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흐르는 이야기/Book1

[김인] 차의 기분 - 인생의 맛이 궁금할 때 가만히 삼켜보는

일루젼 2022. 4. 14. 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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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김인
출판 : 웨일북(whalebooks) 
출간 : 2018.02.14 


       

   

중국에서 차를 사 왔던 적이 있었다. 

녹차는 그전부터 꽤 좋아했었기에 세작, 우전 등은 구분해서 마셔보곤 했었지만 종종 책에서 접하던 백차의 세계는 상상만으로는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철관음'이란 대체 어떤 향과 맛인지? 잔속에서 꽃을 틔우는 꽃줄기는 어떤 모양인지? 

 

지금도 자신있게 차를 우릴 수 있냐고 물으면 조금 주춤한다. 다기도 있고 다판이나 숙우도 갖춰져 있지만, 다른 액체들 -커피, 알콜 등- 에 비하면 조금은 멈칫거리게 된다.

 

딱 맞는 온도로 끓인 물, 다기를 살짝 덥힌 다음 찻잎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시간.

조금씩 우러나며 공간을 채우는 빛깔과 향.

평화롭고, 조용하고, 온전한 시간.

 

마침 봄이다. 곡우까지 기다리면 올해 햇 녹차가 나올 것이다.

벌써 기다려진다.  

 


     

 

주변은 친숙한 소음으로 가득하지만
세계는 여전히 침묵이 압도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내가 돌아갈 침묵,
나는 차를 마시며,
그것을 느낀다.

 

- 이 책은 나와 차에 대한 사사로운 이야기다. 차를 만들고 차를 마시며 차와 교감했던 순간들을 있는 그대로 써보려 노력했지만, 순간은 글로 옮겨지자마자 불명확해졌다. 순간은 그림이나 음악으로 표현되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차를 마셔온 사람으로서, 커피나 여타 음료를 마셔온 사람보다는 차에 더 가까운 정서를 갖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 정서가 알게 모르게 글에 묻어났기를 기대한다. 나는 차를 마시는 사람이고 차를 마시면서 몸도 마음도 한결 편해졌다고 자신한다. 당신도 나처럼 그랬으면, 나는 이제 심지어 와인보다 차를 더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아니, 와인을 약간 더 좋아하고 차를 완전히 신뢰한다는 표현이 올바를 것이다. 

 

- 바로 지금, 지금의 이 상태는 내 기질과 정확히 들어맞아서, 나는 읽기를 멈추고 이 상태를, 지금의 이 상태를 있게 한 모든 요소를 내게 몇 번이고 상기시킨다. 장맛비. 약속 없는 토요일 오후. 창가에 놓인 길고 푹신한 가죽 소파. 쾌적한 온도가 유지되는 주홍빛 실내, 약간의 숙취, 166쪽을 채운 굉장한 문장들. 그리고 차, 아직 두 모금이나 남은. 
이 상태는 내게 지나치게 좋다. 이 같은 경우엔 이 상태에게 생길지 모를 분실, 훼손, 강탈에 대한 불안이 이 상태를 더없이 완벽하게 만든다.

 

- 첫 모금에 네 눈이 휘둥그레지고, 찻잔 속을 재미있다는 듯이 연신 들여다보고, 차향을 맡으며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고, 입안에 차를 머금고 삼키려 하질 않고, 삼키려면 너도 모르게 지그시 눈을 감고, 실컷 마시고도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고, 너도 모르게 어느 날 같은 차를 또 마시고 있다면, 그 차가 네게 좋은 차야. 어때, 간단하지?

 

- 중국 운남성에서 생산한 홍차를 '전홍'이라 부르고, 푸젠 성에서 생산한 홍차를 '민홍'이라 부른다. 옛날에 운남성이 전나라였고, 복건성이 민나라였기에 그렇게 줄여 부른다고, 중국 홍차 중에는 절강성의 기문에서 만든 '기홍'이 또한 유명하다. 끝이 홍으로 끝나는 이름은 자주 부르고 싶다. 분홍과 주홍, 시인 이상은 연인의 이름이 '금홍'이어서 부르면 좋았을 것이다. 

기홍, 마시면 딸기가 떠오르곤 했다.
전홍, 찻잎에 내가 상상하는 원시림의 향기가 배어 있다.

민홍, 민홍이라면 백림과 정화, 탄양을 다 마셔봐야 안다.

 

- 오래 곁에 있는 찻잔.
이 찻잔은 내가 제일 아끼는 찻잔이다. 이 찻잔은 나와 십 년을 함께했다. 그 십 년 동안, 몇몇 친구들과는 소식이 끊겼고, 애인들과는 만나고 헤어지길 거듭했지만, 이 찻잔만은 금도 가지 않은 채 멀쩡히 내 옆에 있다. 이 찻잔은 뭐랄까. 내가 다시 혼자일 때, 어느새 내 옆에 와 있는 식으로 존재하는 것 같다. 나는 새삼 감탄하면서 우정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이 찻잔은 십 년 차를 담아내더니 어떤 경지에 이르렀는지, 뜨거운 차는 따뜻하게 내고 차가운 차는 시원하게 낸다. 눈에 띄게 아름답지는 않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잿빛 표면에 홍조가 어렸다. 나는 이것을 노을이라 여기며 어루만지곤 한다. 만지며 내가 보는 것이 이 찻잔만은 아닐 것이다. 

 



하루의 반절을 보내며 한 모금, 

나머지 반절을 보내기 전한 모금,

아주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시간, 

그처럼 아주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시간, 

시작과 끝의 관점에선 무엇을 내세우기에도, 

무엇을 단념하기에도 어중간한 시간.

그러니 오후 네 시엔 결심을 미룰 것. 

비관도 낙관도 하지 말것. 

 

대신에 부드러운 곳에 자리를 잡고 

터무니없이 한가하게, 

찻잔을 들어서 후후 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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