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서울리뷰오브북스 편집부
김홍중, 권보드래, 송지우, 홍성욱, 장대익, 박진호, 조문영, 서소영, 신승철, 정재완, 박태근, 김영민, 김겨울, 김연수, 손보미, 이아립, 이석재
출판 : 서울리뷰오브북스
출간 : 2021.12.10
김겨울의 짧은 에세이가 실렸다는 이야기에 바로 구입했다. 사실 그녀가 발표한 모든 글과 책을 읽은 것은 아니지만, 멋대로 아껴읽고 있는 거라고 생각 중이다. 어딘가 날이 서있는 유머 감각이 좋고, 매끄럽게 읽히는 문장들도 좋다.
하지만 역시 단연코 돋보이는 건 <겨울서점>의 뽐 추천영상들이다. 그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뽐력 힘이 정말 대단하다. 매번 영업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넘어가고 마는 것은, 그렇게 읽어본 책들 중에 실망스러웠던 책이 없기 때문이다. 가끔 내가 마음에 들게 읽었던 책이 소개되면 뿌듯한 마음으로 흡족한 미소를 짓게 된다. 가벼운 팬심이라 칭하기엔 무리가 없는 상태다.
해서 <책 한 권 찾으려다 그 책의 씨를 말린 건에 대하여>을 읽기 위해 처음 만나는 <서울 리뷰 오브 북스>를 덜컥 구매하게 된 것이다.
책에 대한 리뷰나 서평, 칼럼, 대담 등 다양한 형태의 글들이 실려 있었고, 또 영화에 대한 글이나 소설, 에세이도 있었다. 사실 화려한 구성진들이다. 하나의 책에 대해 이렇게 심도 깊게 파고들어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그에 대한 하나의 완결된 글을 쓴다는 것. 서평집도 몇 권 읽어보았지만, <서리북>은 여러 가지 면에서 신선했다.
개인적으로는 이아립을 만난 것이 반가웠다. 내가 기억하는 그 이아립이 맞나? 싶어 확인해보니 '그' 이아립이 맞고, <픽션들>이라는 출판사를 열었다고 한다. <버스, 정류장> OST로 처음 알게 되었던 그녀의 목소리를 나는 아직도 사랑한다. 그리고 이제는 그녀의 글에도 반할 지경이다. 필립 말로와 페소아라니
세계의 확장인가? 깊이 없는 나부낌인가?
지금의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저 행복했을 뿐이다.
나는 그저 책을 한 권 사고 싶었을 뿐이다. 정말이다.
- 집에 이미 피아노와 음악에 관련된 책이 책장 두어 칸을 채우고도 남을 만큼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책에 꼭 직접적인 내용이 담기지 않아도 배경이 되는 지식을 다양하게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 니체는 피아노에 조예가 깊었고 작곡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프랑수아 누델만이 쓴 <건반 위의 철학자>에서도 중요한 챕터를 차지하고 있다. 니체의 글에는 음악적 비유가 자주 등장하고, 잘 알려져 있듯 작곡가 바그너와의 관계도 복잡했다. 음악과 피아노는 결코 떼어낼 수 없는 니체의 삶의 일부였다. 참고 도서 목록을 정리한다면 반드시 넣고 싶은 책이었다.
- 이제는 포기할 수 없는 싸움이라고 여긴 나는 아예 남은 판매자 중고책 중 세 권을 한꺼번에 주문했다. 그중 한 권은 배송이 시작되었다고 하고 나머지 두 권은 아직 소식을 모른다. 소식이 늦어지는 걸로 보아 아마 취소될 작정인가 보다. 배송이 시작된 책은 과연 '최상'이 맞을까? 주문이 너무 많이 취소되어서 솔직히 기대를 버린 상태다.
- 만약 이번에 배송되는 책도 최상급이 아니라면 내가 남은 중고책도 모두 주문할 예정이니 여러분이 이 글을 만나볼 때쯤엔 아예 목록이 없을 수도 있다. 그래도 없다면 교보문고에 올라와 있는 판매자 중고 두 권을 내가 살 것이므로 거기도 씨가 말라 있을 것이다.
