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윤성근
출판 : 프시케의숲
출간 : 2021.12.06
헌책방을 운영하며 사람들이 찾는 책을 구해주는 기담 수집가. 그를 찾아오는 손님들은 때로는 찾는 책의 제목조차 기억하지 못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지 정보를 줄줄 꿰고 있지만 도통 구하기 힘든 책을 의뢰하기도 한다. 언제 구할 수 있을지, 가능하기는 할지 기약이 없는 의뢰이니만큼 그는 보수로 돈 대신 그 책을 찾는 '사연'을 받고 수락 여부를 결정한다. 이는 특이하긴 하지만 책과 사람들 사이의 연을 이어주는 헌책방 주인으로서 할 법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책이 사람을 찾아온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특별한 기억. 소중한 추억.
누군가에게 한 없이 중요한 것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대화를 나누다보면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에게도 그것이 특별해지게 된다. 자신의 일처럼 뛰어다녔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더라도, 사연을 모르는 채로 '혹시 책 들어오면 연락 주세요' 하고 남기는 예약과는 다른 느낌으로 책을 수소문하고 알아본다. 하지만 그럼에도, 저자의 힘만으로 '해결했다'고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우연과 기연들을 읽다 보면 정말 '책이 제 의지로 사람을 찾아오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건 나도 비슷한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더 깊게 다가오는 표현이었다.
나는 적절한 때가 되었을 때 그 시기에 읽어야 할 책과 닿는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소장하고 있는데도 영 진도가 나가지 않거나 손이 가지 않아 몇 년 간 읽지 않는 책도 있고, 희귀 절판 도서라는데 한 번에 구해 읽게 되는 경우도 있다보니 개인적으로 신기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적절한 시기에 만난 책에서는 울림을 주는 문장들을 만나게 된다. 지난번에 읽을 때는 지루하기만 해서 다 읽지 못하고 던져놓았던 책이, 우연히 눈에 띄어 다시 펼쳐보면 이번엔 전혀 다른 느낌으로 강렬하게 뒤통수를 치는 것 같은 식이다. 이런 경험을 몇 번 하다 보면 손 닿는 대로 읽는 게 가장 좋은 것 같다는 (게으르고 무책임한) 생각을 품게 되는데, 내게는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이니 어쩔 도리가 없다.
<헌책방 기담 수집가>는 각 에피소드마다 단 하나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다.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사연을 엮기도 하고, 사연들 간에 흐르는 묘한 느낌들을 함께 다루기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저자가 실제로 경험하고 들은 실화들이라고 생각하면,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 책에 실린 사연과 일화들은 모두 실화라고 한다. 때로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기가 막힌, 조금은 작위적인 느낌까지 주는 이야기들을 따라가다보면 사실 이런 게 '사람 사는 삶'이라는 표현이 절로 떠오른다. 저자는 생업으로 책방을 운영하고 있지만, 그가 하는 일들은 판매나 중개보다는 맺어야 할 연을 맺고 끊어야 할 한을 끊는 인연 업에 가까워 보인다. 처음 저자 소개를 읽었을 때의 당혹스러움은 어느새 흐려지고, 나도 이런 인연들을 다루는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조차 든다. (실제로는 사람에 쉽게 치이는 성격에다 말주변이나 넉살이 좋지 못해 어려울 거라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다)
편안하게 읽히는 책이다.
추천.
"진실은 소설보다 더 기묘하다.
