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조새미
출판 : ART BOOK PRESS
출간 : 2021.01.27
앗 하는 사이 4월이 시작되어 버렸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간선이 갑작스럽게 변화한 느낌이라 얼떨떨하다.
아직은 차가운 날씨에 시작해 가볍게 읽고 있었는데 덮을 때가 되니 봄날이 된 기분.
이 책은 개인적으로 기대가 컸던 책이었는데 실제로 읽어보니 내가 생각했던 방향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저자의 사견이 섞이지 않기는 힘들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가능하면 더 중립적인 입장에서 '뮤지엄'과 소장품, 그 역사와 내력을 소개해줬더라면 어땠을까 한다. 미술평론가로서의 저자보다 '조새미' 개인의 가치관과 단상이 많이 섞인 느낌이라 글 속에 녹아들어 있는 정보량이 상당함에도 불구하고 인문학 도서보다는 에세이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점을 더 마음에 들어할 사람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특히 소장품을 의인화하여 관람객들을 향해 말을 거는 도입부 부분은 표지에서 추구하는 방향성과는 결이 달라지지 않나 싶다)
하지만 체로키와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부분은 상당히 마음에 들었고, '뮤지엄'을 건물 자체로부터 다루는 방식도 흥미로웠다.
한 번쯤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당신은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까?”
- 이 책은 뮤지엄(museum)에 있는 사물에 관련된 이야기이다. 여기서 뮤지엄은 박물관, 미술관, 유적지, 그리고 국립공원까지 포괄한 개념이다. 나는 그중에서도 미국과 영국, 일본의 자본주의 및 시민사회와 더불어 성장했던 장소에 주목했다. 그곳을 둥지 삼아 사는 물건들은 노동, 제작, 인권에 관해 할 말이 많다. 이 책의 무대가 되는 뮤지엄은 모두 열네 곳이다. 그중에는 연구를 위해 방문한 곳도, 관광을 목적으로 갔던 곳도 있다. 방문 목적은 달랐지만, 공통적인 점은 뮤지엄에서 울리는 어떤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나는 뮤지엄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울림이 멈추지 않았던 그 목소리의 근원을 좀 더 조사해 보고 싶었다.
- 어떤 관람객에게는 족쇄와 사슬을 보는 행위 자체가 폭력일 수 있으며, 그런 경험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뮤지엄을 방문하고 싶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서양 노예무역과 노예제라는 전 지구적 비극과 절대적으로 무관한 사람이 지구 상에 있으랴. 이 뮤지엄은 이 비극을 망각하지 않도록 관람객을 설득한다. 누구든 망각의 늪에 던져버리고 싶은 기억이 있지만 그런 불편한 과거를 잊지 않도록 보존된 장소가 바로 옛 노예시장 뮤지엄이었다. 이 뮤지엄은 억압과 착취의 나날을 견디는 것이 일상이 되는 삶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타인의 고통'이 어떤 의미를 발생시킬 수 있는가를 질문한다.
- 작가이자 사회운동가인 프레드 윌슨(Fred Wilson, b.1954)의 <박물관 채굴하기 Mining the Museum>는 옛 노예시장 뮤지엄의 소장품은 아니지만, 미국 남부 노예제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설치 작품이다. 이 작품은 볼티모어시에 있는 메릴랜드 역사학회(Maryland Historical Society, MHS)에 설치되어 있다. 이곳은 갤러리, 도서관 등을 갖추고 있는 기관으로, 작가 윌슨은 1992년에 이곳에서 조형적으로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 전시하는 대신 다른 선택을 했다. 즉 서로 다른 맥락에서 제작되었으나 역사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두 종류의 사물을 하나의 유리 진열장 안에 함께 전시함으로써 각각의 사물을 함께 전시하지 않았더라면 생성되지 않았을 대화를 창조한 것이다. 윌슨이 선택한 사물은 은제 수공예품과 노예용 쇠고랑이었다. 작가는 메릴랜드 역사학회의 소장품인, 은을 재료로 정교하게 세공이 된 각종 주전자, 컵, 커피포트, 와인 잔 사이에 볼티모어 지역 창고에서 발견한 노예용 쇠고랑을 배치했다. 이 은공예품들은 1793년부터 1880년까지 제작된 것들이었다.
