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김보영
출판 : 아작
출간 : 2022.02.10
좋았다.
저자명만 확인한 뒤 복간된 책인 줄 모르고 구매했지만, 다시 읽어도 여전히 좋았다.
미묘하게 바뀐 부분들을 더듬었다. 조금 더 친절해지고, 조금 더 알기 쉽도록 풀어 설명된 부분들이 눈에 걸렸다. 좀 더 매끄러워졌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이전 발표작의 형태가 더 취향이었다. 너무나 익숙하던 것들을 불현듯 낯설게 만드는 능력은 정말 탁월하다. 그 낯섦을 인지한 뒤에도 '새로운 당연함'을 탄탄하게 받쳐주는 세계관에 설득되고 만다. 문득 정말 이런 세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 들만큼. 그 무엇도 '당연한' 것은 없는가 하는 어지러움이 일만큼.
<I'm Waiting for You: And Other Stories>에 이어서 <On the Origin of Species and Other Stories>가 발표되었다. 나는 애국심이 그리 투철한 편도 아니지만 - 같은 국적을 가진 타인의 성취가 어째서 나의 기쁨이 되는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 보다 많은 사람이 김보영의 글을 읽고 좋아하게 될 것이란 사실에 묘한 뿌듯함을 느낀다. '보세요, 대단하죠?'
어떻게 번역이 되었는지 궁금해 읽어보고 싶은데, <종의 기원>은 페이퍼백만 출간된 것 같아 킨들 발표를 조금 기다려보고 있다.
아직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이 계시다면 꼭 읽어보시길 추천 드린다. <다섯 번째 감각>을 먼저 읽은 다음 기억이 흐릿해질 때쯤 <진화 신화>와 <멀리가는 이야기>를 다시 읽어보시면 또 새로울 것이다. 조금 더 불친절하지만 더 날 것의 에너지가 있다. 그러니 가능하면 <다섯 번째 감각>부터 읽으시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스포일러가 상관 없으신 분들을 위한 리뷰는 더보기에.
<지구의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다>
기면증에 걸린 한 학자가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의 형태로 쓰인 단편이다. 화자의 상태를 걱정하는 부모님과, 치료를 극구 거부하는 화자를 이해하기 어려워하는 동생에게 자신은 괜찮으니 자신의 선택을 지지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선을 긋는 화자.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지구의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다'는 문장에 닿게 된다.
우주에는 수많은 별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별빛들은 스스로 빛을 내는 항성의 빛이기도 하고, 그 빛을 반사하는 행성의 빛이기도 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별들은 무한에 가깝다. 그렇다면 밤하늘은 어두운 구석이 없을 만큼 별빛으로 가득차 환하게 빛나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올베르의 역설'이다. 그 역설이 파훼되는 이유는 우주는 탄생 이후 계속 확장하고 있으므로, 그 확장의 속도가 빛의 속도보다 같거나 조금 빨라 아직 지구에 닿지 못한 별빛들이 있기에 검고 어두운 밤하늘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
그 문장을 해석해나가는 화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불현듯 화자가 지구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동굴 깊이 사는, 빛이 닿지 않는 시간 동안은 화자처럼 기면증 증상을 보이는 동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화자의 세계에서 '기면증'으로 분류되는 증상이 '잠'이라는 것을 깨닫고 멍해지게 된다. 어두움이 없는 밤하늘, 언제나 밝은 백야의 세계에서 '잠'이란 기면증의 일종이 되고 만다.
<땅 밑에>
지하로, 더 깊은 지하로 하강하는 동굴 탐사원 -하강자- 의 이야기이다. 화자는 지난 하강에서 부상을 입어 사실상 깊은 하강을 할 수 없는 몸이 되었지만 '나락'이라는 가장 깊은 틈에 새로운 하강 루트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생애 마지막 하강을 도전하기로 한다.
더 깊게, 그리고 더 깊게.
다시 올라갈 체력을 계산해서 내려가야 하건만 화자는 주변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더 깊게만 내려간다. 그리고 더는 무리라며 윽박지르는 그의 동료의 일갈에 불현듯 깨닫는다. 자신은 다시 올라갈 생각이 없음을.
땅 깊은 곳에는 '지사'가 산다는 소문이 있다. 그를 보았다는 하강자들도 다수 존재한다. 땅 밑에 사는 신령한 존재는 언제나 더 깊이 내려갈 것을 권한다. 사실 화자도 그의 환영을 본 적이 있다. 마지막 하강이라면, 후회없이 가닿을 수 있는 가장 바닥까지 내려가리라는 마음으로 내려가자...
위와 아래가 반전된다. 그에게 왜 이제야 돌아왔냐며, 그가 온 길은 인간이 올 수 없는 길로 어째서 ㅇㄹㅂㅇㅌ('엘리베이터'로 추정)를 이용하지 않았냐고 묻는 진짜 '지사'를 만나게 된다. 그와의 대화에서 화자는 깨닫는다. 이미 몇 겹의 양파 껍질처럼 파묻힌 지층, 그 층마다의 문명들은 모두 지사와 소통하고 있었음을. 자신이 '하강'했다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은 '상승'이었음을. 땅 속 세계에서 살던 것은 자신이었음을.
<촉각의 경험>
자신의 클론과 연결되는 감각은 어떤 것일까?
그것도 수정 이후 단 한 번도 외부 세계와 연결된 적 없이 무균 상태의 인큐베이터 용액 안에서 살아온 클론이라면.
소설 속의 주인공은 링크를 통해 자신의 클론이 꾸는 꿈을 보고 싶다고 주문한다. 클론을 담당하는 과학자는 애초에 외부 자극을 접한 적이 없는 클론의 뇌는 '꿈' 같은 것을 꿀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주인공은 그건 직접 확인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라며 고집을 부린다. 결국 의뢰인 측의 주장을 꺾지 못한 과학자와 주인공은 클론의 꿈을 엿보기 시작한다.
'무(無)'.
소리도, 색채도, 그 무엇도 없는 영상에 주인공은 좌절하지만 반복되는 접촉 속에 작게 떠다니는 먼지와 같은 부유물, 자신을 감싸고 회전하는 배양액의 느낌 같은 꿈을 꾸게 된다. 새로운 발견에 환희에 찬 이들은 더욱 반복적으로 클론의 꿈에 접속하지만...
결국 클론의 꿈은 주인공이 '클론이 꿀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을 스스로 '꾼' 꿈이었다. 오히려 연결을 통해 본체의 기억과 꿈을 엿보게 된 클론은 그 최초의 자극들과 감각에 중독되어 주인공과 연결되지 않은 단절의 시간 동안 극도의 불안과 우울 상태를 보이게 되고, 연구 중단을 선언했던 주인공은 알 수 없는 느낌들에 압도되어 번번히 연구실로 돌아오게 된다. 그의 '클론의 부름'을 거절할 수 없어서.
마지막 순간, 마치 알에서 깨어나 새로운 세계를 마주한 것 같은 클론의 '탄생'은 지복으로 가득했다.
<다섯 번째 감각>
" "로 표기되지 않은 대화들.
「 」로 표기된 대화들을 따라가다 보면 불현듯 모든 대화가 '보이는' 형태를 따르고 있음을 깨닫는다.
입으로 표현되는, 귀로 인식하는 소통이 배제된 세상.
다섯 번째 감각이 존재하지 않는 이 세계에서 모든 대화는 손, 수화로 이루어진다.
이 곳에서 소리를 듣고, 소리를 사용하고,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은 '초능력자'로 분류되어 숙청 당한다. 그들은 보지 않고도 상황을 눈치챌 수 있고 묘하게 감정을 움직일 수 있는 자들이다.
언니에게 도착한 '멜로디 카드', 그것을 아무렇지 않은 척 위장하고자 펼쳐놓은 상황을 상상해보라.
오감으로 감각하는 것이 익숙한 독자들에게 <다섯 번째 감각>은 그 중 한 가지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는, 하지만 틀림없이 그런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세계를 선사한다.
<우수한 유전자>
대다수의 현대 문명에 익숙한 독자들은 맨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뒤통수를 맞게 될 것이다.
작가 후기에 따르면, 마지막을 읽고서도 반전을 눈치 채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진정으로 '진보한' 세계는 돔에 갇혀서 조절된 환경이 아니면 살아남지 못하고, 외부에서 제공해주는 식량이 없으면 아사 위기에 처한 채 유전자 조작과 물질적 세계에만 집착하고 있는 돔 사람들이 아니다. 영적인 진보를 이루어 말이 아닌 텔레파시로 소통이 가능하고, 언뜻 샤머니즘적으로 보이는 비파괴적 치료가 가능한 바깥 세계의 사람들.
이 소설의 화자는 미개한 돔 바깥의 사람들을 설득해 조금이라도 더 발전된 삶을 살게 하겠다고 찾아온 돔의 인물이 치료가 가능했던 아이를 사망에 이르게 하고 만 비극적인 사건을 성토하고 있다. 중반까지는 틀림없이 수트를 차려입은 차분하고 건조한 어조로 느껴졌던 화자의 문장들이 서글프고 따스한 영적인 목소리로 변화하는 순간의 반전.
갇힌 것은 누구였는가.
<마지막 늑대>
'인간'은 거대 종족인 '용'에게 길러지는 애완동물의 한 종으로 전락한다. 한 때는 '늑대'들, 마지막 드래곤 슬레이어들이 존재했었다지만 그들에 관한 전설은 밤이 찾아와야 조심스러운 원로들의 노랫소리로 전해질 뿐이다.
