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2

[카를로 긴즈부르그] 밤의 역사 - 악마의 잔치, 혹은 죽은 자들의 세계로의 여행에 관하여

일루젼 2022. 1. 11. 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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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카를로 긴즈부르그 / 김정하
출판 : 문학과 지성사 
출간 : 2020.07.06 


이전 저작에서 프리울리라는 한 지역권 안에서의 베난단티를 좁고 깊게 파고들었던 저자는 <밤의 역사>에서는 보다 넓은 시야로 전형들의 맥락을 따라 세계를 떠돈다. 그러면서도 건조한 역사적 '사실'들에 짓눌려 개별적인 '맥락'을 잃지는 않겠다는 의지가 보인다. 

 

우선 그는 이 긴 이야기를 유대인과 나병 환자들로부터 시작한다. 소수이자 차별, 경시의 대상이었던 존재들로부터 시작된 '증표'와 '악의'를 읽어내는 것이다. 그 박해로부터 마녀 사냥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여타 저자들이 성별 구조와 폭력 속에서 바라보던 시각과는 사뭇 다르다. 

 

그렇다면 그 마녀들이란 어디에서 온 개념들인가? 저자는 여기에서 베난단티의 사례를 들어 풍요와 재생산의 여신-죽음의 여신의 옷자락을 발견한다. 선량한 여주인들, 두려운 여신의 이미지들 사이의 유사성과 차이성에 유의하며 문화권별로 나타난 '외부 세계로의 여행'을 주관하는 여신들을 다룬다. 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시야 불능 -blindfolded- 혹은 큰 머리장식으로부터 유래된 접시 같이 큰 눈을 짚고 넘어가는데, 이 존재가 이끄는 무리들이 육신이 없었다는 점에서 다시금 탈혼 상태에 관한 논의로 회귀한다. 이것은 앞서 다루었던 풍요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며, 탈혼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전투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즉, 저자는 일종의 기준점으로서 베난단티를 제시한다. 

 

하지만 주로 남성들이 맡았던 '전투'에 집중하게 되면 동물 가면들이 등장한다. 동물에 타고 이동하는 것과 연관성이 보이기도 하고, 탈혼 상태에서 동물로 변신하는 것의 연장선이기도 하다. 이 부분에서 저자가 주의깊게 다룬 암곰의 이미지와 설명은 문득 단군 신화를 떠올리게 한다. 주신을 거둬 키우는 시초, 생산자로서의 암곰의 이미지가 상당히 많은 종족들에게서 나타났음과 제우스를 키운 암곰의 이미지가 어떻게 다시 그의 연인으로 변화했으며 '암곰의 가죽을 쓴'이라는 의미의 베르세르키르로 이어졌는지는 아주 흥미로웠다. 

 

자, 여기서 영혼과 동물들로 이어진 이야기는 유라시아의 샤먼들로 이어진다. 이 부분에서 저자는 미르치아 엘리아데의 의견을 차용하기도 하고 반박하기도 하는데, (때로는 레비-스트로스) 이에 대한 논의는 딱히 깊게 다룰 부분은 아닌 듯 하다. 저자는 탈혼과 샤먼을 분리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그것들이 상당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는 확실하게 주목한다. 

 

지금까지 저자와 독자는 '밤의 연회-전투-모임-광란-축제'의 이미지들을 좇아 <밤의 역사>를 훑고 있다. 한 번도 끊어지지 않은 이 흐름은 다시 그 동물들의 뼈를 통한 재생이란 개념으로 여신들에게로 돌아간다. 뼈를 모아 다시 살리는 이미지들은 이집트의 오시리스 설화와도 연결시킬 법 한데, 성경과 신데렐라까지 폭넓게 연결시키던 저자가 이집트 문화권에 대해서는 침묵한 것은 특이한 점이다. 어쨌든 절름발이 혹은 한쪽 신발만 신은 자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갔던 주제는 다시 동물 - 뼈와 가죽 - 가죽 뒤집어쓰기(막) - 양막(Caul) - 베난단티로 돌아오며 마무리된다. 

 

후에 결론에서 다시 마녀의 약과 두꺼비를 샤먼들의 환각 식물 또는 맥각균과 연결시키며 해당 권역에서 마녀 사냥이 활발했음을 짚어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이미지가 결국은 유대인과 나병 환자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보다 앞선 시대의 공포스런 이미지에서 출발했을 가능성 또한 열어두고 있다. 

 

사실 만 하루 정도에 몰아서 읽으며 저자가 풀어내는 가설들을 따라가기에도 벅차서 깊게 숙고해보지는 못했다. <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에서처럼 상세하고 경험적인 저술이지 않을까 생각했다가 조금 고생을 했는데, 모두 회수되지는 못했지만 저자의 기발하고 창의적인 연결 관계들은 매우 흥미로웠다.

 

끝. 

 


   

- 나는 이 연구를 진행하면서 처음에는 스테파노 레비 델라 토레 Stefano Levi Della Torre와 장 레비 Jean Levi, 그다음에는 시모나 체루티 simona Cerutti, 조반니 레비 Giovanni Levi와 열띤 토론을 했다. 이들의 비평과 제안은 매우 소중했다. 살바토레 세티스 Salvatore Settis는 연구의 질을 높이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오랜 세월 충고와 제안을 통해 많은 도움을 준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이탈로 칼비노 Italo Calvino와 아르날도 모밀리아노 Arnaldo Momigliano에게 각별한 애정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 이 항의문에서는 독극물로 식수를 오염시킨 유대인들의 공범으로 나병환자들이 지목되었다. 이들이 공범으로 지목된 것은 많은 상징적 암시를 내포하고 있으므로, 이를 나병환자들의 유산을 독식하려는 관계 당국의 노골적인 탐욕으로 해석할 수만은 없다. 

 

- 그러나 비록 우리가 이러한 국면의 세부 사실들을 알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일련의 문건들의 전체적인 의미는 비교적 명확해 보인다. 다시 말하면 비교적 제한된 범위의 사회집단(나병환자들)에서 (비록 인종적으로나 종교적으로 국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보다 큰 규모의 집단으로 발전하여 어쩌면 경계가 없는 집단(주술사들과 마녀들)으로 확대된 것이다. 나병환자와 유대인처럼 마녀와 주술사는 공동체의 주변부에 위치하고 있었고, 이들은 강력한 외부의 적인 악마의 사주로 다시 한번 음모를 꾸몄다. 이단 심문관들과 세속 재판관들은 마녀와 주술사의 육신에서 악마와의 협정에 대한 물리적 증거, 즉 나병환자들과 유대인들이 의복에 꿰매어 부착하고 다녔던 표식을 찾으려고 했을 것이다. 

 

- 선량한 밤의 여신들과 관련된 여성들(그리고 드물지만 남성들)의 이면에는 탈혼 상태의 특징을 동반한 숭배가 엿보인다. 베난단티들은 가톨릭 권에서 사계재일 주간에 거행되는 기도와 단식의 3일 동안 탈혼 상태에 빠져들었으며, 연중 같은 기간에 파사 계곡의 두 노파는 자신들의 여신에게 갔다. 마녀로 의심된 스코틀랜드 여성들은 주기적으로 탈혼 상태와 전이에 빠져들면서 활력을 잃은 육신을 빠져나와 보이지 않는 영혼과 짐승(까마귀)의 모습으로 옮겨 갔다. 아분디아 귀부인의 추종자들은 영혼의 상태로 옮겨 가기 전에 경직 상태에 빠져들었고, 이후 문과 벽을 통과하여 여행을 시작했다. 이미 <교정자>에서는 잠긴 문도 이들의 야간 비행을 방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언급한 바 있다. 탈혼 상태에 대한 경험은 리켈라 또는 오리엔테를 따르던 무리들의 경우처럼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추론 가능하다. 이들은 일시적인 죽음을 통해 번영과 부, 지식을 주는 선량한 여성들의 세계로 들어간다. 이들의 세계는 죽은 자들의 세계다. 이러한 정체성은 일련의 접점들을 통해 확인되었다. 최근까지 매우 방대한 지역에서 일정한 날을 정하여 죽은 자들의 목마름을 해소해주기 위해 물을 제공하는 관습이 행해졌다. 이러한 관습은 이미 오베르뉴의 기욤과 보베의 빈첸초에 의해 비난받고 처벌되었던 좋은 것들 bonaeres에게 또는 아분디아에게 제물을 바치는 관습을 떠올리게 한다. 아분디아도 오리엔테가 그랬던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무리와 함께 만찬을 벌인 집들에 축복을 내렸다. 아르노 젤리스의 자백에 따르면 이러한 축복은 오리엔테의 경우에서 보듯이, "잘 정돈된 집들에만 주어졌다." 죽은 자들은 깨끗이 청소된 장소와 집들에만 출입했을 뿐 무질서하거나 더러운 집에는 결코 들어가지 않았다. 

 

- 어머니들의 밤을 의미하는 모드라니히트 mōdraniht라는 표현은 이 신들과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베다 베네라빌리스 Beda Venerabilis는 이 용어가 이교도들의 영국에서는 기독교 달력의 크리스마스이브에 상응하는 (에포나에게도 바쳐졌을) 철야예배의 밤을 가리킨다고 했다. 켈트족의 달력에서 12월 24일과 1월 6일 사이의 밤들은 츠뷜프텐 Zwilften의 윤년에 해당했다. 게르만 지역에서는 12일 동안 죽은 자들이 여러 곳을 배회한다고 했다. 또한 대모들인 마트레스는 에포나처럼 분만 중인 여성을 보호하는 것은 물론이고 죽은 자들의 세계와 틀림없이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영국의 비문들 그리고 라인 지방에서 유래한 1세기경의 유적들을 보면 마트레스는 파르카이 Parcae와 함께 등장한다. 11세기 초 보름스의 부르카르드는 사람들이 특정한 날 밤이면 음식과 칼 세 자루를 바치는 세 명의 신(틀림없이 마트레스였을 것이다)이 이교도들이 믿는 파르카이와 같다고 여겼다. 보이족이 살던 콜로니아 클라우디아 사바리아(오늘날 헝가리의 솜버트헤이) 지역에서 발견된 제단은 요정 파테에게 바쳐진 곳이었는데, 이때 파테는 그 지역 특유의 마트레스인 것으로 밝혀졌다. 수 세기, 어쩌면 1000년 이상의 오랜 세월 동안 마트로네, 요정, 그리고 축복과 죽음을 관장하는 다른 신들은 켈트 문화가 지배하던 유럽에 눈에 띄지 않게 존재해온 셈이다.

 

- 이아손이 아킬레우스처럼 켄타우로스인 케이론에 의해 양육되었다.는 것을 우연의 일치로 볼 수는 없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펴본 신화들의 영역 바깥에서도 발이 부었거나 기형이거나 불에 태워지거나 또는 맨발인 경우와 같은 등가의 상징들을 수없이 목격한다. 지난 19세기 초, 다마스쿠스에서 한 발에만 샌들을 신고 있는 나체 여신의 청동상이 발견되었다. 이후 몇십 년이 지나 청동 여신의 정체는 장례의 여신인 아프로디테 네메시스 Aphrodite Nemesis로 밝혀졌다. 그런데 다른 숭배 의식이나 신화에 등장하는 한 짝의 샌들은 태양의 신화와 연관된 것으로서 당시에는 필수적인 요소였다. 이후 이러한 도상학적인 특이성들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20세기 초반에 다른 맥락에서 독자적으로 재등장했다. 