- 아프리카계 미국인 예술가 닉 케이브의 작품도 눈에 띄었다. 케이브의 작품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개 이상의 감각을 동원해야 한다. 들리지 않더라도 소리가 나는 상황을 상상한다. 마치 누군가가 카니발 의상을 입고 서 있는 듯하게 보였지만 사실 그 안에 사람은 없다. 케이브의 작품은 조각이 움직일 것 같은 환영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 스완 체어(Swan Chair)는 덴마크 모던 디자인을 대표하는 의자 중 하나이다. 1958년 덴마크 디자이너 아르네 야콥센(Arne Jacobsen, 1902-1971)이 코펜하겐에 있는 로열 레디슨 호텔을 위해 디자인했고, 이를 프리츠 한센사(Fritz Hansen)가 제조했다. 야콥센은 우아한 백조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이 의자에 백조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립 미술관 로비에는 바로 그 백조들이 호수에 무리 지어 있듯이 수십 개의 스완 체어가 배치되어 있었다. 차이콥스키(Piotr, Ilyitch Tchaikovsky, 1840~1893)의 발레 <백조의 호수 Swan Lake>에 등장하는 발레리나들처럼 스완 체어가 우아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 스완 체어는 그 역사적 중요성만큼 가격도 만만치 않다. 그 때문에 혹자는 스완 체어가 모두를 위한 사물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그런 고가의 의자를 공공 뮤지엄의 휴식 공간에 배치하는 것보다 독거노인의 복지를 위해 세비를 사용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곳에는 수십 개의 스완 체어가 있었고, 이 사물은 아름답다. 그리고 누군가 앉기를 겸손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뮤지엄에서 스완 체어는 공간의 일부처럼 보였다. 나는 그 하얀 의자에 앉아 뮤지엄의 높다란 천장을 바라보며 의자를 좌우로 움직여 보았다. 명작 의자가 주는 편안함과 부드러운 가죽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 의자들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 공간의 일부가 되어 뮤지엄의 시간에 용융되어 있었다.
- 런던 빅토리아역에서 기차를 타고 남동쪽으로 한 시간 정도 이동했다. 미술공예 운동(Arts & Crafts Movement)의 창시자였던 윌리엄 모리스(Williarm Morris, 1834-1896)가 신혼집으로 지은 빨간 벽돌집 레드하우스(Red House)로 가기 위해서였다. 서양 디자인의 역사를 다루는 대부분의 책은 모리스의 미술공예 운동을 근대 디자인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래서 공예, 디자인의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레드하우스 방문은 성지 순례처럼 여겨질 수 있다.
- 2003년 영국 내셔널 트러스트(National Trust)가 레드하우스를 매입했다. 근대 건축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디자인, 공예의 역사에 있어서도 언급되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거의 없는 레드하우스가 대중에게 공개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이다. 개인의 사유 재산이었던 레드 하우스를 공공재로 전환하기 위해 시민들은 자발적인 모금 활동을 벌였고, 그 결과 이 집은 공공 뮤지엄이 될 수 있었다. 대중에게 레드하우스를 개방하기 위해 1860년대 모리스가 이 집에 거주했을 당시의 느낌대로 복원하는 일이 필요했다. 모리스 부부가 떠난 후 레드하우스는 오랫동안 다른 사람들의 거주지였기 때문에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이 집안 곳곳에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고 내가 방문했을 당시는 막 대중에게 공개하기 시작했던 시기였으므로 이전 거주자들의 흔적이 여기저기 그대로 남아 있었다.
- 독일에서 전파된 이 기법은 십자수와 유사한 기법이었는데 이와 대조적으로 메이가 천착했던 자수는 중세 영국 교회에서 번성했던 'opus anglicanum'이었다. 이 기법은 비단, 벨벳, 리넨과 같은 고급 직물에 금실과 은실로 섬세하게 수를 놓는 고난이도 작업이었다. 이 중세의 기법을 재현하는 일의 중요성을 인지했던 사람은 아버지 모리스였지만 실질적으로 이 과업을 수행했던 사람은 그의 딸 메이였다. 메이는 왕립 예술학교의 전신인 국립 예술 훈련 학교(National Art TrainingSchool)에서 자수를 전공하고 23세가 되던 해부터 아버지가 창립한 장식미술 회사 모리스 & Co. 에서 벽지, 직물 디자인을 담당했다. 또한 메이는 스튜디오에서 자수 작업을 하는 직원들의 책임자가 되어 생산 관리자의 역할도 담당했다. 합성염료로 염색된,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값싸고 화려한 직물이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 산업혁명의 시대에 젊은 여성 메이는 미술공예 운동이라는 아버지의 유산을 수용하고 재해석했으며 자신감 있는 태도로 사업을 이끌었다.
- 1893년 저서 <장식 바느질 작업 Decorative Needlework>은 그녀가 당시 자수 분야의 권위자임을 증명한다. 이 책을 통해 그녀는 더 우수한 자수는 이국적이고 어려운 스티치 기법을 많이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흐름을 보여주는 몇 가지 평범한 스티치를 표현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메이 모리스는 미술과 공예 분야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직업적 지위와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1907년 여성 예술 조합(Women's Guild of Arts)도 설립했는데 여성에게 많은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던 시기, 그녀가 이뤄낸 사회적 성취는 실로 놀랍다.
- 코프만 주니어가 사용했던 2층 서재의 창문은 건물의 모서리를 개방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어 있었다. 벽과 벽이 만나야 하는 곳 또는 기둥이 세워져 하중을 받아야 하는 곳을 열어젖혔을 때 그곳에는 산바람과 숲의 향기 이외에는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눈앞의 풍광은 역동적으로 실내로 밀려들어 왔고, 모서리로 불어 드는 산바람과 함께 산수가 낙수장의 일부로 녹아들고 있었다.