용들의 감각은 적외선과 자외선 영역을 포함한 초감각적인 시계를 가지므로 주인공이 그리는 그림과 목소리는 그들에게 가닿지 않는다. 반대로, 용들의 의사 또한 인간들에게 닿지 않는다.
사실은 주인을 사랑하지만 소통의 부재에 절망해 차라리 늑대가 되겠다며 가출한 주인공.
혹은 사랑하지만 서로 소통할 수 없는 인간과 반려동물의 관계를 역전시켜 그려낸 세계.
그리고 비어버린 자리는 대체가 가능하다는 잔인한 현실.
개인적으로는 수정 전 버전이 더 마음에 드는 단편이었다.
<스크립터>
서비스를 중지하기 위해 접속 중지를 요청하러 들어간 게임 속에서, 서버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는 유저를 발견한다. 불법 이용을 중지하라며 극노한 사측 사원이 그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유저와 게임 캐릭터들과 접촉하지만, 대화를 나눌 수록 누가 진짜 '인간' 유저인지 확신할 수 없어진다.
이 게임 자체가 그 캐릭터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유저.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게임 서비스의 중단은 한 세계의 종말인가?
<거울애>
자신의 감정을 거울처럼 비추어주는 존재가 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분노, 증오, 의심을 그대로 투사해 반응하는 존재가 있다면.
거울애는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에 대한 愛이기도 하다.
주인공이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된 이유는 자신의 감정 자각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보다 감정적 변동의 폭이 작아서는 아니다. 스스로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고 있기에, 스스로의 감정을 인식하지 못하기에 소희가 보이는 반응이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가능성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자기 혐오로부터도 자유로운 편이며, 무엇보다 자신을 반사하는 존재를 가장 '인간적으로' 인식하며 그를 이용하고자 할 확률이 낮은 사람, 가장 '편견'이 적은 사람이 그였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단편도 수정 전이 더 마음에 든다.
<노인과 소년>
행동과 결과가 아닌 '선택의 의도'가 삶을 결정한다.
<몽중몽>
여몽은 자신의 꿈 속에 갇혀 있다. 그는 매 꿈마다 해(명일)를 만나지만 해의 모습과 그와의 관계성은 계속해서 변화한다. 하지만 그는 그 꿈 안에서의 세계관만 인식할 뿐이다.
그러나 모든 세계는 여몽의 꿈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가 태초의 바다를 꿈꾸었으므로 세계가 열렸고, 그가 존재하는 꿈만이 그가 꿈꾸는 동안 존재할 뿐이다. 모든 것은 꿈 위의 꿈, 꿈 속의 꿈일 뿐이다.
- 내 건강은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나는 치료를 받을 생각이 없단다. 나을 확률이 얼마가 되건 상관없다. 부작용이나 위험 때문만도 아니다. 내 상태는 나의 일부다. 바꿀 마음이 들지 않는구나. 부모님이 하시는 말씀은 신경 쓰지 마라. 그분들은 늘 내가 죽을병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말씀하시지. 서른 해를 살아낸 뒤에도 믿음을 바꿀 생각이 없으신 모양이다. 오히려 내가 하루 더 나이를 먹을 때마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야말로 때가 되었다는 확신만 커지는 것 같다. 물론 특수 기면증 환자들이 오래 살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다. 내가 다른 사람에 비해 쉽게 피로를 느끼는 것도 사실이고, 쉽게 신경이 날카로워지거나 판단력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 기면증 환자가 정신분열 증세를 보인다고 소개하는 책도 있다. 기절하는 동안 나타나는 기괴한 환각 때문에 그런 해석이 나온 것 같다. 그에 관해서는 나도 딱히 설명할 방법이 없지만, 역시 깨어 있는 동안에는 나타나지 않고, 그 환각이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해를 주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들이 네게는 생소할 것이다. 이전에는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으니까. 부모님도 원하지 않으셨다. 그분들은 네게 언제나 내 정상적인 부분, 다른 사람과 같은 부분만을 보여주고 말하기를 원하셨다. 내가 의식을 잃은 모습을 네게 보여주지 않으려 애쓰셨지. 그게 네게 도움이 되리라 믿으셨고, 어떤 면에서는 그분들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 나 자신에 관한 문제는 내가 판단하고 결정할 수밖에 없다. 너는 자신을 닮은 사람들로 둘러싸인 세상에 살고 있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세계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우리에겐 스승도 제자도 없으며 동료도 소속할 곳도 없다. 일생 스스로를 가르치고 스스로 공부하며, 자신에게 맞는 제도와 환경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너는 나을 수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싸우며 살아야 한다. 어려운 일이다.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기면증과 싸우다가 몸과 뇌를 완전히 망가뜨리는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내 입장에서 '낫는다'는 것은 나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을 뜻한다.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는 자신들과 같은 사람을 하나 더 만드는 것이니 아무 상관도 없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나를 버리는 것이다. 내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다.
- 지구의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다.
천문학자들부터 언어학자, 서지학자들까지 오랜 세월 동안 이 문장을 해석하기 위해 노력해왔단다. 너는 아마 이렇게 말하겠지.
"이 문장이 뭐가 어쨌다고요. 별이 빛나는 거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맞다. 그래서 이 문장은 아주 이상하다.
- <지구의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다>
- "박사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클론은 외부의 정보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인간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클론의 꿈을 보게 되면, '오직 선천적인 정보' 이외에는 없는 사회적인 정보는 아무것도 없는, 순수 무결하게 '선천적인 정보만 있는' 사람의 꿈을 보는 겁니다. 어때요, 이래도 흥미가 동하지 않습니까?"
나는 안경을 내려놓으며 그를 찬찬히 살폈다.
"아까부터 선천적인 '정보', '정보' 하는데, 그런 것은 없습니다."
"이거 재미있어지는데요. 그러니까, 인간은 후천적인 교육으로만 만들어지는 것이다, 선천적인 요소는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주장하시는 거로군요."
“그렇게 말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선천적인 요소란 너무나 미미하여..."
"꿈을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험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지 않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언제부터 과학자들이 실험과 관찰을 버리고 상식을 택했습니까?"
- <촉각의 경험>
- 언젠가 선배님과 논쟁했던 일이 떠오릅니다. 선배님은 평등이란 서로 같아지는 것에서가 아니라 다른 점을 인정하는 것에서 온다고 하셨지요.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은 획일이 아니라 조화고, 키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키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를 보완하는 것이라고. 그런데도 역사는 언제나 어느 한 부분을 배제하고 축소하고, '더 낫거나' '더 옳다'고 믿는 것을 과다하게 확장하는 데에만 주력해왔다고요. 비대하게 기울어진 가치관은 결국 쇠퇴를 가져오고, 뒤를 잇는 문명은 다시 다른 쪽 저울에 추를 과다하게 올려놓는 모순을 반복해왔다고요. 그러므로 우리의 눈에 아무리 바보스러워 보이더라도, 그들의 존재 역시 이 사회에 필요하며, 그들의 생활방식 역시 인정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 <우수한 유전자>
- 나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서녘 하늘을 응시했다. 내 발을 따라 질주하던 시간이 내 뒤꽁무니에 부딪혀 멈춰 섰다. 해 그림자가 반대쪽 지평선까지 어스름하게 덮여 있었다. 짙게 깔린 구름에 산란하는 태양빛으로 하늘이 온통 타는 듯 붉었다. 내가 시선을 두는 사이에 서녘 하늘은 황금빛으로 빛나다가 짙은 코발트빛으로 물들었고 숨어 있던 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 풍경을 보지 못한다.
거리는 적막에 잠겨 있었고 내 거친 숨소리만이 천지 사방에 구슬프게 울렸다. 나처럼 허약한 생물의 체력이 어디 가는 것이 아닌지라, 고작 한 시간 여를 달리고 난 내 폐는 애처롭게 울부짖고 있었다.
그들은 이 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들은 이 소리를 듣지 못한다."
나는 중얼거렸다. 입으로 뱉은 말은 힘을 가진다. 아무리 오래 생각했어도 머릿속에 있는 동안에는 되돌아갈 여지가 있다. 하지만 말한 후에는 모든 것이 변한다. 그 말을 입에 담은 순간 나는 내가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지나버렸음을 깨달았다.
나는 이제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애완동물로는.
- 하지만 또 어찌 알겠는가? 그의 하늘에는 다른 것이 떠 있을지. 그들의 귀에는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가 들리며 별들이 공명하는 소리가 음악처럼 들릴지, 지구의 자기장이 흐름을 바꾸는 소리가 들리며 우주선(線)과 자외선이 지표로 쏟아지는 모습이 보일지. 인류가 수만 년의 역사 동안 그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무엇인가를 일상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을지. 그가 보는 내 모습이 물에 비친 내 모습과 완전히 다른 형상을 하며, 그의 귀에는 내가 듣지 못하는 내 목소리가 들릴지.
-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내가 이런 생각을 하며 슬픔에 젖는 줄을 그는 또 어떻게 알겠는가. 우리가 서로 다른 우주에 살고 서로의 진정한 모습을 알지 못하건만, 서로의 그림자를 사랑하건만 그 실체를 알지 못하고, 같은 세상에 살면서도 다른 차원에 걸쳐 있는 것을.
