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김희경] 이상한 정상가족

일루젼 2022. 3. 17.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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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희경
출판 : 동아시아 
출간 : 2022.02.22

출판사 제공 서적 


   

꼭 한 번 읽어봐야지 생각만 하던 차에 '개정증보판'이 발간되었다. 이 책이 처음 발간되었을 때만 해도 '정상가족'에 대한 이슈는 잔잔한 호수에 던진 돌처럼 파문을 일으킬만한 주제였다. '보통의' 단계를 밟아가는 '정상적인' 성인이라면 당연히 가정을 이루어야 하고, 이성애 부모와 아이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전국민적 믿음. 

 

지금은 조금은 달라진 것도 같다. '나 혼자 산다' 같은 예능 프로그램의 영향인지, 무시할 수 없는 사회적 현상 때문인지 1인 가구에 대해서도 이전보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듯하고, 본문에서도 등장하는 사유리 씨의 출산 같은 이슈를 거치며 다양성에 대해 한 번쯤은 생각해 본 뒤라서 일까. 

 

하지만 이런 낙관적인 생각은 본문을 읽다보면 산산이 부서진다. 1인 가구의 급증과 21년 조사 기준 0.837로 1도 되지 못하는 출산율은 물론 중대한 사회 문제이지만, 그보다 더 깊게 깔린 근원에는 '정상가족'에 대한 환상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다시 말해 아동학대와 정당한 체벌, 저출산, 돌봄과 경제 같은 일상과 깊게 관련된 주제 속에는 모두 '4인 가족' 신화가 녹아있다. 50년대 미국의 '스위트홈' 환상처럼.

 

'가족이란 이래야 한다'는 신념이 모든 문제의 주적이자 유일한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왜 생겨났는지, 그래서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유의미하다. 익숙하다는 것이 반드시 옳거나 좋은 것은 아니다. 

 

저자는 스웨덴의 예시를 들며 가정의 역할과 정부의 역할 구분선을 새롭게 조정할 것을 주장한다.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의 밸런스가 저출산, 아동학대, 입양, 더 나아가 다양한 가정 형태에 관한 이해와 관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고속 성장을 거듭해온 한국 사회의 비결은 공적인 해결책을 제시했어야 할 많은 부분을 가정과 개인의 몫으로 돌려왔기 때문이며, 이제 그 부채를 해결하는 것이 다음 단계를 위한 준비가 될 것이라고도 말한다. 

 

본문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과거나 현재를 마주하게 된다. 어떤 형태이건 가구와 가정은 맞닿아 있으므로, 저자가 제기하는 의문을 마주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외면하고 싶은 불편함이 따르더라도, 잠시 멈춰서서 제대로 보아야 할 시점이다. '나 개인의 삶에 집중하기에도 바쁘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대로 '국가 소멸'을 맞게 되면 더이상 '삶'의 기반을 뒷받침해 줄 인프라가 사라지게 될 것이므로. 적어도 '나'를 위해서라도 관심을 가져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해결책은 개인의 몫으로 미루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결국 형태는 다를지라도 '당신'의 일이 '나'의 일이기도 하므로. 

 

 

 


   

 - "한 사회가 아이들을 다루는 방식보다 더 그 사회의 영혼을 정확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없다."  - 넬슨 만델라 Nelson Mandela 

- 학대에서 해외입양, 과도한 사교육, 이주아동에 이르기까지 아동인권 침해가 벌어지는 영역과 폭은 예상보다 넓다. 이런 일들이 개별적 조각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었을 때 총체로서 드러나는 우리 사회의 영혼은 어떤 모습일까. 전체를 보아야 패턴이 뚜렷해진다.

 

- 그러나 여전히 아이들, 특히 부모에게 경제적, 정서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에게 가족주의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정상가족' 안에서 여성을 억압하는 성차별적 위계구조 못지않게 아이들을 억압하는 것은 자녀를 소유물처럼 대하고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자녀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증명하려 드는 부모라는 권력이다. 또한 '정상가족'의 바깥에서 비정상으로 간주되는 가족관계에 속한 아이들은 차별을 넘어 종종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까지 놓이기 십상이다. 