- 라이트는 자서전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건축가의 작품은 환경에 순응해야 한다. 지금처럼 환경을 무시한다면 가까운 장래에는 볼품없는 상자 모양 건물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많은 상자 모양 건물들을 제아무리 새로운 '미학'이라고 선전해봐야 결국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편의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 라이트는 낙수장을 통해 폭포를 바라보는 전망 좋은 집, 자연을 수용하는 인간의 지각 방식에 관한 고정관념을 바꾸었다. 집 안에서 폭포를 바라보는 시지각적 경험 대신 폭포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청지각적 경험을, 집 안에서 계곡의 물에 발을 담글 수 있는 촉각 지각적 경험을 선사했다. 낙수장은 사진으로 보았을 때보다, 그리고 상상 속에서보다 모든 면에서 훨씬 더 도전적이고 감각적이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건축물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까? 축조 당시 구조적으로 이 집의 하중을 완벽하게 지탱할 수 있는 공법이 없었다. 때문에 하중을 견디기 위한 철근의 양을 정확하게 계산할 수 없었고, 결국 낙수장은 필요한 양보다 훨씬 더 적은 양의 철근으로 지어졌다. 이로 인해 끊임없이 보강 공사를 하며 65년 동안 구조적 불안감을 견뎌야 했던 낙수장은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불안한 구조를 보강해야 하는, 그래서 기금을 모금해야 하는, 유지 비용이 높은 예술품이 되었다.
- “언어는 사물의 이름이 아니다"
MAD의 시작은 1956년으로 거슬러 간다. 1956년 공예 애호가이자 자선 사업가였던 아일린 오스본 웹(Aileen Osborn Webb, 1892-1979)은 동시대 공예 뮤지엄(The Museum of Contemporary Crafts)을 설립했다. 이는 1979년 아메리칸 크래프트 뮤지엄(American Craft Museum)으로 이름을 바꿨고, 이 뮤지엄은 2002년까지 뉴욕 현대미술관의 맞은편에 위치했다. MAD는 6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2008년 콜럼버스 서클 북서쪽에 세계적 주목을 받으며 새로이 개관했다.
- 뮤지엄을 지금의 MAD 자리로 옮기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소장품의 양적 질적 팽창으로 인한 공간 부족이었다고 운영위원회는 밝혔다. 하지만 뮤지엄의 이름을 변경하겠다는 운영위원회의 결정은 격렬한 논쟁을 촉발했다. 뮤지엄의 이름에서 공예(Craft)의 자리를 예술과 디자인(Art & Design)이 대체한 것에 관해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이곳저곳에서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논쟁은 오히려 크래프트, 아트, 디자인을 분리된 장르로 보는 시각, 또는 순수미술의 부정 대상으로서 공예를 규정하는 방식에 관해 생각할 여지를 남겼다. '공예'는 일반적으로 도자, 금속, 섬유, 목재와 같은 재료를 특정하고, 해당 재료의 최적화된 형태로 사물을 제작하는 과정 및 그 결과로 이해되어 왔다. 예를 들면 <미학·예술학 사전(美学事典)>(弘文堂, 1974)은 독어 '쿤스트게베르브(Kunstgewerbe)’와 영어 '아츠 앤드 크래프트(Arts and crafts)'를 '고우게이(工芸)로 일역 했고, 이를 다시 한국어 번역자(안영길 외)가 이를 '공예'로 한역했다.
- 공예는 물품에 있어서 광의의 장식적 기능을 주요인으로 한다. 조형예술의 다른 부문에 비해서 공예의 고유 영역을 규정하기가 어렵고 공예의 개념이 확립된 19세기 중엽 이래 그때까지 차지해온 미술과 공업의 중간적 위치에서 점차로 공업 쪽으로 접근하는 한편 미술의 다른 부문과의 교류가 깊어졌다. 하지만 이와 같은 공예 개념의 세밀한 정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공예'라는 용어의 맥락을 파악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공예'의 의미는 상대적이며 가변적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이것은 공예이다"라고 말했을 때 A는 '수공으로 만들었다', B는 '제조업과 관련이 있다', C는 '용도가 있는 물건이다', D는 '장식적인 사물이다', E는 '지역 토속품이다', F는 '같은 일을 반복하는 일이다', G는 '취미활동이다' 등으로 서로 다른 층위에서 각기 다른 의미로 말할 수 있다.
