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이승우] 사랑의 생애

일루젼 2022. 1. 6. 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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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이승우
출판 : 위즈덤하우스 
출간 : 2017.03.02 


 

와. 

'이승우'라는 이름은 여러 번 들어보았지만 그 작품을 읽은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감탄사를 멈출 수가 없다. 거의 모든 형태의 사랑과 그에 관한 관념을 다룬 듯한 느낌. 그 탄생과 죽음까지, 끈질기고도 정확한 관찰과 해부. <사랑의 생애>라는 제목이 너무나도 적확하다.  

 

작가는 단상들을 모은 글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개연성으로 이어지는 '사랑의 생애'에 대한 깊고 날카로운 고찰은 그 자체로 완결성 있는 소설이 된다. 이는 아가(雅歌)다. 

 

잠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최근 독서가 의무처럼 느껴졌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의 성취감이 읽는 즐거움을 압도하고 있었다. 읽어나가야 할 책들은 끝이 없는데, 읽고 싶은 책들도 끝이 없었다. 해서 당분간은 읽어야 할 것 같은 책보다는 읽고 싶은 책을 읽기로 했고, 덕분인지 몰라도 신년 들어 읽는 책들은 대부분 즐겁다. 읽는 동안 시간을 잊는 경우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사랑의 생애>는 정말 두근거리며 읽었다. 뭐랄까, 감히 표현하자면, '나의 언어'로 말하는 글인 것처럼 읽어나갔다. 갸우뚱하거나 잠시 읽기를 멈추고 생각하며 곱씹을 필요가 없이, 그저 감탄과 즐거움 속에서 '그렇지, 그렇지'라고 끄덕이며 읽어나가고 있자니 정말 행복했다. 읽는 동안 절로 미소가 새어 나오는, 이런 기쁨을 잠시간 잊고 있었다. 

 

어떤 책들을 읽을 것인가- 어느 정도 균형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필요하겠지만, 내가 더이상 즐겁지 않다고 생각되는 지점에서는 쉬어가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 이승우. 좀 더 많이 읽고 싶다. 

 

사족) 준호와 선희의 마주침이 인상 깊다. 그 장면의 위치를 고려할 때 이는 사랑의 형태가 반드시 하나이지는 않음을 의미하는 것 같기도 하다. 변화하는 듯 변함없었던 존재와 가장 많은 변화를 거친 존재의 마주함. 

 


-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이다. 사랑은 누군가에게 홀려서 사랑하기로 작정한 사람의 내부에서 생을 시작한다. 어떤 사람은 사랑이 마치 물이나 수령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니면 누군가 파놓은 함정이라도 되는 것처럼, 난 사랑에 빠졌어, 라고 말한다. 사랑이 사람이 빠지거나 잠길 수 있는 것인 양 물화시켜 말하는 이런 수사는 사랑의 불가항력적 성격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무의식적인 저항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딘가에 빠진 사람은 무력하다는 인식이 이 문장의 바탕에 자리하고 있다.     

 

- 숙주는 자기 몸 안으로 기생체가 들어올 때는 물론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순간까지 어떤 주체적인 역할도 하지 않거나 못한다. 숙주는 기생체가 욕망하고 주문하는 것을 욕망하고 주문한다. 자기 욕망이고 자기 주문인 것처럼 욕망하고 주문한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전에는 하지 않거나 할 거라고 상상할 수 없었던 말과 행동을 사랑의 숙주가 된 다음에 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세상에 떠도는 말대로, 사랑하면 용감해지거나 너그러워지거나 치사해진다. 유치해지거나 우울해지거나 의젓해진다. 어떤 식으로든 어떤 변화인가가 생긴다. 몸 안에 사랑이 살기 시작한 이상 아무 변화도 생기지 않는 경우는 없다. 그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다른 사람과 다를 뿐 아니라 사랑하기 전의 자기와도 같지 않다. 같을 수 없다. 사랑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당신이 사랑할 만한 사람인가 아닌가, 사랑해도 되는 사람인가 아닌가는, 사랑의 초기에 반드시 찾아오는 피할 수 없는 질문이지만, 연연해할 일은 아니다. 숙주로서의 조건이 있기는 하지만, 그 조건을 자격으로 간주하는 것은 착각이다. 그 조건이 기생체를 불렀다고 단정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믿음은 없다. 어떤 경우에도 숙주가 기생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사랑할 만한 자격을 갖춰서가 아니라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올 때 당신은 불가피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자격을 갖추고 있어서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와서 당신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사랑이 들어오기 전에는 누구나 사랑할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 

