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blog.kakaocdn.net/dn/bdUzgm/btrpzLlk396/EvQ9zmUm5UFK12ISFzcY40/img.jpg)
저자 : 신우인
출판 : 포이에마
출간 : 2013.05.27
이런 본격(?) 종교서는 읽기가 꽤 힘들다. 적당한 거리감이 있는 종교사학자들의 책은 즐겁게 읽을 수 있지만, 신학자들의 책은 아무래도 생각이 조금 다른 상태에서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이 책은 아마도 저자가 자신의 설교를 모아 정리한 것 같다. 목회를 그만두고 선서 공부에 매진할 수 있어 기뻤다가, 다시 목회로 돌아와 기쁘다는 언급 등이 있다. 현재 내가 삐딱한 상태라 그런 것 같기도 한데, 조금씩 상충되는 부분들이 걸려 쭉 읽어나가지 못했다.
보속의 예수님이 오셨으나 여전히 벌을 내리기도 하는 하나님,
그러나 그런 두려움을 이용해 신자들을 옭아매려는 잘못된 목회자들.
중개자 없는 연결과
교회와 목사를 통한 예배의 관습적 당위성.
모든 이들을 평등하게 사랑하라는 메시지와
다른 종교, 혹은 다른 교회와 우리 교회 사람들을 나누는 거리감.
이런 식으로 접근하자면 모든 것이 모순적이지만 특히 힘든 부분들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만약 일어나야만 한다면- 진정한 전도란 바람직한 자신의 삶을 통한 방법뿐이지 않을까 싶다. 당장 삶에 짓눌린 이에게 말씀을 믿는다고 약속하라는 일종의 강요에 가까운 지시를 내리고 그 후에야 약간의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은 종교인의 자세가 아닌 것 같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행동을 보이면 메시지와 가르침은 저절로 전해지지 않을까.
같은 선상에서 진정으로 자신의 하나님과 소통하는 신자에게 성전과 예식은 의미가 사라진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저자가 말한 것처럼 바리새인들의 율법에 대한 집착과 마음 없는 역겨운 성례식이 무의미하다면, 결국 자신의 마음과 믿음이 있는 곳이 성소가 되는 것이다. 저자 역시 이 점을 의식한 듯 예배와 교회, 목사는 중요하다고 언급하지만 무엇이 다른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설명은 하지 않고 있다.
누군가보다 앞서고 위에 서는 일이 없도록 하면서 낮은 곳에서 섬김을 통해 가르침을 전하라는 것이 메세지라면, 타 종교에 대한 비난이나 비판은 오히려 삼가고 스스로의 자정을 위한 목소리를 높여야 맞지 않을까. 언제나 어떤 교회를 나가도 상관이 없어야 하지 않을까. 발길 닿는 가장 가까운 곳을 가도 하나로 통하는 같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으며, 그 뒤로 또 다른 곳을 가더라도 형제와 자매로 맞아주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는데 저서 안에서도 '저희 교회'와 '다른 교회'로 나뉘는 점이 안타깝다.
항상 자신을 돌아보기는 어렵고 남을 뜯어보기는 쉽다.
결국 내 눈에 걸렸던 이런 부분들이 내 안에 있음을 인정하고 고쳐나가야 하는데, -당장 나부터 나와 저자의 생각이 다름을 꼬집고 있으니- 포용이 어렵다면 적어도 내가 믿는 바대로 행하며 살려고 노력이라도 해야 마땅하다. 아직도 내가 종교인인가에 대해서는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지만, 적어도 '옳은 방향'이라고 믿는 대로 살아갈 생각은 있으니까.
내가 존재하기 위해 소비하는 많은 것들로부터, 조금이라도 유익한 뭔가를 남길 수 있기를 바라며.
- 종교는 가장 오래되고 진부한 아이디어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잘못은 완전히 새로운 생명의 길인 기독교를 가장 오래되고 진부한 종교로 바꿔버린 것입니다. 전도와 헌금, 봉사 활동을 열심히 해서 복 받으라는 그런 기복적인 신앙과 다를 바 없는 싸구려 종교로 전락시킨 것입니다.