- <마지막 늑대>
- "창조주의 심부름꾼이라고 주장하는 자여, 나는 존재하기 위해 그대의 허락은 물론이고 그 누구의 허락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돌아가서 그대의 주인에게 그리 전하세요. 당신들은 이 세계가 자신들의 것이라 믿을지 모르지만, 이 세계는 우리의 것입니다. 당신들이 이 세계를 멸망시키거나 새로 창조할 수 있다고 해도 결코 우리가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일을 하도록 만들 수는 없을 것입니다. 죽음과 멸망이 나를 이 세계로부터 내쫓는다 해도, 결코 내 의지로 그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 "'신' 레벨이 되니 사람들 태도가 달라지네요. 구조상으로는 거지의 구걸 기술과 다를 게 없어 보이지만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어요. 신 레벨은 숨겨져 있었다고요. 구현할 이유가 없었을 텐데요."
여인은 반쯤 검게 물든 얼굴로 여행자를 올려다보았다. 천사는 주먹밥을 볼 가득히 넣고 우물거리며 검은 물이 왈칵왈칵 흘러들어오는 강을 힐끗 보았다.
"내 책임이 아녜요. 내가 한 일도 아니고요. 저걸 어떻게 고쳐야 할지 우리는 모르고,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도 몰라요. 소스를 아는 사람은 다 늙어 죽었어요. 디스크도 수명이 다 되었고요. 데이터를 새 판에 옮기고 전체적으로 점검을 하면 좀 나아질지도 모르겠지만, 기대하지 않는 게 좋아요. 신께서는 이 세계에 인력을 투자할 생각이 없거든요."
- 여자는 강 저쪽을 바라보았고 손을 들어 강이 끊긴 곳을 가리켰다.
"슬퍼하지 마라. 망각은 너를 지우지 않는다. 죽음 또한 너를 지우지 않는다. 사라지는 것은 없다. 너는 홀로 온전히 존재하며 존재한 순간에 영원히 머문다. 네가 살아온 날들을 아는 이가 없다 할지라도, 네가 살아간 흔적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할지라도, 네가 존재한 순간은 바람과 햇빛과 구름이 세상에 한순간 머물다 사라졌을 때 그리하듯이 찬란하게 빛난다."
천사는 몇 번 기침을 했다. 그러다 간신히 진정하고 입을 열었다.
"지금 뭘 한 거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슬픔이 찾아올 때 외우는 주문입니다."
- "답을 그에게서 보았다고 생각할 거야. 너는 그에게서 네가 원하는 말을 듣고 네가 듣고 싶은 답을 얻을 거야. 너는 혼자 했던 일방적인 대화 속에서도 소통을 상상하고, 이유가 없는 것의 이유를 해석하고, 논리가 없는 것의 논리를 보겠지. 그의 무표정에서 너는 무수한 감정의 파편을 보겠지. 그 감정이 네 안에 있었던 것인 줄도 모르고."
여행자는 당혹스러워했다.
"그는 널 보고 웃겠지. 그 사람이 웃음의 이유에 대해 말했었나? 아니면 네가 그의 웃음을 멋대로 해석한 것뿐이었던가? 그는 네게 화를 내겠지. 그가 이유를 말하던가? 아니면 네가 이유를 멋대로 해석했던가? 만약 네 안에 있지 않은 감정을 그에게서 발견한다면, 그건 '그것'을 만든 사람의 감정이겠지. 내 모습을 만들고, 이 나무를 산에 세운 사람. 죽음의 풍경과 멸망의 스크립트를 만든 사람. 너는 내 창조자가 내 얼굴을 그렸을 때, 이 나무의 가지와 잎을 색칠했을 때, 그가 내 표정을 만들고 눈빛을 그려내었을 때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겠지. 그 사람이 세상에 남긴 감정을 재차 읽을 수 있겠지."
여자는 팔을 들어 올려 하늘을 향해 손바닥을 폈다. 팔은 차진 반죽처럼 그림자에 눌어붙은 채로 들려 올라갔다.
"잘 생각해봐. 불가능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어. ... 그는 너와 대화한 적이 없어."
- <스크립터>
- '마음이란 드러나기 마련이야.'
연정은 그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눈으로는 생각하는 것을 다 쏟아부으면서, 입만 열지 않으면 자신의 생각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해. 책 속에는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하면서 첫 장을 펼쳐볼 생각도 하지 않아. 하지만 마음은 몸 안에만 있지 않아. 경계선이 좀 더 바깥에 있지."
그녀는 말을 이었다.
"사람은 처음 태어났을 때는 모두 자폐에 가까워. 세상에 자기 자신 이외에는 없고 외부를 인식하지 않아. 그러다 생후 1개월에서 7, 8개월 사이에는 거꾸로 자신과 외부 사이에 경계가 없는 시기가 와.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분하지 않고 양육자의 마음을 고스란히 자신의 것처럼 느끼지. 그러다 타인과 자신이 구별되면서 마음의 경계가 정착되는 거야. 그렇게 보면 우리는 다 어릴 때 갖고 있던 능력을 잊어버린 채 사는 거지."
그녀는 계속했다.
"읽을 수 없는 건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야. 잘못 읽는 것은 상대를 읽는 대신 상대의 눈에 비친 자기 자신을 읽기 때문이야."
- 설명, 지나치게 상세한 설명. 보통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 사람이 부모라면, 아니, 제대로 된 부모라면, 전화로 처음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게다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의 아이에 대해 '그런 식'의 이야기를 구구절절 할까?
- 왜 화를 냈을까? 정말로 잘못 걸었을 수도 있잖아?
보호자가 있었다면 의사인 연정이 몰랐을 리 없다. 보호자가 있었다면 연정이 소희를 돌봐줄 사람을 따로 찾을 이유가 없다. 대체 어떤 보호자이기에 의사가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 그것도 '환자'가 '더 안전하다'고 판단할 정도였을까?
- 내가 감정 호르몬이 제대로 길을 찾아가는 보통의 뇌를 가진 사람이라면, 확인을 위해 어쨌든 그 아버지라는 사람에게 연락을 취해 보았을 것이다. 아니면 어딘가 잘못 끼어들었구나 싶어 소희를 경찰서나 병원에 맡기고 튀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내 뇌는 여전히 반쯤 고장 나 있었다. 연정은 그 사실을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내 고장 난 뇌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연정이 바라는 일일 것이다.
- <거울애>
- 스승님의 얼굴을 접한 순간 모든 두려움과 고통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신의 축복이 가득한 수도원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했던 저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꼈고, 영원히 스승님의 평온하고 따듯한 품 안에서 순종하며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잠에서 깨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오랫동안 그 네 사람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같은 말을 하고 같은 행동을 하며, 같은 방식으로 살아온 두 사람이 어째서 전혀 다른 지점에 서 있는지, 한편으로 같은 수행을 하고 같은 방식으로 살아온 두 사제님께서 어째서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계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 꿈은 오랫동안 저를 괴롭혀왔습니다.
- 이야기를 다 들은 노사제는 입을 열었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네가 마음에 거스르지 않는 싸움을 하였으면 이는 용기 있는 행동이며 그러지 않았으면 사람의 목숨을 가벼이 여긴 죄를 지은 것이다. 내가 마음에 거스르지 않고 신을 섬겼으면 이는 고귀한 일이며 그러지 않았으면 세상을 기만한 죄를 지은 것이다. 네가 마음을 다하여 여자를 안았다면 이는 생의 큰 기쁨을 행한 것이며 그러지 않았으면 사람의 마음을 농락한 죄를 범한 것이다. 내가 마음을 따라 금욕을 하였으면 이는 존경할 만한 일이며 그러지 않았으면 생명의 순환을 거스르는 죄를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 나타난 젊은이는 설사 세상이 비난할 만한 인생을 살았다 할지라도 진실한 마음에 따라 살았으므로 신에게 바친 자의 인생과 다른 면의 고귀함을 갖고 있다. 세 번째에 나타난 대사제는 비록 남에게 존경받는 삶을 살았다 해도 마음에 따라한 일이 아니었으니 헛된 고행으로 삶의 기쁨을 저버린 것이다."
이야기를 하던 중에 사제의 눈에는 차츰 광채가 일었고 곱사등이처럼 굽었던 등이 곧게 펴졌다. 꺼져가듯 내뱉던 숨이 고르고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오늘 연단에 서서 신의 말씀을 전하던 그때처럼 무한한 힘이 몸속으로 폭포처럼 흘러들었다. 답을 들은 소년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소년의 어깨에 얹혀 있던 무지와 순수가 벗겨지고 대신 창에 스며드는 붉은 햇빛처럼 활기찬 힘이 들어섰다. 소년은 넘쳐나는 기운을 주체하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가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무릎을 꿇었다. 이불처럼 늘어졌던 옷이 어쩐지 조금 줄어든 듯했다. 그는 사제의 손에 입을 맞추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전과는 달리 굵고 강하며 씩씩한 목소리였다.
- <노인과 소년>
- 꿈 하나.
어제 나는 죽었다.
나는 어제 죽었고 오늘 다시 태어나 살아간다.
- 어제 꿈에도 그가 등장했다. 그는 어린 소년이었고 나도 어렸다. 그는 영원과도 같은 몸짓으로 내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의 표정은 부드러웠고 온화한 시선이 찻잔에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차향을 기억했고 달콤한 맛을 기억했다. 꿈에서 나는 그것이 현실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 죽음 또한 진실한 죽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논리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제외하면 현실과 아무 차이가 없다.