 

- 멜람푸스가 이피클레스 Iphicles의 암소들을 되찾은 것도 사후 세계에서의 가축 절도를 주제로 하는 신화들과 유사하다. 이피클레스에게 포로로 잡힌 멜람푸스는 아주 작은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능력 덕택에 좀벌레들이 대들보를 갉아먹는 소리를 듣고 감옥이 붕괴되기 직전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것은 멜람푸스의 고유한 이미지를 형성하는 수많은 우화적인 요소들 중 하나다. 예를 들어 두 마리의 뱀이 혀로 그의 귀를 깨끗하게 닦아주었고 이렇게 해서 그가 새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두 마리의 뱀이 교배하는 것을 보았다는 이유로 7년 동안 여성으로 변한 채 살아야만 했던 장님 예언가 티레시아스 Tiresias도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 지금까지 우리는 '부은 발' 오이디푸스와 '검은 발' 멜람푸스가 어떤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멜람푸스와 티레시아스 그리고 티레시아스와 오이디푸스의 유사성도 명백하게 드러났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의 한 유명한 장면을 보면 오이디푸스는 테베에 전염병을 퍼뜨린 자의 감춰진 정체를 티레시아스로부터 전해 듣고 난 후에 공포에 질려 피신한다. 두 사람의 대화는 의도적인 대칭 관계가 숨겨진 대조법으로 진행된다. 한쪽에는 장님 예언가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무지라는 은유적 어둠에서 벗어나 앞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현실의 세계로 옮겨 갈 운명을 가진 죄인이 있다. 오이디푸스가 티레시아스의 예언처럼, 유배되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낯선 땅에서 가난뱅이로 떠돌아다니던 당시의 불안한 걸음걸이는 아테나 Athena가 선물한 장님용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티레시아스 자신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 산제물 의식에서 물에 끓이는 것과 불에 굽는 것 사이에 우선 순위가 있다는 의사-아리스토텔레스적인 문제는 디오니소스의 살해에 대한 신화를 노래한, 오르페우스에게 바쳐진 시의 제목 <입회의 의식(들) Rito(Riti) d'iniziazione(Telete, Teletai)>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이 신화에 입회 의식의 핵심적인 내용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피타고라스 또는 디오니소스의 추종자들은 입회자들에게 개별적인 금욕주의 모델들을 제시했다. 그 모델들은 확실히 매우 다양했지만 도시의 종교라는 완전히 공적인 차원과는 무관하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헬레니즘 시대에 이러한 종교적 경험의 형태들을 알레고리적 의미로 해석하려는 충동과 함께 그에 대한 관심이 강화되었다.  

 

-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보굴-오스타크족의 신화와 거의 2000년 전에 기록된 루페르칼리아의 기원 신화 간의 그야말로 당혹스러운 유사성을 밝혀주지 않는다. 가축 도둑의 침입으로 중단된 식사(또는 산제물 의식)에 관한 두 이야기가 독자적인 수렴의 결과라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제 두 개의 가설이 남는데, 이는 공동의 모델 또는 전이에 의해 유래되었다는 주장이다. 두 가설 모두 이러한 이야기 구도가 수 세기를 거치면서 오랫동안, 심지어는 수천 년 동안 변화 없이 유지되었음을 암시한다. 각각의 맥락 분석을 통해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선 기본적으로 중앙아시아와 일치하는 지역에서는 아래와 같은 사실들이 발견된다. a) 이중적인 군주정 또는 이중적인 권력인 경우가 많았고, b) 보통은 뼈(부친 계통)와 살(모친 계통)로 확인된 두 개의 큰 범주에 따라 친족관계가 분류되었으며, c) 결혼제도는 모친 쪽 사촌 간의 혼인(누이의 아들이 남동생의 딸과 결혼)을 선호한다는 암시가 매우 빈번했다. 다른 한편, 라치오 지역의 경우 a)는 그 흔적이 남아 있는 반면 b)와 c)는 완전히 사라졌다. 두 신화에서 족외혼의 계층과 살/뼈의 대립은 분리되었다. 보굴-오스탸크족의 신화에서는 첫 번째만을, 오비디우스가 기록한 신화에서는 두 번째 만을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분리를 라치오 지역에서도 선사시대에는 족외혼이 존재했다는 증거로 간주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 두 신화가 서로 다른 사회에 매우 다른 수준으로 존재하는 이중적인 요소들을 해석한 것으로 보는 게 좀 더 그럴듯하다. 구약성서에서도 쌍둥이인 에서와 야곱의 적대 관계는 각각의 후손인 에돔과 이스라엘 간의 관계를 예고하고 정당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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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녀와 주술사들은 밤 시간을 이용해 주로 외진 곳이나 들녘 또는산에서 모임을 가졌다. 때로는 몸에 기름을 바르고 지팡이나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 모임에 참가했다. 이들은 동물의 잔등이에 올라타거나 동물로 둔갑한 채 모습을 드러냈다. 모임에 처음 참가하는 자는 기독교 신앙을 부정하고 신성을 모독하면서, 인간의 외모나 동물 또는 반인반수의 모습으로 분장한 악마에게 경의를 표해야만 했다. 이들은 만찬과 춤 그리고 섹스의 향연을 벌였다. 마녀와 주술사 들은 모임이 끝나고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어린아이의 육신을 쥐어짜서 만든 기름에 다른 재료들을 섞어 제조한 악의 기름을 제공받았다. 위의 내용은 악마의 잔치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기본적인 특징들이다. 지역적 다양성, 특히 악마의 회합을 가리키는 명칭은 매우 다양했다.  

 

- '사바트 sabbat' 외에도, '스트리아츠 striaz' '바를로트 barlott' '아켈라레 akelarre' 등 여러 대중적인 어휘들로 해석되는 '사가룸 시나고가 sagarum synagoga' 또는 '스트리지아룸 콘벤투스 strigiarum conventus'와 같은 식자의 용어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야간 모임에 참석한 자들의 자백은 지극히 획일적이었다. 15세기 초부터 17세기 말까지 유럽의 전 지역에서 진행된 마녀재판과 이러한 재판들에 직간접적으로 근거한 악마론 저술들로부터 근본적으로는 위에서 요약 기술한 내용과 유사한 악마의 잔치 이미지가 나타났다. 이러한 묘사는 당대 사람들에게 수 세기 전부터 알려진 주술사나 요술사보다 훨씬 위험한 마녀와 주술사의 집단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음을 암시했다. 획일적인 자백들은 이러한 집단의 추종자들이 도처에 존재하며 특히 끔찍한 의식을 벌이고 있다는 증거로 채택되었다. 악마의 잔치라는 전형은 이단 심문관들이 피고인의 육체와 정신에 고문을 가하여 대대적인 마녀사냥을 전개하는 데 필요한 고발을 이끌어낼 수 있게 했다. 

 

- 알다시피, 지난 1940년대 초반에 레비-스트로스는 사회 현상들, 특히 무엇보다 먼저 친족관계의 구조를 분석하기 위해 야콥슨의 음성학 연구를 출발점으로 삼았다. 레비-스트로스가 당시는 물론 그 이후에도, 공시성과 통시성의 대립 관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야콥슨의 지적을 간과했다는 사실은 확실히 의미가 있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의 공시적 관점이 지극히 반역사적인 태도를 암시한다는 현재의 해석은 피상적이다. 초기에 레비-스트로스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문장을 인용하면서, 역사학자는 의식의 차원("인간이 역사를 만든다")을, 고고학자는 무의식의 차원("그러나 인간은 그들이 무엇을 만드는지 모른다")을 연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시 말해 심리의 어둡고 무의식적인 현상에 대한 뤼시앵 페브르 Lucien Febvre의 연구처럼, 풍요로운 교배의 가능성을 허용하는 영역 분할이었다. 계속해서 레비-스트로스는 양도 논법의 차원에서 고고학과 역사학의 관계를 설정했다. 즉, (적어도 문서의 차원에서) 역사적으로 관련이 없는 문화권들의 상동의 신화들을 반복적으로 비교하는 작업은 그때마다 유사한 점들을 문화적 차용이라기보다는 형식적 조건을 추적해 밝히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반면, 최근에 레비-스트로스는 30년 전의 연구를 상세하게 재검토하면서, 이전에도 그랬듯이 역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 간의 협력 가능성을 주장했다. '확산 주의'는,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역사 연구는 구조적 분석에 지극히 중요하다. 이러한 관점은 서로 다른 경로와 별개의 방식을 통해, 즉 각각의 전체에 빛을 비추어 표면적으로 이질적인 현상을 이해함으로써 같은 결론에 이르는 경향이 있다. 

 

- 유대인과 나병환자의 관계는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세기 무렵 유대인 역사학자인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Flavius Josephus는 변증론 저서인 <아피온 반박문 Contro Apioney>에서 이집트인 마네토 Manetho와 논쟁을 했다. 이 논쟁에서 마네토는 유대인의 조상 중에 이집트에서 추방된 나병환자도 있었다고 주장했다. 겉으로 보기에 뒤엉키고 상호 모순된 마네토의 이야기에는 비록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았지만, 이집트 지역의 반유대주의 전통이 틀림없이 반영되어 있었다. 중세에 <아피온 반박문>의 유행은 서양에서 반유대주의 선동의 영구적 도구가 될 (마찬가지로 요세푸스가 반박한 당나귀 숭배, 인신공양 같은 다른 전설들과 함께) 파괴적인 전설을 유포시켰다. 이러한 전통이 식자층 문화에 끼친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에게 훨씬 중요했던 것은 13세기와 14세기 사이에 집중적으로 일어난, 유대인과 나병환자 들을 사회의 주변부로 내몬 경향이었다. 1215년의 라테라노 공의회는 유대인에게 보통은 노란색, 아니면 붉은색이나 녹색의 원형 장식을 옷에 달고 다니도록 했다. 물론 나병환자들도 특별한 옷을 입어야만 했다. 그들은 회색 또는 (드물게는) 검은색 외투를 입고 진홍색 모자를 쓰고, 때로는 나무로 만든 딱따기 cliquette를 들고 다녀야 했다. 이러한 인식표는 카고 cagot 또는 보통 귓불이 없고 호흡할 때 악취를 풍겨 건강한 사람과 구분되었던 '백색 나병 lebbrosi bianchi' 환자(영국에서는 유대인들과 비슷하게 간주되었다)들에게도 확대되었다. 노가레 종교회의(1290)에서는 이들에게 가슴이나 어깨에 붉은 표식을 달고 다니도록 했다. 유대인과 나병환자에게 눈에 쉽게 띄는 표식을 달게 한 마르시아크 종교회의(1330)의 결정은 이제 두 집단에 부여된 불명예라는 공통된 낙인의 정도를 보여준다. 파리의 성 이노센트 공동묘지의 문에는 "유대인이나 나병환자 같은 미치광이와의 우정을 경계하라"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 의복에 박음질된 낙인은 철저한, 특히 신체적인 소외를 나타냈다. 나병환자들은 불결했고 유대인들은 고약한 냄새를 풍겼다. 나병환자들은 전염병을 퍼뜨리고 유대인들은 음식을 오염시켰다. 사람들이 거리를 두게 만든 두 집단에 대한 혐오감은 좀더 복잡하고 모순적인 태도와 접목되었다. 이들을 소외시키려는 경향은 정확히 두 집단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는데, 그 이유는 이들의 처지가 모호하고 불안정했기 때문이다. 나병환자들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죄의 물리적인 증거로 간주된 질병이 인간의 모습을 지워버리듯 외양을 망가뜨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Francesco d'Assisi나 루이 9세가 이들에게 보여준 사랑은 성스러움에 대한 숭고한 증거로 여겨졌다. 유대인들은 신을 죽인 민족이지만 신은 이들을 선택해 자신을 드러냈다. 이들의 성서는 기독교인들의 성서와 불가분의 관계다. 

 

-  천지창조 후 6294년부터 이스라엘의 왕은 자신의 중재자인 그라나다의 총독을 통해 여러 차례 메시지를 보내면서, 유대 민족과 영원한 협정을 체결할 의향이 있음을 알려왔다. 이 메시지를 보면, 에녹 Enoch과 엘리야 Elia는 유대 율법을 가르치기 위해 타보르산에서 사라센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시나이 계곡의 한 웅덩이에서는 구약성서에 언급된 잃어버린 방주가 발견되어 보병과 기사 들의 호위를 받으며 아이시로 옮겨졌다. 방주 안에는 하느님이 사막으로 보내준 만나가 들어 있었는데, 이것들은 아직 부패하지 않은 상태로 모세와 아론의 지팡이와 신이 직접 손가락으로 새긴 십계명과 함께 발견되었다. 이러한 기적 앞에서 사라센인들은 유대교로 개종하면서 할례를 받기 원한다고 선언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과 예리코, 그리고 방주가 있는 아이시를 자신들에게 돌려주기를 희망했으며, 그 대가로 유대인들은 사라센인들에게 프랑스 왕국과 빛나는 도시 파리를 양도해야 했다. 그라나다 총독의 이러한 의지를 알게 된 유대인들은 바나니아스가 계속해서 말하기를 - 매우 간교한 꾀를 생각해냈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다. 우리는 막대한 돈을 들여 매수한 나병환자들의 도움을 받아 기독교인들을 독살하기 위해 우물, 분수, 저수지, 강에 쓴맛의 풀과 독이 있는 설치류의 피를 섞어 제조한 독약 가루를 풀었다. 그런데 불쌍하기 그지없는 나병환자들은 순진하게 행동했다. 그들은 먼저 우리 유대인을 고발했고 나중에는 다른 기독교인들에게 속아 모든 것을 자백했다.   