왜냐하면 소설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을 그려야 하지만,
진실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마크 트웨인
- 지은이 윤성근. 책방지기이자 이야기 수집가. 초등학생 때부터 동네 헌책방의 최연소 단골이었고 책더미 속에서 신기한 이야기가 들어있는 책을 찾아 읽는 걸 좋아했다. 벤처 열풍이 불던 시절 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하여 졸업 후에 IT 회사에 취직했다. 서른 살 즈음에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손님으로 자주 다니던 헌책방에 직원으로 들어갔다. 2007년부터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이라는 작은 가게를 꾸리고 거기서 책에 둘러싸여 읽고 쓰며 살고 있다. 겉보기엔 보통 헌책방과 다르지 않지만, 주인장은 여기서 책과 사람에 얽힌 기묘한 이야기를 수집한다. 기담을 모으는 이유와 그 이야기를 놓고 간 손님에 관해서는 아직까지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
- 내 직업은 작은 헌책방의 주인이다. 표면적으로는 일단 그렇다는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중고책을 사고파는 일을 하고 있지만 사실 나는 책에 얽힌 기묘한 이야기를 수집하고 있다. 김수영 시인이 오래전에 쓴 것처럼 "잠자는 책은 이미 잊어버린 책이다. 그 책을 깨우는 사람만이 진짜 책 속의 이야기를 얻을 수 있다." 잠들어 있는 책을 깨워 그 속에 깃든 무한한 힘을 찾아낸다. 그게 바로 진짜 내가 하는 일이다.
- 새책을 파는 서첩에 갈 때 대부분의 사람은 무슨 책을 사야겠다는 결심이 선 상태다. 특정한 책을 사러 가는 것이다. 하지만 헌책방에 오는 손님들은 반대인 경우가 많다. 특정한 책을 마음에 두기보다 그저 '오늘은 무슨 책이 있을까나' 하는 느슨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책장을 훑어보다가 어떤 책이 문득 자기를 끌어당기면 그 책을 산다. '새책방'을 '사람이 책을 선택하는 곳'이라고 한다면 '헌책방'은 반대로 '책이 사람을 선택하는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는 가게'다. 그런데 가끔 특정한 책을 목표로 삼아 헌책방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왜 하필이면 헌책방인가? 당연히 그가 찾고 있는 책이 새 책방에서는 팔지 않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절판된 책이다.
-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책은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책 스스로 나타나 주어야 한다. 헌책방에서 일하다 보니 책을 찾는다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 일인지 알게 됐다. 어떤 책은, 분명히 세상에 존재하는 책이라는 걸 아는데도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한 채로 살아간다.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도저히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책인데 며칠 만에 나타난다. 그건 어떠한 자연법칙이나 심리학 개념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책이 제 의지로 사람을 찾아오는 것이다. 믿기 힘들겠지만,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 어르신은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오랫동안 찾아다닌 내 젊은 시절의 고운 사랑 같은 책을 찾았는데 어찌 우편으로 받겠소? 내가 직접 모셔가야지."
- 책은 작가가 쓴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 책을 찾는 사람들은 거기에 자기만의 사연을 덧입혀 세상에 하나뿐인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낸다.
-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요즘 다시 번역된 <롤리타>를 읽어봤는데 예전 그 느낌이 아니더라고요. 그때 읽었던 책이 줄 수 있는 감정의 울림이란, 다른 책에서는 찾을 수 없나 봐요."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하는 말이었다. 책은 다 같은 책이지만 꼭 만나야 하는 그때의 책이 있다. 그 책은 그냥 소설이 아니라 젊은 날의 추억, 사랑, 고민, 그리고 망설임과 선택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들을 때마다 매번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좋은 음악처럼. 그런 의미로 나는 S씨에게 책이 음악 같다는 말을 한 것이다.
- 밥을 먹던 중 한 사람이 로쟈에게 평소에 책을 얼마나 사느냐고 물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거다. '얼마나 읽느냐'가 아닌 '얼마나 사느냐'라는 것. 로쟈는 책을 읽고 쓰는 게 직업이니 당연히 많이 산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덧붙였다.
"집에 분명히 있는 책인 걸 아는데도 사는 일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집니다. 첫째는, 집 어딘가에 책이 있다고 기억으로는 확신하지만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경우입니다. 두 번째는 더 우스운 경우입니다. 책을 갖고 있고 그게 어디에 있는지도 정확히 알고 있지만, 워낙 꺼내기 어려운 곳에 있어서 차라리 그 책을 다시 사는 겁니다. 물론 이 경우는 책값이 저렴하다는 단서가 있어야겠지요."
(리뷰자 주 : 이건 정말 남 이야기가 아니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일식>도 그렇고 이미 있다는 걸 알면서 다시 산 책들이 있다...)