- 아이들은 문자 그대로 '작은 인간'이다. 그저 작을 뿐 성인과 다르지 않은 사람,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 세상에 초대받아 성인과 종류만 다를 뿐인 불안을 견뎌내야 하는 여린 생명체다. 한 사회에서 가장 약한 자가 그 사회의 수준을 드러내 보여준다면 작은 단위의 사회라 할 가족도 아이를 중심에 놓고 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가족을 다룬 책들도 거의 성인의 문제들만을 다뤘을 뿐 아이를 중심에 둔 책은 찾을 수 없었다.

(리뷰자 주 : '작은 인간'이라는 표현은 매우 다양한 맥락에서 쓰인다. 의학계에서는 아이는 성인의 축소판인 '작은 인간'이 아니므로, 완전히 다른 약동학과 치료 계획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근대 유럽에서는 아이는 '작은 인간'이므로, 충분히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니 노동력을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 하에 근로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다. 저자가 설명하는 맥락에서는 근대 유럽과 유사하지만, 권리 쪽에 더 초점을 맞추어 '한 사람으로서의 권리와 존엄성'을 존중받아야 한다는 의미로 보인다.) 

 

-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학대와 체벌의 경계가 과연 어디인지, 그런 것도 좀 전문가들이 정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검사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대부분 집에서 아이들 한두 번씩은 때리면서 키우고 나도 그러는데 어디까지가 체벌이고 어디서부터가 학대인지 구분해야 법의 대응도 가능하지 않겠느냐 하는 이야기를 많이 하거든요."

 

- "체벌? 에이, 나도 아이들 때린 적 있어요. 그거랑 학대는 좀 동떨어진 거 아닌가? 그런 약한 거 말고 학대를 다루는 캠페인을 해보자니까요."

 

-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이런 사고방식은 뭔가 좀 이상하다. 여성에 대한 폭력에 빗대어 생각해보자. 요즘 우리는 '성폭력은 나쁘지만 부부나 연인 사이에 다투다 보면 뺨 몇 대쯤 때릴 수 있지 뭐'라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 그런데 아이들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학대는 나쁘지만 아이를 키우다 보면 때리지 않고 키우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버릇을 가르치기 위해 체벌은 어쩔 수 없고, 나도 맞고 자랐지만 잘 크지 않았느냐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앞에 예로 든 검사와 기자처럼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체벌과 학대는 동떨어져 있으며 그 사이의 경계가 뚜렷하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왜 우리는 이런 생각을 갖게 됐을까?

 

- 아동학대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데 반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끔찍한 아동학대 사건들이 불거질 때마다 우리는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저럴 수 있는지' 분노한다. 아이를 학대하는 사람들은 비정상인 악마 같은 사람들이라고 치를 떤다. 한편 국가인권위원회가 5년마다 실시하는 국민 인권의식조사의 2016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여전히 국민의 절반가량은 아동, 청소년을 체벌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조사에서 체벌에 찬성한 절반의 국민도 거의 다 학대에는 반대할 거라고 확신한다. 체벌과 학대 사이의 경계를 제대로 정의해야 한다는 주장이 심심찮게 나오는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런데 체벌을 허용하는 태도와 학대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 '체벌 덕분에 오늘날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라는 논리 역시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서도 체벌금지가 사회적 의제가 될 때마다 등장하는 체벌 옹호의 논리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Bertrand Russel은 <런던통신>에서 "학창 시절 회초리나 채찍으로 매를 맞았던 이들은 거의 한결같이 그 덕에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믿고 있다. 내가 볼 때는 이렇게 믿는 것 자체가 체벌이 끼치는 악영향 중 하나"라고 말했다. 어릴 때 회초리를 맞지 않았더라면 내가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는 겪어보지 않아서 알 수 없다. 아마 지금과 비슷하거나 폭력에 민감한 감수성을 장착한 더 나은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 기성세대는 그 시대의 제한된 문화적 환경에서 자녀를 가르쳤다. 자신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다고 해서 그 방법이 지금도 유효하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체벌의 유해성을 연구해온 발달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거 쇼프는 이를 자동차 안전벨트에 비유해서 설명했다. 성인의 상당수는 자동차 안전벨트가 없던 시절에 자랐다. 하지만 누구도 안전벨트가 없었던 덕분에 내가 잘 자랄 수 있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안전벨트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무탈하게 자랐다고 말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부모의 체벌 덕분에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부모의 체벌에도 불구하고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해야 한다.