- 피터 다니엘스는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인 필립스에게 언제나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넌 썩은 사과 같은 존재야. 넌 결코 어떤 자리에도 오르지 못할 거야!" 그도 그럴 것이 피터는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난독증 환자였습니다. 인생의 낙오자입니다. 스물여섯 살이 된 그에게 어느날, 한 친구가 밤을 꼴딱 새우며 <생각하라 그리고 부자가 되라>라는 책을 읽어주었습니다. 이 책이 피터 다니엘스가 읽은 유일한 책입니다. 깊은 감명을 받은 피터는 부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성실하게 열심히 일했습니다. 모든 역경과 실패를 이를 악물고 참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큰 부자가 되었고, 천신만고 끝에 글도 깨우쳤습니다. 그리고 책 한 권을 썼습니다. 제목이 <필립스 선생님, 당신이 틀렸습니다>였습니다.
(리뷰자 주 : 나폴레온 힐이 여기서 나오다니.)
-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얻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사 14:12-15)."
- 먼저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 누구인지 아셔야 합니다. 계명성은 샛별, 곧 금성을 말합니다. 별 중에서 가장 먼저 떠올라 가장 밝게 빛나는 별입니다. 이 샛별은 당시 떠오르는 별인 바벨론 왕국을 상징하는데, 가장 찬란한 바벨론 왕국도 결국은 가장 비참해질 것이라고 예언한 것입니다. '루시퍼'라는 이름을 들어보셨습니까? 모든 악을 일으키는 사탄의 이름입니다. 루시퍼는 '빛을 가져온 자'라는 뜻으로 lux(빛)와 ferre(가져오는)가 합쳐진 말입니다. 샛별이 별 중에서 가장 먼저 뜨는 가장 밝은 별이라서 붙여진 이름으로, 처음에는 사탄과는 관계가 없었던 이름입니다. 그러다가 점점 사탄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단테의 <신곡>과 존 밀턴의 <실낙원> 같은 책을 통해서 대중에게 알려졌습니다.
- 그런데 이 샛별의 몰락 이미지는 아주 오래된 것입니다. 가나안에서는 샛별의 신을 '샤헬'이라고 부르며 숭배하였는데, 샤헬은 자신보다 유일하게 더 밝은 태양신의 영광을 질투하여 여러 별들을 거느리고 쿠데타를 일으켜 그 옥좌를 빼앗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실패하여 번갯불처럼 하늘에서 땅으로 던져졌습니다. 그렇게 땅에 떨어진 샛별은 사람들을 규합하여 태양신에게 대항한다는 신화입니다. 이 외에도 고대 중동 지역의 여러 관습이나 신화들이 성경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 어떤 사람들은 펄쩍 뛸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하나님의 신성한 성경에 잡신들의 신화가 끼어들 수 있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흥분할 필요가 절대로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행한 할례도, 유월절에 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는 것도 모두 그전부터 있었던 관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관습에 전혀 새로운 영적 의미를 부여한 것입니다. 십자가 역시 그전부터 있었던 처형 방법으로 최악의 저주를 상징합니다.그 십자가에 예수님께서 달리심으로 최고의 사랑과 은혜의 의미로 바꿔주셨습니다. 타락한 천사이자 악의 화신인 루시퍼가 끝내 무저갱으로 들어간다는 개념은 예수님도 사용하셨습니다. 거라사 땅에서 한 남자를 사로잡고 있는 귀신은 루시퍼의 부하인데, 그 귀신이 예수님을 보자,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눅 8:31)"했습니다.
-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에 따르면, 루시퍼는 원래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도록 허락받은, 가장 신뢰받는 천사장天使長이었습니다. 이름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그는 주위의 다른 천사들을 압도하는 아름다움과 용기 그리고 기품으로 가득 찬 천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총을 한몸에 받던 루시퍼는, 스스로를 위대하다고 여기면서 하나님 자리에 앉을 생각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이때 동조하던 모든 천사의 3분의 1도 함께 추방됩니다. 이 개념은 성경에도 나와 있습니다. "그[사탄]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계 12:4).