 

- 악마론 문헌의 초기 간행물 중에는 지금까지 연구자들이 분석보다는 인용을 더 선호하는 문헌이 있는데, 그것은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의 독일인 요하네스 니더 Johannes Nider가 쓴 <개미둑 Formicarius> (또는 <개미 나라>)이다. 니더는 1435~37년 종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갔던 바젤에서 이 작품을 집필했다. 그리고 휴식 시간을 이용해, 회의에 참석한 교부들에게 자신의 글 일부를 읽어주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한 게으른 자의 집요한 질문에 신학자가 중세 동물우화집의 전통을 따라 인간들의 덕목이나 악습에서 개미들의 습관에 이르기까지 자세하게 언급하면서 답변을 하는 대화 형식으로 작성되었다. <개미둑> 제5권은 미신과 마법, 주술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기술하기 위해 니더는 같은 교단 소속 신학자들의 조언 이외에도, 베른주 지멘탈의 블랑켄부르크 성주이자 재판관인 페터 폰 그라이에르츠 Peter von Greyerz와 리옹 수도원의 개혁자이면서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인 에비앙의 이단 심문관과 폭넓은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정보를 수집했다. 이 두 정보제공자는 마녀와 주술사에 대한 수많은 재판을 주재하면서 적지 않은 피고인들에게 화형을 선고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세심하게 취재한 이러한 구전 자료들은 니더의 전체적인 구상에 매우 특별한 신선함을 부여했다. 대교황 그레고리오 Gregorio Magno 또는 보베의 빈첸초가 기술한 사악한 주술 이야기들 이외에도, 장소와 시기를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언급한 증언들이  있었는데,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증언들이 두 판사의 실제 경험에서 유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상했던 바와 같이, 니더는 소위 전통적인 사악한 주술, 즉 질병이나 죽음을 불러오는 주술이나 사랑을 얻기 위한 주술 등이 확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그러나 그의 책에는 참회록이나 중세의 설교집에 등장하는 악인이나 마법사와는 명확하게 구분되는 마녀나 주술사의 모임과 같은 친숙하지 않은 이미지들도 등장한다. 당시에 이러한 이미지는 여전히 형성 중에 있었기에, 니더는 부분적으로 불확실하고 모순적인 요소들을 저술의 이곳저곳에 무질서하게 기술했다.

 

- 니더는 에비앙의 이단 심문관과 역시 이단 심문관인 페터 폰 그라이에르츠로부터, 베른에는 사람보다 늑대에 더 가까운 모습으로 어린아이들을 잡아먹는 남녀 주술사들이 있다는 정보를 확보했다. 특히 그는 이단 심문관으로부터 로잔 지역의 어떤 사악한 주술사들이 자기 자식을 요리한 후에 먹어치웠으며, 이들이 모임을 갖고 인간의 형상을 한 악마를 소환하는 의식을 거행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악마의 추종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더 이상 성체를 숭배하지 않아야 하며 기회가 생길 때마다 은밀하게 십자가를 짓밟을 것을 맹세해야만 했다. 불과 얼마 전에 이단 심문관인 페터 폰 그라이에르츠는 열세 명의 어린아이를 먹어치운 마녀와 주술사 몇몇을 재판하여 화형에 처한 바 있었다. 이러한 '존속 살인자' 중 한 명은 요람이나 부모의 침대 곁에서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거나 기도나 십자가로 보호를 받지 못한 어린아이들을 공격하는 것(이러한 공격성은 이방인의 자녀에게 향하기도 했다)이 자신들의 풍습이라고 증언했다. 주술 의식을 통해 살해된 어린아이들의 시신은 매장된 무덤에서 꺼내졌고, 마녀들은 살과 뼈가 자연스럽게 발라질 때까지 그 시신을 커다란 솥에 담아 끓였다. 고체 부분은 주술 행위나 변신에 사용할 연고로 만들어졌고, 액체 부분은 병이나 자루에 넣어 보관했다가 주술 의식을 거행하는 도중에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려는 자의 음료로 제공되었다. 특히 음료에 관한 부분은 이단 심문관인 페터 폰 그라이에르츠가 화형에 처해지기 직전에 회개한 어느 젊은 남성으로부터 들은 내용이었다. 새로운 가입자들을 받아들이는 의식은 일요일에 교회에서, 성수로 정화되기 이전에 거행되었다. 기존 구성원들 앞에서 가입 후보자는 그리스도와 신앙, 세례, 가톨릭 교회를 부정하고 집단 구성원들이 악마를 소환할 때 사용하는 용어인 '마지스테룰로 magisterulo' 즉 작은 스승에게 존경을 표한 후에 앞서 언급한 액체를 들이켰다. 악마의 잔치의 전형으로 굳어질 의식의 몇 가지 핵심 요소들이 이렇게 드러났다. 악마에 대한 존경 표시, 그리스도와 신앙에 대한 거부, 십자가 모독, 주술용 연고, 잡아먹힌 어린아이들, 그러나 (역시 중요한) 다른 요소들은 아직 언급되지 않거나 또는 매우 초보적인 형태에 머물고 있었다. 변신에 관해서는 이것이 동물 형태로의 변신인지 아닌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으며, 주술 비행은 물론이고 향연과 난교가 동반된 야간 모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그러나 악마의 잔치를 향한 결정적인 행보는 주술사들과 마녀들의 위협적인 집단이라는 개념 성립으로 완성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 돌이켜 보면 이러한 사건들은 철저하게 일관된 의지에 따라 기록된것이었다. 그러나 굳은 의지만큼의 일관된 전개는 드러나지 않았거나 발생 초기에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1348년 스트라스부르에서 유대인들과 함께 흑사병의 병원체를 퍼뜨렸다는 혐의로 기소된 기독교인 중에는 베긴 수녀회 소속의 수녀 한 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세속인과 성직자의 중간에 해당하는 애매모호한 입장에서 공동생활을 하던 베긴 수녀회 수녀들은 불과 한 세기가 지나기도 전에 유대인 박해에서 마녀 박해로 옮겨 간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기에 충분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스트라스부르의 경우는 속편 없이 하나의 사건으로 끝났다. 악마의 잔치 이미지에 전적으로 매달린 재판들이 시작되었을 당시 베긴 수녀회는 이미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마녀들과 베긴 수녀회 수녀들은 사회적으로 격리된 범주에 머물러 있었다. 

 

- Seconda Apologicdp서 이러한 불명예스러운 이야기는 사실무근이며 이토록 와전된 이유는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대감 때문이라고 했다. 이와 유사한 유형의 이야기들은 유대인들 자신을 계냥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기원전 1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유대인들이 당나귀 머리를 숭배하고, 인신공양 의식을 치른 후 식인 행위를 했다고 전해진다. 식인 행위는 당시로서는 흔한 고발의 명분이었다. 이것은 카틸리나 Catilina와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지적되었다. 기독교인들이 연루된 사건에 대한 고발의 명분을 강화하기 위해서 다른 요소들을 추가해야만 했는데, 그중 가장 먼저 추가된 것은 성체성사를 의도적으로 잘못 해석한 것이었다. 어린 아이나 갓난아이의 인육을 먹는 의식에 대한 고발은 <요한복음>(6장 54절)의 내용을 왜곡한 결과일 것이다("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 추정하건대, 이러한 적대적인 전형이 형성되는 과정에는 당시 여러 집단들이 실제로 거행하던 의식들도 개입되었을 것이다. 입회 의식 차원의 식인 풍습에 뒤이어 벌어진 난교에 대한 충격적인 기술은 이집트를 배경으로 하는 그리스 소설에 일부 실려 있다(<페니키아 이야기> Phoinikikai). 그러나 2세기경 롤리아누스 Lolianus가 쓴 작품으로 추정되는 이 소설이 실제 사건을 다룬다고 믿을 만한 근거는 없다. 어쨌든 대략 50년 동안 마르쿠스 미누치우스 펠릭스 Marcus Minucius Felix에서 테르툴리아누스 Tertullianus까지 기독교 세계의 저자들은 이교도들이 퍼뜨린 범죄적인 소문들을 반박하는데 주력했다. 리옹에서 카르타고에 이르는 지역의 순교자들은 자신들을 비난한 사형집행인들에게 경멸감을 드러냈다.  

 

- 1022년 오를레앙에서 화형을 당한 마니교도가죽은 어린아이의 시신을 태운 재를 먹으며 한 번 가입하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집단에 가입했다는 것을, 카타리파가 고양이 모습으로 둔갑한 악마를 숭배했다거나 거대한 고양이 앞에서 광란의 제전 의식을 거행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안토니오 갈로스나와 마르티노 다프레스비테로의 증언을 살펴보면, 이러한 전형들은 다른 문화, 즉 민속문화에 의해 걸러지고 수정된 것으로 보인다. 이단 심문관인 안토니오 다 세티모 Antonio da Settimo는 피고인들을 발도파로 분류하는 것으로 혼합된 신앙 기록을 끝마쳤다. 우리의 지식은 그들이 알고 있던 것에 비하면 간접적이고 부분적인 것에 지나지 않지만, 시공간적으로 보다 확장된 것임에는 틀림없다. 우리는 이 시기에 베른 지역과 코모 지역에서 마녀 집단들에 대한 박해가 이미 시작되었거나 또는 시작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 우리는 반세기 후에 재판관인 페터 폰 그라이에르츠가 새로운 입회자들이 치러야만 했던의식을 수집(후에 이 자료는 니더에게 전달되었다) 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입회자들은 어린아이의 살을 으깨어 만든 액체를 마신 후에 집단의 비밀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마녀들의 자백에서 고양이가 마치 악마의 동물인 것처럼 오랫동안 등장해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피에몬테 계곡에 정착한 발도파의 자백은 당시 이단 재판의 전형과, 악마의 잔치로 이어졌을 민속 문화 사이에 상호작용이 일어난 경우처럼 보였다. 

 

- 피에리나의 진술에 따르면, 오리엔테는 자신을 추종하는 무리와 함께 여러 집, 특히 부자들의 집을 방문하여 먹고 마시기를 즐겼다. 청소가 잘된 정돈된 집을 발견하면 오리엔테는 기뻐하며 축복을 해주었다. 오리엔테는 집단 구성원들에게 풀의 효능 virtutes herbarum 을 가르쳐주고 병을 치유하는 처방과 훔친 물건을 찾아내고 악을 제거하는 방법도 일러주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비밀에 부쳐져야만 했다. 피에리나는 마치 그리스도가 세상의 주인인 것처럼 오리엔테가 '무리'의 여주인이라고 생각했다. 그 외에도 오리엔테는 죽은 피조물에 생명을 다시 불어넣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하지만 인간들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때때로 오리엔테의 추종자들은 소를 도살해 그 고기를 먹었다. 그런 다음에는 뼈를 수습해 죽은 동물의 가죽 속에 넣었다. 그러면 오리엔테가 자신의 지팡이 끝으로 가죽을 쳤고 그 순간에 소들은 다시 살아났다. 하지만 이전처럼 밭일을 할 정도로 활력을 되찾지는 못했다. 

 

- <교회규범>에 따르면, 디아나의 추종자들은 꿈과 악마적 환영의 희생자들이었다. <교회규범>의 지침에 따라 이단 심문관인 루제로 다 카살레 사제는 당시 사람들이 에로디아데라고 부르던 디아나의 놀이, 즉 오리엔테의 모임에 참가했다고 믿었다는 이유로 시빌리아에게 형을 선고했다. 후임 이단 심문관인 벨트라미노 다 체르누스쿨로 사제는 6년 전의 재판에서도 밝혀졌듯이, 피에리나가 사람들이 에로디아데라고 부르던 '디아나의 놀이'에 참가했었다고 기록했다.  