- 어떻게! 새 책 한 권이! 없을 수가 있지!
(리뷰자 주 : 그리고 교보문고의 두 권은 제가 씨를 말렸습니다.... 한 권은 취소되었고 다른 한 권은 기다리고 있어요.)
- 책은 영화와 달리 세계를 믿게 하는 대신 그것을 상상하고 표상하게 한다. 책의 이 힘이 병리적 수준까지 발휘되었을 때 나타나는 망상(妄想)의 위력을 가장 예리하게 포착한 것은 세르반테스다. 17세기 초반에 출판된 <돈키호테>에서, 주인공은 기사도 문학을 탐독하며 형성한 자신의 환상 시스템 속에서 살아간다. 그의 망상은 현실보다 더 강한 현실성을 띠고 있으며, 세계 그 자체를 대체하기에 이른다. 실재하는 세계는 만져지지도, 인식되지도, 체험되지도 않는다. 여행도 모험도 편력도 모두 망상 속에 발생하는 사건이다.
- 돈키호테에게 풍차는 풍차가 아니며, 시골 여자도 시골 여자가 아니며, 세계도 세계가 아니다(풍차, 여자, 세계는 그 자체가 아닌 다른 무언가의 '기호'이며 '상징'으로 나타난다). 우리에게 웃음을 주는 이 오인(誤認)은 그러나 돈키호테가 대표하는 구텐베르크적 인간의 섬뜩한 징후를 드러낸다. 그는 세계를 그 자체로 인지하지 못하는 한에서만, 상징의 추상적 세계를 향유한다. 그는 망상의 인간, 언어의 인간, 독백의 인간, 사물과 분리된 기호의 놀이 속으로 침몰하는, 해석하는 인간이다. 후일 칸트, 소쉬르, 라캉이 이론화하는 표상적 인간의 어떤 단면을 돈키호테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언어 혹은 텍스트의 광대한 감옥에 갇혀 버린 수인(囚人)의 이미지. 영화는 이 막막한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바깥으로 나가는 한 출구다.
- 권보드래 : ... 그러면서도 ‘조시 대체 계획'을 세웠던 카팔디 씨가 클라라를 분해해 보자고 하니까 크리시가 나서서 "클라라는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면서 "서서히 꺼질 수 있게" 하겠다고 반발하고요. 그렇지만 그 서서히 꺼진다는, 'slow fade'라는 건 야적장에 클라라를 갖다 버리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송지우 : 크리시는 클라라를 위하는 듯 보일 때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위한다는 인상이 짙습니다. '나는 인공지능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아니야' 이런 자기 정당화 같은 게 있어요. 소설 곳곳에서 드러나는 이 세계 '상류층'의 덕목 중 하나가, 남에게 대놓고 잔혹하고 못되게 굴지 않는다는 점인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게 얄팍하고 자기중심적이에요. 결정적 순간에는 클라라를 방치하면서도 해체는 안 된다, 우리는 클라라를 존중한다, 이런 태도를 보이니까요.
권보드래 : 결정적 순간에는 냉혹하게 차별하죠. 크리시가 보여주듯 이미 많은 것을 가졌지만 불안해하면서 더 큰 확실성과 수월성을 지향하는 게 대세라면 사회 전반으로도 공동체적인 감정 같은 건 정말 생기기 어렵겠죠.
- 송지우 : 정치철학에서 '능력'을 판단할 때 사회적 맥락을 봐야 한다는 논의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어떤 제도가 필요하고, 그 제도 안에서 어떤 일을 할 사람이 필요한지 알아야 어떤 역량이 '능력'인지 알 수 있다는 거죠. 그리고 '능력'은 자연적 사실이 아니라 항상 이렇듯 특정한 사회적 맥락을 전제하고요. 이 점을 간과하면 제가 조금 전에 '탈맥락화 된 능력주의'라고 한 것만 남을 거예요. 그런데 조시와 클라라의 세상에서는 폴 같은 고학력 엔지니어도 실직하는데, 위험을 무릅쓰고 유전자 조작까지 해 가면서 얻은 학습 역량이 결국 무엇에 필요한지는 불분명합니다. 대학 가는 데 도움이 된다는 건 알겠는데, 그 학력이 결국 어떤 사회적 필요를 충족하는지 모르겠어요.