- 집에 책이 많다 보니 여기저기 제법 쌓여 있는 모양이다. 바닥은 물론이고 책상 위, 의자에도 책을 쌓아서 앉을자리조차 없이 해놓고 사는 사람을 여럿 봤다. 로쟈도 그와 다르지 않으리라. 그 속 어딘가에 작은 책 한 권이 들어 있다면, 책을 꺼내기 위해(로쟈는 이때 '발굴'이라는 말을 썼다) 몇 시간에 걸쳐 그 모든 책더미를 들어내는 수고로움을 겪기보다 만 원 정도 돈을 쓰는 게 더 나은 거라는 얘기다.
- 이 말을 듣고 거기 모인 수강생들은 떠들썩하게 웃었다. 모든 일에 철두철미할 것 같은 로쟈에게 그런 느슨한 구석이 있을 줄이야. 책이 가득 쌓인 무더기 앞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허리에 손을 짚고 서 있는 로쟈라니. 그가 강의 때 자주 쓰는 말처럼 '난센스' 같은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라 나도 웃었다. 하지만, 날마다 이어지는 강의에 몸과 마음이 다 지쳐 있을 걸 생각하면, 차라리 그런 방법을 택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집에 책을 켜켜이 쌓아놓고 사는 사람이라면 로쟈의 말이 결코 난센스로 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때 다른 사람들처럼 크게 웃을 수 없었다. 일하고 있는 헌책방에 책이 많아지면서 분명히 가지고 있는 책을 여러 날 동안 찾지 못하는 일이 많아졌다. 내가 관리하는 책이니 다른 사람에게 대신 찾아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내 책을 내가 못 찾으면 누가 또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누가 그런 일을 주인 대신할 수 있을까?
- 거의 모든 시계의 시간이 제각각이었다. 지금 시간과 정확히 맞는 건 한 개도 없었다. 전시해놓은 시계들이 다들 이 모양이면 방문한 손님이 N씨의 실력을 신뢰할 수 있을까? 나는 왜 시간을 제대로 맞춰놓지 않느냐고 물었다. N씨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시계 고치는 일을 하다 보니 매일 보는 게 시계잖아요?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벽에 있는 모든 시계의 시간이 똑같으면 어쩐지 강박적인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시간을 일부러 조금씩 다르게 맞춰 놓은 거예요."
"아, 그렇군요. 뭐, 어쨌든 시간은 다 틀리지만, 시계 자체는 정상 작동하는 거니까요. 판매할 때 제대로 된 시간으로 맞춰서 손님에게 주면 되는 거군요."
N씨는 내 말을 듣고는 "그렇죠. 시간은 틀려도 시계는 정확하니까요. 모든 시계가 다 같은 시간을 가리키고 있을 필요는 없죠."라고 대답했다.
- "책은 제가 찾았지만, 이 책이 나타날 마음이 없었다면 저는 지금도 어느 도서관 책 무더기 사이에서 헤매고 있었을 겁니다."
"책이 자기 스스로 나타나 줘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제 경험상 그렇습니다. 책은, 그 책을 만날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습니다. 책은 사람의 마음을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그 간절한 마음을 알아보고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는 거라고 할까요? 이번 경우엔 K님의 마음이 책과 통했나 봅니다. 그러니 이 책을 오래 간직해주세요. 이번엔 꼭 읽어보시고요."
- 책과 사람은 연결되어 있다. 그 끈이 보이지 않을 뿐. 둘은 마음으로 이어져 있기에 제아무리 억지로 몸을 움직인다고 해서 금방 만날 수 있는 건 아니다. 오직 마음으로 간절히 바라는 사람에게 책은 살며시 다가와 제 어깨를 내어준다.
- 거기엔 "원한다는 것의 완전한 의미는 원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며, 의지의 작용 위에 어떤 압력도 행사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라는 아리송한 문장이 있었다.