- '공예'라는 용어는 문화적으로 더 복잡한 상황에서 사용되어 왔다. 콜링우드의 에세이에 기술된 'craft', 일본어 '고우게이(工芸, COVF)', 그리고 한국어 '공예’도 각각 정해진 짝을 찾기는 어렵다. 언어활동은 비정형적이며, '공예'라는 용어의 사용도 상대적이다. 나는 '공예'라는 관념이 먼저 존재하고 그것에 '공예'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이름이 붙으면서 어떤 관념이 우리의 사고 속에 존재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자기 동일성을 확보한 주체로서의 '공예'가 먼저 존재하고, 이 확정된 '공예'가 다른 것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공예'를 실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공예'라는 용어는 한국어를 사용하는 언어 공동체의 가치관과 강력한 관계를 맺고 있다. 언어를 사용하는 한 언제나 자신이 속한 언어 공동체의 가치관을 승인하고 강화한다는 소쉬르의 주장처럼 모국어를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어떤 가치 체계에 지배된다. 그래서 먼저 '공예'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야기되는 언어공동체의 가치관 강화의 상황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 즐겨보던 여행 안내서에 이 남부의 저지대가 '굴라(Gullah)'문화와 관계가 있다고 쓰여 있었다. 생소한 단어 '굴라'. 어떤 문화이기에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일까? 굴라는 노예선에 태워져 대서양을 건너 북아메리카에 온 사람들의 문화였다. 미국 남부 대농장의 주인들이 그들을 데려 놓은 장소가 언제나 매그놀리아 대농장처럼 내륙에서 도보로 이동할 수 있는 곳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조지아(Georgia), 플로리다(Florida) 주까지 이어지는 대서양에 면하는 해변을 따라 저지대가 형성되어 있는데 이곳은 대부분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농장의 주인들은 유배지와 같은 고립된 저지대 섬에 노예를 옮겨 놓았다. 그 누구도 배 없이 육지로 갈 수 없었다. 따라서 고향 아프리카에서는 한 번도 마주칠 일이 없었던 다양한 민족의 사람들이 저지대 섬이라는 고립된 공간에서 함께 거주하게 되면서 다양한 언어, 종교, 음식, 공예 문화가 뒤섞였다. 그것이 바로 '굴라'였다.
- 굴라 문화는 삶의 모든 측면에서 형성되었다. 식문화와 관련해서는 쌀과 관련된 음식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쌀과 고구마, 돼지고기를 함께 조리한 요리를 개발했다. 굴라 공예문화로는 목각, 퀼트 제작 등이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활동은 짚풀 바구니 제작이었다. 이 공예품은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아프리카의 수공예 바구니 짜기 기술을 아메리카 대륙의 저지대 일상 환경에서 찾을 수 있는 재료와 접목한 결과물이다. 무엇인가 담을 수 있는 넉넉한 크기의 용기는 농작물을 생산하는 대농장과 같은 곳에서 필수품이었다. 일반적으로 여성들이 바구니를 만들었지만, 더는 노역을 담당할 수 없게 된 노인이나 병약해진 남성들도 바구니 제작에 동원되었다. 하지만 노예해방 후 대량 생산된 값싸고 실용적인 공산품이 등장함에 따라 굴라 문화가 반영된 바구니의 용도가 변경되었다. 굴라 바구니는 관광 상품이 되었고 딜레마에 직면했다. 역경 속에서 살아남은 문화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관광객의 취향에 맞게 새로운 디자인을 개발해야 할 것인가? 값싼 공산품과 어떻게 경쟁할 수 있을 것인가?
- 메리 제인 매니골트(Mary Jane Manigault, 1913-2010)와 같은 장인은 평생 짚풀 바구니를 제작했다. 매니골트는 1913년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마운트 플레전트(Mount Pleasant)에서 태어났고, 여덟 살에 어머니로부터 바구니 짜기 기법을 배웠다. 매니골트는 어렸을 때부터 정교하고 조형미가 넘치는 바구니를 만들었고 사람들은 종종 값을 치르고 사가곤 했다. 그녀는 1962년부터 17번 고속도로 옆에 가판을 세워서 본격적으로 바구니를 판매했다. 한 번에 30점에서 50점까지 전시해놓고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사람에게 호객을 했는데 바구니는 꽤 인기가 있어서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찰스턴 도심 시장에 상점도 낼 수 있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농작물을 담는 바구니를 만들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피크닉 가방, 반짇고리, 빨래 바구니 등 새로운 디자인도 개발했다.
(리뷰자 주 : '조산 라 밸리'의 <어떤 여자가 왔었다>의 메리걸은 이 인물을 기반으로 했던 걸까?)
- 그런데 질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3억이 넘는 미국인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짚풀 바구니를 미국의 문화유산으로 받아들이는 데 동의하고 있을까? 미국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인종차별의 문제와 어떤 문화를 미국이라는 공동체의 자산으로 인식할 수 있는가는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다.