권보드래 : 말씀을 듣다 보니, 사회적 재부의 증진과 공정한 분배, 그게 거시적인 목표고, 능력이란 그 목표 속에서 평가된 역량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능력주의가 엘리트주의 없이 작동할 수 있나 싶습니다. 더 나가면 엘리트 없는 사회란 불가능할 것 같기도 하고요.
- 권보드래 : 불안정한 상황에서는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동의어입니다. 저희 부모님은 그런 말씀 자주 하세요. "요즘 젊은 애들 왜 이러냐. 열심히 근검저축해야 하는데 왜 저렇게 소비부터 하냐." 그때마다 어머니께 말씀드리곤 합니다. "열심히 근검저축한 후 쓰려고 하면 이젠 그 시절 평생 안 와요. 나름대로 그 사실을 절감해서 그러는 거겠지요." 계획이나 개발이 근본적으로 부조리해져 버린 것 같습니다. 2차 대전 이후 냉전기에는 계획·개발 이후 미래의 과실을 내가 맛볼 수 있다는 전제가 가동하고 있었다면,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지요.
송지우 : 계획을 세울 수 있는 인생을 산다는 것 자체가 특권입니다.
- 송지우 : 영화 〈기생충〉에 '계획'이 자주 등장하잖아요. 김기택 가족 같은 사회경제적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합리적으로 계획을 세운다는 게 불가능한데도요. <클라라와 태양>은 그런 사람이 다수가 된 세상을 그립니다. 계획을 세운다는 건 최상층에게나 가능한데, 그 경우에도 도박은 피할 수 없어요. '향상'이라는 유전자 조작이 잘못되면 병들거나 죽을 수도 있다는 식으로요.
- 실재로부터 배우기 위해서는 자신을 실재에 노출하고, 실재에 부딪혀야 한다. 가장 저항이 심한 길을 걸으면서 배움을 극대화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얻은 내 배움이 절대 진리일 수 없으므로, 다른 탐구의 길을 막아서도 안 된다. 전통적인 철학적 실재론이 진리를 추구했다면, 실재주의는 지식, 앎, 진보를 추구한다. 실재론이 세상의 실재에 대해 하나의 진리가 있다고 믿고 과학의 이론이 이런 진리에 대응한다고 오만하게 생각했다면, 실재주의는 우리의 지식이 커지면서 무지도 함께 증가했음을 알기 때문에 겸허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실재주의는 겸손, 신중, 인간의 한계와 연약함, 오류 가능성, 자연의 다양성에 대한 복잡한 지각 등을 인정하는 성숙한 태도이다. 이렇게 보면, 오만한 라봐지에 주의자들은 실재론을 주창했고 겸손한 프리스틀리는 실재주의자였다.
- 물이 부족한 사막에서 살아가는 푸에블로 인디언은 오직 8월에만 집중 호우를 만나게 되는데, 이는 옥수수 농사, 다시 말해서 식량 문제와 직결된다. 이 때문인지 그들의 그림과 장식에서는 번개를 닮은 뱀 또는 "뱀 형상을 띤 번개"가 흔히 발견된다. 바르부르크는 이를 주술적인 인과 관계로 이해했다. 인디언이 뱀의 이미지를 통해 자연 공포를 극복하고, 비를 내리게 하는 번개라는 에너지에 다가서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뱀은 자연 극복이라는 주술적 시도와 그것을 추상화해 우주적인 질서를 확립하려는 개념적 태도, 즉 주술과 논리의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상징이 된다.
