖춰 놓을 것이다. 아질울포는 주의 깊게, 하지만 신경질적으로, 그리고 거만하게 걸어갔다. 사람들의 육체를 보면 아질울포는 거의 질투에 가까운 불쾌감을 맛보기도 했고 또 자존심과 오만한 우월성에 상처를 입은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지금 여기에는 이름난 많은 동료들과 영광스러운 용장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인가? 그들이 지닌 계급과 이름의 증인이며 그들이 치른 전투의 증인이며 능력과 가치의 증인인 갑옷이 이제 빈 껍질로, 빈 철조각으로 변해 여기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저쪽에서 코를 골며 잠잔다. 그들의 얼굴은 베개에 짓눌렸고 벌어진 입에서는 침이 한 줄 흘러내린다. 아질울포는 그렇지 않다. 그를 조각으로 분리할 수도 없고 사지를 잘게 나눌 수도 없다. 그는 낮이나 밤, 그 어떤 순간에도, 이런저런 날 기독교 군대의 영광을 위해 이런저런 무훈을 세웠고 카롤루스 대제의 군대에서 이런저런 부대를 지휘했던 셀림피아 치테리오레와 페츠의 기사로, 코르벤트라츠와 수라의 구일디베르니 가문과 기타 가문 출신인 아질울포 에모 베르트란디노로 존재했다. 그는 전 진영을 통틀어 가장 아름답고 하얀 갑옷을 가졌는데 이 갑옷은 그에게서 분리될 수 없었다.  

 

- "뭐라 말할 수 없는 미친 녀석이지요. 존재하기는 하지만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일 뿐입니다."
"오, 재미있는 일이야! 여기 있는 이 백성은 존재하지만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모르고 저기 있는 나의 용장은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지만 존재하지 않는군. 좋은 짝이 되겠어, 틀림없어!"

 

- 아질울포는 시체를 끌고 가면서 생각한다.

 

'오, 죽은 자여, 너는 내가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되지 않을 시체로구나. 다시 말하면 넌 시체로 존재하는 거지, 그러니까 바로 이 때문에 가끔씩 우울한 순간이면 놀랍게도 난 존재하는 인간들을 질투한다. 굉장해! 난 특권을 지녔다고 나 자신에게 말할 수 있어. 육체가 없이도 살 수 있고 모든 일을 할 수 있으니까. 물론 내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일들이지. 난 존재하는 사람들보다 수많은 일들을 훨씬 더 잘할 수 있어. 그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조잡함이나 부주의함이나 지리멸렬함 같은 결함 없이, 악취를 풍기는 일 없이 말이야. 존재하는 사람들은 어떤 특별한 흔적을 남길 수 있지만 나는 결코 그럴 수 없는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존재하는 사람들의 비밀이 바로 여기, 이 자루 같은 배 속에 있다면, 고맙지만 난 그 배 없이 살겠어. 여기저기 찢긴 알몸의 육체들로 뒤덮인 이 계곡은 그래도 아수라장 같은 인간 세상보다는 덜 끔찍하군.'

구르둘루는 시체를 끌고 가면서 생각한다.

'시체야, 넌 내 방귀보다 훨씬 더 고약한 방귀를 뀌었겠지. 왜 모두들 너를 불쌍하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네게 부족한 게 뭐가 있어? 처음에는 네가 네 몸을 움직였지만 이제는 네 몸에서 자라는 이 구더기들이 너 대신 움직이잖아. 예전엔 네 손톱과 머리카락들이 자랐지. 이제 네 몸에서 물이 흘러나와 거름이 되어 풀밭의 풀들이 햇볕을 받으며 점점 더 잘 자랄 수 있게 해 줄 거야. 넌 풀이 되고 풀을 먹은 젖소의 우유가 되고 우유를 마실 어린아이의 피가 될 수 있어. 봐, 나보다 훨씬 더 멋지게 살 수 있지, 시체야?'

랭보는 시체를 끌고 가면서 생각한다.