- 자, 왜 이렇게 자세히 설명을 드리는지 아셔야 합니다. 사탄과 귀신의 존재에 대한 무지 때문입니다. 동시에 지나친 관심 때문입니다. "그런 게 어디 있어?"라며 무시하는 태도나 "그런 게 정말 있대"라며 벌벌 떠는 태도나 모두 잘못된 태도입니다. C. S. 루이스는 사탄의 전략을 다룬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통해, 우리가 사탄을 무시함으로써 그들에게 무지하게 만들거나, 지나치게 신경 쓰면서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탄의 전략임을 지적했습니다. 두 가지 극단적인 태도 모두 악의 세력에게 휘둘리는 것입니다. 요즈음 교회들은 지나치게 사탄론, 귀신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들을 두렵게 하여 교회와 목사에게 꽁꽁 묶어두기 위한 전략 가운데 하나입니다.
- 그런데 본문에서 정작 중요한 것, 가장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아침의 아들 계명성", 루시퍼가 품었던 생각입니다. 루시퍼가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사 14:13).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14절). 하나님은 루시퍼에게 최고의 능력과 지위를 주셨습니다. 그 능력과 지위는 그에게 부여된 사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능력과 지위를 이용하여 뭇별 위에 군림하려고 했고, 나아가서는 지극히 높은 자, 즉 하나님과 겨뤄보려고 한 것입니다.
- 한없이 높아지려 했던 루시퍼의 생각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품게 되는 가장 보편적인 욕망입니다. 인간의 불행은 자신이 가진 능력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영역을 넓히려고 하는데서 시작합니다. 각자의 세력 확장은 상호 충돌이 불가피합니다. 별 볼일 없는 능력의 소유자는 미처 펴보기도 전에 당하고, 그나마 있는 것마저 빼앗깁니다. 그래서 억울해하고 와신상담하다가, 끌탕하다가 인생을 끝냅니다. 반면 이긴 자는 세력 확장에 돌입합니다. 하지만 더 강한 상대를 만나 새로운 힘겨루기 끝에 물러납니다. 높아지려는 마음이 곧 '교만'입니다. 높아지고 독점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반드시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래서 '교만'은 언제나 '파괴'를 동반합니다.
- 사탄의 별명은 여러 개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거짓의 아비' (요 8:44)입니다. 사탄의 모든 말은 거짓입니다. 거짓말로 사람들을 유혹해 올무에 걸려들게 하고 결국은 파멸하게 만듭니다. '밤낮 참소하던 자' (계 12:10)입니다. 스스로를 자책하고 위축되게 만들어 주저앉게 만듭니다. 한편으로는 남을 헐뜯게 하여 서로 대적하게 합니다. 사탄은 배후에서 우리가 서로 싸우는 것을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구경합니다. 이긴 사람에게 또 다른 사람을 붙여 이간질합니다. 그래서 사탄을 '파괴의 영'이라고 부릅니다. 그에게는 사랑과 동정심은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래야 힘 안 들이고 뭇별 위에 올라설 수 있으니까요. 동시에 하나님의 가장 사랑하는 인간들로 하여금 서로 싸우게 하여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으니까요. 또 다른 별명이 '말씀을 빼앗는 자' (막 4:15)입니다.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게 만들어 자신의 거짓말에 걸려들게 합니다. 사탄은 너무나 교묘하여 성경을 왜곡해서 가르칩니다. 기독교 이단들은 모두 성경을 들고 나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시간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입니다. 크로노스는 기계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이고, 카이로스는 의미가 담긴 시간입니다.