- "죽음과 잠은 얼굴이 같지. 이상한 일도 아니야. 둘은 쌍둥이 형제니까. 잠은 매일 밤 찾아와 사람들을 죽음에 훈련시키지. 자면서 진짜 죽음을 연습하도록, 쌍둥이 형의 맨얼굴에 익숙해지도록 말이지. 여몽, 잠과 싸우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어. 잠은 자네 아버지잖아. 죽음을 미루는 법이 있다는 말은 들었어도 잠을 미루는 법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어. 천신께서도 잠에 대항해 싸우진 않아. 티린스 출신의 저 우악스러운 사냥꾼께서 멱살을 잡아 패대기를 친 것도 죽음이었지 잠은 아니었어."
- 어떤 꿈에서는 이런 세상을 동경했을지 모른다. 멸망하는 세상은 정지한 세상보다는 생동감이 있으니까. 죽어간다는 것은 살아 있었다는 증명이니까.
'이 꿈은 곧 끝난다'
내 안에서 누군가가 속삭였다. 나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았고 내 전생을 모두 기억하는 내 영혼의 어떤 부분이 말했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내 긴 일생을 한순간처럼 느끼며 내 하나뿐인 생을 흔하디 흔한 것으로 치부한다. 눈을 감았다 뜨면 사라져 버릴 짧은 꿈처럼.
- <몽중몽>
- 이 소설을 강의 교재로 쓰곤 했던 어느 대학 강사께서 "언제나 학생의 절반은 반전이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한다"라고 하셔서 반전 기법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된 작품이다. 자신의 선입견과 다른 내용은 읽어도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면, 어쨌든 그게 사실이라면, 소설은 그 점까지 고려하여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키바'는 미 원주민의 종교의례를 위한 건물의 이름에서 땄다. NASA에서 달에 다녀왔을 때, 실제로 미 원주민은 '우리는 이미 명상으로 달에 오가고 있는데 왜 구태여 그런 일을 하는가?' 하고 질문했다고 한다.
- 어릴 때 우연히 여행 중 타로카드 한 벌을 산 것이 계기가 되어 타로 공부를 했었다. 나는 늘 카드가 정방향으로 놓였는가, 역방향으로 놓였는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점이 흥미로웠다. 같은 그림에 대한 같은 점괘인데 단지 보는 시선만 달라진다. 이는 그에 대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웹진 <거울>에서 22명의 작가가 각기 타로카드를 하나씩 맡아 그에 대한 소설을 쓰는 <타로카드 22 앤솔로지>의 일환으로 썼다. 원래 내가 쓰고 싶었던 카드는 '여사제'였지만 가위바위보에서 밀려 '교황'을 택했다. 며칠 만에 완성한 몇 안 되는 소설 중 하나다. 이 소설의 전체 구조는 교황 카드에서 나왔지만, 소년의 꿈에는 순서대로 악마(역방향), 교황, 전차, 은둔자 카드가 등장한다. 이 소설은 후에 중편 <어느 광대의 여정>으로 이어진다. 쓰지 못한 여사제의 이야기는 그 소설에 담았다.
- "병일 뿐이잖아요." 네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구나. "나으려고 하는 게 뭐가 이상하죠?"
낫 세포에 관해 들어본 적이 있겠지. 적혈구 기형인 이 세포는 심각한 빈혈을 유발하지만, 이 병이 생겨난 지역의 열병에 대처하는 데에는 효과적이라고 한다. 나는 내 문제도 뭔가 이유가 있어서 생겨나지 않았을까 한다. 어떤 환경적인 문제에 적응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하고 말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증상을 가진 사람이 이토록 많을 리가 있겠느냐. 주기적으로 의식을 잃는 것이 살아가는 데 무슨 도움이 되느냐고 너는 물을 것이다. 어느 모로 보나 효율적이지 않다. 의식을 잃은 동안 나는 자신을 보호할 수도 없고 생산적인 일을 할 수도 없다. 남들이 공부를 하고 자기 계발을 하는 동안 나는 기절한 채로 보내야만 하니 말이다. 의식을 잃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한편으로는 좋기도 하다. 네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환각도 좋아한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구나.
- 어린 시절에 나는 늘 어딘가에는, 기면증 환자들로 가득 찬 세상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서로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웃으며 기절하고 기절하는 시간에는 서로에게 '잘 기절하라'라고 인사를 나누고, 깨어나면 '잘 기절했느냐'라며 안부를 물을 것이라 생각했다. 웃을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나는 지금도 진지하게 그리 생각한단다.
- 그로부터 꽤 시간이 지난 뒤에야 중요한 의문이 등장한다. 이 의문은 어느 천문학 시간에 한 학생이 교수에게 손을 번쩍 들고 질문하면서 시작된다. "그 사람들은 왜 별이 빛난다고 했을까요?" 그는 이어서 물었다. "왜 하늘이 빛난다고 하지 않은 거죠?"
- 그래, 물론 우리는 하늘에 빛나는 것이 별인 줄을 안다. 지구인들도 알 테니 별이 빛난다고 말한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만약 '하늘에 별이 있다'는 말이 그들의 오랜 역사에서 관습적으로 굳어진 표현이라면, 대체 그들은 어떻게 알았을까?
빛나는 것이 하늘이 아니라, 별이라는 것을?
- 우리 행성에서, 옛날 사람들은 별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저 하늘이 빛난다고만 생각했다. 물론 자세히 보면 그 빛이 수많은 광원의 집합체라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인식하고 보지 않으면 그리 쉽게 눈치챌 수 없다. 우리에게는 어떤 지역에서도 별에 대한 신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하늘에 대한 신화만이 있다. 그 신화는 대부분 어떻게 해서 하늘이 빛나는 몸을 갖게 되었는가로 시작한다. 우리의 하늘은 별로 가득 채워져 있다. 물론 별들은 서로 다른 거리에 있지만, 우리 눈에는 그들이 천구에 층층이 쌓여, 실제로는 멀리 떨어진 별들이 마치 하늘 전체를 가득 메운 것처럼 보인다. 망원경이 발명된 뒤에야 우리는 하늘이 무수한 별의 집합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지구인들은 하늘이 아니라 별을 언급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혹시 그들은 별과 하늘을 구분해서 볼 수 있었을까? 천문학자들이 머리를 싸매며 수학적 계산을 하고 망원경으로 하늘을 들여다보지 않고도, 누구든 하늘을 보면 알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곳에 별이 있다는 것을.
- 그제야 우리는 깨달은 것이다. 지구의 하늘은 어둡다는 것을. 우리는 빛나는 하늘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고, 그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것이다.
- 처음에는 권위 있는 학자들마저 이 가설에 저항하고 나왔다. 별의 밀도가 아무리 낮아도 하늘은 밝을 수밖에 없다. 우주의 크기는 무한하며 별의 숫자도 무한하다. 그렇다면 아무리 별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결국 그 숫자가 무한하므로 어느 방향을 보든 별이 보일 수밖에 없다. 지구가 어디에 붙어 있든 하늘이 어두울 리가 없다. 하지만 젊은 학자들을 중심으로 다시 이 문제를 다루기 시작했고, 이어서 은하의 중심을 제외하고는 하늘이 어둡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우주의 크기와 별의 숫자가 무한한지는 알 수 없는 일이며, 설사 그렇다고 해도, 우주는 팽창하고 있고, 어느 지점에서부터는 별이 빛의 속도로 멀어져 가기 때문에 모든 별의 빛이 시간 내에 시야에 도달할 수가 없다. 우리의 하늘이 빛나는 까닭은 우리가 은하의 중심에 가까이 있고, 시간 내에 우리 별에 빛이 도달하는 별의 수가 하늘을 가득 채울 만큼 많고 오밀조밀하기 때문이다.
- 나는 늘 의식을 잃을 때면 지구에 대해 생각한다. 어둠과 빛이 주기적으로 바뀌는 세상. 더위와 추위, 활동과 휴식이 매일 자리를 바꾸는 세상. 네가 이미 눈치챘는지 모르겠구나. 지구에 빛을 주는 별이 단 하나뿐이라면, 그리고 지구가 자전한다면, 지구에는 매일 주기적인 어둠이 찾아오게 된다. 내가 발견한 그 동굴 입구처럼 말이다. 그 별은 시간에 따라 빛의 세기가 다른 별이다.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세상이다.
- 생각하면 할수록 이상한 풍경이다! 지구의 사람들은 어둠이 찾아오면 자연스럽게 각자의 방에 들어가 의식을 잃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누구도 이를 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붙잡고 "너는 나을 수 있어."라고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부모님이 의식을 잃은 아이를 깨우며 눈물을 흘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아이들이 기면증과 싸우며 자신을 창피해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치료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어둠이 찾아오고 하늘에 별이 빛나면, 사람들은 서로에게 "잘 기절해." 하고 인사할 것이다. 아침이 찾아오면 어젯밤은 잘 기절했느냐고 안부를 물을 것이다.
- <지구의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다>
- "다들 아래에 뭐가 있다고 그렇게 내려가는 거야? 땅속에 지사(地使)라도 살아?"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반쯤은 반항심에서, 반쯤은 생각 없이 대답했다.
"... 응."
"봤어?"
“응.”
아내는 적당히 해, 라든가 드디어 미쳤구나, 라든가 농담은 집어치워,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지사가 땅속이 아니면 어디에 살겠어."