 

- 그러니까, 사랑할 자격이 이제 생겼다는 건가? 하고 그녀가 물은 것은, 그를 변화시킨 요인이 무엇일지 궁리하던 중 문득 그때 자기를 떠나면서 했던 그 말("나는 사랑할 자격이 없어")이 떠올랐기 때문이지만, 하필이면 그 짧은 순간에, 어쩌면 즉각적으로 그 일이 떠올랐을지 되짚어보면, 그 말이 선희의 마음에 그만큼 깊이 박혀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렇지만 형배는 그녀의 그 질문에 담긴 뜻을 곧바로 알아듣지 못했는데, 그것은 그녀와는 달리 그의 마음에는 그 말이 전혀 박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는 그 말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머리를 흔들고, 일시적이고 즉흥적인 감정이 아닌지 조금 더 지켜보자고 미루었다. 더 이상 머리를 흔들 수 없고 미룰 수도 없었으므로 그는 그 말을 했다. 그는 쑥스러워서, 얼굴을 붉히고 어색하게 웃으며 그 말을 했다. 어찌나 어색한지 문득 그의 미소를 본 그녀는 그가 자기를 비웃는 것이 아닌가 오해했을 정도였다. 그럴 리 없는 상황이라는 전제가 없었다면 오해를 밀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도 어렴풋이 느꼈듯, 그는 그 말을 하는 자신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상상도 해보지 않은 일은 상상이 잘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상상도 되지 않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피할 수 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는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니 아무렇게나 할 수도 없었다. 그는 자기의 내부에서 거역할 수 없는 어떤 강한 힘의 활동을 의식했다. 그 힘은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라고 시켰다. 그러니까 그의 말은 자발적으로 한 말이 아니라 강요받은 상태에서 나온 말이었다. 강요받음이 없이는 누구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 못한다. 그녀는 강요하지 않았지만 그는 강요받았다. 피할 수 없는 강요였다. 

 

-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 누군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도록 강요받는 사람이다. 강요의 주체는 없다. 객체만 있다. 사랑은, 사랑한다는 말을 포함해서 상대에게 무엇을 강요하지 않는다. 사랑은 강요가 없는 영역이다. 사랑의 이름으로 무엇을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 역시 있을 수 없다. 사랑을 내세워서 무엇을, 그것이 무엇이든, 요구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자기 사랑을 얼마나 대단하고 절실한 것으로 표현하든,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요구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요구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권력이 아니고 권력이 될 수 없고 권력이 되어서도 안 된다. 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랑을 앞세우는 사람은 지배를 하기 위해 국민들을 사랑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는 독재자와 다름없다. 독재자의 사랑이 권력욕을 충족하기 위한 수단에 다름 아닌 것처럼 무엇인가를 강요하는 사람의 사랑 역시 자기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랑을 이용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사랑은 강요하는 것이 아니고, 강요하지 않는데도 강요받는 것이다. 강요하는 이는 없고 강요받는 이만 있다. 사랑한다는 말은 발화된다. 누구도 사랑한다는 말을 발화할 수는 없다. 

 

- 소설집 작가의 말에 쓴 적이 있다. 그런 뜻이다. 그 작가가 그 짧은 글에서 염두에 둔 대상은 독자였지만, 이것이 작가와 독자 사이에만 적용되는 원리일 리 없다. 기본적으로 이 문장은 말의 주술에 대한 것으로 읽힌다. 말이 가진 힘에 대한 말.

 

- 집에서 키우는 식물들에게 긍정적인 기운의 말을 하면서 물을하면서 물을 주면 잘 자라고 반대로 부정적인 기운의 말을 하면서 물을 주면 잘 자라지 않고 시든다는 실험이 보고된 적이 있었다. 그런 유의 이야기는 꽤 많다. 우리가 먹는 밥이나 물도 칭찬의 말과 저주의 말에 대해 특정한 반응을 보인다는 보고도 있었다. 칭찬의 말을 들은 음식과는 달리 저주의 말을 들은 음식은 금방 상하고 쉬 부패한다는 것. 사랑의 말을 듣고 자란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의 인생이 어떻게 달라지는가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이 많은 언급을 했다. 말의 힘에 대한 이런 보고들은 수신자, 즉 특정한 말을 듣는 대상(사람은 물론 동식물이나 무생물까지를 포함하여)에게 나타난 결과들에 대한 것이다.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을 듣는 사람에게 말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연구들이다. 자극을 받은 대상에게 자극의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러면 자극을 가한 주체에게는? 말을 들은 사람이 아니라 말을 한 사람에게는? 말의 영향은 말을 듣는 사람만 아니라 말을 하는 사람에게도 나타나지 않을까. 말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나타나지 않을까.