 

- <교회규범>에는 여신의 추종자들이 "그녀를 운명의 여신 quasi Fortunam인 양 숭배하고 일상적으로는 훌다 출신의 훌덴 Hulden da Hulda으로 불렀다"고 언급한 구절이 실려 있다. 그리고 베른의 페터가 제공한 정보들에 근거해 집필된 한 연구서(니더의 <개미둑>)에 대한 암시가 뒤따라 나오는데, 이 저서에는 사탄이라는 작은 스승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끝으로 성인 제르마노 San Germano의 삶에 대한 구절(야코포 다 바라체 Jacopo da Varazze의 <황금전설 Legenda Aurea>에서 인용된 듯하다)에는 밤에 이곳저곳을 쏘다니는 선량한 여성들로 불리는 정령들이 나오는데, 이들의 사악한 본성은 성인에 의해 정체가 드러나게 된다. 급하게 써 내려간 글에서 쿠자누스는 파사 계곡에서 회자되던 악마의 이름을 언급했다. 두 노파는 "포르투나라고 불리던 디아나를 이탈리아어로 리켈라 Richella, 즉 부와 행운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학식이 깊었던 그는 리켈라가 오베르뉴의 기욤 Guillaume d'Auvergne과 보베의 빈첸초가 언급한 인물인 아분디아 또는 사티아를 번역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쿠자누스는 “이 집단의 리켈라에 대한 존경과 어리석은 의식들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더 이상 인내심을 발휘하지 못하고 두 노파를 심문한 것과 이들이 거의 미쳤다고 Semideliras 결론 내린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은 신앙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선량한 여주인, 즉 리켈라에 대해 말했을 뿐이며, 이 여신이 깊은 밤에 마차를 타고 자신들을 찾아왔다고 말했다. 리켈라는 멋진 옷을 입은 여성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들은(조금 후에 그 이유를 살펴보겠지만) 리켈라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 이는 아마도 악마적인 의미로 몰아붙이려는 공격에 직면한 (훨씬 오래된 민간신앙의 층위를 기독교적인 장막으로 덮으려는) 프리울리의 베난단티 또는 리보니아의 늙은 늑대인간의 좀 더 정직한 무의식적 반응이었을 것이다. 앤드루 맨의 경우 그것은 선량한 이웃들인 작은 요정들(엘피 elfi, 파테 fate)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이었다. 만찬을 벌이며 연주를 하고 춤을 추는 이러한 그림자의 세계는 (16세기 초반 트렌티노의 종교재판에서 드러난 '좋은 놀이의 귀부인'처럼) 악마에 종속된 요정들의 여왕이 지배한다. 

 

- 1430년 3월 18일 루앙의 재판관들은 잔 다르크 Jeanne d'Arc에게 "요정들과 함께 하늘을 나는 자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유도신문을 물리쳤다. 그녀는 그런 유의 일과 전혀 무관하지만 들어본 적은 있다고, 그 일은 매주 목요일에 일어났으며 단순히 '마법 sorcerie'인 줄 알았다고 답했다. 이것은 교회 법학자들과 이단 심문관들, 재판관들에 의해 작성된 문서들을 통해 부분적으로만 전해오는 민간신앙의 한 층위가 수 세기를 거치면서 점차 악마화 되어간 것에 대한 수많은 증언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이러한 과거의 화석은 이러한 층위가 특히 여성들에 의해 숭배되었던 신비의 여성들을 암시하는 정보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 13세기 중반 무렵, 보베의 빈첸초는 자신의 저서<도덕의 거울 Speculum morale>에서 <교회규범>을 인용하면서 디아나와 에로디아데와 함께 환영에 사로잡힌 여성들이 "좋은 것들 bonae res"이라고 부른 다른 인물들에 대해 언급했다. <장미 이야기 Roman de la Rose>는 '아분디아(또는 아분단티아) 귀부인 dame habonde'에 이어 '선량한 귀부인들 bonnes dames'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야코포 다 바라체는 앞서 언급한 성인 제르마노의 삶에서 "밤에 이곳저곳을 쏘다니는 선량한 여성들"에 대해 언급했다. 아리에 주주의 공세랑에서 개최된 종교회의의 한 법규집은 <교회규범>을 본떠 작성되었는데, 여기에는 앞서 살펴보았던 벤소치아(보나 소치아 Bona Socia)가 언급되어 있다. 같은 아리에주주에서 '아르미어'인 아르노 젤리스의 고객 중 한 사람은 자신을 심문하던 이단 심문관에게 '선량한 부인들'이 지상에서는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여성들이었는데, 지금은 마차를 타고 악마를 따라 산과 계곡으로 돌아다닌다고 진술했다. 마돈나 오리엔테는 자신을 따르는 여성들을 '선량한 사람들 bona gens'이라고 불렸다. 파사 계곡의 노파들은 리켈라를 '선량한 여주인'이라고 불렸다. 피엠메 계곡의 경우, 밤의 여신은 '좋은 놀이의 귀부인'으로 불렸다. 스코틀랜트와 아일랜드에서 '선량한 사람' 또는 '선량한 이웃 buont vicini'은 요정들을 지칭했다. 프리울리의 베난단티도 이들과 비슷하다. 베난티였던 마리아 판초나 Maria Panzona는 17세기 초반 이단 재판을 밭을 때 (시빌리아와 피에리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위엄 있게 의자에 앉아 있는, 바테시로 불리는 어떤 여성"에게 "머리를 숙여" 존경을 표했다고 말했다. 빈번하게 등장하는 형용사
'선량한'이 어떤 의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선량한 여신 bona dea' '온화한 placida'과 같은 표현이 각각 헤카테 Hecate(아르테미데 Artemite와 밀접하게 연관된 장례의 여신), 그리고 헤카테와 동일시되는 신(3세기경 남부 모이시아에 위치한 노베에서 숭배되었다)을 연상케 한다는 것이다.

- 죽은 자들의 무리는 이러한 자료들 덕분에 확인되었다. 좀더 정확히 말해 이들은 젊은 나이에 사망한 자들의 무리로서 전투에서 죽은 군인들과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어린아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을 인도한 것은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들(헤르레치누스 Herlechinus, 보탄 wotan, 오딘 odin, 아서왕 등)이나 신화화된 인물들(디트리히 폰 베른 Dietrich von Bern)이었다. 가장 오래된 증거들을 통해 명백하게 확인되듯이 꽤 동떨어진 문화권들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주제 - 억울하게 죽은 자들의 위협적인 출현은 당시 정교하게 형성되기 시작한 연옥의 이미지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기독교적, 도덕적 차원에서 재해석되었다. 그러나 민간신앙의 구체적인 민속적 특징들은 '유령 사냥'을 이끈 인물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헤롤트가 디아나의 군대를 강조한 것은 <교회규범>에 의해 죄악으로 간주된 것들과 이러한 전통을 혼합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순회 설교자인 그가 활동 과정에서 수집한 미신들을 기록한 것인지 아니면 뿌리 뽑고자 했던 몇 가지 미신들에 대해 자신의 사적인 해석을 제시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물론 신비의 여성들(베르히톨다 Berchtholda, 페르히타)이 성난 군대를 이끈 경우는 극히 드물다. 더구나 그 시기는 헤롤트의 문헌이 등장하고 한 세기 반 이상이 지났을 때다. 그러나 우리의 시각에서 본다면 '디아나와 그의 군대는 매우 중요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교회규범>에 나타난 현혹된 여성들을 죽은 자들의 무리와 암묵적으로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 에라를 의미하는 헤라 Hera 또는 헤레쿠라 Haerecura라고 새긴 글씨는 같은 시기에 이스트리아반도, 스위스, 갈리아 키살피나에서도 발견되었다. 계속해서 15세기 초반 팔츠의 농민들은 풍요를 가져오는 헤라라는 이름의 신이 크리스마스와 공현축일 사이의 12일 동안, 즉 죽은 자들의 귀환을 위한 기간에 하늘을 날아다니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고 믿고 있었다. 연대기적으로 차이가 많이 나는 이러한 증언들 중에서 루사의 무덤에서 출토된 기와에 그려진 여성의 형상은 연결 고리 역할을 한다. 기와의 발견은 한편으로는 '헤라, 디아나'를 잘못 읽어서 생긴, 밤의 여신을 의미하는 수많은 유사 용어들 중에 헤로디아나(후에 에로디아데라고 보편적으로 읽었다)가 존재한다는 가설을 강화해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교도들의 여신 디아나'를 추종하면서 '짐승들을 타고 다니는 '환영에 빠진 여성들이 관련된 민간신앙을 장례식과 연관 지어 해석하는 것을 뒷받침해준다. 로마의 외피가 켈트의 과육을 덮고 있다. 어쨌든 밤에 짐승을 타고 다니는 이미지는 그리스-로마 신화와는 근본적으로 무관하다. 예를 들어 호메로스의 신들도 영웅들도 말을 타지 않았다. 말들은 오직 이륜 전차를 끌 때만 사용되었을 뿐이다. 디아나(또는 아르테미데)가 말을 타고 있는 이미지는 매우 드물다. 반대로 말을 탄 디아나의 희귀한 이미지들은 거의 항상 말들과 함께하는 켈트 신 에포나 Epona의 수많은 이미지들에 영감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디아나가 짐승을 타고 있는 짓에 대한 가장 오래된 증거들은 프룸, 보름스, 트리어에서 발견되었다. 즉 말을 타고 있거나 한 마리 이상의 말을 대동한 에포나의 많은 이미)지들이 출토된 지역들이다(그림 2). 레지노네가 받아들였던 프랑크왕국 교회 법규의 "이교도들의 여신 디아나 Diana pagamorum dea"에서, 우리는 에포나 또는 같은 이름의 지역에 대한 '로마적 해석 interpretatio romana'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루사의 에라와 마찬가지로, 풍요를 상징하는 뿔 컵 코르누코피아 cornucopia와 함께 등장하는 에포나는 죽은 자들의 신이었다. 이미 살펴보았다시피, 두 요소는 아분디아, 사티아, 리켈라의 이름과 특징에서 다시 등장한다. 디아나의 이미지를 본떠 만들어졌을 에포나의 모습은 훗날 디아나 숭배로 해석될 지역의 숭배 의식들을 자극했다. 문화적 헤게모니에 대한 해석과 재검토 그리고 이를 수용한 피지배 문화 간의 거울 놀이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13세기 중반, 디아나에서 유래된 제네스 genes와 같은 어휘는 애매모호한 실체인 일종의 요정을 가리킨다. 그로부터 200년 후 이아나티카 ianatica는 이미 마녀의 동의어로 정착되었다.

 

- 말과 마구간을 수호하는 여성인 에포나는, 훗날 말을 탄 디아나의 전형적인 이미지로 합쳐진 민간신앙들에 반영되었던 여러 신들 중 하나였다. 사실 에포나는 기독교의 공세 앞에서 와해의 길로 접어든 켈트족의 불가사의한 종교 세계를 대표하는 여러 형상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13세기에 이들은 아분디아를 따르는 '밤의 여인들에 대한 기록에 앞서 오베르뉴의 기욤이 서술한 내용을 통해 재등장했다. 이들은 흰 옷을 입고 때로는 숲에서 때로는 마구간에서 말의 갈기에 자신들이 정성 들여 준비한 초의 촛농을 떨어뜨리던 어린 소녀 또는 기혼 여성의 모습으로 둔갑한 정령들이었다. 이러한 세부 내용은 '로미오와 줄리엣 Romeo & Juliety(1막 4장)의 머큐시오가 (또 다른 밤의 신) 마브 여왕 queen Mab을 묘사할 때 반복된다. 흰 의상을 입은 대모들, 즉 마트로네 matronae는 마트레 Matrae, 마트레스 Matres 또는 마트로네 Matronae 를 모방한 나중의 인물들이었으며 라인강 저지대, 프랑스, 영국, 그리고 이탈리아 북부 지역의 (여성들이 의뢰한) 수많은 비문에 등장했다(그림 3). 예를 들어 노바라와 베르첼리 중간에 위치한 지역에서 발견된 비문들을 보면, 이 신들은 디아나와 함께 자리했다. 비문의 부조들에는 종종 세 명이 함께 앉아 있는 형태로 마트로네를 표현했다(드물게는 여성이 두 명 또는 한 명인 경우도 있었다). 또한 이들은 에포나처럼 번영과 비옥함을 상징하는 뿔 (모양의) 컵, 과일바구니, 강보에 싸인 신생아를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숭배에 내포된 탈혼 상태적 성격은 대모들(마트레스 또는 마트로네)에게 바쳐진 비문들에 시각적으로 ex visu 또 청각적으로 ex imperio, ex iussu 신과 직접 접촉하는 것을 암시하는 표현들이 자주 등장한다는 사실을 통해 확인되었다.

- 이 모든 것은 비잔틴 역사가인 카이사레아의 프로코피우스 Procopio di Cesarea 가 552년 또는 그 이듬해에 작성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저서의 한부분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뜻밖의 결과를 낳았는데, 이는 그의 저서인 <고트 전쟁 Guerra gotica>에서 가장 유명한 대목이다. 브리티아라는 섬에 대해 이야기하던 프로코피우스는 갑자기 설명을 중단하고는 신중하고 진지한 표현을 골라 다음의 여담을 들려준다.
"이야기의 이 지점에서 나는 한 사건에 대해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없다. 내가 이야기하려는 이 사건을 직접 실행하고 또 직접 들었다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이 사건은 끊임없이 언급되었지만, 아무래도 이 사건은 미신과 비슷해서 나로서는 전혀 믿기지가 않는다..."

그들은 브리티아 맞은편 해안가 어촌의 주민들이다. 그들은 프랑크족 신민이었지만, 봉사에 대한 대가로 오랫동안 세금을 면제받아왔다. 그들의 봉사란 이런 것이다. 죽은 사람들의 모든 영혼은 브리티아섬으로 가게 되어 있는데, 이 해안 마을 주민들이 순번을 정해 영혼들이 바다를 건널 수 있도록 해주었다.