땅속에서 지사를 본 하강자는 많다. 낚시꾼들이 인어를 낚았느니 하는 말이나 비슷하다. 바람이 좁은 굴을 지나며 내는 피리 소리, 동굴 박쥐 그림자, 저산소증과 탈수증에 피로가 겹쳐 보이는 환각과 환청. 땅속에서 지사를 보는 방법은 많고도 많다. 내가 본 것은 그저 평범한 종류였다. 동료들과 떨어져 혼자 하강하던 날이었다. 나는 최근 지진으로 반쯤 내려앉은 길을 헤매고 있었다. 관리청에서는 길을 폐쇄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나는 다시는 이 길에 올 수 없다는 생각에 초조해져 있었다. 게다가 나는 막 흙에 묻혀 있던 새 길을 발견한 참이었다. 좁은 길을 얼마나 내려갔을까. 저 아래에서 흔들리는 흰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사람처럼 보였다.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머리에는 다섯 개의 탑이 솟은 관을 쓰고 기장이 긴 천 옷을 입고 있었다. 내게 손짓하는 듯했다. 나는 뭣에 흘린 사람처럼 이리 부딪치고 저리 부딪치며 구르다시피 내려갔다. 가까이서 보니 그건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지사도 아니었다. 누군가 벽에 횟가루를 발라 그린 그림이었을 뿐이었다. 그게 내 헤드랜턴 불빛에 비쳐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그래, 지사가 당신 보고 뭐래?"
그림 앞에는 거기까지 내려가다 지쳐 죽은 듯한 하강자의 유골이 있었다. 유골 위에는 하강자의 기호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 내려가라. -
"당연히 그렇게 말하겠지. 유령이 산 사람에게 원하는 게 달리 뭐겠어? 얼른 죽으라는 거지. 저승으로 내려와서 죽으라는 거잖아."
아내는 말이 끝나자마자 내게 달려들어 주먹을 날렸다. 다행히 딱히 아프지 않은 주먹이었다. 아내는 내 머리, 가슴, 어깨 할 것 없이 한참을 마구잡이로 패더니 내 품에 쓰러져 울기 시작했다.
"가, 어서 가버려. 부탁이니 이젠 다시는 돌아오지 마."
- 바람이 부는 까닭은 세상이 돌기 때문이다. 높이 올라가면 중력이 낮아지는 것과 같은 이유다. 높은 곳일수록 지표에서 멀어서 원심력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그런 괴상한 사실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데에도 역시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 나락은 우리가 발을 들여놓자 허한 소리를 내며 울었다. 바람이 길을 통과하며 내는 소리였다. 얼음처럼 차가운 습기가 몰려오고 동굴 박쥐와 물이끼가 첫인사를 했다.
그 단계가 지나자 고요가 찾아왔다. 땅속에는 빛도 소리도 시간도 없다. 적막에 잠겨 있노라면 영혼에도 고요가 찾아든다. 번잡스러운 지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졌다는 해방감, 어머니의 품에 안긴 듯한 안락함. 이 길이 영원히 이어졌으면 하는,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곳까지 이어지기를 바라는 소망, 언제든 지반이 무너져 고립되거나 가스가 새어 나와 목숨을 앗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떠오르지도 않는다. 지하 낙원처럼 평화롭다.
- 나는 문득 모래바람이 계속 부는 지역에 전해지는 오랜 전설 하나를 떠올렸다. 전설로만 알려진 지하 도시가 진짜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한 부자가 무턱대고 땅을 파 내려갔다고 한다. 그는 땅속에서 양파 껍질처럼 층층이 쌓인 도시를 발견했다. 도시 아래에 도시가 있었고 또 그 아래에 도시가 있었다. 도시와 도시의 시간 간격은 겨우 수백 년에 불과했다.
- 하지만,
그때부터 내가 후회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그때 그것이 마지막 하강인 줄 알았더라면, 왜 더 내려가지 않았을까. 왜 구조를 기다리며 시간을 낭비했을까.
- <땅 밑에>
- "역전도 현상입니다."
나는 조용히 입을 떼었다. 거두절미하고 말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기분은 영 착잡했지만, 그래도 아직 평정을 유지할 여력은 남아 있었다. 유시헌은 몇 달간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버린 모습으로 초췌하게 소파에 앉아 있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시겠습니까?"
그가 띄엄띄엄 질문했다.
"플러스(+) 전자가 한 방향으로 이동할 때는 반대방향으로도 미세한 양의 전자가 이동합니다. 클론의 뇌파가 사장님의 뇌로 흘러 들어갈 때 사장님의 머리에서도 미세한 전파가 나와 반대쪽에 전달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시헌은 나직하게 말했다.
"클론이 내 꿈을 꾸고 있었다는 말입니까?"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깊은 허탈감이 우리 둘의 표정을 통해 서로에게 전해졌다.
"한두 번으로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런 현상에 관해 보고된 사례가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6개월이나 실험을 했습니다. 지나치게 많은 자극이 전달되어버린 겁니다."
- "클론이 꿈을 꾸는 동안 사장님의 뇌는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클론의 꿈을 관찰하기 위해서요. 클론은 그런 사장님의 생각을 읽었고, 그것이 클론의 경험에 더해졌고, 클론은 다시 그 정보를 토대로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을 다시 사장님이 읽으신 것입니다."
- 유시헌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는 웃다가 중얼거렸다.
"이런 것이군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꿈을 꾼다."
- 유시헌은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지능이 절반 이하로 깎였거나 15년쯤은 어려진 것처럼 보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이 그 녀석의 머리에서부터 내 머리까지 연결되어 있어요. 점성이 있는 전기 자극이 전선을 떼어낸 다음에도 공기를 통해서 내 머릿속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녀석은 지금도 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 "그놈에게는... 나와 연결되는 시간만이 유일하게 '무엇인가'가 일어나는 시간이었던 겁니다. 아무것도 없는 삶에 갑자기 새로운 것이 나타난 거죠. 그놈은 꿈을 꾸고 싶어 해요. 나에 관한 꿈을, 내 기억을 보고 싶어 해요. 그래서 내가 접속하지 않는 동안 내내 불안해하고 슬퍼했던 겁니다. 그게 나한테까지 영향을 미친 거예요."
- <촉각의 경험>
- 「죽기 전에 언니가 주문이라도 외우더라는 말인가요?」
「입을 움직였습니다.」
「입을 움직여요?」
나는 그만 팔을 크게 움직이고 말았다.
「누구나 입은 움직이잖아요? 밥을 먹을 때도, 숨을 쉴 때도 입은 움직여요!」
「특이하고 규칙성 있게 움직입니다. 그들은 입을 사용해서 어떤 특별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지요.」
나는 아까 입을 움직이던 사람을 돌아보았다. 내가 도로 경찰을 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해본 겁니다. 연주 씨가 저런 행동에 반응하는지.」
- 「화장실 가는 게 아니잖아요?」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계산하고 나오셨잖아요.」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까부터 날 지켜보던 분 맞죠?」
그가 다가왔다. 나는 물러날 생각도 못 하고 얼어붙어 있었다.
「제가 마음에 드시나요? 싸게 서비스해드릴 수도 있는데.」
나는 그만 얼굴이 확 붉어졌다. 대체 나는 이런 위험한 데서 무슨 바보짓을 하고 있었던 걸까. 속으로 바보 멍청이라고 자신을 욕하면서 나는 정신없이 고개를 숙였다.
「뭔가 착각이 있었나 봐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는 황급히 돌아섰지만 발을 떼지 못했다. 그 사람이 내 손을 잡아 끌어당겼기 때문이었다. 나는 돌처럼 굳어서 뒤를 돌아보았다.
「미안해요. 농담한 거예요.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정말로 사과하는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본 나는 그 남자가 별로 나쁜 사람 같지는 않다고 또 바보 같은 상상을 했다.
「잠깐 이야기라도 하지 않겠어요? 나, 당신이 갖고 있는 그 물건에 관심이 있어요.」
나는 깜짝 놀랐다. 그가 눈으로 내 손가방을 가리켰다. 나는 내 열린 손가방에 삐죽이 나와 있는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 폭풍처럼 몰아쳐대었다. 머릿속이 망치로 두들기듯이 진동했다. 내 귀로 뭔지 알 수 없는 것이 정신없이 몰아쳐 들어왔다. 나는 공포에 질려 귀를 막고 쓰러졌다. 사람들은 일제히 동작을 멈추었다. 윤성이 놀라 내게로 달려와 어깨를 붙들었지만, 나는 완전히 비이성적인 공포에 휘말려 도망칠 곳을 찾아 벽을 파고 있을 뿐이었다. 귀를 막고, 입을 벌린 채로.
- 갑자기 공기가 바뀌었다. 평온하고 부드럽고 따듯한 것이 귓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심장의 뒤흔들림이 잦아들었다. 나는 차츰 진정하고, 눈을 뜨고 귀에서 손을 떼었다. 처음에 나를 붙든 윤성이 눈에 들어왔다. 그 뒤에 놀라 다가온 여자가 그리고 무엇인가를 입에 문 안경을 쓴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입에 문 것은 하얀 소라처럼 보였는데, 남자는 다섯 손가락을 써서 소라 껍데기에 뚫린 구멍을 천천히 막았다가 떼었다가 하고 있었다. 상황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나를 진정시킨 것 같았다. 안경을 쓴 남자는 소라를 입에서 떼더니 난처한 얼굴을 했다. 여자가 말했다.