- 지금은 이 모든 자료가 미 의회 도서관의 정식 온라인 컬렉션으로 등록되어 있다. 이들의 말은 옛 노예 시장 뮤지엄에서 주황, 파랑, 연두의 전시 보드 위에 텍스트로 깨끗하게 정리되어 관람객을 기다리고 있다. 옛 노예시장 뮤지엄의 디스플레이는 일반적인 박물관 유물 전시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족쇄와 사슬, 채찍과 멍에 등이 마치 신석기의 마제석기처럼 유리 진열장 안에 전시되어 있었다. 옛 노예시장 뮤지엄에서 폭압과 공포의 순간을 상상해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 노예 시장의 경매장에 족쇄를 찬 존재가 연단 위에 오른다. 시선은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먼 곳에 닿아 있고, 자유롭지 못한 두 손은 무엇인가를, 아니면 누군가를 붙잡을 수도 없다. 두 눈은 눈물과 공포로 가득 차 있고,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의지의 산물이 아니다. 전시 큐레이터는 고민했을 것이다. 폭력과 착취의 증거물인 족쇄와 사슬의 조합들을 어떻게 전시해야 할까? 하지만 큐레이터의 의도와 크기, 형태, 수 그리고 그 배열 방식과 아무런 관계없이 사람의 신체를 구속하기 위해 디자인된 억압의 도구들은 너무 즉물적이어서 공적 공간에 전시된 사실만으로도 혼란스러웠다. 아프리카인들의 의식과 문명을 파괴하는 행위에 관해 글을 쓴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 b.1961)은 이렇게 말한다. "고통, 아픔, 신체 손상, 감금 상태, 배고픔, 두려움은 일차적으로는 다른 것을 생각할 힘, 다른 때를 기억할 힘을 파괴하고, 장기적으로는 문명 생활을 유지해나갈 힘, 곧 생계를 잇고 이야기를 나누고 전통을 익히고 후세를 양육할 힘을 파괴한다." 유리 진열장에 전시된 족쇄와 사슬은 가학으로 인해 파괴된 힘이 한 때 존재했음을 실증하는 증거물이었다.
- 미국 동시대 미술 작가 데이비드 해먼스(David Hammons, b. 1943)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오랜 불평등의 근원과 이에 관한 동시대적 비평을 제시하는 작업을 한다. 해먼스의 1973년 작 <체인을 단 삽 Spade with Chains>은 민권 및 흑인 인권 향상 운동의 면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작품이다. 스페이드(spade)는 '삽' 또는 '한 삽의 분량'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흑인, 특히 남자 흑인을 뜻하는 비속어이다. 해먼스는 철제 삽에 구멍을 뚫은 후 사슬로 장식했다. 체인을 대칭으로 배치했기 때문에 조형적으로도 균형을 이루고 있다. <체인을 단 삽>은 속박과 저항의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체인의 역할이 구속인가 아니면 장식인가에 따라서도 그 의미가 다르게 해석된다.
- 해먼스는 1980년대에 뉴욕 할렘 등 흑인 거주지에 <더 높은 목표 Higher Goals>라는 제목의 작품 연작을 설치했다. 병뚜껑과 같은 폐품으로 장식한 농구골대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실제 농구 골대보다 훨씬 더 가늘고 길었다. 해먼스는 미국 사회에서 흑인들이 성공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농구와 같은 스포츠밖에 없는가, 그리고 흑인들이 스포츠 스타가 되는 것 이외에 더 높은 목표도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를 질문했다. <더 높은 목표>는 20세기 중반 이후에 도미 국 사회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던 사회적 차별을 비판하는 작업이었다.
- 캔자스주 공화당 상원의원 샘 브라운백(Sam Brownback, b.1956)은 2004년 "인디언 부족에 대한 미국 정부의 잘못된 정책"에 대해 "미국을 위해 원주민에게 사죄한다"라는 공동 결의안을 제안했다. 이 제안은 5년 후인 2009년 연방상, 하원에서 통과되었고 오바마(Barack Obama, b.1961) 대통령이 이 결의안에 서명했다. 2010년 5월 20일 미국 정부는 아메리칸 원주민에 대한 과거의 폭력행위와 잘못된 정책들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브라운백 의원은 체로키(Cherokee), 촉토(Choctaw), 머스코지(Muscogee), 포니(Pawnee), 시서 와페톤 오야테(Sisseton Wahpeton Oyate)의 다섯 부족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워싱턴 DC 의회 묘지에서 결의안을 낭독했다.
- 갤러리에는 '눈물의 길 Trail of Tears'이 마치 연극 무대처럼 재현되어 있었다. '눈물의 길'은 미국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눈물의 길이 잔혹한 이유는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자행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 관리와 체로키의 정치 지도자들은 1836년 체로키 국가가 서부로의 이주에 찬성한다는 내용의 뉴 에코타 조약(Treaty of New Echota)을 체결했다. 체로키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영역에 침범한 백인 불법 이주자들 또는 주 정부와 폭력 투쟁으로 사태가 더 악화하기 전에 미국 주 정부가 제시한 조건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체로키 정부에 더 이익이 된다는 논리를 전개했다. 하지만 이주를 단호하게 반대하던 다수의 체로키 인들은 이를 용인할 수 없었다. 조상 대대로 살던 곳을 떠나 어디로 가란 말인가? 그에 관한 대가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다수의 동의 없이 정치지도자 간에 불평등 협약이 체결되었고, 협약의 정당성을 근거로 강제 이주가 집행되었을 때 비극이 시작되었다.