"밤 근무를 배정받은 사람들은 전임 근무자와 교대를해야 하므로 어둠이 내려앉으면 집으로 돌아와 근무 호출을 기다리며 잠을 잤다. 그들은 늦은 밤에 문 두드리는 소리와 근무를 알리는 나직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럴 때면 그들은 지체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바닷가로 나갔다. 그들은 어떤 신비한 힘이 그들의 이 같은 행동을 유도하는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느꼈다."

바닷가에 도착한 그들은 특별한 형태의 빈 배를 발견한다. 그러나 그들이 배에 올라타면 배는 마치 많은 짐을 실은 것처럼 거의 수면까지 가라앉는다. 그들이 노를 젓기 시작한 지 한 시간쯤 지나면 배는 브리티아에 도착한다.(통상의 항해에는 하루 밤낮이 걸린다). 승객들이 내리면 그들은 가벼워진 빈 배를 운전해 되돌아온다. 뱃사공들은 승객의 사회계급, 부친의 이름, 그리고 여성의 경우 남편의 이름을 알려주는 목소리를 듣지만, "그 누구도 보지는 못한다." 

 

- 우리는 프로코피우스가 누구로부터 이러한 지역 전통을 전해 들었는지 알지 못한다. 브리티아와 브리타니아가 동일한 지역일 가능성은, 비록 다른 가설들(덴마크의 유틀란트 반도, 헬골란트섬)이 제기되기는 했지만, 매우 높다. 영혼들을 건너게 해주는 어부들의 마을과 브리티아는 보통으로 노를 저어 하루 밤낮이 걸리는 거리인데, 그 정확한 위치는 아르모리카 Armorica, 즉 오늘날의 브르타뉴에 해당하는 지역의 해안일 것이다. 이 지역에는 이미 고대부터 수많은 전설이 있었다. 5세기 초 클라우디아노 Claudiano는 대서양 해안의 아르모리카를 율리시스가 그림자 종족, 즉 “죽은 자들의 창백한 그림자들이 배회하는 것을 목격한 농민들을 만났던 지역이라고 했다. 또한 플루타르코스 plutarchos(켈트의 전설을 각색했을 것이다)는 한 가지 전설에 대해 언급한 바 있는데, 이에 따르면 브리타니아를 조금 지난 곳에 있는 어떤 섬에 크로노스 Kronos 신이 잠들어 있다고 한다. 12세기에 비잔틴 학자 체체스 Tzetzes는 자신이 요약한 프로코피우스의 구절에 근거하여 포르투나테 Fortunate(축복)의 섬들이 태평양 너머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모호하면서도 조금 우화 같은 느낌마저 주는 프로코피우스의 지리적 위치에 대한 논쟁은 전체 이야기에서 가장 특별한 요소, 즉 정기적으로 영혼을 실어 나른 사람들의 심야 항해를 덜 중요한 것처럼 만들었다. 다음의 상세한 내용은 우리가 분석하고 있는 일련의 증언들과 함께 다루면 덜 기이해 보인다.

"그들은 늦은 밤에 문 두드리는 소리와 근무를 알리는 나직한 목소리를 들었다"고 프로코피우스는 이야기한다. "잠을 자는 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내게 다가오는데, 이는 인간의 형상을 닮았다. 나는 잠을 자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깨어있는 것 같기도 하다. ... 그리고 그 형상은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너는 나와 함께 가야만 한다.'" 그럴 때면 그들은 지체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바닷가로 나갔다. 그들은 어떤 신비한 힘이 그들의 이같은 행동을 유도하는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느꼈다"고 프로코피우스는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우리는 가야만 한다... 그리고 내가 가야만 한다면 가겠노라고 나는 말했다." 위 인용문에 실린 목소리들은 16세기 말에 재판을 받은 두 명의 (프리울리의) 베난단티가 증언한 내용과 같다.  프로코피우스에게 정보를 제공한 익명의 제보자들은 영혼들을 배로 실어 나르는 일에 일조했음을 주장했으며 아마도 자신들을 강제한 알 수 없는 힘을 설명하기 위해 그들과 동일한 말을 사용했을 것이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두 베난단티가 영적으로 수행한 임무는 서로 다르다. 두 이야기는 여성 신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프로코피우스의 인용문에서는 어두운 해변에서 죽은 영혼들의 이름을 말하는 목소리의 성별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두 이야기에는 탈혼 상태의 경험에 대한 (어느 정도는 수정된) 모방이 명백히 존재한다. 두 증언은 1000년의 시간차를 두고 기록된 것이다. 얼핏 보기에 두 경우에는 프리울리에서처럼 브르타뉴에서도 (다른 전통들과 결합한 채) 죽은 자들에 대한 민간신앙에 오래도록 영향을 준 켈트 문화의 층위가 존재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 하지만 이러한 신화적 핵심은 중세를 지나면서 전혀 다른 종류의 -구전이 아닌 속어로 기록된 전통까지 부추겼다. 이는 대중적이기보다는 우아했으며 탈혼 상태의 경험이 아닌 문학적 경험이었다. 이는 다름 아닌 아서왕의 전설 유의 로맨스 소설들이었다. 잘 알다시피, 이러한 소설들에서 아서왕은 종종 죽은 자들의 진정한 왕으로 등장했다. 1163~65년에 제작된 오트란토 대성당의 거대한 모자이크 바닥(그림4)에서는 덩치 큰 숫양의 잔등이에 올라탄("동물의 잔등이에 올라 superquandam bestiam"라는 <교회규범>의 표현을 조금 바꾼 것이다) 모습에 대한 묘사를 볼 수 있는데, 이는 100년 후 '유령 사냥'의 선봉에 등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후 세계와의 소통을 중심으로 한 민간신앙과 문학적 재구성 사이의 근접성을 증명해준다. 에렉 Erec 퍼시벌 Perceval, 랜슬롯 Lancelot과 같은 영웅들의 -다리, 초원, 황무지 또는 바다로 인해 산 자들의 세계와 분리된 신비의 성을 향한- 여행은 죽은 자들의 세계를 향한 여행으로 인식된다. 때로는 리모스 Limors, 죽은 자들의 성 Schastelle nort과 같은 지명 자체가 이러한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이러한 장소들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그 존재가 추상화되었다. 이곳의 여행자들은 (고대의 전통에 따라 산 자들에게는 금지된) 죽은 자들의 음식을 조심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의 문학작품들은 아일랜드의 몇몇 문헌(또는 모험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우리가 다루는 탈혼 상태의 전통과 유사한 이유는 그 근원에서 켈트 신화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서왕의 여동생인 요정 모르가나 Morgain la fée, fata Morgana는 나중에 켈트족의 두 여신, 즉 에포나와 연결된 아일랜드의 모리건 Morrigan과 웨일스의 모드론 Modron이 (새로운 요소들이 첨가된 상태로) 부활한 것이다. 모드론은 기독교 시대 초기부터 숭배되어온 대모들인 마트로네 중의 하나였다. 16세기와 17세기에 스코틀랜드 마녀들의 자백에서 목격되는 요정들과, 아서왕 이야기에 등장하는 요정들의 관계는 매우 긴밀하다. 이 모든 것은 기독교적인 주제들과 혼합되면서 '브르타뉴 이야기 matière de Bretagne'로 흘러 들어간 켈트 민속 요소들의 중요성을 확인시켜준다. 죽은 자들의 세계를 향한 영웅들의 여행이라는 아서왕 이야기에 여러 차례 등장한 주제는 이 전통에서 비롯했다. 그러나 아서왕의 궁정과 주술 및 적대감으로 가득한 주변 세계의 신화들 간의 반목은 시간을 초월한 형태들을 통해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즉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기사들이 고립된 계층으로 전락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 F. Benoit, L' béroisation équestre, Gap 1954, pp. 27~30. 그는 여기서 묘사된 동물이 뿔을 가진 공작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A. Ross, Pagan Celtic Britain, London 1967, p. 225(이 연구는 기와를 에포나의 이미지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오리인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둘 다 확실하지는 않다. C. B. Pascal, The Cults of Cisalpine Gaul, Bruxelles-Berchem 1964, pp. 102~105 참조. 

- 켈트 문화의 기층을 재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외부 세계의 여성들을 추종하는 자들이 경험한 탈혼 상태는 그것을 불러일으킨, 구비전승의 문학 전통에 잠재되어 있는 민간의 이야기들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수용하기 힘든 가정이다. 그러나 시칠리아에 요정 모르가나와 관련된 전통들이 잔존한다는 놀라운 사실은 또 다른 가설을 제기하는데, 이는 보다 오래전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켈트 전통의 모리건과 시칠리아의 모르가나는 둘 다 키르케 Circe나 메데이아 Medea 같은 여성 주술사들에게 영감을 준 그리스 시대 이전의 위대한 지중해 여신들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에 포함될 수 있다. 이와 같은 문화적 유래는 지중해와 켈트 전통에서 유사한 이름과 지명들(접두어 'morg'가 붙는 지명들은 물론이고)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이는 근거가 빈약한 추측에 불과하지만, 불확실한 과거에 투영함으로써 자료가 부족한 데서 오는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준다. '위대한 여신' 그 자체는 이질적인 숭배를 임의로 동질화시키는 추상적 관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가설은 수용하기 힘든 방식으로 형성된 것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의 접근과는 매우 다른 연구 방법을 간접적으로 제시한다. 

- 기원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러한 숭배의식은 이전에 존재했던 지역 고유의 숭배 의식과 결합된 것으로 추측된다. 즉 <티마이오스>에서 인용된 피타고라스 pythagoras의 견해를 따르자면, 대모는 요정 Ninfe과 코라이 Korai와 유사하며 엔지온의 여신들은 시칠리아에 정착한, 그리스 동전에 부조로 조각된 세 명의 요정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포세이도니오스와 디오도로스의 글들은 특별한 신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키프로스의 한 무덤에서 발굴된 망토를 두른 조그만 세 여성의 조각상이나, 메시나 근처의 카마로에서 발견된 양각의 돌조각을 두고 이들의 정체를 확인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보다 최근에는 엔지온의 대모들이 불가리아의 살라디노보에 위치한 트라키아의 한 성소에서 발견된 여러 봉헌 제물들에 묘사된 요정들과 관련 있다고 언급되고 있다. 살라디노보의 성소는 '요정들의 무덤'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세 명의 요정은 터번과 같은 모자를 쓰고 있는데, 이 모자는 켈트 문화의 대모들이 쓰고 있는 것  또는 19세기 중반 모디카의 한 노파에게 나타났던 '외부 세계의 여성들'의 그것과 흡사하다. 살라디노보의 경우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 기원전 4~3세기에 트라키아에서 작성된 한 문서에 따르면 이곳은 켈트인들이 정착한 곳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시칠리아와는 무관하다. 엔지온의 불가사의한 대모 여신들과 켈트족 문화의 대모들 간의 유사점은 18세기의 고고학자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어왔다.    
 
- 헬리케는 아르카디아의 왕 리카온 lycaon의 딸이었다. 반면 다른 판본들은헬리케를 아르테미데가 제우스의 유혹에 넘어간 죄를 물어 새로 둔갑시킨 요정 페니체 Fenice와 동일시했다. 제우스가 크레타섬에서 출생했다는 신화들과, (몇 개의 판본에 따르면) 아르카디아의 왕 리카온의 딸로서 제우스의 연인이었고 그 이름의 시조인 영웅 아르카스 Arcas의 어머니였으며 곰으로 변신한 후 아르테미데에 의해 살해되고 하늘로 올라가 곰 별자리가 된 여신 칼리스토 callisto에 대한 신화들 사이에는, 이미 칼리마코스 Kallimachos가 언급한 바와 같이 동화작용이 엿보인다. 그리스어 방언들 중에서 아르카디아 키프리오타' 방언은 기원전 2000년 중반 크레타를 정복한 종족의 언어인 미케네어와 매우 유사하다. 이 언어는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선형 문자 B 유형의 서체로 불린 변형된 언어로서 필로스와 크노소스에서 발견된 행정문서들을 작성하는 데 사용되었다. 두 그룹의 신화, 즉 크레타 신화와 아르카디아 신화 사이에 시기적으로 뒤늦게 형성된 접점은 매우 오래된 문화적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요소는 거의 동일하다(암곰 요정-제우스-별자리). 하지만 그 조합과 직접적인 상관관계는 다르다. 이를테면 제우스를 키운 두 마리의 암곰 대신 곰으로 변신한 애인이 등장하거나, 신의 거짓말 같은 유아기 대신 아르카스의 신성한 혈통을 밝히는 식이다. 아르카스의 후손들과 펠라스기 Pelasgi족 시조의 아들이었으나 인신공양 의식을 거행한 죄로 제우스가 늑대로 만들어버린 리카온의 관계는 신화의 새로운 가계도가 형성될 여지를 축소시켰다.  
 

