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심너울
출판 : 아작
출간 : 2020.06.01
톡톡 튀는 상상력이 느껴지는 소설이었다.
유쾌하게 읽었는데, 배경이나 핵심 설정은 상당한 미래인데 기본적인 생활상은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점이 눈에 띈다. 작가는 허구라고 했지만 누가 읽더라도 특정 사건이나 기업이 떠오르는 설정도 있었다. 현재와 유사한 부분이 많은 만큼 몰입이 강해질 수도 있겠고, 아쉬움이 커질 수도 있겠는데 내 경우엔 반반으로 미묘했다. 참신한 아이디어들이었지만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일상 속의 상상으로 그치는 듯해서 조금 아쉬운 마음이 있다. 하지만 단편에서 그 정도의 설정을 풀어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라고도 생각한다. <한 터럭만이라도>에서 배양육에 관한 설정은 무척 신선했다.
대체로 소설 전반에서 느껴지는 작가의 이미지는 이공계 대학원을 수료한 2-30대 남성이었다. 확인해 본 바 실제로는 조금 달랐지만 유사한 지점들이 있었다. 그렇게 느꼈던 건 소설 곳곳에 저자의 자전적 경험이 많이 녹아들어 있어서였던 듯하다. 다만 책제와 동명인 단편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는 처음 느꼈던 인상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젊은 작가이지만 자연스럽게 소설 속 화자인 노인에게 이입이 가능하도록 풀어내서 인상적이었는데, 어쩌면 내가 중년에 다가가는 나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박범신의 <은교>가 문득 떠올랐다.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이 나의 늙음도 벌이 아니다." 이제 이 문장이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또 다른 인상적인 단편은 <감정을 감정하기>였다. 이 소설에는 자율신경계 중 운동 영역 피질에 문제가 생겨 '감금 증후군(locked-in syndrome)'을 앓게 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이 인물의 대사를 통해 표현되는 '신체와 감정의 연결'은 <느끼고 아는 존재>에서 다마지오가 설명했던 내용과도 연결된다. 좀 더 넓게 보면 불교적 주장과도 이어지는데, 감정과 신체적 반응은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섬세한 느낌에 집중해서 감각하는 명상도 있다고 알고 있다. 본격 SF라고 말하기는 조금 애매하지만, 과학적 단편과 연결해서 읽으니 느낌이 새로웠다.
최근에는 책을 집으면 대부분 한 번에 다 읽는 편인데, 이 책은 거의 2주에 걸쳐서 끊어 읽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다양한 문장들이 다양한 감정들과 함께 눈에 들어와 즐거웠다.
반복되는 일상의 지겨움. 사회 구조의 부조리.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덕질과 영업의 즐거움.
이 시점까지 오게 된 과거에 대한 추억과 단상.
앞으로 닥쳐오게 될 노년에 대한 걱정.
이런 감정들과 뇌와 신체와의 관계성.
그리고 이런 것들을 고민하는 인간이라는 종.
스스로가 특별하다는 믿음과 종의 공통적 특성, 그리고 공존.
이 모든 반복들이 새겨지는 시공간.
재미난 경험이었다.
- "진짜 퇴근하고 싶다."
어느 가을밤, Z대학교 공학대학에서 전산학과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K 씨는 탄식했다. 그는 연구실에서 탈출하는 순간, 침대 위에서 즐기는 찰나의 편안함, 잠시라도 자기 냄새가 배어 있는 공간에서 푹 쉴 때의 즐거움을 머릿속에 그렸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찬란한 순간이었다...
그러다 그는 자신이 퇴근한 지 2시간이 흘렀고, 출근까지 8시간이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K 씨는 그날 밤 잠도 이루지 못하고 고민했다. 왜 출근하지도 않았는데, 퇴근한 후에 벌써 퇴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일까? 인과의 역전 아닌가? 근처 건물에서 임상심리학 박사 과정을 밟으며 처절한 고통을 받고 있는 K 씨의 친구 L 씨가 이 이야기를 들었으면 혀를 차며 말했을 것이다.
"하도 비인간적인 환경에서 일하다 보니까, 하루에서 오직 퇴근하는 몇십 분만이 즐거운 때인 거지. 그래서 그 기쁜 순간을 최대한 즐기고 싶은 거고."
- "출근하기 전에 퇴근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내가 출근한 미래에서 퇴근하고 싶다는 감정이 과거로 거슬러 온 것 아닐까?"