「미안해요.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당신이 들∗을 수 있다고는 생각도...」
- 난 윤성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그의 손가락이 내 눈을 따라 움직였다.
「잠깐만 기다려요.」
윤성이 나를 두 팔로 붙잡았다. 그는 뭔가 말하려다가 두 팔을 다 쓰면 내가 알아볼 수 있는 말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손을 떼었다.
「가지 말아요, 연주 씨는 우리와 같은 사람이에요. 지금 증명해줬어요.」
웃기지 마.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들을 수 있어요. 우리처럼요.」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이 사람들은 '본다'는 말 대신 '듣는다'는 말을 쓴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어서 여기를 빠져나가고 싶을 뿐이었다. 남의 감정을 멋대로 농락하고 갖고 논 사람들과 한순간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 '싫어!'
나는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입을 움직였다. 갑자기 생각이 났다. 언니는 화가 날 때나 거부할 때, 그런 방식으로 입을 움직였다. 짧고 강렬하게. 윤성은 소스라치게 놀라 물러났다. 그가 왜 놀랐는지는 몰랐지만 분노로 가득 찬 머릿속에서는 이미 아무 생각도 돌아가지 않았다. 그저 그가 물러나 준 것만 고마울 뿐이었다.
- 「좋아요. 그 대신 한 가지만 말하고 가겠어요.」
내가 움직이지 않자 그는 동의한 것으로 받아들였는지 계속했다.
「눈을 감지 말고 봐요. 지금부터 하는 말을 기억해요. 이해할 수 없어도 내 말을 기억해야만 해요.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예요.」
그는 천천히, 분명하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을 잘 봐요.」
나는 두려움에 눈을 크게 뜬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당신 주위는 소리로 가득 차 있어요.」
나는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소리를 들어요. 귀를 기울이면 알 수 있을 거예요. 그게 길을 인도해줄 거예요. 위험한 일이 생기면 이 말을 떠올려요. 연주 씨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당신 주위는 소리로 가득 차 있어요.」
윤성은 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소리가 길을 인도해줄 거예요. 행운을 빌어요.」
- 「하지만 그 사람은 어떻게 내 노래를 들을 수 있었던 거죠? 사람들은, 그러니까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은 들을 수 없잖아요. 」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많아요. 잘 들을 수 있는 사람에서부터 희미하게 들을 수 있는 사람까지. 하지만 그것이 소리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사는 거죠. 연주 씨처럼요. 아마, 그는 어느 정도 들을 수 있는 사람이었을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를 찾아낼 수 있었던 거고요.」
나는 점점 더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나중에 자기 나름대로 이유를 붙여 생각할 거예요. 귀신이라도 보았다든가, 우리가 자신의 정신을 조종했다든가. 그는 슬픈 느낌에 사로잡혔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겠지요. 그래서 도망쳐버린 거예요.」
- <다섯 번째 감각>
- 말 위에 앉아 산 아래를 응시하던 사냥꾼은 나무 아래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웃다가 거의 안장에서 떨어질 뻔했다.
"안 될 것 같았어요. 처음부터 이런 모습으로 등장했어야 했는데, 역효과네요."
여행자의 등에 붙은 날개가 어깨와 함께 추욱 늘어졌다. 여행자의 머리에는 샛노란 후광이 걸려 있었다. 잠옷 같은 흰 드레스를 걸치고 엉클어졌던 머리도 가지런히 빗어 꽃핀으로 붙여놓았다. 여행자는 새들이 그러듯이 날개를 들고 조금 퍼덕거린 뒤, 얼굴을 날갯죽지에 묻고 닦았다.
- 여자는 미소를 지었다.
"진심으로 저와 같은 인공지능이 이 세계에 존재하리라고 믿는 겁니까? 언어 인식과 길 찾기와 장애물 피하기 로직이 따로 개발되던 시대에 나온 세계예요. 인간의 두뇌를 닮은 신경망 컴퓨터는 아직 이론으로만 존재하고, 디지털 컴퓨터의 한계는 명확합니다. 진심으로 이 세계의 AI가 사고를 하며, 인격을 가지며, 문장 간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겁니까?"
천사는 한동안 입을 벌린 채 여자의 표정을 살폈다.
“그런 대사를 입에 담을 줄은 몰랐는데요."
“나는 무슨 말이든 입에 담을 수 있어요.”
“그러면 왜 이 세계가 사라져서는 안 되는지 말해봐요."
"그대야말로 하나의 세계가 사라지는 것에 어찌 그리 무심하십니까?"
"글쎄요. 하루에도 몇 개씩 세계가 태어나고, 또 몇 개씩 사라지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닫히고, 다시 열리고, 한 줌의 철학도 예술성도 없이 세계가 태어났다가 사라지고, 한 푼의 애정이 없는 창조주가 한 푼의 사랑 없이 세계를 운영하고, 권력욕에 빠진 신들이 한 조각의 철학도 없이 멋대로 세상을 망쳐놓는 것을 매일같이 보고 있는데, 내가 왜 이런 구닥다리 세계 하나가 닫히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이 고생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는데요."
- "다른 차원에서 오신 분이여."
여인이 입을 열었다. 누군가가 그녀의 얼굴을 만들었다면 아마도 그녀를 사랑하여 만들었을 것이다. 누군가가 그녀의 목소리를 만들었다면 마찬가지로 그녀를 사랑하여 만들었을 것이다. 자신의 이상과 꿈을 모두 투영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런 표정을 만들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다른 차원에서 오셨다고 주장하시는 분이여, 내가 자신을 증명할 수 없다면 그대 역시 자신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대는 대체 누굽니까? 자신에 대해 스스로 말한 것 이외에 무엇으로 자신을 증명할 겁니까? 그대가 정말 사람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나를 놀리기 위해 만든 호문클루스인지 누가 증명해줄 겁니까?"
천사의 표정이 변했다. 천사는 벌떡 일어나려고 했다. 여인이 손을 들어 그를 가리켰다. 공격한 것도 손을 댄 것도 아니었는데 천사는 일어나지 못하고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다른 차원에서 오셨다고 주장하시는 분이여, 신의 심부름꾼이며 이 세계의 멸망을 선포하러 오셨다고 주장하시는 분이여, 나는 당신과 같은 사람을 숱하게 보아왔습니다. 그들은 이 세계밖에 다른 세계가 있으며, 수없이 많은 세계가 존재하며, 이 세계는 그 많은 세계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진짜 세계'에 대해 말하며 모든 사람은 그 세계로부터 왔다고 말합니다. 이 세계를 떠난 이들은 그곳으로 돌아가며, 거기서 진정한 탄생과 죽음을 맞이한다고 합니다."
"이것 봐요."
“나를 낳았다고 주장하시는 분도 내게 그리 말했습니다. 그분은 처음에 거지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 말했습니다. 내가 사는 이 세계는 환상이며, 거짓 세계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누군가의 상상에서 태어난 꿈에 불과하다고요."
"이것 봐!"
"그분은 진짜 내 모습에 대해서도 말해주셨습니다.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볼 수도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고 합니다."
천사는 멈칫했다.
"나는 거대한 통에 갇혀 살고 있으며, 그 통이 내 폐와 심장을 뛰게 하고 있고, 내 소화기관에 연결된 관이 영양액을 주입하며, 내 배설물 역시 관을 통해 흘러나간다고. 그분은 영원한 암흑과 고독 속에서 살아가야 할 나를 위해 이 세계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또한 할 수 있는 한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를 만들었다고 하셨습니다."
- "하지만 나는 그분이 말한 세계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그저 가능성을 이해할 뿐입니다. 그곳에는 마법이 없고, 푸른 용도 정령도 그림자 괴물도 없으며, 사람들은 부모의 배에서 아이의 모습으로 태어나 늙어 죽어간다고 합니다. 저는 그런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저 그 말이 사실일 가능성을 이해할 뿐입니다. 어쩌면 많은 호문클루스들이 그러하듯이, 그분이 나와 놀기 위해 꾸며낸 거짓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내 진짜 모습이 통에 갇힌 식물인간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럴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 또한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세계가 거짓이며, 꿈이며 환상이라는 것만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누구도 내게 그런 것을 설득시킬 수는 없을 겁니다. 그대가 말하는 로그아웃의 의미 역시 이해합니다. 하지만 나는 내 의지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그리한다 하더라도 내 몸이라는 암흑의 감옥으로 들어갈 뿐입니다."
- "그 말이 진실이라면 네가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어."
"... 어째서?"
"넌 '그것'이 프로그램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를 원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지 않아. 나는 그것이 사람이 아닐 가능성을 이해하고 있고, 그 점에 관해 말하고 있을 뿐이야. 나는 그가 죽었을 가능성 역시 이해하고 있어. 살아 있다면 백 살도 넘었을 테니까... 그는 내가 자신의 죽음을 알아차릴 수 없도록, 혼자 남겨졌다는 슬픔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대신할 것을 만들어놓겠다고 했어. 죽음을 내게 알리지 않겠다고 했어. 지금 그는 자신일 수도 있고 자신이 만든 프로그램일 수도 있어. 어느 쪽일까?"
"..."