- 아르테미데 오르티아 Artemide Orthia의 모습에 대한 진위성은, 파우사니아스(<그리스 이야기> 제3권 16장 7절)에 따르면, 자신을 발견하는 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그 광기에 의해서도 입증되었다. 에페수스 사원에 있는 헤카테(아르테미데와 관계가 깊은 장례의 여신)의 동상은 눈부시게 빛나서 쳐다보는 사람들은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여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이러한 행동은 종교적 성격의 금기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파다나 평원과 알프스 동부 사이 지역에서 나온 16세기 초반의 몇몇 증거들에 따르면, 만토바의 놀이의 귀부인의 고개 숙인 모습은 고대 그리스의 기록된 증거들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페라라시에서 마녀로 고발당한 여러 여성은 (그들이 추종하는) 현명한 시빌리아가 요르단강에 가려는 그들의 헛된 노력에 분노하자,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도망쳐야만 했다고 이야기했다. 피엠메 계곡에서 마녀로 고발당한, 테사드렐라 tessadrella라고도 불린 마르게리타 Margherita라는 여성은 '좋은 놀이의 귀부인'의 눈 주변에는 두 개의 돌이 있었는데, 그 돌들이 "각각 눈 옆에 위치한 채 귀부인의 의도에 따라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하고 있었다"고 진술했다. 카라노의 카테리나 델라 리브라 Caterina della Libra는 "좋은 놀이의 귀부인은 어떤 것도 보고 들을 수 없도록 눈과 귀를 헝겊으로 가린 검은 띠를 머리에 둘렀다. 할 수만 있다면 그녀는 듣고 보는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고 진술했다. 톰마시나 Tommasina라고 불린 마르게리타 델라뇰라 Margherita dell'Agnola는 "그녀는 아무것도 볼 수 없도록 눈 주변에 두 개의 안대를 붙인 채 늘 하늘을 날아다녔다. 그녀가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면 세상에 엄청난 재앙을 불러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 엘케의 귀부인의 실체가 여신인지, 여사제인지, 또는 헌물을 제단에 바치는 여성인지는 아직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한편, 두 개의 게 대한 바퀴는 얼굴의 관자놀이에 나란히 놓인 리본에 밀착되어 있을 뿐, 아무런 신비한 분위기도 연출하지 않는다. 이는 쿠네오 지방의 카스텔라르 성소에서 발견된 봉헌 제단의 조그마한 여러 여성 조각상들에서 볼 수 있는 장식이다. 이와 유사한 은장식은 에스트레마두라주에서도 발견되었다. 크고 작은 바퀴들은 자연 모발이든 가발이든 땋은 머리를 고정하는 데 활용되었다. 이베리아의 독특한 헤어스타일은 아르테미도루스 Artemidorus의 증언에 기초한 스트라본 strabone(<지리학> 제3권 4장 17절)의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대에 유행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유사한 헤어스타일은 시칠리아로부터 보이오티아에 이르는 지역에 살았던 그리스 조상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엘케의 귀부인의 헤어스타일과 머리 양쪽에 두 개의 바퀴를 붙이고 검은 띠를 두른 피엠메 계곡의 밤의 여신의 헤어스타일이 일치한다는 사실은 아마도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어떤 역사적인 관계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관련성을 제기하는 이유는, 이후의 내용에서 조금씩 구체적으로 드러나겠지만, 예상치 못한 또 하나의 접점과 마주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엘케의 귀부인의 관자놀이를 장식하고 있는 두 개의 바퀴들 안쪽 부분에 달려 있는 리본들이다. 이들은 크림반도와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로 불리는 지역에서 둥근 황금 원판들이 관자놀이에 부착된 형태로 출토된 그리스-스키타이의 유물들과 유사하다.)

 

 

   


- 지금까지의 설명은 부분적으로는 추측에 의존한 것이며 이와 관련된사실들도 그 수가 매우 적다. 탈혼 상태의 연속성이 실제로 존재했으리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주민들, 특히 산악 지역에서 고립된 채 살던 여성들은 시공간적으로 먼 과거에서 유래된 신화들을,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로 심야의 황홀경을 경험함으로써 다시 체험했다. 이러한 심오한 맥락을 재구성하면 그때까지 이해할 수 없었던 세부 내용들의 의미가 급작스럽게 드러난다. 14세기 말 밀라노에서 벌어진 종교재판의 판결문 중 하나(피에리나에 대한 판결문)는 오리엔테가 자신의 추종자들이 도살해서 먹고 남은 소의 뼈를 가죽으로 덮고 그것을 지팡이로 건드려 소를 다시 살려냈다고 했다. 넨니오 Nennio가 826년경에 쓴 <브리튼 인의 역사 Historia Brittonum> (13세기 말에 편찬된 야코포다 바라체의 <황금 전설>에서 거듭 언급되었다)에 따르면, 브리타니아 오세르의 성인 제르마노가 영국에서 켈트족을 개종시킬 때 (도살된 소들의 부활에 근거한) 유사한 기적을 행했다. 이러한 사실은 넨니오의 이야기가 훨씬 오래된 문헌에서 유래했음을 의미한다. 플랑드르와 브라반트주처럼 아일랜드 수도사들이 복음을 전파한 지역, 또는 아일랜드에서 동일한 성인 전기의 주제 - 사슴이나 오리의 뼈들이 사슴과 오리로 부활하는 것 가 재현된 것은 켈트 문화의 층위가 존재함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여기까지는 별로 놀라운 점이 없다. 그러나 스노리 스툴루손 Snorri Sturlusson이 13세기 전반에 쓴 <에다>를 보면, 게르만의 신 토르는 통상적으로 가지고 다니는 무기인 망치로 숫염소의 뼈를 두들겨서 자신의 신성한 숫염소들을 다시 살아나게 하는 놀라운 기적을 일으켰다는 내용이 나온다. 기독교로 개종한 켈트족 이야기와 기독교 개종 이전의 게르만 이야기 간의 연관성은 명확하지 않다. 후자가 전자에서 유래했을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그것도 아니면 둘 다 그보다 오래된 어떤 이야기에서 유래한 걸까?  

 

- 제3의 가설을 생각하게 된 계기는 부활을 목적으로, 도살된 동물들의 뼈를 가능한 한 모두 수집하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신화와 의식 들이 어떤 지역들에서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였다.) 이러한 신화들은 죽은 자들의 행렬 또는 그 행렬을 이끄는 밤의 여신에 의한 불가사의한 행동이 기록된 알프스 지역에서 형성되었다. 여신을 지칭하는 수많은 명칭들 중에는 헨트시의 수호성인인 파라일디스 Pharaildis도 있었다. 한 전설에 따르면 이 수호성인은 뼈를 손으로 만져오리를 다시 살아나게 했다고 한다. 이와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는, 예를 들어 코카서스의 압하지아에서는 사냥과 밀림의 남성 신이 (황소 같은 가축이 아닌) 사냥한 동물을 다시 살아나게 하는 역할을 했다. (아프리카 대륙을 포함해) 매우 다양한 문화권에 기록된 이러한 믿음은 핀란드 북부의 라플란드 지역과 아이누 Ainu족이 살고 있는 일본 열도의 북쪽 극단에 위치한 섬들 사이의 척박한 땅에서 주로 수렵 생활을 하는 종족들의 몇 가지 의식을 연상시킨다. 곰, 엘크, 사슴과 같이 덩치가 큰 동물들의 뼈는 바구니에 담거나 단 위에 수북하게 쌓았고, 때로는 가죽 속을 짚이나 덤불로 채워 넣기도 했다. 18세기 중반 무렵 의식용 제물을 준비하는 일을 맡았던 라플란드 지역의 무당들 no'aidi은 덴마크 선교사들에게 뼈를 조심스럽게 수집하고 보관하는 이유가 이렇게 함으로써 제물을 봉헌받은 신이 죽은 동물들을 이전보다 더 살찐 모습으로 되살려 ...  

- 늑대로 변신하는 능력이 주기적으로 매우 다양한 규모의 집단들이 지닌 능력으로 여겨진 것은 틀림없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네우로이족 모두가 그 능력을 지니고 있었고, 기랄두스 캄브렌시스 Giraldus Cambrensis에 따르면 아일랜드 오스라이 지역의 주민들이, 플리니우스 Piinius에 따르면 아르카디아의 안티 Anthi가 같은 특정 가문이 그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보름스의 부르카르드는 11세기 초반에 이 신앙을 미신이라고 비난하면서 (대모들과 동일시되는) 파르카이가 점지한 개인들이 이 능력을 지녔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성에는 몇 가지 반복적인 요소들이 동반된다. 첫째, 변신은 그 지속 시간이 다양하기는 해도 언제나 일시적으로 이루어진다. 즉, 파우사니아스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그 기간은 아르카디아에서는 9년, 중세 아일랜드에서는 7년(또는 7년을 주기로 특정 기간 동안), 게르만 지역과 발트해 인근에서는 12일이다. 둘째, 변신에 앞서 의식적인 동작들이 행해진다. 이를테면, 늑대인간은 옷을 벗어 오크나무 가지에 걸치거나(플리니우스), 땅에 내려놓은 다음 주변에 소변을 보았다(페트로니우스 Petronius), 그러고는 연못(플리니우스에 따르면 아르카디아의 경우)이나 강(비테킨트에 따르면 리보니아의 경우)을 건넜다. 

- 미래의 탈토시들은 이 기간에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었다." 때로는 자신의 몸이 산산조각 나는 꿈을 꾸거나 (예를 들어 매우 높은 나무에 기어오.르는 것과 같은) 특별한 시험을 치르기도 했다. 탈토시는 종마나 황소 또는 불꽃의 형상을 하고 주기적으로(1년에 세 번 또는 7년마다 한 번) 전투에 참가했다. 그들은 보통 자기들끼리 전투를 벌였다. 드물게는 마녀와 주술사들과 전투를 벌였고, 때로는 터키인이나 독일인 같은 외부 출신의 적들과 전투를 벌였다. 터키인과 독일인 역시 동물이나 불꽃의 모습이었지만 색깔은 달랐다. 동물로 변하기 전에 탈토시는 일종의 뜨거운 기운에 지배되어 말을 더듬다가 곧바로 영적인 세계로 빠져들었다. 종종 전투는 구름 속에서 전개되었으며 폭풍을 동반했다. 승리를 쟁취한 자는 7년간 또는 이듬해의 풍족한 수확물을 보장받았다. 이 때문에 가뭄이 닥치면 농부들은 비를 내리게 하기 위해 돈과 선물을 탈토시에게 바쳤다. 한편 탈토시는 폭풍을 일으키겠다고 협박하거나 그들의 공적(숨겨진 보물을 찾아내고, 사악한 마법에 걸린 자들을 치료하고, 북이나 체를 두드리며 마을의 마녀들을 색출해냈다)을 자화자찬하면서 농부들에게서 우유와 치즈를 갈취했다. 하지만 탈토시의 능력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소명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들은 그 소명에 저항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열다섯 살이 되면, 때로는 그보다 더 나이가 들어서) 이들은 활동을 그만두었다. 이러한 도식적 설명을 통해 탈토시와 베난단티의 유사성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두 경우 모두에서 입회 의식이나 연장자의 부름 받기, 동물로의 변신, 풍요를 위한 전투, 마녀를 색출하고 사악한 마법의 희생자들을 치유하는 능력, 자신의 특별한 임무를 거스를 수 없다는 인식, 그리고 때로는 자신에 대한 종교적 정당화를 발견한다. 하지만 이러한 유사성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크레스니키는 형식적으로든 지리적으로든 중간적인 용어인 것 같다. 예를 들어 이들은 베난단티처럼 막에 싸인 채로 태어났지만 탈토시처럼 동물의 형태로 변신하여, 역시 동물로 변신한 다른 크레스니키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일련의 고정된 형태는 그 속에 내포된 이질적인 현상들과 대비를 이룬다. 다시 말해 헝가리의 탈토시는 우리를 인도유럽어권 밖으로 데려간다.