- K 씨는 연구실을 뛰어다니면서 "유레카, 유레카!" 하고 소리 질렀다. '퇴근하고 싶은 기분이 시간을 초월해 과거로 흘러간다'라는 사실을 증명해낸 것이다. 퇴근하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 즉 정보가 과거로 흐른다는 것, 바로 초광속 통신의 기본 골자인 'Salyojo 프로토콜'의 기본 원리가 발견된 순간이었다. 그 후 5년이 지난 지금도 초광속 통신 기술은 여전히 고통받는 대학원생들과 직장인들의 도움을 톡톡히 받고 있다. 한국 정부에서는 초광속 통신 기술을 4차 산업 혁명 핵심 기술로 선포했다. 한 사람당 1비트의 정보를 약 10시간 전으로 보낼 수 있으니, 많은 정보를 보내려면 그만큼 고통받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했고, 주 52시간 근무제는 유명무실해졌다. 현재 초광속 통신 기술에서 가장 뒤처진 국가는 아무래도 북유럽 복지 국가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쪽에서는 매일매일 야근으로 기름을 뽑히는 사람이 드물어서 'Salyojo 알고리즘' 적용이 너무나 힘들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자랑스러운 삼천리 금수강산에서는 위대한 초광속 통신을 선도하기 시작했다.
- <초광속 통신의 발명>
- 정 박사는 소장이 술자리에서 비밀스레 제시한 정규직 전환이라는 미끼를 도저히 물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는 초임계 추출기에다 참깨를 으깨 넣어서 참기름 100병을 만들어냈다. 상당히 고급스러운 포장까지 준비했다고 하는데, 이공계 사람들한테는 기대하기 힘든 덕목인 것을 생각하면 집념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최고급 국산 참께에 첨단 기술을 더해 뽑아낸 그 참기름의 맛은 참으로 각별했다고 한다. 소장이 참기름을 선물해준 사람들 중에 초임계 추출기의 도입에 앞장서 나선 어느 임원만 없었다면, 정 박사와 소장 모두 자기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저번에 줬던 참기름은 어디서 난 건가요?"
"아, 신경 써주신 초임계 추출기로 한번 뽑아봤습니다. 맛이 상당히 좋지요?"
"R&D 용으로 도입한 기계로 참기름을 뽑았다고요? 제정신입니까?"
"앗... 아니... 저..."
소장의 정치 감각이 부족했던 탓이었다. 그 임원은 그룹 내에서도 상당히 유별난 사람으로 유명했는데, 그러니까 정직하고 상식적인 사람이었다. 임원은 큰돈을 들여 설치해준 기계로 뇌물이나 만들고 있다는 것을 상당히 유별나고 기괴한 일로 여겼다. 소장과 정 박사 그리고 연구소의 다른 무고한 사람들 모두에게는 비극이었다. 수도권에 있는 연구소에서 일하는 것을 삶의 주요한 기쁨으로 삼던 소장은 탁월한 자연경관을 누릴 수 있는 곳으로 튕겨 나갔다.
(리뷰자 주 : <작가의 말>에 따르면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검색해보니 2015년 기사가 나온다. ... 맛은 궁금하다.)
- 소장은 네 낙오자에게 '등산 동아리'를 만들어보는 건 어떻겠는가 넌지시 신호를 던졌는데, 우리 넷 모두 주말에 등산을 하느니 인센티브를 포기하고 말겠다는 고결한 의지가 있었다. 나를 포함한 넷은 너무 전형적이라서 오히려 비현실적인 내향적 사람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집구석에 틀어박혀 책을 읽거나 수학 문제 푸는 것을 선호하고, 그러다 보니까 근처 사람들한테 "얘는 하는 짓 보니 영재의 싹이 있다."는 큰 오해를 받게 되고, 그 오해를 딱히 수정할 생각도 없어서 시키는 공부를 했는데 정말 머리가 좋지는 않아서 의대나 치대 진학은 실패하고, 약대나 갈까 생각하면서 화학공학이나 생물학 따위를 전공했는데 그게 생각보다 꽤 적성에 맞아서 어영부영 눌러앉았다가 결국 연구소에 계약직으로 흘러들어온 사람들이면서, 여전히 집에 틀어박혀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는 뜻이다.
- "여러분, 혹시 SF 좋아하세요?"
생각지도 못한 한마디에 모두가 잠시 멍해졌다. 내가 정적을 끊고 나섰다.
"SF요? 스타크래프트도 SF로 치는 거죠?"
김강건의 안색이 갑자기 창백하게 변했다. 그는 곧 말을 두다다 쏟아내기 시작했다.