- "네가 좋아하는 곳이라면 비록 그곳이 돌담 위에든, 바위에든, 나무 그루터기든, 풀밭이든, 흙 위에든 앉아 보아라. 어디에서든 영상과 시가 너를 에워쌀 것이며 너를 둘러싼 세계는 아름답고 행복스러운 음조를 울리리라."
- '서삼치 書三類'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책에 관한 세 가지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사람을 그렇게 부른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가 책을 빌려달라고 하는 사람이요, 둘째는 빌려달란다고 순순히 빌려주는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빌린 책을 돌려주는 사람, 혹은 빌려준 책을 돌려받으려 하는 사람이다.
- 그런데 책을 좋아하는 사람 치고 이런 세 가지 어리석은 일을 한 번도 안 해봤다고 하면 거짓말일 것이다. 책은 묘한 물건이다. 책은 사람을 똑똑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을 똑똑하게 살려면 약간 바보 같은 면이 있어야 한다는 걸 가르쳐준다.
- 몇 해 전 어르신에게 책을 넘겨받았던 그곳엔 이제 높은 아파트가 들어섰다. 거기가 전에는 허름한 주택가였다는 사실조차 기억에서 흐려졌다. 하지만 50년 전 책을 주고받았던 청년들의 운명은 여전히 이 땅 어딘가에 살아 있다. 두 사람과 한 권의 책. 이들은 운명이라는 끈으로 여전히 연결되어 지내는 게 아닐까? 그 끈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한, 두 사람의 운명도 역시 끝은 아니다. 내가 오래된 책 다루는 일을 하며 얻은 여러 배움 중에 가장 깊이 의미를 새긴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에 책이 남아 있는 동안, 그 책과 함께한 사람들의 인연도 사라지지 않는다.
- “세상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이 있지만요, 해보지 않으면 영 모르는 일도 있으니까요. 저는 거기서 누구도 느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제주도를 만나고 왔습니다. 사장님은 모르실 거예요.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 떨리는 순간이었다. 비록 수십 년 전에 자신이 찢어버린 책과 똑같이 생긴 건 아니었지만, 다시 읽으려고 하니 손이 떨렸다. 하지만 두려움도 잠시, 놀랍게도 모파상이 들려준 이야기는 고등학생 때 봤던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때는 "바보 같은 잔느, 멍청이 잔느!"라고 하면서 화가 났는데 지금은 이 아름다운 여인을 진심으로 위로해줄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다.
- 나는 그녀가 하는 말을 수첩에 옮겨 적으면서 물었다.
"고등학생 때 읽은 책과 내용은 똑같은데, 왜 그렇게 전혀 다른 감정이 생긴 걸까요?"
S씨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책은 변하지 않았지만 제가 변했으니까요. 50년이라는 인생을 살다 보니 잔느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그녀의 운명도 역시 조금은 이해가 되더라고요. 소설이긴 하지만, 누군가의 일생을 판단하려면 그 사람에게도 일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닐까 싶어요. 꽃 다루는 일을 하면서도 그런 걸 자주 느낀답니다. 저도 처음엔 꽃이 예쁜 건 활짝 피었을 때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가엾다는 마음도 자주 들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알아요. 꽃은 싹트고 잎이 나오고 활짝 피어났다가 시들어 고개를 숙이는 그 모든 과정 자체가 아름다운 거예요."
- "인생은 보다시피 그렇게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가 봅니다." S씨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외우고 있었다. 이 문장 때문에 화가 나서 책을 쓰레기통에 버린 일을 반성하는 의미로 똑같은 책을 찾아 이번엔 소중하게 간직하겠노라 다짐했다. S씨는 꽃과 우리 인생이 비슷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 나는 책을 찾아주는 대신 그 책에 얽힌 사연을 수고비로 받는다. 하지만 가끔 귀한 삶의 깨달음을 얻고 나면 한동안 마음이 숙연해진다. 누군가에게는 흔하게 볼 수 있는 낡은 책 한 권이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일생을 통해 찾은 소중한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손님에게 받은 아름다운 삶의 가르침을 마음에 담고, 어디 있을지 모를 책 한 권을 찾아 길을 나선다.