- 왜 아니겠는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그 말은 그 말을 듣는 사람만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사람도 겨냥한다. 더욱 겨냥한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는 말을 듣기도 하기 때문이다. 듣는 사람은 듣기만 하는 사람이지만 하는 사람은 하면서 듣기도 하는 사람이다. 듣는 사람은 잘못 들을 수도 있지만 하는 사람, 하면서 듣는 사람은 잘못 들을 수도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말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되지 않을 수 없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는 어렵지만 사랑한다는 말을 해놓고 사랑하지 않기는 더욱 어렵다.

- 그런데 이런 현상이 생기는 것은, 질문해보자, 단지 그 말을 했기 때문일까. 말의 힘, 즉 주술일 뿐일까. 그것뿐일까. 주술사는 누구, 혹은 무엇을 향해 주술을 건다. 주술에 힘이 있다는 것은, 주술사가 겨냥한 그 누구, 혹은 무엇에 주술사가 의도한 어떤 현상이 결과로 나타나는 것에 대해 하는 말이다. 그런데 주술사가 건 주술이 누구이거나 무엇이 아니라 주술사 자신에게 나타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경우에는, 이 주술이 말하는 사람의 외부, 그러니까 누구이거나 무엇을 향하지 않고 자기를 향한다. 
 

- 기적은 밤의 숲에서 일어났다. 이 문장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기적이 밤의 숲에서만 일어난다는 말인가, 하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밤의 숲이 기적을 만들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렇게 말할 수 없다. 기적이 낮과 밤을 가릴 리 없고 바다와 숲을 가릴 리 없다. 밤과 숲이 결합하여 다른 차원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이 다른 차원이 형성한 낯선 분위기로 인해 보통의 경우에는 일어나지 않거나 일어날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되는 일이 일어날 것 같아지고, 그런 일이 발생해도 놀라지 않거나 덜 놀랄 것 같아진다고 해도, 결코 밤의 숲이 기적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밤에 일어날 일은 밤에 일어나고 낮에 일어날 일은 낮에 일어난다. 숲에서 일어날 일은 숲에서 일어나고 바다에서 일어날 일은 바다에서 일어난다. 기적은 자기에게 맞는 시간과 공간을 스스로 선택한다. 어떤 기적은 밤의 숲을 필요로 하고, 그래서 밤의 숲에서 일어나고, 어떤 기적은 낮의 바다, 혹은 낮의 숲, 혹은 밤의 바다를 택해서 일어난다. 밤과 숲이 결합하여 한 차원이 더 생기는 것 같은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처럼 낮과 바다, 낮과 숲, 혹은 밤과 바다가 결합해도 그런 분위기가 형성된다. 어떤 기적이든 그 기적에 적합한, 그 기이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여지가 높은 무대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그 무대는 그 기적을 위한 무대이다. 다른 기적을 위해서는 다른 무대가 필요하다. 선희와 영석에게 일어난 기적을 위해 필요한 무대는 밤과 숲이었다. 그런 뜻이다. 

 

- 사랑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랑의 무엇을 믿지 못하는 것일까? 사랑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믿지 못하는 경우를 가정해볼 수 있다. '사랑? 그런 것은 없다'라고 그들은 말할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이렇다. 사랑처럼 보이거나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은 어떤 의도나 필요에 의해서 작명된 것이지 그 이름에 걸맞은 실체가 실제로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욕망을 미화하거나 희생을 저항 없이 강요하기 위해, 혹은 그 비슷한 사회적 필요에 의해 이런 이름을 지었을 수 있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그 이름으로 불리는 객관적 존재물인 실재가 있다는 확실한 증거라는 순진한 믿음이 이 작명의 동기 속에 숨은 비밀이다.  

