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이성진
출판 : 하모니북
출간 : 2019.09.25
<오늘도 한껏 무용하게>를 읽고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찾아 읽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더 마음에 든다. <오늘도 한껏 무용하게>는 훨씬 더 다듬어진 문장과 눈에 흐르는 표현이 많았지만, 이런 날것의 느낌은 강하지 않았다. 곱게 정제된 베이킹의 느낌에 가까웠다.
'도시공학'이라는 전공에 관해 호기심이 생긴다. 건축도, 사회학도 아닌 듯한 이 전공은 도시를 계획하고 설계하고 유지-운영되도록 관리하는 공부라는 듯한데,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의 방향성을 설계한다는 것이 무척 흥미롭다. 무수히 많은 순간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결정들을 내리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공부가 아닐까 싶다. 물론 그 안에 있는 '인간'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건 기본일 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살아본 도시들을 크게 세 파트로 나누어 살펴보고 있지만, 깊게 들어가기 보다는 그 도시에서 태어난 저자의 단상들을 정리했다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저자의 개성적인 시각이 매력적이었다.
즐겁게 읽었다.
- 현수막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슬로건과는 달리 어디에도 그냥 '살기 좋은 도시'는 없었다. 상황과 조건에 따른, '나랑 잘 맞는 도시'가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도시와 사람이 똑같지는 않은 것이,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랬지만 도시는 얼마든지 바꿔나갈 수 있었다. 내가 체코로 교환학생을 간다고 했을 때 엄마는 사람 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기라고 했다. 그러나 그 말이 반년 동안 살아 본 유럽에 딱 맞지는 않았다.
- 우리와는 다른 가치관과 사고방식으로 살아온 유럽인들은 그들에게 알맞은 도시를 만들어냈고, 도시는 다시 그들의 삶의 방식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실로 거대한 순환이었다. 그걸 본 나는, 우리가 도시를 바꾸고 도시가 다시 우리를 변화시키는 거대한 순환에 미미하게나마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
- 누구에게나 어떤 것을 깊이 파고든다는 것은 일종의 부담감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나의 경우는 전공을 설명하는 것이 그렇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적어도 자기가 배우는 게 무엇인지를 처음 만난 사람에게 간단히 설명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아직 졸업할 준비가 안 됐다고 생각한다. 사전에 적혀있는 대로 정해진 답안을 달달 외웠냐는 게 아니라 전공에 대한 자신만의 관념, 철학 등을 가졌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 그런 의미에서 내 전공인 도시를 한번 맘 편하게 설명해보려 한다. 하고 싶은 말? 사실 넘쳐난다. 도시라는 건 대체 무엇이며 어떤 배경 속에서 생겨났고 그것의 역사와 생태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까지 설파하려면 아마 책을 따로 하나 내야 할 테다. (물론 독립출판에 소장용으로, 그 누구도 돈 주고 사서 읽으려 하지 않을 테니까.) 아무튼, 그런 도시를 딱 한 마디로 말해 보자면, '다양성'이라 할 수 있겠다.
- 누군가는 인정하기 싫겠지만, 지금 우리가 있는 도시, 이 나라는 하늘에서 누가 덜컥 만들어 준 게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손으로 직접 만들었죠. '헬조선'에 사는 우리는 어쩌면 지옥 체질에 맞는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이 지옥이 싫으시다면야, 바꾸어야지요. 지옥 체질인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을 뜯어고치든지, 아님. 지옥을 나름 살 만한 곳이라 인정하든지. 어느 쪽을 선택하는 당신의 자유입니다만... 당신이 바라는 모든 것이 좋기만 한 '무릉도원'은 단언컨대 저 어디에도 없습니다.
- 읽는 내내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던 <행복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심지어 서은국 교수는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라 여겨졌던 행복마저도 생존과 번식에 필요한 일개 스위치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책에서 흥미로웠던 게 여럿 있는데, 그중 인간이 타인과의 관계를 맺으면서 얻는 안정감과 행복이 실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효과적인 유인책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꽤 설득력 있었다.
- 목적지까지 한 번에 쉬지 않고 걸어가겠다는 건 애당초 과한 욕심이었다. 내 체력이나 끈기, 뚝심을 곰곰이 따져봐도 나는 '중간에 쉬어야 다시 갈 수 있는 사람'이 맞았다.