"예? 아니, 그건 스페이스 오페라고요. 제가 말한 건 진짜 SF거든요. 원래 SF는 과학에 대한 경이를 표현한 장르인데, 스페이스 오페라는 배경에 그냥 과학적인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만 나오지 정작 진짜 과학은 안 나오잖아요. <스타워즈> 다들 보셨죠?"
우리 셋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김강건은 더욱 흥분했다.
"아니, <스타워즈>를 안 봤어요? 하여튼 <스타워즈>에 광선검이 나오는 건 알 거 아니세요. 근데 광선검이 말이 돼요? 빛이 딱 적절한 길이로만 나가서 다른 걸 썰어내고 하는 거 말도 안 되잖아요. 사실 <스타워즈>는 배경이 우주가 아니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거든요. 그에 비한 진짜 과학은..."
우리 셋은 단번에 깨달았다. 김강건이 진짜배기 오타쿠라는 사실을.
- 왜, 화학을 하면 누구나 독이나 폭탄부터 만들 생각부터 하지 않나? 유기 화합물을 공부하는데 왜 재미없게 무독한 것부터 떠올리냔 말이다. 당연히 반응성이 짱짱하고 불안정한 물건이 흥미를 끌지. 어쩌면 나만 그럴지도 모르겠다.
- 그렇다고 SF 동아리의 인원이 늘어나지는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함께 장르를 파헤치다 보니까 우리 모두 상당히 깊은 심연까지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끔 "어, 마블도 SF 아니에요? 나 마블 영화 재밌게 봤는데..." 하면서 들어오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우리가 떠드는 기기묘묘한 이야기들을 일주일도 참지 못하고 도망쳤다.
- 횡설수설, 중언부언, 서털구털, 어무윤척.
-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걸까? 근데 영화를 읽는 게 맞나? 나는 외치고 싶었다. 덕질에 생산적인 이유가 어딨어요. 그냥 재밌어서 하는 거지! 젠장, 제발 취미에서 생산성 좀 찾지 마. 휴식은 휴식답게 하고 싶어!
그 이후로는 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종의 최면 상태에 빠져들었던 것 같다. 나는 말 한마디 더듬지 않고 김강건이 쓴 여러 책을 하나하나 소개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부터 나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다른 사람들에게 영업하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알잖나? 오타쿠는 남들에게 자기 좋아하는 것을 영업할 때 모든 부끄러움과 사회적 맥락에서 초탈할 수도 있다는 것을.
- 현대에 상용화된 여러 3D 프린터들의 사진이 나타났다.
"그래도 재료가 되는 분자들로 어떤 물질을 찍어낸다는 아이디어 자체는 3D 프린터로 현실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물질재조합장치라기에는 한참 말었지만 한 발짝 뗐다는 게 중요하죠."
- <SF 클럽의 우리 부회장님>
- 갈매기대학교 컴퓨터공학과 2학년 유원탁은 매주 네 번씩 아주 매운 훠궈를 먹는 버릇을 들였다. 온갖 향신료와 소금이 든 탕에 버섯과 고기를 담가 먹으면서, 원탁은 기대수명을 대가로 지극한 행복을 얻었다. 문제는 일주일에 네 번씩 훠궈를 먹어치우기에는 그의 지갑이 그리 두껍지 않다는 것이었다. 수입이 필요했다.
- 기획서를 낸 지 한 달 정도 지나, 유원탁은 자기가 그렇게 창의적이지 않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과외 자리를 구했다. 다행히 수학 과외를 구해, 곧 유원탁은 훠궈를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독한 향신료가 안정적으로 공급되는 생활을 몇 주 지속하며, 유원탁은 깊은벗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리고 몇 주 뒤에 유원탁은 깊은벗이 창조미래인문사회자연과학공학 통섭기술 융합대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게 됐다는 문자를 받았다. 유원탁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상을 받으면서도, 그 말 같잖은 사업이 실제로 시행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그래도 그로서는 나름대로 삶의 교훈을 하나 얻은 셈이었다. 어차피 모든 사람이 뭣도 모르고 인생사 태반이 주먹구구로 돌아가니 재지 말고 그냥 서류를 내보는 게 항상 이득이라는 걸.
- 승현은 얼빠진 표정으로 물었다.
"저기, 파라미터가 뭐예요?"
"그건 다 설명서 보시면 나와 있거든요."
그 이야기와 함께 그들은 모두 짐을 싸고 바람처럼 떠났다.