 

- 반면 19세기 초반의 동양학 연구자인 율리우스 클라프로트 Julius Klaproth의 연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코카서스 북부의 산악 지역을 떠돌던 오세트 족은 인도유럽어권에 속한다. 클라프로트는 고대 스키타이족과 중세의 알란족과 오솔라 계곡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머나먼 후손인 오세트 족의 언어를 연구하여 이들이 이란계에 속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하지만 이들의 종교에도 관심을 가졌던 그는 이 종교를 "기독교와 고대 미신들의 기이한 혼합"으로 정의했다. 그는 이들이 최고의 수호자로 간주하는 선지자 엘리야를 향한 열정적인 숭배에 대해 기술했다. 이들은 신성한 동굴에서 양을 제물로 바치고 고기를 먹었다. 그다음에는 거대한 나무 아래에 그 가죽을 펴놓고 선지자의 축일에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숭배했다. 이들의 의식은 우박이 그치고 풍요로운 수확을 보장받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오세트 족은 그들을 잠에 빠지게 하는 '만병초 식물 rbododendron caucasicum'의 연기에 취하기 위해 동굴에 가곤 했다. 이때 꾼 꿈들은 전조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들은 신성한 바위에서 살며 사례를 받고 미래를 점쳐주는 전문적인 축복 기원의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늙은 남자와 늙은 여자도 있었다. 이들의 의식에 관여하는 여신인 이로데아사, 아라다. 도암나 지네로르는 그들에 상응하는 서양의 신들처럼 죽은 자들의 여신임이 분명했다.      
 

- 1월 1일에 동물 가면을 쓰는 것에 대한 켈트 지역의 자료들에서는 여성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찾아볼 수 없다. 이 경우 언급이 없다는 점은 증거로서의 가치를 가진다. 성직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들의 참여가 관습들의 수치스러운 성격을 강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발칸반도와 슬라브 지역의 계절 의식들에 등장하는 것과 유사한 젊은이 집단이 그러한 관습들에 가담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기껏해야 몰다. 비아의 칼루크제니처럼, 예외 없이 여성으로 변장한 남성 집단들을 다룰 뿐이다. 하지만 항상 홀수로 구성된 여성 집단들이 남성으로 변장하고 칼로 무장한 채 성령강림절 행사에 참가했던 세르비아 크로아티아의 크랄리체는 전혀 예외적인 경우다. 이 점이 우리를 좀 더 오래 전의 시기로, 이를테면 남자든 여자든 각자 상징적으로 자신들의 성 정체성을 부정하면서 공개적으로 의식에 참여하던 가장 오래된 시기로 데려간다고 말할 수는 없다. 

 

- 우리는 사적인 탈혼 상태의 경험에서도 특별한 성적 성향이 드러나는 것을 보았다. 이를테면 밤의 여신을 추종하는 여성 중심의 행렬이 있었고, 풍요를 위한 전투에 참가하는 남성 중심의 집단이 있었다. 후자의 특징은 컬루샤리의 경우에 대략적으로만 드러난다. 하지만 남성 베난단티와 비교하면, 비록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분명히 상응하는 측면이 존재한다. 두 경우 모두 각각 루살리와 마녀가 건 사악한 주술을 전문적으로 치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 모두는 연령대가 다양하기는 하지만 대체로 청소년기와 일치하는 특정 기간 동안 비밀스러운 집단의식들에 - 전자의 컬루샤리는 물리적으로, 후자의 베난단티는 영혼의 상태로 참여할 것을 강요받았다. 이들이 속한 의식의 집단과 신화적 집단은 모두 군대식으로 입회 의식을 치르는 조직으로 지도자의 지휘를 받았으며 자신들만의 깃발과 악기 그리고 식물성 무기들(컬루 샤리는 마늘과 쑥, 베난단티는 회향풀 다발)을 휴대했다. 컬루샤리의 동물 변장은 베난단티들에 의해 묘사된 동물로의 변신 이미지들 또는 동물 잔등이를 타고 하늘을 나는 것에 상응한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의 이름이 말해주듯이, 컬루샤리(또는 작은 말을 의미하는 카발리 caballini)들은 말의 갈기를 몸에 걸치거나 말머리 장식이 달린 지팡이를 들고 다닌다. 오래전에 이들은 수사슴이나 늑대의 가면을 쓴 춤꾼을 대동하고 다녔다. 이들의 춤에서 볼 수 있는 높은 도약은 루살리의 비행과 말의 도약을 흉내 낸 것이다. 컬루샤리 집단은 사실 신화적인 산토아데리 santoaderi, 즉 말의 꼬리와 발굽을 갖춘 모습으로, 카니발 주간에 죽은 자들과 관련이 있는 성 테오도로 san Teodoro의 축제를 기념하여 체인을 끌고 북을 치면서 밤에 마을 곳곳을 위협적인 모습으로 돌아다니던 기사들로 조직된 신비의 단체를 모델로 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응성은 루살리와 산토아데리를 하나로 묶어준다. 다시 말해 성 테오도로의 또 다른 축제가 부활절로부터 24일이 지난 후에 열릴 때 이들 무리는 서로 만나 함께 즐기고 끝날 무렵에는 숲에서 채취한 레몬밤 다발(토도루세 todoruse)을 교환한다.  

      

-  즉 스파르타의 크립테이아 krypleia처럼 입회 의식을 치르는 집단의 구성원들은 도시 외곽의 야생 지대에 고립된 상태로 일정 기간 머문 후에 시험(도둑질, 우연히 마주친 천민들을 죽이는 살인 행위)을 통과해야 했다. (헤로도토스와 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테살리아의 주민들에 대항하여 얼굴과 무기에 석회를 바른 채 밤을 틈타 행진하던 포카이아 주민들, 타키투스가 적들에게 공포심을 주기 위해 방패와 얼굴에 검은 칠을 하고 전투에 참가함으로써 죽은 자들의 군대 exercious feratis에 비유되었던 (게르만의) 하리 Harii 족은 입회 의식을 치르는 집단에 비유되었다. 아이슬란드의 영웅 전설들에서 볼 수 있는 호전적 분노와 맹수로의 변신은 베르세르키르 berserkir(문자 그대로는 '곰의 가죽'을 의미한다)를 오딘이 이 그는 죽은 자들의 무리의 살아 있는 화신으로 만들었다. 이 모든 사례에서 죽은 자들의 무리와 동일시된 것과 관련이 있는 공격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우리의 연구는 외견상 아동들의 구걸 행위가 드러내는 장난스런 폭력과는 거리가 있지만 신화적 모체는 동일하다.  

 

- 컬루샤리의 의식들에서는 베난단티가 탈혼 상태에서 벌이던 극적인 전투에 대한 정확한 반향을 찾아볼 수 없다. 물론 폭력적인 환경은 젊은이들의 무리가 의식을 수행함에 있어 항상 장난스러운 것만은 (또는 단지 그런 것만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의식에 있어서도 애매모호한 측면들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특히 슬로베니아의 촐레다리와 마케도니아계 불가리아의 에스카리는 인근 마을들에서 온 동료들에게 상당한 적개심을 갖고 있었다.  

 

-  좀더 일반적으로, 말머리 장식이 달린 지팡이를 사용하는 것과 같은 요소들에 근거하여 춤과 계절 의식이 샤먼 의식들로부터 유래되었다는 것은 근거가 불충분한 주장이다. 여기서 우리는 출생 당시 신체적 특징 같은 것을 통해 탈혼 상태에 대한 구체적인 소명을 받은 남성이나 여성을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대부분 소년이나 취은 청년으로 구성된 남성 중심의 집단(여성들이 배제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잡다한 무리를 지칭하는 가장 오래된 증거다)을 발견한다. 첫 번째 경우에서 죽은 자들의 세계와 맺는 상징적인 관계는 전문가들에게, 두 번째 경우에서는 특정 연령대의 구성원들에게 위임되었다. 그럼에도 위의 두 가지 경우는 예를 들어 중국의 대규모 축제인 타노 Ta No에 대한 기술에서 드러나듯이, 양립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전년도 12월 하순부터 새해 1월 중순까지 열리는 계절 의식인 타노 축제에서는 죽은 자들의 영혼이 추모되었다. 여기서는 붉은색과 검은색의 의상을 입고 네 개의 노란색 금속 눈을 붙인 곰의 가죽을 두른 한 인물이, 붉은색과 검은색이 반반인 튜닉을 입고 머리에는 붉은 모자를 쓴 열 살에서 열두 살 사이의 소년 소녀 120명을 이끌었다. 이들 무리는 지난해의 전염병들을 황궁의 담장 밖으로 몰아내기 위해 복숭아나무로 만든 활에 산사나무로 만든 화살을 걸어 쏘았다. 1년 열두 달에 상응하는 열두 개의 동물 가면들이 전염병을 나타냈다. 다른 동물들의 가면(호랑이 가면도 있었다)은 전염병 동물 집단의 반대 집단이었다. 

 

- 어쨌든 스키타이족의 종교와 조로아스터교의 샤머니즘적인 요소들은 (매우 논쟁적이기는 하지만, 어느 한 의견을 따르자면)중앙아시아 스텝 지대의 문화와 접촉한 결과일 것이다. 스키타이족에게도 버드나무 막대기나 참피나무의 껍질을 이용해 미래를 점치는 전문적인 주술사들이 있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역사>제4권 67연, <역사> 제1권 105), 스키타이족의 샤먼들은 에나레이 Enarei, 즉 남자가 아닌 자, 남자-여자라고 불렸다. 이러한 명칭은 시베리아의 샤먼들 사이에서 성전환 및 복장 도착이 빈번했으리라는 사실을 짐작하게 한다. 비록 상당히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훨씬 많은 정보는, 기원전 7세기에 다르다넬스 해협(마르마라 해의 작은 섬)에 살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리스인 프로콘네소스의 아리스테아스 Aristea di Proconneso에 대한 전설을 통해 전해졌다. 단지 몇 구절만이 전해오는 <아리마스피의 노래 Canti arimaspi>에서 아리스테아스는 어떻게 자신이 아폴로에게 홀려 식인종인 이세돈 Issedoni족의 거주지 북쪽을 헤맸고, 또 이들보다 북쪽에 거주하는 존재들, 즉 외눈박이 아리마스피 Arimaspi, 보물을 지키는 그리폰 Grifoni, 그리고 이페르보레아 Iperborea에 대해 듣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헤로도토스는 자신의 책에서 이 여행이 사실이라고 말하면서, 아리스테아스가 한 세탁업자의 가게에서 죽었다가 신비하게도 두 차례나 다시 살아난 -6년 후에 프로콘네소스에서, 심지어 240년 후에는 메타폰토에서 부활했다- 기적적인 사건의 주인공이었다고 했다. 이 섬에는 아폴로의 동상 옆에 또 하나의 동상, 즉 아리스테아스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그 모습은 까마귀의 형상이었다. 이러한 신비한 특징들은 이후의 전설들에서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티로의 마시모 Massimo di Tiro(2세기)에 따르면, 아리스테아스의 영혼은 마치 새처럼 하늘을 날아가기 위해 활력을 잃은 육신으로부터 일시적으로 빠져나갔다. 하늘에서 바라본 대지와 강과 주민 들은 이후 그의 시의 주제가 되었다. 플리니우스(<자연의 역사 Naturalis Historia> 제7권 174행)는 아리스테아스의 영혼이 까마귀 형상으로 입에서 빠져나가는 모습의 동상에 대해 언급했다. 다른 증언들에 따르면, 아리스테아스는 자신이 원하면 강경증에 빠져들 수 있으며, 탈혼 상태의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는 전염병, 지진, 홍수 등을 예견했다. 이 모두는 기원전 7세기부터 흑해 연안에 세워진 그리스 식민지들이 스키타이족의 문화로부터 일부 샤머니즘적인 요소들을 수용했음을 보여준다.

 

- 이러한 일련의 (불완전한) 신화들은 대체되거나 다소 완화된 형태로 표현된 유사한 구조를 가지는데, 이는 고의적인 존속살인과 모친과의 자발적인 근친상간을 예견하는 급진적 가설의 형태로 시작된다. (당연히 불멸하는) 천상의 신들의 거세 또는 권력 상실은 위 목록의 다른 사례들에서 볼 수 있듯이, 고의적 존속살인의 완화된 형태로 간주될 수 있다. 이와 유사하게, 비고의적으로 이오카스테 Iocaste와 몸을 섞은 오이디푸스,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아우게와의 혼인을 피한 텔레포스, 키르케의 아들로 계모인 페넬로페 Penelope와 혼인한 텔레고노스(그와 매우 닮은 페넬로페의 아들 텔레마코스 Telemachus는 키르케와 혼인했다) 등의 경우는 모친과의 고의적 근친상간을 점진적으로 완화시켜 표현한 판본들로 여겨진다. 이러한 신화들은, 때로는 보다 구체적인 특징의 집합점들로 보강된, 구조적 질서의 유사성들로 매우 촘촘하게 짜여진 망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이제는 장님이 된 오이디푸스가 콜로노스에 갔을 때, 유배지에서 함께 보낸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테세우스의 환영과 보호를 받는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소포클레스의 작품을 보면 두 신화의 공통적인 요소가 살짝 드러난다. 
 