-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 순전히 나만의 노력은 아닐 수 있다는 것. 어쩌면 내가 운칠(運七)의 축복을 받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걸 인정하는 사람만이 진심으로 겸손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 처음엔 내 쪽에 문제가 있나 싶어 스스로 바뀌려고 해 봤고, 나중엔 저쪽이 문제구나 싶어 거리를 두기도 해 봤다. 다만, 내가 바뀌자니 이 성격으로 다른 동료들과는 별문제 없이 잘 지냈었고, 저 사람과 상종하지 말자니 그가 본디부터 심성이 악한 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었을 뿐이야.' 이렇게 덮어두니 내 속만 편하구나 싶지만, 세상이 나랑 잘 맞는 사람으로만 가득하기를 바라는 것 또한 어찌 보면 욕심이었다.
- 맥주와 꼴레뇨의 나라 체코. 비록 프라하는 아니지만, 유럽 감성 가득한 도시에 적을 둔 적이 있었다. 내가 살았던 그 도시, 오스트라바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자면, 우선 물가가 매우 저렴했다.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유럽풍의 도시치고는 그랬다. 이것 말고 또 하나 꼽으라면 단연 접근성이 좋았다고 말하고 싶다. 중부 유럽에 자리하고 있어 인접한 나라만 해도 네 개(독일, 오스트리아, 폴란드, 슬로바키아)나 되니, 주말에 다른 나라를 가볍게 놀러 가기엔 이보다 좋을 수가 없었다.
- 요즘 세대의 청년들이 물질을 소유하는 것보다 무언갈 경험하는 것에 돈을 더 많이 쓴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이것과도 일맥상통하겠다. 소유 추구보다 경험 추구가 가난한 청춘이 생존하는 데에 유리한 처사인 것도 있지만, 여행지에서, 혹은 맛집에서 보낸 시간, 사진, 감성, 느낌들은 오롯이 그 사람만의 것으로 남는다. 바꿔 말해 이왕이면 소유하더라도 남들과 다를 바 없는 판박이는 영 끌리지 않는다는 게 요즘 애들이다.
- 많은 사람이 자기가 개성적이지 못하다며 스스로 자책하는데, 겪어본 바로는 개성 따라 사는 걸 어렵게 생각하면 안 된다. 꼭 남들보다 크게 튀지 않아도 된다. 내가 좋아하는 거 하면서 남 눈치 보지 않는 것. 그리고 이왕이면 나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도움이 되는 방향성. 정말 그거면 충분하다.
- 누구에게나 선을 지키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언제, 어디서든, 동서고금 할 것 없이. 각종 이름의 선 중에서 가장 민감하고 애매한, 그렇기에 더욱 짜릿한 건 역시 남녀 사이의 선이었다. 교환학생의 옷을 입고 갔던 유럽의 홈파티에는 한국인의 정서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장면들이 자주 연출됐다. 프랑스의 파티장에서 마음에 드는 소녀에게 헤드셋을 씌어준다든지, 기차에서 만나 빈에 충동적으로 내린 남녀가 하루를 같이 보낸다는, 그런 로맨틱한 그림들을 일절 생각지 않고 유럽에 왔다면 거짓말일 터였다. 다만 그런 낭만적인 장면들이 날이 지나고 파트너만 바뀐 채로 계속되는 것을 보았다면, 당신 역시 '애당초 이 친구들에게 선이라는 것이 존재는 하는가'라는 의문이 들었을 것이다.
- 반면에 그런 서양인들도 유난히 잘 지키는 선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공적 생활과 사생활 사이의 선이었다. 개인주의의 역사가 오래된 그들은 어디까지가 자신의 영역이고 어디서부터가 공공의 영역인지를 곧잘 구분했다. 또한, 누군가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려 할 때는 거부의 의사 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공·사의 영역을 확실히 나누어 각자의 영역에 맞는 규범으로 생활하였다. 반면 우리의 전통사회는 유교 이념에 따른, 철저하게 공동체 기반의 사회였다. 옆집 가족이 쓰는 숟가락 개수마저 꿰고 있다는 우스갯소리는 그런 사회의 특성을 잘 보여줬다. 부디 헷갈리지 않았으면 한다. 공동체 기반의 공간이 모두 공공의 영역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응답하라 1988>에서도 볼 수 있는 골목골목의 전경들은 단지 사적인 영역이 확대된 것에 불과했다. 어쩌면 그때의 우리에게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사이에 선을 확실히 그으라는 것은 대단히 정 없는 말이었을 것이다.