-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오기 전부터 가나안 땅에 거하는 사람들은 대대로 바알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건장한 남자 몸에 머리는 황소 모양을 하고 있는 바알은 고대 팔레스타인 지역의 '풍요와 번영의 신'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원래 유목민이고, 가나안 땅 사람들은 농경민입니다. 누가 더 잘살까요? 농경민이 더 잘 삽니다. 농경민은 유목민을 천대합니다. 농사를 지으려면 황소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바알 신의 머리가 황소입니다. 떠돌이 유랑민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오자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그곳의 도시는 화려했고 온갖 물자가 넘쳐났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도 그와 같은 풍요를 누리고자 바알 신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알 신을 섬기는 것을 '간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알 종교의 시스템을 알아보면 이 말이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파종기가 되면 가나안의 왕들은 모든 남자들을 이끌고 산 위에 있는 바알 신전을 찾아갑니다. 바알 신전에는 소위 '신의 딸'로 불리는 특별히 선발된 성창들이 있었습니다. 요즈음의 미인 선발 대회가 바로 이 성창 제도에서 유래했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자신의 딸인 공주가 성창으로 선발된 것에 감격스러워하는 글을 남겼을 정도로 오래된 제도이고 국가적으로도 공인된 제도였습니다. 신전을 방문한 남자들은 이들과 성관계를 갖는데, 신의 딸을 통해 바알 신의 능력이 상대방 남자에게 전달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신의 딸과 관계를 맺은 후에 씨를 뿌리면 풍년이 든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합법적인 매춘이었습니다. 이런 가나안의 음란한 문화에 물든 이스라엘 백성을 보며 통탄한 호시아 선지자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내 백성이 나무에게 묻고 그 막대기는 그들에게 고하나니, 이는 그들이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버리고 음행하였음이니라. 그들이 산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하니, 이는 그 나무 그늘이 좋음이라. 이러므로 너희 딸들은 음행 하며 너희 며느리들은 간음을 행하는도다. 너희 딸들이 음행 하며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하여도 내가 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남자들도 창기와 함께 나가며 음부와 함께 희생을 드림이니라.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리라(호 4:12-14)."
-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없고, 다만 하나님을 열심히 섬겨 복을 받겠다는 일념으로 목사는 종교 생활을 독려하고 교인들은 외적인 활동에 몰두합니다. 종교 생활에 몰두하면 입신, 방언, 투시, 환상, 예언, 진동 등 일상에서는 보기 힘든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이런 현상들은 나름대로 아주 좋은 가치가 있습니다. 이런 현상들의 많은 경우는(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과 일체감을 경험할 때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도 이런 현상들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현상들이 종교 생활의 목표는 절대로 아닙니다. 이러한 현상들을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하나님의 뜻을 보다 열심히 행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만약 이런 현상들이 정말 중요한 것이라면 신명기에 자세히 설명하면서 장려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딱 한 군데, 신명기 13장에서, 그 현상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렇게 하는 사람에 대해서 언급하셨습니다.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신 13:3). 여기서 끝나면 다행인데, 하나님께서는 무서운 조항을 하나 덧붙이십니다. "그런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 (신 13:5)."
-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고 베드로가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 2:17)." "그가 누구이든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꿈을 꾸리라." 이 말씀이 신약 교회의 출발을 알리는 나팔소리였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매달려 소원을 비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꿈을 꾸는 곳입니다.
- 세스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업이 탁월한 성과를 내면서 성공하면, 그 결과로 기업의 근본을 갉아먹는 자기 파괴의 습관이 무의식 중에 생겨난다." 현실 부정, 오만, 타성, 핵심 역량에 대한 과도한 의존, 눈앞의 경쟁만 보는 근시안, 규모에 대한 집착, 구성원들의 자기 영역 의식 등 일곱 가지가 전형적인 자기 파괴의 습관들입니다. 그중 가장 나쁜 것은 '오만'입니다. 그래서 기업의 리더들은 항상 기업 내의 오만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지 '교회에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지, "교회의 소금"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을 맛깔나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혹 세상의 기준에서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비굴해져서는 안 됩니다. 인생은 여행입니다. 여행 중에서 가장 못 봐줄 사람은 언제나 힘없이 아파하고 걱정하고 불평불만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요즘 청년들은 세계 여러 곳에 배낭여행을 다닙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 부족하고 지닌 것이 없다고 창피해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은 타인에게 쉽게 마음을 열고 친구가 되며, 없으면 서로 나눠 씁니다. 그러면서 한 군데라도 더 가보겠다며 신나게 여행합니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 잠시 배낭여행 왔다 여기면 어떨까요?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 흩어진 나그네라 했습니다. 나그네는 여행하면서 자신이 보는 어떤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 아름다움을 보며 경험하는 축복을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언제나 당당하고 신나는 여행자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서로 나누고 격려하며 살아갑시다.