결국, 승현과 혜린은 학교에서 밤을 새웠다. 처음에 둘은 저번에 신경도 쓰지 않고 넘겼던 부록의 기술적 설명서를 읽어보려고 했는데, 한글로 쓰여 있긴 했지만 해독이 아예 불가능했다. 한글과 한국어는 서로 분명히 다른 것을 지칭한다는 교훈을 얻은 순간이었다.
- 수학 시간이었다. 유림은 수학에 꽤 재능이 있는 아이여서, 수많은 한국인들의 인생에서 첫 번째 난관이 되는 나눗셈과 곱셈, 각을 아주 빠르게 이해했다. 아이는 4학년 1학기의 마지막 단원인 분수와 소수를 공부하고 있었다.
- <컴퓨터공학과 교육학의 통섭에 대하여>
- 하지만 나 같은 늙은이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모두가 대화형 인터페이스를 별로 안 좋아할 줄 알았는데, 어느 해던가, 설날에 어린 조카가 휴대폰을 쓰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마인크래프트가 세계 1위 게임인 것도 놀라웠지만... 조카는 궁금하고 필요한 모든 것들을 휴대폰의 인공지능 비서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물었다. 대화로 요리조리 정보를 찾아나가는 모습은 우리 세대가 마우스와 키보드로 웹서핑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아이들이 인공지능 스피커로 영어공부를 하는 모습이 말도 안 되는 광고에서나 나오는, 연출된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카는 그걸로 30분씩 영어 공부도 하는 것 같았다. AI 스피커에게 교육받은 조카는 까다로운 r이나 th 발음도 곧잘 해내곤 했다.
- 그래, 내가 70대여도 이 정도면 품위 있고 트렌드를 따라가는 모습이지. 완전히 젊은이처럼 살 수는 없어도 젊게 사는 구석이 있어야 사람들도 나를 존중하는 거 아니겠나 싶었다. 곱게 늙기가 힘들고 청춘은 빠르게 시든다지만 아직 수십 년 치 생기는 남은 몸이다. 나는 살아 있다. 아직 활기차게 살아 있다.
- "그래도, 대놓고 앞에서 말하는 건 다른 것 같은데."
"그러니까 네가 젊게 살려고 해도 안 되는 거야. 겉은 최대한 옛날 노인들처럼 안 보이려고 해도 마음은 못 따라가지. 저 친구들이야 입으로 말하는 게 우리보다 훨씬 익숙한 거고, 고개 처박고 폰이나 보고 있는 거보다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겠어?"
나는 그 말을 듣고 또 기분이 꿍했다. 이 친구는 항상 이렇다. 나이야 싫든 좋든 먹는 것이고, 나는 그저 추해지고 싶지 않을 뿐인데 그 뜻을 몰라준다. 거기에 반박할 기분도 들지 않아서 나는 묵묵히 맥주를 마셨다.
정주현은 내가 답을 않는 걸 보고는 주제를 바꿔서 떠들기 시작했다. 배우자 이야기, 자식 이야기. 다 나랑은 상관이 없는 말들이었다. 어쩌다 40년 동안 이런 사람이랑 친했나 싶은 환멸과 혐오까지 마음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 하늘을 쳐다보니 오른쪽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열대야로 자글자글 타오르고 있는 보도 위에 주저앉아 내가 바라지도 않았던 노추를 억울한 심정으로 곱씹었다.
-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 "나, 원래, 이렇게, 못 움직이면, 되게, 무서워해야, 하는 것, 아닌가? 모르겠어. 나 지금, 너무, 이상할 정도로, 평온하다. 왜 그렇지? 나, 아무 기분이, 안 느껴져. 그래서, 그게 무서운데, 또 무서운 게, 가슴이 막, 가라앉고, 이러거나, 하지 않아. 그게, 너무, 그게 너무 나는, 지금, 당황스럽고, 황당하고. 근데 그게 또, 느껴지지 않고, 그래야 하는 것 같은데. 나, 감정이, 없어진 거 아니야? 진짜, 왜, 나는..."
- 내 머리에 쓴 뚜껑은 파도처럼 쏟아지는 내 생각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했다. 아무 채널도 없는 라디오 주파수를 잡은 양 합성기가 지지직거리는 소리를 냈다.
- "그러니까 흔히 우리 뇌가 이성과 감정을 관장한다고들 말하잖아요."
"그렇죠."
내가 추임새를 하자 이예슬이 말을 이었다.
"근데 의사가 그러더라고요. 뇌에서 운동을 관장하는 부분이 망가지면서, 자율신경계에 운동 신호를 보내지 못하게 되었다고요."