'오, 망자여. 내게 발목을 잡혀 끌려가는 당신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발목을 맡기고 끌려가기 위해 달리고 또 달려 여기에 이른 것 같습니다. 부릅뜬 당신의 눈과 바위에 부딪혀 뒤틀린 당신의 머리가 놓인 곳에서 바라본 이 광기, 나를 몰아치는 이 광기와, 전투와 사랑에 대한 갈망은 대체 무엇입니까? 난 그것을 생각합니다. 망자여, 당신 때문에 난 이런 것을 생각합니다. 그런다고 뭐가 변하겠습니까? 아무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우리들에게나 죽은 당신들에게나 무덤에 가기 전의 이 하루하루가 존재할 뿐입니다. 그날들을 낭비하지 말라고, 내가 존재한다는 것,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조금도 헛되이 생각하지 말라고 그런 날들이 내게 주어졌을 겁니다. 프랑스군을 위해 뛰어난 행동을 하라고, 자존심이 강한 브라다만테를 가슴에 안고 또 그녀에게 안기라고 그런 날들이 주어졌을 겁니다. 망자여, 당신 생애가 그다지 불행하지 않았길 바랍니다. 어쨌든 당신의 주사위는 던져졌습니다. 내 주사위는 아직도 요술 주머니 속에서 소용돌이칩니다. 망자여, 난 당신의 평화보다는 나의 불안을 사랑합니다.'
 

- "그도 역시 조립품일 뿐이야. 다른 사람보다 더 나쁘지."
"너 대체 무슨 말 하는 거니, 조립품이라니? 그의 행동은 모두 진실해."
"천만에! 모두 꾸며 낸 거야... 그는 존재하지 않아. 그가 하는 행동도 말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아..."
"하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불리한 그런 조건에서 어떻게 그런 지위를 맡아 군대에 복무할 수 있었던 거지? 오로지 그의 이름만으로?"
토리스먼드는 잠깐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름들도 모두 가짜야. 내가 마음만 먹으면 모두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어. 두 발을 디딜 땅도 남겨 놓지 않고 말이야."

"그때 무사할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이니?"
"아마 그럴걸. 하지만 여기 말고 다른 곳에는 있어."
"누군데? 어디 있는데?"
"성배 기사단이야."

"그런데 그 기사들이 어디 있지?"
"스코틀랜드의 숲 속에."
"넌 그 기사들을 봤니?"
"아니."
"그런데 어떻게 그들에 대해서 알지?"
"그냥 알아."
그들은 입을 다물었다. 개구리 울음소리만 들려왔다.  

 

-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표면적으로는 아무 변화도 없는, 이렇게 텅 빈 페이지에서 모든 것은 움직인다. 결국 모든 게 울퉁불퉁한 이 세상의 표면에서 움직이지만 세상을 전혀 변화시키지 않듯이. 지금 내가 글을 쓰는 이 종이처럼 동일한 물질이 세상에 확장되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확장은 여러 형태와 밀도 그리고 다양한 농담의 색깔로 수축되고 응축되지만 그래도 편평한 표면 위에 덧칠해진 모습으로, 또 털이나 깃털투성이 덩어리, 혹은 거북이 껍질처럼 마디투성이 덩어리로도 형상화될 수 있다. 그리고 그와 같은 털 덩어리, 깃털 덩어리, 마디 덩어리들은 종종 움직이는 듯 보이기도 한다. 혹은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균일한 물질들이 주변으로 확장될 때 다양한 특성들이 부여되면서 그들의 관계에 변화가 생기기도 한다. 여기 이 한가운데서 분명하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아질울포 뿐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나는 그의 말이나 갑옷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불안을 느끼고 초조해하며 지금 말을 타고 여행하는 갑옷 속에 들어 있는 단 하나뿐인 그 무엇을 이야기하려 한다. 그의 주변에 서 있는 소나무 가지에서 솔방울들이 떨어지고 작은 냇물이 돌멩이 사이로 흐르고 그 냇물에서는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나비 유충들이 나뭇잎을 갉아먹고 거북이들이 딱딱한 배로 땅 위를 기어간다. 하지만 그것은 환영 같은 움직임일 뿐이며 돌고 도는 바다의 파도처럼 영원히 순환할 뿐이다. 그리고 이런 파도 속에서, 사물이라는 양탄자의 포로이며 그 역시 솔방울, 물고기, 유충, 자갈, 나뭇잎 들에 뒤덮여 버린, 세상이라는 껍데기에 단순한 혹으로 붙어 있는 구르둘루가 돌고 또 돈다.
 