- 바르부르크는 불안과 공포를 상징적인 이미지로 변환시켜 현실에 대처하는 인디언의 이미지 문화를 유럽의 극단적인 물질문명과 대조시켰다. 사실 뱀이라는 상징은 인디언만의 것이 아니다. 서양에서 그것은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상징으로 활용되어 왔으며, 성경에는 장대 위에 놋뱀을 달아 백성을 구원한 모세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문제는 유럽인들이 신화적 세계를 버리고, 놋뱀을 전신주로, 번개를 전기의 힘으로 대체했다는 점이다. 바르부르크는 이를 "거리 감각의 파괴", 즉 주술과 논리라는 양극단 사이에서 반성적 거리를 만들어 내는 사유 공간(Denkraum)의 상실로 이해했다. 테크놀로지에 의존해 자연 공포를 극복하면서, 인간과 환경을 정신적으로 이어주는 신화적이고 상징적인 공간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결과는 참혹했다. 전쟁이 일어났고, 이미지 속에 갇혀 있어야 할 폭력과 야만, 그리고 공포와 불안이 도처에 성행했다. 바르부르크는 상징적인 이미지가 만들어 내는 사유 공간의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는 그의 정신세계만이 아니라 파국으로 치닫는 유럽 문명을 위해서도 시급한 일이었다.
- 이런 정책이 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깨끗하게 읽으면 다시 팔 기회가 생긴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중고 책방에 되팔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독자라면 처음부터 책을 깨끗하게 읽으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휴대폰으로 기억할 만한 구절을 사진으로 찍거나 독서 앱을 이용해 인상적인 구절을 남길 것이며, 더 고전적으로는 노트에 그 구절들을 옮겨 적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런 행위는 책에 밑줄을 긋고 여백에 자신의 생각을 적던 습관을 대체할 것이다.
(리뷰자 주 : 일부 동의한다. 그러나 애초에 책에 밑줄을 긋고 여백에 자신의 생각을 적던 습관은 없었다. 포스트잇 정도였을까. 분절된 기록은 후에 검색을 통해 찾기 어렵다는 주장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 점을 보완하기 위한 발췌와 기록이 현재의 내 리뷰들이니까.)
- 언뜻 보기에 이는 매우 효율적인 독서처럼 보인다. 취미로 독서를 한다면, 그러니까 시간을 보내는 하나의 방법으로 책을 읽는다면 이렇게 사진을 찍고 입력하거나 노트에 옮겨 적는 일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전문적으로 글을 쓰기 위해 책을 읽는 사람에게는 이런 식의 독서가 시간 낭비에 불과하다. 스마트폰이 나온 뒤로 나 역시 스마트폰이나 컴퓨터에 문장을 저장해 봤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디에 어떤 문장이 있는지 찾기도 어려울뿐더러 일일이 들여다보며 문장들을 봐도 내가 왜 이 문장들을 저장했는지 기억하기 어려웠다. 여기에는 독서, 혹은 글쓰기와 관련해서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중요한 사실이 숨어 있다. 바로 맥락의 문제다.
(리뷰자 주 : 또한 나의 읽기가 취미의 연장선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 그렇기 때문에 줄을 그은 뒤에는 왜 줄을 그었는지 적어 둬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을 '어노테이션(annotaion)', 즉 주석 달기라고 한다. 컴퓨터 코드를 짜거나 영상물에 부가적인 정보를 제공할 때도 어노테이션 기법이 사용된다. 책에서 어노테이션은 밑줄, 혹은 동그라미나 하이라이트 등 강조 표기와 부기로 이뤄진다. 책의 경우에는 특별히 여백에 적는 글이라는 뜻의 '마지네일리아(marginalia)', 즉 ‘방주(傍註)'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마지네일리아 기법이 있다. 누군가는 색색의 펜을, 누군가는 연필을 사용하기도 하고 다양한 기호와 약어가 동원되기도 한다. 내가 가장 인상적으로 본 건 올리버 색스의 책들이었다. 올리버 색스의 책을 촬영한 사진을 보면, 그는 중고서점이라면 구매를 거부할 게 분명할 정도로 많은 마지네일리아를 남겼다. 그렇지만 헌책방 주인이라면 올리버 색스가 첫 페이지에 프로이트에 대한 글을 휘갈겨 쓴 <억압, 증상과 불안>을 무슨 수가 있더라도 손에 넣으려고 할 것이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마지네일리아로 연결된 지식은 문명의 기초가 됐기 때문이다. 내가 꿈꾸는 서점 중 하나(맞다, 내가 꿈꾸는 서점은 한두 개가 아니다)는 '완독 서점'이다. 이 서점에서는 누군가 완독한 책만 판매한다. 구매의 기준은 책을 읽은 흔적이 얼마나 많이 남았느냐다.
