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엘리자베스 문] 잔류 인구

일루젼 2022. 1. 29. 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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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엘리자베스 문 / 강선재

원제 : Remnant Population

출판 : 푸른숲 
출간 : 2021.10.27 


 

 작년 가을쯤 구매했던 '겨울에 읽을' 책들을 어찌어찌 겨우내 읽고 있다.

<잔류 인구>는 표지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골랐던 걸로 기억하는데, 예상외로 취향이었다. 읽다가 눈물도 비추고 말았는데ㅋㅋ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이들과 평생을 살아오던 오필리아는 짐짝 취급을 받기 싫어 홀로 남기를 선택한다. 지금껏 그가 가꾸어 온 것들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들 사이에서 오롯이 홀로 지낼 수 있다면 정말 바랄 것이 없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는 자유를 위해 남은 시간들을 센다. 

 

해방. 누가 뭐랄 수 없는 완전한 자신만의 시간. 그녀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웃고, 즐겨도 누구도 그것을 막거나 비난하지 못한다. 정신없이 흘러가는 자신만의 순간들이 지나고, 서서히 자신이 혼자임을 자각할 즈음 그는 말이 통하지 않는 외계 생명체들을 조우하게 된다. 

 

인간, 노인, 여성, 현명한 자, 잔류자, 둥지 수호자.

 

저자는 오필리아라는 조각을 통해 인간사의 다양한 단면들을 여러 각도에서 비춘다. 

 

시대의 빠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노인들을 젊은이들이 어떤 시각으로 대하고 있는지.

경험에서 우러난 지혜들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이전 세대가 이룬 것들의 수혜를 당연하게 발판 삼아 나아가는 이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은 무엇인지.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자신의 것에 대한 집착은 어째서 당연한 것이 되어야 하는지. 

 

제대로 안내받지도, 보장받지도 못한 채 착취당하는 삶과 권리가 얼마나 만연한지.

그러나 그 안에서도 서로 돕고 나눌 수도 있지는 않았는지. 

 

신문물과 전통 사이에서 유연하게 대처할 줄 알았던 '살아남은' 이들이 그것을 편견 없이 받아들이고 공유할 수 있는 지성을 만나 '존중'받을 때 어떤 미래를 그릴 수 있을지.

 

책을 다 읽기 전까지는, 급변하는 기술들이 그것이 존재하기 이전을 기억하는 노년층에게 얼마나 '외계적'일지를 암시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존재들이 몸짓, 분위기, 흉내내기 등을 통해 서로 의사소통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그들이 오필리아에게 보내는 존중과 신뢰를 보았을 때. 우리가 잊고 있는 것들이 무엇일까. 조화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에게 낯설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무시하고 낮잡아보아 왔던가. '푸른 망토'는 꽤 인상적이고 이상적인 캐릭터였다. 만약 독자들에게 선택권이 있다면 인간들의 콜로니와 이종들의 콜로니 중에서 어느 곳에서 생활하고 싶은가? 보다 자연적이고, 그러면서도 불편하지 않고, 서로가 이미지로 공유되는 기억을 통해 세대를 거듭할 수록 빠른 속도로 현명하게 발전해가는 평등한 공동체는 후자였다. 

 

'존경할 수 있는 노년층'에 대한 로망이 있는 편이다. 그러나 그것을 찾기 위한 노력은 게을리했음을 솔직히 인정해야겠다.

치열하게 배우려고 노력하는 모습. 활자를 읽고 있다는 면피용 구실 뒤에 숨기만 해서 될 일은 아니다. .... 하지만 당분간은 조금만 더 즐겁고 싶어.

  


   

- 한 번도 임금을 받지 못한 피고용인, 오필리아는 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은퇴도 의료 혜택도 없는 피고용인. 얻는 거라곤 생산한 것 중에 스스로 소비하는 만큼뿐, 자력으로 먹고살며 잉여생산물까지 내야 하는 피고용인. 열대목재를 할당량만큼 정기적으로 선적하고 있지도 못하지만... 벌목량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성인의 수가 줄어든 지 오래였다.    

 

- "참 안타깝군요." 남자는 자신은 겪을 일 없을 불편을 애석해하는 사람처럼 말했다. "이렇게 잘 가꾼 정원이 쓸모없어지게 된다니..."

"쓸모없는 건 없어요.”

 

- 다음 날 아침 그가 처음 한 생각은 이랬다. 28일. 그리고 두 번째로 한 생각은 이랬다. 떠나지 않겠어. 28일 후 나는 자유야.

(리뷰자 주 : 원문 확인 시에는 she였지만, 나는 이 번역이 좋다.)

 

- 그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하루하루 보내고 있었다. 방해도 없고 성난 목소리도 없었다. 그것은 그만두고 이것을 하라고 요구하는 사람도 없었다.  

 

- 오필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까마득한 위쪽에 새파란 동그라미... 그 동그라미를 둘러싼 구름 벽의 상층부를 떠오르는 해가 금빛으로 칠했다. 듣던 대로 그림 같았다. 하지만 직접 나와서 보니 다르기도 했다.  

(리뷰자 주 : 태풍의 중심, 태풍의 눈에 서서 그 구름 벽에 비치는 햇살을 아래에서 올려다볼 수 있다면.)

 

- 정말 아름다웠다. 오필리아는 전부터 이런 폭풍을 우주에서 찍은 사진을, 푸른 바다 위의 우아하고 흰 소용돌이 구름을 좋아했다. 하지만 밑에서 봤을 때 이렇게나 아름다울 줄은 전혀 몰랐다. 구름 벽의 다채로운 파란빛과 회색빛과 보랏빛, 금빛이었다가 날이 밝으면서 눈처럼 하얘진 상층부, 그 위의 짙푸른 하늘, 그는 지금의 느낌을 표현할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름다움과 공포가 길항하고 있었다. 그는 발을 어루만지는 시원한 진흙 속에서 걸음 앞으로 갔다가 다시 뒤로 갔다. 

    

- 아니, 그럴 필요가 있었어. 그런 것이 필요하다는 걸 모르면서 살았던 평생 동안 그런 게 필요했어. 창작의 기쁨, 놀이의 기쁨은 가족과 사회적 의무로는 채워지지 않는 빈 곳이었어. 자식들을 더 잘 사랑할 수 있었을 텐데, 이제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게 놀이가 얼마나 절실했는지, 아름다운 것을 다루고 더 많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려는 스스로의 유치한 욕망을 따르는 일이 얼마나 절실히 필요했는지 더 일찍 알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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