 

-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두 가지 가운데 하나가 확인되면, 나머지 하나는 확인되지 않는다. 두 가지 모두 확인되지 않을 수는 있지만(믿기에도 믿지 않기에도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 있는 법이니까), 두 가지 모두 확인될 수는 없다. 상반된 두 가지 욕구를 동시에 충족하기를 원하는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길은 없다. 의심하는 사람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만족이 아니라 의심이기 때문이다. 의심하는 사람의 의심은 확신하는 사람의 확신보다 언제나 확고하다. 

 

- 허상은 허상이기 때문에 견고하고, 견고할 뿐만 아니라 더 견고해지는 성격을 지녔다. 시간과 함께 더 넓어지고 더 튼튼해지고 더 복잡해진다. 더 허물 수 없게 된다. 허상은 상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이 증축 역시 상상 속에서 이루어지고, 따라서 시간이나 인과율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순식간에 아주 많은 새로운 (상상 속의) 자재들이 여기저기 달라붙어 모양을 키우고 늘리고 변형시킨다.

 

- 우리는 때로 자기의 사랑을 얻거나 지키기 위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이미지의) 훼손을 감수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사랑을 내놓지 않으려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의 크기를 보증한다는 관념이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이 관념을 전혀 근거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이런 관념의 배후에 사랑의 이기심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사랑의 '이기심'이 아니라 '사랑'의 이기심이라는 사실을 아는지. 지키려고 하는 것은 그, 또는 그녀의 사랑이 아니라 그, 또는 그녀의 '사랑'이다. 사랑을 내놓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의 이미지의 훼손만은 막으려는 사람은 사랑의 크기를 묻는 질문 앞에 놓인다. 당신의 사랑은 그 정도인가? 사랑이 그렇게까지 크지는 않기 때문에, 즉 연인의 이미지를 걱정할 여유를 부릴 만한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랑을 내놓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사랑이 그래도 되는 것인가? 당신의 큰 배려는 당신의 사랑의 보잘것없음을 감추기 위한 포즈가 아닌가?

- 배려는 이기심을 넘지 못한다. 배려보다 이기심이 더 큰 사랑의 증거로 간주된다. 사랑하기 때문에 떠난다는 수사가 이 세계에서 위선과 변명의 표현으로 인식되는 이유이다. 
 

- 이번에도 사랑의 이기심이 모든 것을 지휘했다. 사람의 덕은 사랑의 이기심을 이기지 못한다. 덕이 이기심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이 문장에 대한 바른 해석이 아니다. 바른 해석은, 사람이 사랑을 이기지 못한다,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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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람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미묘하고 당황스러운 현상들을 탐사하는 데 할애된 이 소설은 떠오르는 대로 순간의 단상을 적어둔 여러 개의 내 메모들에서 탄생했다. 메모들은 여러 권의 몰스킨 수첩을 거쳐 스마트폰의 메모장으로 옮겨 왔다. 소설에 붙은 소제목들은 메모장에 있는 것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특별한 사람들의 별스러운 사랑 이야기를 지어내는 대신 평범한 사람들의 사랑 경험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보고서를 쓴다는 것이 이 소설을 쓸 때의 작의라면 작의였다. 사랑 경험은 사람마다 다 다르지만 비슷하고, 비슷하지만 다 다르다. 내 현미경의 배율이 적당한지, 혹 불필요하게 높거나 지나치게 낮아서 그 미묘하고 당황스러운 현상의 실체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것은 아닌지 하는 염려가 없지 않지만, 배율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보이는 것이 마땅한 이 경험의 신비를 확인해보는 것도 소득이라고 스스로 안위한다. 제목은,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일 뿐이고, 사랑이 그 안에서 제 목숨을 이어간다는 뜻으로 사랑의 생애'라고 했다. 예담의 편집부를 비롯하여 이 책의 탄생에 관여한 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이 책의 관여를 혹시 받을지도 모르는 이들에게 격려와 응원의 인사를 미리 전한다. 

 

- 사도행전에 나오는 첫 세대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할 수 없는 일, 그들이 할 거라고 기대할 수 없는 일들을 했다. 병자를 고치고 통역 없이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고 죽은 사람을 살리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들이 믿는 위험한 진리를 증거하고 기꺼이 잡혀가고 고난당하고 목숨을 내놓았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살았고 이전의 자기들과도 다르게 살았다. 사도행전은 그 이유가 그들 안에 성령이 살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내 안에 사는 것은 내가 아니고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 다른 존재가 우리의 내부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 존재를 따라 살지 않을 수 없다. 내 안에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순간 사랑은 문득 당신 속으로 들어오고, 그러면 당신은 도리 없이 사랑을 품은 자가 된다. 사랑과 함께 사랑을 따라 사는 자가 된다. 사랑이 시키고 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된다. 그러니까 사랑에 빠졌다는 식으로 말하지 말라.  