- 우리의 삶도 비슷하지 않을까. 자신의 삶이 완벽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대신 완벽한 삶에 대한 기대를 가진 사람은 많다. 그런데 완벽한 삶, 고칠 필요가 없는 삶만이 좋은 삶이라면, 좋은 삶에의 길은 막막해 보인다. 완벽한 삶에 대한 기대 자체가 우리를 보다 피곤하게 만든다.
- '우리도 우정일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이 글을 이렇게 답하며 맺는다. 우정이란 언제든 이 고독한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완벽한 목격자가 되는 것이라고.
- 하지만 그날 밤, 나와 내 죽음이 분리되리라는 그 자명한 사실을 떠올렸을 때, 내 머릿속으로 이 문장이 뒤따라왔다.
아무도 읽지 않는 책 속에 갇힌 느낌. 누군가 집어 읽어주기만을 바라는 마음.
- 여우와 고슴도치의 비유는 여론 조사 전문가 네이트 실버의 책 <신호와 소음>에서 처음 접한 것으로 전문가들의 특성을 분류하는 데 매우 유익하다. 필립 테틀록(Philip E. Tetlock)은 여러 다른 영역의 전문가 의견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걸프전쟁, 일본의 부동산 거품, 퀘벡이 캐나다에서 분리될 가능성 등 1980년대와 1990년대의 거의 모든 주요 사건을 대상으로 전문가들의 의견을 모았다. 소련의 붕괴를 예측하지 못한 것은 예외적인 사건인가? 아니면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정치 분석을 할 때 정말로 밥값을 못하는가?
- 테틀록은 이런 식으로 '거창한 생각'을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반면 별 근거는 제시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전문가를 고슴도치로 분류했다. 반면 고슴도치와 달리 예측력이 상대적으로 뛰어난 소수의 사람들을 '여우'로 분류했는데, 이들은 매우 실용주의적이라 가능한 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가능성이나 확률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는 특성을 지닌다고 한다.
- 이러한 치료법은 여러 연결망의 층위로 구성된 몸을 상정한다. 아울러 한의학의 처방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자의 개별성에 따라 가감·조정되면서, 표준화로 환원되지 않는 비고정성을 지향한다. 과학적 분석은 때때로 유효하다. 그러나 한의학적 치료에서 인삼은 사포닌만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강황은 커큐민만으로 분리·축소되지 않는다. 몸의 치유와 관련된 약성은 존재와 존재의 연결망 속에서 얻어지는 앎이자 개별적으로 경험되는 진실이다. 김태우는 동아시아 전통 의학에서 앎의 주체와 객체는 분리되지 않으며, 한의학의 독특한 몸 질병 이해는 세계를 인식하고 존재를 해석하는 관점이 복수일 수밖에 없음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 김태우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쿠리야마 시계히사(Kuriyama Shigehisa), 로레인 대스턴(Lorraine Daston), 피터 갤리슨(Peter Gaison), 필리프 데스콜라(Philippe Descola) 등 의료 인문학의 축적된 연구성과들을 참조하면서, 생의학의 독점적 권위를 비판적으로 고찰했다. "몸이라는 다측면의 생명 현상을 고려할 때, 한 의료는 일부의 진실일 수밖에 없"으며 몸을 해석하는 획일적 관점에서 벗어날 때, 대안적 세계들을 상상하고 그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저자는 한의학이 소통 불능의 독자적 진리/지식/실행 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동아시아 의학 전통이 표상하고 있는 몸(존재)·언어(말)·인식의 관계를 심도 있게 조망함으로써, 현대 사회의 주류 생의학(biomedicine)을 상대화하고자 했다.