- 영웅 아킬레우스 이전에는 호메로스가 알지 못했던 한 전통에 따르면, 흑해의 북쪽 해안가 올비아의 맞은편에 위치한 레우카섬(오늘날에는 뱀들의 섬으로 알려져 있다)에 묻힌 죽은 자들의 신인 좀 더 고대의 아킬레우스가 있었다. 올비아섬은 스키타이족 영토 안에 있는 그리스 식민지였다. 기원전 7세기 말 알카이오스 Alcaeus는 오늘날 오직 한 줄만이 남아 있는 시에서 아킬레우스를 스키타이족의 군주'로 불렀다. 화가 소시아 sosia가 거대한 잔에 그린 그림에서 아킬레우스가 치료해주는 인물로 묘사된 부상당한 파트로클로스 Patroclus의 얼굴에서는 스키타이족의 특징이 확실하게 드러난다. 어쨌든 알카이오스의 시는 그리스 영웅들의 가장 대표적인 전형인 아킬레우스의 관습적 이미지에 색다른 요소를 추가한다. 어린 아킬레우스를 불에 넣은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의식과 관련이 있다. 첫째는 호메로스의 <데메테르 찬가>(231~55행)에 기술되어 있고, 둘째는 600년대 초 키오스섬에서 실제로 있었던 의식이었다. 데메테르 여신은 어린아이 데모폰 Demophon을 불멸의 존재로 만들기 위해 신들의 음식인 암브로시아를 발라 고통을 달래주면서 불에 넣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데모폰의 모친이 공포에 질려 하자 데메테르는 분노에 차 어린아이를 다시 인간의 온전한 모습으로 되돌려놓았다. 학자 레오네 알라치에 따르면, 키오스섬의 주민들은 크리스마스와 공현축일 사이의 기간에 출생한 신생아의 발밑에서 풀을 태우는 의식을 거행했는데, 그 이유는 신생아가 같은 기간에 지하 세계를 떠나 지상 세계를 배회하는 기형의 영혼들인 칼리칸차로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약 이러한 그리스 신화의 인물들이 고대의 켄타우로스에 기원한다는 가설을 수용한다면, 아킬레우스 -테티스처럼 말의 특징을 지닌 여신의 아들로서 켄타우로스인 케이론 Chiron에 의해 양육되었다- 와의 유사성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키오스섬의 어린아이들을 비참한 운명으로부터 구하려는 노력을 통해, 과거에는 그 대상인 인간에게 초인적인 조건을 부여하기 위한 입회 의식의 성격을 내포한 화해 의식을 재해석해볼 수 있게 된다. 기형 또는 비대칭 보행은 여기에서도 죽은 자들의 세계와 산 자들의 세계 사이를 떠도는 존재들(신, 인간, 영혼 등)을 구분해주는 표식이다. 
 

- 로도스의 아폴로니오스는 <아르고함의 원정>(기원전 250년경)에서 이아손의 동료를 태운 배가 키르케아로 불린 콜키스의 해안에 도착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곳에는 능수버들과 버드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다. 나무 꼭대기에는 시체들이 매달려 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콜키스의 주민들은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무두질하지 않은 가죽에 싸서 도시 밖의 나무에 매달아 둔다고 아폴로니오스는 설명한다. 반면 여성의 시신은 매장한다. (고대의 콜키스가 위치하고 있던) 코카서스에서는, 그리고 특히 오세트 족은 불과 수십 년 전까지도 이러한 매장 풍속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난 18세기에 몇 명의 여행가들은 중앙아시아의 야쿠트족이, 이제는 거의 사라진 이러한 풍속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긴 바 있다. 시신을 나무에 매달거나 조금 높고 평평하게 만든 무덤에 넣고 매장하는 관습은 중앙아시아와 북아시아의 대부분과 아프리카 일부 지역을 포함하는 방대한 지역에서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죽은 자의 시신을 동물 가죽으로 감싸거나 꿰매는 것은 상당히 독특한 관습이다. 그리고 죽은 동물의 가죽으로 감싸 뼈들을 수습하는 것에 근거한 유라시아 부활 의식과의 유사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의식은 코카서스의 전설들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한 가지 난해한 특징을 해독할 수 있게 해 준다. 오세트 족 사이에서는 소슬란이 의도적으로 도살한 소의 가죽을 덮고 죽은 척하는 전략을 구사하여 도시를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는 이야기가 회자된다. 이러한 특징은 어쩌면 과소평가된 것인지도 모른다. 동일한 전설을 바탕으로 하는 치르카시아 주민들의 여러 이야기들에서 소슬란은 마치 진짜로 죽은 것처럼 심한 조롱을 받는다. "어이, 다리가 비틀린 주술사, 벌레들이 자네 몸을 덮는다네." 어린 시절 불멸의 존재가 되기 위한 시도가 실패하면서 무릎이 허약해진 소슬란은 사실 샤먼의 일종인 주술사로서, 산 채로 사후 세계에 다녀오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능력 덕분에 그는 자신을 감싼 소가죽을 통해 부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뼈의 수습에 근거한 의식과의 유사성은 충분하지 않다. 동물 가죽의 의미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절름발이의 경우에 적용된 전략과 유사한, 보다 간접적이고 포괄적인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  마테 블랑코(Matte Blanco, L'inconscio cit., pp. 44~45 등)에 따르면, 무의식 체계에서는 모든 관계가 대칭적으로 처리되는 원리가 작동한다. 예를 들어 아버지는 아들을 낳고, 아들은 아버지를 낳는다. 그러나 치료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원리는 항상 제한된 상태로 적용되었다. "대칭의 원리는 어떤 구체적인 시점에 나타나며, 마치 강력한 염산처럼 그것이 적용되는 영역의 모든 논리를 해체한다. 하지만 논리적인 구조의 잔재는 변하지 않은 상태로 남는다." 이러한 고찰은 신화로까지 확대될 수 있을 것이다. 대칭을 유지하는 방식에 대한 분석(하지만 뷔셰는 대칭화하려는 경향'에 대해 이야기할 것을 제안한다. Bucher, <Ensembles>)은 어쩔 수 없이 부적당한 용어를 사용하더라도 우리가 무의식 체계의 기능을 기술할 수 있게 해준다. ... 야콥슨은 은유의 극과 환유의 극이 형성하는 대조(제유법을 포함하여)를 (프로이트를 언급하며) 꿈에서 재발견한다.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어느 시점에 이르자, 졸면서 쓴 글의 어색한 부분을 교정할 것을 생각하면서 나뭇조각을 대패로 밀고 있는 자신을 보는 한 작가의 사례를 인용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이 구절을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은유는 길들여진 사고가 작용하는 제유법을 잠시 동안 무효화시키는 야생적인 사고가 수행하는 퇴행적인 작용을 말한다."

 

- 늑대인간과 향정신성 물질 간의 완전히 독립적인 상관관계는 전혀 다른 언어적, 문화적 영역에서 가설로 설정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두번째 가능성을 마주하게 된다. 이란의 문헌들에서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왕가를 의미하는 어휘 '사카 하우마바르카 saka haumavarka'가 '하오마 haoma에 취해 늑대인간으로 변한 인간'을 의미한다고 여겨졌다. 이것은 남성 비밀조직들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여겨져 온 전사들의 광적인 정신 상태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해석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더욱이 하오마가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조로아스터교의 성전인 <아베스타 Avesta>에서는 적어도 그 기원이 소마 soma와 같은 식물로 언급되고 있다. 베다 경전의 시에서 고상한 어조로 묘사된 물약은 이 소마에서 추출한 것으로 보인다. 소마와 하오마가 어떤 식물인지를 확인하려는 수많은 노력이 실패한 이후(둘 중의 하나 또는 두 식물 모두와 관련된 주장에는 기장, 포도, 대황, 인도 대마 등이 포함된다). 텍스트에 포함된 내용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듯한 가설이 제기되었다. 그에 따르면, 소마는 '광대버섯 amanita muscaria'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버섯을 섭취하거나 즙을 짜서 (때로는 물과 함께 섞어) 마신 자, 또는 이 버섯을 먹은 자의 오줌을 마신 자는 탈혼 상태와 같은 최면 상태에 빠지거나 유사 증세를 일으킨다(후자의 경우에는 효과가 특별히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베리아의 주민들은 (알타이족은 제외하고) 이 버섯을 광범위하게 사용한다.  

 

- 여기에서 버섯, 두꺼비, 비대칭 보행의 세 가지 요소로 얽힌 매듭의 형상이 드러난다. '지체장애인 pied bot'을 뜻하는 형용사 'bot'과 두꺼비를 뜻하는 명사 'bot'의 일치는 착각의 결과다. 그 이유는 두 용어가 서로 다른 어원(전자는 '둔화되다'라는 뜻의 'butt'에서, 후자는 부풀다'라는 뜻의 'bott' 에서 유래했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탈리아 북부의 방언에서 두꺼비라는 명칭이 '신발 scarpa' 실내화 ciabatta' 등의 명칭과 같다는 사실은 물론 외적 유사성으로는 추론될 수 없는 의미론적 연관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비록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버섯과 두꺼비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광대버섯은 중국에서 '두꺼비 버섯'으로, 프랑스에서는 크라포딘crapaudine('crapaud'는 두꺼비를 뜻한다)으로 불린다. '두꺼비 빵'을 뜻하는 'pin d'crapa'는 노르망디에서 재배되는 주름버섯(광대버섯도 포함된다)의 이름이다. 베네토주에서 '로스페르 잘로 rosper zalo'는 '애광대버섯 Amanita mappa'을 가리키고, 특히 트레비소에서 '푼고 로스페르 fungo rosper'는 독버섯인 '마귀광대버섯 Amanita pantherina'이다. 먹을 수 없는 버섯인 '두꺼비 버섯 zabaci huby' 또는 '두꺼비와 유사한 것 zhabjachyi hryb'은 각각 슬로바키아(타트라 산악 지역)와 우크라이나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들이다. 그 외에 '두꺼비 의자 road stool' '두꺼비 모자 road hat' 등을 뜻하는 용어는 영어, 아일랜드어, 웨일스어, 브르타뉴어, 프리지아어, 덴마크어, 독일 서부 지역의 언어, 노르웨이어로 버섯을 의미한다. 못생기고 불쾌하며 심지어 사악하다고 여겨지는 두꺼비가 이처럼 버섯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은 버섯에 대한 켈트 문화권의 적대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이미 살펴보았듯이, 버섯과 두꺼비의 언어적 근사성, 특히 광대버섯과 두꺼비의 언어적 근사성은 켈트 문화권을 벗어난 지역, 심지어 중국에서도 등장했다. 만약 두꺼비에 대한 부정적인 함의가 나중에 추가된 것이고 피상적이라는 이유로 배제한다면 다른 설명이 가능해진다. 이탈리아 북부로부터 독일, 우크라이나, 폴란드에 이르는 지역들에서 두꺼비는 '요정' '마녀' 주술사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탈리아어의 두꺼비 rospo'는 라틴어 아루스펙스 haruspex에서 유래하는데, 이는 라틴인들이 에트루리아에서 차용한 용어로 주술사' '점쟁이'를 뜻한다. 두꺼비도 '광대버섯'과 비대칭 보행과 마찬가지로, 많은 문화권에서 비가시적인 것과 관련된 상징적 매개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이 두꺼비 피부의 분비물에 함유된 물질인 뷰포테닌의 향정신성 효능에 따른 것인지 여부는 확신할 수 없다(이 주제에 대한 견해들은 논쟁적이다). 

 

- 우리는 광대버섯이 유럽의 산악 지역에서 상당히 많이 자라는 전나무와 자작나무와 같은 나무들에 기생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알프스, 쥐라산맥, 피레네 산맥의 지역들에서 마녀재판이 특히 빈번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진 바와 같다. 피고인들 대부분의 자백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이단 심문관들이 제시한 모델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샤머니즘적인 탈혼 상태에 대한 내용이 드러난 소수의 예외적인 재판들에서도 광대버섯의 존재는 언급되지 않는다. 롬바르디아, 베네토, 에밀리아의 방언들에서 광대버섯을 가리키는 '코흐 마트 coccb matt' '코코 마토 coco mato' '오볼 마트 ovol matt' '볼레 마트 bole mat'와 같은 용어들이 의식장애 상태와 연관성을 가진다는 점은 재판 문서들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단지 몇몇 사례에서만 의심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우리는 14세기 말 피에몬테의 이단 재판에서 키에리 근교의 안데제노에 사는 빌리아 라 카스타냐라는 여성이 난교 의식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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