 

- '모른다'는 '인식하지 못한다'로 바꿔 말할 수 있으므로 모르는 사람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인식한다는 것이 된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몰라서는 곤란하다. 무지가 사랑의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 모르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가. 연인은 내가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가 아는 것은 모른다는 것이다. 연인은 내가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이 '모름'은 의식적인 것이다. 연인은 의식적으로 모르는 사람이 된다. 이런 의식적인 무지의 과정이 매혹을 위해, 사랑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안다. 사랑의 상대가 지식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거니와 꼭 그래서 만도 아니다. 현재의 무지는 앞으로의 앎의 과정을 위한 동기로 작용한다. 누구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알려고 시도하지는 않는다.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모르기 때문에 알기 위해 어떤 시도를 해야 한다. 사랑하는 자는 알아가야 하는 숙제를 떠안는 자이다.  

 

- 그래서 그녀와 한 번도 같이 파스타를 먹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런 것들이 한꺼번에 떠올라 민망했다. 그러니까 그는 과거에 자기가 거절해서 한 번도 같이 먹어본 적이 없는 파스타를 같이 먹자고 청한 것이었다. 왜 그랬을까, 그는. 

위선과 기만 운운하며 그를 비난하는 건 성급하다. 조금 전 그녀에게 전화를 걸 때 그는 분명히 파스타를 먹고 싶어 했다. 그 순간에 그는 강렬한 식욕을 느꼈는데, 그가 먹고 싶은 음식은 구체적으로 파스타였다. 먹고 싶지 않은데도 파스타를 먹고 싶다고 속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파스타에 대한 자신의 그 식욕이 실제로는 구체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는데, 파스타의 어떤 맛이나 모양이나 재료가 떠오른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떠올린 것은 어떤 재료로 만들어진 어떤 맛의 파스타가 아니라 그냥 기호로서의 파스타였다. 그리고 그 기호가 가리키는 대상은 그녀였다. 파스타는 그녀를 지시하는 부호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부르기 위해 파스타를 찾아냈다. 

"이제부터 좋아하려고." 정말로 이제부터 파스타를 좋아할 것 같은 예감이 든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을 중의적으로 사용했다. 그는 그녀가 자기의 그런 의중을 알아주기를 은근히 바랐지만, 그럴 리 없다는 것 역시 모르지 않았다.

 