-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저기 단풍나무 잎사귀 보이지? 그 잎사귀에 이슬방울이 맺혀 있다. 넌 여기 움직이지 말고 서서 그 이슬방울만 쳐다보며 너 자신을 그 이슬방울과 동일시해라. 그리고 그 이슬을 통해 세상의 모든 일을 잊어라. 너 자신을 잊어버리고 성배의 무한한 힘속에 너 자신이 스며들어 갈 때까지 그렇게 서 있어라."
그러더니 그는 토리스먼드를 그곳에 세워 놓고 떠났다. 토리스먼드는 이슬방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자신의 일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는 나뭇잎 위에 거미 한 마리가 내려앉는 것을 보았다. 거미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그는 다시 이슬방울을 쳐다보았다. 발이 저려 한쪽 발을 움직였다. 아얏! 그는 지겨웠다. 주위 숲 속에서는 입을 딱 벌리고 눈을 크게 뜬 채, 데리고 다니는 백조들의 부드러운 깃털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걷는 기사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팔을 벌리고 목쉰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조금 달려 나가기도 했다. 토리스먼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다시 근처에 나타난 그 나이 든 기사에게 물었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왜 저러는 겁니까?"
"무아의 상태에 빠진 거다. 너처럼 그렇게 주의가 산만하고 호기심을 버리지 못한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경지야. 저 형제들은 드디어 모든 사물과 완전히 하나가 된 거야." 노인이 말했다.
"그러면 저기 있는 다른 사람들은요?"
젊은이가 물었다. 어떤 기사들이 가볍게 떨듯이 몸을 흔들면서 걸어가다가 하품을 했다.
"아직 중간 단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초심자는 자신이 태양과 별들과 하나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 전에 가까이 있는 사물들이 자기 안에 들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을 아주 강렬하게 느낀다. 이런 현상은 특히 젊은이들에게 많이 일어나는데 분명한 효과를 나타낸다. 네가 본 우리 형제들은 흐르는 시냇물, 살랑이는 나뭇가지들, 땅에서 자라는 버섯들로부터 부드럽고 기분 좋은 자극을 얻는다."
"그런데 그렇게 오래 있으면 지치지 않나요?"
"그들은 서서히 최고 단계에 도달하는데 그 단계에서 기사들은 아주 가까이 있는 사물의 진동에 사로잡히는 게 아니라 천상의 거대한 호흡을 느끼기 때문에 천천히 감각들에서 분리된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나요?" 
"소수에게만 일어난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단 한 분, 선택받으신 분인 성배의 왕에게만 가장 완벽한 형태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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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랭보는 소나무 밑에서 아질울포를 찾아냈다. 아질울포는 땅바닥에 앉아 땅에 떨어진 작은 솔방울들을 일정한 모양으로 늘어놓아 이등변 삼각형을 만드는 중이었다. 이렇게 동이 틀 무렵이면 아질울포는, 사물들을 세어 보고 기하학적인 형태로 배열하며 산술 문제를 푸는 등, 정확성을 훈련하는 일에 몰두할 필요를 느꼈다. 지금은 사물들이 한밤 내내 자신들을 따라다녔던 짙은 어둠에서 벗어나 차츰차츰 자기 색깔들을 찾기는 하지만 그와 동시에 주변에 무리를 만드는 어슴푸레한 빛을 받으며 불확실한 림보 같은 어둠을 가로지르기도 하는 그런 시간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별로 믿지 않는 시간이기도 했다. 아질울포, 그는 언제나 눈앞에 있는 사물들을 자신의 긴장된 의지와 대립되는 단단한 벽으로 느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에만 그는 자기 자신을 분명하게 의식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 만약 주위 세상이 불분명하고 애매모호하게 흩어져 버린다면 아질울포 역시 그 부드러운 어슴푸레함 속에 잠기는 기분이 들 것이고, 텅 빈 갑옷에서 분명한 생각이나 재빠른 결정, 고집을 더 이상 드러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럴 때면 그는 몸이 좋지 않았다. 바로 정신을 잃을 것 같은 순간들이었다. 가끔씩 그는 분해되지 않기 위해 극단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그럴 경우 그는 나뭇잎, 돌, 창, 솔방울 같이 자기 앞에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세기 시작했다. 아니면 그런 것들을 한 줄로 늘어놓거나 네모나 피라미드 형태로 배열했다. 그렇게 정확한 일에 몰두함으로써 그는 불쾌함을 극복하고 불만족스러움과 불안, 혼돈을 이겨내고 평상시의 명쾌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 "저 사내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녔고 기독교 군대나 이교도 군대를 모두 쫓아다녔는데 그때마다 다른 이름을 얻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구르둘루라고 부르기도 하고 구디-우스프, 벤-바우스프, 벤-이스탄불 또는 페스탄불이나 베르틴줄, 마르틴봉, 또는 오모봉, 오모베스티아나 계곡의 미개인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잔 파치아소 또는 피에르 파치우고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어떤 외딴 농장에서는 사람들마다 모두 다른 이름으로 저 사내를 부른 일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다가 저는 저 사내의 이름이 어디에서든 계절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이름이든 그에게 달라붙어 있지 않고 흘러가 버린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어떻게 부르든 그에게는 별 차이가 없는 겁니다. 폐하께서 저 사내를 부르시면 저 사내는 아마 폐하께서 염소를 부르신다고 생각할 겁니다. 폐하께서 '치즈'나 '시냇물'이라고 말씀하시면 저 사내는 '저 여기 있어요.' 하고 대답할 겁니다."  