 

- 어린이는 보편적 개념이 아니다. 각 사회의 맥락에 따라 늘 다르게 정의되어왔다. 유발 하라리 Yuval Noah Harari의 <사피엔스>에 따르면 함무라비 법전은 가족 내 엄격한 위계질서를 규정했는데 어린이는 독립된 개인이 아니라 부모의 재산이었다. 어떤 귀족이 다른 귀족의 딸을 죽이면 그 벌로 살해자의 딸이 처형당했다. 살인자는 무사한데 죄 없는 그의 딸이 죽어야 한다는 게 이상해 보이지만 함무라비와 바빌론 사람들에게는 이게 정당한 귀결이었다. 손해 본 재산만큼 손해를 끼친 자의 동일한 재산을 처분하는 게 옳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 서양에서도 근대 이전에는 어린이를 때리거나 위협하는 게 보편적이었다. 18세기 중반까지 서구 각국의 법에서 아이는 물건으로 간주되어 부모나 법적 책임자들 마음대로 사고팔거나 노예로 부렸다.  

 

- 한국 사회에서 부모가 자신의 뜻대로 자식을 처분하는 가장 극단적인 행위가 지금도 간간이 발생하는 부모의 자녀 살해 후 자살이다. 언론은 이를 곧잘 '가족 동반자살'이라 부른다. 행위 자체에도 그렇고 이를 '동반자살'이라고 부르는 표현 둘 다에 아이들을 부모와 분리된 존재로 바라보지 못하고 부모가 세상을 버릴 때 데리고 갈 정도로 처분이 가능한 소유물처럼 여기는 관점이 배어 있다.  

 

- 미혼모가 낳은 아이들을 대거 입양 보내는 일은 한국에서만 일어났던 게 아니었다. 자본주의 산업국가의 정점에서 미혼모의 자녀들을 입양에 의해 중산층 가정으로 대거 재배치하는 일은 서구에서도 벌어졌다. 1940~1980년대에 미국, 뉴질랜드, 호주 등에서는 선주민의 자녀들은 열등하다는 인종적 이유로, 미혼모의 아이들은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친생부모와 강제로 분리시켜 백인 중산층 가정으로 대거 입양을 보내는 강제 입양이 횡행했다. 아이스크림을 떠내듯 아이들을 원가정에서 떼어냈다고 해서 이 시기는 '베이비 스쿱 시대'라 불린다.

(리뷰자 주 : 이제 원주민이라는 표현 대신 선주민이란 단어를 쓰는 모양이다.) 
 
- 민 대표는 친생부모와의 분리는 "몸이 기억하는 상처"라고 했다. 아기가 뭘 알겠나 생각하기 쉽지만, 분리는 학대 못지않게 큰 트라우마를 남기는 경험이라는 것이다. 생후 7개월 무렵 입양돼 평탄하게 자란 A 씨는 중학생 때 가족과 잠깐 떨어져 지내는, 별스럽지 않은 상황에서도 온몸의 세포가 덜덜 떨리는 느낌이 들 정도로 유별난 공포를 겪었다. 그 이유를 몰랐는데 입양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제야 흩어진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듯했다고 한다. 그는 "아이에게 친생부모와 분리되는 경험은 버림받는 것이고 온몸에 화상을 입는 듯한 충격이다. 화상이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상처는 남을 수밖에 없다"라고 했다. 

- 일곱 살 때 입양된 B 씨는 20대가 되어도 해소되지 않는 분리불안과 함께 "엄마가 버릴 만큼 내가 나쁜 아이였나?" 하는 생각으로 성장 과정 내내 고통스러웠다. 존재 자체를 거절당했다는 아픔과 자기 불신은 입양인을 힘들게 하지만, 입양가족은 '자연스러운 가족'과 똑같다는 믿음 앞에서 입양인의 감정은 제대로 존중받지 못한다. 되레 친생부모의 양육 포기로 입양부모가 자신을 거두어준 것에 감사해야 한다는 암암리의 압박에 자기감정을 지우려 노력해야 한다. 입양을 말하면 종종 차별받거나, 상실을 말하면 '실패한 입양인'이라는 비난을 듣기 일쑤다.

 

- 더 많은 민주주의와 자유, 진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보수적인 사람들보다 타자에 대해 더 관용적 태도를 지녔으리라 생각했던 나로서는 그들이 이주아동에게 보인 적대적 태도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무슨 이유인지 알고 싶어 온라인 게시판과 SNS에 올라온 '한국판 이민법’ 비판을 일일이 찾아 읽어보았다. SNS 프로필에 권위주의적 정부를 비판하고 민주주의를 바란다고 적어둔 이들이 딱 그 권위주의적 시각으로 이주민을 바라보며 "우리 권리를 빼앗아 간다"라고 비판과 혐오 발언을 쏟아냈다. 