"네. 네? 잠시만요."
나는 급히 노트북에다 '자율신경'이라는 키워드를 검색해보았다.
"자율신경은 호흡, 순환, 대사, 체온, 소화, 분비, 생식 등 생명 활동의 기본이 되는 기능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고등학교 때 배웠던 기억이 있었다. 하지만 굳이 무시무시한 생물 시간의 기억을 되짚고 싶지는 않았다. 젠장, 누가 뭔가를 알고 있다면 초짜한테도 쉽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나. 왜 이렇게 어려운 설명들뿐이야.
"히히. 복잡하죠."
내 표정이 숨길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졌나 보다. 이예슬을 장난스러운 웃음소리를 내고는 설명을 이었다.
- "저, 그런데, 지금 얘기하시는 거 보면 감정이 사라진 게 가장 중요한 문제인 거 같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자율신경계가 감정이랑 관련이 있는 건가요?"
내가 그 말을 끝마치자마자 이예슬은 손가락을 튕기는 딱 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바로 그거죠."
- "그거 아시잖아요. 무서우면 심장이 뛰고, 슬프면 눈물이 나고, 무서우면 소름이 돋고. 이런 거 의식적으로 할 수 있는 거 아니잖아요. 근데 그게 감정이랑 엄청 연결되어 있는 거 같지 않아요? 아무리 무서운 영화를 봐도 심장이 안 뛰면 공포를 느끼는 걸까요? 짝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때 그 가슴을 억누르는 답답하고 울고 싶은 느낌이 느껴지지 않으면 그게 사랑일까요?"
- "그러니까요. 의사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감정은 진짜 머리만으로 느끼는 게 아니라고요."
휠체어에 달린 스피커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갈수록 빨라졌다.
"그러니까 보통, 우리가 무서운 걸 보면, 그 무서운 걸 보면 무섭기 때문에 소름이 돋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고,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 그 아름다운 얼굴을 보기 때문에 심장이 뛴다고,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근데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러니까 신체의 반응이 먼저라는 거죠. 뇌가 무섭고 설렌다고 생각해서 심장이 뛰는 게 아니라, 어떤 상황에 놓이면 먼저 심장이 뛰고, 그걸 사람의 뇌가 해석하는 거라는 거예요. '어, 내 심장이 뛰네, 왜 뛰지? 아, 내 앞에 내 애인이 있구나. 그래서 설레는 거구나.' 하고 설레는 감정을 느끼는 거죠. 좋아하는 사람 있으면 같이 무서운 영화를 보라고 하잖아요? 심장이 쿵쿵 뛰는 걸 옆에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거라고 착각하니까."
(리뷰자 주 :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주장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다.)
- 소정의 얼굴과 그 맵시를 바라볼 때마다 느껴지는 흐뭇하고 두근거리는 기쁨이 다시 돌아온 것이 제일 기뻤다. 소정과 함께 내 증상과 바깥 이야기를 하면 시간이 가는 줄을 몰랐다.
"나는 지금까지 뇌가 모든 정신적 활동의 핵심이라고 생각했거든. 근데 심장이 안 뛰고 소름이 안 돋고 땀이 안 나면 감정도 비어버린다는 게 진짜 신기하다."
- "제가 미워하고 없어졌으면 하는 것과 제가, 어떤 면에서는 같다는 거니까요. 사실 그렇게까지는 생각을 안 했어요. 제게 전자뇌는 보조에 지나지 않았다고 보았죠. 그래도 걔가 그러니까 찝찝했어요. 퇴원하자마자, 일단 죽자 사자 술을 마셨죠. 한 2주 동안 매일 술만 마신 것 같은데... 근데 그때 딱 느껴지더라고요."
"무엇이?"
딱히 새로운 질문을 던지지 않아도 이예슬을 이야기를 충실히 잘 전개하는 좋은 화자였다. 어쩌면 입으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으로 말을 합성하기 때문에 말에 혼란이 없는 걸지도 모른다.
- "여기서부턴 국가 기밀이에요. 편집하시든가, 적당히 꾸며내시든가. 흥미가 있으면 더 조사해보시든가. 기자님 원하는 대로 하세요."
- "말씀하세요."
글쎄... 내 생각에는, 별로 대단한 게 아니지만 자기 딴에는 대단하다고 여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하다는 착각을 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별거 아닌 정보도 크게 특별하다고 착각하지 않는가.