 

- 랭보는 이런 광경을 보고 너무나 당황해서 머리가 어지러울지경이었다. 하지만 혐오를 느끼기보다는 여기 이 앞에서 죽 때문에 앞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 저 남자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더 많이 생겨났다. 그러니까 세상은 모든 것을 분해해 버리고 다른 모든 것들을 뒤덮어 버리는, 형태도 없는 거대한 죽일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죽이 되고 싶지 않아요, 도와주세요!' 랭보가 막 이렇게 소리를 치려고 하다가 이런 속물스러운 광경과는 멀리 떨어져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무감각하게 팔짱을 끼고 자기 옆에 서 있는 아질울포를 보았다. 랭보는 아질울포가 자신의 불안을 결코 이해해 줄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얀 갑옷의 기사를 볼 때 전해져 오던 고뇌는 구르둘루를 보면서 느끼는 정반대의 새로운 고뇌와 균형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랭보는 자신의 균형을 유지하고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왜 저 사람에게 전부 죽이 아니라고 말해 주지 않는 거죠? 왜 이 사라반드를 멈추지 않는 겁니까?"
그는 목소리에 동요를 나타내지 않으면서 아질울포에게 말할 수 있었다.
"그것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방법은 정확한 임무를 부여하는 거다."

 

- "제 아버지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악마란 말인가?"
"아닙니다. 폐하."
토리스먼드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러면 대체 누구란 말이냐?"
토리스먼드가 연회장 한가운데로 나와 무릎을 꿇고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성배 기사단입니다."
연회장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떤 용장은 성호를 긋기도 했다.
"저희 어머니는 대담한 소녀였습니다."
토리스먼드가 설명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언제나 성 근처 숲 속으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어느 날 깊은 숲 속까지 들어갔다가 거기서 성배 기사단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속세에서 멀리 떨어져 정신을 단련하기 위한 야영을 하고 있었답니다. 어린 소녀는 전사들과 어울려 놀기 시작했고 그날부터 가족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그 야영지에 가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천진난만한 놀이 때문에 어머니는 곧 임신을 하고 말았습니다."
카롤루스 대제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성배 기사단의 기사들은 모두 순결 서원을 한 사람들이다. 그 누구도 너를 자식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을 거야."
"저도 그런 건 전혀 원치 않습니다." 

 

- "빨리 준비해 줘, 난 떠날 거야. 떠날 거라고. 단 일 분도 여기 있을 수 없어. 그가 떠나가 버렸어. 이 군대를 통틀어 어떤 의미를 지닌 사람이라곤 그밖에 없었어. 내 인생과 내 전투에 의미를 줄 수 있는 단 한 사람이었다고. 그런데 이제 이 군대에는 술주정뱅이와 사나운 사람들밖에 남지 않았어.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지. 침대와 싸움터를 왔다 갔다 하는 쳇바퀴 같은 생활만 되풀이될 거야. 신비한 기하학을 알고 질서와, 그 질서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규칙을 아는 사람은 그 사람뿐이야." 

      

- 이 종이 위에 브라다만테나 랭보, 혹은 우울한 토리스먼드의 질주를 그려 내기란 얼마나 힘든가! 마치 종이 뒤에서 핀으로 누르면 앞편에 생기는 흔적처럼 그렇게 아주 약하게 균일한 표면을 스쳐 지나가게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가벼운 스침과 긴장은 언제나 세상 사건들을 가득 담고 그에 젖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될 때 의미와 아름다움과 고통과 진정한 마찰과 움직임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하얀 종이에서 용장들이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을 읽게 하려고, 종이를 이렇게 잘게 나누고 그 위에 계곡과 골짜기들을 만들어 내고, 주름살이나 찰과상 하나까지 다 적어 넣기 시작한다면 어떻게 이야기를 계속 진행해 나갈 수 있겠는가? 프랑스의 온화한 어떤 지방과 자부심 강한 브르타뉴, 검은 파도가 넘실거리는 영국 운하, 그 위의 고지대 스코틀랜드, 그 아래의 험준한 피레네 산맥, 그리고 아직도 이교도들의 손에 있는 스페인과 뱀들의 어머니인 아프리카 지방들을 종이에 그린다면 내 이야기를 펼치는 데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화살과 작은 십자가와 숫자들을 이용해서 여러 주인공들의 행보를 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벌써 굴곡이 몇 번 있기는 했지만 나는 그래도 빠른 직선 하나로 아질울포를 영국에 상륙할 수 있게 했고 십오 년 전 소프로니아가 은둔했던 수녀원으로 곧장 가게 했다.