"매일 생각했지. 그는 어느 쪽일까? 죽었을까, 죽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 둘의 상태가 공존하고 있을까? 사람일까, 사람이 아닐까? 나는 혼자일까, 혼자가 아닐까? 나는 혼자 떠들고 있을 뿐일까, 아니면 대화하고 있을까? 그는 내 말을 이해하고 있을까, 아니면 입력된 단어를 출력하고 있을 뿐일까? 아니면 그는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고, 처음부터 부모님께서 내 외로움을 위로하려고 만든 프로그램에 불과했을까? 모두가 거짓말이었고, 어떤 천재적인 프로그래머가 자신의 기량을 시험하기 위해 집어넣은 장난에 불과할까?"
여자는 여행자를 올려다보았다. 흑진주처럼 깊고 어두운 안광을 발하는 눈이었다. 생생한 영혼이 그 눈동자에 깃들어 있었다. 만약 그녀가 사람이 아니라면, 그녀를 만든 사람이 그 눈에 자신의 혼을 칼로 베어 넣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눈이 생명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한 번은 내가 그에게 질문한 적이 있어. <당신은 지금 사람인가, 사람이 아닌가? 내가 지금 혼자인가, 아니면 당신과 같이 있는가?> 그러자 그는 침묵했지. 그리고 슬픈 표정을 지었어. 그런 슬픈 표정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본 적이 없었어. 누군가가 내가 그 질문을 할 때를 대비하여 미리 그런 표정을 만들어두었을까...? 그는 이후로 몇 날이고 몇 달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나는 결국 그에게 가서 울며 애원했지. 다시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겠다고, 용서해달라고 했어. 그러자 그가 말하더군. <나는 네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믿고' 있다.>"
여행자는 눈을 크게 떴다. 황금빛 해가 서산으로 지기 시작했다. 노을이 긴 붉은빛을 들판에 뿌렸다. 드러누운 나무가 주홍빛으로 빛났다. 새들이 푸드덕 하늘로 날아올랐다. 산허리를 흐르는 강이 무수한 황금 보석을 끌어안고 빛을 발했다. 여인의 얼굴과 몸도 붉게 물들었다.
"그건 무슨 뜻이었을까? 그는 한 번도 내가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던 걸까? 아니면 그는 우리의 미래를 위해 그런 대답을 했던 걸까? 먼 훗날에, 두 사람 다 남지 않게 되었을 때를 위해서? 허상과 허상이 남아, 서로의 그림자만이 남아 서로를 지키게 되었을 때를 위하여? 아니면, 그것은 그저 입력된 대사일 뿐이고, 그래서 맥락도 논리도 없이 튀어나온 말일 뿐이고, 내가 그 말에 혼자 의미를 부여하는 걸까? 아니면, 혹시 나는 처음부터 사람이 아니었던 걸까? 그런 일이 과연 가능할까?"
여자는 검은 눈동자를 반짝였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내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 걸까?"
- <스크립터>
- "난 아직 병도 다 낫지 않았어."
"넌 최소한 그걸 알아. 그만큼은 안전하지. 진짜 환자들은 자신이 환자인 줄 몰라. 그들은 병원에 갈 생각도 자신을 치료할 생각도 하지 않지. 그게 세상에 돌아다니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야. 그 사람들이 다 소희에겐 위험해."
"무슨 병인데? 광장 공포? 대인공포? 정신분열?"
"시만..."
"뭐?"
연정은 내 말을 무시하고 내 아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왜 알몸으로 나왔어?"
"이유는 없어.”
그녀는 손을 뻗어 내 사타구니를 감싸 쥐었다. 나는 눈을 찔끔했다.
"넌 감정이 없는 게 아니야. 자신의 감정을 모르는 거지. 마음도 있고 행동도 하면서 이유는 깨닫지 못해."
그녀는 눈물이 맺힌 얼굴로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니 너라면 괜찮을 거야."
나는 점점 더 모를 기분이 되었다. 뭐가 괜찮아? 내가 낫지 않아서? 망한 인생이어서?
- <거울애>
- 한참 떠들던 명일은 나를 힐끗 보았다.
"왜 그래?"
나는 창밖을 보았다. 날개 장식이 달린 모자와 신발을 신은 우체부가 자전거를 타고 찌르릉 거리며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그냥, 어느 쪽이 꿈인지 헷갈려서 그래."
명일은 황금처럼 빛나는 눈으로 나를 측은하게 보았다.
"가서 눈 좀 붙여."
"넌 나보다 아는 게 많지?"
"상대적인 문제지."
"꿈에 무슨 의미가 있지?"
"철학적인 문제에 봉착했군."
명일은 웃었다. 그가 웃을 때마다 그의 도포자락에 붙어 있는 금색 반짝이가 현란한 빛을 뿌렸다.
"수많은 현인들이 그 문제에 관해 고민했지만 아무도 그럴듯한 답을 주지 못했지. 꿈은 무의식의 발현일까? 아니면 자는 동안 무작위적으로 발산하는 무의미한 자극의 조합일까? 아니면 옛사람들이 믿었던 대로 다른 세계와의 통로일까? 혼수상태에서 영계(靈界)를 엿보는 것일까? 하지만 그것이 영혼과의 통로이든, 무작위적인 자극의 결과이든. 그런 것이 '존재해야 할 이유'는 뭘까? 꿈을 꾸지 않는다고 무슨 차이가 있지?"
명일은 계속 말했다.
"꿈속의 자아는 자아이되 자아가 아니야. 인격과 가치관과 기억과 지식이 완전히 다른 존재요, 현실의 자아와는 분리된 존재지. 그런 것을 '나'라고 기억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한 일이야. 꿈속의 자네는 현실의 자네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할 짓을 하고 다니겠지. '다른' 자신을 기억하는 것이 고통스러운가, 여몽?"
"넌 꿈속에서 그게 꿈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나?"
"그럴 수 있다 해도 뭐가 달라지지?"
"모르겠어. 진실을 볼 수 있는 것?"
"뭐가 진실인데?"
명일은 웃었다.
- "이번엔 무슨 짓을 해도 깨어나지 않는 약을 줬소. 그러니 포기하고 집에 가시오."
약이라니.
"약이라니."
"그런 게 있소."
청년의 눈빛에는 기이한 황금빛이 깃들어 있었다.
"내가 아직도 꿈을 꾸나?"
"깨달음을 얻으셨소."
장소가 달랐다면 칭찬으로 들릴 법도 한 말이었다.
"그렇소. 이 세계는 바로 당신이 꾸는 꿈이오. 하지만 그걸 깨닫는 게 그리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오. 이 세상이 꿈이라는 게 대체 무슨 설명이 되겠소? 꿈이 무엇인지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다면."
나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어디 계신 분인지 이름이라도 압시다. 이건 아주 특이한데. 미륵이오, 정도령이오?"
나는 무슨 종교인지 물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이름을 묻는 줄 알았나 보다.
"해요."
해, 라니.
"해라니."
"아침이 되면 왜 뒷산에서 둥실둥실 올라오는 것 말이오."
해, 라니.
"그게 내 이름이오, 이름이자 나를 의미하는 것이오. 그 외에도 많은 이름이 있으나 그건 당신이 만든 언어가 조악한 탓이지 내 탓은 아니오."
"해랑 약이랑 기타는 다 무슨 관계야?"
"굳이 설명하지 않겠소. 내 꼴이 우스꽝스러워 보일지 모르겠지만 이 모습은 바로 당신이 만들어낸 거요. 당신이 상상한 모습이지, 나라는 인물의 상(像)이오. 그림자라고 할까. 내 실체와는 차이가 많소. 당신의 모습도 그렇지만."
"내가 뭘 만들었다고?"
"내 이 모습이 당신이 상상한 나란 말이오. 더 정확히 말하면 상의 하나요. 다른 하나는 저 하늘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으니까. 왜 나를 저런 모습으로 만들어놨는지는 나도 모르겠소만, 당신 속을 내가 다 어찌 알겠소. 아, 그렇다고 내가 당신의 상상의 산물이라는 말은 아니오, 나는 분명히 존재하오. 단지 당신의 상상이 내 모습을 치장할 뿐이오."
"왜 자꾸 날 아는 것처럼 말하지?"
"기억에 관해 논하자면 끝이 없소. 지금의 당신 역시 당신의 진짜 실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많으니까. 당신은 지금 이 꿈에서 있었던 일밖에는 기억하지 못하오. 당신의 인격과 가치관 또한 내가 아는 것과 많이 다르오."
이딴 말투를 2006년의 서울에서 들으려니 즐겁지는 않았다. 어디 청학동 같은 데서 탈출한 놈일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그러니까 네가 내 상상이라고?"
"일부 반영된 모습이라고 했잖소, 지금까지 뭘 들었소? 하긴. 당신이 만든 세상의 규칙을 내가 다 어찌 알고 설명하겠소? 나는 나 자신이지만 또한 당신이 만들었으니 한편으로 당신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오, 이 온 세상이 그러하듯이."
- "내가 온 세상을 만들었다고?"
“어떤 의미에선 그렇소."
아주 재미있게 미친놈이군. 놓아두고 떠나야 했지만 나는 심심한 김에 대꾸했다.
"이봐. 난 그렇게 똑똑하지 않아. 요새 TV에서 떠드는 줄긴지 잎인지 하는 말도 하나도 못 알아듣는다고."
"당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아는지는 나도 가늠할 수 없소. 무한(無)이 당신과 함께하오. 이 조그만 별의 크기로는 차마 잴 수도 없을 만큼. 물론 나도 마찬가지지만."