- 아하스는 남왕국 유다의 왕 중 최악의 군주였습니다. 스무 살의 나이에 왕좌에 올라 16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그의 통치 기간 중에 가장 핵심이 될 만한 사안은 우상 숭배였습니다. 바알, 아세라 등 당시 가나안에서 섬기는 우상을 몽땅 유다로 들여왔습니다. 그중 가장 사악한 우상이 바로 몰렉이었습니다. 주로 암몬 족속이 섬기는 몰렉은 전쟁과 역병을 가져오는 파괴의 신으로, 그 같은 재앙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자녀를 불에 태워 바치는 끔찍한 인신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하스는 몰렉을 받아들여 예루살렘 외곽에 있는 힌놈의 골짜기에서 인신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 모든 인간은 어떤 체제나 이념보다도 존엄하며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움직일 수 없는 원칙입니다. 공산 치하의 그 사람들이 한 일은, 어떤 위협과 위험 속에서도 하나님의 원칙을 따라 산 것입니다. 현실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들은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자유로운 인간처럼 살았습니다. 그러자 존재도 없던 '자유와 존엄성의 산'이 '권력과 억압의 산'을 무너뜨리며 우뚝 섰습니다.
-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라는 이사야의 말이 정말 실현된 것입니다. '말일'은 '마지막 날'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말세', '말일', '마지막 날', '심판의 날', '여호와의 날' 등의 단어만 나오면 무조건 지구 종말의 날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다가는 이단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말일' 이란, 내 뜻대로만 행하던 것과 서로 이기기 위해 경쟁하던 것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던 것이 종식되는 날을 의미합니다. 모든 인간적인 방법이 소용없어지는 날, 하나님의 방법이 옳았음을 깨닫게 되는 날입니다. 바로 그날 여호와의 산이 우뚝 서서 모든 산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입니다.
- "전도와 봉사와 헌금으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시겠지” 생각하며 종교 생활에 더욱 매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별 소용없습니다. 사는 게 더 힘들어지고 하나님께 실망만 할 뿐입니다. 설사 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해결해주신다고 해도 일시적입니다. 문제는 내게 있기 때문입니다.
- 가장 중요한 것은 '무리'에서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상사가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지고 프로젝트를 할당합니다. 그때 상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있는 것을 여러분들이 확인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지시를 받은 사람들은 맡은 일들을 시작합니다. 상사의 인정을 받기 위하여, 또 상사가 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열심히 일을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차이가 납니다. 상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면 탈락이고, 상사가 원하는 것을 해오면 평균입니다. 상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아이디어를 찾아내야 합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아내려는 사람만이 무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전 직원의 99.9퍼센트가 무리 속에 남아 있는 이유는 새로운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 원칙을 이해하면 상사는 여러분에게 중요한 질문들을 더욱 많이 하게 될 것이며, 때가 되면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게 질문하는 자리에 있게 될 것입니다.
- 기억하십시오.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아내려는 사람만이 무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고, 때가 되면 다른 사람에게 질문하는 리더의 자리에 있게 됩니다.
- 코이노니아 농장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조던의 꿈은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다가 흐지부지 끝이 나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농장 구성원 중에 밀러드 풀러라는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조던의 인생관에 감명을 받고 자신의 재산을 정리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해비타트 운동입니다. 클레런스 조던의 코이노니아 농장은 실패했지만 그는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코이노니아 농장 근처에 땅콩 농장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농장 주인은 우리가 잘 아는 사람입니다. 바로 지미 카터입니다. 훗날 그는 조지아 주지사를 거쳐 미국 대통령이 됩니다. 지미 카터는 몇 안 되는 실패한 대통령으로 인식되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지미 카터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에 훨씬 더 멋지고 훌륭한 삶을 살아갑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해비타트 운동에 열심입니다. 지미 카터의 참여로 더욱 활기를 띤 해비타트 운동으로, 전 세계 곳곳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집이 30만 채 이상 세워졌습니다.