 

- "숲 속에 기사들이 살고 있나요? 어떤 옷을 입고 있나요?"
"하얀 망토를 두르고 양쪽에 하얀 백조 날개가 달린 황금색 투구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경건한 사람들인가요?"
"예, 신자들이니까 경건하기도 하겠지요. 돈 같은 것은 한 푼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돈 때문에 손을 더럽히는 일은 분명 없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 요구하는 게 많고 우리는 그 요구에 복종해야 합니다! ..." 
 

- 풀밭 한가운데로 흐르는 조용한 시냇물 위로 백조 떼들이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토리스먼드는 그 백조 떼들을 따라 시냇가를 걸었다. 나뭇가지들 사이로 아르페지오가 울려 나왔다. 나뭇가지들이 차츰차츰 적어지면서 사람이 나타났다. 하얀색 날개들이 장식된 투구를 쓴 전사였는데 검과 함께 작은 하프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 하프로 가끔씩 이런 가락을 연주했다.
"플링! 플링! 플링!"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토리스먼드에게서 시선을 돌리지는 않았으나 그냥 토리스먼드를 쳐다보기만 할 뿐 그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계속 토리스먼드를 눈으로 좇는 것같이 보이기도 했다. 나무 몸통과 관목들이 그들을 갈라놓자 그 사람은 자신이 연주하던 아르페지오로 토리스먼드를 이끌어 길을 다시 찾게 해 주었다.
"플링! 플링! 플링!"
토리스먼드는 그에게 말을 걸고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조용히 그리고 압도당한 듯이 그를 따라갔다. 그들은 나무 사이에 난 공터로 나갔다. 여기저기에 칼을 찬 전사들이 있었다. 그들은 황금빛 갑옷을 입고 길고 하얀 망토를 걸치고 시선은 허공을 향한 채 각자 서로 다른 방향으로 몸을 돌리고 꼼짝하지 않았다. 한 전사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서 백조에게 밀알을 먹이로 주었다. 

 

- "네 바람이 이루어졌다."
카롤루스 대제가 말했다.
"이제 네가 싸울 시간이다. 네가 입은 갑옷을 욕되게 하지 마라. 아질울포는 성격은 좀 까다로웠지만 훌륭한 군인이었다!"
프랑스 군대는 침입자들에 대항했고 사라센들의 전선을 뚫고 들어갔다. 젊은 랭보가 제일 먼저 전선으로 달려들었다. 랭보는 맹렬히 싸웠다. 공격을 하고 방어를 했다. 공격하다가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 많은 회교도들이 땅에 죽어 나자빠졌다. 랭보는 셀 수도 없이 창을 휘둘러 그만큼 많은 회교도들을 차례차례 찔렀다. 이미 침략자들 무리는 후퇴를 해서 정박 중인 범선 주변으로 몰려갔다. 땅에 쓰러져 브르타뉴의 회색빛 흙을 피로 붉게 물들인 무어인들을 제외한 나머지 패배자들은 프랑스 군대의 추적을 받으며 닻을 올렸다.

 

- 랭보는 무사히 승리를 거두고 전쟁터에서 나왔다. 하지만 흠집 하나 없이 순백색이던 아질울포의 갑옷은 이제 흙투성이에, 적들의 피가 여기저기 묻어 있었고 우그러지고 긁히고 칼에 베인 곳도 있었다. 투구에 달린 장식 깃털은 반쯤 빠져 달아났고 투구는 찌그러졌으며 한가운데 신비한 문장이 그려진 방패는 칠이 다 벗어져 버렸다. 이제 젊은이는 이 갑옷이 자신, 루시용의 랭보의 갑옷같이 느껴졌다. 처음 이 갑옷을 입었을 때 느꼈던 거북함은 멀리 사라져 버렸다. 이제 갑옷은 그의 몸에 꼭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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