- 전시는 북미 원주민들의 풍습, 언어, 문화의 다양성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어느 부족이 어떤 기후에서 살았으며, 그들이 사는 지역에서 많이 생산되는자연 재료는 무엇이며, 어떤 부족이 무엇을 더 잘 만들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피마(Pima), 나바호(Navajo), 아파치(Apache), 주니(Zuni), 아코마(Acoma), 호피(Hopi), 산 일데폰소(San Ildefonso), 산타클라라(Santa Clara), 코치티(Cochiti), 지아(Zia), 틀링기트(Tlingit), 침샨(Tsimshian), 수(Sioux), 카이오와(Kiowa), 샤이엔(Cheyenne), 수마쉬(Chumash) 그리고 이누트(Inuit)는 허드 뮤지엄이 소개하는 원주민 부족의 이름이다. 하지만 분명히 이보다도 훨씬 더 많은 원주민 부족이 과거에 존재했다. 같은 아메리카 원주민이라 하더라도 수 백을 헤아리는 부족은 저마다 고유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신앙, 생계 수단에도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그렇다면 '인디언'이라는 또는 '인디언과 같은'이라는 표현은 무엇의 보편성을 대변하는 것인가? 터키석이 세팅된 은 장신구, 깃털 머리 장식, 작은 구슬로 장식된 허리띠와 가죽 신발을 신고 해가 뉘엿뉘엿 지는 사막에서 모닥불 주위를 돌며 춤추는 인디언의 이미지는 도대체 어디에서 시작되었단 말인가? 그들이 인도와 관계가 없었고,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14501506)가 인도라고 믿었던 곳도 인도가 아니었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 나바호족의 경우 은 장신구가 다른 부족에 비해 우수했다. 다른 부족이 은 장신구를 만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나바호의 은 장신구는 다른 부족의 장신구보다 허드 뮤지엄의 소장품 중에서 압도적으로 많았고 미적 수준도 높았다. 나바호는 장신구 제작에 있어 은선(silver wire)을 꼬거나 휘고, 터키석과 같은 돌을 세팅하는 기법 또는 색이 다른 돌들을 병치하여 세팅하고 다시 표면을 연마한 인레이(Inlay) 기법을 주로 사용했다. 반면 주니족은 돌을 연마하는 기술이 뛰어나 바늘 기법(needle point)으로 가늘게 세공한 터키석으로 만든 장신구에 재능을 발휘했고, 호피족은 오버레이(overlay)라는 기법에 능했다. 이 기법은 은으로만 제작하는 기법이기 때문에 다채로운 색의 향연이 펼쳐지는 나바호의 장신구와 달리 패턴의 형상이 더 중요했다. 오버레이 기법은 유럽의 세공 기법을 받아들여 적용한 결과로 비교적 최근에 시작된 기법이었다.
- 이처럼 어떤 부족이 특정 기법을 더 능숙하게 사용하여 특정 공예품을 생산해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특정 부족이 특정 재료나 기법만을 고수한다고 할 수는 없다. 각각의 부족은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공예품을 만들었고 끊임없이 변화되는 생물과도 같은 결과물을 창조했다. 예를 들면, 나바호의 대표적 목걸이 디자인으로 알려진 호박꽃(Squash Blossom Jewelry) 모티프는 1870년경 스페인 장식 문화를 수용한 결과였다. 이러한 은과 터키석을 재료로 하는 나바호 장신구는 1970년대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했고, 급증하는 수요에 맞춰 대량 생산되면서 소위 '아메리칸 인디언 장신구’로 정형화되었다.
- 또 다른 예로 2018년 허드 뮤지엄에서 특별전을 개최했던 리처드 차베스(Richard Chavez, b.1945)는 토기 제작으로 유명한 푸에블로(Pueblo) 지역 산테리페(San Teripe) 출신이지만 도예가가 아니다. 대신 시베리아산 옥, 터키석, 산호 등의 재료로 인레이 기법을 적용하여 이국적이며, 동양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장신구를 제작했다. 문화적 규범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을 옹호하는 사람의 경우 차베스에게 왜 푸에블로의 전통 토기 제작 대신 장신구 제작을 선택했느냐고, 부족의 특징적인 공예 예술품 제작에 헌신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지 않았겠냐고 질문할 수도 있다. 그리고 나바호의 전통 기법인 인레이 기법을 적용한 것은 푸에블로 지역 출신 공예가로서 옳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질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품 제작에 있어 선택에 관한 자율성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작품이 품고 있는 활력은 반감될 것이다.