- 하나님의 마음을 오해하는 사람들은 고아 의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마련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에 집착합니다. 부르짖어 기도하며 하늘 보좌를 움직여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 합니다. 그런데 원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자신이 잘못하여 벌을 받는 것 같아 두렵습니다. 더욱 열심히 종교 생활에 매진합니다. 그런데도 소원이 이뤄지지 않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고 속았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 그때부터 엑터는 비셀 마을의 개척자가 되었고, 마을 중앙에 세워진 그의 동상 밑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졌습니다. "새로운 생활은 방향을 잡는 데서 시작한다." 개인이나 종교나 새로운 길을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똑같이 반응하여 똑같은 실패를 거듭하다가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모든 종교에서 일어나는 공통된 현상 두 가지가 있습니다. 치성을 드려 섬기는 신에게 잘 보이기와 신과 인간 사이에 누군가를 끼워 넣는 현상입니다. 430년간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출애굽 시키셨습니다. 출애굽은 영어로 exodus인데, '밖으로'라는 뜻의 'ex'와, '길'이란 뜻의 'hodos'가 합쳐진 말입니다. 출애굽이란 '길 밖의 새로운 길'입니다.
- 어떤 종교에서도 최하층 노예는 절대로 최상층 제사장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가장 오래되고 낡은 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노예를 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다. 아무도 가보지 못한, '길 밖으로 난 새로운 길'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자녀로서 평등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계급을 무너뜨린 전혀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에 인간들은 자꾸 계급을 만듭니다. 성경을 왜곡하여 성모 마리아를 만들고 베드로를 교회 수장으로 세웁니다. 그 계급은 점점 세분화되고 복잡해집니다. 다른 종교에서 행하는 똑같은 일들을 행하여 기독교도 다른 종교들과 구분이 없어집니다. 우리가 여기에 모인 것은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새로운 길을 새롭게 회복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서입니다.
- 커트 모텐슨은 자신이 쓴 <위대한 잠재력>에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기 위해서는 5C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인격 character, 능력 competence, 자신감 confidence, 신용 credibility, 일치성 congruence이 그것입니다. 인격과 능력과 자신감과 신용과 일치성을 고루 갖춘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 것 하나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없으며, 또 신뢰를 얻지 못하면 이 땅에서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 북왕국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오므리 왕조는 이스라엘을 솔로몬에 버금가는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먼 곳에 있는 나라들은 이스라엘을 '오므리'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였다" (왕 16:25)고 일축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업적과 성과에 관심을 두지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진실성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계십니다. '진실성'이란 무엇일까요? 진실성은 정직과 성실과 인내에다 사랑까지 더해진 것입니다. 그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이 아닌, '이타적인 사랑'이어야 합니다. 상대방을 진짜로 사랑할 때만 비로소 진실성이 드러납니다. 능력이 있고 정직하고 성실하며 자신의 감정까지 잘 다스리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만을 생각한다면, 그 모든 것들이 일순간에 빛을 잃고 맙니다.
- 무엇보다도 여호와와 연합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한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연합하다'는 히브리어로 '라와'입니다. 여기서 '레위'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레위인들은 여러 지파 중에 하나님께서 택하여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게 한 특별한 존재입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모든 사람들은 레위인들입니다. 레위인들이 하나님의 마음과 연합할수록 예배가 가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예배를 통하여 성도들이 하나님과 연합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 12지파 중 레위 지파를 제외하고는 모두에게 땅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 지파에게는 땅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섬기며 여호와를 사랑하며 여호와의 종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에 대하여 레위 지파입니다. 그런 존재들이 경제 위기로 인하여 흔들린다는 것은 너무나 창피스런 일입니다. 레위 지파들이 해야 할 일은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입니다. 그리하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더하십니다.
-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계 14:1-3)."
-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계 14:6-7)."
'활자가 흐르는 이야기 > Book2'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론 자만] 발도르프학교의 수학 - 수학을 배우는 진정한 이유 (0) | 2022.01.16 |
---|---|
[카를로 긴즈부르그] 밤의 역사 - 악마의 잔치, 혹은 죽은 자들의 세계로의 여행에 관하여 (0) | 2022.01.11 |
[제프리 버튼 러셀] 메피스토펠레스 - 근대 세계의 악마 (0) | 2022.01.08 |
[S.N. 고엔카] 고엔카의 위빳사나 10일 코스 - 내면의 평화에 이르는 여행 (0) | 2021.12.26 |
[얼 나이팅게일] 사람은 생각대로 된다 (0) | 2021.12.21 |
[맨리 P. 홀] 음악의 심리학 -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음악의 힘 (3) | 2021.1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