- 무수한 비판 중 일상생활에서 이주민에게 실제로 피해를 당한 경험에 근거한 주장은 찾기 어려웠다. 대개 '왜 내가 낸 세금으로 불법체류 아동을 돕느냐'라는 논리였다. 내가 낸 세금으로 남을 돕는 사회보장제도는 비난하지 않는 자칭 '민주주의자'들이 미등록 이주아동의 기본권 보장에 대해서는 '세금이 아깝다'라는 논리를 들이밀었다. 미등록 이주아동의 부모들도 한국에서 일하며 사는 이상 지역 경제의 한 부분을 맡고 있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세금을 낸다는 것도, 간접세 비중이 50%에 육박하는 한국에서 세금을 내지 않고 생활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그들의 안중에는 없는 듯했다.  

 

- 이주민에 대한 증오는 이주가 일상화된 현대사회에서 위험 전가, 희생양 찾기, 타자 비난의 가장 흔한 형태다. 미등록 이주아동의 처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너무나 간단히 타자를 증오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그만큼 불안과 위기감이 사람들의 일상과 마음 깊숙이 스며들었다는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 

 

-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나 자신이 그런 사례다. 지방의 소음에서 태어났지만 내 부모가 가까운 중소도시로, 서울로 계속 옮겨 온 유일한 이유는 우리 형제들의 교육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자립한 지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내 선택으로 삶을 만들어왔다는 생각의 이면에는 나를 위해 헌신한 부모의 기대를 번번이 배반하며 살아왔다는 죄책감이 여전히 남아 있다. 가족주의가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나 역시 가족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셈이다. 

 

- 그런 상황이니 내가 속한 세대뿐 아니라 현재 30~40대들도 대체로 부모에게 정서적 친밀감을 갖고 자란 사람이 많지 않다. 그들의 부모는 자녀교육과 경제적 지원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세대였고 부모 자녀 사이에선 친밀한 애정보다 '공부'가 가장 중요한 화두였다. 자녀의 수가 줄어든 요즘에도 교육을 중심으로 한 부모의 희생과 헌신, 자녀의 보답을 아름다운 관계로 바라보는 오래된 가족주의의 경향은 약해진 것 같지가 않다. 되레 가족이 더욱 응집돼 자녀를 두고 '너의 성공=우리의 성공'이라고 바라보는 등식이 더 심해진 듯하다. 세대가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는 '부모의 헌신'과 '자식의 보답'의 구조는 아이들이 사회에 나가기도 전에 부채의식을 갖도록 만든다. 헌신과 보답의 도덕적 의무로 서로에게 짐을 지우는 이 가족주의의 구조 안에서 행복한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 자녀의 성공을 위해 똘똘 뭉쳐 분투했던 가족의 중심에 늘 '헌신적 어머니가 있었다는 것도 한국 가족주의의 특징 중 하나다. 사회제도가 개인을 보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실질적 생존은 가족과 그 소우주의 주연출자인 여성에 의해 이끌려갔다. 중산층 전업주부들이 '가정'이라는 성역을 유지할 의무를 수행했고, 가족 집단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경쟁에 뛰어들었다. 과거 엄마들의 치맛바람과 촌지, 부동산 투기 열풍 등이 상징하듯 사회적 지위의 상승이 학벌과 기회의 포착에 좌우되면서 중산층 전업주부가 중심이 된 성공지향적 가족이기주의, 소시민적 가족 지상주의는 그 어느 때보다 심해졌다. 

 