- 표지 디자인이 아름답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고정되어 반복되는 괘선과 타이포그래피, 각 권마다 변화하는 목판화 이미지가 고유한 개성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시리즈는 힘을 갖는다. '풀빛 판화 시선’은 시리즈 이름처럼 판화와 시 두 가지 요소가 동등한 지분을 가지고 있다. 시를 보조하는 삽화가 아닌 독립된 목소리를 드러내고 있는 판화 작품이 인상적이다. 표지를 열면 모조지 또는 한지에 인쇄된 작품이 선물처럼 끼워져 있다. 판화 작품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만들어질 수 없는 시집이기도 하고, 조각도로 새긴 제목의 글자가 아니었다면 시인이 전하려는 언어의 힘도 지금보다 약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책 표지에서는 작품으로서의 목판화와 제목 글자가 돋보이지만, 상단에 적용한 괘선, 시리즈 이름과 번호의 연출, 그리고 이들을 배치한 것은 디자이너의 감각이다. 부리 계열 활자(명조체)로 시인의 이름을 적고 그 아래 가는 선, 그리고 판화작품과 제목 글자를 유기적으로 배열하는 레이아웃은 시리즈의 얼굴을 만들기 위한 디자이너의 전략이다. 시리즈를 관통하는 어두운 배경색의 선택도 디자이너의 일이다. 이 시리즈에서 활자와 그림은 북 디자인의 재료로서 사용된다. 책이 저자와 출판사만의 것이 아니라 디자이너와 제작자도 함께 협업하는 결과물임을 생각하면 간행기록에 디자이너의 이름이 누락된 점은 언제나 아쉽다. 오윤, 홍성담, 김경주, 이철수, 주정이 등 판화 작가의 이름은 책날개에 적혀 있지만, 책 어디에도 디자이너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다. 대개 저작물의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편집자와 디자이너 등 직접 책을 만들었던 실무자의 정보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 관행은 사실을 파악하려는 훗날의 연구자에게는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게 된다.
- 번지 점프의 장점은 정말 심연으로 떨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얼마간 떨어지다가, 등 뒤 밧줄 힘으로 다시 튕겨 올라오게 된다. "아버지, 인문학이 자연과학보다 더 우월하고 매력 있어요. 전 정답이 없는 학문을 좋아해요, 이 미친 세상에서." 이것은 천재의 대답이 아닌가. 전공 선택에 대한 동어의 해명을 듣자마자, 아버지는 심연으로부터 다시 튕겨 올라왔다. 동어의 인문학적 대답에 감동한 아버지는 아들을 위대한 인문학자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한국에서 어영부영하고 있다가는 유학파가 장악하고 있는 한국 대학에서 취직하기 어렵다고 본 아버지는, 동어에게 미국 유학을 권했다. "양놈들이 폼만 잡는 거지, 알아야 뭘 알겠어요." 인문학은 자기 삶의 현장으로부터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동어의 생각이었다. "유학을 간다면 모든 학비와 생활비를 보내주겠다."는 말을 듣고 동어는 마침내 미국으로 떠났다. 아버지가 그렇게 가산을 터는 바람에, 나는 대학 시절 내내 등록금을 내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싫지만은 않았다. 동어가 박사 학위를 받으면 금의환향하여 가족들의 자랑이 되어줄 테니까.
- 과연 동어는 돌아왔다. 가족을 배신하지 않고 돌아왔다. 외국에 정착하지 않고, 명문 대학 학위를 손에 쥐고 돌아왔다. 귀국한 동어는 가산을 탕진해 가며 공부한 사람답게 존재감이 상당했다. 도장 깨기 하듯 학술회의를 찾아다니며 거침없는 질문을 퍼부어댔다. 동어는 학술회의에 만연한 쿠션어들을 싫어했다. 진리의 아름다움에 탐닉하는 정신은 엄격한 돌직구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게 동어의 지론이었다. 대개 사람들은 "제가 과문(寡聞)해서 하는 말인데요."라고 자신을 낮추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동어는 달랐다. "왜 겸손을 떨죠? 겸손은 뛰어난 사람만이 떨 수 있는 거예요. 당신은 뛰어나지도 않은데 겸손을 떠네요. 당신이 뭐가 뛰어나죠? 당신 어디가 뛰어난데? 도대체 어디가?" 동어는 상대의 무식을 탓할 때 과문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건 당신이 과문해서 그런 거예요."