- 그러니까 바람을 피우는 것이 개인의 고유한 인격을 존중해주는 행위라는 뜻이야? 바람둥이는 타인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라는 뜻이야? 바람둥이야말로 사랑을 하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사랑을 할 줄 모른다는 뜻이야? 준호는, 설명이 좀 필요하긴 하지만, 그런 뜻이라고 대답했다. 이어서 차이에서 나오는 매력을 발견하는 것이 사랑의 시작이다,라고 덧붙였다. 듣고 있던 다른 친구가 반문했다. 혹시 사람이 다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네가 욕망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솔직하지 않아? 사람마다 다른 누군가의 매력이 아니라 들끓는 너의 욕망이 네가 말하는 사랑의 시작 아냐? 네가 욕망하는 것이 여럿이어서, 그걸 욕심껏 다 충족시키려고, 여러 사람을 동시에 만나는 거 아냐? 연애 대상자들의 인격을 존중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쾌락을 존중해서 애인들을 대상화하고 있는 거 아냐? 네 쾌락을 충족시키기 위해 연애 대상자들을 이용하면서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거 아냐? 준호는 이렇게 반박했다. 연애를 통해 쾌락을 얻는 것이 나쁜가, 쾌락을 위해 연애를 하는 것이 나쁜가. 중요한 것은 쾌락이 연애 안에 있느냐, 연애하는 사람의 내부에 있느냐, 이지. 연애 대상자들의 고유성을 구별하지 않는 연애야말로 자기 내부의 쾌락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들을 이용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내 안의 쾌락을 연애 대상자에게 투사하지 않는다. 나는 연애 대상자와의 만남을 통해 탄생할 쾌락을 기대하고 기다리며 그것을 즐긴다. 쾌락은 연애의 과정에서 탄생한다. 그 연애가 시작될 때까지는 상상도 추측도 할 수 없는 쾌락이다. 대상이 다르면 쾌락도 다르다. 그 쾌락이 연애의 대상과 함께 만든 것, 공조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다르기 때문에, 즉 각자의 매력이 다르기 때문에 각각의 연애가 제공하는 쾌락도 다르다. 그러니까 여러 연애는 가능할 뿐 아니라 필연적이다. 또 다른 친구가 이렇게 반문했다. 이상한 논리다. 여러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한 사람만 영원히 사랑하는 것보다 바람직하다는 말인가? 더 도덕적이라는 뜻인가? 준호는 이렇게 대답했다. 더 도덕적이냐고? 낭만적으로 이상화된 속설에 속지 말자. 도덕은 사랑이 아니라 인간됨, 혹은 인간의 인간에 대한 태도에 관련된 문제이다. 물어보자. 평생토록 한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름답고 바람직하다는 식으로 추켜세워져 왔는데, 그런 사람은 도대체 왜 한 사람만 사랑하는 것일까? 왜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하는 기적 같은 어리석음을 실천하는 것일까?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사랑(즉 사람)에 대한 기대가 없거나 어떤 이유에 의해 억압되었거나. 둘은 무관하지 않다. 서로가 서로의 원인일 테니까.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이거나, 거짓이 아니라면 아예 사랑이라는 것을 (기대가 없어서든 억압되어서든)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한 사람만 사랑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개별적 존재가 발산하는 매력에 대한 정당한 반응으로서의 개별적 사랑이 아니라 그저 자기 안의 쾌락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혹은 더 나쁜 경우로, 단지 편리와 관습에 따라 사랑을 구실로 내세워 사람을 붙들고 있는 것뿐이라면, 이것이야말로 개인이 가진 고유성에 대한 마땅하고 정당한 대우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부도덕하다고 말할 수 있다. 평생 한 사람만 영원히 사랑하는 것이 참된 사랑이라고? 그것은 낭만적으로 이상화된 속설일 뿐이다. 또 다른 친구가 되물었다. 낭만적으로 이상화된 속설이라니, 유일하고 영원하고 불변하는 사랑을 의심하는 것인가. 그런 사랑이 부도덕하다는 것인가? 고귀한 것 아닌가? 준호는 조금도 굽히지 않고 자기주장을 이어갔다. 스스로 속이지 말자. 유일하고 영원하고 불변하는 사랑이 이상화된 것은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사회를 갈등과 혼란에서 지키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로 유일하고 영원한 사랑의 불변성에 대한 신화를 만들어 쓴 것이 아닌가.  

 

- 알 랭 바디우는 사랑에 빠지지 않고도 사랑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선전하는 미틱(Meetic)이라는 만남 알선 사이트를 비판하는 것으로 자기 책을 시작하는데,그에 의하면 위험하지 않은 사랑, 안전한 사랑이란 전사자 제로의 전쟁과 마찬가지로 허구의 프로파간다에 지나지 않는다. '위험 없이 사랑하기'를 내건 이 사이트의 슬로건은 위험이 사랑에 내재하고 있는 본질임을 역설적으로 유추하게 한다. 사정이야 다양하겠지만, 어쨌든 사랑에 따른 위험부담 때문에 사랑하기를 주저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사랑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사랑에 대해 더 진지하다. 더 진지하기 때문에 함부로 하지 않는다. 함부로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시도하지 못한다. 함부로 하는 것은 사랑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함으로써 모독하느니 아예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피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두려움은 멸시가 아니라 공경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싫기 때문에 다가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존경하기 때문에 다가가지 못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다가가지도 못하고 떠나지도 못하는 비극이 그래서 생겨난다. 탈옥도 하지 못하고 개조하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태. 

 

- 그냥 내버려둘 수 없는 것이 누군가의 약함이다. 약한 것들은 무엇인가를, 어떻게든 할 것을, 가만히 있지 말 것을 요청한다. 약함으로부터 가만히 있지 말고 무엇인가를, 어떻게든 하라는 강요를 받을 때, 그 강요를 받은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기는 쉽지 않다. 약함은 유인한다. 강한 것은 뿌리칠 수 있지만 약한 것은 그럴 수 없다. 강한 것에는 저항하고 대들 수 있지만 약한 것에는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무기를 가지고 위협하는 자와 싸우는 것은 필요하고 가능한 일이지만, 무장하지 않은 이를 공격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고 가능한 일도 아니다.  