- 담배 피우러 나간 그녀의 얼굴엔 죄책감이나 미안함 따윈 없었다. 그녀는 노동자라면 마땅히 가질 수 있는 권리를 누린 것이다. 손님들 역시 그걸 보고 크게 개의치 않는 이 나라가 좋다. 정시에 퇴근하는 체코가, 늦은 시간까지 일하는 게 일상화돼있지 않은 체코가 좋다. 식당에서 돈 쓰는 것뿐만 아니라 식당에서 돈 버는 것의 가치도 인정해 주는 이 나라가 좋다. 차보다는 걷는 사람이 우선인, 말만 그럴 뿐 아니라 실제로 보행자 우선인 체코가 좋다.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 앞에 서 있으면 운전자가 당연하다는 듯 먼저 멈춰주고 손 흔들어주는 이 나라가 좋다. 밤에 일하는 곳이 거의 없고 이른 아침부터 일을 시작하는 체코가 좋다. 충분히 잘 수 있는, 또 잘 수밖에 없는 이 나라가 나는 정말 마음에 든다.
- 이제는 꽤 많이 만들어 본 호두 파이기에 머릿속에 재료나 조리법이 다 들어있지만, 처음엔 그저 맨땅에 헤딩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 막막한 가운데에도 길은 있었다. 정보의 홍수 속에 잠긴 나는 적절한 정보를 가려내기만 하면 되었고 각종 블로그나 카페에서 시키는 대로 차근차근 따라 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재료며, 방법이며 천천히 흉내 내다보니 점차 나도 그 복잡한 과정들이 손에 익기 시작했다.
- 언제부턴가 내게 당연은 당연(當然)이 아니게 되었다. 어디에도 이유 없이 그냥 '당연한' 것은 없었다. 세상 모든 당연한 일에는 우리가 알든 모르든, 인지하고 있든 말든 그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주위에 널려있는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상식'을 덮어놓고 믿기 전에 한 번쯤은 들춰 보기로 했다. 요모조모 따져봐도 도저히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그저 허울뿐인 이유라면 따르기를 거부하기로 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 여기, 약자는 보호받아야 한다'라는 굳건한 명제가 하나 있었다. 우리는 당연한 명제를 애써 증명하기보다는 의심 없이 참으로 받아들이고 이용해 먹는 것에 더 익숙했다. 나는 노인이, 여자가, 아이가, 장애인이 당연히 보호받아야 한다는 명제에 의구심을 가졌다. 약자는 약자이기에 그저 보호받아야 한다는, 수긍하기 힘든 말보다 설득력 있는 힘이 나를 이끌어야만 했다.
"장애인의 반대말은 정상인이 아니라 비장애인이에요."
- 자유가 최고의 가치라는 말에 거부감이 느껴질 수도 있다. 흔히들 인간의 생명보다 소중한 게 어딨냐고들 하는데, 다들 알겠지만 그런 건 차고 넘쳤다. 우리 인간은 일신(一身)의 자유를 위해, 집안의 경제적 자유를 위해, 민족의 해방을 위해 얼마나 같은 종족의 목숨을 쉽게 앗아간 존재였는가. 정당방위에 의한 살인, 민족해방운동에 따른 테러, 독립전쟁... 지금껏 우리는 자유라는 안대 뒤에서 쉽게 눈을 가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인정하긴 싫지만, 역사는 되풀이될 거고 인간은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할 테다.
"그들은 우리의 모든 것을 감시해. 거리, 식당, 심지어는 집 안구석까지 도청 장치가 있지. 그거 알아? 우린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도 생체 인식을 해야만 해. 우리가 매 순간 어디 있는지 효과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지."