- <감정을 감정하기>
- 그날은 그게 끝이었다. 나는 길거리 경험이 전혀 없어 보이는 고양이들과 강아지들을 보았고, 나중에 좀 더 자리를 잡으면 분양받겠다고 다짐하면서 보호소를 나왔다. 그때까지는 회색앵무를 분양받을 생각은 없었다. 수십 년이나 사는 생물을 어떻게 책임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인생의 모든 중요한 사건은 계획이 아니라 우연에서 발하는 것이다. 티렉스를 입양하게 된 계기는 일주일 뒤 보게 된 어느 다큐멘터리였다.
- 그러니까 앵무새가 말을 한다고 해서 앵무새가 "이 영화는 연출은 괜찮았는데, 솔직히 플롯이 너무 별로더라." 같은 말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겠지. 난 티렉스가 그냥 내 목소리나 잘 따라 해 주기를 원했다. 그 정도는 충분히 기대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고. 왜, 회색앵무들은 여덟 살배기 사람만큼이나 영리한걸. 그런데 티렉스는 2년간의 옹알이를 끝내더니 완전한 문장을 말했다. 그건 내 기대를 한참 넘어선 수준이었고, 티렉스의 천재성은 내가 애를 써서 발견했다기보다는 너무 환하게 빛나서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 "저기, 티렉스."
"왜?"
"그런데 너 있잖아, 어떻게 그렇게 말을 잘하는 거야? 내가 딱히 가르친 것도 아니고, 집에서 말을 자주 하는 것도 아닌데."
"네가 맨날 집구석에 틀어박혀서 넷플릭스만 보고 있으니까 내가 모를 수가 없잖아."
"그, 그런가."
"그건 그렇고, 감귤 싫다는데 요즘 너 왜 자꾸 줘. 체리 달라니까 체리!"
"아니, 그게, 체리가 감귤보다 훨씬 비싸다니까..."
- <한 터럭만이라도>
- 이제 나는 연구실에 있다. 내 연구 분야는 성인 대상의 유전자 치료다. 수많은 세포의 유전자를 일괄 수정하여 치료 효과를 내는 것이 목표다. 아, 이 유전자 치료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적용할 수 있도록 쉽고 싸게 만드는 것도 주요한 목적으로 삼고 있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해결해야 할 난제가 많은 분야지만 그만큼 연구가 진전될 때 기쁨도 크다.
- 물론 못 견딜 만큼 괴로울 때도 있다. 그럴 때, 나는 저 광활한 하늘 너머의 어둠 속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을 언니를 떠올린다. 400년과 맞먹는 한 달을 보내고 있을 나의 언니, 사춘기 시절 때부터 도저히 담담히 받아들일 수 없는 세상의 진실에 당당히 맞선 그의 모습을 마음속에 그린다. 내게는 언니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있으니까. 우리 다시 만나 마침내 서로를 완전히 용서할 그 순간이 올 것을, 나는 믿고 기다린다.
- <시간 위에 붙박힌 그대에게>
- 초임계 참기름 비리 사건은 어떤 국책연구소에서 진짜로 일어났던 일을 각색했다. 초임계 참기름과 초임계 콜드브루는 실제로 상품화가 되어 있다. 초임계 참기름은 정말로 그 품질이 좋다고 한다. 나도 책을 많이 많이 팔아서 그냥 참기름 말고 초임계 참기름을 사 먹으면서 살고 싶다.
- 사실 상당히 고통스러운 질병일 것 같은데, 놀랍게도 일부 연구에 따르면 환자들의 정서 상태가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Bruno의 2011년 연구에 따르면 표본 집단의 환자들 중 72퍼센트가 행복하다고 대답했고, Kübler의 2001년 연구에 따르면 환자들 대부분 차분한 상태에 있다고 한다. 이는 정서를 느끼는 데 있어 신체의 피드백이 필요하다는 근거가 된다. 그러니까, 아무리 무서운 상황에 있어도 자율신경계가 활성화되어 내 심장이 뛰지 않는다면 공포감이 없다는 말이다.
- 그 내용에 흥미를 느낀 나는 그것에 대한 생각을 나름대로 발달시켜 소설로 완성했다. 우리의 감정과 정서가 뇌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체와 협응하여 이루어진다는 생각은 매력적이다. 우리의 몸뚱이는 단순히 우리의 영혼이 입은 옷가지가 아니라, 우리의 정신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현대의 생물심리학이나 신경과학에서 정서에 대한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 언젠가 여유가 생긴다면 꼭 개인적으로라도 더 공부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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