- 그런데 일이 잘 안 풀린다고 했을 때, 그것은 단지 그 순간에 무엇이 잘못되어 나온 결과는 아니다. 여러 가지 일들이 뒤엉켜 있다가 어떤 사소한 계기를 통해 산사태처럼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오늘 책방 한쪽에 탑처럼 쌓아둔 거대한 책더미가 와르르 무너진 것처럼 말이다.
- 두 사람이 돌아간 다음, 나는 혼자 의자에 앉아 후련한 마음으로 작게 숨을 내쉬었다. 엉켜 있던 인생의 실타래 한쪽에서 작은 끄트머리를 발견한 것 같아 오랜만에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살다 보면 또 실타래가 엉키거나 쌓아 올린 책 탑이 무너지는 때가 있겠지만, 그 역시 우리 인생의 한 부분이 아니겠나. 엉키면 풀고 무너지면 또 쌓고 하는 동안, 누군가 옆에 함께 걸으며 따스하게 손잡아 줄 사람이 있다면, 그 길이 결코 힘든 기억만으로 남지는 않을 것이다.
- 그 말을 듣고 나는 비장의 무기라도 꺼내는 듯 내 책상 위에 있는 태블릿 컴퓨터를 가지고 왔다. 이런 경우 국립중앙도서관 웹사이트에 접속해서 도서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해보면 손님이 무슨 책을 찾는지 의외로 쉽게 알 수 있다. '니콜라', '상페'라는 단어로 검색하니 순식간에 결과가 나왔다.
- "저는 명랑하고 인기 많은 니콜라를 닮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니콜라처럼 멋지게 행동할 수 있을지는 몰랐죠. 그래서 한 가지 꾀를 냈습니다. 책에 나오는 니콜라의 행동이나 말투를 그대로 따라 하는 거였죠. 책에 보면 친구 두 명이 싸우려고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중간에 니콜라가 들어가서 '좋아, 싸워봐. 내가 심판을 봐주지, 정정당당하게 싸우려면 유능한 심판이 필요한 법이니까!'라고 말해요. 니콜라의 말투와 몸짓을 상상해서 거울을 보며 연습했어요. 실제로 학교에서 그런 식으로 행동하니까 금세 아이들이 저와 친해졌어요. 우쭐해진 저는 더욱 대담하게 니콜라를 흉내 냈죠. 다른 아이들은 니콜라를 절대로 모를 테니까 저는 아주 신이 났어요."
- 본명보다는 '로쟈'라는 인터넷 활동명으로 더 잘 알려진 서평가 이현우 씨는 책 강의를 할 때 개인적인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몇 해 전, 나는 그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두 달 동안의 일정으로 <변신>으로 유명한 프란츠 카프카가 쓴 여러 작품을 다루는 특강이었다. 로쟈는 소문대로 강의안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수업을 이어나갔다. 언젠가 책에서 읽은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가 연상됐다. 바르트는 강의할 때 워낙 철저하게 사전 준비를 하다 보니 직접 작성한 강의 노트에 별다른 가공을 하지 않아도 그대로 단행본으로 출판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처럼 로쟈의 강의는 매우 건조한 면이 있었으나, 한편으론 완벽한 건축물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 서재는 거실에서 한쪽으로 나 있는 복도를 따라가니 건물 끝부분에 자리하고 있었다. C씨는 문을 열고 내가 먼저 들어가도록 옆으로 조금 비켜섰다. 서재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나는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놀랐다. 개인 서재라고 하면 작은 방 하나에 책이 가득 찬 모양 정도로 상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노인의 서재는 그 이상이었다. 이곳은 책을 보관하기 위해 따로 방을 설계한 게 분명했다. 내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입을 반쯤 벌리고 있으니 C씨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원래는 지금 문을 열고 들어온 이 방 하나만 서재였어요."
C씨는 묵직해 보이는 책상 위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여기에 책을 가득 올려놓고 공부하시던 할아버지 모습이 눈에 선해요. 그런데 점점 책이 많아져서 보시다시피 옆에 있던 방의 벽을 허물고 공간을 늘려야 했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방도 서재로 만들었어요. 결과적으로 이렇게 방 세 개가 연결된 재미있는 구조가 됐죠."