- 대서양 삼각 무역에 브랜디와 럼이라는 두 종류의 증류주가 등장한다. 증류주는 발효된 술을 다시 증류해서 만든 술로 알코올 도수가 높다. 브랜디는 주로 유럽에서 제조되며 와인과 같은 과실주를 증류해서 만든 코냑, 알마냑과 같은 유한계급의 술이었다. 반면 럼은 사탕수수를 착즙해 설탕을 생산하고 남은 찌꺼기인 당밀이나 사탕수수 즙을 발효시킨 뒤 증류하여 만든 해적의 술이었다. 노예와 교환하기 위해 아프리카에 술이 모여들었다. 아메리카에서 생산된 럼은 대부분 유럽으로 보내졌지만, 일부는 아프리카로 유입되기도 했다. 럼은 카리브해 플랜테이션에서 착취한 노동력으로 생산한 상품이었으며 이 상품이 대서양을 건너 아프리카에서 또 다른 희생자와 교환되었다는 사실은 잔혹하기 이를 데 없다.
- 이 대형 걸개 금속 조각의 패턴은 아프리카 가나의 전통 켄테 직물(kentecloth)의 색상 및 패턴에서 영감을 받아 작품에 반영되었다. 누군가의 몸에 휘감았을 옷감을 모티프로 한 이 거대한 작품은 아프리카에서 술을 소비하고 난 후 남겨진 사물을 재료로 제작되었기에 더 역설적이다. 이 작품은 반짝이는 대서양의 파도와 같은 모습으로 미국 남부 미술관 벽에 걸려 있는데 멀리서 보았을 때 거대한 바람에 물결이 일렁이는,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처럼 보였다. 작품의 거대한 스케일은 깊은 경이로움을 불러일으켰지만, 쓰디쓴 역사의 순간도 상기시켰다. 대서양을 가로질렀던 수많은 배와 그 안에 타고 있었던 사람들이 느꼈을 파도의 울렁거림을 생각하니 복잡한 현기증이 몰려왔다. 이제 잔인한 무역은 폐지되었지만, 그 악한 영향력은 사회적 갈등의 매 순간마다 위력을 발산하고 있다.
- 1936년 <타임 Time>지의 표지에 만 레이가 찍은 달리의 사진이 표지에 실렸다. 달리는 미국이 사랑하는 인기 스타로 등극했다. 1937년에는 할리우드도 방문했다. 그는 결국 2차 세계대전의 화마를 피해 1941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는 캘리포니아 몬테레이 반도(Monterey Peninsula, Colifornia)에서 1948년까지 살았다. 달리는 페블 비치(Pebble Beach)를 좋아했는데 그 이유는 페블 비치가 자신의 고향인 포트 리가트(Port Lligat)와 기후 조건이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 그런데 달리의 기행은 몬터레이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그 예로 그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예술가들을 위해 기금을 모은다는 명목으로 델 몬테 호텔(Del Monte Hotel)에서 '마법의 숲에서의 초현실주의 밤 A Surrealistic Night in an Enchanted Forest'이라는 이름의 연회를 열었다. 손님들은 자신들의 꿈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의상을 입고 와야 했다. 달리의 아내 갈라는 거대한 침대에 누워 손님을 맞이했고, 샌프란시스코 동물원에서 침팬지, 어린 사자 등 동물들을 빌려왔다. 파티의 모든 것이 과장되었고 그 화려함은 높은 비용을 필요로 했다. 달리가 미국 대중에 가했던 이러한 충격은 달리를 더 유명하게 만들었다.
- "안녕하세요? 레드하우스를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엘리자베스 시달(Elizabeth Siddal1826-1860)이라는 여성에 의해 그려졌고, 보시는 것처럼 레드하우스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화가이자 시인이었던 시달은 빅토리아 시대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 PRB) 화가들의 뮤즈이자 모델로 활동했습니다. 런던에 있는 테이트 브리튼 뮤지엄의 최고 인기 소장품인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1896)의 걸작 <오필리아 Ophelia>에 등장하는 여인도 시달을 모델로 그린 것입니다. 시달은 이탈리아 출신 거장 화가 단테이 게이브리얼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와 결혼했습니다. 결혼 기간은 단 2년에 불과했는데, 행복했던 것 같지 않습니다. 가장 충격적인 경험은 시달이 딸을 사산했던 일입니다. 이후로도 건강이 좋지 않았고 폐렴과 우울증에 시달렸던 그녀는 아편 중독으로 32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 "저는 시달의 그림 중에서 가장 큰 편에 속합니다. 시달이 저를 그릴 때 로세티가 약간의 도움을 줬습니다. 이 집 레드하우스는 윌리엄 모리스의 신혼집이었습니다. 시달 여사가 신혼집 침실에 벽화를 그렸던 이유는 좀 복잡합니다. 설명드리자면, 모리스를 비롯한 라파엘 전파 화가들은 중세의 노동과 삶을 찬미했고, 산업 사회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어요. 산업 공정을 통해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어떤 물건도 신혼집에서 사용하고 싶어 하지 않았고, 그래서 모리스와 친구들은 이곳 레드하우스에서 저와 같은 중세풍의 벽화를 그리거나 일상의 물건들을 직접 디자인하고 만들었습니다. 저는 창세기를 모티브로 하는데 시달 여사는 아담과 이브, 노아, 레이첼, 그리고 야곱과 그의 사다리를 그렸습니다. 모리스 부인이 저를 좋아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저는 끝내 완성되지 못했고, 모리스 가족은 1865년 레드하우스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 알베르스는 바우하우스 예비과정에 시의 교육 경험을 바탕으로 1933년부터 1949년까지 16년 동안 BMC의 교육 체계를 독자적으로 심화시켰다. 