- 정신과 의사 하지현은 <대한민국 마음 보고서>에서 스스로 아무것도 결정할 줄 모르거나 계속 결정을 지연하는 청년들이 양산된 현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자녀가 경쟁에서 이기기를 바라는 부모는 아이 대신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선택해왔다. 덕분에 아이는 시행착오를 거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가진 성인이 됐지만 결정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갖출 기회를 놓쳤다. 결국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고, 무엇을 결정하지도 모험하지도 못하는 어른이 되어 세상에 나갈 문 앞에 서게 된다. 아이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했던 일들이 사실은 아이에게 독이 되어버린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 내비게이션에 의존해서 운전하는 데에 익숙해져 버리면 내비게이션이 없을 때 혼자 힘으로 길을 찾지 못하듯,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앞길의 돌부리를 치워주는 부모에게 익숙해져 버린 아이들은 성인이 되었을 때 자기 앞길을 스스로 닦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런 상황에서 상당수의 청년들은 독립을 유보한다. 부모의 과도한 기획과 권력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 곧 계층 하락을 의미하는 세계에 진입하는 것이기도 하므로 독립을 포기하고 끊임없이 의존하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 자아를 형성하는 가장 기초적 공간인 가정에서부터 자기 가족만 아는 폐쇄적 분위기, 자녀의 자율성을 무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면 그런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독립적인 근대적 자아를 형성하긴 어려울 것이다. 사회는 경쟁의 장이고 누군가가 이겨서 무언가를 얻으면 다른 사람은 잃는 게 세상 이치라는 제로섬의 논리가 부모의 태도에 배어 있다면 자녀들에게도 그러한 행태가 강요되기 쉬울 터다. 가족 내에서 부모의 권위가 강할수록 구성원들 사이의 존중과 배려, 민주적 의사결정도 그만큼 더 어려워진다. 부모의 신분이 세습되고 사회에서 개인이 아닌 가족 단위로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수립할 때 가족과의 분리를 생각하기 어렵다. 


- 가족주의를 떠나서 보편적으로 부모와 자녀의 심리적 분리는 부모뿐 아니라 자녀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자신 안에 내면화한 부모의 모습과 싸우고, 달래고, 도망치고, 협상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곧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성장의 과정이다. 나이가 든다고 끝나는 일도 아니고 어쩌면 평생 지속해야 하는 과제다. 나는 그 과정을 어떻게 치러내는가가 어떤 사람이 되는지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본다. 각자도생의 경쟁 속에 이기적 가족주의의 강력한 영향이 모든 사람의 삶에 어른거리는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 '정상가족'의 안팎에서 시달리는 아이들의 문제들을 지켜보며 내가 한국 가족주의에 대해 가졌던 의문들, 즉 가족 안에서는 개별성, 가족 밖에서는 다양성이 왜 존중받지 못하는가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해본 답은 이렇다. 첫째, 가족의 생활을 지원하는 공공의 역할 부재 때문이다. 사회적 안전망 없이 사적 안전망인 가족에게 모든 '보호'를 떠넘겼고 당장의 생존이 목표인 가족이 구성원의 개별성을 고려할 리는 만무하다. 둘째, 치열한 경쟁과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가족 단위로 경쟁에 뛰어들어야 하는 상황 때문이다. 이런 조건에서 개별성과 다양성이 설자리는 없다. 셋째, 자기 집단만 중시하는 가족주의가 사회로 확대되면서 배타적인 태도가 굳어졌고 타인과 사회에 대한 신뢰가 사라졌다. 


- 2016년 9월 CBS의 확정된 미래 1인 가구 시대, 미룰 수 없는 숙제>에서 인터뷰한 스웨덴 역사학자 라르스 트레고르드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스웨덴 사람은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고 알려졌지만 동시에 사회에 대한 신뢰도도 높으니 독특해 보인다. 하지만 아주 간단한 이유다. 상대를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까 하는 신뢰의 범위를 상상해보면 된다. 신뢰의 범위가 주로 가족에게만 집중되어 있는 한국도 있고, 가족보다 훨씬 먼 곳, 원으로 보면 테두리에 있는 정부 혹은 시민단체에까지 신뢰의 반경이 넓게 펼쳐진 스웨덴도 있다. 나는 이걸 쿨 트러스트 cool trust, 즉 시원하고 개방된 신뢰관계라고 부른다. 가족에게 신뢰가 집중되어 있는 형태는 뜨겁고 구속적 성격인 핫 트러스트 hot trust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쿨 트러스트는 얼핏 차가워 보일지 몰라도 그렇기 때문에 포용적이고 안정적이다."  