- C씨는 "그럼, 천천히 보시고 마치면 제가 다시 서재로 올게요."라고 한 뒤 조용히 문밖으로 나갔다. 두꺼운 문을 닫으니 서재는 마치 라디오 부스처럼 고요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봐야 할지 솔직히 엄두가 나질 않았다. C씨는 책이 2만 권 정도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엔 방 하나에 족히 만 권은 되는 것 같았다. 첫 번째 방은 소파와 책상이 있어서 상대적으로 책이 적어 보였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방에는 도서관처럼 레일이 설치된 책장이 있으니 세 방을 합친 전체 공간에 어림 잡아 3만 권 이상의 장서가 있는 셈이다.
(리뷰자 주 : 언젠가는...!)
- 나는 어릴 때부터 사고방식이 부정적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조금씩 고쳐나가려고 하고 있지만, 이게 본래 내 성격이라 마음먹는다고 해서 쉽사리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 성격이 내가 헌책방에서 일하기 전, IT회사에 다닐 때는 여러모로 도움이 됐다. 직장생활을 잘하려면 되도록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져야 하지 않느냐고 말할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종사했던 컴퓨터 프로그래머라는 직종은 업무 특성상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하는 게 일할 때 편하고 결과도 좋다. 야근을 자주 하는 프로그래머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있다. "프로그램에 오류가 있으면 그걸 고치기 위해 야근하고, 오류가 없으면 있을지도 모르는 오류를 찾기 위해 야근한다." 여기서 뒤에 있는 문장은 모순이다. 없는 오류를 찾아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 에밀 시오랑은 1911년에 루마니아에서 태어난 작가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파리에 정착해서 모국어 대신 프랑스 말로 책을 쓴 사람이다. 쇼펜하우어의 부활이라고 할 만큼 그가 쓴 글은 온통 독설 투성이다. 이런 특유의 철학 때문에 어떤 독자들은 에밀 시오랑의 책이 현대의 성경이라며 열광적인 찬사를 보낸다. 반면 살아가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무의미한 소리만 늘어놓는 불평쟁이의 넋두리에 불과하다며, 그의 책은 읽을 가치가 없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많다.
- "사람이 어디 그리 쉽게 바뀌겠습니까? 저는 여전히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 책 때문에 기운을 얻었는걸요. 책을 읽으면서 부정적인 생각도 충분히 생산성 있는 결과로 발전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봤습니다. 세상과 자신을 갉아먹는 부정 말고, 모든 것에는 언제나 새로운 방향이 존재한다는 걸 고민하는 생산적인 부정 말입니다."
- 책에 사악한 기운이 깃들어 있다는 얘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 유럽의 중세시대 이야기냐고? 아니다. 오늘날에도 어떤 책은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 주인이 그 책에 깃든 힘을 똑같이 누릴 수 있다고 전한다. 이제부터 이야기할 <오맨> 번역 초판본에 관한 이야기는 소설이 아니라 진짜다. 평소 심약한 체질이신 분은 여기까지만 읽어주시길 당부한다.
- 봄이었다. R은 우리 책방에 자주 오는 단골인데 직업은 인디 가수와 의상 모델 일을 겸하고 있다. R로 말하자면 손님으로 알고 지낸지 10년이 넘었다. 처음엔 헌책방 한쪽에 작게 마련한 무대에서 노래와 연주를 하고 싶다며 나를 찾아왔다. R은 낡은 기타를 꺼내더니 데미안 라이스의 곡을 연주했다.
- 찾아낸 책은 뜻밖에도 소설이 아닌 산문집 <방랑>이었다. 그런데 이 책은 지금도 번역서로 나오기 때문에 처음에 헤세의 작품 전체를 조사할 때 당연히 읽었다. 왜 당시엔 그 문장을 발견하지 못했을까? 그 이유가 내겐 충격이었다. B씨가 기억하는 문장이 있는 농부의 집이라는 글 한 꼭지가 지금 판매되는 책에는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1980년대 판본에만 그 글이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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