그는 재료와 감각 지각, 그리고 정신의 합일이라는 통섭적 시각과 비평적 능력 배양이라는 특성을 예술 교육에 접목시켰다. 이러한 독일 바우하우스와 듀이의 실용주의 사상의 혼성적 결합인 알베르스의 BMC에서의 교육은 대량생산을 목표하는 실습뿐 아니라 자기표현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알베르스는 '뼛속에 침투된 상상력'을 토대로 경험을 통한 학습을 강조함으로써 학생들에게 자신만의 방법론을 개발할 것을 독려했고, 이는 1950년대와 60년대 미국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탄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
- BMC가 수많은 예술가를 배출한 것은 사실이지만 BMC는 예술가를 교육하기 위한 전문학교는 아니었다. 먼저 1933~1934년 학사 행정 카탈로그를 살펴보면 수강 가능 과목에 경제학, 음악, 영문학, 과학 등이 있다. 경제학 분야에는 기초 경제학, 경제사, 사회개혁 철학, 경제학 이론의 진화, 노동 문제, 음악 분야에는 음악 감상, 기초 화성학, 음악, 시, 세미나, 19세기 오페라 등이 개설되어 있었다. 미술 강좌는 '순수미술(Fine Arts)'로 분류되었으며 드로잉(Drawing), 색채학(Color), 직조(Weaving), 공작 수업(Werklehre)의 네 수업이 개설되었다. 공작 수업에는 재료와 공간을 위한 감각 개발'이라는 부제가 명기되어 있었다.
- 로버트 라우션버그(Robert Rauschenberg, 1925-2008), 루스 아사와(Ruth Asawa, 1926-2013), 레이 존슨(Ray Johnson, 1927-1995)은 BMC 교육의 수혜자들이었다. 라우션버그는 알베르스를 자신의 스승들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인터뷰를 통해 밝히기도 했다. 라우션버그에 따르면 알베르스는 어떻게 예술을 하는지 가르치지 않는 대신 재료에 있어서 사용될 재료의 구체적인 특성을 개발해 내라고 요구했다고 말했다.
"나는 아직도 그가 나에게 가르쳤던 것으로부터 배우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가르쳤던 것이 시각 세계 전체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떻게 '예술을 하는지'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초점은 항상 개인적인 보는 감각에 관한 것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그가 수채화를 가르칠 때, 예를 들면, 그는 어떻게 수채화를 잘 그리는가가 아니라, 수채 물감의 독특한 성질에 관해 가르쳤습니다. 그가 드로잉을 가르칠 때는, 선의 효율적 기능에 관해 가르쳤습니다. 색채는 적응성과 색채가 다른 색채와 가지게 되는 복잡한 관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 그런데 MAD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관람객과 작가의 상호작용을 특히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점에서 차별화되어 있었다. 작가들은 관람객에게 시연을 보여주며 응대하기 위해 요일별로 정해진 시간에 출근해야 했다. 여기서 모호한 점은 작가들이 MAD에서 보내는 시간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였다. 기관의 입장에서는 제작 기법을 작가들이 직접 시연했을 때 기관의 긍정적 이미지를 홍보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관람객의 입장에서는 지명도 높은 작가들의 직접 시연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흔치 않은 경험을 할 수 있기에 바람직할 수 있다. 하지만 작가들의 입장에서 언제나 긍정적인 것 같지 않다.
- 예술과 자유는 오래된 연인 같다. 때때로 싸우기도 하고, 헤어지는 것이 나을 것으로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둘은 다른 하나 없이는 좀 쓸쓸하게 보인다.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비어 있던 마음속 공허함이 조금씩 채워지는 것 같다. 그래서 시연하지 않을 자유까지도 작가에게 주었으면 좋겠다. 다른 방식으로 입주작가로서의 책임을 다한다면 공유하거나 시연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것을 이기적인 예술이라고 깎아내리거나, 의무 사항을 이행하지 않았으니 입주작가로서의 지원을 포기할 것을 촉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MAD는 작가가 제작 과정을 관람객에게 공개하는 것이 '크래프트'의 미덕이라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제작의 '비법'은 중세시대에는 길드(guild)가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주된 이유였지만 이제는 제작의 기술은 비법도 아니고 제작 기법은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쉽게 공유되고 있으며 특권을 위한 열쇠일 수 없다. 풍요 속에서 가능한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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