- 동어에게 말은 칼이었으며, 학술회의는 형장이었다. 동어는 특히나 용어가 불명확하게 쓰이는 것을 못 견뎌했다. "왜 서론에서는 사랑을 성욕과 동의어로 쓰고서, 결론에 가서는 사랑을 동정이라는 뜻으로 쓰는 거죠?" '민주주의', '신자유주의', '인문', '통섭’ 등의 단어를 쓴 논문 대부분이 그런 식으로 난도질당했다. "이 논문에 신자유주의라는 말 대신 '아웅'이라는 말을 넣어도 결론은 변하지 않네요. 그래도 되는 걸까요?" 이제 동어 앞에서는 다들 '민주주의', '신자유주의', '새로운 패러다임', '인문', '통섭' 같은 표현을 쓰기 두려워했다. 동어의 한마디 한마디는 절삭력 좋은 길로틴이었다. 발표자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얼버무리거나, 동문서답으로 피해 가려 들면 동어는 벼락같이 고함쳤다. "또 끼 부린다!" 결국 상대의 논문은 거열형(重裂刑)에 처해진 것처럼 해체되었다. 흩어진 논문의 살점과 뼈들을 추리며, 동어는 마무리 질문을 던졌다. "이 논문에 과연 주장이란 것이 있습니까?" "논문이란 무엇인가?"
- 귀국한 지 일 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동어가 학계에 미친 영향력은 상당했다. 20세기 한국어로 쓰인 논문의 77프로가 표절임을 밝혀냈다. 50프로가 지적인 옹알이를 하고 있으며, 70프로가 연구사를 무시하고 있으며, 82프로가 번역이 틀렸으며, 94프로가 10개 이상의 비문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97프로가 아무 주장이 없다는 사실을, 99프로의 논문이 자기기만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모두 동어의 재능을 인정했지만, 동어는 정규직 교수가 될 수 없었다. 생태계 교란종에게 교수 자리를 내어 줄 사람은 없었다. 학계를 불태우기 위해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와 직장 생활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정년 퇴임할 때까지 교수 회의에서 그에게 계속 논박당하는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사람들은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함께 있기 편한 사람을 원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동어는 학계의 난민이 되어 갔다.
- 영원히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슬퍼하는 가족들의 얼굴과 친구들의 표정을 나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나의 죽음은 나와 관계된 사건이지만 동시에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의 죽음은 나와 완전히 동떨어져서 개별적으로 존재할 그 무엇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굉장한 슬픔과 공허함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순수한 두려움과는 무언가 다른 감정이었다.
- 팀 오브라이언의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에 실린 마지막 작품, <죽은 이들의 삶>에는 죽음에 대한 이런 대사가 나온다. "... 하지만 죽는다면 뭐랄까... 모르겠어. 아무도 읽지 않는 책 속에 갇힌느낌일 것 같아. (……) 도서관 책장 위에 놓여 있어서 안전하긴 하지만 긴긴 시간 빌린 사람이 없는 책 말이야.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는 거지. 누군가 집어 읽어주기만을 바라면서." 나는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을 여러 번 읽었고, <죽은 이들의 삶>은 특별히 더 반복해서 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에 나오는 죽음에 대한 정의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다고 느꼈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자면, 여전히 그렇다. 여전히 잘 모르겠다.