 

- 영석이 선희가 보낸 신호에 반응하지 않은 것은 그녀가 보낸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보낸 신호를 그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그녀가 자기에게 어떤 신호를 보낼 거라는 예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누군가와 친밀한 교감을 나눌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수십 년을 살아온 사람의 내면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그런 삶을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른다. 의무와 역할, 사회적 조건이나 이해관계와 무관한 어떤 정서의 주고받음이 가능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학습한 적 없는 사람은 타인의 감정을 헤아리는 데 서툴다. 타인의 감정을 헤아릴 여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타인의 감정을 헤아릴 권리가 자기에게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은 이 사람은 자기감정도 잘 헤아리지 못한다. 그에게 감정은 다루기 힘든 생선 가시와 같다. 생선 가시를 잘 다루지 못하는 사람은 생선을 만지려고 하지 않는다. 생선을 만지지 않고 생선 요리를 할 수는 없다. 감정을 만지는 것이 힘든 사람은 사랑에 접근하지 못한다. 사랑을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 오셀로의 비극을 떠올려보라. 교활한 이아고의 흉계에 의해 정숙하고 헌신적인 아내 데스데모나를 의심하기 시작한 오셀로는 아내의 어떤 진실한 말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음에 의심이 들어찬 사람은 마음속 의심의 기울기와 파동을 통해 상대방의 말을 증폭하거나 변환시켜 듣는다. 말은 맥락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매우 불완전하고 비자족적인 신호체계라서 듣고 싶은 데에 따라 달리 들리는 속성이 있다. 말하는 사람이 말하는 대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듣고 싶은 대로 들린다. 말을 통해 진실을 전달하는 데 실패한 사람들이 말을 통해 진실을 전달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 못지않게 많다고 해서 이상해할 이유는 없다. 데스데모나는 진실을 알리려고 말을 하고, 그러나 진실은 잘 전달되지 않고, 그래서 더 말을 많이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진실은 변질되어 옳게 전달되지 않는다. 선희 역시 그랬다. 선희 역시 진실을 알리려고 말을 하고, 더 많은 말을 했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진실은 변질되어 옳게 전달되지 않았다. 그녀는 차라리 진실을 전달하려는 시도를 하지 말았어야 했을 것이다. 의심에 사로잡혀 무슨 말을 해도 말 그대로 듣지 않는 사람에게는,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반드시 최선이라고 할 수 없으니까.   

 

- 있을 수 없어, 라고 여러 번 중얼거렸는데, 그녀가 저렇게 이상한 남자를 사랑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것이 그 말의 속뜻이었다. 그는 영석이 이성에게 어필할 남성으로서의 매력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판단을, 비교적 짧은 시간에, 별 망설임 없이 하고 말았는데, 그것이 그의 은밀한 소망이 벌인 수작이든 아니든, 그러고 나자 자신이 근거 없는 모욕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이 일그러졌다. 자기가 사랑하는 멀쩡한 여자가 누구의 눈에도 멀쩡해 보이지 않는 남자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그는 그녀의 사랑을 의심하는 길을 택했다. 물론 영석이 누구의 눈에도 멀쩡해 보이지 않는다는 건 그의 평가였다. 다른 눈에 대해 알지 못했으므로 그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었다. 그렇게 보는 눈은 실은 그의 눈이었다. 그런데 그의 눈은 그의 은밀한 소망의 사주를 받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으므로 그 눈이 제대로 옳게 보았다고 할 수 없다. 눈은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도록 유도된 것을 본다. 그 순간의 그의 눈이야말로 그러했다. 그의 은밀한 소망의 실현을 위해 그녀의 남자인 영석은 멀쩡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했고, 그의 눈은 그렇게 보았다.  

- 그는 자기가 교활하다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그러나 악덕을 물리치고 정의를 수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용납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합리화했다. 더 큰 악의 제거를 위해 작은 악을 쓰는 것은 정당하다고 세뇌했다. 목표의 정당함이 수단의 부당함을 문제 삼지 않게 했다. 심지어 자기의 교활함에 자부심을 느낄 정도까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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