 

- 스웨덴의 경험이 보여주는 것은 삶은 개인적으로 살고, 해법은 집단적으로 찾을 때 저출산을 비롯하여 우리가 겪는 위기를 해소할 길이 보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스웨덴과 비교하면 한국은 거꾸로다. 삶은 집단적이고 해법은 개인적이다. 개인의 개별성을 별로 인정하지 않는 가족과 온갖 배타적 관계에 둘러싸여 집단적으로 살아가면서 육아, 교육, 주거 등은 다 각자 알아서 개인적으로 해결해야 하니까 말이다. 스웨덴이 작은 나라라서 가능한 일이지 한국에 맞지 않다고 폄하할 필요도 없다. 한국 사회의 주류가 툭하면 비교 대상으로 삼는 미국은 한국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나라다. 하나의 자본주의만 가능한 게 아니므로 여러 모델을 종합해서 볼 필요가 있다. 스웨덴의 경험은 정책을 통한 개인의 자율권 증진이 평등한 방식으로만 진행된다면 사회적 신뢰를 높이고 응집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서도 서로에 대한 의존성이 줄어들고 가부장적 질서가 약화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가 역량이 있다고 느끼고 삶에 대한 만족도도 늘어날 것이다.  
 

- "친하지도 않은 사이에서 가족 이야기 좀 꺼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일하는 데서 당연하다는 듯 부모가 뭐 하는지 묻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가족의 달 이런 말 별로 달갑지 않아요. 저는 '부정적 - 비정상적 가족'이고 가정의 달은 '이상적 - 정상적 가족'을 위한 달인 거 같아요. 차별, 편견 분명히 있어요."

- "너희 아버지 뭐 하시니?" 같은 질문, '이상적, 정상적’ 가족을 전제하고 던지는 가족 관련 질문들은 지금의 20대에겐 폭력이다. 20대에게만 그럴까. "남편은 뭐 하느냐", "아이는 몇 살이냐", "결혼을 안 하는 이유가 뭐냐", "왜 아이를 낳지 않느냐" 등등 가족에 대한 질문들은 소위 '결혼 적령기'를 지났으나 비혼 상태인 성인, 미혼모, 성소수자, 무자녀 가족 등 다수의 사람들에게 폭력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태와 무관하게, 가족은 중요하다. 지치고 힘들 때 위로와 격려를 주고받는 친밀감과 보호의 근거지로서 가족은 여전히 필요하다. 아이들에게 특히 그렇다. 

 

- "우리에게는 아이들의 죽음에서 배울 의무가 있다. 매일 그 죽음을 생각하면서 배울 수 있는 것을 다 배우고 제대로 된 전략을 수립해야만 비로소 아이들의 다 살지 못한 삶을 존중할 수 있다."

리베카 솔닛 Rebecca Solnit은 공감 empathy에 대한 아름다운 에세이 <멀고도 가까운>에서 사람은 타인에게 공감함으로써 자아는 확대되지만 그다음엔 자아도 위험과 고통을 분담하게 된다고 썼다. 공감이란 "자신의 테두리 밖으로 살짝 나와서 여행하는 일, 자신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진정으로 타인의 현실적 존재를 알아보는 일이며, 바로 이것이 감정이입을 탄생시키는 상상적 도약을 구성한다. 다른 말로 하면 공감은 매우 어렵고 노력해야 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사회의 온갖 분야에서 자주 거론되는데 정작 찾아보기 어려운 희귀한 덕목으로 나는 공감, 즉 '역지사지'를 꼽겠다. 
 

- 공감의 능력이 확대되는 건 아름답지만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어렵게 익혀야 하는 일이다. 흔히 상상하는 것과 달리 공감의 확대는 어쩌면 감성이 아니라 이성을 발휘해야 도달 가능한 목표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마치 자신이 겪는 양 느낀다 해도 고통의 원인을 잘못 인식하면 행동이 엉뚱해지듯, 그릇된 인식이 공감을 왜곡하는 일도 잦다. 나와 다른 사람과 공존하는 기술, 갈등의 해결, 세상의 고통을 줄이는 방법을 이야기할 때 역지사지의 확대, 공감의 향상을 핵심에 놓는 것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다. 

- 진화심리학자 스티븐 핑커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낯선 사람을 친구와 동등하게 느낄 정도로 공감의 기울기가 평평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20세기 최악의 유토피아적 이상과 다르지 않다"라고까지 신랄하게 비판했다.

- 핑커는 공감은 이타성을 촉진할 수 있고, 다른 계층에 속하는 사람의 관점을 취하면 그 계층에게 공감이 확대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감정이입'의 문명을 추구하면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족벌주의처럼 감정이 입과 공정성이 상충되는 예도 많기 때문이다. 핑커가 '네 이웃과 적을 사랑하라'보다 더 낫다고 제시한 이상은 다음과 같다.

"네 이웃과 적을 죽이지 마라. 설령 그들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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