- 저 골목을 돌면 카페 로지 190이 나타날 것이다. 나는 습관처럼 이 거리의 풍경이 된 남자를 눈으로 좇고 있다. 그는 오늘도 카키색 재킷에 짙은 남색 셔츠를 입고 햇볕이 드는 창가 쪽이 아닌 구석 쪽 2인용 테이블에 앉아 미트 파스타와 뜨거운 커피를 주문할 것이다. 창가 테이블 위로 쏟아지는 햇살 혹은 주문을 받는 서버의 셔츠 무늬의 차이가 어제와 다른 오늘을 구별해 줄 뿐이다. 그는 줄곧 창가로 시선을 고정한 채 먼저 나온 블랙커피를 홀짝이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이 시간, 이 거리의 변함없는 풍경이다. 나는 그 앞을 지나며 매일 같은 모습의 풍경에 어떤 안도감을 느낀다. 늘 거기,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으레 그러하듯 세상의 엄마들처럼, 세상의 하늘처럼. 그러다 문득 어쩌면 그에게도 내가 이 오후의 풍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 그는 도라도레스 거리의 회계 사무원 소아르스다. 누군가 알은체를 하면 상대는 물론이고 그 주변의 공기까지 어색하게 만드는 사람, 누구도 기다리지 않고 무엇도 기대하지 않는 표정으로 입가에 토마토소스를 묻히고 오래도록 파스타를 우물거리며 오로지 창밖에만 골몰한 사람, 그는 내가 아는 사람 중 드물게 혼자로서 완전한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유일한 취미가 있다면 창밖을 내다보며 거리의 모든 것을 관찰하는 것이다. 회계 사무원이라는 번듯한 직업이 있지만 그는 많은 시간을 창밖의 거리와 그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관찰하면서 보낸다. 마치 이것도 업무의 하나라는 듯이. 거기에는 어떤 의도도 없고 어떤 목적도 없는 순수함마저 깃들어 있다. 만약 내가 그를 타인에게 소개한다면 나는 그를 '창밖을 보는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그보다 더 적당한 말을 찾지 못했다. 타인을 마주 보는 일은 거의 없지만 어느 정도의 거리감을 통해 누구보다 타인에게 유심한 사람. 사람을 가까이에서 돋보기로 들여다보듯 관찰하며 그의 걸음걸이나 말투, 눈의 깜박임, 작은 습관들을 종합해 알리바이를 유추해 내는 나 같은 사립 탐정과는 완전히 정반대로 말이다. 이토록 다른 우리가 어떻게 만나게 되었느냐고? 그건 그의 거리감과 나의 거리감이 우연하게 맞닿은 어느 오후, 한 장의 편지에서 시작되었다.
- 두 작가가 만들어 낸 인물, 소아르스는 누구보다 고독했고, 필립 말로는 누구보다 그 고독을 잘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질문이었다. 이것이 내가 책과 우정을 나누는 방식이다. 오래오래 그들의 곁에서 그들을 목격하는 것. 어떤 날은 이해로 어떤 날은 공감으로 어떤 날은 좋아요로, 나는 이 글을 쓰는 동안 책 속에서도, 책의 바깥에서도 어떤 날의 풍경이 되어준 그들을 매일 목격했다.
- 지금 나의 삶도 고쳐야 할 부분이 많다. 급한 것도 있고 덜 급한 것도 있다. 아주 급하게 불을 끄고 나니 저쪽에서 살짝 문제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바비큐 그릴에 연어가 익어갈 때 굳이 마당 구석 편에서 다시 솟아나는 옻 새싹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을까. 삶에서의 부족한 점, 고쳐야 할 점을 부인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제아무리 무시하려 해도 고장 난 부분은 삶에서 가시처럼 돋아난다. 다만 고쳐나가야 하는 삶 자체도 쉽지 않은데, 더 이상 고칠 필요가 없는 삶, 완벽한 삶에 대한 갈망은 불필요하게 우리를 더 힘들게 한다는 생각이다. 그나마 종종 찾아오는 휴식과 즐거움을 맛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너무 패배적인 태도는 아닌가? 완벽이 그렇게 어려운가? 어지러운 17세기 말 세상을 이해하려고 한 독일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 스스로가 유한하기 때문에, 곧 우리 자체가 완벽하지 못하기에 우리의 삶 역시 완벽할 수 없다. 완벽을 갈망할 수는 있어도 완벽은 어렵다.
- 다시 말하지만 삶을 고쳐 나가고, 보다 낫게 만들려고 하는 마음을 탓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늘 고치려고 할 것이며 나 역시 그렇다. 그러나 이렇게 고쳐 나가는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슬퍼할 필요는 없다. 라이프니츠의 말이 맞다면, 원초적 한계를 지닌 존재가 어찌하겠는가? 완벽함에 대한 갈망이 과하다는 것을 이렇게 인정할 때, 개선의 과정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쉼과 즐거움은 온전하게 우리 삶을 채운다. 우리 삶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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