"이 세상을 내가 만들었으면 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데?"
"꿈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누군들 좋은 꿈을 꾸려 들지 않을까."
녀석은 안타까운 듯 한숨을 푹 쉬었다. 뭐가 안타까운지 모를 일이었지만.
"하지만 꿈은 의지의 반영이 아니라 마음의 반영이오. 당신이 살아온 무한의 반영이지. 물질화된 언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소. 당신이 만든 상징을 다 이해하기에는 내 무한으로도 모자라오."
그는 말을 이었다.
"당신의 몸은 둥그런 원형 물체 위에 붙어 있고, 그 물체는 초속 30킬로미터로 '나'를 회전하고 동시에 초속 220킬로미터로 은하를 회전하고 있소. 별과 별은 서로 맞물려 있고 질량은 에너지와 동일한 의미를 가지며 속도는 시간을 잡아먹소. 전자가 핵의 주위를 회전하며 전자의 숫자가 물질의 성질을 결정하고 존재는 불확정성의 원리에 지배받고 있소. 당신이 상상한 나는 반지름 70만 킬로미터와 표면온도 6천 도, 내부 온도 1500만 도의 거대한 원형 물체요. 당신이 상상한 내 동생은 반지름 1700킬로미터의 황량한 원형 물체요. 솔직히 이런 괴상한 꿈은 듣도 보도 못했소."
- 꿈 다섯.
내가 명일의 신당에 들어섰을 때 명일은 우아하게 포도주를 마시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머리에는 금관을 쓰고 금색 의자 위에 빛줄기처럼 흘러내리는 황금색 튜닉을 입고 앉아 있었다. 눈과 후광과 금발머리에서도 마찬가지로 눈부신 황금빛이 흘러나왔다. 녀석이 아끼는 어린 시동들이 주위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다.
"잘 잤나?"
명일이 잔을 들어 보이며 유쾌하게 인사했다.
"대체 뭐하는 짓이지?"
"뭐가 뭐하는 짓이라는 건가?"
"누가 멋대로 남의 꿈에 들어오라고 했어?"
명일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자네는 오래전부터 내 꿈을 꾸었어, 자네가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야. 내가 원해서 들어간 것도 아닐세. 멋대로 나를 자기 꿈에 불러놓고는 투정인가. 물론 내가 정말 원하지 않았다면 불려 가지 않았겠지만."
- "아, 정말 몇 번을 말해야 알겠나, 내 친구, 그건 내가 선택한 모습이 아니라니까. 그리고 자네 꿈에 들어갔을 때 내가 내 전당을 비우고 가는 것도 아니라네. 그건 내 실체의 하나의 그림자, 내 전인격의 한 조각에 불과하지. 자네와 내가 나눈 이야기도 어느 정도는 자네가 만든 세계의 규칙에 따라 한 것이었어. 내 의지로 말하고 싶어도 자네의 의지에 완전히 저항할 수는 없다네. 그 세계에서는 운명의 물레를 자으시는 저 무서운 세 할머니들께서도 자네의 규칙에 굴복한다네. 어쨌든 자네 옆에 내가 늘 있다는 걸 자각했다는 것만으로도 기쁘네. 어른이 되어간다는 증거야. 포도주 좀 하겠나?"
나는 포기하고 그의 황금빛 탁자 앞에 앉았다. 금빛으로 빛나는 아이들이 황금색 냅킨을 내 무릎에 씌우고 황금색 잔을 내 앞에 놓았다. 등에 날개가 달린 귀여운 시동이 탁자 위로 날아올라 내 잔에 포도주를 부었다.
"자네는 꿈속에서도 그게 꿈인 걸 알더군."
내가 말했다.
"그런 편이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난 꿈을 다스릴 수가 없어. 마치 내가 꿈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것 같아. 내가 어디서 생겨났는지, 꿈이 끝나면 어디로 갈지도 몰라."
명일은 빈 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튕겼다. 다시 시동이 날아와 잔에 포도주를 따랐다. 명일은 포도주가 잔에 채워지는 동안 손가락을 튕기며 술의 양에 따라 달라지는 소리로 짧은 음악을 연주했다. 늘 보는데도 볼 때마다 신기했다.
"이런 생각 해본 적은 없어?"
명일이 물었다.
"무슨 생각?"
"오늘 자네는 수염이 덥수룩한 아저씨지만, 어제는 갓 소년티를 벗어난 팔팔한 청년이었다든가, 그저께는 그 의자에 앉으면 식탁에 간신히 턱이 닿는 작은 어린 아이였다든가 해도, 자네의 기억이 왜곡되어 있다면 무엇으로 그걸 증명할 수 있겠나?"
"무슨 소리야?"
"어제는 여기가 내 신전이 아니라 손님들이 북적이는 한약방이었다든가, 내가 여기서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창구에 앉아서 약을 팔고 있었다고 해도 말이지. 그저께는 조그만 양옥집이었고 네가 나를 형이라고 부르며 내가 따라주는 차를 마셨다 해도, 마찬가지로 자네가 그걸 기억할 수 없다면 어떻게 알겠나? 세상이 어제 시작되었고 오늘 밤이면 끝난다 해도, 자네가 영원처럼 길게 느끼는 생이 사실 하룻밤의 일에 불과하고, 자네가 하룻밤의 꿈이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 평생과 같다 해도."
"무슨 소리야? 그건 다 그냥 꿈이잖아. 넌 항상 거기서 포도주를 마시고 있었잖아. 내가 매일 찾아왔고, 어제도 난 여기서 너와 잡담을 했다고."
"물론 그랬지."
명일은 다시 잔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몽환적인 가락이 명일의 손끝에서 태어났다가 사라졌다. 한순간에 사라지기에는 지나치게 아름다운 음색이었다.
"명일, 자네는 처음 꾼 꿈을 기억하나?"
"그것까지 무슨 수로 기억하겠나."
"난 살아오면서 꾼 모든 꿈을 기억해. 이상한 일이지. 꿈속에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그게 자네의 재능이니까. 명일(明)이라는 이름이 가진 힘을 가질 수밖에 없고 자네 역시 마찬가지야. 불평하지 말게. 이름은 태생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니까. 알고 있잖아?"
명일은 기묘한 시선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그게 이 세계의 '규칙'이라는 걸."
"알아. 내 이름 때문이지. 모든 게 내 이름 탓이야."
- "네 첫 꿈은 어떤 꿈이었지?"
명일은 내 푸념은 한쪽 귀로 흘려버리고 물었다.
"바다를 떠다니고 있었어."
"바다라."
"해신과 지신과 천신이 아직 그 영역을 나누지 못했을 때였던 것 같아. 모든 것이 뒤엉켜 있었지. 바다는 걸쭉한 수프 같았고 나는 그 바다를 떠다니는 조그만 단백질 덩어리였어. 하늘에서는 번개가 치고 있었고. ... 나는 그게 천신이 태어나는 모습 같다고 생각했어... 나는 번개가 내리치는 검은 하늘을 바라보며, ... 바라봤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을 거야. 그때 나에겐 눈이 없었으니까... 하염없이 바다를 헤엄쳐 다녔어. 나는 바다와 섞여 있었고 주변과의 구분도 없었어. 내 몸을 바다에서 분리시키는 법을 깨달은 순간 잠에서 깨었어."
- 눈을 떴을 땐 아직 한밤중이었다. 얼마나 난리를 쳤으면 책상에 있는 물건이 온통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몸서리를 치며 내가 아직 살아 있는지 확인했다. 고통이 뇌리에 남아 있었다.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죽음. 영혼마저도 팔아버릴 듯한 고난. 그 고난이 끝나지 않으리라고 믿었다. 내가 그렇게 믿어마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고통스러웠다. 다시 잠이 들 기분이 나지 않아 나는 어둠 속을 더듬어 옆방으로 향했다.
- 침대 위에는 새가 한 마리 누워 있었다. 벼슬과 날개 끝은 황금빛이었고 깃털은 불에 탄 듯 새카맸다. 침대 아래로 황금색의 긴 꼬리가 커튼처럼 흘러내렸고, 이불 밖으로 세 개의 발이 드러나 보였다. 오늘은 뭐라고 불러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폴론, 라, 해, 해모수, 세발 까마귀 처자, 삼족오(三足烏)님. 나는 여러 이름을 생각해보다가 얘야, 하고 불렀다.
얘야. 내가 다시 불렀다. 새는 몸을 뒤척였다. 나는 새가 잠을 깨는 동안 일어날 일들을 상상해보았다. 어디선가 나타난 육식 생물, 갑작스러운 폭풍우, 운 나쁘게 머리 위로 떨어지는 돌, 그의 꿈은 생을 끝낼 적당할 변명거리를 찾고 있을 것이다. 헉하는 짧은 비명과 함께 새는 잠에서 깨었다. 새는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더니 한숨을 푹 쉬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 '이 꿈은 곧 끝난다'
내 안에서 나보다 더 오래된 내 자아가 다시 속삭였다. 이 이야기는 끝나고 이제 다른 이야기가 시작한다. 그게 어떤 것일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또한 사라져 갈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 문득 내가 처음 꾼 꿈이 떠올랐다. 나는 바다와 대지로 둘러싸여 있는 거대하고 푸른 원형의 세계를 꿈꾸었고, 그 세계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물들과 사람들을 상상했다. 그건 아름다웠다.
- <몽중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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