체코의 한 펍에서 처음 만난 J는 내게 무척이나 고마워했다. 자기 민족을 알아본 친구는 네가 처음이라면서. 난 그저 '신장 위구르'라는 단어의 조합을 언젠가 한 번 교과서에서 본 적이 있으니 알은체를 했을 뿐인데. 부끄럽게도 난 정말 그의 민족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리뷰자 주 : 이번 주는 '신장 위구르'가 계속 눈에 띈다.)
- 그런 그들이 검지의 3kg 남짓한 힘에 눈을 감았다든가 '지클론-B'라는 가스 따위에 더는 숨을 쉴 수 없었다는 게, 내겐 너무도 비현실적이어서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유와 실로 조잡한 재판을 거쳐 끌려간 '죽음의 벽' 앞에서 그들이 생애 마지막으로 쳤을 뒷걸음질이 내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입소 후 3개월 된 아주머니는 어떤 죄목으로 머리에 구멍이 났는지, 퍽 닮은 쌍둥이 동생은 언니가 자기 앞에서 굶어 죽을 때 자신 또한 2주 뒤에 싸늘한 시체가 되어있을 거라는 걸 어렴풋이나마 느꼈는지를, 나는 앞으로도,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리뷰자 주 : 검지의 3kg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다. 방아쇠를 말하는 것인가?)
- 나는 전쟁이 무서운 이유가 사람이 종잇장처럼 쉽게 죽어가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보다 내겐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악의 평범성'이 더 컸다. 평범한 가정의 성실한 가장이나 애국심 가득한 청년을 그토록 잔인한 악마로 탈바꿈시켰다는 것이,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 악행에 무덤덤하게 손가락을 움직이게 했다는 것이, 그게 나는 너무 무서웠다. 그건 대체 어떤 종류의 자유를 위함이었을까. 얼마나 귀중한 자유였길래 그토록 끔찍한 학살을 정당한 임무로 보이게 만들었을까.
- "너는 그냥 지나간 일로 배우면 되겠지.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두어선 안 된다 정도로, 하지만 우리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어. 지금 이 시대에 상상도 안 되는 일들이 내 민족에게 벌어지고 있단 말이야.”
'너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우리도 그와 비슷한 역사를 겪었으니까'라는 나의 말을 그는 못마땅히 여겼다. 어쩌면 그의 말이 백번 맞았다. 이제는 교과서에서나 영화에서 보고 되새겨야만 하는 일제강점기와 달리 중국의 '소수민족 탄압(말살) 정책'은 현재 진행형이다. 노동은 그들을 자유롭게 하지 못했다. 그들은 죽어서야 자유로울 수 있었다. 아우슈비츠의 악몽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고마워, 지금까지 내 얘기를 듣고 함께 슬퍼해 줘서. 그렇지만 운다고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어."
- 내겐 아직도 그 일이 트라우마로 남아있던 걸까? 최근에 읽은 심리상담의 권위자인 김용태 교수가 쓴 <가짜 감정>이란 책엔 이런 내용이 있었다. "자신의 '진짜 감정'을 표현해 버리면 사회적으로 위험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가짜 감정'으로 덮어버린다. 그러고는 자신의 '진짜 감정'을 무의식 속에 꾹꾹 눌러 넣는다. 당장 느껴지지 않으니 완전히 지워져 버렸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의식 속에서 느껴지지 않는다고 감정이 진짜로 사라진 건 아니니 언제든지 터져 나올 수 있다."
- 확실히 내 표면 감정(가짜 감정)은 뺨을 때린 그 아이에 대한 '화'가 맞았다. 하지만 무의식 깊숙이 들어있던 내 심층 감정(진짜 감정)은 사실 '공포'였다. 열세 살 수업 끝난 교실에서 혼자 떨고 있던 아이의 공포 말이다. 사실 해답은 무에타이에도, 당당한 깡다구에도 있지 않았다. 내가 정말 해야 했던 건 복수 따위가 아니었다. 그보단 먼저 뺨을 맞은 아이를 안아줘야 했다. 네 잘못이 아니라고 위로해줘야 했다. 이젠 괜찮다고, 더는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달래줘야만 했다. 조금 늦었지만, 이제라도 내 진짜 모습을 인정하고 돌봐줄 수 있게 해 준 김용태 교수께 이 글을 빌려 감사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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